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젝에 관한 책을 읽었다. <슬라보예 지젝>(김현강 지음)이란 책인데, 지젝과 라캉에 관심이 있지만 가까이 가면 약간 두통이 생기던 분들에겐 새로운 처방전 역할을 할 거 같다. 이 책을 본 김에 요새 지젝과 라캉의 출몰현황(신간 소식?)을 살폈더니, 눈에 띄는 것들이 여럿 보인다. 

 

 

 

 

라캉의 '세미나'를 드디어 우리말로 맛볼 수 있다. 1권부터 차례대로가 아닐지라도, 이제 시작인데 어쩌랴! 이 상황에서 에크리 번역까지 기다리는 건 큰 욕실일까?            최근 라캉에 관한 책 중에선 캐서린 벨지의 <문화와 실재>가 끌린다. 책의 차례를 보니, 독특한 구성은 아니지만, 여태 라캉과 관련하여 생긴 많은 문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잘 포착해서 구성한 모습이 엿보인다.번역만 괜찮다면, 좋은 지식을 얻을 것 같다. 

<라캉 거꾸로 읽기>는 시인이기도 한, 이승훈씨의 책인데, 라캉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 (자신의) 라캉 소화와 그 배출의 풍경을 담아내지 않았을까, 예상이 간다. 이 분의 다른 책들을 보니까, 지식의 폭이 상당히 넓다. 약간 옆길로 새는 감이 있지만, 몇 권을 추려본다. 

 

 

 

 

모더니즘에서 해체, 라캉에 이르는 큰 주파수 대역이 느껴지는데, 특히 눈이 가는 책은 <선과 기호학>이다. 나도 최근에 '간화선'이 심상치 않게 보여서, 공부할 기회를 찾고 있는데, 기호학과 선을 다룬 책이 있다니 꽤 반갑다. 내용도 기대에 미친다면 더 근사한 일이지만. 

화두를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표의 차원에서 바라볼 이론적인 도구들은 지금, 간지럽게 서성이고 있다.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지젝의 본격적인 징후가 보이는 책이기도 한데, 굳이 완성도?를 들먹인다면 편견과 억지도 세련된 여과없이 떠도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지젝에겐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지젝 특유의 실천을 독려하는, 그리고 그 자극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면, 그것으로 된 거니까.  

 

 

 

 

 

 

 

<죽은 신을 위하여>를 굳이 꼽지 않더라, 이제 슬슬 지젝의 여인이 라캉보다는 헤겔임을 눈치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를 믿는 지젝이 즐겨 읽는 헤겔! 그리고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라캉.  

최근 지젝이 관여한(서문) 책들이 나오고 있다. 

Revolutions 시리즈인데, 지젝은 물론 그의 동료 알랭 바디우도 보이고, 테리 이글턴, 마이클 하트의 이름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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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책을 주문하다가 너무 오래 방치한 누군가?의 서재에 잠깐 들렀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나...일 것이다.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이라는 이 책의 느낌은, 부제 '... 치유하는 영화읽기'가 오히려 더 알맞다. 제목은 왠지 어려운 느낌이 나는데, 그렇게 깊게 이론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아마도 정신분석과 관련된 뾰족한 용어들이 작은 산을 이루는 책들에 대한 저자의 염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친절함에 비해선 뭔가 끈덕지게 남는 지적인 중량감은 떨어진다. 특이한 건, 이 책의 저자는 쥐를 잡는데 고양이의 색깔을 문제삼지 않는 실용적인 입장에서 융과 라캉을 동시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여준다.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고기를 잡을 때, 그물과 낚시를 동시에 쓰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인간의 문제는 산술적인 것(가령 1+1=2)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초점 하나를 잘 잡아서 들어가는 길에서 풀리는 일도 있다. 어쨌든, 저자의 태도는 한 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꺼리가 된다고 본다. 

