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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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작가의 이번 작품 <흑산>은 읽기에 조금 망설여졌다. 아니 좀더 시간을 두고 있다가 읽고 싶었다. <칼의노래>나 <현의 노래><남한산성>의 역사소설 느낌이 너무 좋았는데 <내 젊은날의 숲>을 비롯한 다른 작품에서는 왠지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선느낌이 들어 다시 역사소설을 썼으면 했는데 이번작품 '흑산' 은 타작품에서도 많이 다루어진 부분이라 어떻게 그가 표현해낼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동안 읽은 작품들의 여운이 남아 있어 작가의 작품은 조금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기전에 <서찰을 전하는 아이>에서 또한 '천주교박해' 에 대하여 언급해 놓았지만 그 책은 아이가 본 역사였기에 물론 이 작품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한승원님의 <흑산도 하늘길>은 이작품과 뜻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한승원님의 <흑산도 하늘길>은 바다로 둘러쌓인 흑산에 갇혀 뭍으로 나가지 못하는 약전의 가족과 뭍에 대한 그리움 애틋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흑산에 길들여지듯 그곳과 하나가 되는 포기하는 삶처럼 흑산인이 되어가는 이야기였다면 <홍어장수 문순득,조선을 깨우다> 에서는 일개 홍어장수로 인해 자칫 흑산에서의 약전의 삶이 일개 범부의 삶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삶에 돌을 던지듯 그곳에서 새로운 '실학' 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고 새로운 삶을 제시해 주게 되었다.그런가하면 강진에 유배되어 내려온 약용에게까지 그 파문이 전해질 수 있던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들여다보고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김훈 노련한 작가가 담아 내려던 것은 지금까지 다루어졌던 흑산에서의 정약전의 삶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천주교박해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그 이야기를 축으로 하되 무수히 이름도 없이 죽어간 '민초'들의 끈질긴 삶을 그만의 살풀이,아님 넋두리식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자산어보를 쓴 약전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며 이름없이 죽어나간 '민초'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그들의 삶을 찾아주는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함께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내가 살던 고향의 옆동네는 천주교박해를 받던 시절에 천주교인들이 숨어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마을을 이룬 곳이 있다. 그곳은 모두가 천주교인이다. 그렇게 하여 친구들도 물론 태아때부터 그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영세를 받아 천주교인인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믿음이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고 종교' 라고 보는데 그동네 친구들과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자궁안에서부터 받아 들이고 몸 속 아니 뼛속까지 밴 '천주교'라는 믿음은 감히 일반인인 우리가 가까이 범접하지 못하는 그런 경지였던 것이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며 배우게된 역사속 천주교박해는 좀더 친구들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보게 되었고 언젠가 가서보게된 백여년이 넘은 '공세리성당'은 그시대를 그나마 밑그림이라도 그려보게 만들어 주었던 곳이다. 우리나라에 서학하면 그 큰 줄기에 '황사영과 정약종과 그의 형제들' 있듯이 그들과 관계한 많은 민초들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지금까지 그들의 삶이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작가는 그들의 삶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아니 황사영이나 정약전이나 그의 형제들과 똑같은 평행선위에 민초들을 놓고 그들을 어루만지고 토닥이고 그들의 발바닥에 낀 더깨처럼 그들을 따라 어디로든 따라가며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어찌 인간이 살아가는데 고난과 아픔 슬픔이 배제된 삶이 있을까? 사람살아가는데 한줄기 곡절은 누구나 있는 것이다. 양반이라고 소년등과를 했다고 그 삶이 평탄대로가 되란 법은 없는 것이다. 소년등과를 한 황사영,그의 처 또한 잘나가는 정씨네였기에 그의 삶은 그야말로 반석과 같을줄 알았는데 누가 그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을까. 어찌보면 작가는 배교를 할 것인가 아님 맞써서 싸울것인가? 라며 작가의 물음속에 '황사영과 정약전' 을 놓은 것일수도 있다.