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그의 이름이 좋다.

약간 모자란 듯 하면서 동시에 엄격하기도 한, 남성적이면서도 리듬이 있는.

병렬에서 약간 틀어진 자신만의 순서와 각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이런 편애는 내 아이의 이름에 '율'자 한 번 넣어보려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움과 지난번에 읽은 그의 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말의 낭만을 떨쳐버리지 못한 때문이겠다.

 

여행중에 토끼를 기르고, 남의 개를 산책시키며 파리에 머무르고,

그의 낡은 운동화를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를 가졌던 사람.

여행을 하고, 그러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것이 책이 되는 일을 완료시킨 사람.

주로 여행서를 출판하는 출판사의 대표인 사람.

너무 자유인같아 보여서 동경하게 되는 사람.

 

발로 찾아가서 발더러 글을 쓰라고 종용하는 여행산문집의 묘미는

낯선 곳에서 가면 도대체 어떤 내가 발견될까 하는 질문을 대신 던져주는 데 있지 않을까한다.

고생스러움은 작가가 지고 깨달음과 잔잔한 감동은 독자의 몫으로 친절하게 던져주니 관람과 체험을 동시에 맛보는 즐거움이 있다. 계획대로 현대인을 위한 알뜰모듬상품이 되어준다.

 

이 책은 목차도 없고 페이지도 없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 곳을 찾으려면 작은 여행을 해야한다.

제목과 내용과 사진을.

의도적이었을거다.

페이지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작가의 추억도 그렇겠거니와

여행이란 예상대로 딱 맞아떨어지는 법도 흔하지 않으니 이해하기로 한다.

조금 고약하지만 명민하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면 그런 수고쯤은 일도 아니다.

 

*

어느 저녁 식당의 이별

 

사카모토라는 청년이 중국 계림일대를 여행하다 물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여인을 보았단다.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이상할 정도로 깊고 신비한 눈에 매료되어 수학자라고 소개하는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제의했고 그녀는 흔쾌히 오케이 했으며 연인이 가질 수 있는 다정한 시간을 보냈으나

식사가 끝나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배가 고파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자신은 수학자가 아니라며 유유히 식당을 걸어 나갔고, 후일 선배의 사진여행에 동승했었던 그 여행에서 돌아와 전시회를 도와주러 갔다가 한 사진을 보고 주저앉았단다.

그 사진에는 배고프다던 그 여자가 물가에서 카메라를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기에.

 

비한 눈은 다른 말로 하면 난 언제든 당신을 속일 수 있어요 하는 눈이다.

남자의 젖은 눈을 조심하듯 여자의 신비한 눈도 조심해야하리라.

눈을 무기로 삼을 줄 아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표정의 변화가 다양하고 눈빛의 변화가 계산적인 사람, 미소를 거둘 시간인데도 여전히 걸치고 있는 사람,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눈이 무기인 사람.

언제고 한번쯤은 속게 되지 않나.

이미 속아본 경험이 젊은 시절 빽빽하다.

 

*

리가에서의 금식일기

 

그가 서른 네 시간을 먹지 않으며 내린 금식의 정의는 이랬다.

금식 : 나를 여행할 때 준비하는 진지한 도시락

 

마흔 여덟 시간만 채우고 뭣좀 먹자했는데 마흔 시간 이십 여 분이 경과했을 무렵,

새벽 네 시에 문득 깨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부피가 줄어든 몸을 본다.

얼른 거울을 본다. 이제 겨우 시인의 얼굴이 되었군.

 

*

한 사람 때문에 힘이 다 빠져나갔을 때

 

한 달 동안 터키여행을 다녀오겠노라는 후배에게 그는 여행이 지루하면 미련 없이 그리스로 건너가 섬 남자가 건네 오는 말을 피하지 말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기회가 되면 사랑까지 하라고했다. 그렇게 되면 아예 돌아오지 말라는 인사를 덧붙여서.

그 여자후배의 귀환은 늦어졌고 돌아온 어느 날 다시 그리스로 가겠다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도 한 달짜리 항공권을 끊은 건 아니지? 마음 내키는 대로 많이 저지르고 와,

나중에 후회없을 정도로. 알았나?”

이 위험한 충고자 같으니라고.

 

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 부른다.

 

 

 

 

장을 열었을 때 같은 색깔과 모양의 옷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주로 쥐색, 인디고 블루, 그리고 블랙.

문득 내가 여태껏 좋아했던 사람들도 동색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이 그리 젊어보이지는 않지만 매력적이다.

나는 혼자인 것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어요 하는 눈동자를 숨기고 있는 듯한 저 여인의 눈.

창에 비치는 자동차의 모습은 그녀가 건성으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다는 시선을 갖게한다.

더불어 겹치면 다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가슴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오묘한 세계가 앉아있다.

 

반 이상을 잘라주면 나의 성질은 사라지지요, 하는 도마와 빵의 조화는 어떤가.

적어도 반은 고수할 수 있을 때 나머지 반을 회복시킬 수 있다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라진 반쪽 부분엔 부스러기만 남아있어서

사랑을 하고 남은, 열정을 다해 보내고 난 삶의 재같이 느껴진다.

 

저 빵의 나머지 반쪽 공간에서는 마치 빵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들이 자라날 것만 같다.

혹시 붉은 꽃이, 혹은 파란 하늘만을 담는 거울이, 빨리 닦아내야한다며 향기로운 비누가.

나는 그리스로 날아갔던 이 작가의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반은 꼭 남겨두고 사랑하세요.

선배와 등을 지게 되는 충고일지라도.

 

빵과 푸른 사과.

그들이 가진 절단면을 본다.

다른 성질이지만 음식이라는 동족애로 서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왜 무엇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긴장감이 지닌 거리와 공기가 더 즐거운 걸까.  칼이 있는 이 사진이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남루한 속옷, 수영장에서의 급작스런 쓰러짐, 눈부신 장미 정원.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안고 있던 노인의 이야기.

이른 아침 남자가 깰까봐 분무기로 물을 뿌려가며 신문지를 넘기는 여자의 이야기,

식당에서 일할 때 커다란 나방을 바람의 방향으로만 쫓아 낸 작가의 이야기.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히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에게 여행의 시작은 살면서 치르게 되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피해서였다고 하는데 후일에, 사랑은 여행이라고,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 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이라 고백한다.

나는 후일 여행에 대해 무어라 말하게 될 지 책상에 앉아 마음으로 쐐앵 달리며 눈알만 무심히 또로록 굴리고 있다.

