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 이다. 그 죽음조차 자신의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유예기간이 주어진다면 행운이겠지만 그런 예고도없이 길을 가다가 혹은 산행을 하다가 천재지변이나 그외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가는 이도 황당하겠지만 보내는 사람도 황당하다. 남아 있는 자로 죽음에 대한 상처가 치유되기란 정말 오랜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까운 사람이었다면 더할 것이다. 올해는 그런 뜻하지 않은 일을 두번이나 겪게 되었다. 올해 초에 작년에 폐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를 뵈러 오시다가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시게 되었다. 결코 준비되지 않은 죽음앞에서 우린 그저 ’가는 길은 순서가 없단다. 고생않고 가신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하며 좋게 보내드렸다. 그런데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폐암으로 그래도 건강하게 사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그 또한 모든 일들이 복을 받았다며 좋게 보내드리자고 했다. 아버지 당신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당신은 두렵고 무서우셨겠지만 어쩌면 주변인들은 아버지를 정리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슬픔을 줄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은아버지에 비해. 그렇다고 어느 죽음인들 서럽지 않은 죽음이 있으랴. 가고 나면 흔적조차없니 모두가 사라지는데. 지금도 어디선가 날 바라보고 계실것만 같은 아버지가 문득 문득 생각날땐 그저 눈물만 나온다.

요시모토의 소설은 몇 편이 있지만 처음이다. 그녀의 글에 대한 생각없이 읽어서일까, 아님 내가 요즘 겪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일까 무척 내 맘에 와 닿았다. 만약에 내 꿈에라도 아버지가 다시 한 번만 나타나 주신다면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무엇이다 딱히 정해진것없이 그저 아버지와의 시간을 좀더 연장하고 싶은 생각이다. 영혼을 좀더 편안하게 해 주어 가볍게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여기 그런 소설이 있다. 쌍둥이 자매로 할머니가 마녀라 쌍둥이 딸들 또한 마법학교를 나와서 다른사람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소녀들이 할머니의 잘못으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입고는 있는자들을 위한 병원이나 마찬가지인 곳에 사춘기때 가게 된다. 그곳에서 원장과 사귀었던 동생은 그후 결혼을 하여 외동딸을 낳고 가게를 운영하며 부유한 삶을 산다. 외국산식료품가게를 하였기에 무엇이 좀더 잘 팔릴까 하는 것에도 그녀는 주술을 이용하기도 하여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맘에 들지 않았다. 쌍둥이 언니도 결혼을 하여 외동 아들을 두고 비슷한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서로 연을 끊고 살았다시피 한다. 그러다 동생의 외동딸인 유미코가 열살이 겨우 넘은 나이에 사단이 일어나고 만다. 강령회를 하던 중에 유미코의 엄마가 아빠를 찔러 죽인 것이다. 그곳엔 외삼촌 내외와 그녀의 엄마를 만나러온 여자가 있었지만 그녀 또한 목을 찔리고 만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를 잃게 된 유미코는 혼자 떠돌게 된다.’어두컴컴한 현관홀에서 쇼이치가 말했다. 마치 동굴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답답함. 이 눅눅함. 집 안은 어느 정도 치워져 있어서 그때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황량했다.’

그런 그녀 앞에 이모의 아들인 쇼이치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이모가 살아생전 그녀를 거두고 싶어했다는 말에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그녀는 처음으로 와 보는 이모의 집에서 평온함을 느끼며 쇼이치와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과거와 재회를 하게 된다. 쇼이치는 그녀를 데리고 과거 그녀가 부모와 한때는 단란하고 부유하게 살았전 집이며 가게등을 그리고 과거의 삶에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보러 다닌다. 이모와 함께 엄마가 오래전에 머물렀던 병원에 들러 그곳에서 그녀들의 삶에 대하여 듣고는 평소 그녀가 생각하는 엄마와 이모의 성격이 병원에서는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병원에서 그렇게 얌전하듯 한 엄마가 왜 세상에 나와서는 그토록 돌변한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에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나던 날까지 살던 집에 들어가서야 엄마와 아빠가 몹시 그립다는것을 알게 된다. 비록 아빠를 죽인 엄마이지만 그녀에게는 하나 뿐인 엄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무덤에 가면서 그녀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익히 그 모든 일을 알고 있고 사건이 일어나던 날 다음부터는 애매모호함이 자신이 이미 죽은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그녀는 쇼이치의 꿈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모가 그녀를 데리러 오지 못했던 것이다.

쇼이치의 꿈 속에서 이모를 만나 모두를 용서하게 되는 그녀, ’ 이제야 겨우 이해가 된다. 구마 씨가 했던 말..... 자신이 이곳에 겨우겨우 있다는 것. 이모가 나를 데리러오지 않았던 이유를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했던 것. 그야 그럴 수 밖에, 죽었으니 데려갈 방법이 없잖아. 내가 쇼이치와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 가만히 놔둔 것이리라.’ 그녀는 자신이 오래전, 그러니까 엄마가 아빠를 죽이던 날 자신 또한 엄마의 칼에 목숨을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떠도는 영혼이 되어 있었던 것이란것을. 그녀는 엄마도 이해를 못했지만 이모도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쌍둥이자매를 모두 이행하고 비록 엄마의 손에 죽음에 이르렀지만 아빠 또한 행복했음을 알아차린다. 쇼이치의 꿈 속에서 모든 것을 치유하게 되는 그녀는 그렇다면 이제 편안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자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꿈 속에서 자신과 과거로의 동행 뿐 아니라 아픈 상처를 치유해준 쇼이치를 위해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갓파를 놓고 행복하게 떠나는 그녀, 유미코의 영혼을 위한 레퀴엠이었던 것이다. '책상 위에 딱 하나 덩그러니 남은 촛ㄷ에 종종 촛불을 밝히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살며시 그것을 만져 보았다. 엄마의 통통하고 하얀 손이 닿았던 곳이다. 엄마, 하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엄마를 만나고 싶어, 목소리를 듣고 싶어, 걷는 모습을 보고 싶어, 꼭 안기고 싶어, 그 손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어.'

