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쪽 정도 읽었을 때였다. 배아의 성장을 조정하는 부분을 읽다가 순간 멈추고 책날개를 다시 펼쳤다. 1932. 이 책은 1932년에 발표되었다. 1932년이면 엄마도 아빠도 태어나기 전이다. 경술국치가 1910, 해방이 1945년이니 잔인한 일제의 강권통치가 극에 달했을 무렵.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완성했다.

 


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에 따라서 산소를 더 적게 공급합니다.” 포스터가 말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기관은 두뇌였다. 다음으로는 뼈대. 정상적인 수준의 산소 가운데 75퍼센트만 공급을 받으면 난쟁이들이 태어난다. 7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면 눈이 없는 괴물들이 태어나고. (46)


폭발이 그치고, 종소리가 멈추고, 사이렌의 울부짖음이 차츰차츰 낮아지더니 결국 잠잠해졌다. … “아기들에게 다시 꽃과 책을 주도록 해.” 보모들이 지시에 따랐지만 장미꽃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새끼 고양이와 꼬꼬댁 닭과 음매 검정 어린 양을 알록달록한 빛깔로 그려놓은 그림들이 그냥 눈에 띄기만 해도 아기들은 겁에 질려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났고,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갑자기 한꺼번에 높아졌다. (55)

 


미래사회 멋진 신세계에서는 난자와 정자의 수정이 이루어지는 때부터 외과적, 화학적 관리를 통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입실론이라는 다섯 계층의 인간을 제조해낸다’. 출생 후에는 각기 다른 자극과 세뇌과정을 통해 각 계층의 인간에게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특성을 소유하도록 조정한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사랑(48)하도록 훈련하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만족하는 인간상으로 성장하도록 만들어낸다.

 

작가가 그려내는 야만 세계의 모습이 얼마나 아시아적인지에 대해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인디안과 아시아인, 흑인의 특징이 공존하는 거주민들, 오물과 쓰레기, 먼지와 개들 그리고 파리떼와 생활하는 환경에 대한 묘사가 반복된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니, 헉슬리는 1920년대에 인도와 동양을 방문했고,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매료되어 이런 경향이 작품에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과학적 문학적 배경 속에서 광범위한 지식을 소유했던 영국의 소설가에게 야만 세계라는 환상에 대한 재료는 아시아 일거라 추측할 뿐이다.

 


궁금한 지점은 여기. 문명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라는 모토 아래, 원하는 상대와 언제든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특정한 사람과의 친밀하고 지속적인 1:1 관계를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규정한다. 정열적이거나 오래 질질 끄는 모든 관계를 경멸한다.(83) 더 많은 사람과 더 자주, 더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도록 독려한다. 이에 반해 야만세계는 문명인들이 미개하다고 여겨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결혼은 원주민 말로는 영원히라는 뜻이다. 결혼한 두 사람은 깨뜨릴 수 없는 관계에 들어선다고 믿어진다.

 

 

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읽는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를 통해 해결하는 문명세계도 천혜의 아름다움이 깃든 야만세계도 여자들에게는 살기 어려운 곳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할 수 있는 문명세계에서는 언제든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육체를 더듬을 수 있다’. 작가는 남자다. 작품 속, 더듬는 손길은 남자들의 것이고 여자들은 이 행위를 당연하게 여긴다. 여자가 남자를 더듬는 장면은 서술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호감 있는 남성에 대한 유혹으로만 제한된다.  

 


버나드는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침침한 빛을 틈타 전에는 완전히 캄캄한 어둠 속에서조차 감히 엄두도 못 냈을 대담한 행동을 감행했다. 새롭게 부여된 중요한 신분으로 인해 자신이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고 느낀 그는 여교장의 허리를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리가 나긋나긋하게 응했다. 그가 한두 번쯤 도둑 키스를 하고 한 번 슬쩍 꼬집어주기까지 하려던 참에 덧문들이 짤깍거리며 다시 열렸다. (252)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야만세계에 떨어진 문명인 린다’. 마을 남자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문명세계에서처럼 그녀는 그들과 자율적인 성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남자들이 찾아오는 얼마간의 밤이 지나자, 여자들이 나타난다. 린다의 손목을 부여잡고 다리를 깔고 앉아 채찍으로 린다를 때린다. 린다를 찾아왔던 남자들이 자기들 남편이라고 말하며, 그들은 린다를 때린다.