 

곰국 끓여놨어. 한 달동안 나 기다리지마.

내 평생 이런 말 할 일도 없겠지만,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가봐야할 곳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으니.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골짜기의 백합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은 요즘 길게 붙들고 읽었던 사랑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께요.

이 책이 서간체이기 때문일까요?

저도 긴 편지를 쓰듯 이야기 하고 싶어져서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어요.

노래하듯 미끄러지는 예쁜 접미사를 가져보고 싶어서요.

그럼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젊은이의 사랑얘기를 시작해볼게요.

 

주인공 펠릭스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기를 거친 스무 살의 청년이예요.

게다가 발육도 부진해서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약해보입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골고루 나누어지는 사랑이 왜 나에게는 흐르지 못할까,

혼자 울어도 보고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도 써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인색함과 냉랭한 눈초리뿐.

그러던 그가 한 무도회에 참가하게 돼요.

이 무도회는 앙굴렘 공작이 루이 18세를 만나러 파리로 상경하는 도중 통과하는 도시마다 개최되는 환영식 중의 하나랍니다. 거기에서 펠릭스는 평생 사랑하게 될 여인 모르소프 백작부인을 만나게 되는 거지요.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 옆으로 빛과 향기를 동시에 가진 여인이 와서 앉습니다.

 

자신의 안에 그런 본능이 숨어있는 줄 몰랐을 그는 홍조를 띤 희고 관능적인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지요.

요즘 같았으면 전자발찌 찰 행동일텐데 부인은 다행히(?) '별 거지같은 놈 다 보겠네' 하는 분노가 섞인 눈길만 주고는 사라져버리는데 그 부인은 아름다운 등 뿐만 아니라 그 등에 걸맞은 가슴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더욱 들뜨게 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맞닥뜨렸을 때 백작부인은 이렇게 얘기했지요.

“제가 최초로, 마지막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당한 치욕이었어요.

그 무도회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마세요!“

그러나 먼 후일 백작부인은 이 날의 일을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해요.

‘비록 두 아이의 어머니였지만 사랑이 허락하는 쾌락을 경험한 적이 없었어요.(...)

당신의 입맞춤은 내 삶을 지배했고, 내 영혼에 긴 자국을 냈습니다.

당신의 열정적인 피는 내 핏속에 열정을 깨웠고,

당신의 젊음은 내 젊음 속으로 침투하였으며, 당신의 욕망은 내 가슴속에 파고 들었지요.’

여인의 진심이란 당시엔 깨닫지 못하는 것일는지, 아니면 변하는 것일는지.

 

언뜻 그렇고그런 불륜이야기가 전개 되겠구나 생각하시겠지만

오늘 아침 전 눈물과 콧물을 닦은 휴지로 산 하나를 만들었더랬습니다.

발자크씨의 부드럽고도 시적인 묘사, 죽음을 꿰뚫는 웅장한 진리에 말이지요.

아이고, 내 정신.

더러운 콧물이야기는 그만 두고 계속 이야기를 할께요.

 

무도회가 끝난 후 사랑의 열병에 사로잡힌 펠릭스는 그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지요.

그렇게 그녀를 위한 순례를 하던 중 한 골짜기를 발견해요.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모든 여성 중의 꽃인 그 여인이 세상 어디선가 살고 있다면 바로 이곳일 테지!’

정말 그 곳 <클로슈구르드>라고 불리는 집에 그녀가 살고 있었고 이 무모한 청년의 방문에

그녀는 놀랐지만 예를 갖추어 손님으로 맞습니다.

그녀의 남편 모르소프백작은 나름 명문가문의 사람이었지만 펠릭스가 보기엔 그저 노인에 가까웠습니다. 망명의 고약한 세월을 보낸 사람답게 지치고 집착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녀에겐 생명의 위협을 받을만큼 약한 딸 마들렌과 허약한 아들 자크가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나름 뼈대있는 집안의 청년 펠릭스를 별 경계심없이 받아들여줍니다.

 

오로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 이 골짜기에 찾아든 청년 펠릭스와

그 사랑을 알면서도 거부하지는 않는,

오히려 아들처럼 여기겠다며 펠릭스를 더욱 깊이 사랑한 모르소프백작부인.

그들이 거니는 정원, 근교의 산책길은 영혼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삶의 충고와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사랑의 암시적 고백들로 가득찹니다. 그러다 아들 셋을 연달아 잃고 태어났던 백작부인의 외로웠던 유년시절과 펠릭스의 우울했던 유년이 조우합니다.

"우리는 똑같은 유아기를 거쳤군요"

그리고 백작부인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사랑을 부어주었던 숙모가 불렀던 이름,

앙리에트를 펠릭스에게만 허락하지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면 됩니까?”

“숙모가 나를 사랑했듯이요.”

믿을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모성에의 그리움이 서로를 향해 깊은 사랑의 골짜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나봐요. 아니면 모성으로 포장한 욕망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펠릭스에게 그녀를 흔드는 열정적인 말투를 철저히 금했고

내가 손을 내밀 때만 잡으라는 등 엄격한 선과 규칙으로 거리를 둡니다.

 

정신착란증을 앓고 있는 백작은 오랜 시간 어르고 달래야 수그러들며

사소한 잘못도 핑계삼아 부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지요.

더구나 허약한 아이들은 교대로 뼈가 녹는 간호를 필요로 했어요.

그녀의 고단하고 희생적인 삶을 엿본 펠릭스는 그녀를 더욱 숭상합니다.

 

달이 밝은 밤, 펠릭스는 그녀의 눈물을 영성체로 받아 마심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저는 지금 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성혈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교감하듯이 부인의 영혼과 결합했습니다. 가망없는 사랑도 행복입니다."

(흠, 세상에! 입술에 바른 꿀이여, 정신에 바른 아편이여!)

하지만 그녀는 그를 파리로 보내 그 곳에서 출세해야한다고 합니다.

파리로 떠나는 그에게 쓴 그녀의 편지는 얼마나 지혜의 말로 가득 차있던지.

 

예절은 진정한 자비처럼, 실제로 자신을 희생하는 데 있습니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은 헛된 희망을 전혀 주지 말고 단호하게 거절하세요. (...)

세련된 예절과 아름다운 매너는 마음속에서, 개인적인 자존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니까요.

사회는 어머니라기보다는 계모이기 때문에,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자식들을 편애합니다. (...)

