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156쪽까지 읽었는데, 이만큼 읽은 바로는 이 책은 페미니즘 비평보다는 페미니즘 이론을 정리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듯싶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면 역시나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를 빼놓을 수 없겠다. 페미니즘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책은 내게 정말 중요한 텍스트였는데, 그건 내가 처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된 케이스.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고 다른 사회적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의 여성. 나의 첫 페미니즘 도서였던 <빨래하는 페미니즘>도 이와 비슷한 스탠스를 가지고 있다. 저자 스테퍼니 스탈의 페미니즘 각성을 불러온 책도 바로 그 책 <여성성의 신화>. 혹 이 책의 내용이 너무 오래되었다거나, 우리에겐 이미 다른 어젠다가 훨씬 더 중요하다, 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정희진 선생님의 해제 <베티 프리단, 우리를 출발선에 다시 세우다>를 권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이 책에서는 프리단의 <두 번째 단계>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여성성의 신화> 출간 이후, 20년이 지난 상황에서 프리단의 생각이 많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변절 혹은 변심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상당하다. 앨리슨 루리의 <테이트 가족의 전쟁>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루리와 프리단의 생각(구체적으로는 <두 번째 단계>에 나타난 생각)의 비교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여성성의 신화』에 나타나는 계급, 인종 이성애적 편견은 늘 비판의 대상이다. 프리단의 아젠다는 백인 중산층 이성애 여성이 가정에서 벗어나 중산층 백인 이성애 남자의 가치와 생활양식을 따르는 것이다. 프리단은 노동자 계급 흑인 여성의 경험은 교외의 가정주부의 경험과 같지 않고, 집밖에서의 일, 육체 노동이나 비전문직의 일은 남녀 모두에게 착취적이며 육체적으로 고단하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프리단은 양쪽 부모가 모두 밖에 나가서 일하면 어린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집안일을 누가 할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또한 동성애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핵가족 이외 생활 양식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성의 신화』 에서 프리단은 페미니즘이 초래하는 최악의 결과는 남성 동성애의 증가라고 지적한다. 마치 남성 동성애는 명백하게 회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109)

 



다만, 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 보자면, 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비판의 상당 부분이 사실이기는 하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여기에 마이크가 100개가 있다. 마이크 100개를 서구 유럽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 서구 유럽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이 앞으로 나서서 그 마이크 중 하나는 내가 갖겠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반응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비판과 같은 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여성주의 운동사에서 백인 여성들의 선점권 경쟁이 과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백인 남성이 흑인 남성을 억압하듯이, ‘자매애를 부르짖던 백인 여성도 흑인 여성과 유색 인종을 억압했다. 그것 자체는 사실이다. 다만, 마이크가 한 개인데, 잡고 있는 그 마이크를 왜 너만 갖고 있느냐, 왜 너에게 먼저 발언권이 주어지는 거냐, 라고 묻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건 잘못된 일이고, 비판받아야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일단 마이크를 가져와야, 가져온 쪽에서 가위바위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지식이라는 건, 결국 중산층의 것이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고, 생활에 찌든 사람은 고민할 시간이 없다. 약간의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여분의 시간에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 아닌가. 지식의 발명에 대한 위의 세 문장은 정희진쌤이 강연에서 여러 번 강조하신 말씀이다. 출처를 정확히 책으로 불러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 관계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개인이 사회/이데올로기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젠더 차이에 대해 규범적인(모순적이지만) 모델에 따르고 있으며, 정치적 행동과 진보와 변화에 대해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구조를 유지하는데 노력을 투자하고 있으며, 그 구조 밖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이 가장 큰 한계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페미니즘 이론이나 정치적 운동에서 가장 인기 있고, 동시에 가장 덜 위협적인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그들의 아젠다를 전략적으로 동등권 법안을 통과하는 캠페인과 같은 특정한 페미니즘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 (116)

 



가장 인기 있고, 동시에 가장 덜 위협적인이 중요 포인트다. 남자와 결혼해 남자와 살고, 아들을 낳아 키우는, 가부장제의 일부인 나 같은 여성에게 먹힐 수 있는페미니즘이다. 기혼 여성들을 포섭할 수 있는, 그들에게 접근 가능한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을 소유한 여성들이 발견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소수자 운동으로 전락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내 말을,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젊은 여성은 듣지 않는다. 듣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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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20 13:02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성운동을 소수자운동이라고 하거나, 과격한 분리주의 노선에 대해서 매우 유보적 입장입니다. 다만 2010년대 후반 페미니즘 대중화의 수혜를 제가 입었다고 생각하고요, 여성들의 목소리와 지면이 당분간은 더 많아지는 것이 필요하단 입장예여. 소비자로만이 아니라… (의미있는 소비자여도 좋겠고요) 이미 훌륭한 페미니즘적 이론의 성과들이 잘 논의되면서 분단, 지역주의의 오랜 역사로 이분법에 찌든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담론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예요. 저 역시 먹고사니즘을 겨우 해결한 입장과 위치라는 걸 강연통해 잘 인식했고요, 물론 여성운동의 방향에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더 잘하겠지만…
어제 새벽에 동생들이랑 희진샘 머니볼 매거진 들으면서 시골 내려오는 데,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리더십 이야기 하시면서, 누구도 누구를 바꿀 수 없는 거라고. 다만 배려하고 고려 할 수는 있는 거라고. 여전히 특정 성별일방만 배려하고 고려하는 노동이 당연한 것에 대해서는 거대한 물음표가 있지만, 태도로서는 잘 염두해두려고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원 내고 싶네요 ㅋㅋㅋ

잠자냥 2023-01-20 11:39   좋아요 5 | URL
저기 가서 내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1-20 11:4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잠자냥바보!!!

단발머리 2023-01-24 12:33   좋아요 4 | URL
쟝쟝님 입장을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여성들의 목소리와 지면이 더 많아질때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위치에 선 여성들이 대표되는 상황이 전 좀 걱정이기는 한데. 이미 그런 상황으로 보이기도 하구요. 그 분들이 제일 똑똑하고 이미 일을 하고 있고... 그런 것이요. 나경원이 어떻게 원내대표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당대 정치 문법의 체화없이는 불가능하겠지요.(물론 요즘은 윤에 찍혀서 무척 힘들어 보이지만...) 오히려 ‘정치하는 엄마들‘ 같은 분들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언론은 관심이 없는 것도 같고요.

200원은 제가ㅋㅋㅋㅋㅋㅋㅋ 마음만 받을게요. 적립해 두겠어요.

단발머리 2023-01-20 11:47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은 바보 아니고요. 근자 들어 가장 핫한 투비 작가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흥해라, 잠자냥님!! 꼭꼭 흥해라!!!