이 소설은 독특하다. 죽은 이가 화자가 된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등장하여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한다. 이렇게 죽은 자가 소설속에서 화자가 되는 경우는 특이한데 올해 읽은 책 중에 <딩씨 마을의 꿈> 이라는 책 또한 죽은 아이가 화자로 등장을 한다. 죽은 자가 화자가 된 경우는 자신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추리소설처럼 사건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리곤 그 죽음과의 치유를 통해 좀더 편안하게 이승을 떠난다. 하지만 소설은 그녀가 죽은 것이 아닌것처럼 모두가 생생하게 이어 나간다. 자신이 왜 억울한 영혼이 되어 자신의 죽음과 작별도 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영혼 유미코는 쇼이치의 꿈 속에서 비로소 엄마와 이모를 알게 되고 그녀와의 죽음과도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자신이 세계로 돌아가려는 그녀, 더이상 억울하게 떠돌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것으로 표현을 한다면 죽은 자에 대한 살풀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더이상 이승의 끈을 잡지 말고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길 바라는 치유의 소설, ’그녀에 대하여’ 소설을 덮고 나니 표지의 소녀가 너무 애처롭다.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처럼 그녀의 빨간 치마가 자꾸만 눈 앞에 아른 거린다. 아버지를 보내고 난 후라 그럴까 죽음을 좀더 너그럽게 바라보는 눈이 생긴듯 하다. 너무 붙잡고 있어도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 하다. 나에겐 여기 이 자리가 있다면 이승을 떠난 아버지에겐 아버지만의 편안한 자리가 있는 것이다. 좋게 정말 좋게 보내주는 것이 남은 자의 도리인듯 하다. 이 소설 또한 그런 의미로 받아 들이고 읽는 다면 소녀의 아픔을 토닥토닥 두드려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그녀가 부디 다른 생에서 행복하길 바래보며 나 또한 소설로 치유를 받은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루 밑 남자
하라 코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아내가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입주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누군가라니. 귀신이라도 있다는 말이야?' 누군가 이사한지 얼마 안되는 우리집에 함께 살고 있다면 그것도 마루 밑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자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에 '우렁각시' 처럼 신문을 정리해 준다든지 설거지를 해준다면 어떨까? 그와 함께 하고 싶어질까. 

이 소설은 독특한 생각으로 기발하게 전개 된 이야기인데 마지막은 가슴을 울린다. 찡하다. 샐러리맨들의 고통이, 가장으로 사회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가장들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가슴이 찡했다. 이사 온 지 얼마되지 않는 당신의 집에 누군가가 마루 밑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면? 설마 했는데 그게 정말이 되었다. 아내가 누군가 있는것 같다는 말에 남편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와 마주치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고 그를 의식하게 된다. 도대체 왜 그는 우리집 마루 밑에서 살고 있으며 누구란 말인가. 남편은 한시도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집이란 그저 하숙집처럼 잠만 자는 곳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고 회사에서 또한 눈코뜰새 없이 열심히 일하지만 여기저기 눈치를 봐야 한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슬프고 바쁜 샐러리맨, 밤낮없이 일하지만 아이들에게서도 아내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존대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부터인가 질투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집에서 자의든 타으든 함께 동거하게된 마루 밑 남자에 대하여. 그가 바쁜 시간 중에 잠깐 집에 들렀다 보게 되는 아내와 마루 밑 남자와의 단란한 시간들, 그 속에는 자신은 없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마루 밑 남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자신인양 자신의 일을 대행하고 있는듯 하다. 점점 집에서 자신의 위치는 밀려나게 되고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되는 남편, 그러다 어느 날 아내에게 그의 존재에 대하여 말하게 되지만 아내는 이미 그를 받아 들이고 있는 눈치이다. '그럼 어쩔 생각이었어? 별로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도움이 돼. 그럼 됐잖아. 정리정돈도 해주고,설거지도 해주고,최근에는 욕실과 화장실 청소까지 해준다고. 마치 밤중에 우렁각시가 다녀간 것 같아서 즐겁지 않아?'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산다고 해도 서로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의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 이상 괜한 것을 알려고 해봤자 별로 의미 없으니까.' 그렇다면 아내는 이미 그를 받아 들였다는 뜻인데 그럼 자신의 존재는 어떻게 된 다는 것일까.

'그 사람은 당신하고 달리 언제나 옆에 있어준단 말이야. 우리하고 같이 밥을 먹고, 우리하고 같이 텔레비젼을 보고, 우리하고 같이 웃고 떠들어준단 말이야. 내가 한숨을 쉬면 걱정해주고, 내가 불편을 하면 들어주고, 내가 곤란해하면 도와준다고, 그런데 당신은..' 그는 아내에게 지금까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의미였을까. 혹시 돈버는 기계는 아니었을까.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들어가려 열쇠를 구멍에 넣어 보았지만 맞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쫓겨 나게된 그가 역에 이르러 노숙자를 보게 되고 그도 이젠 노숙자가 되었다고 생각할때 그가 말해준다. 그가 열한번째 쫒겨 난 남자라는 것을, 그러면서 들려주는 '마루 밑 남자' 들에 대한 이야기. 회사와 가정에서 쫓겨난 이들이 남의 집에 먼저 들어가 마루 밑에 둥지를 틀고 그 집에 아내와 아이들과 존재감을 긴밀히 하다가 드디어 가장을 밀쳐내고 마루 밑 남자가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집에 있던 남자도 언젠가는 한 집의 가장이었을테고 자신처럼 회사와 집에서 쫓겨난 존재란 말인가.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이 사회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날카로움으로 샐러리맨들의 비애를 다르고 있는 '마루 밑 남자' 는 재미도 있으면서 슬프기도 하다. 지금 그래서 내 옆에 있는 '가장' 에게 좀더 애정과 관심을 갖게 만든다.