당신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받지 말아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요. (...)

젊은 여자들을 비웃고 하찮게 여겨도 됩니다. 그녀들은 진지한 생각을 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아마도 다음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을까요.

 

아, 당신을 사랑할 여인은 고독할 것입니다. 그녀에게 가장 화려한 축제는 당신의 시선일 것이고, 또 그녀는 당신의 말들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겠지요. 그 여인은 당신에게 세상 전체가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녀의 모든 것일 테니까요. 그녀를 많이 사랑해줘요.

 

파리로 진출한 펠릭스는 자신의 숭고한 사랑을 시기하는 영국후작부인 아라벨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내가 모르소프 부인처럼 사랑받는다면, 당신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겠어요.(...)

항상 당신의 친구로 남을게요. 그리고 당신이 원할 때 연인이 되어 드리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사교계에서 그들의 사랑을 이렇게 비웃었다지요.

“한 쌍의 어린 비둘기처럼 한숨짓는 저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지겹군요.”

 

아라벨과 앙리에트를 비교하자면 동양과 서양의 차이.

하나는 아주 작은 물기도 먹이로 삼기 위해 빨아 들이려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마음을 내뿜고 측근들을 빛으로 감씨준다.

한 명은 날렵하고 가늘고, 다른 한 명은 느리고 풍만하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여인을 비교하며 영국의 경박스러움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질의 모든 부분을 개량하여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물질의 쾌락 속으로 빠져드는 정신의 세계를,

기계로 빠져드는 그들의 삶을 비난합니다.

사랑을 맹세하며 자신을 버린다면 곧 죽어버리겠다고 펠릭스의 목을 교묘히 조르던 그녀였지만

앙리에트의 장례를 치르고 온 그가 그들이 생활하던 거실에서 대면한 것은 더들리 백작과 자녀들.

그가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어느 것을 배신이라고 말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배신 당한 것이지요.

그것이 영국식 사랑의 종말일까요.

정열과 가면, 두 개를 번갈아 쓰던 여인, 더들리와는 그렇게 끝나게 되지요.

 

聖을 선택한 여인의 사랑의 방식은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던지

금욕의 고단한 내적 싸움으로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질 만큼의 고통을 지나

레이디 더들리와의 염문을 듣고는 질투심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상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서야했던 여인 앙리에트.

性을 선택하여 펠릭스의 육체를 화려하게 정복했으나 다만 물질의 형태로 남은 여인 아라벨.

누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누가 더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라벨식 사랑과 앙리에트식 사랑사이에서 오늘도 많은 여인들이 죽은 사랑을 위하여는 애도를,

탄생하는 사랑을 위해서는 기도를 하고 있겠지요.

 

아라벨과 욕정과 환희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엔 성녀 앙리에트를 위하여 울 수 밖에 없었던 펠릭스.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졌지만 그 어느 것도 가질 수 없었던 그의 사랑은 울면서도 웃었던 것인지. 그래서 펠릭스는 이기심을 발휘하여 이 편지의 수취인인 나탈리에게 앙리에트와 아라벨을 겸비한 또 하나의 여인상을 주문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앙리에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펠릭스는 한 걸음에 클로슈구드르로 달려갑니다.

마지막까지 여인의 모습이고 싶어서 그를 기다리게 한 후 하인들에게 꽃으로 벽난로를 장식하게 하고 흰드레스로 갈아입고는 소파에 앉아서 펠릭스를 맞아요.

꽃향기가 너무 그녀의 사랑의 꿈을 자극했는지 죽음 앞에 선 사람답지 않게 앙리에트는 말해요.

 

나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어요. 꿈같은 계획을 세웠죠.

저 사람들은 클로슈구르드에 남겨놓고 우리는 함께 이탈리아로 떠납시다.(...)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어요. 여태껏 내 삶에서 모든 것이 거짓이었어요. (...)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내가 죽다니, 말이 되나요?

애인을 들판으로 마중 나가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죽나요?“

 

정말 사랑해보고 싶어서 살고 싶다던 그녀의 삶 앞에 정말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돼요.

사랑은 삶의 수단인지, 목적인지.

 

얼마 후 종부성사를 마친 그녀는 다시 평정을 되찾게 돼요.

마땅히 쏟아야 할 정성을 다른 데로 쏟아 소홀히 했던 것에 대해 백작에게 용서를 구해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고, 순종적인 아내였고, 순결을 더럽히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 속에서 살 거란다.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앙리에트의 고귀한 영혼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던지요.

그녀가 죽음을 맞이한 후,

장례식을 준비하며 모두 지쳐 잠들어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펠릭스는 그녀가 생전에 표현하지 못하게 했던 사랑 전부를 담아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어요.

 

그녀의 죽음은 온 골짜기가 애도를 했지요.

근방에서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베풀었던 선행으로 그녀의 장례식은 소박했지만 성대했어요. 그녀가 죽음을 대면하는 장면을 읽는 것만으로 영성이 깊어졌다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 장면은 내 주변의 한 뼘을 위하는 기도보다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나만이 이 무명의 위대한 여인의 삶을 알고, 오직 나만이 그녀의 감정들을 기억하고,

오직 나만이 그녀의 영혼의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편도, 자녀들도 그녀를 완전히 알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정혜윤은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라는 책에서 앙리에트와 펠릭스의 사랑을 <

골짜기식 사랑>이라고 부르며 ‘한 사람만을 위한 역사가’라는 제목을 통해 소개했어요.

'한 사람만을 위한 역사가'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타이틀이었는데 그것을 얻기 위한 댓가가 죽음이라면 그 역사가는 애시당초 포기해야하겠지요.

이 골짜기식 사랑을 수용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한 번 헤아려 보았네요.

없으니까 문학의 이름으로 버젓이 여태 살아있는 것이겠지요?

 

문득 창밖을 보았어요.

삼일 내내 비가 오고 있잖아요.

같이 울어준 하늘이 고마우면서도 이런 날에는 비가 아닌 눈이 와야 하리라 생각하고 있네요.

백합 같은 눈송이가 마음의 골짜기로 한없이 쌓여야 하리라, 하고.

절규에 가까웠던 펠릭스의 외침이 생각나요.

“잘려버린 이 아름다운 백합이 천상에서 다시 피어나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은 말을 하고 경험은 통역을 한다.’

카톡 상태메시지를 보고 남편이 탄복을 한다.

“우와, 이거 니가 한 말이야?”

