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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만찬 - 공선옥 음식 산문집
공선옥 지음 / 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올리브 기름이 반지르르한 스파게티, 입에 넣으면 스르르 녹는 티라미스 케이크, 그렇게 고급 재료일 수 없다는 샥스핀... 어느덧 우리나라에서는 못 먹을 음식이 없어졌다. 아무래도 생활 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거겠거니 싶다. 나 역시 매일되는 야근에 저녁은 집에서 먹을 때보다 오히려 잘 먹지 않나 싶다. 베트남 쌀국수, 갈비, 스파게티 등등. 오히려 혼자 살기에 집에서 먹는 찬은 조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엄마가 고추장과 남은 나물 싹싹 긁어서 비벼준 비빔밥보다 못한 이유는 무얼까? 우아하게 칼질을 하다가도 문득 손으로 찢어먹는 김치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행복한 만찬'은 소박하지만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음식들을 다룬다. 호박, 봄나물, 시래기, 계란... 요즘은 안먹는 사람도 있는 추어탕까지. 흔하디 흔한 음식 재료들로 이루어진 만찬은 그 어느 만찬보다 '행복하다'.
나는 토란탕을 좀 많이 끓여 냉장고에 넣어두고 속이 출출할 때 한 그릇씩 퍼서 데워 먹는 정도까지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한밤중에 간식으로 먹는 토란탕은 내 출출한 속을 채우며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향기로 내 근원적 외로움까지 위로해주는 것 같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니라 헛헛한 마음까지 채워주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팍팍한 현대 삶 속에서 비만, 거식증과 같은 식이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내놓는 사람들을 보면, 먹는 것은 단순히 기본적인 욕구가 아닌 무언가 더 있구나 싶다. '행복한 만찬'에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음식이 주는 행복감을 일깨워 준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즐거웠고, 괜히 서러웠던 시절. 남의 집이 내 집이었고, 내 집이 남의 집이었듯 왔다갔다 하던 시절. 물질적으로 풍부한 현재를 살고 있는 나보다 조금은 부족하게 살았던 저자가 그리고 저자의 밥상이 부러운건 왜일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토지를 물려받지 못한 가난한 할아버지의 작은아들의 딸이다, 작은집 애다. 작은집들은 추어탕을 별로 안 끓여 먹는다. 더구나 딸만 있는 작은집이니. 추어탕은 아들 많은 큰집들에서 끓인다. 가을 저녁이면 세상의 큰집들은 아들들이 잡아온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이느라고 부산하다. 큰어머이 기다려요, 선옥이가 가서 불 때드릴게요오!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빛깔과 맛을 자랑하는 도너츠보다, 어렸을 적 엄마가 해주었던 촌스런 튀김 도너츠가 먹고 싶어지고, 이름도 어려운 뉴욕의 달걀 요리보다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먹는 삶은 달걀이 그리워진다. '행복한 만찬'이 행복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음식에 속속들이 숨겨진 작가의 추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분명,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만의 '행복한 만찬'을 차릴 수 있는 음식이 있지 않을까?
정년퇴임을 앞두시고 아빠가 작은 밭을 일구기 시작하셨다. 종종 부모님 집에 가면 아무것도 안 나있던 밭에 호박이 싹을 틔우고, 고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엉터리지만, 땅콩밭의 김을 매고, 낑낑거리며 물을 주고선 서울로 돌아온다. 매번 내려갈 때마다 밭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기대된다. 지난번에는 쑥갓과 상추를 뜯어 쓱쓱 밥한그릇을 뚝딱했다. 이번 주말, 다시 부모님 집으로 향할 예정이다. 이번 주말에는 또 어떤 메뉴가 나만의 '행복한 만찬' 추가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