공쟝쟝 2023-01-20 11:55   좋아요 3 | URL
저는 페미니즘 공부 통해서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해볼 법한 상상력이상의 상상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긴해요 (이게 재밌어요…) 그건 그거대로 계속해볼 생각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3-01-20 12:2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의 3장 <마르크스 주의 페미니즘>을 읽고 있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책은 이론을 잘 정리해준다는 장점이 있고, 마르크스 주의 페미니즘 부분은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아직 다 읽진 않았습니다만. 그리고 자유주의 페미니즘 읽다가 마르크스 주의 페미니즘으로 읽기를 넘어온 지금, 제 입장은 확실히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아니라는 거였어요. 저는 그보다는 마르크스 쪽이더라고요, 현재는. 물론 뒷장을 읽으면 또 어떤 식으로 바뀔지 모르겠지만요. 아마도 저는 젊지는 않지만, 단발머리 님이 설득하고자 하는 바로 그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자 운동으로 전락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말씀 충분히 이해하고 일리가 있지만, 그러나 ‘인기 있고 덜 위협적인‘ 것으로도 저는 이미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여성들의 현실이 바뀌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언론에서는 젠더갈등 심하다고 연일 얘기하지만, 실상 젊은 여성들의 과격한 발언(어떻게 그런 말을 해?)이 없었다면 사실 저는 여전히 김치녀, 된장녀, 맘충을 쓰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현저히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충분히 진보적이지도 못하고 충분히 급진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깜짝 놀랄만큼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젊은 여성들에 대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저야말로 단발머리 님의 말을 ‘듣지 않는‘ 바로 그 사람중에 하나인 것 같네요. 하핫;;

이런 제 입장이나 생각과는 별개로 저는 요즘 유연함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건 얼마전 친구를 만나서 얘기를 한 지점이기도 한데요, 그러니까 제가 페미니즘을 알면 알수록 분노가 쌓이고 급진적이 되면서 ‘너같은 놈들은 안돼!‘ 라는 마음이 가득했다면, 그래서 손을 놓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시간이 흘렀고 그 뒤로 유연해지기도 해서 제 생각은 더 급진적이 될망정, ‘너라는 개인의 입장에서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지‘ 라든가 ‘너는 나랑 생각이 완전히 다르구나‘ 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좋은 동료, 친구, 연인이 될 수 있다는거죠. 그러니까 뭐랄까, 가슴 속에 꽉 차있던 분노를 제가 스스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달까요? 어떤 말이나 행동 때문에 누군가를 잃었다면, 지금처럼 유연해진 지금 똑같은 말과 행동에 잃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일전에 단발머리 님도 그룹(혹은 단체)에 대한 반발감이 일 때, 그러나 그 그룹에 있던 애정하는 개인을 떠올린다, 그러면 조금 부드러워진다, 는 그 말씀과 맥락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표성을 미워할 수 있지만, 개인으로 놓고 보면 우린 사실 거기서 거기인, 다 부족하고 그러나 또 충분히 애정할만한 지점도 있는, 그런 개인들 이니까요.

잠자냥 2023-01-20 14:15   좋아요 4 | URL
500원 주고 싶다........

단발머리 2023-01-20 14:27   좋아요 4 | URL
여성의 현실을 바꾸는데 있어서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운동 방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운동 전체를 이끌고 가는 힘이 있죠. 미러링을 비롯한 강하다고 느껴지는 일련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락방님 말씀처럼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적 여성 혐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는 점도 이해하고요.

그리고 유연함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도 동의합니다. 젊은 여성들 내면에 쌓여진 분노가 여성주의 운동의 강한 동력이 되었던 것만큼,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면서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생각하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젊은 여성‘, 제 말을 당최 들으려고 하지 않는 여성은 구체적인 인물입니다. 저랑 같이 살고, 제가 차려준 밥을 먹는 사람이죠. 여성으로서 고단한 삶에 대해 제가 알고 또 이해하지만 저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할 여성이고, 또 아직은..... 아직은 제 삶/생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여성입니다. 저는 다락방님과 연대할 수 있고, 그 연대의 바탕에 애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여성과의 연대는 여전히 요원해 보입니다. 제가 가진 애정과는 상관없이요. 저는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운 마음 없이 이 상황을 이대로 받아들입니다. 제게는 뭐 다른 선택지도 없고요. 그 젊은 여성을 응원하기 때문이죠. 당최 듣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단발머리 2023-01-20 14:26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 거기 가셔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케익이 500원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1-20 14:53   좋아요 4 | URL
단발머리 님/ 어휴, 저 왜 단발머리 님 댓글 읽는데 눈물이 나죠? 그 구체적인 젊은 여성을 저는 페이퍼 읽을 때부터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던 바, 연대는 요원해 보이는 바 받아들이고 응원한다는 단발머리 님의 생각과 마음가짐이 어떤걸지 제가 감히 짐작도 못하겠네요. 이건 아마도 제가 아빠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른 지점일 것 같아서 말이지요. 늙으면서 눈물이 많아져가지고 툭하면 눈물이 나요 ㅠㅠ

잠자냥 님/ 제 계좌로 500원 쏴주십시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20 15:10   좋아요 3 | URL
에구..... ㅠㅠㅠ 다락방님.... (토닥토닥)

제가 오전에 이 글 올리는데 한 3-40분을 화면을 열어놓고 계속 망설였어요.

...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젊은 여성은 듣지 않는다. 내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라고 썼어요. 그러면 훨씬 더 명확하고 정확하죠. 그 대상이요. 근데.... 참 그렇더라구요. 제가 밥을 차려주기는 했는데 맛있게는 못해줬구요. 아니, 그래도....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도저히 못 먹을 음식도 저는 막 내놓습니다. 그렇게 못 먹였는데도 아이가 키가 커요. 미스테리죠. 화면을 쳐다보면서 계속 맘에 걸려서.... 마지막 문장을 빼고 바꿨어요. 듣지 않더라, 이렇게요.

큰아이는 저의 분신같이 느껴질 때가 많고요. 한국에서... 사춘기 여자 청소년의 고단한 삶을, 저는 아니까요. 이 아이와 저를 분리하면서 그러면서도 응원하고 연대하는게 제 몫이라고 여겨요. 제 말을 당최 듣지는 않지만요.

다락방님 마음, 제가 잘 접수했어요. 전, 그 마음 알죠. 알아요.....

책읽는나무 2023-01-20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전 페미니즘 책을 읽기 전까지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인 줄 알았습니다.
헌데 읽다 보니 부류가 다양하게 나뉘는 것에 좀 놀랐었고, 나는 어디에 속할까? 늘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나는 급진적인 페미니즘 쪽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요즘 10~20 대들이 서로 성비가 나뉘어 소통이 되질 않는데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많아지니...급진적 페미니즘을 밀고 나가는 게 맞는 것인가? 소통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나는 급진적은 아닌가 보다! 그런 결론을 내린 적 있었어요^^
근데 이 책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 이론과 맞물리는 비평들이 마구 섞여 지금 나는 누구인가? 가 되어버렸구요! 베티 프리단의 책을 읽으면 또 한없이 침울해지구요. 그래서 읽기 진도가 잘 나가질 않네요?ㅜㅜ
일단 전 꾸역꾸역 4 장 <정신분석 페미니즘>을 오전에 잠깐 읽었습니다.
2 장 자유주의 페미니즘 부분이 제겐 가장 부담스럽고 어지러운 편이었습니다. 기초가 부족하니 정말 너무 혼란스럽더군요? 공부가 부족한 걸 깨달았구요^^;;;
헌데 단발님의 예시는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 현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분명 논쟁거리가 되는 계급 문제가 있지만, 그 시점에서는 어쩌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도 생각지 못한, 행하지 못한 것을 앞서 나갔다는 것은 뒤에 따라올 사람에게 길을 터준 것! 길을 터주었기에 의식이 바뀌었고, 의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문제시 된 것을 바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평서의 작가는 비평으로 끝나는 것인지? 개인이 주장으로 강하게 밀고 나가고자 하는 것인지?
간혹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암튼 4 장 중반까지 읽으면서 급히 깨달은 건 아! 더 찾아 읽어야겠구나! 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이름이 너무 많이 나오네요^^;;;

단발머리 2023-01-21 17:01   좋아요 1 | URL
저는 책나무님의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이 책 읽으면서 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질문 같아요. 정희진쌤(제 독서인생의 영원한 원저자)께서도 그 질문 ‘나의 위치를 묻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구요. 그래야 빨리 배울 수 있고 깊게 배울 수 있다고 하셨어요 ㅎㅎ

저 역시 앞서서 길을 터준 여성들에 대해 고마워하고 또 그 공과에 대해 잘 살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재산을 ‘소유‘한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던 시대도 있었으니까요.
설 하루 전날이네요. 맛난 거 드시고 계시나요? 아니면, 전 준비하시나요? ㅎㅎㅎ

2023-01-20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1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3-01-20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뭔가 울컥하는 이 기분은 일종의 동료의식이랄까? ㅎㅎ
지금의 10대와 20대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는 절대 없어요. 심지어 저의 20대는 부모세대를-그 세대의 학력이나 업적이나 뭐 이런거 상관없이 세대 전체를 말이죠 - 철저하게 무시한 세대인걸요. 그런 제가 지금의 어린 여성들이 내 생각과 같기를 기대하는건 전 너무 비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ㅎㅎ
저는 요즘은 이론과 현실은 절대로 같을 수 없고 어차피 현실은 다양한 생각의 세력과 운동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뻔한 생각을 해요.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자리가 있고 그들은 그들대로 운동을 하며 사회를 바꾸고, 또 그 반면에 자유주의든 체제지향적이라고 욕을 먹든 그래도 필요한 작은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사회를 바꾸어나간다고요. 그 과정에서 내가 옳으니까 너는 죽어야 돼 이것만 아니면 된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단발머리 2023-01-21 17:10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댓글에 제가 형광펜을 쳤습니다.