튀김사원, 제목이 재밌다. 지방에서 근무하던 중년의 남자, 컴퓨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때문에 급하게 해야 했던 서류가 다 날라가고 말았다. 그가 일어서 가려다 전선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코드가 뽑혀 그가 하려던 작업이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장에게 잘 말해 자신이 저지른 일을 뒤집어 쓰겠다고 한다. 이남자 다도코로,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그에게 있다. 그의 말처럼 과장은 그에게 서류업무기한을 늘려 주고 전과는 다르게 그를 대한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시작된 다도코로씨의 대한 의심은 점점 불거지게 된다. 사내 연애를 몰래 하던 그들의 이야기를 아는가 하면 그가 소속된 부장의 조직의 무너뜨린다고 하는 '복수' 심에 불타는 이남자, 과연 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자신이 복수를 하겠다며 이 회사를 무너뜨리겠다고 하는 이 덜떨어져 보이는 중년남자를 믿어야 할까? 하지만 그의 말처럼 한가지 한가지 일이 실행되면서 그의 정체를 캐기 위하여 그는 애인과 함께 고군분투 하지만 그의 확실한 정체를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부장의 부정이 밝혀지는 글이 퍼지게 되고 다도코로가 의심스러워 그를 불려낸 자리에서 듣게 되는 '튀김사원' 이라는 말에 그들은 놀라게 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컴퓨터를 잘하는 고등학생인 그의 아들이 만들어 준 일이라는 것에 놀란다. 그들 모두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오며 모이게 된 자리에서 자신들이 당했던 일처럼 회사에 '복수' 를 하는 일을 해 보자는 애인의 말,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듯 뭉친다. '너 회사에 불만있냐?' 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불만이 있다고 그 불만을 앞에서 토로하기 보다는 삼키고 뒤로 삭이며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샐러리맨들, 그런 그들을 위해 여기 가짜사원인 '튀김사원' 이 납시었다. 그룹을 와해시킬수도 있는 저력은 그가 아닌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 해 준 컴퓨터광인 아들이었다. 늘 접하고 있는 컴퓨터, 그 속에는 비밀도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그 비밀들이 밑바탕이 되어 회사를 와해 시킬 수 있었던 튀김사원의 대활약이 펼쳐졌지만 이 또한 샐러리맨들의 슬픈 자화상 같은 이야기라 가슴이 아프다.

남자들에게서 밀려나 자신의 능력 밖에서 살아야 하는 여자들, 그녀들이 뭉쳐 남자들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다. 여자전용인 빌라에 뜻하지 않게 살게 된 두 남자들, 그들은 갇히게 된다. 전화도 안되고 자신의 집에서 나갈 수도 없는 감금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남자들은 그녀들에게 동조를 해야만 한다. 그게 어쩔 수 없는 빌라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합의 약속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방송일을 배우고 거들면서 있는 그가 난데없이 여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갇히게 되면서 겪게 되는 몰랐던 세계 여자, 그녀들은 할 말이 많다. 그녀들이 벌이는 이 전쟁이 빨리 이슈화 되고 여성 또한 남자들과 동등한 자리에서 일하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사회는 그녀들이 지금 남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그녀들만의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속에서 점점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이고 뜻 하지 않은 사고로 우두머리인 여자가 총상을 입게 되면서 그녀들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어쩌면 너무도 열정적이고 자신이 남자와 지기 싫어한 우두머리 여자 혼자만의 전쟁이었는지 모른다. 이 또한 사회에서 점점 설 자리가 소외되고 있고 남자의 아래 자리로 밀려 나고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라 슬프다. 여자들의 비애를 다루고 있어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전쟁을 선포하기엔 사회는 너무 거대하다. 자신들의 능력을 펼 수 있는 무언가 남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전쟁을 해야 할 터인데 막무가내식 사회에서의 '여자' 만의 단절은 안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좀더 조화로운 협상이 필요한 일이다.

'당신의 회사에 파견사장이 필요합니까?' 파견사원은 있어도 지금 사장이 있는데 굳이 '파견사장' 이 필요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사장은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시작된 파견사장은 전국 호프체인점으로 대박을 낸 사장이 디자인 회사에 파견사장으로 오게 된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파격적으로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급물살에 하나 둘 떠나 가더니만 모든 일들이 빠져 나고 만다. 겨우 몇 명 버티고 파견사장의 입맛에 맞추어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간신히 자신을 바꾸게 되는데 회사는 또다른 '파견사장' 이 오게 되고 그는 한달전 파견사장과는 너무도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지휘한다. 어디에 중심을 맞추어야 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사장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정사원들이 떠난 자리는 점점 파견사원들이 채워 넣어도 정사원과 전혀 다르지 않는 일처리에 정사원인지 파견사원인지 분간이 안가는 회사로 거듭나게 되고 남아 있던 이들마져 바뀌는 파견사장에 맞추다 그곳을 나와 자신들 또한 파견사원이 되고 만다. 그동안 한곳에 갇혀 있는 정사원으로 그들은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가 파견사장으로 모든 것이 와해되고 말고 정사원마져 파견사원이 되어 떠 돌고 그 회사는 파견회사의 손에 넘어가 파견회사게 된다는 이야기다. 파견사장에게 손을 놓고 본사장은 여유만 즐기고 다녔기에 회사관리에 소홀하고 그런 헛점을 파견회사가 놓치지 않고 집어 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점점 '파견화' 된다면 어떻게 될까. 주인이 없고 주인의식이 없는 회사와 사원들도 이루어진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탱할까? 그렇다면 지금 무언가 생각을 달리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이야기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그런 일자리로 늘려 가고 있는 사회, 과연 먼 미래에는 회사도 그 회사를 일터로 삼는 누군가도 과연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면서 무언가 큰 상처를 주는 이야기는 가슴을 콕 찌른다.비정규직 그들이 소리를 높이고 있는 듯한 이야기다. 

