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 정확히는 세 어절로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몇 줄로 써보려고 한다. 긴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모든 분에게 스킵을 권한다.

 

 


최근에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대상화였다. 어떤 사물을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 칸트의 정의를 따르자면 오로지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개인을 이용하는 태도나 행위를 말하고, 캐서린 맥키넌, 안드레아 드워킨 같은 페미니스트들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라는 논의가 본격화되기도 했다.

 


존경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정의를 가져와 보면 이렇다. 2022 11 30일 경향신문. 미소지니에 대한 설명과 혼재되어 있고, 대상화에 대한 직접적인 문장은 세 문장뿐이지만 인용해 본다. 전체 글 링크는 여기에 있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 사진과 총, 캄보디아에서의 대통령 부인 https://www.khan.co.kr/print.html?art_id=202211300300065 )



무엇보다 ‘김건희’는 ‘엘리너 루스벨트’가 아니다. 미소지니는 여성 개인을 혐오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당연히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착하지 않다. 미소지니는 한 인간을 동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성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뜻한다. 여자는 모두, 그저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을 어머니와 창녀로 이분화하고 그 스펙트럼 안에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내가 미소지니를 번역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유는 혐오라는 단어가 주는 피로감, 남성 혐오라는 황당한 대칭어의 생산, 그리고 이 문제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전반에 대한 지배 전략이기 때문이다.

미소지니는 상대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맘대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고인 가부장제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상상(망상)인 오리엔탈리즘, 이 두 가지가 문명의 두 축이다.

대상과 대상화는 다르다. 누구나 대상일 수 있다. 대상화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에 대한 낙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결혼제도의 정상성은 이혼과 저출산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흰 피부의 우월성은 흑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것이 사고방식으로서 ‘미소지니’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


 



대상화는 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타인이 나의 설명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과 상황, 환경을 동원하지 않고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너무 어려운 문제라서, 나는 노트에 대상화라고 쓰고, 관련된 글을 찾아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공사다망하여 잊어버렸던 차에, 마사 누스바움의 이런 문장을 만났다.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물로 다루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책상이나 펜을 사물로 다루는 것을 두고 대상화라 부르지는 않는다. 책상과 펜은 그 자체가 사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상화는 사물로 변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실제로는 사물이 아닌 인간 존재를 사물로 다루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대상화는 그 대상에 인간성이 존재한다고 여기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더 많은 경우 완전한 인간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교만의 요새>, 41-2)

 


대상이 가진 인간성을 거부하는 것, 그 속에 깃든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을 대상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설명하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나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나는 상황과 환경을, 세상과 사람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가. 혹은 그려내야 하는가. 이를테면, 내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나는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것인가. 혹은 나 자신을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설명하지 말아야 하는가.

 




 













자리에 눕기만 하면 5분 이내에 깊은 수면에 빠져드는 내게도 잠 못 이루는 며칠이 있었으니, 시몬 드 보부아르와 거다 러너와 케이트 밀렛과 실비아 페데리치를 읽은 밤에는 그랬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고, ‘a thinking woman up at night’에 대한 글을 썼다.(https://blog.aladin.co.kr/798187174/91967102017년이었다. 끝없는 고민이 확고한 결정으로 바뀐 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결심을 했고, 올해는 그 결심이 나의 실제가 되었다.

 

 


사회적 고용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서 보냈던 나의 19년을, 나는 부끄러워하지는 않지만, 나의 노동은 여전히 국가 GNP 속에 계산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가족들이 나의 노동과 노력을 인정해 주고 고마워하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여전히 사회 속의 보이지 않는존재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19년 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은 돌봄 노동의 범주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의 하얀 빈칸에 그걸 적을 수는 없었지만, 또한 그것밖에 적을 것이 없었고.

 

며칠 후, 나는 근로복지공단에서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취득 사실 통지서내용을 담은 카톡을 받게 되었다. 보이지 않던 존재였던 나는, 비로소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일을 하면 하는 대로, 일한 시간에 맞춰 돈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좋아하는 친구는 ‘너를 만나는 사람들은 복 받은 거야라고 말해주어 내게 힘을 줬다. 혼자 있을 때면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어느 금요일 밤에 교회에 갔을 때는, 설교와 찬양, 기도 순서가 끝나고 각자 통성기도를 할 때, 키보드를 치면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신 그 사랑을 제가 나눌 수 있게 해 주세요. 제겐 하나님의 사랑이 많으니까, 그 사랑을 조금씩 나눌 수 있게 해주세요.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했다.

 


그러나, 나는 좋은 사람이면서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정한 사람이면서 실력 있는 사람이어야 했는데.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어렵기는 하지만, 내게는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몇 배 더 힘든 일이었으니. 나는 자주, 아주 자주, 염려와 걱정, 실망과 자괴감으로 점철된 저녁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내가 이러려고 19년 만의 대탈출을 감행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 아름다운노랫소리에 익숙했던 나. 퇴근하고 그다음 날 출근하는 그 놀라운 다람쥐 쳇바퀴의 삶을 겨우 20여 일 맛본 후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경외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우리 각자는, 각자 삶의 무게를 견디고 산다. 8살짜리는 8살짜리 대로, 12살짜리는 12살짜리대로, 30대는 30대의 무게를, 40대는 40대의 무게를 각자 지고 산다. 그만두고 싶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8살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생각했다.

 
















그리고 밤에는 책을 폈다. 10분 뒤에 고개를 떨굴 것을 알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책을 펼쳤다. 아렌트를 펼치는 밤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바구니가 함께 하기도 했다. (우리, 아렌트 읽을 때는 옆에 꽃바구니 놓고, 화병에 꽃 꽂고 그러잖아요. 맞잖아요.)

 



 



이 시간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이 시간을 산다. 내 삶을 어떻게 설명할지, 혹은 설명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고, 또 모르겠지만. 샬럿 브론테를 모방해 내가 쓰려는 그 한 문장을 여기에 쓴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이 문장이다.

 



 

 

 




 

독자여, 나는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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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종(種)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어.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5-06 23:41 
    1.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인 <빈 옷장>을 읽으려다가 또 실패했다. 작가의 낙태 경험으로 시작하는 책의 첫 페이지는 자궁에 막대기를 집어넣는 묘사가 있다. 에르노의 <사건>을 온 얼굴을 찌푸리면서 읽어버리고 다시는 읽지 않고 싶다 냅다 내던졌던 기억이 난다. 독서 경험은 강렬해서 그걸 지우고자 <레벤느망>(은 <사건>을 영화한 작품이다)을 꾸역꾸역 다 보았는데… 그 이미지들은 더 괴로웠다. 프랑스 영화는 역시 좀
 
 
유부만두 2023-04-29 17: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친구여, 그대가 자랑스러워요!