이론과 현실은 절대로 같을 수 없고 어차피 현실은 다양한 생각의 세력과 운동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저도 잊지 않고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과격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지지합니다. 제가 그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크기는 하지만요. 다만 저의 위치가 있으니, 저와 가까이 있는 덜 과격한 사람들을, 더 과격한 사람들의 옆자리로 안내하는데 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바람돌이님!! 오늘 아침에 서울 영하 8도였는데 제 맘은 영상 3도였어요^^
 



















분명 어젯밤에는 <페미니즘의 이론과 비평>을 읽고 있었다. 참고하겠다고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을 페미니즘 책장에서 꺼내 옆에 두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이 책을 읽었는데,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서 읽고 있다. 반납일이 이틀이나 지났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ㅜㅜ)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읽으면서 르 귄과 마거릿 애트우드 사이의 ‘SF 논쟁에 대해 알게 된 나는, 마침 집에 있던 이 책 속에 애트우드가 자신의 글이 SF라는 걸 인정하면서 두 사람 간의 대화를 썼던 에세이가 들어있나 찾아보았다. (알고 계시는 분, 저 좀 알려주세요^^) 제목을 보면서 추측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글을 찾지 못했고, 대신 <우리는 어슐러 르 귄을 잃었다. 우리에게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를 보게 됐다. 그다음에는 <도리스 레싱>이라는 제목의 레싱에 관한 추모글을 읽었고, 글쓰기와 이메일 & 편지 쓰기, 그리고 레시피 박스에 관한 유쾌한 일기인 <글 쓰는 삶>을 읽었다. 그리고 이 글 <<시녀 이야기>를 회고하며>를 읽었다.

  


그때 우리 파티에 온 작가들 중에 35세의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다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전에도 심장마비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큰일날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거실에서 몰아냈고, 제가 911에 전화하는 동안 그레임은 여성과 함께 심호흡을 했습니다. 얼마 안 가 젊고 건장한 남성 구급대원 두 명이 응급처치 도구들을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몸들이 근육으로 터질 것 같더군요. (구급대원들은 근육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쓰러진 사람들을 이리저리 나를 수 있어요.) 대원들은 우리를 방에서 내쫓고 응급처치에 착수했습니다. (381)

 


알라딘 서재의 글을 좀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터질듯한 근육질의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리실 거라 생각한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 그 사람 맞다. 근육질을 좋아하는 그 사람, 그 사람 딱 맞다.

 

 


<시녀 이야기>에 대한 회고,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는 애트우드의 이 강의는 당대 페미니즘의 역사를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시녀 이야기』는 두 가지 사변적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을 제시합니다. (1) 만약 미합중국이 독재국가나 전제국이 된다면, 어떤 종류의 정부가 될 것인가? (2) 만약 여성의 자리는 가정인데 여성이 집을 나와 다람쥐처럼 사방을 돌아다닌다면, 그들을 다시 가정에 몰아넣고 거기 머물게 할 방법은 무엇인가? (388)

 



해답은 389쪽부터 쭉 이어진다. <시녀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찾아서 읽어보실 만한 좋은 글이라고 말씀드린다. 이 문단은 요즘 읽는 책과도 겹쳐 남겨 두어야지 싶다.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는 대학 교육을 받았음에도 너희의 진짜 학위는 미시즈(Mrs)라고 세뇌당했던 미국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이런 '집안의 주인' 세뇌가 크게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후미진 곳에 살았고, 여전히 하늘을 나는 말괄량이 어밀리아 에어하트의 날개 아래 있었습니다. 거기다 우리에겐 『샤틀레인(Chatelaine)』이라는 여성 잡지가 있었죠. (384)

 



마지막 문단(398) 속의 책의 운명에 대한 애트우드의 의견은 정희진 선생님의 것과 아주 똑같아서 역시 대가들은 서로 통하는구나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대가들은 서로 통한다.  

 

 

애트우드의 소설은 시녀 이야기, 그레이스, 미친 아담 3부작, 눈먼 암살자, 증언들,을 읽었으니, 8권을 읽었다. 전작을 결심했던 작가이니 마저 읽는다면 올해 읽자, 하는 마음이다. 살아계실 때 읽어야지, 하는 그런 마음.

 


존경하는 애트우드 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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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1-19 12: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 님 <나는 왜 SF를 쓰는가>에 르 귄 님과의 문제의(?) 대화가 있습니다요!

단발머리 2023-01-19 13:02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존경하는 마음.... 정말 한결같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사모하였고, 현실세계에서 접한 후 흠모하는 마음 더욱 깊어졌사옵니다. 곧 다시 만나 뵈올날을 고대하며.................

건수하 2023-01-19 13:02   좋아요 4 | URL
앗 제가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미 있네요 ^^

단발머리 2023-01-19 13:03   좋아요 3 | URL
수하님.... 존경하는 마음.... 정말 한결같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사모하였고, 현실세계에서 접한다면 흠모하는 마음 더욱 깊어질 것이옵니다. 곧 만나 뵈올날을 고대하며.................

다락방 2023-01-19 13:09   좋아요 3 | URL
와 이분들 왜이렇게 멋져요!! 대박!! 나도 책 사야겠다 ㅋㅌㅋㅋㅋㅋㅋㅋㅌㅋㅌ

잠자냥 2023-01-19 13:14   좋아요 3 | URL
언제나 책 살 핑계를 만드는 그대, 르 다락방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1-19 13:40   좋아요 3 | URL
좋은 책을 알게 되면 또 갖추어 두어야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1-19 13:45   좋아요 3 | URL
단발머리님/ 좀 과하다 생각하며 위를 보니... 복사 붙여넣기 신공을 쓰셨...
잠자냥님과 같은 말을 듣다니 그저 영광스러울 뿐.

저는 잠자냥님만큼 낯을 가리지 않습니다. 곧 만나뵙기를 고대합니다.. ㅎㅎ

라로 2023-01-19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도 나왔던 것 같은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단발머리 2023-01-19 15:39   좋아요 1 | URL
그 책도 함 찾아볼게요. 감사합니다, 라로님!!

라로 2023-01-19 16:43   좋아요 2 | URL
제가 착각했어요. 그 책에서 르 귄 여사가 그녀의 책에 대해서 쓰면서 애트우드 여사가 자기 글이 SF 라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쓰셨네요. ㅎㅎㅎ 죄송해요. 기억력이 없어서. 암튼 그래도 이 책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꼭 읽어 보시길요.

단발머리 2023-01-19 18:5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그 책 안 읽어봐서요. 목차 살펴보고 그 부분만이라도 읽어봐야겠어요. 헤헤헤.