“어머나,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알면 지금 인세로 이자놀이 하고 있겠지. 사르트르님의 말씀이셔!”

 

모든 엄마들은 아이에게 하루라도 빨리 말을 가르치고 싶어서 안달한다.

“엄마, 엄마, XX야, 엄마 해봐"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칠 때처럼 엄마들이 친절과 인내로 자녀교육에 일관성을 가진다면 이 세상에

청소년문제 따위란 단지 외계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열심히 가르치려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 한마디 거들고 싶어진다.

“거, 말 빨리 가르쳐봤자 말대꾸 밖에 더해요?”

목이 쉬도록 낱말을 반복하던 엄마들의 얼굴로 제일 많이 되돌아오는 말들이란,

‘싫어’,‘미워’ 인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친구와 라볶이를 먹으며 주인아줌마가 단무지를 넉넉히 안준다고 푸념하고 있어야할 18살의 나이에 문정희시인은 ‘꽃숨’이라는 시집을 냈었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들이키며 그 무의미한 운동성에 재미에 열중할 때, “으그, 코 풀어!” 하는 엄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쾌락을 포기하고 코를 풀 아홉 살의 나이에 사르트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오프닝 멘트로 돌아가 살펴보면,

여기에서 자연이란 아이이고 경험이란 노인을 나타내고 있다.

즉 어린 사르트르가 하는 말을 통해 할아버지가 철학 위에 겉옷을 입혀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이들이란 아직도 자연과 가까운 존재이며 바람과 바다의 사촌이다. (...)

할아버지는 철학보다 시적인 명상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의 명상의 대상은 나였다.(...) 내가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무슨 예지를 찾아보려고 하고 실제로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후에 할아버지의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웃어넘긴 일이 있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황홀경을 만들어서 죽음의 불안과 싸워보려고 한 것이었다. p 33

 

<말>은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보낸 유년시절의 기록한 자서전이다.

사시 기운이 있는 키가 작고 야윈 아이,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에 불완전했고, 할아버지의 손자가 되기에는 완전했던 소년.

 

이 책은 1부 읽기, 2부 쓰기로 이루어져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1부는 어떻게 읽기를 습득하게 되었는가, 아버지를 1살 때 여의고 외가댁에 들어간 후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들과 조우한 이야기이고 2부는 그 읽기를 토대로 자아를 구축했던 연극에서 벗어나 쓰기를 통해 어떻게 자아를 완성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좀 자세히 이야기한다면 유년 시절, 어른들의 말이란 진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의 세계와 아이들을 대하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고독했고 그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읽기에서 솟아나와 자란 덩굴 같은 표절의 세계에서 어떻게 쓰기를 확장해갔는가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그가 책을 읽는 할머니를 유심히 관찰한 일이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당시 유행하던 소설책(통속적인 책이라 표현되어 있다)을 손에 쥐고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피로감과 행복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책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퍼지던 미소는 후일 모나리자의 입술에서 다시 발견한 그런 미소였다는데.

책의 무엇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말이 그런 미소를 피워 올릴 수 있었는지 일곱 살의 사르트르로써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그가 책을 읽고 있는 연극을 하고 있으면 어른들은 감탄 어린 칭찬을 했고 그 칭찬을 듣는 사르트르의 연기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급기야 그 연기에 동화된 할아버지는 여덟 살인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며 “이 아이의 결함은 나이에 비해 너무 앞서간다는 것이지요.”라고 허세를 부리게 했고 첫 받아쓰기 시험이 끝난 후 반을 강등시켜야한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할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게 했었다.

그 후 열 살이 되어서야 다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르트르에게 할아버지의 서재는 온갖 유물들로 가득찬 신전이었다. 퀴퀴한 잉크냄새가 나는 서재에서 뜻도 모르는 책을 펼쳐들고 어른들의 숭배해 마지않는 그 눈빛을 즐겼다.

그러다 글을 깨우친 사르트르가 기쁨을 쓴 대목이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식물표본처럼 그 조그만 상자 속에 들어있는 말린 목소리,

할아버지가 들여다보면 다시 살아나는 목소리, 할아버지 귀에는 들리지만 내 귀에는 들여오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내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것을 귀담아 듣고 의젓한 이야기들을 몸에 가득 지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말리라.

할아버지의 서재를 마음대로 배회할 수 있게 된 나는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오늘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p 53

 

사르트르는 어른들의 부조리를 알았다. 아이들 앞에서 아이들에게 동화된 것처럼 그들의 말을 흉내 내었으나 어른을 만나면 곧 아이들을 따돌리고 어른들만의 언어로 아이들을 소외시켰다.

연극은 그에 대한 반항이었으리라.

내 유년시절에도 집에 이웃집 아주머니가 놀러 오시거나 친척이 오랜만에 방문할 때면 엄마는 평소와 달라보였다. 때로는 나에 대한 칭찬을 부풀리거나 때로는 얼굴이 붉어질 만한 나의 단점을 내 면전에서 웃으며 이야기해서 나를 겸연쩍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내력이라 나도 똑같이 행동했는지 내 아이가 어느 날 말한다.

“엄마, 제발 내 얘기 좀 하지 마세요!”

어른들의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작정한 어린이들이나, 아이들의 자존심을 괘념치 않는 어른들이나

바람직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말은 모순의 친족이다.

 

말을 사물의 진수로 여기며 사물은 말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사르트르.

언어로 사물을 생포하는 그의 특이한 경험을 보자.

 

나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우선 플라타너스의 멋있는 허상을 꾸며보고 스스로 홀려들었다.

플라타너스를 관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허공을 믿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자 금방 단 하나의 형용사의 모습을 띠고, 또 때로는 기나긴 한 문장의 형태를 띠고 진짜 잎사귀가 솟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계를 바르르 떠는 초목으로 가득 채웠다.

p 196

 

머릿속은 바스락거리는데 그것이 안에서만 웅얼대고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화가는 인터뷰에서 사물이 말을 걸어오기까지 대상을 관찰하며 기다리는 일이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비단 화가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사물에 말은 건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말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는 경험을 즐겼다고 하니 그 ‘예술하시는 법’이 경이롭다. 그렇지만 따라하려면 주위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좀 이상해!’라는 말 들을 각오는 단단히 해야겠다.

 

2부가 시작되면 사르트르는 연극을 꾸며내기 위한 읽기를 중단하고 쓰기에 돌입한다.

연극을 쉽게 벗어버릴 수 없었지만 표절을 통해 거짓말을 꾸며보며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간다.