단발머리 2023-04-29 17:08   좋아요 1 | URL
(다다다다다다다) 와락!!!!!!!!!!!!!!!!!!!!!!!!

서곡 2023-04-29 1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응원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3-04-29 20:26   좋아요 1 | URL
응원 감사합니다, 서곡님!! ㅎㅎ

건수하 2023-04-29 19: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새로운 시도 그리고 실천.. 꼬옥 안아드립니다. ❤️

단발머리 2023-04-29 20:27   좋아요 2 | URL
수하님께 포옥~~~~ 안기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수하님 💕

2023-04-29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29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4-29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새로운 시작을 하셨군요^^ 어떤 것이든 도전은 쉽지 않은 일이죠. 여러 말을 하면 부담되실테니 다른분들 말씀처럼 한마디 던지고 갑니다. 힘껏 응원해요!!!

단발머리 2023-04-29 21:21   좋아요 1 | URL
새로운 시작이 좀 멋지고 근사했으면 좋을텐데 아.... 전 넘나 피곤한 것입니다 ㅎㅎㅎ 응원의 마음, 응원의 댓글에 힘을 얻습니다.
감사해요, 거리의화가님!!

난티나무 2023-04-29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오옷!!!!!! 20일이나 되셨어요! 일단 추카추카~!!!!!! 이단은 당근 응원~!!!! (실은 늠 열심히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ㅋㅋㅋㅋㅋ) 꽃바구니는 못 보내지만 응원하는 마음 한가득 두가득 세가득 백만송이가득 천만송이가득~~~~~~~~~~~~ 보내요~~~~~~~~~~!!!!💐🎂🍾

단발머리 2023-04-29 23:50   좋아요 0 | URL
축하말씀 감사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 열심히 하지 말라는 그 귀한 충고의 말씀, 제가 몸소 열심히 확실히 실천해보겠습니다.

보내주신 응원의 마음과 백만송이 꽃바구니, 그리고 생크림 케익은 잘 받았습니다. 감사해요, 난티나무님!

DYDADDY 2023-04-30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먼저 새로운 출발을 축하드려요. 몸에 익지 않은 일을 하시느라 고되시겠지만 결심하신만큼의 결실이 있으시기를 바라요.
대상화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서 당장 떠오르는 것은 칸트(상대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밖에 없네요. ㅠㅠ (개인적으로는 칸트.. 싫어합니다. ㅋㅋㅋㅋ)
작가여, 당신은 위대했고, 더 위대해질 것이다. 라고 돌려드리고 싶어요. ^^

단발머리 2023-04-30 07:46   좋아요 1 | URL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나서 좋은 시간과 실망의 시간이 빼곡히 들어차네요. 잠깐 시간 날 때 알라딘 이웃님들의 글을 읽는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새삼 깨닫는 요즘입니다.
칸트를 읽을 수는 없을 거 같지만 ㅋㅋㅋㅋㅋㅋㅋ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귀한 응원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대디님! 힘내볼게요!!

책먼지 2023-04-30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아 단발머리님 ㅠㅠ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한 문장까지 갓벽했다!! 정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으셨을지요ㅠㅠ 앞날에 축복있으라!!!!
저 통 큰 꽃바구니 너무 아름답습니다!! 보기만 해도 밝은 에너지가 듬뿍듬뿍 전해지는 느낌💕

단발머리 2023-04-30 16:35   좋아요 3 | URL
으아 책먼지님!! 전 워낙 쫄보에 겁쟁이인지라 이렇게 한 발 내딛는데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어요ㅠㅠ
응원해주시고 축복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꽃바구니는 이제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는데 그런데도 향기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
책먼지님도 향긋하고 여유로운 오후 되시길요

공쟝쟝 2023-04-30 18: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던 적 있어요. 정확하게는 나 자신이 쓰고 싶지 않은 글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지만요. 희진샘은 타자화에 대해서는 일종의 ‘조물주 의식‘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최근에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에서 아주 자세히 적어두셨는 데, 제가 따로 옮겨 적어두진 않았네요.

여튼 제가 이해한 바를 쭉 써보자면 대상화는 일종의 물화라면 타자화는 열등화죠. 둘다 결론 적으로는 ‘우월한’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의지를 알게모르게 내포하고 있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를 가진 주체가 자기 안에 어떤 위계를 가지고 그에 따라 급을 나눠 너의 존재를 내가 판단(규정)한다,는 식의 일종의 지식-권력(이건 푸코네ㅋㅋㅋ)을 행사 하는 거죠. 그런데 이건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특히 더 많이 배운 사람일 수록 그렇죠. 그래서 알 수록 어떤 긴장이 필요한 것 같다능. 저는 대상화 보다는 타자화가 더 문제적이라고 보는 데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볼게요. (저는 매번 한남이라는 용어로 남성을 대상화 시키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ㅋㅋㅋ)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사실 진짜 문제는 타자화하는 시선-> 특히 내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건데... 여성이나 피식민자의 위치는 지배질서안에서 그 타자화하는 시선을 스스로 내면화하기 쉽죠. 그러니 타자화할까봐 입조심해야하는 사람이 되는 건 어느 정도의 언어를 구축한 뒤의 이야기고... 차라리 나 스스로가 타자화를 하는 글을 쓰지 않으려면 어떤 위치에서 말하는 가, 나는 어떤 위치에서 말하고 있는 가를 물어보는 것이 가장 먼저 일지도 몰라요. 이건 맥락적이고 상대적이기도 하다는 거죠. 보통은 삶에서 부대끼는 문제들을 가지고 글을 쓰는 저는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 언어가 없어서 일때가 많아요... 음... 내 위치에서 내 시선으로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 저는 그걸 내 몸에 묻은 지배의 시선을 털어낸다고 표현해요. 내가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느정도 글쓰기에 습관이 들고서는 어떤 질문들이 든 게 사실이고... 그래서 이렇게까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일단 저는 알라딘에서는 신나게 떠들지만 페미아닌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는 너는 페미 아니니까 뭘 모른다 이런식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페미니즘 책 몇권 이나 읽었는 데? 이런 말은 남자들이랑 싸울때는 쓸 수 있죠ㅋㅋㅋ (-_- 본심 나옴) 여하튼. 맥락적이라는 것.

타인을 수단, 동원하는 것이 문제라기 보다는 내 안에서 위계 세워져 있는 그 무의식적인 계열이 문제라는 것. 저는 모든 위계가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고요, 사회에서 통용되는 저열한 위계는 비난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부동산이라던가 서울중심주의라던가 학벌. 여튼 안쓰면 내가 그런 위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고요.... 내 수준을 드러내는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가 혹은 그 글을 읽는 타인은 알게되겠죠. 그래서 읽는 만큼. 아는 만큼. 읽어낼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들어요.