공쟝쟝 2023-01-19 15: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년엔 노벨상 가실 수 있도록 💪💪💪

단발머리 2023-01-19 15:39   좋아요 3 | URL
힘 좀 보탭시다들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1-19 15: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단발님 애트우드님 찐팬이시군요. 많이 읽으셨어요! 저도 <증언들> 읽어야 하는데!
<타오르는 질문들>은 도서관 대출기한 내에 읽기에는 넘나 두꺼운 것..

단발머리 2023-01-19 16:30   좋아요 2 | URL
네… 이 책 넘나 두꺼운 것입니다. 묻지 않으셨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ㅋㅋㅋㅋ 시녀이야기 넘 좋지만 전 그레이스도 좋아하고요. 눈먼 암살자는 좀 어려웠어요. 한 권 고르라 하면 저는 미친 아담 시리즈 권하고 싶어요. 근데 3권이네요…. 하아….

건수하 2023-01-20 09:23   좋아요 2 | URL
저는 <눈 먼 암살자> 가 좀 어렵지만 제일 좋았고, <마녀의 씨>도 좋았어요 ^^

단발머리 2023-01-20 09:37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저는 미친 아담 시리즈요. 이제 결단의 시간이에요. 저에요, 수하님이에요? 🤔🤔🤔

건수하 2023-01-20 09:48   좋아요 2 | URL
음음. <미친 아담>도 좋았습니다... =ㅁ=
제가 <눈 먼 암살자> 가 더 좋았던 건 여성 서사가 좀더 많아서...

<증언들> 갖고 계시면 독서괭님 당장은 안 사실 (혹은 안 읽으실) 것 같은데요 ㅎㅎ

독서괭 2023-01-20 10:03   좋아요 2 | URL
둘다 아닙니다. 추천하신 책들 다 안 가지고 있으므로.. 전 책을 안 살 것이므로.. 내년에 고민해볼게요. -단호박괭

독서괭 2023-01-20 10:06   좋아요 2 | URL
이거 달고나서 수하님 댓글 봤네요.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23-01-20 10:09   좋아요 1 | URL
(털썩!) 이거 아닌데요. 제가 그리던 그림 이게 아니고….. 독서괭님이 ‘그럼 미친 아담 시리즈 책들은 많이 두꺼운가요?‘ 라고 물으시는건데…. 그럼 제가 아니에요… 이러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1-20 10:12   좋아요 1 | URL
음 <미친 아담> 시리즈가 두껍지만. 엄청 잘 읽힙니다.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일인가…)

단발머리 2023-01-20 10:14   좋아요 1 | URL
아무 소용 없어요…. 저는 미친 아담파에요. 수하님 암살자파 ㅠㅠㅠㅠ 히잉 😔😔😔

독서괭 2023-01-20 10:15   좋아요 2 | URL
무슨 조폭 이름 같습니다. 미친아담파 암살자파.. ㅋㅋㅋㅋ

건수하 2023-01-20 11:38   좋아요 2 | URL
특히 암살자파요... ‘눈먼‘이 들어가면 갑자기 약해지는 느낌 ㅋㅋ

단발머리 2023-01-20 11:42   좋아요 1 | URL
아담파도 어마무시하잖아요. 우아... 아담파 ㅋㅋㅋㅋㅋ 근데 저는 미친 아담파라니까요. 무조건 이깁니다, 암살파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1-19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어떤 질문이든 하면 답이 자동으로 뜨는 알라딘 서재동네. 내가 답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자랑스러운지.... ^^
애트우드 여사의 책은 3권 읽었네요. 나머지 책들도 찾아봐야지하는데 또 저의 위태위태한 책탑이....ㅠ.ㅠ

단발머리 2023-01-20 11:41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충분히 자랑스러워 하셔도 돼요. 여기는 책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완성형! 알라딘서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태위태한 책탑 사진 또 올려주세요. 너무나 탐스러웠습니다. (쓰윽) (침 닦는 소리)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고 나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던 문단은 여기다.

 


메리 셸리의 유명한 일기가 주로 자신과 퍼시 셸리의 독서 목록 일람표라는 사실이 그녀의 이례적인 과묵함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일화는 메리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이, 대다수 작가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지적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빈번하게 감정적인 행위였음을 강조한다. 특히 메리 자신은 어머니를 전혀 몰랐고, 사랑하는 남자와 가출한 뒤 아버지가 자신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메리가 자신을 정의하는 주요한 방식은 (그녀가 『프랑켄슈타인을 썼던 시기, 그리고 셸리와 함께한 초창기 때는 확실하게) 일차적으로는 독서, 그 다음으로는 쓰기였다. (417)

 


메리의 일기가 사실 독서 기록이었다는 것. 그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허락 받는 느낌이었다.

 

 


2020,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쳤다. 모든 사람이, 모든 국가가 똑같은 상황, 똑같은 위기에 처했다. 열 나도, 토해도, 바람 불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학교에 가야 했던, 개근상에 목숨 걸었던 기억이 있는 세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학교 가지 않는 날들이 오래 이어졌다. 아침, 점심, 저녁.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의 지난한 반복이 계속됐다. 2주마다 이어지는 온라인 수업 연장발표에 집 안에는 희비가 교차했다. 물론 내가 맡은 쪽이 비(울분과 슬픔과 원망의) 쪽이었다.

 


아무 곳도 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현재답답함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시작하는 마음은 언제나 화이팅이 넘치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침, 점심, 저녁의 식단표였다. 장보기(20), 크린토피아(2), 커피숍(3), 도서관(10)에 머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콕. 남은 시간을 모두 집안일에 쓴 것은 아니지만 집 안에 (갇혀) 있을수 밖에 없는 매일이었다. 코로나가 얼추 수그러들면서 코로나 일기가 여러 권 출간되었다. 똑같은 시간을, 정확히는 더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밥을 짓고 밥을 먹고 서로에게 힘이 되고 그리고 기록을 남겼다. 개인의 기록, 지극히 사적인 기록들이, 시대를 표현하는 한 면이 되었다.  

 

 


<알쓸신잡>의 후속편의 후속편인 <알쓸인잡>을 즐겨 본다. RM이 보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고(RM을 좋아하기는 한다), 심채경 보고 싶어서 본다. 김영하도 같이 나와서 좋다.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심채경 씨가 중학교 때 썼던 일기 이야기를 했다. 데스노트와 같았던, 극한 감정과 미움의 발산 장소였던 일기가 있었기에 자신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받아서 법의학자 이호 씨가 이런 말을 하시는 거다. 나의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건 미래를 생각하는 거거든요. 희망 없인 일기를 쓰지 않아요.

 


 






이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던 건, 내가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된 비밀용일기는 후에 제출용일기가 필요 없어진 중학교, 고등학교 때를 지나 대학 때까지도 이어졌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일기를 계속 썼다. 주로 일상적인 일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생각, 고민, 걱정 그리고 기대가 담겨 있었다. (마무리는 항상 기도였다. 이 습관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기를 계속해 써왔던 내가, 일기를 끊었던때가 퇴사 직후였다.

 


큰애보다 5살 정도 어린아이를 가진 친구에게 말일기를 쓰라 가르쳐주었다.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말을 연습하는 아이들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말들을 잘 기록해 놓으라고 알려주었다. 모범생인 내 친구는 조언대로 따랐고, 지금도 가끔 네 덕분에 아이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잘 남아있다면서 고마워한다.