서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인 민초들은 그들을 옮가매려는 올가미에 맞써 싸웠다고 본다면 황사영은 어찌보면 그저 순순히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가 좀더 적극적으로 민초들처럼 맞써 싸웠다면 역사와 그의 삶은 달려졌을 것이다. 소년등과를 하여 미래가 밝던 그가 '서학'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 한번 제대로 발휘해보지 못하고,그야말로 빛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 어찌보면 안타깝다고 작가는 풀어내고 있다.그런가 하면 정약전의 삶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함을,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술로써 그런 자신을 감추며 현실을 어느정도 품어 안으려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에 반하여 그들의 밑에서 자유인이 아니었던 민초들이 그들로 인해 '자유'의 몸이 되어서 북경이며 그외 꼬불꼬불한 산길을 몇십리를 들어가 살아도 그들은 그들나름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믿음과 죽음 그리고 올가미에 맞서지 않았을까,그런 민초들의 아픔과 슬픔 질곡의 삶을 작가는 토닥토닥 아니 목울대를 울컥하게 하는 통한의 슬픔을 다 쏟아내고 있다.그래서일까 문장이 가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버겁다. 좀더 매끄럽다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읽다보니 눈이 버걱버걱한다. 하지만 작가를 이해한다. 황사영과 정약전이 씨실이라면 그들 밑에서 함께 한 민초들을 날실로 하여 작가는 지금 거칠면서도 튼튼한 옷감을 짜고 있는 것이다. 작가 또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까.이름없이 죽어간 민초들은 때론 젓빛 도라지꽃으로 피었다가 말보다 더 억세고 질긴 생명력으로 표현되었다가 새우젓보다 더 곰삭은 삶으로 점철되기 위하여는 작가가 먼저 곰삭어야했을 것이다.


작가의 문장은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여 입안에서 가슴안에서 곰삭여야 함을, 좀더 문장안에서 머물러야 함을 이 책을 읽으며 느낀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돌아가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서 복받쳤다.'황사영의 붓 끝에서 깨알 같은 글자들이 살아나서 반짝였다. 글자들은 저마다 절규하면서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문장이 아니라 글자 한 자 한 자가 갈고 잘 다듬어진 후에 그자리에 박힌것처럼 문장안에서 빠져나올줄을 모르고 빛을 발한다. 온 몸으로 글을 쓰는 그의 고통과 무게감이 함께 실려 너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런 그도 가끔 그만의 살인적인 미소를 실어 놓듯 잠시 쉼터를 제공한다. '이 돈이면 공명첩을 사서 역참에 매인 마부 신세를 면하고도 그래도 남아서 목 좋은 자리에 주막을 차릴 수도 있겠구나.그런데 주교는 한사코 마부질을 하라시는구나......' 어찌해야할까 우리의 마노리, 먼지 풀풀나고 북경을 걸어서 다녀오자면 그 길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생명도 부지기수인데 거금이 생겼다. 그 돈이면 자신의 삶을 바꿀 기회인데 마부에서 벗어나 좀더 번듯한 삶을 살 수 있을 듯 한데 주교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마부질을 평생하라고 한다.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어찌보면 욕심부리지 않고 사는게 민초의 삶이라 그가 말한다. 과한 욕심을 부렸기에 그는 화를 자초하듯 죽음에 이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정약전은 그를 가로막고 있는 '바다' 를 보며 한마리 '날치'가 되고 싶은 생각도 가져본다. '날치가 왜 날아오르는 것이냐?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가?' 그는 자신의 삶에 희망을 가지듯 날치에게도 희망을 실어본다,아니 품어본다.하지만 흑산도에 매인 삶인 창대라는 녀석은 그와 다른 세상을 본다.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물 밑에 잡아먹으려 덤비는 놈들이 있을 것입니다. 허나,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는 날치가 아닌 다음에야......' 그랬다 날치가 되어봐야 날치를 알고 날치가 왜 날아오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약전이 왜 흑산도로 유배를 하고 그와 함께 하던 민초들이 왜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죽어가며 믿으려했던 서학, 그것은 민초가 되어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그런면에서 작가는 스스로 이름없이 죽어간 민초가 되어 그들의 한많은 삶을 풀어내고 있다. 