그외 '슈사인 갱' 또한 모두 사회와 가정으로 부터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다. 정리해고 당한 중년 남자가 가출한 당돌한 소녀와 함께 동거를 하는 이야기이니 이 또한 슬프다. 모든 이야기들은 샐러리맨들의 비애라든가 그들이 가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잡아 내고 있다. 재밌게 읽으면서 나름 좀더 넓은 사회와 가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게 한다. 전쟁 같은 회사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눈코뜰새 없이 일하는 가장들, 하지만 그들이 가정에서 설 자리는 없다. 가정은 오로지 잠자는 '하숙집' 정도 밖에 안되고 아내나 아이들에게 그들은 '돈 버는 기계' 로 밖에 인식이 안된다. 아무리 돈이 필요한 사회라 해도 아내나 아이들은 회사와 일에 빠져 있는 남편과 아빠보다는 자신들과 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텔레비전을 함께 볼 수 있는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들어 줄 따듯한 체온을 가진 아빠와 남편을 원한다.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번더 일깨워주는 단편들이 재밌으면서도 가슴 찡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립의사협회는 낙태의 자유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득 표명하며, 입법부에서 낙태를 허용한다면 그 '과업' 은 '특정한 집행 인력' 에 의해 '특별히 지정된 장소' 즉 '낙태소' 에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1973년 4월8일자 신문'  본문에 들어가기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낙태에 관한 소설일까. 무척 애매하다. 찬성을 하는 것인지 반대를 한다는 것인지 잠깐씩 낙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가의 입장이 어떻다고는 확실하게 볼 수 없다. 소설은 쿠쟁이라는 소심하면서도 남 앞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통계학을 다루는 삼십대 남자가 아프리카 패키지 여행을 갔다가 '비단뱀' 을 만나 그 뱀을 사서 가져와 키우게 되는 이야기다. 그와 같은 곳에서 일을 하는 흑인인 드레퓌스 양을 좋아하고 있지만 좋아한다고 한번도 말을 해 보지 못하고 속으로 가슴만 태우는 정말 소심남이다.

그로칼랭, 열렬한 포옹이란 뜻처럼 '군중속의 고독' 을 철처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남자 쿠쟁, 그는 자신을 몇 시간이고 칭칭 감고는 자신을 놓지 않고 안아 주는 비단뱀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 뱀이라는 동물이 남에게 혐오감을 줄 수도 있고 먹이를 산 채로 삼키어 서서히 죽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처한 사회를 '비단뱀' 에 비유를 했는지 모른다. 파리에 중고 사람이 천만을 넘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열렬하게 포옹을 해 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 살은 뱀에게 먹이로 산 토끼나 쥐를 주어야 하지만 그 또한 그에겐 할 수 없는 일이라 가정부 아줌마를 고용하여 먹이를 주게 한다. 자신은 오로지 비단뱀이 감싸주는 것을 좋아할 뿐이고 두 칸짜리 방에서 자신을 맞아 준다는 것 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 퇴근후나 그외 자신이 외로움에 처해 있을 때 곁에 있어 준다는 그 의지 하나만으로 그에겐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그로칼랭에게 산 먹이를 주는 것을 하지 못하여 신부를 찾아가 답을 듣기를 원한다. 신부는 그에게 ' 쿠쟁 씨는 사랑이 넘치는데 그 사랑을 남들처럼 처리하지 않고 비단뱀과 생쥐에게 쏟고 있다는 말이에요...... 아시겠지만 세계에는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아이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비단뱀이 아닌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는 그가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에 봉착했을까. 사랑하는 드레퓌스 씨에게도 정정당당하게 나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비단뱀에게 말하듯 반듯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루는 비단뱀을 가지고 밖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혐오스런 생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편견과 증오와 경멸이 생기는 것은 인간적인 접촉이나 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결국 사람들이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소통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모두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지만 서로간의 거리는 좁히지 못하고 벽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 벽에 갇혀 있듯 하는 쿠쟁, 비단뱀으로 인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좀더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그럴수록 그는 자신안의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지만 그 사랑하는 드레퓌스 양에게 한번도 제대로 말을 건네보지 못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 짧은 시간도 여행을 하는것처럼 층마다 각나라의 여행지를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혼자 속으로 생각하다 결국 그녀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 남자로 비쳐지게 되는 쿠쟁, ' 네 지금도 같이 삽니다. 아시겠지만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사랑한 대상이 필요하니까...' 왜 그 사랑할 대상이 그를 사랑해줄 대상이 '비단뱀' 일까. 생식을 하며 먹은 것을 서서히 자신 안에서 죽이며 허물을 벗고 요도와 항문으로 배설 밖에 모르는 동물은 왜 그는 키우고 사랑하며 비단뱀화 되어 가는 것일까.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인 드레퓌스 양에게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전달했다만 뱀과의 이상한 동거는 일찍 끝났을 수도 있다. 드레퓌스 양이 비담뱀이 싫다고 하면 동물원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고향이 드레퓌스 양은 비담뱀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 못하고 어느 날은 비단뱀과 지금도 살고 있냐고 물으며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말을 건다. 그는 그 물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본다. 그의 아파트에는 오르지 두사람 분의 것만 갖추어져 있다. 침대는 더블이며 그외 것은 모두 두개씩이다. 그런 가운데 드레퓌스 양이 비단뱀을 보러 오겠다고 하여 자신은 최선을 다해 식탁을 꾸미고 비단뱀이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지만 그녀는 혼자 오지 않고 동료 둘과 함께 온다. 그렇게 하여 그의 마음이 모두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정말 그 순간을 기다려 왔고 잘 되면 그녀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쿠쟁은 일생일대의 혼란을 겪게 된다. 뱀이 허물을 벗어도 똑같은 뱀이듯 그 또한 어쩌면 결혼이라는 껍질에 쌓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벗어나 다른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 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껍질로 사는 사람이 있을까. 사회에 맞추어지고 사회화 되면서 자신의 본래의 껍질을 잃어하는 것이 우리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런 속에서 뱀이 허물을 몇 번이나 벗는 것을 지켜 보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뱀이다. 사회 또한 허물을 벗듯 변화한다고 해도 역시나 '사회' 일 수 밖에 없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이 변화지 않는다면 '군중속의 고독' 을 언제고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은 자신안에 '자유' 가 깃들어 있다고 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적응력이 부족하고 소심한 남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소심함이 잠시 비단뱀으로 인하여 허물을 벗는듯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쿠쟁이고 말듯 드레퓌스 양하고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그에게 말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만 것이다. 제비꽃이 시들까봐 물컵에 꽂아 그녀를 기다려 보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그는 사창가에 가서 창녀와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드레퓌스 양, 그녀와 사랑의 시간을 갖고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말을 해 보지만 그녀는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면서 지금의 자신의 일이 좋다고 한다. 쿠쟁은 집으로 돌아와 비단뱀인지 쿠쟁인지 알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난다. '안 했지만 만찬가지에요. 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생물학적 돌연변이를 일으켜야 할 겁니다. 탈피해봤자 그게 그거고 오히려 점점 심해지지만 할 거요.' '매일 저녁과 주말 내내 이인용 침대와 함께 지내노라면, 어쨌거나 혼자라는 것에 핑계를 만들어주는 일인용 침대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혼자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파리에 사는 비단뱀의 고독이 한껏 드러나 쑥쑥 커지기 시작한다. 비단뱀을 두르고 있어도 이인용 침대 위에 혼자 있는 것은 끔찍하다.' 자신을 칭칭 감고 놓아줄줄 모르는 비단뱀이 자신의 안식처와 같았고 자신 안에는 드레퓌스 양이라는 사랑이 자라고 있었지만  그 모든것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단뱀에게도 자연으로 돌아가 살아야 할 자신만의 자리가 있는 것이고 드레퓌스 양에게는 그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쿠쟁은 그들이 없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변태를 해야 하는 것일까. '탈피는 착한 파충류들이 전혀 다른 종, 즉 완전히 진화된 허파를 가진 종에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일깨운다.'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 또한 허파를 가진 파충류이며 비단뱀과 같은 탈피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다른 사람과의 '소통' 을 원했는지 모른다. 그가 사람과 좀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찾았던 비좁은 중국식당, '그 식당은 비좁아서 테이블도 인간도 모두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다. 다른 테이블과 다정하게 팔꿈치를 맞대고 있기 때문에 혼자 가도 여럿이 온 기분이 든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면 곁에서 같이 듣는다. 내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슴에 와닿는다.' 쿠쟁이 원하는 것은 누군가와 팔꿈치를 맞대고 또는 누군가와 어울려 대화를 나누며 소통을 원하고 있는데 그럴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철처히 혼자가 되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열지 못했기 때문에 소통의 부재 속에서 그가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이나 고독이 그를 비단뱀화 하게 했는지 모른다. 