 


하지만, 나는 정작. 정작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 예뻤고 너무 귀했고 또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만족했고, 행복했지만,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 앞에는, 이 아이의 삶 앞에는 크고 신나고 놀라운 내일이, 미래가 펼쳐져 있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이제, 끝났다고. 나한테 기대하는 다른 미래는 이제 없다고. 그때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결심이 잦은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기쓰기를 새로 다짐하게 되는 건, 알라딘의 존경하는 이웃 몰리님의 글 덕분이다. 몰리님의 글을 캡처해서 핸드폰에 넣어둔다. 꺼내서 한 번 더 읽고 다시 결심한다. (https://blog.aladin.co.kr/zauberberg/14236599)

 




 



 

그리고 이 책

















츠바이크는 이미 숱하게 쓰이고 읽히고 전해진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여러 사료를 폭넓게 조사한다. 중요한 기록은 일기와 편지이다. 츠바이크는 이렇게 쓴다. 

 


그뒤의 나날은 불멸의 문자로 세계사에 새겨져 있다. 단 한 권의 책만은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둔감하기 짝이 없는 루이16, 그가 썼던 일기장이다. 그 일기장의 7 11일의 대목에는 "아무 일도 없음. 네케르 씨 출발"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며, 국왕의 권력을 결정적으로 때려부순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이 일어났던 714일 역시 똑같은 비극적인 언어, "아무 일도 없음" 이라고만 적혀있다 ㅡ 즉 사냥도 하지 않고 사슴을 쏘아 잡은 일도 없었으므로 유달리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파리에서는 이날을 전혀 다른 날로 생각했다. 국민들은 그날을 자유 의식의 탄생일로서 축하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261)

 

 


이 책을 읽어야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루이 16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었고 성격이 온화했다. 피난 가는 와중에도 식욕이 줄어들지 않았고, 먹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모욕당했을 때도 밤이면 숙면을 취했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겠다고 고집 부리는 일도 흔하지 않았다. 그가 쓴다. 아무 일도 없음.

 


평범한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는 좋은 농부, 좋은 귀족, 좋은 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는 끝까지 우유부단했기에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프랑스의 왕인 그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라는 대사건앞에서도 그는 쓴다. ‘아무 일도 없음’. 더 잘 볼 수 있는 위치에서도 그는 보지 못했다. 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판단의 몫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사냥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사냥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이렇게 세 권의 다이어리를 준비했다. 알라딘의 피너츠는 독서 기록용이고, ***의 빨간 다이어리는 속마음 토크를 위한 일기용이다. 달인 선물로 받게 된 마티스 다이어리는 메모용으로 정했다(제일 마음에 든다). 그래서 다시 부르는 나의 노래는.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그려야 할까.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써야만 하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들 사랑의 이야기.

 

 


이 노래 모르시는 분은 유튜브에서 젊음의 노트검색 바랍니다. 생각보다 옛날 노래라 깜짝 놀라실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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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8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18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1-18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알쓸인잡 매주 봅니다. 본방보다는 다시보기로 거의 보지만... 출연진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어요. 2020~2021년 많은 여성들이 집에서 집콕을 강제하며 보내야 했던 날을 생각하니 마음이 묵직해집니다ㅜㅜ 저는 마티스 다이어리 책 인용구 노트로 쓰고, 피너츠는 간단하게 책 감상기를 적고 있어요. 일기는 마음의 해방구 같은 것이지요. 단발머리님에게 일기가 좋은 친구 사이로 계속되길 기원합니다.

젊음의 노트 입모양으로 읊조리고 있어요!~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8 14:22   좋아요 1 | URL
알쓸인잡 팬이시라니 반갑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이제 코로나는 지나갔지만 삶의 형식이 확 변한게 느껴져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요.
거리의화가님 따라서 저도 마티스 다이어리, 인용구 노트로 쓰렵니다. 메모할 게 별로 없습니다, 저는 ㅋㅋㅋㅋ 보내주신 응원 감사합니다. 근데 제 생각보다.... 나이가 있으신데요? 이 노래를 아시다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1-18 14:49   좋아요 1 | URL
음... 원래 댄스를 좋아해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그런 노래를 많이 흥얼거렸던 것 같아요. 그 세대는 아닙니다!ㅋㅋㅋ

다락방 2023-01-18 1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매일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생각나면 일기 쓰는 일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가 재작년부터였나 뭔가 시들해졌어요. 거의 안쓰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제 삶에 이제 희망이 없어서 일까요.. 희망을 찾자, 희망을.
올려주신 몰리 님의 저 다이어리 사진 보니 너무 근사하네요. 저도 .. 영어로 쓰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올려주신 노래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손 번쩍!!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8 14:28   좋아요 1 | URL
저는 작년 일기장 살펴보니 빈 칸이 너무 많더라구요. 그리고 너무 힘든 날에는 안 썼더라구요. 중타(?)로 힘든 날 일기를 썼구요. 그럼 작년 한 해가 온통 힘들었나 그건 아니구요. 귀찮아서 안 쓴 날도 많았습니다. 찾아진 희망을 잘 부여잡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올해는 일기쓰기 잘 해보자구요. 영어로는 ㅋㅋㅋㅋㅋㅋ 전 반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은 이 노래 아실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1-18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 없인 일기를 쓰지 않는다, 멋진 말입니다!!
저는 마티스 미니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성인된 이후 늘 일기쓰기는 작심삼일, 길어야 한달이었는데 작년 8월경부터 시작한 일기쓰기는 꾸준히 하고 있고 올해는 아직까지 가득 채우고 있네요^^
코로나 시절 갇혀 지내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지. 어휴. 저도 애들이랑 같이 코로나 걸려 격리되어 있다가 격리 해제 후 회사 나온 날 너무 기뻤답니다. ㅠㅠ 전 완전 집순인데, 혼자 있을 떄만 좋은 것 같아유..
아이가 한 말 기록하려고 해도 조금만 지나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바로바로 기록은 어려워서 저도 거의 없습니다. 동영상으로 남긴 것들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네요. 일기는 그냥, 나를 생각하며 쓰는 게 좋은 듯해요.
단발님의 일기 쓰기 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23-01-19 18:58   좋아요 1 | URL
우아... 독서괭님 새벽기상에 미라클 모닝 게다가 일기쓰기에 알라딘까지.... 정말 멋지셔요!!!
아이들과 집에 갇혀 있는 기분은 뭐... 뭐라 말할 수가 없죠. 저도 법정으로 보장된 육아휴가 반납하고 출근하시는 분들 이야기 들은 적 있구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그냥 저만 생각하며 일기쓰기 해볼게요. (근데 자신은 좀 없.......)

건수하 2023-01-18 14: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에서 검사를 안 한 이후 오빠가 자꾸 일기 훔쳐봐서 안 썼는데요...
블로그에 매일매일 끄적거리다보니 위안이 되어서

올해부턴 미니 다이어리, 마티스 아니고 고양이 다이어리에 일기를 써야지! 했는데
18일 중 3일인가 쓴 것 같아요 하하하...
눈에 띄는 곳에다가 둬야겠어요.

그런데 이 미니 다이어리 쓰기가 좀 불편하더라고요... 두꺼워서 손이 바깥으로 빠지는데 불안정해요... ㅠㅠ

코로나 시절이 저에게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답니다.

단발머리 2023-01-19 19:01   좋아요 1 | URL
18일 중 3일 쓰셨다고 하니 이..... 동질감 도대체 어쩔 것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쓸 거 없는 날에는 루이 16세처럼 아무 일도 없음, 이라고 쓰려고 합니다. 미니 다이어리, 저는 아직 많이 사용 안 해서 모르겠는데, 그런 애로사항이 있군요. 역시 한 가지 좋으면 한 가지가 부족하고요 ㅋㅋ

수하님의 코로나는 페미니즘과 연결되는군요. 다음에 그 이야기도 우리 ..... 나눠봐요!!