저는 이미 부분적 인식론을 체화ㅋㅋ하셨으며 인간종의 오만함(?)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계시는 단발머리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쓴다고 한다면 일단 환영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혹시 타자화하는 글을 쓸까봐 겁이 난다면 고민하는 과정을 쓰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ㅎㅎㅎㅎㅎ 뭐 돈받고 쓰는 글 아니잖아요?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 어떤 지식을 알고자 하는 건 스스로를 상처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과 우리는 결국 알 수 없다는 부분적 인식론... 신의 위치에서 내려다 보는 초월하는 그 시선과 총체성에 대한 비판은 해러웨이를 알게 되면서 확실히 더 정밀해졌던 것 같아요. 곧 <상황적 지식>이 재번역되어서 나온다니 기다리는 중이고요. 대화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결국 모두 다를 알 수 없다는 자세를 갖춘다면... 그런 타인은 결국 나의 앎을 비워내게 해주는 앎을 선사하는 고마운 인연이라는 거. 어떤 대화는 내가 모른다는 것이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주기도 한다는 거...

마지막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단발머리님의 앎비앎 친구인게 자랑스럽습니다!

단발머리 2023-05-01 17:00   좋아요 2 | URL
대상화와 타자화에 대한 댓글 너무 반갑습니다. 제가 몰랐던 부분이라 찬찬히 읽었습니다. 저 역시 대상화보다는 타자화가 더 문제라고는 생각하고요. 다만 타자화에 대한 자기 인식이 어느 정도로 필요한가,에 대해서 저는 좀 고민이 많고요. 정희진쌤의 <미투의 정치학>에 대상화에 대한 선생님의 신랄한 비판이 있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해요. (잊이버리면 안 되니까 쟝님이 좀 적어두세요ㅋㅋㅋㅋㅋㅋ우리 만나면 할말 많아서 까먹을 수 있음요.) (제가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이것과는 좀 다른 결의 문제인 것으로 밝혀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글쓰는 이의 ‘자세‘, ‘위치‘에 대한 것이기는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제가 예전에 ‘글쓰기는 잘난척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글쓰기의 한가지 측면일 수 있지만, 저는 근본적으로는 글쓰기를 그렇게 보거든요. 자기 표현의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요. 그 다음에 만났을때 쟝님이 제 말이 맞다고, 정말 맞다고, 박수치며 말했던 거 기억나나요. 푸코의 <상당한 위험>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내게 전적으로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잘난 체하는 일이었습니다.˝

글쓰기는 잘난척이라고 푸코도, 쟝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푸코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쓰기가 갖는 힘, 조물주 의식, 목소리, 언어는 근본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고요. 그런 측면에서 글을 쓴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는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의미할 겁니다. 여성에게도 그런 힘이 있었음에도 우리가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건 여성의 목소리가 다른 소리(남자들의 헛소리)에 묻혔기 때문이고요. 다만 저의 우려는 남성/여성 중 여성이어서 가려진채 살았던 내가 이제는 또 다른 위치에 속했다는 걸 안다는 뜻입니다.

주인/노예, 어른/어린이, 부모/자녀, 선생/학생, 중년/청년 기타 등등이요. 저는 남성도 주인도 아니지만, 저는 부모이고, 40대 이상의 중년이고요. 쟝님 말이 맞고요. 사실 저는 ˝타자화할까봐 입조심해야하는 사람˝이 될 정도로 언어를 구축한 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 자체를 서술해도 괜찮을 듯 합니다만, 아직은 여기에 대한 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거 같아요. 그런 경우 알라딘에 안 쓰고 종이일기장에 쓰면 될텐데.... 아, 직장생활로 피폐한 나는, 일기 못 쓰는 몸,이 되었고ㅋㅋㅋㅋㅋㅋㅋ

축하 감사해요 ㅋㅋㅋㅋㅋㅋ 저도 쟝님이 제 앎비앎 친구라 자랑스러워요!

공쟝쟝 2023-05-01 16:44   좋아요 2 | URL
네 더 이야기해보아요! 저도 꼭꼭 대상화에 대해서 생각해볼게요. 확실히 쓰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 같아요! 읽을 때도 어떻게 쓰는지도 유심히 보게 되고요 😀 그리고 뭔가 쓴다는 자의식(?)이 생겨버린 지 1년이 좀 넘은 된 것 같습니다 ㅋㅋㅋ 저는 읽기 좋아하는 종류의 글이 확실히 있고, 글 쓸 때 지치고 아직까진 재밌어요ㅋㅋ 푸코의 글을 좋아하는 저는 잘난 척을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확실합니다 ㅋㅋㅋ 한 동안은 괴로웠는 데 언젠가부터는 나의 지적임이 너무 자랑스러워 ㅋㅋㅋ 난 왜 이렇게 지적이며 천재들을 이해하는 가 ㅋㅋㅋ 그건 내가 천재이기 때문인가 이러면서 쓰지롱 ㅋㅋ

단발머리 2023-05-01 16:59   좋아요 2 | URL
쓰는 몸이 된 거 축하드리고요. 앞으로도 우아하게 세련되게 건강하게 잘난 척 하는 글을 많이 쓰게 되길 빌어 마지 않습니다.

다만 기억하세요. 지적인 자극을 주는 푸코나 정희진쌤은 쟝님에게 이렇게나 긴 댓글과 대댓글을 ‘쓰게‘ 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자극만 주는 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천상계는 쟝님과 놀아주지 않아요. 웃어주지도 않고요. (우리 정희진쌤 팟빵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오픈 이후로 가끔 지상계에 나타나신다는 소문은 있지만요) 댓글은 저같은 미천한 지상계가 달아줍니다. 대댓글도 달아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먼댓글도 환영이며 ㅋㅋㅋㅋㅋㅋㅋ 자주 만나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5-01 17:27   좋아요 3 | URL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ㅋㅋㅋ 지상에서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다 ㅋㅋㅋ 명심할게요~

잠자냥 2023-04-30 23: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내일은 노동절입니다. 만끽하시길!

단발머리 2023-05-01 15:59   좋아요 1 | URL
놀고 있어요 ㅋㅋㅋㅋㅋ 잠자냥님도 오늘 하루 맘껏 누리세요!

