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3 - 미천왕, 낙랑 축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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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고구려의 왕이 된 을불,그리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고구려의 역사를 쓰기 위하여 이제는 고구려를 넘어 그 원대함을 드높이기 위하여 낙랑과의 전쟁을 벌이는 장면이 시작된다. 작가의 역사소설은 사실적이며 전개가 빨라 재밌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아니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그 뿌리를 전해주고 있다. 을불, 고구려의 왕손이었지만 자신에게 뻗어 오는 '죽음' 의 손을 피해 주변국을 떠돌어야 했던 그에겐 그것이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주변정세도 알게 되었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더없는 기회가 되기도 하여서인지 그런 시간과 인맥은 그가 고구려 왕이 되는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을불, 고구려의 왕만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밑에 있는 인맥들이 또한 그가 뛰어난 왕이 되기 위한 기반이 될 수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국상 창조리,누가보다 뛰어난 지혜와 지략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며 그외 많은 장수들과 그의 힘이 더욱 커질 수 있는 보탬이 될 수 있었던 '아영'인 왕비 또한 여자이지만 누구보다 뛰어날 지혜를 가진 여자이며 그외도 많은 인물들이 난세를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고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가 또한 고구려 뿐만이 아니라 그가 한때 몸담고 있었던 낙랑까지 혈전을 하면서까지 이겨내게 된 것은 아닐까.

고구려의 주변국이 숙신및 낙랑,낙랑으로 늘 보내오던 철,철은 그시대엔 나라의 힘이었다. 무기를 만들어야 하고 농기구를 만들어야 했던 철, 그 대부분의 고구려 철이 고구려도 부족한데 낙랑으로 가고 있다. 무언가 꾀를 내어야만 했다. 숙신 아달휼은 고구려가 보내는 철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자신들이 훔친것으로 하지만 그 또한 을불과 통하였던 지혜, 그 철들은 무기가 되고 고구려의 밑바탕인 힘이 되어 더욱 큰 힘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로 만드는,낙랑을 집어 삼킬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그런가하면 다양한 농사법까지 바꾸어가며 좀더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안팍으로 힘쓴 을불,백성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인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승리는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젊은 왕이라 패기 또한 대단했고 그 패기로 겁없이 뛰어 들려는 전쟁터를 창조리라는 지혜로운 국상이 옆에서 연륜을 더하며 좀더 안정되면서 더욱 단단한 힘이 될 수 있게 다져준 듯 하다. 나라는 임금 혼자의 힘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백성이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같은 뜻을 가지고 하나로 움직여줄 때 강직한 나라로 거듭난 다는 것을 을불은 잘 보여주고 있다.아영의 말처럼 ' 성공을 거두려면 누구보다 더 차갑고 교활해야 한다는 제 생각이 폐하를 보는 동안 서서히 무너졌어요...제게는 그런 따듯함으로 이기는 길이 보이지 않아요. 저는 눈물이 많은 계집이에요. 머리와 외모는 있는지 몰라도 인정은 없어요. 그러나 폐하께서는 그게 있어요. 당장은 손해를 보아도 결국은 승리로 이어지고 마는 내면의 힘, 그 힘이 저를 이끌었어요.저는 처음으로 인간의 길을 배웠어요.' 을불은 여인의 마음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도 군인의 마음도 그런가 하면 낙랑의 '최비' 또한 그가 승리자임을 인정한다. 물론 작가의 마음과 믿음이 많이 더해졌겠지만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그 눈이 잘 그려져 있어 읽으며 기분이 좋다. 장수들은 자신들이 나아갈 때와 들어가야 할 때를 알고 행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죽음이 필요할 때는 마땅히 죽음으로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제대로 하며 역사 속으로 물러난다.

