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 육체파 지식노동자 김남훈이 만난 30인의 인생 필살기
김남훈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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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가끔 고민해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어디까지 행동하는 것이 과연 진정성의 범주에 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단지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 말하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고 주어진 것에 대한 비판역시 때로는 첨예한지라 고민은 시시때때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주어진 길을 아무생각없이 따라오다보니 제도가 주는 자격증을 토대로 사회에서의 한 역할을 도맡게 된 처지인지라, 뒤늦게 시작한 고민은 종종 소소한 자괴감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리고 현재의 나의 삶엔 진정성이 존재하고 있을까라는 고민에서는 일말의 괴리감과 소심함을 느끼곤 한다.  뭐 고민을 이어나감은 좋다 생각한다.  진정성이란 현재의 고민을 바탕으로 사고와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꾸어간다는 것이라 한다면, 난 지금의 나의 삶에 진정성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름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그 표정은 온실에서 편하고 귀하게 자라 살면서 인상을 쓸 일이 그닥 없었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밝음과는 조금 구분되는 면이 있다.  진정한 사람들의 밝은 표정에는 나름의 부지런함을 수반한다.  학회차 서울행에서 우연히 들른 이 책의 출간기념번개에서 만났던 김남훈씨나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모습은 그러했다.  자신의 삶에 나름의 진정성을 심어가며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 책에서도 여러 대목에서 보여주지만, 진정함을 지키기 위해 겪었던 어려움과 아팠던 과거나 현재는 살짝 건드리는 순간 그들 특유의 밝은 표정은 잠시 사라진다.  그러고는 마음을 조금 가다듬은 후 다시 표정을 추스린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쉽게 따라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특징일 것이다.


  잠시 만났던 그들을 그 순간에 다 알 수는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만났던 그들을 알게 되고,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그들을 거울삼아 비추어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드라마틱까지는 아니라도 나는 내 인생을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 김남훈씨가 나를 만나 인터뷰를 한다면, 나는 내 삶의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보고 생각하는 내 인생의 필살기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다시 되돌아가, 내 삶의 진정성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일련의 인터뷰집이 많이 발간되던 시기가 있었다.  깊이 있는 질문이 유도하는 풍성한 대답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의 꺼리와 깊이를 유도하는 작업이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마치 거울같은 느낌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진정성있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남으로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런 방식의 인터뷰는 정말 신선하다.  깊은 생각이나 깨달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는 죽을때까지 싸운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김남훈씨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로도 '남자의 진정한 삶'의 일부를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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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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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찌조직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아이히만의 마지막 유언이다.  뭐랄까..  뭔가 한없는 상투성밖에 느껴지지 않는 저 유언에 아이히만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아렌트도 어이가 없었는지 이 유언을 두고 '기괴한 어리석음'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어이없는 마음으로만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냉철하게도 그녀는 아이히만의 정신상태에 대해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대체 '기괴한 어리석음'과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통제함'은 어떻게 연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인가?