은오 2023-01-18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 쓰면 좋을 것 같고 시간이 흐른 뒤에 읽으면 너무나 재밌을 것 같지만...초등학교 때 개학식 전날 방학일기 30일치를 몰아서 쓴 기억이 마지막입니다...
단발님이 일기를 오랜기간 쓰셨어서 글을 잘쓰시나 싶기도 하고요. 일기 쓰는 분들 너무 멋집니다!!
그리고 단발님이 rm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접수했습니다. 심채경과 김영하를 뒤에 언급하셨지만 rm이 먼저 튀어나오신걸 보면 rm이 본심이신 것 같은데
아무튼 rm을 좋아하신다고하니 rm을 닮아보도록(?)아니 근데 rm 못생겼는데, 하... 닮아보도록 하진 않고 아무튼 알고 있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1-19 19:04   좋아요 0 | URL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비밀일기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애가 2교시 끝나고 내 자리로 와서는..... 막 이런 거 적혀 있어요. 부끄럽네요 ㅋㅋㅋㅋㅋㅋ이사 꽤 다녔는데 아직 잘 있단 말입니다. 걱정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잘 숨겨야 할텐데요.

그리고... 제가 rm 좋아하는 거 자체는 사실이지만 심채경씨 너무 좋아하고요. 김영하씨도 ㅋㅋㅋㅋ 김상욱 박사는 강의도 들었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달의 당선작 아시지요? 저는 김영하씨 책으로 리뷰만 쓰면 이달의 당선작이 되서요. 김영하씨에 대한 호감이 아주 깊습니다. 하하하.

바람돌이 2023-01-18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아 알아요 저 노래. 유미리씨의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부르짖던 노래.... ㅎㅎ
저는 세상에서 일기쓰기가 제일 어려운거 같던데요. 매일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게 참 쉽지 않잖아요. 단발머리님의 올해 일기쓰기 응원 기원 팍팍!!!! 그런데 이렇게 일기를 쓰고 쓰려고 노력하고 이런 분들 글도 잘쓰는건 진리인듯요. ^^
알쓸인잡은 저도 좋아하는데 저 말 기억나요. 저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요.
그러면서 나는 왜 일기를 안쓰지? 아 그냥 내가 사는게 너무 편했구나 뭐 그런 생각도 했달까요. ㅎㅎ

단발머리 2023-01-19 19:07   좋아요 1 | URL
아, 알아주시는 바람돌이님! 가수 이름까지 딩동댕!!
일기쓰기 응원을 제가 모조리 싹싹 긁어담아 제 일기장에 묶어두겠습니다. 꾸준히 일기쓰는 단발머리로 돌아올게요 ㅋㅋㅋㅋㅋ

알쓸신잡이 저는 좋았는데요. 그래도 알쓸범잡 보다는 알쓸인잡이 낫고요. 약간... 준비한 대본 읽는 느낌이 아쉽습니다. 그냥 대본 없이 팍팍 던지는게 전 좋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1-18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모든 좋음은 맥락적입니나.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을 알고 세계를 알고 자신과 관계된 타인들을 알아야 합니다. 타고난 성향이, 지위가, 외모나 재력이 쉴드를 쳐주는 것도 어느 순간까지라고 생각됩니다. 진짜 좋은 사람에게는 공부가 꼭 필요한 이유겠지요. 저는 현시점에서 그걸 알고 가장 잘 다루는 사람들(?)이 일부 극 소수의 여성연예인이라는 생각이 좀 들때가 있어요. 어쨌든 루이16세의 비극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모두의 비극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모두가 너무 자유로워져버린. 자신을 공부해야만 하는.

단발머리 2023-01-19 19:08   좋아요 2 | URL
그걸 아는 사람들....일부 극소수의 여성연예인,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똑똑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가수 보다는 특히 배우라면요.

모든 좋음은 맥락적입니다. 에 밑줄! 쫙!
 



 















간만에 외출을 했다. 장보기와 교회 이외에는 외출하지 않은 게 한 달이 넘었다. 핸드폰 앱 달력에는 모두 병원 예약뿐이다. 피부과와 정기 검진 이런 종류여서 걱정되는 병원행은 아니다. 엄마나 아이, 모두 혼자 갈 수 있을 터이나, 그렇게 보내기는 내 맘이 그러하니 굳이 같이 간다. 집보다 집 밖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병원행도 즐거운 외출이다. 외출하면서 들고나온 책은 <어슐러 K. 르 귄의 말>이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걸 추구하는 나로서는 이 아름다운 책을 들고 나가기 정말 싫었지만, 집에서는 아무래도 두꺼운 책을 읽게 되니 고이 모셔만 놓으면 언제 읽게 될지 몰라 북커버를 입혀서 들고나왔다. (고이 모셔 놓은 모습)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 보다 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114)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고전이 서구 유럽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의 기록이라는 걸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겠으나, 여전히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언어보다 더 인간적인것으로 여겨지는 현실. 여성의 업적이란 건 우연이고 컬트이며 남성의 업적은 길이길이 남아 문학사의 한 줄기 빛으로, 라는 이런 해석. 우리만이 아니라 유럽도, 미국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참 아쉽기는 하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여기.

 


애트우드가 자기 작품이 SF가 아니라고 하는 건, SF를 무척 좁게 정의해서예요. 애트우드가 생각하는 SF는 사실 판타지에 가까워요.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과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다룬다는 거죠. 미안해요, 매기. 하지만 그건 SF의 정의가 아니에요. 많은 SF는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반으로 추론할 때도 많은데, 사실 그게 애트우드의 SF가 하는 일이죠. 지구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특히 정치적인 방식을 가져다가 그걸 기반으로 추정한 미래를 그리면서 끔찍한 가정, "세상에, 이렇게 되고 말 거야"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지만 사실 그건 오래된 SF 기법이에요. 왜 자기 작품이 SF라고 불리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123)

 


진짜 이 부분 읽는데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르겠다. 여기, 마거릿 애트우드가 있다. 여기, 어슐러 K. 르 귄이 있다. 애트우드의 책 <홍수의 해>에 대해 르 귄이 리뷰를 썼다. 애트우드가 답한다. 아닌데요? 내가 쓰는 거, 내 작품은 SF 아닌데요? (여기서 한 번 웃어 주시고) 르 귄이 말한다. “미안해요, 매기. 하지만 그건(당신이 말하는 건) SF의 정의가 아니에요.”


 

SF의 정의를 좁게 봐서 그래요. 당신이 쓰는 거, 그거 SF에요. , 이런 대화를 나누는 대가들을 보시라.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두 번은 받았음 직한 이 대가들의 소박한 대화. 나중에 애트우드는 스스로가 SF를 쓴다는 점을 시인했고, 르 귄과 이 문제를 두고 주고받은 대화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124)

 


여기에서 두 사람의 신뢰를 본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거나 혹은 네가 감히 나한테? 의 삐뚤어진 마음 없이.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사이. 이건 이거야. ? 아닌데요? 그거, 그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건 그거가 맞아요. 그래요? , 그런 거 같네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당연히 끈끈한 애정이 자리하고 있을 테다. 한참을 웃었고, 포근해진 마음에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내 기억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서 쉬운 일이기는 한데, 앞으로 나도 그래야지, 다짐하게 된다. 나도 그래야지. 나도 후퇴를 잘하는 사람이 될 거야. 마지막까지 우기는 사람 말고, 뒤로한 걸음 물러서는 사람. 양보하는 거 아니고, 후퇴. 봐주는 거 아니고, 인정. 이렇게 말이다.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는 너무 좋다. 많이 읽은 줄 알았는데, 겨우 두 권 읽었다. 앞으로 읽고 싶은 책 중에 골라 보자면 이렇게 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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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1-17 1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던 책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누군가를 존경했던 사람이란 대목이 있었어요. 단발머리님이 그 증거네요. 애트우드와 르귄의 대화에 저도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기운으로 오늘 하루도 으쌰으쌰😆

단발머리 2023-01-17 13:43   좋아요 2 | URL
르 귄이 세상을 떠나고 애트우드가 썼던 글 제목이 ‘우리는 어슐러 르 귄을 잃었다, 우리에게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더라구요. 존경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쁨과 먼저 보내는 아픔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미미님 댓글에 오히려 제가 힘이 나네요. 우리 열심히 오늘 하루 살아보자구요!! 뽜야!!