로맹가리, 필명인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도 소설을 내기도 해서 공쿠르 상을 두번이나 받는 이변을 토해낸 그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택했던 '자살' 이란 극단적인 방법이 너무도 아쉬움을 남게 한다. 그의 소설은 이번이 첫 작품이다. 좀더 그를 알고 싶어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와 <자기 앞의 생>을 구매를 해 놓았고 조만간에 읽어보려 한다. 소설속 쿠쟁이나 비단뱀은 강한 인상을 남겨 놓고 얼마 동안은 내게서 떠나지 못할듯 하다. 서른 일곱이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처럼 통계학적이지 못하고 사람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면서 비단뱀을 애완으로 키우며 외로움을 달랬던 남자, 희망을 놓치 않았기에 이 미터 이십센티의 비단뱀도 혐오스럽지 않게 비춰졌던 소설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쿠쟁인지 비단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처럼 나온 것을 보면 그 또한 사회에 적응을 하여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지 않나 싶다. 이 소설로 인해 다른 작품들이 더 궁금하게 만드는 로맹가리, 그 또한 마지막 순간에는 그로칼랭처럼 누군가 자신을 열렬히 포옹해 줄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경우 흔히 갖게 마련인 신랄함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조심성에 가까운 차분함을 가지고,좌절로 얼룩진 거울 속의 얼굴을 서른아홉 해로 나누어 보았다.' 서른 아홉의 나이에 결혼과 이혼의 상처를 가진 그녀 폴, 그녀에게 오랜 시간동안 사랑해 왔고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로제라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늘 고독과 외로움을 안겨준다. 긴장감이 없는 사랑, 늘 습관처럼 행해지는 그와의 집앞에서의 이별후에 그녀가 맞이하게 되는 외로움과 고독이 싫다.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할 것만 같은 그들의 사랑에 더이상의 해답이 없는 것과 같은 나날이 이어진다.

그런 폴과 로제의 사랑에 긴장감과 같은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인 시몽이 나타났다. 그것도 그녀보다 14살이나 연하인 스물 다섯의 혈기왕성한 밀어붙임이 예고되는 시몽의 출현으로 인해 폴과 로제의 사랑이 여울목을 만나 어떻게 잘 헤쳐나갈지 작가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 에서도 보여준 대단한 심리묘사를 이 작품에서 또한 보여준다. 결코 24세에 출간한 작품이라 보여지지 않는 완숙함이 묻어나는 작품에서 습관적으로 익숙함에서 일탈처럼 꿈 꾸던 열정적인 사랑을 만나 방황하는 폴의 심리가 잘 들어나 있으면서도 익숙함과 새로운 급류처럼 닥친 열정적인 사랑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밀려 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익숙하면서 습관적으로 서로를 너무 잘 알고 그녀 자신이 그를 잘 알았던 사랑이 자신의 사랑이라며 택하게 되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고독하지 않고 외롭지 않으면서도 너무도 안정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폴의 심리가 잘 들어난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연상의 클라라 슈만을 좋아했던 브람스를 비유하여 소설의 제목을 붙인듯 하여 로맨틱을 한 줄 알았지만 로맨틱 보다는 어쩌면 사랑을 바라보는 냉철함이나 날카로움이 더 잘 들어난 작품인듯 하다.