때론 마노리가 되어 북경에 다녀오는가 하면 때론 배교를 하면서 그들을 엄탐하는 새우젓 장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가하면 자신의 여동생을 자신이 살기 위하여 죽이기도 하고 때론 옹기를 구워가며 자신의 주인을 숨겨주며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게 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 그들의 끈질긴 삶을 연명하기 위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이유없는 '삶'은 없듯이 모두가 그 빛이 다를뿐 세상에 온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인데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맞부딪혀 싸우느냐 아니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작가는 역설하며 그라면 맞써 싸우는 편을 택하고자함을 간접적으로 들어낸 듯 하다.'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나는,겨우,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가 정약전을 통해 본 흑산은 희망을 간직한 '자산' 이 되었듯이 아니 벗어날 수 없어 바다를 품었듯이 비록 아픔을 간직한 민초들의 삶이 박해를 받아 이름없이 스러져 갔어도 역사는 희망을 간직하고 굳건하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런 이름은 없지만 걷건하고 밑바탕이 되었던 우리 삶의 희망과 같은 민초들의 삶을 그의 곰삭은 손맛으로 재탄생한 '흑산'은 그래서 더 힘들게 붙잡았던 것일까.내게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금 무게감과 힘을 빼고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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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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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그는 토끼일까 인간일까? 그 중간이라고 해야하나. 사람이면서 토끼의 모습으로 태어난,자신이 원하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 또한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그래서 토끼로 태어났을까? 초등하교 선생님이었던 맑은 여자가 오빠를 고문한 사람에게 당했다. 그렇게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평생을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고 차상문,무 또한 원하는 않는 삶으로 태어나 인간사 부조리를 겪어야 했다.

 

그가 잉태되던 순간부터 태어나던 순간까지 모두가 '희귀한 역사' 의 한 장면이었듯이 그의 모습 또한 '기묘한 영장류'인 토끼의 모습이라 그 또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타의에 선택되었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이며 살아야 했던 삶이 인간사에서 토끼의 모습으로 그것도 IQ200 이란 숫자가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주듯 그의 삶은 평범함을 벗어나 겉모습처럼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런 삶이 평탄했을까.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완벽한 토끼도 아닌 인간과 토끼의 중간쯤 되는 토끼 영장류인 차상문의 독특한 인생사는 역사와 맞물려 그의 인생다큐를 보듯 슬픈 역사가 펼쳐진다. 읽다보니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는 작품을 연상하게 되었다. 끝이 없는 이야기가 줄줄,정말 작가의 무한한 상상속에서 풀어내고 풀어내도 끝없이 나올듯한 고치의 실처럼 '차상문'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의 역사가 아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경 남북문제와 성문제 외국인취업자문제등 다향한 사회의 이면들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나 혼자 이산화탄소를 내뱉지 않는다고 환경문제가 해결될까,잉태의 순간부터 부정적이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삐딱이' 인것처럼 그는 '인간사'에도 완전하게 끼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토끼의 모습으로 자연에 귀속되어 완벽하게 토끼로도 살 수 없음이 슬프다.

 

미국유학까지 다녀오고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는 전문자리까지 보장받았지만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최고로 치는 대학의 교수직까지 얻게 되지만 사회는 아니 역사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시국에 편승하여 아웃사이더가 되어 점점 자신의 세계에 빠져드는 차상문,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듯이 자신의 삶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이었을까.IQ200의 천재토끼였지만 인간사에는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아니 인간으로 반듯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힐 그런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왜? 인간이 아니여서.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레푸스 사피엔스인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라서일까?