2023-05-0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1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5-01 1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자여 2탄에 준하는 저 문장은 어마어마한 폭탄같은 문장입니다.
와....👍
축하드립니다.
19년만의 재취업!
아...제가 다 떨리네요.
경력 단절을 깨부수는 중년 여성들께 전 너무나 놀라움의 눈빛을 보내곤 합니다.
벌써 20일이나 일 하시고, 근로자의 날도 챙기시고...ㅋㅋㅋ
젊었을 때만큼의 빠릿빠릿함의 체력이 뒤떨어지더라도 단발 님은 분명 똑똑하게 잘 해내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아렌트 님도 축하해 주시고, 꽃바구니 속 꽃들도 축하해 주고...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단발머리 2023-05-01 16:05   좋아요 1 | URL
사실 자랑할만한 일은 아닌데 저도 19년에 방점을 찍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동자의 날이 저하고 관련있는 날인줄 몰랐어요. 매일 방학만 기다리던 제가 휴일을 기다립니다.
제가 상당히 어벙하고 볼품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지만 책나무님 격려에 힘이 납니다.
책나무님, 진심 매우 간절히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3-05-02 09: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링크하신 기사 읽으면서 ‘존중해서 나쁠 일은 없다.‘에 밑줄 그었거든요. 아마 이 기사에서 제일 중요한 문장은 이것이 아닐까, 하면서요. 그런데 읽다 보니 더 중요한 문장이 맨 끝에 있네요. ‘어차피 관중도 그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요.

저는 대상화를 포함하는 미소지니도 역시 약자(여성, 장애인, 유색인)를 머릿속에서만 상정해서 그런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머릿속 여성은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죠. 그러나 실체의 여성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잖아요. 왜냐하면, 여성도 자기 머리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니까요. 머릿속에 있는 여성도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관중도 다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고요, 그 길의 시작에 이렇게 꽃바구니로 축하해드릴 수 있었고 또 기록을 남길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합니다. 단발머리 님이 너무나 자랑스러운만큼, 저 역시 단발머리 님께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5-02 20:37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다락방님. 저도 미소지니에 대한 다락방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미소지니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런 것 같아요. 여성을 머릿 속에 그려놓고, 그렇게 자신의 예상 혹은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발산하는 거죠. 이건 더 오래오래 들여야 보고 생각해볼 주제인거 같아요. 저는 아직 감도 못 잡았거든요 @@

새로운 시작의 출발선에 혼자 서 있는 거 같지 않았어요. 집에 들어올 때마다 향긋한 꽃내음이 ‘내가 여기 있음‘ 이렇게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스펙터클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냈습니다. 응원과 지지와 격려 감사드려요, 다락방님!
이미 자랑스러운 친구여서 뭔가 더 하실 필요는 없으시고, 앞으로도 계속 쭈욱~~~~~~~ 친구면 좋겠네요. 그거면 만사 오케이!!

2023-05-02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2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very Vow You Break : 'Murderous fun' from the Sunday Times bestselling author of The Kind Worth Killing (Paperback, Main)
피터 스완슨 / Faber & Faber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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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의 교훈 : 


모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말 것이며, 남성연대를 얕보지 말고, 과학기술 발전의 나쁜 측면에만 집중하지 말라. 




2. 오늘의 문장 : She couldn't see it. 


나쁜 놈이 나쁜 속마음을 감추고 나쁜 짓 하려고 달려들 때, 그 진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뭔가 부족해서 그녀가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피해자가 된 것이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3. 오늘의 고전 : 독자여, 나는 그와 잤다. (Reader, she thought, I slept with him.) (44) 


당연히 바로 그 책. 독자여, 나는 그와 결혼했다,의 <제인 에어>.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실사 공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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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여, 나는 그와 잤다.
    from 마지막 키스 2023-05-09 10:18 
    《기척》은 《제인 에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써낸 '레이철 호킨스'의 소설이다. 레이철 호킨스를 내가 들어본 것 같고 읽어본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읽은 작품이 없더라. 그런데 왜이렇게 이 이름이 익숙하지? 엄청 익숙한데? 하고 곰곰 생각해보니, 오호라, 폴라 호킨스였다. 내가 읽은 건 폴라 호킨스였어. 호킨스 라는 성 때문에 내가 들어본 것 같았구나!진 리스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썼는데 레이철 호킨스가 《기척》을 쓰다니. 《제인 에어》가 읽고나
 
 
건수하 2023-04-25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3번에 빵 터졌습니다 ㅎ

단발머리 2023-04-29 18:59   좋아요 0 | URL
저도 3번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하하하

다락방 2023-04-25 10: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군요! 멋져요! >.<

그나저나, 저는 저 문장 언젠가 써먹어 보고 싶네요.

독자여, 나는 그와 잤다. ㅋ

단발머리 2023-04-29 19:01   좋아요 1 | URL
저, 피터 스완슨 책 한 권 더 주문했어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요. 제가 함 읽어보겠습니다.

그 문장 써먹을 날이 꼭 있기를요^^

책먼지 2023-04-25 14: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샬럿 브론테나 제인 오스틴이 저렇게 능청스럽게 독자에게 말 걸 때 진짜 너무 좋더라고요..💕

단발머리 2023-04-29 19:02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ㅋㅋㅋㅋㅋ 저두 그래요.
저렇게 작품 바깥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말 걸 때 엄청난 ‘권위‘가 느껴져서, 전 그래서 좋더라구요^^

책읽는나무 2023-04-25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3번!!!
마구 상상되어지는 문장이군요?ㅋㅋ
근데 뜬금없는 질문인데요.
저 밑줄 사진 속 연필로 그으신 건가요?
어쩜 저렇게 예쁘게 그와 잤다는 문장에 그어지는 건가...싶네요?
단발 님이 하는 건 왜 다 예뻐보이는 건가요?
왜, 왜????^^

단발머리 2023-04-29 19:04   좋아요 1 | URL
저 밑줄 사진 속 연필로 슥슥 그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가 아니고, 정성껏 그었습니다.
저 문장이 좋아서 정성들여서 그었습니다. 저 연필이 참 좋은 연필이구요.

저를 애정해주셔서 ㅋㅋㅋㅋㅋ 그래서 예뻐보이는 거 아닐까요? 헤헤헤.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리고요!!

독서괭 2023-04-25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자여!!ㅋㅋㅋㅋ 패러디 재밌네요~~
원서 읽기 능력자 단발님 부럽다..

단발머리 2023-04-29 19:06   좋아요 1 | URL
네, 독자여! 저 패러디 너무 재미있었어요.
원서 읽기 능력자는 아니지만 부럽다고 해주셔서 샤라랑~~~~~~~~~ 💕

다락방 2023-05-0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데요 단발머리 님. 이 책에 인셀이 나오나요?

단발머리 2023-05-02 20:39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인셀은 안 나오고요. 근데 인셀만큼 여성을 ‘의심하고 끝없이 미워하는‘ 남성들이 등장합니다.
떼로 등장합니다.
 
