  아이히만의 재판이 알려지던 당시의 사람들은 아이히만의 모습을 악에 가득차거나 어떤 형태로든지의 신념으로 가득찬 인물로 상상하였던 듯 하다.  그에게서 잔인한 악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황당한 기분이 섞인 실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단지, 진술에서 어떤 신념이나 논리도 없이 가끔은 횡설수설도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나 다름없는 한 보편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념보다는 나찌장교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진급과 인간관계에 신경쓰며 기계적으로 일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유태인 이송과 학살이라는 관점에서 아이히만에게 그것은 단지 '업무'였으며, 그는 그의 주어진 위치에서 어떻게하면 '업무'가 효율적으로 진행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 '그가 저지른 범죄'의 전부였다.  따라서 그는 '업무의 효율을 고민'한 것이 '반인륜적인 범죄'로 치환되는 것에 상당한 불만과 저항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아이히만의 재판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법은 종전 15년 후의 전범들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데,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 도피한 상태에서 종전 15년이 지난 시점에 이스라엘 비밀경찰들이 납치를 해서 이스라엘로 압송했다는 데 첫번째 문제가 있었고, 두번째는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라는 의미에서 볼 때,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정이 아닌 국제사법재판소에 섰어야 한다는 논쟁이 두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아이히만을 국제적인 관심사로 끌어올리고 처형을 함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독일과 독일청년들에 대해 일말의 면죄부를 부여했다는 논쟁이 존재했다.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반인간적인 신념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주었던 가치판단의 혼란과 더불어 보았을 때, 아이히만과 관련된 수많은 움직임은 그 당시 관심만큼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시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의 역할로 인하여 수많은 인간이 이유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무념을 바탕으로 행하는 나의 일들이 타인에게는 심각하고 잔인한 해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지금의 세상에선 이젠 받아들이는 데 있어 어렵지 않은 개념이 되었지만, 사실 이는 인간사회의 역사속에서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존재했던 개념이 아니었던가.  사소한 악이 평범하게 존재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개념이 명확해졌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구조의 복잡함속에서 합리화라는 과정을 통해 이를 어쩔 수 없음으로 받아들인다.  평범성의 대상에 악 대신 무지를 대입시켜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음으로 처하게 되는 상태, 무지 말이다.  무지의 평범성은 힘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고, 그것은 선거를 포함한 '민주주의적 요건이라 일컬어지는 수많은 정치적 장치'에 의해 헤게모니를 거머쥔 특정집단을 위해 활용된다면 이 역시 누군가에겐 상당한 해악으로 작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만일 무지의 평범함을 이루는 대다수의 인민이라면, 즉 인민에 의해 인민 스스로의 발목을 부여잡는 형국이 된다면 '무지는 악'이라는 등식도 가능하지 않은가.


  아이히만을 평가하는 데 있어 '기괴한 어리석음'과 '완전한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통제함'을 연관짓는 하나의 단어는 '평범성'에 있다.  그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직접적으로 유태인을 죽인 일은 없지만 그의 판단과 행동으로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평범성에 악 대신 무지를 대입시킨 결과가 '무지는 악'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면, 그 사회는 작은 아이히만으로 가득한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한번쯤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나 스스로 '완전한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통제'한 모습에는 혹시 '기괴한 어리석음'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한다.  없다거나 발견하여 스스로 고쳐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온전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지금의 우리사회가 그런 형국이지는 않은가 잠시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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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료 -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
박재영 지음 / 청년의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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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념'을 가지려면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사회의 많은 현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의료 민영화라는 단어도 그렇다.  민영화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지금의 의료계에서 벌어지거나 의료계에 가해지는 변화들을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을텐데, 현재 병원의 이익추구활동이나 지금의 정부가 의료계에 가하는 압박들을 무조건 민영화라고 해석하는 건 오히려 '괴담'이라는 역비판을 불러일으키고만 있지 않은가.  이는 6년전의 촛불과 비슷한 면이 있다.  촛불은 당시 정부의 안하무인격 정책추진과 건강권의 침해에 대한 걱정이 사회 전반의 불안감과 접목되어 폭발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광우병에 대한 걱정과 소문에만 집착을 하였고, 그것은 결국 '괴담유포'라는 역공격을 받으며 언론을 장악한 정권이 촛불을 끄는 효과적 기제로 작용했었다.  우리는 비판과 싸움을 벌여나갈 때, 분명한 파악과 이해를 통한 개념을 가진 후에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분명한 이해든 개념이든 간에 이런 것들을 챙겨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뭔가 진중하고 심각한 현상에 직면해있다는 정황을 의미하는 것일테고, 그것은 지금 의료계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목처럼 우리는 병원에서 화가 난다.  그게 환자든 의사든 간에 병원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심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환자들의 불안감, 경제적 부담감, 불만, 그리고 의사들의 답답함, 불안함, 걱정, 짜증이 한데 뭉친 공간인 병원은 다시 바깥에서 흔들어대는 바람에 앞날이 그닥 밝아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본질적인 의료환경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민영화를 강력히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의료환경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그 안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본질적인 의료환경의 개선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급조된 모든 일들의 과정과 결과가 그닥 좋지 않듯, 한국의 의료보험도 그렇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급조되어 만들어진 의료보험은 시작부터가 엉성했던 데다가 적용대상 확대와 더불어 약속했던 수가인상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에는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먹고사는 일'에 그닥 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선배의사들의 과오도 한 몫했을 것이다.  결국 경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의료의 포화는 전체 의료시스템의 90% 이상을 민간의료가 책임지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무한의 경쟁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고, 근본적인 의료환경 개선 이전에 반드시 해야한다는 명목으로 의약분업을 추진한 일은 역할과 생존의 측면에서 의사들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료환경은 근본적 차원에서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의료의 포화상태와 무한경쟁체제의 사회는 서로 맞물려 의료의 역할을 사회적 근간보다는 각자의 생존과 몫에 시선을 두게 만들었다.  점점 한계적 상황으로 내몰리는 의료는 의협회장의 극단의 행동마저도 불사하게 만들 정도로 정부에 근본적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원격의료 운운하며 의료비 절감만을 생각하고 의료재단으로 하여금 온천이나 호텔같은 서비스산업에 손을 대게 함으로서 자본친화를 유도하면서 정말 필요한 수가인상이나 보험적용의 확대에는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의료는 이제 본질적 활동에의 고민을 떠나 자본의 톱니바퀴가 되어 수익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안에서 의사는 양심적 진료보다는 매출증진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가 되어간다.