'그녀는 소지품을 꼼꼼하게 정돈한 다음 침대 위에 앉았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오늘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속에서, 오랜 병이라도 앓은 것처럼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움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침대 속에서 그녀는 마치 누군가의 따듯한 옆구리를 만질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본능적으로 한쪽 팔을 뻥었고, 누군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이 큰 어려움은 고독과 외로움인듯 하다.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그녀가 밤마다 몸부림을 쳐 봐도 그녀는 늘 혼자다. 그런 그녀에게 따듯함을 전해줄 젊고 잘생긴 그녀에게 푹 빠진 시몽이 나타났다. 로제와의 긴 사랑의 레일위에 있는 그녀가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까 말까.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을 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시몽에게 가고 있다. 어쩌면 로제에게서 채우지 못했던 공허함을 시몽으로 대신 채우려 하듯 시몽에게 점점 마음을 주게 되는 폴, 시몽은 '그녀 나이의 여자에게 모성애를 불러일으키기에 꼭 알맞은 그런 부류의 청년이었다.' 어머니와 살고 있지만 어머니의 사랑보다는 자신을 감싸줄 사랑을 원했던 시몽은 그에게 맞는 완벽한 사랑이라도 찾은듯 그녀에게 집착을 한다. 그런 그의 눈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로제를 보게 되고 그는 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런 그가 폴에게 어는 날 '푸른 쪽지' 라는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폴은 그의 편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 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실패한 결혼생활과 긴장감 없는 사랑의 대상인 로제와의 사랑에 너무도 자신을 꼭 맞게 들여 놓고 자신의 여유를 잊고 살았던 그녀, 지금까지 자신을 찾기 보다는 남에게 길들여지며 살왔던 그녀가 시몽을 만난 이후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한다. 

시몽, 그 새로운 사랑이 자신의 나이 서른 아홉과 잘 맞기는 하는 것일까? 로제가 아닌 시몽과 연애를 하면서 남들의 시선에 자신감을 잃는 그녀,그녀에게 시몽은 너무 젊다. 하지만 폴에게 빠져 일도 팽개치고 술로 소일하는 시몽, 그런 사랑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시몽과 함께 하면서 늘 로제와의 사랑과 비교를 하는 그녀에겐 아직 로제를 잃지 못하고 한 곳에 가두어 두고 있다. 로제 또한 다른 여자를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지만 늘 마음속에는 잊혀지지 않는 존재 폴이 있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집 근처에서 배회해 보지만 그는 늘 하던 대로 서성이다 만다. 폴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책임져줄 무언가가 부족하다. 하지만 그도 자신에게는 폴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시몽이 나타난 이후로 그가 다른 사랑을 나눈 후로 더욱 절실하게 알아간다. 그렇다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야 할까. 그가 젊은 시몽에게서 다시 폴을 찾아 올 수 있을까.

사랑도 인생도 자신이 원하던 대로 잘 짜여진 계획표대로 움직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상인 클라라 슈만을 좋아했던 브람스가 그 사랑을 이루었다면 만약에 폴과 시몽의 사랑도 이루어졌을까. 폴을 시몽에게 빼앗긴 후 로제가 느꼈던 '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맛을 읽어버린 것이다.' 늘상 자신이 맛보던 일상적인 맛을 잃어버린 로제처럼 옆에 있을때는 폴의 의미와 가치가 보이지 않다가 남의 마음에 담겨지고 나니 그 의미와 가치가 비로소 진정으로 빛나는 것을 우린 삶에서 한두번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가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의 여운처럼 내가 정말 브람스를 좋아했던가, 모든 것을 잊고 자신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자신이 꾸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원하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잊고 살다가 갑자기 만난 질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에서 만난 자신의 뒷모습, 자신이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를 원하고 있기나 한가 로제와의 미래는? 로제라는 남자의 울타리에 갇혀 자신의 아름다움마져 잊고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 폴이 시몽이라는 젊은 남자를 만나 로제와의 사랑을 다시 되새겨 보면서 자신의 인생 또한 새롭게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되는 소설은 달콤한 사랑 속에서도 때론 냉철함을 가져야 함을 이야기 하듯 사랑에 대한 완숙함을 보여준다.