... 억압받는 이들은 자신을 재정의하고 현재를 변화시키고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고안해 내는데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오드리 로드, 11쪽) 



낮에 내내 놀다가 11시 넘으니까 제정신. 주경야독 아니고 주놀야독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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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4-25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놀야독 ㅋㅋㅋ 저는 주놀야놀한 날도 있었…ㅎㅎㅎ

단발머리 2023-04-25 21:3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주놀야놀 ㅋㅋ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제가 꿈꾸는 삶입니다, 주놀야놀! 밤낮없이 주놀야놀 24시간 주놀야놀 연중무휴 주놀야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주놀주놀이라고 썼더라고요 ㅋㅋㅋㅋㅋ 바꿨습니닼ㅋㅋㅋㅋ)
 



















인간, 부조리, 신에 대한 본격 탐구서. 제목에 끌려서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중간 억지스러운 부분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래도 논의 자체를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끈질김에 별 하나를 더 준다. 정확히는 3.5. 

 



마지막 부분에서는 반신론(반유신론)’을 강변한다.

 


그렇다면 신은 도대체 존재하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나의 철학적 명민함과 지성이 바닥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그러나 만약이라도 내가 신이 존재하는 세계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눈길을 거두지 않는 이상 우리는 결코 고독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그 존재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우리와 그 존재의 관계는 노예와 선량한 주인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을, 신이 아무리 선한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노예일 뿐이고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170)

 



강신주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장면이다. 신과의 정면 승부. 신 없이 단독자로 서겠다는 결심. 인문학자로서 당연한 모습일 테다. 신 없는 우주, 신 없는 세상. 그리고 단독자 인간.

 




신이 인간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고, 따라서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는 사실 유서가 깊다. 그 견해를 피력한 사상가들도 다양하다. 쇠렌 키르케고르(SörenKierkegaard 1944b, pp. 151-153) 역시 그의 저서 《기독교에서의 훈련 Training in Christianity》에서 인간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그저 공허함이나 무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를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 P155

신앙은 ‘나는 왜 살고,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고, 그 대답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동일할지라도, 표현 방식은 무수히 다양할 수 있습니다. <고백록> 톨스토이 - P156

카뮈는 혹시라도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삶에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 카뮈에게서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그에 따라서 신성한 의미와 목적으로 충만한 삶을 것인가 아니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아무런 처벌 없이 나쁜 행위를 할수 있는 삶을 살 것인가 사이의 선택으로 귀결된다. - P160

여기서 비판의 핵심은 단순히 신이 인간들에게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개연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비판의 핵심은 도대체 신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목적을 부여할 수 있는지 개념적으로 상상하기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 P163

결과적으로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 첫 번째 선택지는 유일신 신앙에서 상정되는 신의 초월적 속성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이 절대성, 완전성, 탈시간성, 불변성과 같은 초월적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초월적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존재가 유일신 신앙의 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P165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삶의 목적이나 소명을 부여할 수 있는 종류의 존재가 아니라는 신이 우리에게 의미로운 삶을 선사할 수 없다는, 신이 인간의 부조리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신이, 그리고 오직 신만이, 인간을 무의미와 부조리의 수렁에서 구원해줄 수 있다는 일부의 주장이 근거 없는 헛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P166

이 지점에서 네이글은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에서는 앞서 언급한 종류의 무한퇴행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 관점에서 "왜 당신은 삶을 지속해야 하지요?"와 같은 질문들은 애초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아무런 부가적 정당화가 필요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 P87

이러한 경험을 네이글(1986, P. 209)은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묘사한다. "저 멀리서 볼 때 나의 탄생은 우연적이었고, 나의 삶에는 아무 이유가 없으며, 나의 죽음은 지극히 사소해보인다. 그러나 나의 내면의 관점에서 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하고, 나의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나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파국적인 사건에 다름 아니다. - P88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이 세 번째 해결책은 삶에 대한 불교[33]의 가르침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불교의 사상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교리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아는 허구일 뿐이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사상 no self doctrine이고, 다른 하나는 해탈을 통해서 윤회의 사슬을 끊고 열반의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열반사상 nirvana doctrine이다. 이 중 무아사상은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세 번째 해결책과 사실상 동일하다. - P125

이에 대해 네이글은 영원의 관점에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진지함을 가지고(그 진지함이 영원의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 삶에 임하는 우리들의 숙명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응은 그저 아이러니를 머금은 미소일 뿐이라고 술회한다. 마치 외부 세계가 실재한다는 우리의 상식적 믿음이 정당하지 않다고 설파하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자가 그러한 회의주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며 세계의 실재를 가정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그저 아이러니를 머금은 미소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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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4-18 13: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기요 무슨 책인지 밝혀주셔야죠!!

단발머리 2023-04-18 14:45   좋아요 3 | URL
앗!!! 반납하려고 밑줄긋기 중입니다. 모르고 공개로 설정했네요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4-19 23:2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넘 웃겨요😂

2023-04-18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8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8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8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 뇌
우주의 시작과 나의 끝



 













결국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인가이고, 해답은 그사이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 해답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있다.

 



<인생 수업>을 읽고 있다.

 


현대 물리학(현대 물리학 잘 모르는 사람)에서 원자의 발견은 가장 혁신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 문명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후세를 위해서 딱 한 마디만 남길 수 있다면 무슨 말을 남기겠냐는 질문에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답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을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유기체이되 고도로 발전된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생명 활동의 중단, 원자의 해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생명 활동의 중단, 원자의 해체가 한 세계의 소멸로서 이해되는지, 혹은 그러한 이해조차 필요하지 않은지말이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일 뿐이며이 세상에는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지능과 의식 또한 그러하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호모 데우스>) 근대 과학 발전 가운에 이루어진 해부학적 지식의 축적 결과, 내부 장기의 어디에서도 인간은 마음을 그리고 영혼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마음이란 뇌 속의 신경 세포 다발의 특정한 전기 신호라는 것이다. 유물론,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예전에 썼던 글(https://blog.aladin.co.kr/798187174/10771504, ‘나와 뇌’)의 한 문단을 그대로 가져온다.

 


나는 뇌가 아니다』의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나는 비물질적 실재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상식적 통찰이라고 본다. 나는 나 자신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18) 고 썼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165), 우리의 인생에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이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 의미 같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면들의 형이상학적 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201).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만 볼 것인가. 측정되지도, 관측되지도 않는, 따라서 과학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영혼이 깃든 존재로 볼 것인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장소로서 인간의 육체를 이해할 때, 이 육체는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인생 수업>의 저자들(공동 저자)은 이렇게 썼다.