소설을 쓰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대 권력에 도취되기도 하고, 무엇이든 상상하기만 하면 되는 그 세계에서 좀처럼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 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어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공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p 166

 

자신과의 데이트를 즐기던 사르트르는 명성을 얻게 된 순간, 그것을 외롭게 누리기만 했다고 고백한다. 영광을 위해 죽느냐, 영광이 자신을 찾아와서 죽이느냐, 다를 것 없는 종말에서 고뇌한다.

희미하게 태어났듯이 희미하게 죽을 것을 염려했으나 결국 책이라는 순수한 사물로 남게 될 자신에 안도한다.

 

나는 수다를 떠는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움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

그리고 육체 대신 문체를, 시간이라는 연약한 나선 대신 영원을 얻으리라.

언어의 침전물로서 성령 앞에 나타나고 인류에게는 집념의 상징이 되리라.

컨대 나 자신과도 다르고 삼라만상과도 다른 ‘타자’가 되리라.

우선 나의 신체를 영원히 닳지 않게 만든 다음 소비자들에게 바치련다. p 208

 

정말 9살의 나이에 그토록 많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문학천재였을 것이다.

그가 천재였음을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인간의 굴레>에서 프라이스양이 말했던 것처럼

‘천재란 무한히 할 수 있는 능력, 바로 그거예요. 그것 말곤 없어요. 무슨 일이든,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거죠.“ 라는 말이 나를 더 쉽게 설득한다.

인생을 읽고 쓰는 것, 그 두 가지로 단순하게 나누었으나 가장 세밀하게 밀고 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천재성이란 말년까지 좋은 소문을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작문천재 사르트르가 오늘날 설교시간에 이렇게 인용이 되고 있다.

“신을 부정하고 죽음을 부정했던 세계의 지성 사르트르, 그는 폐수종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숱한 추태를 보였다고 합니다.”

최고의 지성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는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때 줄곧 들먹여지는 예화이다.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무의미와 무목적을 내세웠던 실존철학이란 실존하는 동안에만 유효했던 것일까. 본문 중에 그가 배교(?)하게 된 우스꽝스러운 계기를 소개한다.

 

어는 날 나는 예수의 수난에 관한 프랑스어 작문을 선생에게 제출했다. 그 작문은 온 집안이 감탄하고 어머니가 손수 베끼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은메달밖에 타지 못했다.

이 실망이 나를 배교로 몰아넣고 말았다. (...) 그 후에도 몇 해 동안은 전능하신 하느님과 공식적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다. p112

 

그러나 그것은 구교와 신교가 혼재하던 시기에 가져온 신앙적 혼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해이한 시기가 아니라면 카톨릭 집안이던 그의 할머니가 루터파 집안이던 그의 할아버지와 결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절대적 신앙이 분리될 때의 부작용이었으려나.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라는 존재가 불현듯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오용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아닐른지.그래서 억울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이 그렇게 조롱당하는 것이 불편하여 나는 본문 중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가 신화적인 침묵으로 가득찬 <위인들의 유년시절>을 읽으며 후에 죽음으로부터 삶을 거슬러 읽어갈 독자와의 만남을 내다보는 예언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줄곧 그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나의 모든 언행의 진실한 의미를 지닌 내 죽음이 무서워졌다. (...)

나의 작품과 나의 죽음이라는 두 개의 열쇠, 나의 비밀을 풀어줄 그 두 열쇠를 갖게 될 2013년의 사람들은

이 갑작스런 불안과 의혹을, 이러한 목과 눈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p 220

 

나는 그의 비밀을 풀 역량이 없지만 미약하나마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다.

 

내 딴에는 문학에 몸을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인즉 나는 성직에 들어간 것이었다.

 

문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결국 신에게 돌아가기 위한 우회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의 행위를 거듭하다보면, 사르트르가 느꼈던 절대권력을 계속 맛보다보면, ‘보기에 좋았더라’는 신의 마음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자신에게서 신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급기야는 신도 말로 창조할 수 있는 우주적 문학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을 죽인 문학가들의 변호는 이정도 해두자.

 

시학에 관하여 <활과 리라>라는 명작이 있다면 문,학,에 관하여서는 <말>이라는 걸작이 있다.

말에 관한 본질과 성격에 대하여, 그리고 문학도가 되기 위해 준비되었던 한 소년의 성장과정과 내면의 갈등, 주변과의 상호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책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이것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책에 살고 있는 사르트르이다.

글을 씀으로 존재했던 사람, 그로 인하여 생각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되는가....

이것은 일곱 살의 사르트르가 고민했던 문제이니 오늘 나는 이 회춘을 기뻐해야할까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써놓은 글을 다시 읽을 때면 왠지 젊었을 적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때로는 침흘리는 유아기를 인정하며 글을 내릴 때도 있다)

비록 미숙함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지만 거기엔 나름 풋풋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미숙함이 흉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너그러운 밤,

모 인터넷서점에 올려놓은 신간 리뷰를 읽다가 그 아래에 달린 다른 리뷰를 보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글은 자판을 두드렸던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을 만큼 ‘삐까뻔쩍한’ 글이었다.

내심 그 글을 쓴 사람이 업자(?)였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며 읽는 사이 글의 생기발랄함에

이내 경계심이 풀어지고 말았다. 이건.... 너무 재미있잖아.

그러다 그가 스스로 비정규직 냄새가 폴폴 나는 ‘생계독서가’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친 김에 그의 책을 검색하게 되었다. (업자여서 나는 너무 행복했다.)

 

 

시원하게 사서 보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가 ‘생계독서가’라면 나는 ‘도서비지출할애불가’한 독서가였기에 다른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순번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중고생학부모로 산다는 게 그렇다)

그러다가 알림서비스를 받게 되었고 5KM이상은 족히 흔들려서 멀미하며 왔을 책을 다시 장바구니에 환승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이 책의 제목에 나타나는 ‘비행’에도 김애란의 <비행운>처럼 중의적 의미가 부여되어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서’라는 앞 두 글자에 중의적 의미를 더 강하게 느꼈다.