작가의 역사 소설을 읽고 있다보면 정말 통쾌하다.아니 역사가 이렇게 재미 있다는 것을,다시금 역사를 배우고 알고 싶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가하면 소설을 읽다보면 재밌게 역사를 다시 배우는 느낌도 든다. <고구려3> 편은 읽는 중에 병법이 많이 나오니 왠지 영화 <적벽대전>을 보는 느낌도 들고 아니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사실감이 더해져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처세술' 또한 배울수 있기도 하다. 강하다고 모두가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함 속에서 강함이 해가 될 수 있음을, 강함이 단점이 되는 약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대나무가 그리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속이 비었기 때문이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거나 꺾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쓸모 없는 인생이란 없다. 길에서 만난 거지라도 아니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더 느끼게 해준다. 을불 그야말로 사람을 부릴 줄 알았고 사람을 볼 줄 안 인물이 아니었을까. 작가의 인생처세술이 소설속 인물들에 많이 반영되어 투영되었겠지만 너무 전설적이거나 무용화 시키지 않고 인간적이면서도 백성을 품을 줄 알았고 사람을 볼 줄 알았으며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한 점 흠없이 잘 그려낸 듯 하다.

을불 미천왕 편에서 난 누구보다 맘에 드는 인물이 '창조리' 이다. 난세를 일으켜 세운 인물로 최고를 뽑으라면 그가 아닐까 한다. 왕이 될 인물을 기다리며 그림자처럼 숨어 시대를 기다렸던 인물이고 그런 바탕을 만들어 놓았던 그였으며 을불이 왕이 되고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자신의 지혜와 지략을 모두 펼쳐 놓았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의 모두를 역사에 쏟아 놓고 사그러져 간 인물인 듯 하다. 스스로를 불 태울 수 있었던 창조리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을불이라는 아니 고구려라는 역사가 다시금 빛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인물이 어디 창조리 한 명 뿐이겠는가. 국상 창조리에서 왕비 아영도 있고 여려극이라 불리는 여노며 숙신의 아달휼이며 그리고 밑으로는 백성들도 있고 모두가 역사를 만들어 내고 바탕이 된 사람들이지만 소설속에서 번득 번득 지혜를 보여준 창조리라는 인물이 정말 맘에 든다. 만약에 창조리가 아닌 임금을 나쁜 쪽으로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 곁에 있었다면 을불이란 인물이 빛이 났을까? 이런 대단한 인물들이 숨어 있어 소설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 한번 잡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하는 작가의 역사소설, 소설로 만나는 고구려이지만 그 행간이 어찌 되었든 간에 빨리 만나고 싶다. '인간이 모든 일을 다 머리로 짤 수 없고, 머리로만 짠 계략은 완전하지도 않다. 최고의 계략이란 우연이 섞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가의 최고의 계략인 우연을 만나 빨리 고구려를 모두 읽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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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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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라 낯설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 그리고 그녀와 꼭 결혼을 하고 싶은 아니 계약결혼이라도 해서 살고 싶은 남자 이현의 사랑법이다. 한 여자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평생을 약속하지 못하는 남자 이현,그는 이번이 네번째 결혼이다. 하지만 상대는 정말 특이한 여자이다. 아버지는 당대의 시인이지만 은둔하여 지내는 사람이고 그렇다고 딸을 애지중지 하는 사람이 아닌 그의 모든 재산은 사회에 환원처럼 그녀에게는 한푼도 물려주지 않는다. 재산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부녀지간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간에 교감도 없고 공감도 없다. 왜 그렇게 부녀지간에 간극이 생긴 것일까.