 

토끼 영장류인 차상문이 정말 사회에 '토'를 달기 시작했다. 잘나가던 교수직을 뒤로 하고 사회의 뒷면에 숨어서 그가 사회에 '토'를 하게 된 것이 무엇일까.그가 혼자 그렇게 노력한다고 사회가 바뀔까. '허, 그놈 참..... 토끼가 범을 두려워하지 않으니,장차 천지를 들었다 놓을 관상일세. 이놈아,부디 자중자애하시게.만유에 다 제 뜻이 있는 것을......' '인간이...... 과연 진화의 종착지일까요?' 어디까지 앞만 보고 달여가야 멈출까.아니 한번쯤 뒤돌아보게 될까? 그런 시간이 있기나 할까? 앞만 보고 무조건적으로 달려가는 인간사,동화속 토끼와 거북이처럼 주변은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달려만 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만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그렇게 자만하며 불편한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꼬집는다. 인간인듯 하면서 완벽한 인간도 아닌 토끼인듯 하면서 완전한 토끼도 아닌 그런 토끼 영장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사는 '불편함' 으로 거듭난다.그러다 '은둔자'가 되어버리는 토끼 차상문,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 일면 유나바머에서 소설은 싹텄다고 하는데 독특하다.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너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카진스키 이야기는 소로의 <월든>을 읽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발달된 문명속에서 탄생하고 삶을 이어나간 이가 문명을 벗어나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소로 역시나 2년여 기간인가 호숫가에 집을 짓고 은둔자로 살았지만 다시 문명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완벽하게 문명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면.

 

차상문이란 토끼 영장류의 탄생도 독특하지만 그의 슬픈 인생사도 독특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니 뭔가 가슴 한 편이 아려온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것처럼 웃다가보니 눈물이 나오는 겪이 되고 말았다. 문명의 이기속에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벗어나지도 못하고 역사에 편승하여 앞으로 토끼처럼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 우리도 어쩌면 토끼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토끼 영장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편하다고 느끼면서도 불편함을 고쳐보려 노력하지 않으며 쿵쿵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쿵쿵거리지 마세요..땅이 놀라잖아요.' '나만 아니면돼.' 라는 생각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그대들에게 토끼 영장류 차상문이 경고하고 있다. '쿵쿵거리지 마세요.땅이 놀라잖아요.'. 천명관 작가의 <고래> 이후 정말 그와 흡사한 독특한 서사를 보았다. 처음에 낯설음은 작가의 사설에 편승하다 보면 어느새 종착역에 도달한것처럼 빠르게 앞만보고 달려간다.그러면서 무언가 놓친것을 뒤늦게 생각하게 한다. 읽고나도 무겁고 찜찜하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일까? 그리고 토끼 한마리가 가슴으로 들어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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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펭귄클래식 43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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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정말 돈답게 쓴다는 것은 무얼까? 아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오랜시간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늘 의문이다. '나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돈을 제대로 잘 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돈보다 귀한 것은 무얼까? 그런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작품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해마다 크리스마스때면 생각나게 하기도 하지만 한 살 더 먹어가는 세밑에서도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는 말도 있듯이 정말 어떻게 쓰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스크루지' 수전노와 같은 스크루지는 그렇게 절약하고 아껴서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무척이나 아낀다. 자신 혼자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된 모든 것에서 아낀다. 그가 사는 집도 동업자 말리가 쓰던 집이고 그와 함께 있는 사무실 직원 밥이 추위를 감내하기 위하여 난롯불을 좀더 지피는 것조차 허용이 안된다.그는 추위를 좀더 누구러뜨리기 위하여 촛불에 의지한다. 그렇다고 스크루지가 낭비를 할까? 그또한 철저하게 아끼고 조카에게조차 한 푼,아니 따듯한 말한마조차 건네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인색하고 옹색한 노인네처럼 그렇게 살아간다.왜일까? 왜 그렇게 돈앞에서 벌벌 떨며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돈의 노예처럼 살아가야만 할까. 그렇다고 죽은 후에 그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갈 수 있을까.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지만 밥에게도 조카에게도 물론 자신에게도 인색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으려고 한다. 하지만 우중충한 낡은 집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말리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그는 분명히 몇 년 전에 죽었는데 그를 비롯한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은 그를 데리고 여행을 하며 그의 지난 시간들 속에서 그의 모습과 그를 보는 주위의 시선과 말들을 듣게끔 한다. 그가 과거에도 인색한 사람이었을까,왜 인색해져야만 했을까. 그가 인색하게 한다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고 나쁜 말만 일삼을까.그런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들은 스크루지를 '불쌍한 사람' 이라고 한다. 무엇이 불쌍한 것일까.함께 나누지 못하고 혼자만 아는,'돈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돈보다 귀한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는 그런 맛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돈이 우상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가슴에서 머리'

유령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과거에서 미래까지 보면서 그의 가슴이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점점 변해간다. 잃었던 웃음도 되찾고 주위 사람들의 아픔을 볼 줄 알게 되고 그가 아닌 아니 돈이 아닌 주변인들의 사는 맛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 또한 속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어율려 사람같이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 . 유령들과 먼 시간속을 여행하며 그는 '가슴에서 머리' 까지의 거리를 좁혔다. 그동안 너무 멀게 느껴졌던 거리를 좁히고 이젠 사람속으로 그가 들어가려 한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려 한다. 어느 순간 '새로운 삶'을 깨우치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지금껏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그리곤 하나하나 바로 바로잡아 나간다.