  3.

  그래도 의료는 변화와 발전을 이어나간다.  의료의 변화는 기술발전의 속도와 더불어 무섭게 변화 중에 있다.  모바일 기기를 통해 내 몸의 이상을 측정하고 병원으로 전송하는 기술을 포함하여, 수술에 필요한 온갖 기구들의 성능과 효율은 개인적으로도 학회에 참석할때마다 그 변화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다.  몇년 전 참석한 로봇수술학회에서는 수술 중 동맥의 박동을 기계를 통하여 손에 감지할 수 있는 기술도 곧 선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만 듣고 있으면 우리는 기술과 기계를 통해 굳이 힘들여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날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의료는 손에서 손으로, 그리고 마주하는 시선을 통해 위로와 안정의 감각을 나누는 행위임을 점점 잊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동시에 의료기술의 발전은 자본과 자원에 의존하는 것인 만큼, 우리는 필요하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청진기가 사라지는 일은 놀라운 일이지만, 다시 청진기를 사용해야만 할 때, 우리는 이전만큼의 감각으로 진료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  시선을 마주함으로 느낄 수 있던 환자의 외양적 변화 그리고 위안과 믿음을, 모니터를 통해 마주함으로서 그만큼의 공감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무언가에 의존해야하는 발전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은 그만큼 자기 본연의 확신과 믿음을 전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4.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의 의료의 과실에 대처하는 입장과 자세에의 조언이었다.  딱딱한 법을 사이에 두고 말을 최소한으로 아껴가며 고압적이고 긴장한 자세로 문제를 대하는 것이 기존의 통상적인 모습이었다면, 좀 더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눔으로서 부드럽고 원활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불확실성이 어디에서나 만연하는 의료라는 영역에서 의사와 환자가 이를 뛰어넘은 원만한 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현상이다.  대화는 어디에서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문제해결법이라는 사실은 의료라는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의 장점은 의료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모든 현상의 이면과 본질의 파악에 있어 상당한 객관적 견지를 유지한다는 데 있다.  때로는 제 3자적 시선을 고집함으로서 객관적 판단을 매우 공고화하는데, 이는 의사의 입장에서도 현상을 정확히 판단하는데 매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의료라는 영역은 매우 복잡하고 시작과 진행이 체계적이지 못한 점이 커서, 객관적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데도 분명한 해결책이나 생각해볼 수 있는 해결책은 그닥 많아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에서 좀 아쉬운 점이라면, 한국의료체계에서 대한병원협회라는 존재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심평원이라는 기관의 역할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 없다는 점이었다.  의료라는 환경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봉직의라는 입장에서 이 두 집단은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부분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 아쉬움은 좀 크게 다가왔다. 