 


There is a part of you that is indefinable and changeless, that does not get lost or change with age, disease, or circumstances. There is an authenticity you were born with, have lived with, and will die with. You are simply, wonder-fully, you. (5p)

 


당신 안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불변의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나이, 질병,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인 것입니다. (22)

 


앞부분에서 저자들은 당신의 사회적 역할이 당신은 아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존재로서의 당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a part of you”를 무엇으로 이해했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나 자신을 규정하는 그 무엇. 가장 중요한 나의 일부. 지금의 나를, 변함없이 이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의 저자 질 볼트 테일러는 갑자기 좌뇌의 손상을 입게 되었다. 언어와 사고의 순차적 처리가 불가능해지고, 시간 감각마저 사라졌으며, 시야에 보이는 것이 뒤섞여 대상들 사이의 물리적 경계를 나눌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통합된 나로서 내가존재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좌뇌의 교묘한 활동 덕분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의 나, 만져지고 느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는 좌뇌의 속임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는 걸 밝히는 의미에서 성경을 가져와 본다.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e of live, and man became a living being. (NIV. Genesis 2 : 6)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 6)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일부가 인간에게 들어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일부가 인간 내부에도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물질로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가 된다. 육체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영을 소유한존재가 된다.



지구를 황폐케 하는 데 더해 멸망 직전까지 밀어 넣은 끔찍한 인간 중심주의를 우리는 많이도 보아왔고 그 잔인함을 매 순간 목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구석 은하의 구석의 구석, 태양계 내 작은 행성 지구에 살고 있는 하찮은존재인데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나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더 이상의 결합을 포기하고(나는 지금 원자가 마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분해되는 순간, 차근차근 3차원 공간에서 원자의 해체가 이루어지면, 지금의 나, 읽는 나, 쓰는 나, 생각하는 나는, 물질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지는 것인가. 영원히. 이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임의의 순간에 ''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유전자, 단백질, 세포, 뉴런, 연접부의 네트워크 등의 고유한 배열 상태)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엔드 오브 타임>, 224)

 



그래서, 마지막 물음은 그런 특정한 원자 형태(지금의 나)가 어떻게 바로 분해되지 않은 채, 현재의 이런 상태, 이런 배열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의문은 생명에게로 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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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이것 저것 다 조금씩만 잘하는 사람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4-19 15:54 
    영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없다고 보는 편인데 혼이나 백이나 기나 영이 (푸하하 갑자기 중딩 때 보던 퇴마록 생각남) 정말로 존재한다면 아무 생각 없이 이생망을 실천하며 살 사람이 나… 과거의 나는 육체무용론자 쪽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몸 자체를 잊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기 망정이지 영혼의 건강 생각하기 시작하면 육체 따위 아예 안보려는 우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극N이라ㅋㅋㅋ 무튼 N을 극단적으
  2. 정의상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사안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12-05 15:39 
    이 책의 주장 8가지는 챕터의 제목과 같다. Ⅰ. 모든 것은 물리학이다Ⅱ.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다Ⅲ. 우주는 수학이 아니다Ⅳ. 모형은 실재와 같지 않다Ⅴ.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Ⅵ.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Ⅶ.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Ⅷ. 자유의지는 없다 이 책의 제일 중요한 문장, 이 책의 결론을 포함하는 문장은 이 책의 첫 문단에 나온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다락방 2023-04-18 08: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에 대해 신앙과 뇌과학을 가져오시는데 말이지요, 저는 같은 의문을 갖고 있거든요. 내가 도대체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그보다는 인간이 죽을텐데 왜 태어났는가, 가 궁금해요. 어차피 죽을건데, 그리고 제 경우에는 죽으면 모든게 끝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무것도 없음. 나씽의 상태가 된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지금 현재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어도, 죽고 나면 그 두려움조차도 없는 상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는 상태란 명백한 결론을 앞에 두고 왜 살아가고 있는가, 왜 심지어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저는 이 답을 종교에서도, 뇌과학에서도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고(아마 이것이 제 한계이겠지요) 그보다는 철학적으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철학적이라고 지금 여기 댓글에 써서 그렇지, 좀 더 솔직하게는 ‘계속 묻다 보면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묻고 답하는 과정에는 철학도, 여성학도 우선 끼어들지 않았고요, 그러나 ‘묻고 답하기‘ 만이 있었어요. 물론,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단발머리 2023-04-18 20:51   좋아요 3 | URL
인간이 죽을텐데 왜 태어났는가,의 그 질문이 저는 궁극의 질문, 바로 ‘그 질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만의 특징일 수도 있겠구요.

죽고 나면 두려움을 느끼는 나조차 없어질 텐데, 어차피 죽을텐데,의 그 의문, 다락방님의 그 질문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예전에 <미비포유> 읽고 나서 글을 썼을 때도 그런 면에 중심을 두었던 기억이 나요. 죽고 싶은 사람의 죽고자 하는 의지보다 ‘죽어야 할 운명인 인간의 살고자 하는 의지‘요. 저 역시 그게 궁금합니다. 보통 하는 말로 70이 넘으면 더 건강에 집착하게 되고, 더 살고 싶다, 더 오래살고 싶다, 하는 욕망이 강렬해진다고 해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초연하고 평온한 자세 이면의, ‘정리된‘ 생각이 저도 궁금해서 계속해서 읽고 또 생각하고 있네요.

다락방님만의 답을,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래오래 생각하다 보면 서로에게 빛이 되고 등이 되는 답을, 어쩌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DYDADDY 2023-04-18 13: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몸이 흩어지지 않고 기능하는 것은 각종 화학적 결합이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의 전자기파는 우리의 몸을 통과하지만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중첩되어 있는 분자간 결합이 태양광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두터워서 그늘을 만드는 것이지요. 내 손은 왜 내가 쥐고 있는 펜과 하나가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피부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내부로 뭉쳐있는 것만큼 외부로는 반발력을 가지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키스를 할 때 실제로는 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전자적 반발력을 감각세포의 압력으로 느끼는거죠. 즉 우리는 키스를 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ㅋㅋㅋ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몸은 다양한 세포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유지하는 ‘생체 공장‘인 것이지요.
자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자아와 세계의 분리가 되지 않아 ˝ㅇㅇ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라고 자신을 3인칭화합니다. 자아라는 것은 기억에서 출발하여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틀이 되는거죠. 기억은 뇌 속에서 존재하는데 단기기억는 대뇌피질에서 점차 측두엽과 해마로 이전을 하게 되어 장기기억화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은 결국 뇌의 작용이지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몸의 세포 평균 2년, 몸의 원자는 5년, 뻐의 구성물질은 7년에 걸쳐 바뀌는데 뇌도 결국 세포이기에 점차 변하게 되지만 한번에 바뀌지 않기에 기억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세포의 사멸과 재생이 반복하는 고리가 끊어짐으로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피부 세포의 재생 불가에 대한 것은 괴사이지만 심장근육세포의 재생 불가는 죽음입니다.
워낙 책을 많이 읽으시니 용어나 맥락에서 혹시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아 주세요. ^^;;
그러면 당신은 죽음에 초연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할 수 있지만 ‘너‘의 죽음은 기억과 감정에 영향을 주기에 슬프고 아플 것입니다.
살아있다라는 것은 이런 유기체적인 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아라는 것이 만들어지면 자연스레 세계와의 관계가 형성되기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거에요. 그 관계의 대상이 사물이거나 동물 혹은 사람, 더 나아가 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존재라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 자체의 물음이기에 데카르트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구요.
어제밤부터 메모장에 시간나는대로 쓰다보니 너무 긴 글이 되어버렸어요. ㅠㅠ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단발머리 2023-04-18 22:05   좋아요 4 | URL
대디님 댓글 감사해요^^