 

 


문명세계는 자신의 위치에만 만족한다면 걱정도 고민도 없는 세상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게 살면서 배급되는 소마를 통해 만족감을 얻으면 그만이다. 자연을 누리며 살아가는 야만세계는 이야기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가능하며, 아이를 낳고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자라가는 세상이다.

 

문명세계와 야만세계의 중간, 그 어디쯤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생각한다. 문명세계도 야만세계도 여자들이 살기엔 잔인하다고. 남자들의 삶도 쉽지 않겠지만(적어도 그렇게 인정은 해 주겠지만), 여자들의 삶이 더 처참하다고. 양쪽 세상이 모두 그렇다고. 멋진 신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마치 그녀가 무슨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듯 얘기를 하는구나." 버나드는 이를 악물었다. "그 여자 여기를 맛보고, 저기를 즐기고, 마치 양고기처럼 말이야. 그녀를 양고기 정도로 몰락시키다니. 그녀는 생각해보겠다고 하고는 이번 주일에 대답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오, 포드 님이여, 포드 님이여, 포드 님이여." 버나드는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면상을 냅다 갈기고 또 후려갈겨주고 싶었다.
"그래요, 정말 그 여자 한번 먹어볼 만해요." 헨리 포스터가 말했다. - P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작은 『에코 페미니즘』이었다.

 

 

 

 

 

 

 

 

 

 

 

 

 

 

 


도서관이 5월 6일부터 재개된다 하고, 5월 1일부터 희망도서 신청을 받는다고 해서, 이 책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6월의 책'을 얌전히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었다. 신청 이유로 책정보를 복사하다가, 이 책이 UN이 선정한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할 페미니즘 도서'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됐다. 나머지 11권을 찾아본다. (12 feminist books everyone should read, 2019)

 

 

 

 

 

 

 

 

 

 

 

 

 

 

 


1. We Should All Be Feminists (가장 쉽고 명료한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생각함)

2. I, Rigoberta Menchu: An Indian Woman in Guatemala

3. Under the Udala Trees

 

 

 

 

4. Feminists Don't Wear Pink and Other Lies: Amazing Women on What the F-Word Means to Them 

(표지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킴)

5. I Am Malala: The Girl Who Stood Up for Education and Was Shot by the Taliban

6. In the Time of the Butterflies (알라딘에는 없다고 함)

 

 

 

 

 

 

 

 

 

 

 

 

 

 

 

7. Handmaid's Tale (읽은 책 나와서 반가움)

8. The Second Sex  (읽은 책 나와서 반가움 2)

9. Ecofeminism  (곧 읽을 책)

 

 


 

 

 

 

 

 

 

 

 

 

 

 

 


10. 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 (안 읽은 책 중에 제일 먼저 읽고 싶은 책 )

11. The Last Girl: My story of Captivity, and My Fight Against the Islamic State

12. A Room of One's Own  (나만의 그녀,로 하고 싶은데 팬이 너무 많아서 좋기도하고 싫기도 함)

 

 


한국어라는 제약이 없었다면 전 세계에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사랑받았을게 분명한 책들.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그녀, 정희진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5-04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게 포함되어 있어서 기쁘지만 안 읽은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갈 길이 여전히 멀구나 싶어요. 최근에 제가 읽은 페미니즘 책이 몇 권이나 되려나 대충 세어봤더니 75권 정도더라고요. 그런데도 안읽은 책이 이렇게 많아요, 단발머리님.

그리고 저는 [새장에 갇힌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이미 가지고 있답니다? 가지고 있은지는 한참 되었어요. 아하하하하.
우리가 [에코 페미니즘]을 읽을 거라 기쁘고, 제 생각에는 [The last girl]은 같이읽기 책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책 정보 좀 검색해보고 올게요. 오래 보관함에 들어있던 책이긴 한데, 분명 넣어둔 이유가 있을테니 말예요.

단발머리 2020-05-04 11:06   좋아요 1 | URL
전 여기에 있는 책을 다 읽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책인지 보고는 싶어서 리스트로 만들어 봤어요. 근데 다락방님, 75권이면 무척 많네요. 한 분야의 책을 75권 읽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안 읽은 책이 많다니.... 우리의 갈 길은 아직도 멀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를 구입해둔 센스를 나는 부러워합니다. 전 오늘 아침에서야 만났는데 말입니다. 하하 하하하.