 

깨달음이란 무서운 것이다. 어느 순간에 깨닫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평생을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고 깨우치지 못하고 가는 사람도 많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그사람이 제대로 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살아서 많이 나누고 베푼 사람들을 보면 시끌벅적 잔치집 분위기인데 그렇지 못하고 옹색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장례식장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스크루지 또한 미래의 유령에게서 자신의 마지막 죽음을 보고는 그런 슬픈 죽음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버려지듯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죽음,그리고 그 죽음을 무시하고 그의 모든 것을 탐내는 사람들. 가졌다면 아니 어느정도 자신의 욕심을 채웠다면 이젠 베풀고 나누는 것이다. 나눔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끝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고 베푸는 것이 더 행복함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모태가 된 <교회지기를 홀린 고블린 이야기>외 에도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단편이나 글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기억으로 흘려버릴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다시 읽으니 '과연 나는 잘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보호를 가지게 한다. 스크루지만이 정말 스크루지일까? 우리도 아니 나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스크루지와 다르지 않은것은 아닐까.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내 삶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점점 대화가 단절되고 있는 현실,따듯한 말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끔 느끼는데 돈이나 그외 많은 것을 나누어서가 아니라 정말 따듯한 말한마디 정답게 건낼 수 있음이 베품이고 나눔인 듯 하다. 어린시절에도 그리고 지금에 다시 읽어도 재밌고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그래서 고전은 고전인가보다.추울때일수록 가족의 정이,따듯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는 계절인데 정말 물질적인 것을 나누기 보다는 '따듯한 마음'을 나누어야 함을 느꼈다. 그리고 스크루지가 영들과의 만남이후 웃음과 행복을 찾은 모습이 왜 그리 귀여운지,디킨스의 위트를 다시금 되새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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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고양이는 없다 - 어쩌다 고양이를 만나 여기까지 왔다 안녕 고양이 시리즈 3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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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에 집 주변에 오는 도둑고양이가 너무 이뻐 밥을 먹고 남는 것을 엄마 몰래 주었더니 녀석이 밥주기만을 바라며 울집에 자주 찾아와서 밥을 먹고 가곤 하더니 아예 울집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중고양이가 와서는 어느 사이 밖에서 임신까지 하고는 광에 새끼를 여러 마리를 낳아 놓기도 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싫어하셨지만 시골에서 고양이가 들어오고부터 쥐가 줄어들기도 하고 가끔 고양이가 쥐를 잡아 놓기도 하니 아버지도 반대를 하지 않으셨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하여 한동안 새끼도 크고 그러면서 한가족처럼 잘 지냈는데 뜻하지 않게 이웃에서 쥐약을 놓는 바람에 어미 고양이가 갑자기 아침에 죽게 되었다. 죽은 고양이를 보고 얼마나 오랫동안 서럽게 울었던지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보기 싫다고 새끼 고양이를 모두 남을 주어 버렸다. 그리곤 고양이 키우는 것을 반대하셨다. 개에 시골에서도 그리고 우리도 키우고 있기에 반려동물에 대한 생각은 남들과는 다른데 어릴적 고양이에 대한 추럭이 있어서인지 길고양이들을 보면 불쌍하긴 한데 아파트 단지에도 많은 녀석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걱정이 된다. 늘 차 밑에 들어가서 잘 있으니.