제가 많이는 아니지만 이쪽 분야 책 읽으면서 궁금했던 게 많았는데 대디님 댓글 읽으면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어요. 피부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외부에 대해 갖는 반발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주로 의자를 예로 들거든요. 우리가 의자에 ‘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의자와 우리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이렇게요. 대디님이 키스로 설명해주셔서 ㅋㅋㅋㅋ 너무 좋았어요. 나중에 저도 이거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키스‘로 예를 들어야겠다 결심을 했습니다. (제 지인들은 무슨 죄랍니까. 제가 이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막 해댈테니 말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

자아에 대한 부분도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이고, 사실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고 싶은 분야이기는 해요. 대디님 말씀처럼 ‘<나>라는 인식‘은 ‘뇌의 작용‘일 수 있겠지요. 제가 오랫동안 읽고 있는 중인 <의식의 기원>이라는 책에서는 ‘의식을 하나의 작용으로, 언어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우리를 설명하는 그 무엇‘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태동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설명하는 작용, 정확히 위치(중앙교환 중추)를 특정할 수 있는 뇌활동의 하나로 이해하죠.

인간의 물리적 성질과 자아, 의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문제가 좀 엉켜있어서, 저 자신을 위해 ㅎㅎㅎ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로서 진화의 과정 중에 지구에 출현했습니다. 자아(인식)는 뇌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세포의 사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고리가 끊어지면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원자는 자연 속에서 분해되어 다른 물질에게로 옮겨가는 순환을 계속합니다. ‘나‘라는 총체는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일이 없습니다. 나와 같은 원자 배열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우주는 언젠가 종말을 맞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현재일까요? 지금의 나, 지금 살아있는 나, 댓글을 쓰는 나.....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디님. 최근에 친구가 ‘내 이야기에 진지하게 응해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라는 페이퍼를 썼는데요. 제 이야기에 진지하게 응해 주시는 대디님도 저의 친구이십니다. 결론이 같을 수 없을 테고, 어쩌면 저에게서 어떤..... 답답함 같은 것을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제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셔서, 응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수하 2023-04-19 00:03   좋아요 2 | URL
우리가 키스를 할 때 실제로는 닿지 않는다…. 전자적 반발력을 감각세포의 압력으로 느낀다.

이 표현이 매우 강렬하여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힘드네요 :)

그럼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접촉이란… 결국 불가능하겠군요? 언제나 거리가 있을테니까…

DYDADDY 2023-04-19 01:30   좋아요 2 | URL
단발머리님 // 키스의 예가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죠. 이것을 차원으로 생각해보면 각각의 개인은 1차원의 점과 같아요. 그 점이 자아를 가지고 자신을 중심으로 2차원 좌표계를 만듭니다. 그런데 대상이 없다면 그 좌표계는 아무 소용이 없죠.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좌표계는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축을 더해 3차원 좌표계를 만들어보죠. 왜 높이라는 축이 아니냐구요? 먼지같은 점에 무슨 높이가 있을까요. 시간이라는 축에서는 기억과 감정이 생겨나요. 그렇게 만들어진 3차원 축 안에서 먼지같은 우리들은 각자 브라운 운동을 하며 우발적인 마주침을 만들어 타자와 조우하게 되요. 그 우발적인 조우에서 작은 반경 내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을 친구라고 부르고 근접 거리 내에서 뭉쳐있는 것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겠죠. 여기서 시간이라는 축이 우발성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당연히 모부의 육체적 사랑때문이고 그 사랑은 DNA의 명령에 충실한 것이었겠죠.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양성교배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DNA 돌연변이를 더 많이 만들어 내어 ‘생육하고 번챵‘하는데 저 적합했을 것이에요. 출생의 목적은 ‘없다‘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목적론적 사고를 장착하고 있는 동물이기에 당연히 삶의 목적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왜 저 새의 부리는 저렇게 생겼고 인간은 엄지를 유인원과 달리 사용하는가 등등의 물음에 목적론적 사고를 배제하면 남는 답은 환경 적응에 유리한 개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더 많이 남겼다 입니다. 즉 DNA의 컨테이너인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생육하고 번창‘하는 목적만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이기에 육체적인 목적을 거슬러 정신적인 목적을 찾아나서기 시작합니다.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태어나 자라서 자아를 가지게 되면 ‘나‘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죠. ‘나‘가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라구요. 그래서 전에 말씀드렸듯이 종교나 사후세계가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좀더 자라 타자와 좀더 친밀한 애착 관계를 가지게 되면 그 때 느끼게 되요. ‘나‘가 죽으면 ‘이 사람‘이 ‘강아지‘가 슬퍼하겠구나 라구요. ‘나‘의 죽음은 두렵지만 견딜만 하죠. 죽으면 고통도 없을 것이고 굳이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번거로운 활동을 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나‘가 죽으면 나와 친밀한 누군가가 슬퍼할거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정말 사랑한다면 자살을 못해요. 그 사랑이 아이일 수도 있고 연인이나 모부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는거죠. 그래서 ‘관계하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번 더 하고, 친구에게 네가 있어 좋다고 전화 한번 더 하고, 애정을 담아 애완동물을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 신에게 뭔가 더 해달라 하지 말고 감사 기도 한번 더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미루지 않고 바로 하는 것이에요. 롸잇 나우!
에고.. 쓰다보니 또 장문이네요. 친구라 명명해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단발머리님의 신앙때문이 답답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라요. 오히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서로 존중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하고 재미있죠. 아, 사는 목적에 그게 빠졌네요. 재미가 없으면 사는거 너무 지루하잖아요. ㅋㅋㅋㅋ

DYDADDY 2023-04-19 01:29   좋아요 2 | URL
수하님 // 전자기적 반발력이 없다면.. 그냥 모든 것이 뒤엉킨 단백질 바다가 되겠죠. ㅋㅋㅋㅋ 조금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한 접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으로 타자와 동일화된다는 것은 ‘나‘라는 자아의 죽음과 같죠. 다만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접촉은 불가능해도 감각세포의 압력으로 느끼듯 흡수는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마치 크림이 피부에 스며드는 것처럼, 음식을 섭취하여 영양분을 얻는 것처럼요. 책이나 영화, 음악같은 미디어도 정신적 흡수가 가능하겠죠.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3-04-19 20:57   좋아요 1 | URL
대디님~~ 밤마다 댓글 대행진 ㅋㅋㅋㅋ 제가 요즘 낮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밤이면 밤마다 돌아옵니다.

