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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단아하게 땋아내린 머리를 가진 표지- 왠지 숨막히는 듯한 고전미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왠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펄벅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오랜시간을 기다려 맺어지는 한 연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뒤에 숨겨진 또다른 한 여인의 기다림-
그는 머릿 속이 텅 빈듯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질문 자체가 끔찍했다. 그 긴 세월동안 자신이 기다린 것은 안 좋은 결과였다는 소리니까.
군의관인 쿵린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고향에서 수위를 신부로 맞이한다. 그 둘은 딸을 낳지만, 쿵린은 근무지에 따라 같이 살지 않고, 약 18년간의 별거가 시작된다. 그러던 와중, 쿵린은 간호사 우만나와 사랑에 빠지고,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18년이란 세월을 기다리게 된다. 그동안 수도 없이 이혼을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결국 배우자의 동의없이도 이혼을 할 수 있는 18년이 지나고, 쿵린은 만나와 결혼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긴 기다림의 끝은 의외의 결과였다.
이 책은 쿵린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웠던 사람은 우만나와 수위였다. 수위는 내가 알고 있는 대지의 오란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 호감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그 둘은 모두 한 남자로 인해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을 감내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결국 한 남자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고, 기다림의 끝이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쿵린은 너무 나약해 보였다. 기다림이 지속되는 내내 그의 행동도, 기다림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책은 정말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이야기를 참 담담하게 풀어나갔다. 쿵린의 나약함이 종종 드러나긴 했지만, 화자는 균형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의 문체가 무척 인정받고 유명하다던데, 그의 다른 작품은 원서로 읽고픈 욕심이 든다.
기다림이란 제목부터 왠지 질겁하여 마음이 질질 늘어지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그들의 마음과는 달리 책은 금세 읽혔다. 다만, 그들의 기다림의 끝이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그 결과가 쿵린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사랑을, 더 나은 직장을, 좀 더 많은 돈을, 여유를 찾고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 결과는 과정보다 우선시 되지만, 그들의 기다림 역시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며 씁쓸함을 털어버린다.
그 세월동안 너는 몽유병자처럼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한거야.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가면서 말이야. 외부의 압력에, 너만의 환상에, 스스로 내면화한 규정에 끌려가면서 좌절과 수동적인 태도때문에 너는 잘못된 길로 간거야. 자기한테 허용되지 않은 일이야말로 마음 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