다락방 2023-01-17 13: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르 귄님 너무 대호감 되어서 르 귄 님 책을 천천히 다 읽어볼까 합니다!

단발머리 2023-01-17 13:44   좋아요 1 | URL
참 좋은 계획이십니다. 저는 <어스시> 시리즈 1권에서 두 권 엎어진 사람이라서 ㅋㅋㅋㅋㅋ 자신 없습니다만 그래도 도전하고 싶기는 해요. 우리, 르 귄 읽어야 되는 사람이잖아요. 허허허.

잠자냥 2023-01-17 13:2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랑 르 귄 님 대화 저랑 다부장님 대화 같지 않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3:49   좋아요 3 | URL
신뢰와 애정이 바탕이 된 티키타카의 정점이죠. 애트우드 vs 르 귄 버전 보다 잠자냥님 vs 다락방님 버전이 5배 재미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1-17 13:47   좋아요 5 | URL
아니 ㅋㅋㅋ 내가 아무리 자뻑 대마왕 이라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르 귄과 애트우드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3:50   좋아요 3 | URL
이미 자뻑 대마왕 우리 다 알잖아요 ㅋㅋㅋㅋㅋㅋ쓰는 김에 쫌만 더 쓰세요 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1-17 14:06   좋아요 3 | URL
알고 보니 잠자냥 다락방보다 자뻑 100배 심한 것으로 알려져......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4:16   좋아요 5 | URL
여러분!!!!! 잠자일보 2호의 표제 나왔습니다.

<<충격 속보 >>

잠자냥, 자뻑 대마왕 다락방보다 자뻑 100배 심한 것으로 밝혀져 ....

육고 미모 속에 감춰진 잠자냥의 민낯 (정해진 부수만 발행하는 관계로 서둘러 결제 바랍니다. 늦으면 놓쳐요!!)


잠자냥 2023-01-17 15:54   좋아요 3 | URL
르 다부장! 공감이 벌써 3개나 달렸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1-17 14: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책 상할까봐 북커버 입혀 나가시는 모습에 반하고 갑니다. 저도 그래요.

유수 2023-01-17 15:17   좋아요 2 | URL
거리감 느껴서 좋아요 누르고 가요.

은오 2023-01-17 15:20   좋아요 2 | URL
단발님 유수님 선점 포기하셔야겠는데요? 우리같은 책손상 혐오파는 책 막 다루는 사람 힘들지 않습니까 ㅋㅋㅋㅋㅋ 하 유수님...

유수 2023-01-17 15:21   좋아요 2 | URL
막 안다뤄여. 성인 adhd일 뿐이야.

은오 2023-01-17 15:27   좋아요 2 | URL
그렇다면 거리감 다시 좁히겠습니다.

유수 2023-01-17 15:36   좋아요 2 | URL
아니 그런데 거리감은 제것.. 제가 차후에 좁힐게요♥️

단발머리 2023-01-17 20:05   좋아요 3 | URL
은오님 / 제가 북커버에 좀 약해요. 책 아끼는거에 집착하는 편이라... 앞으로 좀 두고 볼게요 ㅎㅎㅎ

유수님 / 거리감 조절 잘하시기 바래요. 은오님 훅 들어오는 스타일이라서요 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1-17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왓챠 보다가 한석규가 김서형에게 그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정~˝ 을 두 번이나 말하던데 오늘 단발님 글 인정 대목에서 순간 한석규가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르 귄 님과 에트우드 님도 대화가 그렇게 읽히네요.
아....집에 르 귄 님 책 있는데 읽고 싶다!!!
하지만 좀 참을랍니다. 읽던 책들 마저 읽고~^^;;;;
아 언제 다 읽지?ㅜㅜ

단발머리 2023-01-17 21:37   좋아요 2 | URL
저는 두 대가의 이런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좋더라구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막 이러면서 말리는 모습? ㅋㅋㅋㅋ
저도 이제 여성주의 책 얼른 읽어야해서요. 언제 다 읽을까요, 우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1-18 14: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말 시리즈 아직 한권도 못 읽었는데, 좋아보여요. 애트우드랑 르귄이라니.. 여기 우리 북플의 애트우드랑 르귄 사이 댓글대화의 고급버전입니까? ㅋㅋㅋ 이 두분도 공식 인터뷰 진행하시면 고급지게 투닥거리실 거예요. 그쵸?

단발머리 2023-01-19 19:10   좋아요 1 | URL
이 두 분도 공식 인터뷰 하셔야지요. 알라딘 TV로 생중계해야 할 텐데요. 댓글로도 이렇게 불꽃 튀는데 실제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급의 정점이지요 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1-18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후퇴가 좋은 후퇴군요. 르 귄과 애트우드의 대화 너무 좋네요. 저도 단발머리님처럼 배워야지....
아 오늘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 신청했다가 SF, 로맨스, 무협은 구입을 지양한다는 거절문자를 받고 제가 얼마나 빡이 쳤는지..... 이건 후퇴하면 안돼 하면서 막 세게 말하고 싶었는데 뭐 모를수도 있지 하면서 정중하게 다시 재검토를 부탁한다는 글을 올렸어요. 렘은 세계적인 거장이고, 렘의 책이 안된다면 도서관에 있는 테드 창이나 켄 리우 옥타비아 버틀러 책들 다 빼야 한다고요. ㅎㅎ 이렇게 후퇴를 하는거 배워야 한다 해놓고 역시 못하는 것도 참 ..... 병인듯합니다. 앞으로 잘해야지..... ㅠ.ㅠ

잠자냥 2023-01-18 23:06   좋아요 3 | URL
엥?! 렘이 거절당했다고요?!?! 세상에나.

바람돌이 2023-01-18 23:32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ㅠㅠ 우리 사서님 편견이 너무 심하셔... ㅠㅠ

단발머리 2023-01-19 19:12   좋아요 2 | URL
스타니스와프 렘은 저는 처음 듣는 작가에요. 그쪽으로 세계적인 거장이군요. 장르 작가를 대하는 이 좁은 시야 ㅠㅠㅠ
사서님 안타까워서 어째요. 저희 도서관 사서님도 함 시험해 보고 싶어지네요. 저도 신청해 볼래요!!

그레이스 2023-01-20 11:44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댓글 읽고 저도 신청해볼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습니다 .^^
한 2년 동안 수서담당 선생님 자문을 해 봤는데, 힘드시더라구요, 원칙이 없으면 민원이 많대요 ㅠ
저건 되는데, 이건 왜 안되냐 하고...;;
막상 사서분들은 넘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신 듯요.

이 책 넘 궁금하네요^^

단발머리 2023-01-21 17:12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 저는 오늘 저희 동네 두 곳 도서관 홈피 들어가봤는데 희망도서 신청기간이 아직 안 되었더라구요. 저희 동네는 11월쯤 희망도서 신청 마감하고 연초에 다시 시작하는데 아직 준비중인 모양입니다.
구입 여부 판단하시는 사서님들도 애로사랑 많으시네요. 그래도 함 신청해보려구요^^
 


















<연애 빠진 로맨스>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대화 vs 섹스장면이겠지만 내가 꽂힌 건 다른 장면이다. 연애도 섹스도 안 되는 상황을 한탄하던 함자영 (전종서 분)섹스 이슈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술에 취한 채로 남사친에게 말이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야.

너 지금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뭔지 알아?

2, 30대들의 해소되지 않은 성욕이 골칫거리 1위라 이거야.