수연 2020-05-04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모조리 메모해놓았어요! 다락방님 75권 와 그저 감탄만 나오는...... 바지런히 읽을게요! 저두!

단발머리 2020-05-04 11:38   좋아요 1 | URL
이건 다락방님 껀데 제가 한 번 외쳐볼께요. 수연님! 컴 온!!! 🤗
 

















최근에 찾아 듣는 프로그램은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이다. <코로나 19, 신인류 시대>라는 특별기획이 방송되었는데,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이 출연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자주 회자되는 말이 일상이라는 단어다. ‘일상을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어서 잃어버린 소박한 일상을 되찾고 싶다’. 홍기빈 소장은 다르게 말한다.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한 소비를 긍정하는 현대 문명으로의 회귀에 대해 반대한다. 멈추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도래하는 대상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정관용 : 아까 금융화 설명하시면서도 그런 얘기하셨잖아요. 예측을 못 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어떤 액터들이 어떤 플레이를 해야할지 방향을 못 잡겠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런 현상이죠?


홍기빈 : 그러면 예측이 안 되는 상황에서는 미래를 우리가 대하는 방식은 결단이에요. 그건 우리가 이 상황에서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고 어떤 식의 미래를 만들고 싶은가라고 하는 우리의 이성과 양심으로 되돌아가서 어떤 미래를 만들까라는 그림을 우리 스스로가 결단하고 만들어야 됩니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방송일: 2020 4 20일 월요일)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끝나고 초, , 고등학교가 등교개학을 하게 되면 우리는 예전과 비슷한 모습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의 위협이 상존하는 미래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방역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학년별 식사 또는 학년별 등교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난 주부터 교회에 간다. 체온기로 열을 체크하고 손소독제로 그 자리 서서 (장로님이 보는 앞에서) 손을 문지르고 명부의 이름을 확인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간격을 유지해서 앉아야 하고, 예배 중에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며, 악수 대신 주먹인사를 한다. 식사는 7대 방역 지침 위반이어서 불가능하다. 무기한 연기. 예배 드리고 밥 먹고 커피 마시며 이야기하고, 연습하고 예배 드리고 다시 만나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은 어쩌면 다시 못 올 추억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맘이 슬퍼진다. 다른 시간, 다른 시대가 오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말한다.

 

제가 보기에 이번에 그런 산업구조 개편 이런 것도 있지만, 뭐가 우리 사는 데 더 중요한가, 이런 데 대해서 사람들이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왜냐하면 방금 말씀하신 배달, 택배 이런 거 그냥 당연히 하는 거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그러면 의료, 보육, 양로 이런 데서 일하는 분들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하다못해 식품점,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분들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그러다 보니까 영국 같은 데서는 그런 의료나 먹거리, 교육 이런 데 종사하는 분들을 핵심인력, 키워커 이렇게 부르고 미국에서도 필수직원, 이센셜 임플로이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그냥 세상에 더 중요한 것도 없고 덜 중요한 것도 없고 그냥 시장에서 사람들이 원하면 그런 게 더 많이 생산이 되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생산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사회를 운영을 했는데, 이제는 뭔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필요한 일들이 있고 그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이제 생겼기 때문에 그런 임금구조나 노동시장구조, 이런 것도 또 변할 것 같아요.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방송일: 2020 4 10일 금요일)



질병의 치료와 돌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식자재의 생산과 유통. 조리, 반조리 식품의 배달까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영역의 노동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하찮게 여겨왔고, 노동에 대한 처우도 불합리했다. 비대면. 바이러스의 전파자인 인간과의 접촉을 무조건 피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질병의 치료와 완화를 위해 의료적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필요한 노동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삼시세끼의 위대함과 고단함. 외로움에 대한 대처. 돌봄과 사랑. 연대 그리고 돈.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주민센터를 오르는 어르신들은 서울시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러 가시는 길이다. 4인 가족 100만원.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된다. 7세 미만 아동 1인당 40만원 아동돌봄쿠폰이 지급되고 지자체별로 5만원부터 10만원까지 재난기본소득이 지급된다.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비상 시국에,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형태로 나라에서 주는 공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은 물론,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당장의 생활이 어렵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가 가진 자원을, 더 중요한 곳, 더 필요한 곳, 더 긴박한 곳에 배분해야 한다. 지금이 그런 때이다. 그런 일을 시도할 만한 때이다.