울시골집에는 집 앞에 비닐하우스가 있다. 그런데 그곳은 동네의 길고양이들의 집이자 터전이다.그곳에서 번식도 하고 기거하며 동네의 쓰레기란 쓰레기는 모두 주어다 먹 듯 하니 엄마는 몹시 싫어하신다. 한번은 그곳에 고양이들이 우글우글,여러마리가 들어와서 새기를 낳아 놓은 모양이다. 엄마가 쫒아내도 자꾸 들어온다며 성화셨는데 집 바로 위는 마을회관이라 동네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인데 비닐하우스에 있던 길고양이들의 놀이터가 또한 바로 동네주차장인 차 밑,그러다 지난해 추석에는 한마리가 금방 차 밑에 들어갔다가 치어 죽었다. 죽은 고양이는 길바닥에 그대로 있어 정말 보기 안 좋아다. 요즘 시골에서 길고양이는 찬밥 신세다.고양이가 음식물 찌거기를 파먹지 못하도록 땅을 깊게 파고 묻는 경우도 봤다.그렇다면 녀석들은 무얼 먹고 살까,인간과 살아가는 길고양이들 기생해야할까 공생해야할까. 어떤 관계로 살아가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티비의 동물농장에서도 보면 종종 길고양이들에 대한 문제가 번져 나오기도 한다. 너무 많은 길고양이들 때문에 소음피해를 입는 다는 둥 다른 여러 문제를 야기하며 중성화 수술을 요구하는 경우도 보았는데 고양이들은 자신들만의 영역이 있어 영역다툼 또한 대단했다. 문제는 좁은 지역에서 너무 많은 무리가 살 경우 그것이 인간에게도 고스란히 피해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잘 사는 방법은 없을까.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귀엽고 이쁜데 반면에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하여 '쥐약' 이라는 먹지 말아야할 밥을 놓아 그들이 '고양이별'로 가게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런 고양이들과의 시간을 정리해 놓은 책,'나쁜 고양이는 없다'를 읽다보니 정말 나쁜 고양이는 없다. 우리 인간이 나쁘게 생각할 뿐이지 고양이 자체로는 나쁜 고양이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녀석들 사진을 보다보니 정말 철학적이면서도 얼마나 귀여운지 그러지 않아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우리집 막내는 이 책을 엄마가 읽은 다음에 꼭 자신이 읽겠다고 찜을 해 놓고 갔다.


고양이들에게도 생명이 있는 것이다.아니 물론 살아 있는 것이니 생명이 있다.아니 생명이 아니라 묘생이 있다.그들만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묘생, 하지만 그것이 인간과 함께 버무려질 때 문제가 가끔 불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문제를 집어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캣맘이나 캣대디가 있다는 것이다. 사료를 주며 녀석들의 묘생을 기록하여 더욱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준 글과 사진을 보다보니 녀석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더이상의 고양이가 인간들의 이기심에 밀려 더이상 이유도 모른채 고양이별로 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반려동물을 키운 사람과 한번도 키워보지 않은 사람과는 무척 차이가 크다. 키워본 사람들은 잘잘한 것들을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생명' 보다는 그들을 그저 '동물' 이나 '기생동물'로 취급한다. 한번이라도 따듯한 시선을 주기 보다는 곁에서 없다면 이로는 동물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을 보라 그런 생각이 드나. 그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아낄줄도 알고 어미가 새끼를 챙길줄도 알고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다. 조금도 생명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는다면 함께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고양이별로 가는 녀석들이 많아질 것이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길고양이들이 어느 때부인지 한 마리 두마리 늘어나더니 요즘은 자주 목격된다. 녀석들은 처음엔 사람을 보면 피하거나 도망치고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더니 이젠 인간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점점 집고양이화 되어가고 있다.아파트 산책길에서 녀석들을 만나면 '나비야~~'하고 부르면 '냐옹~~'하고 달려드는 녀석도 있고 먹을 것을 주면 앉아서 받아 먹는 녀석도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버젓이 누워 낮잠을 즐기기도 하고 도망치기 보다는 좀더 사람과 가까이 하려고 한다. 그런 묘생을 읽다보니 참 안쓰럽다는,녀석들의 삶만큼 쓸쓸한 생도 없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길고양이에 대한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책을 읽다보면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된다. 