  이 책의 내용은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아서 누구나 읽어도 현재 의료의 상황을 매우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동시에 복잡한 구조들을 쉽게 설명해놓아 의사이면서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의료의 세부적인 모습들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책을 통해 타인으로서의 의사와 자신으로서의 의사, 그리고 의료의 본질적 모습을 누구나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회적 역할에 있어 오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여전한 터에 다시한 번 반가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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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바
노순택 지음 / 류가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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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지 7년이 되어간다.  이제 해가 바뀌면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나이..  무거워지고 훌쩍 키가 커지고 말을 또박또박하는 모습을 보면 언제 저렇게 커버렸나 싶을 때가 자주 있다.  어릴적의 귀엽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건 조금 아쉽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힘을 키우고 몸을 열심히 관리한다 하더라도 아이 어릴적에 태워주던 무등이나 두부사려 놀이나 안고 휙휙 돌리며 몸으로 놀아주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키가 더 커지고 자기생각이 강해지면 아이는 말이나 힘으로 통제하기는 더욱 힘들어지리라.  아이는 성장중이다. 


  아이는 성장했을까?  아이는 성장중이지만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직 까마득하다.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니면 그 이후의 취업까지 뒷바라지할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를 지겹게 만들고 때로는 비루하게 만드는 지금의 일을 과감하게 때려치울 수도 없다.  이제부터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가족이라는 혈연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감성이나 정감을 제외한다면 돈과의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힘과 생각은 부모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부모는 여전히 아이에게 미래를 알 수 없는 투자를 해야만 한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아이는 부모에게서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지만, 인간의 세상에서 아이의 독립은 여전히 섵부르고 위험해보인다.  자신의 후손을 생산해낼 수 있는 나이인 10대 중반을 대략 생물학적 독립시기로 설정해놓고 생각해보면, 20년 이상을 부모에게 의존하는 지금의 인간의 '퇴화된 능력'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도 있어보인다.