그에 반해 이현이라는 남자는 여섯 살에 본 결혼식,다름아닌 이진의 부모님의 결혼식을 보고는 신부에게 반해 그들의 딸인 이진과 결혼하고 싶어한다. 그때 느꼈던 살구빛 향기를 그가 근무하는 재정경제부 매점에서 백치미처럼 계산도 어둡고 무엇하니 제대로 하는 것 없지만 그녀가 그곳에 있음으로 해서 이상하게 매상이 올라가는, 아니 모두가 그녀를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하여 찾아가는 그곳에서 그 또한 그녀에게 반해 여섯살 그가 품었던 그 마음을 전달하고는 그녀와 계약결혼을 하자고 한다. 삼년 이란 시간 동안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터치하지 않으며 결혼생활을 해나가면 그녀에게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을 주겠다는 것이고 그녀가 살아 있는 영혼들을 만나고 기록하는 일을 터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아니 여섯살 때 보았던 결혼식의 신부의 느낌을 어찌 그의 딸에게 느끼며 결혼을 결정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과 결혼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이진 그녀가 기록하는 영혼들의 이야기와 이현과 이진의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겹쳐지면서 무언가 다른 듯 하면서도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하나로 이어져 나간다. 죽은 영혼들의 이야기가 아닌 살아 있는 영혼들의 이야기를 쓰는 여자 이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들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삶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바라보는 입장에서 기록되어지는 이야기들, 그들의 삶은 어느 순간 한계치에 다다른다. 그리고 분출시키려고 아니 분출되어야만 할 듯 한 순간에도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현과 이진의 삶 또한 그 한계점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에 대한 터치가 없이 잘 이어져가던 그들의 결혼생활,삼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 닥쳐 오면서 그들에겐 한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현 그가 정치계로 입문하려고 하고 부총리가 그를 이끌어 주려고 하는데 문제의 인물인 부총리는 요즘 이진이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다. 왜 그의 삶이 그들의 결혼생활까지 파고 든 것일까. 부총리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어떻게 좌지우지 할까.

이현은 지난 결혼생활에서 애를 갖지 않기 위하여 수술을 했다. 그렇기에 이진과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진의 임신' 아니 그녀를 꼭 닮은 아이를 그가 맞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된 것일까.분명히 자신은 수술을 받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죄의 씨앗은 죄를 낳 듯 이진의 엄마가 그녀와 똑같은 '이진' 을 낳았듯이 이진 또한 그녀는 사라지고 그녀와 똑같은 '작은 이진'을 남겨 놓고 죽고 말았다. 이세공의 마지막 말인 '잘해봐라.' 가 아니 그의 맘을 이제서야 절실히 깨달을 수 있고 그만이 그를 이해해 줄것만 같다. 이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시작일까. 부총리의 삶을 기록하던 이진,그런 그녀의 기록을 들춰부게 되고 그녀가 기록한 것을 찢으며 강하게 거부했던 순간이 그에겐 마지막 이었다. 그리곤 그녀는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생' 이 모두 빠져 나가듯 '임신중독증' 으로 인해 사망에 이른다. 아기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사진들은 그의 결정을 무시하고 그에게 작은 이진을 안겨 주었다.이세공은 왜 그에게 '잘해봐라' 라고 했을까. 그 많고 많은 말중에서 아니 살아 생전 그들의 결혼생활도 딸인 이진의 삶도 받아 들여주지 않았던 부정, 죽는 그 순간까지 떨쳐버리듯 했던 딸과 사위인 그들에게 잘해봐라라니 그와 똑같은 삶을 살아보라는 것인가.나 또한 딸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시집가서 너랑 똑같은 딸을 낳아 고생좀 해봐라' 라고 말하면 딸들이 난리인데 그와 같은 의미인 듯 하지만 비극이 똑같은 비극을 낳아서 더 애처롭다.