아니 따듯한 눈으로 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사소한 일상을 담아 놓은 사진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니 함께 사료를 나누어줘야할 것만 같다. 배가 고파 죽는 고양이 새끼가 나오지 않게 그리고 겨울엔 따듯한 잠자리를 재공해 주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보다 아주 작은 배려처럼 여겨지는 '쥐약'은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시골에 살다보면 어느 누군가의 '쥐약' 으로 인해서 잡아야 할 것 보다는 다른 것들을 잡은 경우를 종종 보았다. 물론 나도 어릴적 시골에서 살아서 쥐약을 먹고 죽은 우리집 개도 몇 마리 있었다. 키우던 개가 죽어도 슬픈데 고양이의 죽음은 어떠할까.'무슨 영화를 바라고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함께 사는 행복,같이 있으면 좋은 것,그저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것,그렇다. 고양이로 영화를 볼 수는 없을지라도 위로는 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정말 영화를 바라고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는 않는다.그들과 함께 있으므로 해서 행복하고 외롭지 않고 자신의 삶에 위안이 된다는 것, 그 사소함에 키우는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또한 많다. 그들에게 따듯한 시선으로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아니 인간 뿐만이 아니라 길고양이들도 묘생이 있음을 존중해주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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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 푸시킨의 마지막 소설 '대위의 딸'은 분명히 학창시절에도 읽었고 그 후에도 읽었는데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말이 어떻게 되었더라 생각을 하게 한다. 고전은 대부분 내용을 알고 있거나 읽었다고 생각을 해서 기피하는 현상이 있는데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도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어 그래서 '고전' 인 듯 하다.이 소설은 요즘시대로 말하면 로맨스라고도 할 수 있어 술술 잘 읽힌다. 김치거리를 절구어 놓고 손에 든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오래전이야 주인공인 표트르와 마샤의 사랑에 중점을 맞추어 읽었다면 이젠 세월이 흘러서인지 표트르의 늙은 종인 '사벨리치'를 더욱 눈여겨 보며 읽게 되었다. 삶이 연륜이 베어 나오는 사벨리치의 말과 행동이 '노마지지'를 보듯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계급을 달고 나오고 아버지 또한 군인이었으니 표트르는 아버지를 따라 군인다운 기계를 펼쳐야 당연했겠지만 열여섯살,한참 성숙한 시기 세상밖 현실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그가 무엇을 알겠는가.그저 치기에 '나는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고 또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라는 말처럼 그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신이 어린애가 아닌 어른임을 과시 하고 싶어하지만 늙은 종 사벨리치의 눈에는 그는 그저 어린 주인밖에 되지 않는다.그가 아직도 어리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인숙에 들어가 처음 만난 사람과 내기 당구를 하여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훔뻑 빠져든것도 모자라 그와 당구로 빚을 져 주린에게 돈을 줘야 한다니 사벨리치의 눈에는 아직도 멀었다. 그런 그들이 또한 눈보라속에 갇히게 된 것도 어린주인의 고집 때문,오랜 마부생활의 예지력 대로 되돌아 갔다면 눈보라를 피했을터인데 어린주인이 우기는 바람에 눈보라 속에서 길을 읽게 되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농부'를 만나 다행히 여인숙을 찾을 수 있었고 그에게 사례로 '토끼털외투'를 벗어 준 것이 훗날 그들의 운명에 큰 역할을 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벨로고르스크 요새에는 사령관의 딸인 마샤가 있었고 그녀에게 한번 청혼하여 거절을 당한 시바브린은 그의 연적,표트르 인생에서 내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적이 되고 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만 같던 곳에서 뜻하지 않게 푸카조프의 반란에 휩쓸리고 되고 사령관및 그의 아내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연인인 마샤를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서 그는 뜻하지 않은 인물,눈보라 속에서 만났던 농부인 푸가조프를 만나게 되면서 행운처럼 목숨을 유지하게 되고 다른 요새로 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지만 그의 연적인 시바브린이 마샤를 가두었다는 말에 다시 벨로고르스크로 향하던 중 다시 푸가조프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마샤와 인연을 맺게 되지만 그가 속한 여제에 맞선 반란가 푸가조프를 도왔고 그를 만났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그,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그의 활약이 이쯤에서 종료되었다면 표트르 부모님 집에 사벨리치와 함께 보내진 마샤는 반면 부모님의 맘에도 들고 다시금 예전의 총기와 아름다움을 되찾아 가고 있다. 