이게 무슨 뜻일까?  

영어 잘해도 소용없다 이거지.

 


이 영화를 어느 아침에 봤다. 그 시간만 혼자일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안방 침대에서 누워봤는데 빵! 터졌다. 막 웃고 싶었는데 혼자여서 그 즐거움과 기쁨을 맘껏 누릴 수가 없었다.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 그게 바로 해소되지 않은 성욕의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여전히 영어 식민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해소되지 않은 성욕의 문제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크게 영어가 골칫거리라는 뜻일 테다.

 



작년에 연말 페이퍼를 정리할까 말까 하면서 읽었던 영어원서를 살펴봤다. 알라딘 서재 이웃님들은 모두 태평양처럼 드넓은 마음의 소유자이시기에, ‘못해도 잘했다칭찬해 주시는 분들이시기에, 올해도 무념무상 사대주의의 정점 원서 책탑을 찍어보려 했다.

 


2022, 최고의 원서를 고르자면 이렇게 3권을 고를 수 있겠다. 로맨스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던 <Love Hypothesis>, 레드의 강렬함을 보부아르와 함께 <How to be You>, 그리고 쎈언니의 정석 필리스 체슬러의 <An American Bride in Kabul>.

 




 












역시 최고의 한 권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 윌리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책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너무 로맨스였던 것이다. 너무 로맨스다. 아래의 글에서 섹스 무용론을 펼쳤던 내가 진정 이 책들을 읽었던 것이냐. 믿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을, 나의 과거를, 나의 읽기를.

 

 











그럼 내게는 로맨스 소설만 있는 것이냐. 그건 아니다. 네이버의 블로그에는 사 놓고 안 읽은 영어책이라는 비공개 폴더가 있다. (저도 비밀이란 게 있는 사람입니다) 50번째 책이 <The Right to Sex>이고, 51번째 책이 친구가 보내준 <Josh & Hazel’s Guide to Not Dating>이다. (읽은 책들도 있으니 사 놓고 안 읽은 책들 35권 정도인 것 같다) 내게도 근사하고 멋지고 좋은 책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읽기가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유달리 매서웠던 올겨울의 바람처럼 내 마음을 스쳐 간다.

 


 

이런 말 하는 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영어로 글을 써서 먹고살았다. 너무 비장해 보이니 직장인 모드로 바꿔 말하자면, 내가 출근해서 하는 일의 65퍼센트가 영어 문서를 읽고 영어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읽고 해석하고 정해진 폼에 맞춰 글을 쓰는 일이어서 루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회사에 들어와서 영어 실력이 늘었다고 말하는 선배가 있었다. 나는 그 마법을 체험하기 전에 퇴사를 했고. 그다음은 모두 슬픈 이야기.

 


나는 아직도 흔들리고, 아직도 모르겠다. 여전히 어휘냐 구조냐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답을 몰라서라기보다는 답의 실행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가진 원서들은 모두 촬영용이고 데코용이고 장식용이니.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뭐가 뭔지 모르겠고, 그래서 청춘이다. 아파서 청춘이다.

 

 



어제부터 <The Right to Sex>를 읽는다. 30쪽 넘기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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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1-15 22: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안 읽는 책이 아니라 ‘아직 안 읽은‘ 책이라고 우기렵니다. 우리집에도 그런 책들이 아휴 수도 없이 쌓여서리 ....

잠자냥 2023-01-15 22:46   좋아요 2 | URL
저도….;;;;

단발머리 2023-01-15 22:4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여기서 이렇게 고백하시고 ㅋㅋㅋㅋㅋ 네, 저도 ㅋㅋㅋㅋ ‘아직’을 넣어야 합니다.

건수하 2023-01-16 08:43   좋아요 0 | URL
원서는 아니지만 저도 그런 책 매우 많.. (원서도 몇 권 있구요 ㅎㅎ)

은오 2023-01-15 2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영어로 글써서 먹고살았다고하시고 원서읽으시는거 너무멋져서힘들어여ㅜ

잠자냥 2023-01-15 23:24   좋아요 4 | URL
이 사람 10인과 폴리아모리 가능하다…

은오 2023-01-15 23:25   좋아요 2 | URL
결혼신청은 변자냥님한테만 했습니다

단발머리 2023-01-15 23:25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을 젤 좋아하는 거 같애요. 쟝님 다음으로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1-15 23:36   좋아요 3 | URL
은오님 저는 거절에 서투르니까 청혼하지마요. 물론 비혼주의긴 한데요…

단발머리 2023-01-15 23:40   좋아요 3 | URL
사랑이 넘치네요 진짜 ❤️🧡💛💚💙💜

은오 2023-01-16 00:32   좋아요 3 | URL
단발님/ 쟝님은 제 운명의 상대구여... 변자냥님은 자꾸 튕기니까 더 들이대고 싶은 사람... 여기 너무 좋은사람들 많아서 괴로워요 ㅜㅜ 단발님도 제 질척임 대상에 추가되셨으니 마음의준비를 하시길바랍니다

쟝님/ 아니 이 선거절은 뭐죠? 정말 섭섭하네요 ㅡㅡ

책읽는나무 2023-01-16 0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맛난 것들을 먹으며 읽는 로맨스 원서는 더 달달했을 듯 합니다!!ㅋㅋㅋ
영어로 글 써서 먹고 살았다!
어쩐지..뭔가 달라보였었어요.
그러니까 단발머리님은 단발머리님이 아니신 거죠?
암튼 저도 하트 더 추가되었습니다.
하트 남발하게 만들어 버리는 주인공이시군요ㅋㅋㅋ

단발머리 2023-01-17 12:21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읽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먹기 위해서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발머리이며 단발머리는 아닙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요즘 별명은 사자머리, 폭탄머리 등등입니다.
하트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하트 잘 모아놓을게요.

건수하 2023-01-16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영어랑 정말 친한 분이셨군요. 역시 멋져...

단발머리 2023-01-16 08:57   좋아요 2 | URL
저 영어랑 친한 사람인데 ㅋㅋㅋㅋㅋ 영어가 절 안 좋아해요 ㅋㅋㅋㅋㅋ 나의 끈질긴 짝사랑 💕💕💕

다락방 2023-01-16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섹스할 권리 영어 단어들이 너무 읽기 싫게 생겼어요 ㅠㅠ 저는 어쩔 수 없이 튕겨져 나와요. 이런 저는 도대체 언제쯤 영어랑 친해질까요? 단발머리 님의 매일 30쪽 응원하면서, 저도 잭 리처.. 작년 초에 시도했다 포기한 거 다시 도전해볼까 싶어지는데,
이제 도전 같은거 그만하고 눕고 싶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단발머리 2023-01-17 23:24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저도 그 생각하고 있습니다. 행간도 좁고 글씨도 작아서요(라고 변명을 해봅니다)

근데 다락방님! 제가 다락방님 너무 좋아하지만 이러시는 건 좀 곤란해요. 제가 언제 ㅋㅋㅋㅋ 매일 30쪽이라고 그랬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에 좀 봐주세요. 30쪽이 목표라고 했죠? 30쪽까지는 읽겠다,가 제 목표에요. 어떻게 이 책을 매일!!! 30쪽씩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01-16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30쪽 읽기 힘들죠ㅠㅠ 저는 하루 한 챕터 많으면 두 챕터 이상... 그래서 안느나요~
단발머리님 화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3-01-17 12:24   좋아요 1 | URL
저는 말이죠. 이 책은 30쪽까지 읽기가 목표였구요. 어제는 번역본에서 중요하다고 표시해 둔 부분을 찾아서 밑줄 그어 놓았는데요.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리더라구요. 휴우 ㅠㅠㅠㅠㅠㅠㅠ 거리의 화가님, 저 화이팅 좀 많이 좀 주세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