그런 삶에서 둘은 벗어날 수 없었을까.'그땐 몰랐다네.저네처럼 터무니없이 희망에 들떠 있었지.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는 마음이 없어. 지구상에서 가장 못돼먹은 애완동물이야. 사랑을 베풀어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상대방을 괴롭히거든. 고양이라도,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보다는 은혜를 알 게야.'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는 '마음이 없다.' 정말 상대에 대한 마음이 없었을까,아님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을까.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했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서로 달랐던 것일까?  동상이몽처러 같은 이불을 덮고 있으면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부부' 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둘처럼 늘 나뉘어져 있었던 사람들,그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그래도 결혼생활은 무난했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서로에게 점점 적응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마음이 영혼들에게 빼앗긴 것일까,아님 너무 자신에게 애정이 없었거나 무지했던 것일까? 어찌 그럴수가 있지. 아무리 남자가 수술을 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해도 그 시간이 지나도록 임신사실을 모를수가 있을까,채식하는 사람이라고해도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생각이 났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면서 자신은 식물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이진은 엄마부터 육식은 거리가 먼 그런 DNA를 가지고 태어난 듯 하다.그렇게 해야만 영혼과의 거리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아니 꼭 다른 영혼들에 대한 기록을 해야만 했을까. 그녀가 떠나고 그녀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하는 남자,이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녀의 딸에게 어머니를 남겨 주기 위하여 기록을 하는 남자로 전락한 남자 이현, 그의 사랑법을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우리 또한 살아가다보면 그런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처음엔 살구빛 향기든 다른 그 무엇으로 강하게 이끌렸다 해도 점점 처음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게 빛이 바래 가는 것이 사랑이고 삶이다. 서로의 삶에서 '교감이나 공감' 이 없어지면 서로에게 무의미해진다. 그럴수록 교집합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런 삶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이 보통의 삶인 듯 하다. 그리고 그 삶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녀를 다른 작품에서 더 만나봐야 할 듯 하다. 이 작품으로 해갈하기엔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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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또는 유년의 기억 펭귄클래식 110
조르주 페렉 지음, 이재룡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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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루주 페렉의 <사물들>도 독특한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 또한 독특하기도 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뭘까' 했는데 그의 유년시절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여 먼저 작품해설을 읽고 읽으니 소설의 맥을 잡지 못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음이 이제 겨우 조금 작가에게 가깝게 다가간 듯 하다. 그래도 여전히 내겐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작가이기도 하다.

양친은 1920년대 폴란드에서 파리에서 이주한 유대인이며 아버지는 40년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어머니는 43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이 소설의 그 주된 이야기가 자신의 유년시절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군대에서 탈영한 뱅클레를 찾아 온 '오토 아펠스탈' 에게서 그에게 이름을 빌려준 사람이 '누구' 인가에 대하여 아는냐는 말에 그는 아펠스탈에게서 자신에게 이름을 빌려준 인물에 대하여,아니 그들과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게 된다.자폐증세가 있던 소년을 치료하기 위해 요트여행을 하던 그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오로지 소년만 행방불명, 죽은 시체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소년을 찾아 나섰가다 'W라는 섬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W 라는 곳에서 소년을 찾았다든지 그외 앞의 사건과 이어지는 내용이 아닌 그곳은 '올림픽선수촌' 같은 올림픽촌이라는 이야기가 점점 세세하게 나온다.'W섬의 마을은 우리가 '올림픽선수촌'이라 부르고, 고대 올림픽에서 레오니트옹이라 불렸던 곳,혹은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 선수들이 중요한 국제경기를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하기 위해 체류하는 훈련 캠프와 거의 동등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에겐 유년의 기억이 없다.' 라고 이어지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옮긴 다른 소설은 그의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듯 유년의 편린들을 찾아 조각을 맞추어 나가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유태인이 어머니를 떠나 보내야 했던 소년,그리곤 어머니와 헤어 진 후 떠돌이 삶처럼 남의 손에 의해 아님 정착지가 불분명하게 떠돌았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의 지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전적인 '유년의 기억'과 'W' 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어어진다는 것일까? 두 이야기는 평행선처럼 계속적으로 똑같은 거리감을 두며 이어진다. 무얼까 'W' 가 의미하는 것은? 유년의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유년의 기억을 어떻게 해서든 더듬으며 찾아내려고 한다.그런가 하면 'W' 라는 올림픽과 그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머니를 앗아 간 '전쟁과 수용소' 를 빗대어 그려내고 있다. '두 개의 V자의 꼭짓점을 이으면 X자가 되고, X자의 가지를 동일한 길이로 수직으로 연장하면...... 동일한 기호로 철 십자를 대테한 사실에 놀랐던 것이 기억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였다.(96p)' 글에서 보면 이곳이 그가 표현하려는 어떤 곳인가에 대하여 나온다. 히틀러와 나치에 대하여 말하는 그,그가 표현하려던 'W' 라는 곳은 어머니를 빼았아 간 전쟁이며 나치이다. 그로 인해 그는 유년의 기억도 아버지를 전쟁에서 잃었고 어머니 또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기에 그의 정신속에서는 전쟁과 나치 정당하지 못했던 베를린올림픽이 겹쳐 'W'라는 이야기가 탄생한 듯. 스포츠란 전쟁처럼 승리자만 살아 남는다.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지 그 치열함을 'W' 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W에서 스포츠 위주로 삶이 조직화된 것이 노리는 유일한 최종 목표는 경쟁을 과열시키고, 혹은 다른 표현을 쓰자면 승리를 찬양하기 위한 데에 있다.' 승자가 되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승자가 아닌 패자의 가지게 되는 것은, 그는 패자의 입장이나 마찬가지이니 유년의 기억도 잃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어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적 아픔에 시달렸던 그는 무엇이든 풀어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들여다 봄으로 해서 어쩌면 자신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져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승자가 되기 위하여 그 또한 치열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에게 남겨진 아픔은 늘 트라우마처럼 그를 따라 다닌 것은 아닐까? 'W의 삶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것은 사실 꽤 끔찍한 광경이다. 초심자는 경기장,훈련장,트랙을 두루 돌아다닌다. 아직 차분하고 자신감에 찬 청소년에 불과해서 그때까지의 삶이란 수많은 동료들과 나눈 따듯한 우정으로 넘쳐흘렀던 반면 화려한 축제와 환호, 승리의 음악, 하얀 새들의 비상과 연관되었던 이미지들은 이제 참을 수 없는 비참한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전쟁은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비참한 현실'과 맛서게 됨을 말하고 있다. 모두가 피해자인 것이다. 그에게 남겨진 것도 피해자이며 아픔이듯이 승리를 쟁취한 이들에게도 현실은 비참할 뿐이다. 그런 유년의 기억과 'W' 를 그는 소설에서 조우하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은 아닌지.