서서는 書書를 뜻하지만 나에겐 standing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다 보니 수많은 책을 뜻하는 ‘서서’보다는 화장실에서의 ‘서서’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금정연은 여자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럴 리가 없어요!’ 하며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심한 부정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뭐, 이건 순전히 웃자고 하는 말이다. (이게 금정연식 발랄체(?)다)

 

 

인터넷서점 인문MD(merchendiser)로 일했던 저자는 당연히 책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읽었고,

3년 6개월 동안 기를 쓰고 책을 팔았으며, 이제는 김수영의 말처럼 ‘속물 중에서도 고급 속물'인 소위 글 쓰는 사람으로 매문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골수까지 빼먹는 독서법을 고수했다면 현재는 매일 쏟아지는 수백 권의 신간들에 치어 고기 몇 점만을 건성으로 먹어버리는 신독서법을 갖게 되었다한다.

읽어야할 책은 많고 인생은 짧으니 선택하게 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때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일종의 구원이 된 셈.

그 책은 봄과 읽음 사이에서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고, 더구나 서재에 가득 채워진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나 많은 책을 다 읽으셨나요?”라는 인터뷰어의 말에 “다 읽은 책을 뭣 하러 꽂아놔요?”

재기발랄하게 응수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일화도 든든한 지원사격이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 속에서 평화와 기쁨만을 찾는다면, 차라리 사랑의 문으로 나가

겨울도 없고 봄도 없고 여름도 없는 곳으로 가라. 그곳에서 당신은 웃겠지만 마음껏 웃을 수는 없을 것이고, 울겠지만 모든 눈물을 흘리지는 못할 것이다.

-마누엘 푸익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요즘은 읽은 책을 연결하면 만리장성도 돌고 남는다는, 책장에 바른 침이 한 드럼쯤은 되노라는 독서가들이 책의 일부분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옮겨놓고 이국적인 저자들의 이름을 소환해내며 서평 내지는 에세이로 만든 책들을 내놓고 있다.

감명 깊게 읽었던 정여울이나 정혜윤의 책들도 그러했다.

책벌레들에게 자극을 준 멋진 책들을 소개받는 장점이 있지만 책 사이들의 비행은 때론 너무나 많은 인물과 인용으로 인하여 멀미가 날 지경.

잠언들도 때로는 느끼해서 콜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독후감만으로도 훌륭한 책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혹시 ‘모듬회를 좋아하는' 작가들의 기호때문일까? 어떻게든 책의 소비를 증진시키려는 출판사들의 적극적인 기획일까.

 

그런 오해와 불신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날로먹는(?) 문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

레몬을 뿌려 소독과 비린내를 잡고 와사비 듬뿍 푼 간장에 찍은 그의 문장들은

‘역시 회가 맛있긴 하지?’ 반문하게 한다.

이 시점에서 ‘독자로써 작가가 좋아질 때’ 경계해야할 것에 대한 그의 충고를 전한다.

여러분, 저자와 독자를 친밀하게 만들려는 출판 마케팅은 그리 좋은 게 아니랍니다.

저자와 독자의 사이가 성공하려면 그것은 책이라는 공간에서여야 합니다.

 

 

명료한 언어의 대적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대듯 말이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가끔은 조지 오웰이 내리친 죽비로 눈물이 쏙빠지고 뇌가 얼얼해지기도 한다는데.

덕분에 이 책은 참 솔직해진다. 든 게 없어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덜어내어 가벼워진 상쾌함이 있다. 책을 읽은 후 발효된 생각들이 생활의 에피소드와 연결되어 꼬리를 무는 유쾌한 사유와 언어의 유희가 감칠나다.

예전의 한 광고카피처럼 통쾌한 맛도 있으니 이 책은 그야말로 ‘유쾌상쾌통쾌’한 책이다. 쾌쾌하다.

 

 

스타워즈를 보고 원숭이가 섹시하게 느껴졌다는 여자친구의 말에 털북숭한 일개 원숭이보다

책 읽는 인간이 더 섹시하다는 것을 증명받기 위해 <모비 딕>을 집어든 이야기,

그러다 다른 남자보다는 원숭이에게 섹시함을 느끼는 것이 본인에게는 무척 안도가 되었다는 이야기,

친구가 아이문제로 고민하자 <부모와 아이 사이>를 추천하고, 회사문제에는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을, 인생에 대한 고민에는 <신화와 인생>을 추천해주자 연락이 끊겨버린 그 친구의 충고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나.

자전거가 타고 싶을 때는 자전거를 타는 대신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었고, 달리기를 하고 싶을 때는 <잘 달린다>를, 현재 <백수생활백서>를 읽고 있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는데. 그러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꽂아두고 <잰틀 매드니스>를 읽게 되었다는 이야기,

 

 

세상을 뒤흔들만한 문장을 써놓고 혼자 흐뭇해하고 있을 때 이내 그것이 70년 전 카뮈가 먼저 썼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는데 그것은 작가들이 동시대를 뛰어넘는 미래의 독자들을 겨냥해 쓰기에 그것을 <예상표절>이라 부른다는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소개하며 환호하는 이야기,

작가라는 놈이 멋이나 부리고 라고 비난했던 김수영과 박인환의 관계처럼 피츠제랄드의 뒷담화를 멈출 줄 몰랐던 헤밍웨이의 괴상한 우정에 야유를 보내는 이야기.

 

 

특히나, 20페이지에 달하는 ‘낭만의 엔진을 꺼보자’라는 이야기는 퍽 인상적이다.

예술가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좀 남는 표(책) 없나요?”라고 하고 좀 교양 있는 사람들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있잖아요. 조금만 참으시면 훌륭한 예술가가 될 거예요.

그런데 정말 남는 표(책) 없나요?” 라고 한다는 이야기,

예술은 배고프고 예술이라는 낭만은 아름다워서 슬프기만 한데, 영혼을 위할 수는 있으나 위장을 위할 수 없는 '생계형예술가'말고, 좀 수준낮고 형편없을 지라도 '여가형예술가'가 됨으로 자신의 영혼을 위하는 삶을 살며 예술의 상품화와 게토화의 관계에서 낭만적인 악순환을 끊자는 이야기 말이다.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학의 세부사항을 잘 알아차리면 삶의 세부사항을 잘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은 맞는 말일까?