대디님 댓글 읽다보면 그간 얼마나 많이 읽고 또 깊이 사유해오셨는지 느껴져서 참 좋아요. 다시 한 번 우리의 결론이 다르더라도 제가 대디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대디님을 존경한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를 DNA의 운반자로 보는 경우, 저는 그런 방식과 설명 역시 인간의 존재와 목적, 삶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 생물학적 목적이 최우선시 되는 삶 또한 가능하고 또 그런 삶에 대해 비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우리 인간을, 인간 종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했을 경우, 우리 삶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특별히 이것을 죽음의 문제에 대입할 경우, 우리 삶의 목적이 없고, 의미가 없고, DNA의 운반자인 우리가 그 임무를, 즉 출산의 의무를 완수했다면 오늘을 더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것은 서로간에 모순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 역시 자살에 대한 접근이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살을 죄악시하는 교회의 일원이기도 하고요.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맞습니다. 나를 기억하는, 나를 원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자살에 대한 결정이 오래오래 유예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마음이 현재 삶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면 말입니다. 타인에게서 동물에게서 소중한 그 무엇에 의지하는 삶의 의지가 삶을 버리려는 의지를 이길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기독교인의 위치에서 인간 삶의 목적, 의의, 의미에 대해 써보자면....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제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제가 괜찮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주시니까,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 분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정도로 내가 특별한 존재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저는 오늘을 삽니다. 바로 위에 제가 밑줄긋기한 책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그런 노예‘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신에 기대는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고요. 저라면, 딱 그 정반대지요. 저는 이 우주 속의 단독자로 살 자신이 없고,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밤마다, 아침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밤이 자꾸 깊어가는데ㅋㅋㅋㅋ 제 댓글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대디님!

건수하 2023-04-19 0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을 단발머리님 덕분에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존재의 이유를 궁금해 해본 적이 없네요.. 그냥 살아있고, 굳이 죽고싶지는 않으니까 죽기 전까지 하고싶은 거 하고 살자는 생각뿐.. 그래서 죽음이나 내세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전 엄청 현실적인 인간인가봐요. 🙂

단발머리 2023-04-19 21:01   좋아요 1 | URL
엄청 현실적이신 수하님을 제가 항상 존경하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죽기 전까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는 생각에도 백번 동의하고요.

건수하 2023-04-19 21:14   좋아요 1 | URL
다시 읽어보니 참 단순무식해 보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

단발머리 2023-04-19 21:16   좋아요 1 | URL
단순무식 아니에요. 오늘을, 매일을 열심히 사는 거죠.
그리고 수하님 말이 맞아요. 그건.... 영원히......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죠.

건수하 2023-04-19 21:27   좋아요 1 | URL
꼭 해야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는 것에서 나오는게 많은데 말이지요… 저는 안하지만 하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전에 mbti 얘기하며 n/s 나누는 기준의 갈매기와 새우깡 만화 생각이 나네요. 제 타입은 n이지만 s에 가까운 n인가봐요.

공쟝쟝 2023-04-19 1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태도를 염두해 두는 자로서 신의 유무 보단 신에 대한 저의 태도를 말씀 드리면, 그건 죽음에 대한 혹은 블랙홀에 대한 그랜드 캐니언 같은 것을 보았을 때에 대한 혹은 아원자의 운동원리나 지평선 수평선을 바라볼 때 느끼는 느낌입니다. 단발머리님의 이 글도 그런 느낌으로 읽었어요. 저는 어릴때 무신론자가 되기로 한 이유로는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신론이 태도가 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게 나약해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하면 절대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는 아닐 거라고 아주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전 어릴 때 부터 권위를 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건 나를 담고 있더라고요. 그걸 안 건 얼마 안됨 ㅋㅋ)

전 여전히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인간 종의 지적총합을 다 합쳐도 알 수 있음이 없음 보다 많고, 그러나 우리가 신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어떤 무엇이 존재로 존재한다면 그냥 가장 낮은 자세로 절 하는 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없다고 하거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좀 문제적 이라고 생각하며, 세속화된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측면에서 저는 무신론자 입니다. 그런데 적고 보니 불가지론이네요.
인간이 풀려고 해서는 안되는 숙제이며 흘끗 보는 것에 대해서도 몸을 삼가고 사려야하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태도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연재해처럼. 혹은 느닷없는 죽음처럼. 그게 운명일 수도 있겠네요ㅎㅎ 그리고 종교가 없는 나의 부모님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도 일종의 유교적(?)세계관인가 해요 ㅋㅋㅋ 그에 대한 공부는 안해봐서 모름 ㅋㅋ

단발머리 2023-04-19 21:04   좋아요 2 | URL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쟝님이 썼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부디 ‘인정하라‘는 거에요.
무신론, 반신론(위의 책,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가 반신론)이 아니라 불가지론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현명한 스탠스라는 거죠. 과학이 모든 것이 될 수 없고, 과학의 설명이 100% 옳은 것은 아니라는 거요. 지동설 전에 천동설도 과학이었다는 ㅋㅋㅋㅋㅋ 그런 느낌?

공쟝쟝 2023-04-19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지금의 뇌과학이나 철학 혹은 지식(ㅋㅋ 푸코 식으로 말하면 에피스테메)이 향하는 일종의 (근대적)인간과 의미에 대한 해체는 서구 지식 (서백남ㅋㅋ) 자장 안에서 바라봐야할 거 같고요,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거나 태도로서 이미 갖춰진 문제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의 연구(!)들을 두팔 벌려 환영하는 데요, 그건 제가 (문제적) 권위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다른 방향의 앎을 여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blah blah… 정리 안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4-19 21:54   좋아요 2 | URL
서백남의 자장 안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소중합니다 ㅋㅋㅋ 자아는 환상이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9 21:53   좋아요 1 | URL
방금 푸코 강의 듣고 왔어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선언하는 인간의 죽음은 모든 지식을 담지 할 수 있고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 -외부 세계의 진리를 담보하고자 하는 (제 뇌피셜 오만한?!)-그런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죽음이래요. 그러니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단발님!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을지도.) 어쨌든 그들의 지식이 그들의 지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 안될 거 같아요. 확실히 공부는 나를 아는 공부여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그걸 안알려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