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중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가치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담긴 책은 박웅현의 [여덟개의 단어]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 2권 중반에서 중단해버린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겠다고 굳게 결심을, (작년에 하고 아직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결심을 했다.

 

 

 

 

 

이 책을 펴서 제일 먼저 읽은 챕터도 당연히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것이었다.

안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브론스키를 사랑합니다. 그만큼 브론스키가 완벽했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안나가 모든 걸 브론스키에게 쏟아부었다는 의미겠죠. 브론스키는 늘 같은 브론스키인데 안나가 달라지는 겁니다. 이런 사랑을 브론스키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과잉된 생기와 열정을 가진 안나의 사랑은 두 몫의 사랑이거든요. 이것이 세료자와 브론스키에게로 나뉘었다가 브론스키에게만 흘러가요. 그건 브론스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263쪽)

과잉된 생기와 열정, 두 사람의 몫의 사랑을 가지고 있던 안나의 사랑이 브론스키에게로만 흘러갈 때, 브론스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브론스키가 안나를 외면하려 했던 이유가 그녀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집착 때문임은 확실하니까.

이런 제안도 재미있었다.

가끔 강의 시간에 이런 질문을 하는데요. 만약 고골이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면 누가 주인공일까요? 스치바가 주인공입니다. 대표적인 생리학적 인간이죠. 잘 먹기만 하면 모든 게 해소됩니다. 도덕적인 문제도 생리학적 문제로 해소되는 인간형이죠. 고골의 소설에 등장하는 속물적 인간의 전형입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썼다면 누가 주인공일까요?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흥미를 느낄 만한 인물은 카레닌입니다. 오쟁이 진 남편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는 뭔가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 인물에 관심이 많았으니까요. (254쪽)

러시아 문학사 뿐 아니라 세계 문학사의 두 거장,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비교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유럽이라는 타자에 대한 대타의식으로서의 러시아(자아)라는 민족의식을 강조합니다. 그에게는 ‘나’와 ‘타자’를 어떻게 구획할 것인지가 『가난한 사람들』 이후 줄곧 이어진 문제의식이었고, 그것이 나중에 러시아 대 유럽이라는 대립으로 확장됩니다. (중략) 하지만 톨스토이는 타자보다 ‘나’의 세계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 니힐리즘과 대결했다면, 톨스토이는 에고이즘과 싸웠다고 생각되는데, 톨스토이의 경우 데뷔작부터가 자전 3부작이죠. 자기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이게 확장되면 러시아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통일성의 문제가 됩니다. (243-4쪽)

대중의 눈높에 맞춘 강의로 엮어진 책이라 그런지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읽고 있다. 러시아가 그렇게나 오랜 기간동안 몽골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걸 몰랐던 1인으로서, 책 앞부분에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개관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넘어 푸슈킨과 투르게네프의 작품으로도 손뻗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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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3-2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사야겠어요. 헤헷. 재미있겠다. 저는 안나 카레니나가 그래서 좋았거든요. '나 자신'에게 충실한 소설이라서요. 그렇지 못한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 안나 카레니나는 그저 불륜녀 일 뿐이지만, 톨스토이는 독자로 하여금 안나가 되게 하고 레빈이 되게 하고 브론스키가 되게 하잖아요.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에게 충실한, 그런 소설을 쓰는 천재적인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재밌겠다. 사야지. 히히.

단발머리 2014-03-21 20: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가 안나가 되게하고, 브론스키가 되게 하는, 이런 고도의 기술은 정말, 최고죠.
천재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아요.
조금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요. ㅍㅎㅎ

2014-03-21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1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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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2반, 형님반이 되어서 그런가, 부쩍 커버린 아롱이가 일찍이 집을 나선다.

“엄마, 갖다올께요~”

시계를 본다. 8시 3분. 작년 요맘때였으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시간이다. 길을 건너는 아롱이를 바라본다. 저 앞에 걸어가는 친구를 발견하고는 아롱이가 또 뛰어간다. 아롱이는 아롱이의 생활 속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나는 아침 설거지를 미뤄두고, 책을 펼친다. (물론, ‘설거지를 미뤄두고‘와 ’책을 펼친다’ 사이에는 약간의(?) 뉴스 확인과 인터넷 검색 그리고 애니팽 3-4판이 자리한다.) 