그 세부사항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 최고의 지혜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답은 잘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행동하러 한 발 나아가던 환멸로 한 발 더 움츠러들던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덕분에 가혹한 운명의 중심에서 꿋꿋하게 일어선 등장인물들을 불러내어 조언과 위로를 얻고 여러 운명을 겪어낸 다른 사람을 품게 되게 되는가보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말이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 332p

 

 

작가 김훈이 어떤 인터뷰에서 <근사록>을 인용하여 했던 말이라는데 <책을 읽지 않고도 말하는 법>과는 비교 되지 않을만큼 비독서가에게 환영받을만한 문장이다. 비독서가들은 이 문장을 보고 그러니까 독서를 할 필요가 없네? 라고 알아들었을 것이고 독서가들은 그러니까 깨달음과 감동은 실천으로 이어져야하겠구나 라고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실한 독서가로써 나를 살펴보게되는 것은 달랑 고기 몇 점 뜯어먹고 이 맛이 최고라며 글에 취해 있는 건 아닌가하는 것이다. 쉽게 옮겨적는 주제에 마치 어떤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체 하는 것은 아닌가. 굵게, 밑줄이라는 옵션까지 넣어가면서 그것도 매우 신나게.

한 물음이 떠오른다.

 

이 책을 다 읽은 당신, 무엇이 달라졌는가.

 

다른건 몰라도 책을 통해 얻은 한 톨정도의 통찰을 가지고서 자식에게 응용하며 실험하는 우에서는 건져지기 바란다.

(성인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만만하고 애먼 아이들에게 말이다.

아이들은 내가 책따위 읽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그래서 장남은 책을 싫어하나보다.)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혹시 책이 덜 감동적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라는

핑계를 댈 수 있는 독자의 위치에 서있는 게 나는 지금 눈물 나게 고맙다.

그러면 금정연씨, 이런 때는 어떤 책을 읽어야하는 거죠?

 

 

디딩.

대출 신청해 둔 <죽은 철학자들의 서>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뜬다.

자, 이제 또 다른 책들을 멀미시키러 갈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의 심리는 무엇인가?’

그 남자를 고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본디 야수를 길들이고 싶은 사육사의 본성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 큰 남자도 아우를 수 있는 울트라수퍼의 모성애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일까

생물학적인 여자의 눈으로 볼 때 여기 돼먹지 못한 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스트릭랜드. (이름은 퍽 놀이동산스럽다.)

 

 

가 책을 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나와 알고 지내기를 원했는데 스트릭랜드 부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베푸는 오찬회에 나는 문인들과 함께 자주 초대되었고 그녀의 집은 늘 따뜻하고 우아하고 상쾌한 예술적 정취로 가득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의 남편이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녀로부터 남편을 찾아가 한 번 만나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여자와 함께 달아났을 거라는 소문과 달리 스트릭랜드는 파리의 허름한 호텔에 혼자 묵고 있었다. 나는 가장으로써 어떻게 가족을 무책임하게 버리느냐, 자식들을 생각해보라고 힐난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찬 말투로

“왜,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난 그 사람을 십칠 년 간 먹여 살려 왔소.

그러니 이제 자기도 혼자 힘으로 살아볼 수 있잖나?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귀여웠지만 다 크고 나니 별 감정이 들지 않아요.”

 

그의 단호함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나를 오히려 무안하게 했다.

단지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고 했다.

사십이 넘도록 증권거래만 해오던 그가. 열일곱 살짜리 딸과 열네 살짜리 아들을 둔 그가 말이다.

결국 나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스트릭랜드 부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내겐 네델란드 출신의 화가 더크 스트로브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과 현대 화가들의 작품 모두에 공감할 수 있는 높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조잡한 이태리의 풍경만을 그려 주위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다.

파리에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괴팍한 성격과

무례한 말투를 넉넉하게 견디고 있었다.

심지어는 앓고 있는 그를 빈민굴에서 끄집어내 자기 집에서 간호하기도 한다.

미칠 듯 날뛰며 반대했던 아내도 결국 두손을 들고 스트릭랜드를 정성스럽게 간호하기 시작한다.

“그를 집안에 들이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예요.”라는 암시와 함께.

 

그의 생김새를 궁금해 할 것 같아 잠깐 그의 모습을 옮겨본다.

 

‘스트릭랜드는 거칠고 투박하게 생겼다.

눈의 표정은 초연하고 입은 육감적이며, 몸집은 크고 건장했다.

그는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자신의 스튜디오까지 빌려주었던 스트로브는 갈수록 방자해지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을 못 견뎌 만 나가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때 가방을 싼 것은 그의 아내 블란치였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스트릭랜드의 야수성에 본능적으로 끌린 블란치는 어느 새 스트릭랜드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방 버림받을 것이라는 위험도 감수한 채 누구보다 가련해질 운명의 길을 들어서고 만다.

아내가 가난때문에 고생할 것을 염려한 스트로브는 결국 두 사람에게 스튜디오를 내어주고 오히려

자신이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온다.

당연히 그들의 동거는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믿으며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 당부한다.

그러나 스트로브의 사랑이 무색하게 얼마 후 블란치는 독극물을 삼킨 후 죽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스트릭랜드는 야멸차게 말한다.

 

“그 여자는 나한테 버림을 받아서 자살한 게 아니야.

어리석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인간이라 그랬지.”

 

나온 김에 여기 스트릭랜드의 야수성을 드러내는 문장을 한 번 더 옮겨 적는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난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왠일인지 주변 인물들은 그런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

최대의 피해자인 스트로브조차 그를 용서하고 네델란드로 같이 갈 것을 권유했었고 소설 속의 화자인 나 또한 스트릭랜드를 극도로 혐오하는 마음과 동시에 알고 싶어 하는 냉정한 호기심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 그를 나쁜 남자에 촛점을 맞추어 묘사하고 있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 한 토막을 적어본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몇 년 후, 타히티로 갔을 때 그 섬에서 우연히 스트릭랜드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열일곱 살 난 토박이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깊은 산 속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았다한다.

거기서 종일토록 그림을 그리고 아이도 둘씩이나 낳아 잘 살고 있었다한다.

아마도 그 곳에서 보낸 최초의 3년이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린 아내 아타는 어떤 여자였을까.

 

“그 애는 간섭을 안 해. 내 밥을 지어주고, 애들 뒷바라지도 하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하네. 내가 여자에게 바라는 건 다 해줘.“

 

토착민처럼 파레오를 두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의사가 찾아온다.

아타가 진료를 의뢰해서 모셔온 것이었다. 의사는 스트릭랜드를 보고 그가 나병에 걸렸음을 알려준다.

그는 그 선언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후일 닥터 쿠트라는 죽음의 선고를 의연히 참아내는 그의 금욕적 용기에 감탄했다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조용히 떠날 준비를 했으나 아타는 죽어도 스트릭랜드 옆에서 죽겠다며 다리를 놓지 않는다. 이를 물리치지 못한 스트릭랜드는 오두막에 계속 남았다.