'나도 느끼고 있었어.당신이 더 이상 나를 참을 수 없어 한다는 걸 말이야. 사랑에서 무관심으로의 이행이 너무 빠르군, 안그래?' 라는 로제의 말처럼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이다. 이별이 아니라. 로제는 폴을 사랑하지만 늘 무관심 속에 두었다. 그런 자신이 폴에게서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자신의 현실을 비로소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폴의 무관심 속에서 늘 고독하고 외로움에 몸서리 쳐야 했던 폴에 비해 그는 늘 폴이 아닌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며 고독에서 헤어나 있었다.그런 그가 폴의 외로움을 알기엔 너무도 겨리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으로 부터 혼자 남겨졌을때 마주한 '무관심' 속에서 진짜 사랑을 찾게 된 로제, 그의 뒤늦은 후회로 폴을 시몽으로 부터 다시 찾게 되지만 그의 판이 박힌 생활과 습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로제는 저녁 8시 울린 전화벨 소리에서 그녀는 그 습관을 읽게 된다. '수화기를 들기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일탈을 꿈 꾸었던 사랑이 다시금 습관적이 사랑을 찾아가지만 그들의 사랑엔 변한 것이 없다. 시몽의 사랑을 맛보았던 그녀의 사랑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가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가 되어 자신의 일방통행적이었던 사랑 때문에 잊었던 혹은 잃어버렸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될까. 사랑을 믿기 보다는 열정을 택했던 그녀처럼 작품 속에서 또한 열정적으로 시작한 사랑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그 사랑에 길들여질 수도 있다는 사랑의 덧없음이 잘 나타나 있다. <슬픔이여, 안녕> 과 이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나니 그녀 '프랑수와즈 사강' 을 더 읽고 싶어졌다. 프랑스 문학의 '천재적인 작은 악마' 였던 사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는 말처럼 약물복용,도박등으로 자신을 철저히 파괴하려 했지만 그녀의 천재성은 작품 속에서 더욱 빛나는 듯 하다. 또 다른 작품에서 '사강' 그녀를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라산 편지 - 신의 정원 한라산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의 이야기!
오희삼 지음 / 터치아트 / 2009년 11월
절판


줄탁동시, 내가 요즘 큰딸과 나와의 교감이 줄탁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의 첫 글에 그 말이 나오니 더욱 맘에 들었다. ' 불가의 화두에 줄탁동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을 때, 때가 되면 알 속의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껍집을 쪼아댑니다. '줄' 소리지요. 이 소리를 들은 어미는 병아리가 쪼아대는 속껍질 바깥쪽을 동시에 쪼아줍니다. 바로 '탁啄' 입니다.줄과 탁이 엇갈리면 병아리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법이지요. '줄' 소리를 어미 닭이 듣지 못하면 병아리는 알 속에서 혼자 끙끙대다 지치겠고 '줄' 도 없는데 어미 닭이 강제로 '탁' 을 하면, 아직 여물지 않은 병아리가 성할 리 없겠지요. 줄과 탁의 교감이 없고서는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없는 법이지요.' 얼마나 멋진 말인가.서로 교감이 맞아야만 생명 또한 싹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어찌하다보니 아직 제주에 가보지 않았다. 제주여행을 몇 번 갔던 남편 때문에 그곳을 처음에 포기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내년이나 그 후에 큰딸의 대입이 끝나면 올레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계획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이 지난번 1박2일을 보면서 차를 가지고 배편으로 가는 방법이 있어 그 또한 운치가 있을 듯 하여 그렇게 한번 제주에 발을 내려 보자고 계획하고 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꿈이지만 그런 꿈을 가지고 있어 제주는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고 제주올레 이사장인 서명숙작가의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과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그리고 고혜경의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를 읽고나니 더욱 가고 싶은 곳이 다름아닌 '제주' 가 되었다. 올레길로 인하여 해외로 가던 관광객을 우리나라 그것도 너무도 아름다운 제주로 발길을 돌려 놓은 '올레길' 걷기여행은 그렇게 하여 전국적인 붐이 되고 여기저기에서 둘레길과 걷기 좋은 산책길을 내놓고 있으니 그 첫번째 올레길을 빨리 걸어봐야 할 듯 하다.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라는 책을 읽으면서 무척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제주사람도 아닌 충청도인인 그가 제주의 바람과 억새 오름에 반하여 그곳에서 루게릭병과 싸우며 이룩해 놓은 그만의 세계가 너무도 멋있어 남몰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읽었던 사진가 김영갑의 '두모악'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가고 싶은 곳이다. 그처럼 진짜 제주의 바람을 잡아 뷰파인더안에서 이상향인 '이어도' 를 잡아 낸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넘쳐나는 제주에 관한 책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제주적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게 할 정도로 넘쳐나는 제주와 제주올레길에 관한 책들 속에서 유독 눈에 들어 온 <한라산 편지> 는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일까 더욱 끌렸다. 제주의 토평에서 태어나고 항공대 산악부에 가입하여 암벽과 빙벽등반을 배운 그가 산악전문월간지에서 근무를 하다가 고향에 내려가 결국에는 한라산국립공원에 입사를 하여 15년동안 한라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만난 비경을 글과 사진으로 풀어 내놓으니 오죽 한라산이 오롯이 담겨 있을까.

치마폭에 감추어졌던 여인네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 보듯이 그가 보여주는 사진들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우리나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그와 함께 곁들여진 글들 또한 한라산 자연과 오랜시간 함께 하여서일까 맑고 아름다운 자연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으며 한라산의 모든 자연이 담겨 있는듯 하여 빨리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제주와 한라산 여행을 가지전에 한번 읽고 간다면 정말 좋을 책으로 보물과 같은 책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가 보여주는 한라산의 봄,여름,가을, 겨울은 정말 비경이면서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 내어 한라산의 사계를 눈 앞에서 그냥 보고 있는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고 김영갑 작가가 제주의 이상향인 이어도를 카메라에 담았다면 그는 순수한 자연을 담아 놓았다. 숨겨져 있던 한라산의 속살을 한 겹 한 겹 풀어내면서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눈길을 멈추게 하면서 순간 날숨을 멈추게 한다.