 

 

총선이 끝나고, 나의 정치적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내도 전혀 괜찮은 독서모임 언니들과 카톡을 하게 되었다. 축하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 받다가 이렇게 썼다. 언니님들, 예상을 뛰어넘는 이런 결과를 받아보니 부담이 되네요. 무한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언니님들은 하하하! 하고 웃으셨다. 근데 언니님들, 왜 제가 부담감을 느끼는 걸까요?

 

180석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는 나는 평범한 전업주부다. 이세상 제일 싫은 이야기 주제가 개학일정24시간 수면잠옷 고딩과 고기반찬만 먹으려 하는 호르몬 폭발 중딩의 엄마이다. 유부만두님이 알려주시지 않으면 지금이 이불빨래 타임이라는 것도 모르는, 철모르는 나다. 『나의 사촌 레이첼』의 필립을 아주 조금 사랑하고, 그를 한없이 미워하면서도 다시 그의 마음을 찬찬히 헤아리며 마음껏 상상하는 독자다.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테지만. 우리 앞에 새롭게 펼쳐질 세계에 대한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이제는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이 글쓴이들이 직접 겪은 고난의 경험에서 온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반드시 우리가 잘 아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현재의 삶에 관해서도 말해 준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12)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현재의 불합리와 불평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돈이 최고라는 종교 같은 신념에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 인간마저 도구로 치환하는 자본주의 미친 질주를 어떻게 멈출 것인가. 내 아이가 살아갈 미래는, 내 아이가 살아야 할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방송 내용이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고 한다. 참 기민하고 적절한 출판 자세라 할 수 있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5-04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4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마 전 다락방님의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리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이전에 읽다가 도중에 포기한 책이라서 더 관심이 갔다. 앞부분만 읽었지만, 하루키를 인터뷰했던 젊은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가 그의 왕팬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하루키의 작품을 오랫동안 깊이 있게 읽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읽던 도중, 하루키 작품을 좀 더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반납일도 성큼성큼 다가오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읽은 하루키 소설은기사단장 죽이기』인데, 친하지 않은 옆집 아저씨에게 제 가슴, 너무 작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이상한 여고생 설정 빼놓고는 재미있게 읽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 자체로서는 하루키의 능력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다만 성적인암시나 섹스에 관한 표현 방식을 넘어서서, 남성 작가 하루키가 생각하는 성적 모험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남녀의 성적인 관계, 육체적인 소통에 대해서 작가들이 각각 지향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있고, 싫어하는 방식도 있다.

 

20대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던 조정래의 서술은 지극히 남성적이다. 남성적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의 의미 그대로다. 그의 작품들의 지향과 노고에 지극히 찬탄하고 존경하지만, 적어도 성적인 서술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컷이 먹이인 암컷을 대하는 자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김훈도 마찬가지다. 나는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김훈을 읽을 때 불편했던 내 마음을 사실 그대로 말할 수 있게 됐다. 김훈이 페미니즘을 못된 사조라고 생각하는 이유, 그렇게 말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 이유가 단박에 설명된다. 밥 먹는 일과 다름없는 일상으로서의 섹스. 역시 수컷의 섹스. 딱 그만큼이다. 필립 로스를 사랑하고, 그의 소설을 사랑하지만, 그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섹스에 관한 기나긴 묘사에 대해서는, 뭐랄까. 읽다 보면 중간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구, . , 또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사람 말했으니 이제 좋아하는 사람 차례다. 절판되었던 이언 맥큐언의속죄』는 <이동진의 빨간책방> 방송 이후 재출간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방송에서 소설가 김중혁은 도서관 장면을 말하면서, 로맨스의 측면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혹 아직 안 읽어보신 분이 계시다면 직접 읽어 보시면 되겠다. 풋풋한 첫사랑의 난감함과 애절함, 그리고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열정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낭떠러지. 한없이 낭만적인 낭떠러지에 다다를 수 있다.


















잭 리처가 나오는 『어페어』 역시 좋아한다. 엄중한 상황 속에 꽃피는 사랑, 끊이지 않는 웃음의 대향연. 깊은 밤, 손을 잡고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 것에 합의한 성인남녀가 얼마나 천천히 옷을 벗을 수 있는지. 이 책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겠다.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다. 처음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다 한결같이 아름답다. 촉촉하고 부드럽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그리고 이 책나의 사촌 레이첼』


422쪽에서부터 425쪽까지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빼앗겼을 때,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동들과 미숙한 움직임이 얼마나 귀여운지 이 책은 보여준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히 마음에 남는 사랑의 흔적에 대해서 말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뛰쳐나올 것 같은 순간. 영원히 나의 것인 바로 그 순간에 대해.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5-0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뭔데요 뭐지 뭐지!!! 저 내일 외출할 때 이 책 가지고 나갈래요!!