 

두어 해가 지날 즈음 닥터 쿠트라는 아타의 긴급한 전갈을 받고 다음 날 아침에 오두막에 도착한다. 그는 집 안에 들어서자 벽에 가득 그려진 신비한 그림을 보고 순간적으로 내뱉었다.

“천재다.”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들은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 같은 거였어요. 뭐랄까. 인간의 형상, 그러니까 남녀형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고, 숭엄하고 초연하고 아름답고 잔인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기도 했어요.

그걸 보면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쿠트라는 집 안으로 더 걸어들어가 심하게 뭉그러진 채 죽어있는 스트릭랜드를 발견했다.

그리고 곁을 지키고 있던 아타와 함께 그를 나무 아래 묻어준다. 아타는 스트릭랜드의 유언대로 집과 벽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렸고 최고의 걸작이었을 그 그림은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후 나는 타히티섬에서 알게 된 일들을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 그녀를 찾아간다. 부인의 생활은 이제 퍽 안정적이었고 거실도 다시 활기를 찾고 있었다.

스트릭랜드가 이미 세상에서 천재로 인정을 받은 터라 벽에는 그의 복제화가 하나 걸려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말한다.

“그림이란 장식으로는 그만이지요.”

 

 

소설은 고갱의 삶에서 소재를 얻어 만들어진 소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스트로브와 스트릭랜드.

이름에서 발견되는 상관관계는 고흐와 고갱을 떠올리게 하고 마침내 그들이 공동화실을 가지게 되었을 때 느끼던 환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자신의 스튜디오를 빌려주며 그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기뻐했었다. 고흐 또한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며 함께 살게 될 노란 집에 얼마나 온갖 정성을 들였었던가. 마침내 고갱이 찾아갔을 때 고흐의 기뻐하던 모습이란.그러나 오래지 않아 찾아온 그들의 불화와 결별.

그들이 마시던 싸고도 강한 압생트의 알코올 기운은 쓸쓸하다.

끝까지 스트릭랜드를 포용하려 했던 스트로브가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또한 쓸쓸하다.

 

어떤 계기로 스트릭랜드가 화가가 되기를 결심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동기는 나타나 있지 않다.

화자는 그에게 잠재되어있던 창조의 본능이 암세포처럼 자라나 존재 모두를 정복하여 가정까지 버리고 도피행각을 벌이는 행동까지 이어졌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우둔한 증권중개인에게 그런 일이?

하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어떤 인간들의 혼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다가 그들을 성령으로 굴복시키고

수도원의 금욕적 삶으로 몰아가는 신의 뜻보다는 덜 이상하다고 말한다.

 

예술성이 주어지는 것과 신앙심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처럼 불가사의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스트릭랜드는 한 때 욕정에서 벗어나 온 힘을 그림 그리는 일에 쏟고자하는 소망을 가졌었다.

방법은 가혹했지만 그는 그 소망을 생의 끝에서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스트릭랜드가 추구했던 예술의 길은 성한 육체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극한의 고통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부인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되 육체의 물질적인 것은 다 걷어버린 후 정신에만 집중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했기에 더욱 강한 정신력과 사물을 꿰뚫는 직관, 더 없이 신비로운 색채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거죠.

 

예술성의 극한은 창조의 신비를 들여다보고 종말의 환상을 체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스트릭랜드의 예술성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스트릭랜드는 물질적인 것에서 어렴풋이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발견했던 모양이나 그것이 너무 이상스러워서 불완전한 상징으로 암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주의 혼돈에서 어떤 새 양식을 발견하고 그 온 영혼으로 괴로워하면서 그것을 서투르게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나는 표현의 출구를 찾아 애타게 고뇌하는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자자,

그렇다면 이제 그를 계속 '여자를 비하하고 물질화시키는 나쁜 남자'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극도의 고통과 쾌락의 완성을 맛본 최고의 예술가로써 받아들일 것인가.

 

해설에 의하면 달과 6펜스는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달은 꿈과 열정이 있는 이상향을, 6펜스는 돈과 물질이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과 6펜스가 신성과 야수성으로, 물질과 정신으로도 읽힌다.

성직을 수행함으로 신성을 갖고 살아가는 아들 로버트 스트릭랜드,

거친 태평양을 가르는 배 위에서 달빛아래 신나게 춤을 추는 아타의 아들의 야수성,

스트릭랜드에게 존재했던 신성과 야수성의 계보가 강줄기처럼 두 아들 위로 흐르는 것을 본다.

 

그를 사랑했던 세 여인들은 어떠했나.

'그림이란 장식으로 그만'이라는 말에서 보듯 정신도 물질화시켜버리는 스트릭랜드 부인,

물질을 정신과 혼동하다 불행해진 블란치,

물질의 세계에서 동떨어진 섬처녀 아타,

나쁜 남자의 야수성을 길들여 정착하게 한 것은 어떤 힘이었을까.

 

스트릭랜드로 보아 야수성의 끝은 신성의 발견이었을까.

 

서머싯 몸은 어렸을 때 양친을 잃고 목사였던 백부 밑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영예로 아는 세대와 '종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는

차세대와의 갈등을 그도 느꼈을까. 하지만 나는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그의 따뜻한 체념을 읽는다.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라 했던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라 했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회의에도 불구하고 내겐 이 책을 통틀어서 하나의 핵심구를 찍으라면

‘신을 믿는 마음’이라 하겠다. 그 핵심어를 발설한 사람은 타히티섬에서 만난 브뤼노 선장이다.

그는 나무뿐이던 섬 하나를 사서 혼자의 힘으로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생활을 하며 그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두 분 모두 의지도 강하고 성격도 굳세어야했겠군요.”

라고 내가 말하자 선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한 가지 요소가 더 없었더라면 우린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게 뭔데요?”

“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실패했을 거예요.”

 

신이 띄워놓은 거대한 공 안에서 우리는 달리며 경쟁하며 서로 미워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이 예술성으로 혹은 각자가 믿는 신앙심으로 부피를 키워간다.

고통이 곧 쾌락인 예술, 그리고 진리를 알기엔 너무나 짧은 생,

신성과 야수성을 가시처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알 수록 모르는 것뿐인 삶 속에서 나는 무엇을 깨달았다 말할 수 있을까.

날로 후패하는 육체 가운데 과연 내 생의 온도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을 믿는 마음.

결국 그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