한참 이성이 성립되는 사춘기에 아니 그 이전에 부모를 잃은 것도 큰 슬픔인데 전쟁으로 피폐해져 여기저기 떠돌며 그의 정신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을까? '똑같은 글은 쓰지 않겠다' 라고 했듯이 <사물들>에서도 사물들을 통해 '행복과 자유' 에 대하여 그 깊숙히 빠져들게 하더니 이 소설에서 또한 자신의 전쟁으로 부모을 잃은 유년시절과 공정하지 못하게 치른 베를린 올림픽을 전쟁및 경쟁에 빗대음으로 하여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지,살아 남았어도 그 아픔은 끝나지 않았음을 '유년의 기억' 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그의 유년의 기억을 통해 좀더 가까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나로 바꾸어 놓는다. 아니 좀더 그와 친숙해지게 만든다. 악동같은 표정의 사진이 말해주듯 그 속에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아픔이 자리하고 있음을 소설을 통해 알게 되고 나니 그의 삶이 안쓰럽기도 하고 현실의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기도 한다. 페렉에게 전쟁은 유년시절과의 단절이다. 그리고 그 단절은 현실을 좀더 치열하게 살게 해 준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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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순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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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지를 읽다보니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그래서 이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매를 해 놓고도 읽지를 못하다가 그 마음을 더 누를 수 없어 읽게 되었는데 너무 좋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3>권을 읽었기에 이 책에는 그 책들에 나왔던 것들이 반복되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우리 문화재란 자주 보고 자꾸 봐야 더 애착이 생기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지키겠는가.


이 책에는 그림 글씨 공예 도자 조각 건축 그리고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책을 보다보니 우리것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말 아쉽고 안타깝다. 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키지 못했을까? 그리고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너무 든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중요한 문화재인데 외면당하여 세월에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들이 많다. 아니면 너무 드러나 그 의미보다 더 크게 부각되어 어색한 것들도 있다. 문화재는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때가 제대로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지키고 보아야 할까,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자세 또한 가르치는 듯 하다.

