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하이데거를 동시에 스치는 책이 보인다. 카자 실버만의 <월드 스펙테이터>, 서양철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뿌리인 시각(성)을 다룬다. 데리다는 음성중심주의을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시각과 음성(목소리) 둘 다 큰 몫을 가진게 아닌가? 어떤 철학자는 서양의 전통에서 시각에 비해 소리(음성)를 소홀하게 취급했다는 볼멘소리도 한다. 음성(소리)이 텍스트에 한해서만 우위를 가지고, 다시 시각과 비교해서는 차별을 받는다? 그럴수도 아닐수도..
다시 <월드 스펙테이터>로 돌아오자. 이 책을 곧 구해서 볼 생각인데, 책소개글을 보자이 이런 말이 나온다. "저자는 시각의 행위가 존재와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보는 주체인 우리 스스로에게 세계의 존재가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 자신이 보지 않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보지 않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늗다-라는 말이 정말 저자가 진정 주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미끼인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다.
나만의 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의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 정점을 찍은게 아닐까? 한때 라캉을 후끈하게 몰던 지젝도 이젠 어느정도 목적을 달성했는지 헤겔과 (정치적인 문제로) 연락을 더 자주하는 눈치다. 라캉에 관한 책이 꽤 많이 나왔는데, 임상에 대한 책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부족함을 채웠던 책이 <라캉과 정신의학>이었는데, 이 책의 역자 맹정현이 스스로 라캉의 임상을 보강하고 나섰다. <리비돌로지>라는 책인데, 왠지 라캉에 대한 충실한 되먹임 역할을 해줄 거 같다.
글쓰기에서 속도와 이상한 과잉을 몸소 보여주는 지젝, 한번 쓰면 엄지와 검지가 쫙 벌어져야 잡을 수 있는 두툼한 책의 질감과 무게까지 선사한다.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스승 뒤에 얌전히 숨지 못하는 본성! 그것이 지젝이 우리에게 주는 큰 매력이 아닐까.
아마 내가 지젝의 책 중에서 하나를 선뜻 잡지 못한다면, 그 책은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이 될 것이다. 오페라를 잘 모르는데, 거기다 지젝의 현란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그렇다면, 지젝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나의 대안을 찾아야겠다. 이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라는 책이 붉게 반짝거린다. 그러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어수선하게 흩어져 놀이에 열중인 철학동네에 대한 선전포고같은데.. 포스트모더니즘이 된통 혼날거 같은 예감이다. 지금 막 <시차적 관점>을 읽는데, 이것을 마치기 전에 이 책으로 갈아탈지도 모르겠다.
지젝이 나온 김에, 잠시 가라타니 고진을 불러오자. 지젝과 고진은 상당히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스타일은 꽤 다르다. 지젝이 양각(양, 돌출)이라면, 고진은 음각(음)에 가깝다. 지젝이 역동적이고 텍스트를 비트는 것을 좋아한다면, 고진은 정적인 바둑 한판처럼, 마주보고 대화하는 듯한 착각까지 주면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면서도 둘은 반복성이 뒤따른다. 비슷한 내용이 여러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반복에서 다시 새로운 버전과 내용을 추가하는 동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둘(지젝과 고진)은 서로를 지그시 응시하는 것 같다. <시차적 관점>이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하나의 반응인 것처럼 말이다.
고진의 책도 참 많다. 여기서 고른다면, <탐구>시리즈가 쉽고 괜찮았던 거 같다. <언어와 비극>은 고진의 여러 책에 담긴 것들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고진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 <트랜스크리틱>은 스스로도 다른 책들에 비해서는 어려울 수 있다고 밝히지만, 원래 글을 쉽게 쓰는 스타일이라서 겁을 먹을 필요는 없겠다. 참고로, 이 책은 여기 알라딘에서는 품절로 나오지만, 다른 서점에선 판매중이다.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에 나온 책인데, 이번에 출판사가 바껴서 나왔다. 번역자(이정우)도 그대로고 쪽수도 엇비슷한데, 아마 큰 차이는 없나보다. 로널드 보그도 들뢰즈에 대한 책을 꾸준히 내는 사람인데, 우리나라에도 여럿 번역되어 나왔다.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들뢰즈의 진의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흔적이 보인다.
오랜만에 프로이트에 관한 흥미로운 책을 찾았다. <프로이트가 꾸지 못한 13가지>라는 제목을 가졌는데, 최근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의 입장에서 과거 프로이트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다. <굿바이 프로이트>도 이와 유사한 책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현상을 단지 시각에 호소하는 물리적인 인과관계로만 해석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이젠 좀 가벼운 마음으로 살필 책이 한 권 있다. <해인의 진실>이란 책인데, 최근에 소설 <해인의 비밀>을 읽었는데, 이 책과 연장선에 있는 책이기도 하다. 해인은 의상대사의 '법성게'와도 관련이 있지만, 자연이 품고 있는 기, 에너지의 상징기호(회로)를 가리키기도 한다. 상식의 차가운 경계와 합리적인 시각을 벗어난 지점을 간지럽히는 소설이다.
끝으로 최근에 고른 언어학, 기호학 책들이다.
위 책에서 가와다 준조의 책이 묘하게 눈길을 잡는다. 일본어 특유의 것들을 건드리면서 진행하기 때문에 자칫 어려워 보이기도 하지만, 언어(학)에 대한 새로운 색깔과 바람기를 느끼게 해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