단발머리 2020-05-01 01: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내일 출근 안 한다고 이렇게 늦게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일단 이 책을 읽고나서 이야기 나누시죠. 전 이런 스타일 좋아합니다. 담백하고 순수하고...물론 뒷목 잡는 장면 두어번 나옵니다. 아, 이 소설 진짜 최고에요. 저도 읽으려고요. 한번 더!!!

책읽는나무 2020-05-01 0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참 뭐, 또 이렇게까지....
그 공감에 공감합니다.ㅋㅋㅋ
‘수리 부엉이~‘책 읽으려면 하루키씨 책 안읽은 게 아직 많다 싶어, 한 권씩 옛추억 떠올리며 읽고 있는데...음!!!
차라리 1Q84보다 기사단장이 더 낫지 않나?란 생각을 해봅니다.아직 다 읽진 않았지만...여주인공의 ‘성‘에 대한 사고와 묘사가 설마 저럴까???여자가 아니어서 잘 모르는???음....
읽다 보면 하루키는 이래서 노벨상 후보밖에 되지 못한 것일까??그런 생각이 들곤 하더라구요.ㅜㅜ
그래도 청춘시절 그의 책을 읽고 좋았던 추억 때문에 여전히 손이 가는 작가 중 한 명이라...미련을 끊진 못하겠고 계속 읽고 싶은^^
태백산맥도 완독하지 못한 상태인데...몇 년 전 친구가 조정래 작가의 최근작이라고 좋다고 해서 그래?? 하면서 읽었었는데....음...뭐지??남자 주인공 선생만 올바르고...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다들 유별난...특히 여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좀 특별한? 느낌이 들어 친구에게 얘길 했더니..내가 좀 예민한 사람 취급을 받은 적 있었네요.이 친구는 태백산맥 완독후 작가님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라~~^^
그후로 나의 예민함을 감추고?? 독서하는 습관이 생겼네요ㅋㅋㅋㅋ

‘작은 것들의 신‘은 제가 읽은 책이라 공감,공감입니다.
요즘 외국 여성작가들 책을 읽어 보면 와~~입이 쩍 벌어질만한 작가들 많아요.그동안 무지하여 너무 모르고 살았었네~~하면서 다시 겸손한? 자세로 독서하려구요.^^
‘나의 사촌 레이첼‘이랑 ‘속죄‘랑 ‘어페어‘도 읽어봐야 겠군요~~사랑묘사가 아름다운 책...좋아요.좋아^^

단발머리 2020-05-04 07:28   좋아요 0 | URL
책읽는나무님 굿모닝이요^^ 1Q84는 읽어보지 않아서 전 기사단장이란 비교하기는 어렵네요. 기사단장 읽으면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었던 건 아닌데, 사실 저도 하루키 나름의 읽는 맛을 포기하기가 어렵더라구요. 하루키 책을 모두 다 읽을 생각은 없지만 기회만 된다면 또 읽고 싶기도 하고요.
조정래 작가 최근작이라고 하면 그 초록 표지일까요? 전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이랑 한강 몇 권만 읽어서 단행본은 안 읽어봤어요. 태백산맥 완독 후 작가님 너무 사랑하는 친구분의 느낌도 아주 쪼금은 이해가 되요^^ 하지만 우리의 예민함은 계속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가 많지만 진심입니다.