'봄의 여울목에서 휑한 숲 속에 잎도 없이 피어나는 생강나무의 샛노란 꽃망울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기다란 줄기 끝에 자주빛으로 터질듯 부풀어 오른 층층나무 겨울눈을 바라본 적 있으신지요. 익어가는 봄의 산길을 걸어갈 때 잠시 눈여겨볼 일입니다. 무심한 듯 서 있는 나목 깊은 곳에도 수직의 혈관을 역류하는 뜨거운 체온이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다가가 귀를 대고 가만히 만져볼 일입니다. 계절을 흘러가는 한 그루 나무의 애면글면한 삶의 얼굴이 한 사람의 생애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숲에 가면 나는 한번씩 나무의 겉껍질을 스다듬어 본다. 소나무 같은 경우 비늘처럼 한 겹 한 겹 떨어져 내리는 세월의 깊이를 쓰다듬다 보면 그 세월은 고스란히 내게로 오는 듯 하여 너무도 좋다. 굴참나무의 그 깊은 표피의 굴곡은 참나무의 무심한듯 한 질곡이 세월이 계곡을 이룬 듯 하여 얼굴을 가만히 대보기도 한다. 그런 나무에게도 '뜨거운 체온' 이 있다는 말이 공감간다. 봄을 알려주는 복수초가 눈 속에서 피어 오르면 꽃 둘레에는 눈이 녹아 있고 나무의 둘레에서 부터 눈이 녹기 시작이다. 그런것을 보면 무심한듯 한 식물이나 나무에게도 알게 모르게 저마다의 온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만의 감정 또한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 숲에 가면 더욱 자연에 귀 기울이고 맘을 열어 그들을 보아야 할 듯 하다.

그가 전해주는 꽃 이야기며 식물 이야기 그리고 봄에 가장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는 '두릅' 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나 또한 두릅나물이 좋다며 금방 새순이 나와 세상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을 톡 꺾었던 기억이 있다. 건강을 위해 무심하게 생명을 꺾었던 그 미안함을 책을 읽으며 살짝 놓아본다. 그런가 하면 제주의 거친 바람속에서만 자라는 '피뿌리풀' 의 그 오묘한 꽃이 사람들의 무책임함 속에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정말 서글프다. 그런데 사람들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한 생명이 어찌 피뿌리풀 뿐이겠는가. 그곳에 있어야 비로소 빛을 보는 것들을 사람들의 욕심에 집이나 그외 다른 곳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채취를 하여 그 생명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았는 무책임한 행동은 이젠 더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후손에게 남겨 주어야 할 자연의 보고와 같은 곳에 골프장이나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한번 더 깊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프로에선가 곶자왈이 개발되는 것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정말 대단한 곳인 그곳을 몇 몇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자연을 무시하고 개발하는 것은 후손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다. 지켜야 할 것과 보존해야 할 곳은 정말 지금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지켜주었으면 싶다. 어쩌면 다음 대에는 책의 글이나 사진에서나 만나거나 그렇게 되는 일이 없도록 지금이라도 좀더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책을 봤다.

내 눈길을 잡아 더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게 만든 꽃 '돌매화' 는 정말 눈을 의심하여 옆에 있는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다 자라도 2cm밖에 되지 않는 나무, 암매는 잎 또한 꽃처럼 겨울엔 붉은 빛으로 있다가 봄이 되면 초록으로 변하고 그곳에서 별이 빛나듯 다섯장의 하얀 꽃잎이 피어난다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주의 거센 바람도 이겨내고 바위의 거침도 이겨내는 것엔 키가 필요하지 않다. 바위에 달라붙듯 하여 자신의 모두를 들어내는 '돌매화' 야 말로 제주의 숨겨진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런 자연이 지켜지고 보존되어야 대대로 제주의 한라산을 찾게 되고 관광자원이 될터인데. 그가 전해주는 아름다운 꽃 중에 기생 꽃이라 할 수 있는 억새풀에 달라 붙어 광합성을 하여 억새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15cm의 연보랏빛 '야고' 는 처음 보기도 하지만 꽃도 이쁘다. 그런 꽃이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뚱하게 만드는 이런 생소함이 숨겨져 있어 한라산은 그야말로 야생화의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 너무도 여리어 손길만 닿아도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은, 억새의 보살핌이 없으면 차마 꽃 한 송이 피우지도 못할 들판의 고독한 나그네 야고野孤, 어쩌면 야고는 제주 들판이 품고 있는 외로운 유추프라카치아가 아닐는지요. 순결한 억새 들판 한 귀퉁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태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져가는 고독한 들판의 나그네는 아닐는지요. 가으르이 제주 들판에 선 그대, 억새수풀 사각대는 저물녁의 오름을 떠도는 나그네여, 오늘 그대의 유추프라카치아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풀어야할 야고는 누구입니까. 혹은 그대는 구누의 야고입니까.' 억새의 밑둥을 헤쳐보지 않는다면 만나지 못할 야고, 그런 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인데 꽃마져 아름다우니 어찌할꼬.

돌매화와 야고에 이어 또 한가지 귀한 것을 얻었다. 조릿대가 6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대나무가 60년만에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조릿대가 벼과의 식물로 꽃을 피운후에 말라 죽는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산행을 하며 많이 만났던 조릿대를 다시 보게 된다. 조릿대가 제주의 자연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릿대가 있어 산림도 보호하고 많은 동물들이 그에 의지를 하며 보금자리를 틀며 그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 그런가하면 어려운 시절 식량처럼 먹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에 산에서는 한가지 그냥 보아 넘기지 말아야 함을 느낀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그 몫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는 듯 하다. 그야말로 제주의 한라산에 자생을 하기에 더욱 빛을 보기는 것들, 그리고 그곳에 있기에 더욱 아름답고 보존되어야 하고 지켜 나가야 할 것들을 선명한 사진과 함께 하는 감동은 정말 크다. 한라산의 사계가 담긴 화보집을 보는 듯 하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진분홍빛 꽃과 함께 하는 노루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제주의 노루, 한때는 말성이 되기도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더욱 노루다운 녀석이 귀를 쫑긋 세우고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있는 사진은 오래도록 남을 듯 하다. 이 책을 모두 읽고나니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담겨져 있던 자연이 그의 사진속에서 거센 바람과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 책은 한라산의 사계가 보고 싶거나 제주 여행을 가기 전에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을 보고 싶을 때 보면 정말 좋을 책이다. 숨김없이 드러난 자연의 아름다움이 거짓없이 그의 뷰파인더 속에서 속살을 살짝 들어내고 무지개를 띄운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