나쓰메 소세키를 큰 맘 먹고 구매한 후에 제일 먼저 손에 든 책은 3권 [풀베개]이다. 열린책들 판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반 정도 읽었는데, 그래도 이 책이 먼저 읽고 싶었다. 알라딘 어느 분 서재에서 읽었던 이런 구절들 때문이었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15쪽)

 

누구나 아는 이야기, 이렇게도 쉬운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아,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되어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 (16쪽)

 

서른을 넘어 마흔의 문턱까지 달려온 이 즈음, 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이 더한다는 소세키의 말이 담담하게, 그리고 깊이있게 다가온다.

책을 펼치고, 책을 만지고, 삽화를 보고, 소세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책 속에서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이런 멋진 구절을 읽게 될 때, 나는 생각한다. 너무 ‘호사스럽지 않은가’. 내 생활이 너무 호화롭지 않은가. 내 삶이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가.

조용한 아침, 혼자 소세키를 읽으며 하는 생각이다.

나는 기차가 분별없이 모든 사람을 화물과 마찬가지로 알고 맹렬히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객차 안에 갇혀 있는 개인과, 개인의 개성에 털끝만치의 주의조차 주지 않는 이 쇠바퀴를 비교하며, 위험하다, 위험해, 하고 주의를 주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명은 이 위험이 코를 찌를 정도로 충만해 있다. 앞을 전혀 내다볼 수 없는 상태에서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기차는 위험한 표본 가운데 하나다. (182-3쪽)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냉수처럼 깔끔한 소세키의 문장이 현대 문명을 비판한다. 기차를 보며 말한다. 이것은 위험하다고 말이다.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이다. 소세키가 보았던 기차보다 2배, 3배, 아니 10배는 빨라진 기차를 생각하며 나도 말한다. 위험하다, 위험해.

아래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락이다. 나는 이 단락을 읽으면서, 소세키의 작품을 그리고 소세키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그럼 뭐가 쓰여 있는데요?”

“글쎄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호호호호. 그래서 공부하시는 거예요?”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책상에 이렇게 펼치고, 펼쳐진 데를 적당히 읽고 있는 겁니다.”

“그래, 재미있나요?”

“그게 재미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읽은들, 끝에서부터 읽은들, 적당한 데를 적당히 읽은들 괜찮은 거 아닌가요? 그리 이상하게 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122-3쪽)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책상에, 아니, 식탁에 이렇게 책을 펼친다. 아무데나 편다. 아무데나 펴서 적당히 읽는다. 공부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아무데나 펴서 적당히 읽는다.

이게 내 일이다.

맞다, 나는 호사스럽다. 나는 너무나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은, 너무나 사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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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에서 윤리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욕망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개개인의 삶보다는 사회질서를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전체 사회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182쪽)

하루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행하고 죽는 것, 그것이 더 커다란 행복이니 말이다.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자. 그것이 바로 욕망을 긍정하는, 쉽지만 녹록치 않은 방식이다. (184쪽)

 

 

 

 

 

 

 

길게 뻗은 방파제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 배를 매어 두는 기둥으로 쓰이는 철탑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온통 검은색 차림의 그녀. 움직이지 않고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녀. 신화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사람. 그녀가 돌아본다. 

그녀의 얼굴은 어니스티나처럼 곱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 어떤 취향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는 슬픔이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거기엔 어떤 꾸밈도, 위선도, 발작도, 가면도 없었다. (19-20쪽)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은 아니다. 난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 아니다.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슬픔이, 내 얼굴에는 없다. 나는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 아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얼굴 속에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다면, 만약 그래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메롱을 머금은 얼굴이다. 메롱.

이 작품이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배우가 좋을까 생각해본다. 금방 떠오르는 배우가 없다. 우수에 찬,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라. 조민수, 김희애, 그리고 신세경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따라간다. 제목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 주인공은 여자일 테고, 그녀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 이야기는 ‘프랑스 중위와의 사랑 이야기‘일 수 있고, 아니면, 프랑스 중위와 사귀였던 여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전력을 가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여자를 찾아 나선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은, 자신은 언제나 정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그녀가 생각하는 통치의 개념은, 불손한 백성들은 사납게 몰아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34쪽) 

 

나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찾고 있었는데, 위의 문장은 나를 ‘또 다른 그녀’에게로 이끌어준다.