<라캉과 한국영화>에 실린 글들의 제목을 보니까, 위에 저자가 왠지 달가워 하지 않을 거 같은, (라캉식) 용어 주위에 포진한 과잉이 느껴지는 짧은 늘어섬들이 눈에 띈다. 발산은 하지만 왠지 속 깊이 스며들지 않을 거 같은 텍스트가 아닐까? 미리 설레발 예감을 해본다.

새벽에 갑자기 주문을 한 <라캉과 영화 이론>은 '라캉과 영화'를 좀 더 분명하게 묶은 책이 아닐까싶다. 번역은 읽어봐야 알겠지만, 왠지 그리 나쁘진 않을 거 같다. 난 라캉보단 들뢰즈에 더 가까운 기질이 있다고 여기는데, 오히려 라캉에 관한 책을 훨씬 더 많이 보는 거 같다. 왜 그럴까? 

라캉과 영화.. 이 지점에서 이젠 영화를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보기엔 글러먹은 것 같다. 영화 안에서 감상자 자신을 비춰주는 섬뜩한 거울들을 만나게 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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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너무 오랫동안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 "나의 게으름을 남에게 알리지 마라!". 정말이지 '게으름에 이르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아침에 동아일보를 보다가 신간에서 '지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요새 띄엄띄엄 읽고 있는 책이 <까다로운 주체>인데, 중간을 넘어서 버틀러 부분을 훑고 있는 중이다. 이걸 끝내면, 사 놓고 고히 책장에 모셔만 둔 <신체 없는 기관>을 볼 작정이다.

 

 

 

 

<지젝 Zizek>은 그 전에 나온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나 <슬라보예 지젝>과는 조금 차이가 느껴진다. 급하게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알려주려는 목적보다는 하나의 체계적인 지도를 담은 듯한 느낌이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지젝의 물리적 태생 지점인 슬로베니아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직접적으로 강하게 자신의 나라에 대해 긴 연설은 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회귀마냥 과거의 기억으로, 혹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해서 건드리곤 한다. 스스로 자신을 백인 남자?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도 어느 정도는 이방인의 자리에 있음을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번역자가 옮겨서 오역에 대한 두려움은 일단 접을 수 있을 것 같다. 헤겔-라캉-맑스로 이어지는 삼각구도 안에서 지젝이 어떻게 이 힘들을 승화시켜 나가는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감각의 논리>가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들뢰즈는 화가로는 베이컨, 영화(감독)으로는 알랭 레네를 주목한 거 같다.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전하고는 전혀 다른 방법을  구사했고, 그러면서도 과거의 찌꺼기가 결국 발목을 잡는 꼴을 피하는 과감성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즉 발전보다는 비약에 가까운 시도였으리라..

궁금한게 있다. 대개 라캉과 들뢰즈를 거의 비슷한 무게를 두고 읽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과연 이 둘 중에 그래도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싶을까? 물론 지젝이 <앙띠 오이디푸스> 이전의 들뢰즈는 라캉과 대척관계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어떤 큰 흐름을 돌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큰 걸림돌인 니체를 알렌카 주파치치가 <정오의 그림자>에서 아주 가는 빛으로라도 라캉과의 이어짐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읽은 소감은 말레비치의 검은 표면과 더 밀착된 느낌이었다.

어쨌든, 들뢰즈와 라캉의 긴장된 역학 관계는 언젠가는 한쪽으로 대세가 기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라캉의 지젝처럼 들뢰즈에게도 누군가 하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스티븐 컨의 <육체의 문화사>라는 책이 탐이 나는데,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이다. 이 사람은 지식의 재단사라도 되는지, 방대한 시간에 흘러가는 지식들을 알맞은 구획으로 잘 포개어 담아내는 것 같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룬 <사랑의 문화사>도 왠지 흥미로울 것 같다.