  부모의 보호와 물질적 지원을 받아가며 성장하는 아이는 행복할까?  힘과 생각이 부모를 넘어선 아이가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순간 부담과 죄송으로 바뀐다.  사회에 대한 적응과정을 충실하게 따르고 배워왔건만, 자신이 인간의 세상에서 독립된 주체로 온전히 서기에는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  설령 간신히 서더라도, 세상의 불안감은 다시 부모에게 시선을 향하게 만든다.  이미 등골이 빠지도록 일하느라 늙어버린 부모의 모습은 자신에게 그닥 도움이 될 것같지 않지만, 바라볼 곳은 부모말고는 마땅한 곳이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자식을 낳으면 잘 키워낼 수 있을까..  내 자식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지다보면 자식을 낳는 일에 대해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식은 많이 낳을수록 좋고 형제는 많을수록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간다지만, 당장에 내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잘 키워지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두려움으로 가슴에 박힌다.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해놓지 않는다면 힘들어질 것이 분명한 노후가 걱정이 되는 나라, 워커홀릭이라는 단어가 남한이라는 국가를 표현하는 세계적 인식으로 자리잡은 나라, 청소년 대학생 중고등학생 전반에서 자살률이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나라,  출산률은 세계 최저의 수준을 유지하는 나라..  이것이 위에서 말한 부모와 자식간의 피하지 못할 고민과 갈등의 결과물이자 역으로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온통 아이를 업고 있는 사진으로 가득채워진 이 화보집을 넘기고 있자면, 업혀있는 아이가 마냥 귀엽지만 않고, 아이를 업은 부모의 팔과 어깨는 그닥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업힌 아이의 엉덩이는 왠지 피로해보이고, 피로해보이는 엉덩이를 들춘 부모의 팔에선 버티는 힘이 느껴진다.  업힌 아이는 그대로 점점 자라는 듯 하고, 자라는 아이를 업은 부모는 점점 상체가 앞으로 기우는 듯 하다.  사진이 포착한 그 순간은 업힌 아이의 졸림과 업은 부모의 돌봄사이에 교감의 행복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연속에서, 작가가 서문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조금은 어둡고 무겁게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고 느끼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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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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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시작했던 이유는 그저 글을 쓰고 싶었다는 마음때문이었다.  낙서장으로 시작한 블로그는 어느 순간 사진이 없으면 가시성이나 내용이 단조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고,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은 이후부터 블로그 포스팅을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사실 포스팅을 위해 사진을 찍는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게 되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피사체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보낼 사진이 아니라면, 포스팅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사진들엔 조금 소홀해지고 있었다.  여튼 나의 블로그 활동에 사진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이엔드 레벨의 사진기로 특별한 조작기술없이 장면설정을 통한 연출만으로 찍어올리는 사진이지만, 주제를 설정한 사진들은 희미하지만 나름의 특징이나 분위기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 블로그에서 사진이 일순위로 중요해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글쓰기를 일차적으로 고민하며 블로그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사진은 다만, 글을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서 글과 함께 게재된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다짐한 것은, 사진을 설명하기 위해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키기 매우 힘든 다짐이었다.  어떤 포스팅이나 특정 카테고리의 글들은 어쩔 수 없거나, 떠오르지 않는 글을 억지로 써야 하거나, 무의식중에 저절로 사진을 설명하는 글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의 다짐과 비교해보면 그런 포스팅은 조금 부끄러운 글들이 되어버렸는데, 뒤돌아보는 나의 블로그에서 그런 포스팅들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걸 보면 나도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저자도 앞에서 밝혔듯이 서로 상보적으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끌어주는 글과 사진의 관계는 나의 블로그에서도 추구하는 정말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글의 내용과 사진의 모습이 뭔가 어울리지 않더라도, 종국에서는 왜 이 글과 사진이 어울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깨달음을 주는, 그런 포스팅으로 내 블로그를 채워나가고 싶다.  그리고 그런 글과 사진이 깨달음 이후에 주는 마음의 울림까지 만들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나는 블로거로서 더할나위없는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과 바램을 가진 나는 이 책을 엮어낸 저자가 무척 부러워질 수 밖에 없다.


  글을 읽다가 사진을 보면 때로는 왜 이 사진인가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또는 사진먼저 보다가 글을 읽으면 좀 생뚱맞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종국에서는 왜 그 사진인가 또는 그런 글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을 은근하게 후비며 배지근한 열감을 자아내는 섬세함 또는 깊이가 느껴진다.  저자는 사진작가인가 아니면 글쓰는 이인가 싶을 정도로 글과 사진의 조합은 정말 애틋하다.  그것이 시대를 공감해온 근저의 시사성있는 주제이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날선 칼로 베기보다는 둔중한 누르개로 지긋한 힘으로 눌러 배어나오는 진액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여튼, 사진과 글의 조합이 보여주는 어울림과 차분함은 블로거인 나에게도 무척 인상적이며 본받고 싶은 작업이자 능력이다.  그런 깊이는 어디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진의 기술을 터득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으나, 글의 깊이와 글과 사진의 애틋한 조합은 욕심부려보고 싶은 요소이다.  단편의 나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장을 덮고나서도 이어지는 어떤 여운은 쉽게 넘어볼 수 없는 높이임을 직감하기에 나의 욕심은 아직 오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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