자신은 언제나 정당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그녀, 불손한 백성들은 사납게 몰아세워야 한다고 믿는 그녀, 상대방은 항상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 의미 해석이 불가능한 문장을 말하는 그녀, 외교 성과를 패션으로만 말하는 그녀.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녀의 말과 행동이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녀가 정말 몰라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그녀. 그녀가 나왔다. 그녀를 저리 밀치고, 다시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찾아본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찰스는 그녀가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짓궂은 농담을 당장 알아차릴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농담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애정이 깊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깊은 애정은 곧 그에게 와닿았다. (12쪽)

 

또 다른 그녀다. 부족함 없이 자란 부잣집 외동딸, 찰스의 약혼녀, 어니스티나. 어린 나이임에도 바람기 다분한 찰스의 성향을 진작에 간파한 어니스티나는 드디어 찰스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녀는 곧 그의 신부가 될 것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책장을 빠르게 넘긴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가들은 글을 쓸 때 나름대로 설정된 계획을 갖고 있어서, 제1장에서 예견된 미래는 언제나 정확한 경로를 밟아 제13장에 이르러 실현될 것이라고. 그러나 소설가들은 저마다 다른 숱한 이유들 때문에 글을 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애인들을 위해, 허영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즐거움 때문에. ... 모두의 진실은 아닐지라도. 우리들 소설가에게 공통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 <우리는 실재하는(또는 실재했던) 세계만큼 사실적인, 그러나 그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

바꿔 말하면,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는 찰스만이 아니라 티나와 사라, 심지어 저 밉살스러운 풀트니 부인에게도 각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신에 대한 좋은 정의가 하나 있다 − <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자유>. 나는 이 정의에 따라야 한다. (139쪽)

 

이번에는 작가다. 소설가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하나의 이유를 밝히고, 그리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 나는 각각의 방문을 열어놓으라고 말한다. 안방의 컴퓨터에서 유튜브로 ‘레고 무비’를 무한반복하는 아롱이 때문이 아니라(아니라?!), 아이들이 아직 어리므로, 문을 열고 닫을 때 손을 다칠 염려가 있어 문을 열어놓으라 한다. 우리집은 문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이렇게 느닷없이 소설의 문을 열고, 문장 사이를 뚫고, 정체를 드러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를 만나면 적잖이 당황한다. 근래에 읽었던 소설 중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난다. 한껏 진지하면서도, 완벽하게 유머러스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문을 열어 젖히는 밀란 쿤데라. 문을 열고 갑자기 나타나는 작가들.

찾았다. 드디어 그녀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두 눈으로 덮여 있어서, 그것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액세서리 정도의 구실밖에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지성과 꼿꼿한 정신이 있었다. 또 거기에는 어떤 동정에도 반발하는 조용한 거부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그녀의 존재였다. (168-9쪽)

 

눈빛에서는 억제된 격정을, 입술에서는 억제된 감각을 드러내는 그녀. 검은 눈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 시선을 찰스에게 쏘아대는 그녀.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지만, 단지 연애소설만은 아니다. 다만, 나는 작가가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볼테르에 대해,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에 대해, 영국의 선거권 확대에 대해, 신생국 미국의 역동적 변화와 미국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복잡한 심경에 대해, 렌틴의 『의학에 관한 실제적 지식』(하노버, 1798)에 대해 잘 몰랐기에, 내가 읽을 수 있는만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잠시 서 있었다. 여자는 닫힌 문이었고, 남자한테는 열쇠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미소는 사라졌다. 긴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찰스는 진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는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뛰어내리고 싶다고,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기만 하면 그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띤 감정으로 호응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마침내 그가 속삭였다.

“다시는 단둘이 만나서는 안 되겠소.” (262쪽)

 

이승우님의 책, 한 구절이 떠오른다.

 문학의 문장은, 실용문과 달라서 정보의 직접적이고 빠른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문학은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호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다. (64쪽)

 

 

맞다. 문학은 소통을 가능한 지연시킨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고 불리던 사라라는 여자가, 아름답고 유복한 약혼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짧은 소설은, 이 짧은 이야기는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을 미룬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에는 이렇게 보여주고 만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아니, 이미 사랑에 빠졌음에도 지금까지 그걸 속여왔던 거다. 이제야, 두 사람은 눈을 맞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둘 다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 눈은 여전히 서로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녀는, 아니 우물처럼 깊고 커다란 눈은 그가 이제껏 보았던 어떤 것보다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이 시대를 극복했다. (349쪽)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에 사라를 멀리하려 했던 찰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 한다. 하지만,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당신을 잊지 못할 거요.”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파고드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봐둬야 할 게 있다고. 당신의 진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진실, 당신의 감정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감정, 당신의 역사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역사를 보아 두라고.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나는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말해 주어야만 비로소 당신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면...... (362쪽)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여러해 까지라도 미뤄둘 수는 있지만 영원히 가두어둘 수는 없는 욕망(482쪽) 때문에 결국 찰스는 사라를 안는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럴 수 있다고, 사라도, 찰스도 적어도 머리속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 다음, 찰스의 사랑을 얻은 후 사라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 내에서도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판 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 당시의 사회와 문화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해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찰스편이다. 왜, 왜 떠나려 하나요? 왜, 떠나나요?