켄타우로스.. 하체는 말처럼 힘있고 야생적인 네발인데,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한 반인반수. 그렇다면, <켄타우로스의 비평>에 담긴 몸놀림은 어떠할지 대강 짐작이 된다. 얌전하고 차분한 글쓰기는 아닐 터. 최근에 국산 텍스트의 섭취가 적었음을 반성하면서 발견한 책인데, 실제 섭취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미술에 대한 책도 읽어야 한다. 누가? 나 말이다. 요새는 특히 '알레고리'를 익히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것만을 다룬 책이 나오면 좋으련만, 아직 보이질 않는다.  <미술사를 보는 눈> 같은 책도 한번 보면 미술에 대한 차분한 시력을 조금 높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우선 알베르토 망구엘의 <나의 그림 읽기>가 읽고 싶어진다.

미술, 미학에 관한 책을 자주 쓰는 진중권의 책은 뭔가 좀 아쉽다. 물론 스스로 많은 자료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옮기는 작업, 그 노고가 깃든 책이겠지만은.   <미학 오디세이>, <천천히 그림 읽기>, <성의 미학>,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을 읽었고, 현재 <춤추는 죽음>을 보고 있는데, 언제나 <미학 오디세이>의 약간 다른 변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가 부족할까? 그건 그의 책 제목에도 찍혀 있는 바로 '상상력'이 아닐까? 기존 미학 견해에 대한 얌전한 수거와 정리 이상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특히 <성의 미학>에서 너무 단순한 페미니즘 시각은 예상외로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구름 속에서도 빛은 숨어 있는 법.

 

 

 

 

<춤추는 죽음>은 필립 아리에스<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다룬 미술 자료들을 토대로 저자가 다시 선별 작업을 거친 책이라고 한다. 전에 <미학 오디세이>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에서 모티브를 얻었듯이 말이다. 이렇게 대가의 방향에서 힌트를 얻어 스스로 무언가를 보태어 약간 다르게 돌출해내는 작업도 하나의 센스가 아닐까? 굳이 장점을 찾자면 말이다.

끝으로 필립 아리에스의 책들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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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살랑거린다. 파란 새싹처럼 싱그러운 책들은 어디서 피어나고 있을까?

 

 

 

 

그리스 문명이 검은 대륙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영향이 컸음을 말하는 책이 있다. <블랙 아테나>. 검고 도발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이 동양의 뿌리에 서식하는 심리층들에게 어떤 위안을 줄 순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결국 흥미로운 주변의 풍경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타당한 증거들이 지식의 표층을 새롭게 장악하리란 순진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요새는 유행이다. 암울한..

지젝을 읽으면서 가라타니 고진도 함께 읽는데, 상당히 효과적인 '읽기'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중이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뭔가 기존의 익숙한 지식의 말뚝을 제거하는 '태도 변경'을 독려한다는 점에선 실천적인 면이 있다. 어쨌든, 앞으로 고진을 (독서로써)고집할 생각인데, 그를 비판하기도 한 아즈마 히로키의 책을 하나 발견했다. 우선 이 책,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으로 만족해야겠다. 전에는 몰랐지만, 일본에는 제법 눈에 띄는 (지식) 검객들이 활동한다. 그 검술이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모양인데, 우리나라로 눈을 돌리니 참 그렇다.  