첫 페이지의 '물방울관음'에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어쩌면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그 유려함과 품위를 잃지 않은 감동,정말 대단하다. 글과 그림에서 눈을 계속적으로 왔다갔다 하며 읽어나가는데 정말 '와 대단하다' 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것을 실제로 본다면 그 감동은 더할 것이다. 무한감동이라고 해야 하나. 서양미술사는 줄줄 꾀고 있어도 우리 미술사나 문화재엔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어나 하는 반성을 해 본다. 정말 대단한 작품들이 너무 많다. '수월관음도' 속살이 다 비치고 속옷이 다 비치면서도 얼마나 섬세하고 살아 있는 듯 선명한지 정말 그림을 또 보고 또 보고해도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만 나온다. 옛그림을 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좋다. 사실적인것 같으면서도 여유가 있고 재치가 있고 선비의 굳은 절개도 보이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농 익음은 그림에서 나타나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빠져들게 하는 옛그림,정말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면서 설명을 읽다보면 재밌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해석이 이보다 더한 말이 있을까,정말 적확한 말인 듯 하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고 그런 것이 그림 뿐만이 아니라 조각이며 건축등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런 '절제의 미' 가 있어 더욱 가치있어 보이고 가치 있는 것 아닐까. 어느 것 하나에도 눈을 뗄 수가 없으면서 허투루 흘려 보낼 수 없는 정말 '보물중에 보물' 만을 담아 놓은 것처럼 너무도 좋다. 그런가하면 그런 문화재들이 우리손에 있지 않고 해외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이어 <국보순례>를 읽다보니 작은 산사에 가도 돌 하나 그냥 허투로 보아 넘기게 되지 않는다. 무언가 역사가 있을 것 같고 당간지주를 보아도 역사를 찾고 싶다,아니 읽고 싶고 알고 싶어진다. 그렇게 마음과 자세와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너무도 귀한 것들이 많은데 우린 너무도 당연하여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오감을 책에 꼭 붙잡아 놓는다. 그리고 이 책을 손에서 놓는 순간 전국을 한바퀴 문화재 여행을 하고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한마리 '천록'에서 재치를 한 폭의 그림에서 '여유' 를 마감재 하나인 박석에서조차 예술적 기질을 발휘한 조상들의 지혜와 장인정신을 이 한 권이 아니라 '국보순례'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그러 했듯이 '국보순례'가 또한 귀중한 유산이 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 같다. 모든것을 다 담지는 못하고 그저 손에서 놓으면 금방 또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이 한 권을 읽음으로 해서 한발짝 문화재에 더 다가갔다고 생각을 하니 뿌듯하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몇 개 정도는 현장에 가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진다. 그 감흥을 책에서 좀더 넓혀 세상 밖에서 만나고 싶어진다.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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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얼마나 될까? 이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내 집과 주변을 생각해보니 사물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 늘 가지려고만 했지 좀더 비우려고 노력했던 적은 손에 꼽을만하다는 것을 느꼈다. 비우기는 어려워도 채우는 것은 금방이라는 것을 우리집 책장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무언가를 가지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을 취하면서 얻게 되는 '행복,만족감'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하지만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또 하나를 버려야 하는 단순한 이치를 모르고 있기도 하다.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악동이라 불리는 '조르주 페렉' 의 책은 처음 접하는 것이다. '사물들' 로 어떻게 소설을 이어갈까 궁금했는데 제롬과 실비는 함께 생활하게 된다. 잡지에서 보던 그런 풍유롭고 넉넉한 삶을,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살다보니 갖추고 산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설문조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은 필요한 것들을 벼룩시장에서 얻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집을 채우지만 언제나 '행복' 으로 다가가기에는 부족하다. 언제쯤이면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과 존재 이유, 행동을 결정지을 유치한 맹목적 추구 앞에서 이를 감히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자신들의 욕망의 크기에 압도당해,눈앞에 펼져진 부와 주어진 풍요로움에 질식해 갔다.' 쉽게 이루어지고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1960년대, 당시의 사회상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제롬과 실비의 삶, 설문조사를 하며 자신들의 꿈을 키워 보지만 늘 제자리에서 쳇바퀴를 돌 듯 하는 삶, 벗어나고 싶다. '덫에 걸린 취처럼 사방이 막힌 듯했다. 그들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다. 정해진 근무시간,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하나의 족쇄처럼 여기고,이를 지옥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기본적인 생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일에 매진하며 일에 이끌려 갈 때가 있다. 벗어나고 싶지만 발버둥치면 칠수록 점점 깊이 빠져 드는 늪처럼 더 깊은 골로 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고 버둥거릴 때, 과감하게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느끼지만 현실은 자신의 발목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아 현실에 안주하는 경우가 있다.아니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추구하거나 찾아 떠나는 용기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자신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사물들에 의해 점점 지배를 받듯 올가미가 조여드는 느낌,벗어나고 싶다,제롬과 실비는 설문조사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난다.