 

사라는 답하고, 나는 그녀의 답에 조금은 수긍한다. 이렇게 현대적인 여성이라니. 너무 쿨해서 서늘해질 지경이다.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인용되는 시와 소설의 몇 구절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하다. 기품이 있다. 그가 좋아하는 시, 그가 사랑하는 소설, 그리고 그가 아끼는 작가들 때문에 나도 존 파울즈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내 유일한 힘은 그대에게 있나니.

그대 안에 머무는 것은 기쁨이어라.

− 토머스 하디, 「영원한 그녀」 (371쪽) 

 

오, 나의 사랑이여, 그대를 나 혼자서만 사랑하게 해다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해다오.

환상이 찾아온 것을 아무도 목격하지 않게 해다오.

모든 것을 보면서도, 보이지 않게 해다오.

− 아서 H. 클러프, 제목 없는 시 (1852) (356쪽)

 

다음책은 [오래오래]다.

감은빛님의 <커피의 역사> 이벤트에 응모했었다. 사실, 기준 미달인데 넓은 아량으로 이벤트 당첨자로 선정해 주시고, 내가 신청한 책을 보내주셨다. 어제 아침, 일찍 도착한 책을 품에 안고는, 너무 예뻐서 감탄과 탄성에 혼자 원우먼쇼를 하고야 말았다.

“감은빛님, 고맙습니다. 잘 읽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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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4-03-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롱을 머금은 얼굴, 아하하하 단발머리님~! 정말 ㅋㅋㅋ

프랑스 중위의 여자, 진짜 재밌게 읽었네요. 존 파울즈의 전작 3권짜리 마구스를 좀 암울했던 시기에 읽고, 은근 19금스러운데가 다분한 참 매력적인 소설이었더래서,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본다는 것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였답니다.

그의 작품 중 이런 거 몇 편 더 수중안에 주어진다면, 계속계속 틀어박혀 책으로 도피하며 은둔자처럼 살아도 부족할 게 없겠다 싶은 때가 있어요. 그나저나 줄거리와 등장인물 기억 잘 안나요. 재밌게 읽은 거 맞나?

두 작품에서 모두 영국은 낡은 사회였고, 미국은 도피를 떠나는 신세계였는데, 앞의 나라 것이 고급이라면, 뒤의 나라 것은 천박 저급하다. 하는 배경 기저가 깔아놓은 거 같았아요. ㅎ

단발머리 2014-03-06 11:07   좋아요 0 | URL
icaru님, 메롱 머금은 얼굴, 한 번 보실랍니까?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리뷰 쓰면서 처음부터 사악 훑어보는데, 다시 읽고 싶더라구요.
전 존 파울즈꺼는 처음이라 다른 것도 읽어볼려구요. 말씀하신 작품 이름이 [마구스]인가요?
지금 검색해보니, 품절이네요. 도서관을 찾아봐야겠어요~~

저는 영국이든, 미국이든 가리지 않고요. 가보고 싶을 따를입니다. 살고 싶지는 않지만, 가보고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4-03-1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에서 여자가 나오는 장면을 읽을 때 그곳을 지도에서 찾으면서 읽었어요.잉글랜드 지역이 은근히 경치 좋은 곳이 많더라고요.

단발머리 2014-03-13 08:31   좋아요 0 | URL
아하.. 전 그 생각은 못했어요.
그냥, 그 놈의 절벽만 막 상상하면서 읽었거든요. 전 왜 지도를 찾을 생각을 못했을까요.
풍광을 보면서, 바람을 상상했다면, 더 근사한 사라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었을텐데요..... ^^
 

세기별 국내외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시리즈와 김탁환의 혁명 시리즈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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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12,500원 → 11,250원(10%할인) / 마일리지 6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오늘(17~21시) 사이" 택배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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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12,500원 → 11,250원(10%할인) / 마일리지 6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오늘(17~21시) 사이" 택배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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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비 신통한 단원평가+서술형평가 5-1 - 국어.수학.사회.과학, 2014년 우공비 신통한 단원평가 2014년
신사고초등콘텐츠연구회 엮음 / 좋은책신사고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 풀어보지는 않았구요.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단원평가 문제집입니다. 학교시험 대비(^^)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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