전 올해의 소설로 ‘나의 사촌 레이첼‘을 꼽고 싶어요. 읽게 되신다면 책나무님 감상도 궁금해요. 리뷰를~~~~~^^

유부만두 2020-05-01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려요. 밥해야 하는데 책 읽고 싶어요.
오월 초에 여행을 가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이라 집에서 멍....하게 있어요.
휴일이지만 휴일 아닌 것과 크게 차이도 없어요.
하지만 오늘은 창문을 열어놔도 춥지 않네요. 봄은 갔어요. ㅜ ㅜ

단발머리 2020-05-04 07:32   좋아요 0 | URL
오월 초 연휴가 덥지도 춥지도 않아 여행가기 참 좋은 시즌이기는 해요. 저희는 오월초에는 여행가지 않는 편인데 유부만두님은 조금 서운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아이들이랑 항상 지내다 보면.... 네, 모두 빨간 글씨인 것입니다.
갑자기 날이 더워졌어요. 어제는 반소매 입은 사람들을 많이도 보았습니다. 봄이 갔어요ㅠㅠ

보슬비 2020-05-0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유부만두님 말씀대로 페이퍼를 읽는것만으로도 두근거렸어요. 마침 판타지로맨스를 읽어서인지 단발머리님께서 언급하신 책들이 설레게 하네요.

단발머리 2020-05-04 07:33   좋아요 0 | URL
굳이 하나 고르자면 전 판타지 보다는 로맨스 쪽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보슬비님의 두근거림은 제가 보슬비님 방에서 맛나 보이는 사진을 보면서 깨닫게되는, 그런 두근거림일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이며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 책이 성 대결의 측면에서만 소비되는데 도리스 레싱이 불만을 가졌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흑백 갈등,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전쟁에 대한 반대 등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의 경전으로 읽힌다는 것에 대해서도 도리스 레싱은 반대했다. 그럼에도 여성해방이 추구하는 모든 주제가 다뤄졌다는 점에서, 특별히 여성의 신체가 세상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런 평가는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서사는 자유로운 여자들의 주된 흐름 속에서, 주인공이자 소설가인 애나의 네 가지 색 공책들인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공책이 삽입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책들> 안에는 일기, 리뷰, 소설의 개요, 신문 기사, 꿈에 대한 설명들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금색 공책이 추가된다. 여러 이야기의 앞과 뒤, 먼저와 나중이 하나로 엮이면서 작가가 아닌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 적극적인 이해 과정을 통해 소설이 완성된다. 소설 쓰기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생각을 해부해 보임으로써 소설 형식의 실험을 시도했고 이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주인공 애나가 제일 많이 투영된 사람은 노란색 공책 <제삼자의 그림자>의 엘라이다. 여성지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엘라는 그녀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는 닥터 웨스트의 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폴 태너라는 의사였는데, 그는 엘라에게 성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첫 눈에 반한 건 아니었지만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확신에 차서 점점 더 그를 사랑하게 된 엘라와는 달리, 폴은 엘라가 싫어할 만한 질문을 계속하며 자신의 난봉꾼 기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이면 셔츠를 갈아입고 씻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남자. 아내는 좋은 여자라고 말하면서 매일 밤 엘라를 찾아오는 남자. 결국에는 예상처럼 엘라를 떠나는 남자. 엘라가 사랑했던 남자가 이 남자다.  



폴과 함께할 땐 그와 무관하게 성적인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고, 그가 며칠 떠나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욕구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 끓어오르는 이 성에 대한 갈망은 섹스 자체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온갖 감정적인 갈망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다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곧 정상의 상태, 즉 남성의 성에 의해 차오르고 스러지는 성을 지닌 한 여성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여자의 성은, 말하자면 남자에 의해, 진짜 남자에 의해 채워진다는 사실을.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잠들게 해줄 것이고, 그러면 더이상 섹스에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금색 공책 2』, 133)



엘라가 갈망한 것은 섹스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폴이라는 남자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물음이다. 인생의 의미, 진정한 사랑, 정치적 이상향. 이 모든 것은 결국 스러져 버린다. 떠나고, 잃어버리고, 해체된다.


사랑을 확신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의 것이 되지 않고 떠나가버린 폴을 예상했던 엘라처럼, 젊음과 시간을 모두 바쳤던 거대한 이상인 공산주의의 몰락 앞에서 애나는 절망한다. 엘라는 사랑을 잃었고, 애나는 꿈을 잃었다.


섹스도, 정치적 이상도 일생을 바칠 만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삶을 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가. 왜 그토록 뜨거웠던 사랑은 식어버리고, 완벽한 이상은 무너져 내리는가. 마음속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왜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공허함과 우울함인가. 왜 빈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가.


소설가는 답해 주지 않는다. , 애나가 말할 뿐이고, 독자는 듣고 생각할 뿐이다. 『금색 공책』에 대한 로베타 루벤스타인의 논평이 옳다. 이 책은 읽는 책이 아니라 경험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