'하나둘씩 차례로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항복해 갔다.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삶에서 안정을 찾아 떠났다.'우린 이제 더이상 이렇게 못 살겠어.' 라고 말했다. '이렇게' 라는 말은 모호한 동시에 계획성 없는 삶,너무 짧은 밤,얼간이,낡아빠진 재킷,지켜운 일,지하철과 같은 말들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원하던 곳은 그들이 살던 곳과 비슷한 곳이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잘 되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가게 된 곳은 도시가 아닌 변두리나 마찬가지이고 '사물들' 이 그리 필요하지 않은 곳이다. 설문조사를 하며 사물들에 파묻혀 지내던 삶은 점점 잊혀져 가고 이 삶이 또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제롬과 실비,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지만 사물들에 지배를 받듯 그렇게 살았던 것들이 이젠 필요 없는 물건처럼 보여진다.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유' 및 그외 그이상의 것들을 포기하기도 해야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손 놓아야 하는데 우린 그러지 못하고 모두를 가지려고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럴때는 늦다.얼마만큼 많이 왔다고 생각이 들 때 가끔 뒤돌아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 처해보거나 어디 정말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필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다는 것을 알게 된다.필요할 것이라고 꼭꼭 챙겨 온 것들은 무게 때문에 버려야 하는 경우가 오기도 하고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가져가지 않아도 되는 것들, 쓰지 않은 물건들이 대부분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현재의 삶은 사물들을 가지며 갖는 행복감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유며 여유등을 포기하고 살게 되지만 그것들이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먼 길을 돌아오고 나서야 깨닫게 되고는 미래는 '~것이다.' 라고 추측이나 희망적인 문구로 끝낸 것을 보면 현재는 가지지 못한 것을 이들의 삶이 미래는 좀더 밝고 여유롭고 행복해지고 자유와 여유를 가지고 살 것이라는,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어 기분 좋게 내려 놓을 수 있게 한다.

사물들에 대한 글이라 다소 뻑뻑하고 밋밋하고 딱딱할 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나의 예전 삶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며 앞만 보며 달여 왔던가,하지만 가지고 나면 필요 없어도 된다는 것을,아니 허무함이 들 때가 있다. 없어도 살 수 있고 있어도 살 수 있는 것이 물질만능시대다. 누군가는 모든 것을 가지며 누리고 살지만 누군가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산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자신감이 있기에 그리고 미래가 희망적이라 생각하기에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저 사물들을 가지는 것이 행복인줄 알았다면 이젠 '있고 없는 시간' 을 살아 보았기에 그들의 삶은 더욱 희망적일 것이다.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이전보다 상황은 더 나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찾은 것은 카트르파주와 아름다운 나무,그들의 사랑스러운 아담한 아파트와 초록 커튼이 쳐진 창문, 오래된 정겨운 책들과 산더미같이 쌓인 신문, 좁은 침대와 비좁은 부엌,그 뒤죽박죽인 상태일 것이다.' 떠나고 보니 처음의 자신의 것들이 소중하고 정겹다. 그리고 미래는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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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9-1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정말 필요한것과 그렇지 않은것들의 구별해내는 능력이 아주 조금씩은 늘어나는것 같습니다^^;

서란 2011-09-22 22:51   좋아요 0 | URL
맞아요~~여행을 가보면 필요없는 것들이 정말 많죠.
사물에 집착, 나이 들고 집을 떠나보면 더욱 느끼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