 <- 아즈마 히로키에 관심이 있어 찾아보니까, <현대일본사상>이란 책이 보인다.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의 힘>(우리나라에선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로 나옴)에서부터 나카자와 신이치,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 열도의 지능적 힘줄을 훑어 볼 수 있다. 이상하게 일본 지식인들을 유럽이나 미국 학자들에 비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들뢰즈 영화 이론에 대한 책은 몇 권 보이지만, 그것을 응용한 것은 찾기 힘들었다. <시각문화의 매트릭스>는 그래서 반갑다.           아마 들뢰즈와 라캉 사이에서 긴장된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을 터.. 나도 그런가?  들뢰즈의 형,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혹은 차라투스트라가 이번엔 '짜라두짜'로 등장했다. 여태의 번역과는 다른 새로움이 느껴지는데, 왠지 정이가는 니체의 흔적이다보니, 나도 곧 이 책을 손에 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문맥에 맞지 않게도 앞에다 썼다) 라캉이나 지젝, 혹은 고진을 읽으려면 그들의 텍스트 군데군데 곰팡이처럼 따라다니는 제임스 조이스나 바흐친을 회피하기 어렵다. <조이스와 바흐친>이라니.. 두 마리를 하나에 가둔 책이 보인다. 셰익스피어도 결국은 본격적으로 읽어야 할 텐데, 우선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5대 희극>, 이런 책으로 잠시 무마해 볼 생각도 든다. 난 곰처럼 우직하게 읽기보단 요령을 피우니까 말이다.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전에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으로 나온 적이 있다. 왜 원래 제목과 다르게 나와서 헷갈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난 그것도 모르고, 절판된 이 책을 헌책방에서 열심히 찾았다.

<20세기 서양 철학의 흐름>이라.. 이렇게 종합적으로 모아 놓은 책들은 피했었는데, 요새 돌아가는 사상의 흐름에 점점 둔해지는 기분이다. 철학은 정말 끝없이 유혹하는 덫이 아닐까? 철학은 죽었다고 외치는데, 그것은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것들이 오히려 더 질긴 오염력을 갖는다. 그걸 안다고 벗어날 순 없는 문제다. 신이 그렇고 종교가 그렇지 않은가?

오늘 책 오디세이에서 좀 동떨어진 분위기의 책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 제목 참 멋지다. 읽지 않고 괜히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책은 우리에게 '태도 변경'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자극적인 알갱이들, 그 풍부한 껍데기들로 우리를 유혹하는 책이 아닐까? 그래도 이 유혹으로 도피하고/들어가고 싶기도 하다. 모든 책이 전혀 새로운 품종의 씨앗들이라면, 우리의 눈은 곧 두려워할테니까. 세속의 못된 관성을 즐기고 싶은 히스테리 환자들이니까.. 우리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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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몇 권이 눈에 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꽤 이른 시기부터 서양과의 교류가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영향이 컸는데, 반대로 고흐같은 화가한테 일본화풍(판화)은 이상적인 모범이 되기도 했다.   과거 동양에서는 사람의 몸을 열어서 각 장기들을 분석적으로 살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러한 서양의 해부학이 일본에 전해질 때, 그 충격은 단지 몸을 열고 닫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인 변화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인간의 몸까지 객관적인 자연의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천인관계'의 맥락에 있는 인간학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결국, 이것은 18세기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의 근본적인 사고가 동양에 진입해서 어떻게 그들의 사고에 변화를 주었는지 추적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에도의 문을 열다>는 동양의 속살, 가장 서양의 외부에 직접적인 압점으로 작용했던 일본이라는 피부가 어떻게 열리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줄 것만 같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라는 책이 나왔다. .한 권으로 읽는...> 이런 제목의 책은 많다. 그런데 백과사전이라니 좀 색다르다. 저자는 철학과 출신인데, 이 백과사전을 1년 반 동안 독파했다고 한다. 그것을 다시 관심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같이 백과사전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한테는 그 검은 빛 전집이 들어찬 위압적인 풍경을 우회해서 달랑 책 한 권으로  때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거 같다.

다치바나 다카시.. '책들에 관한 책'은 물론, 과학, 여행, 임사체험 등에 이르는 다양한 세상 읽기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의 개인 도서관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생각보다 많다. 일본의 대학자 가와이 하야오(이 분의 책은 쉬우면서도 영양가가 있다)와 함께 참여한 <읽기의 힘, 듣기의 힘>이 우선 눈에 띈다. <임사 체험>은 기대했던 거에 비해선 그냥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주제에 대한 평범한 접근이 아니였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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