그녀는 표트르가 위기에 닥쳤다는 말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사령관의 딸인 마리야, 그를 들어내지 않으려 했던 표트르 하지만 마리야는 자신의 신분을 들어내고 여제게게 표트르의 진실을 규명하여 그를 위기에거 구하고 그들 또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두 연인의 사랑이 소용돌이 치는 역사와 맞물려 급류에 휩쓸린것처럼 흘러가고 있다. 순간 순간 위기를 만나지만 그때마다 표트르가 요새로 가면서 만났던 주린이나 푸가조프와 토끼털외투가 큰 몫으로 그에게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는 역할을 한다.그런가 하면 위기에 닥칠 때마다 그의 옆에는 연륜과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늙은 종 사벨리치가 나서서 그들의 이익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어린 주인이 경거망동이라면 늙은 종은 노마지지를 발휘해 위기에서 탈출을 한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사랑은 역사와 씨실과 날씨처럼 얼키고 설켜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불발로 끝나 버리나 하면 다시 이어진다. 역사의 이야기인 듯 하면서 역사 속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개개인의 삶이 숨어 숨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사랑의 실패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의 모든 삶이 하나하나 모여서 역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가 바로 길이지 뭐요.내가 서 있는 단단한 땅 위, 여기가 길이잖소.'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나타난 농부,그가 한 말 중에 이 말에 가슴에 와 닿는다. 길이 어디냐고 묻는 그에게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길이라는,어찌보면 자신이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인생에서 정해진 길이란 없는 말처럼도 들린다. 그와 상통하듯 표트르의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얽혀들어가는 듯 하면서 어느 순간에 다시 길이 보인다. 길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시작' 일 수 있다. 집안에서는 그저 어린애로 취급받았고 늙은 종에게도 어린 주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전장에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청년 표트르,그의 거짓없음이 아니 용기 있는 선택과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고 길을 찾으려 했던 그의 패기 있는 행동이 어쩌면 그의 사랑을 이어주고 그를 위기에서도 구해주지 않았을까. 그런가하면 푸가쵸프가 이야기한 까마귀와 독수리의 이야기 중에 '이봐, 까마귀, 죽은 짐승을 먹으면 300년을 사느니 뒷일이야 어찌 되건 간에 단 한 번이라도 산 짐승의 피를 실컷 마시는 편이 낫겠다.' 라는 말에 '살인과 강도 행각을 일삼으며 사는 건 죽은 짐승을 쪼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는 말로 그가 푸가쵸프와 다른 이상을 가지고 있음을,아니 전장에 휘둘리며 그 또한 그나름 성숙하고 단단한 이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어찌보면 표트르와 푸가쵸프의 삶을 아니 표트르와 시바브린의 삶을 비교해 놓는다. 푸가쵸프 반란군의 황제로 군림하지만 눈보라 속에서 자신을 감추어주고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소년을 위기에서 늘 구해주는 인정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표트르와 연적이었던 시바브린은 기회를 이용할 줄 알지만 자기꾀에 자기가 걸려 드는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끝까지 표트르를 물고 늘어지는 여유같은 존재, 그에 비해 표트르는 정직하면서도 세상물정을 잘 모르지만 그런대로 옆에 노마지지를 가진 사벨리치가 있어 위기를 잘 넘긴다. 소설을 읽으면서 '새옹지마'를 떠올렸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전장속에서도 역사는 흐르고 개인의 사랑과 인생사도 흘러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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