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없는 사람이기는 한데, 원래 계획으로는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리라, 잘 정리된 리뷰를 쓰리라 했는데, 그렇게 했다간 아무것도 못 쓸 것 같아, 일단 1장을 정리해 둔다.


 

1장의 제목은 <고통의 우연성>이다. 도입은 지뢰 제거 사업의 후원자를 모으기 위한 소식지의 일부이다. 발신자인 자선단체는 사회경제적 관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이들을 후원하며 돕는 훌륭한 일에 서구의 독자를 초대한다. ‘착하고 선량한시민으로 행세하려는 이들에 대한 사라 아메드의 평가는 박절하다. ‘서구는 먼저 빼앗고 난 뒤에 베푸는 셈이다(61)’. 그다음 단락부터는 고통의 근원적 의미에 대해 추적이다.

 

프로이트는 자아란 다른 무엇보다도 신체적이라고 주장(65)했는데, 아메드는 그중에서도 신체적 자아의 형성이 표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있어 표면은 어디일까. 피부? 피부. 로즐린 레이가 이야기하듯이 자아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인 피부를 통해…… 모든 인간 존재는 수많은 인상을 받게 된다.” (67)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고통. 고통당할 때, 고통받는 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고통 혹은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고통은 주로 '이미 있는 것'으로 경험된다. 고통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다. 과거의 고통이든 현재의 고통이든 설명하기 쉽지 않다. 고통을 겪은 경험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이를 '나의 고통'으로 간주한다.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77)

 


사랑하는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를 바랄 뿐 아니라 상대를 대신해서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이때 사랑은 공감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는 이유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주체는 상대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을 '느낀다’. (78)

 


고통받는 사람은 주위의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고통받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이해와 공감이다. 하지만, 자아 경계 밖의 외부에서 그를 제대로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은 이해 불가능하다. 그가 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듯이, 나 역시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육체속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는, 내 육체 속 나의 고통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사람의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엄기호는 이렇게 썼다.



 













고통은 동행을 모른다. 동행은 그 곁을 지키는 이의 곁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의 곁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곁에 선 이의 위치는 고통의 곁의 곁이 된다. 이렇게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되는 것, 그것이 고통의 곁을 지킨 이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곁에 선 이는 고통을 겪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249)


 

나눌 수 없는 고통, 전할 수 없는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 고통당하는 사람 곁에 있다가 그의 고통에 같이 침몰당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그는 말한다.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되라고.

 


<고통의 정치>에서 아메드는 호주 원주민에 대한 백인 정부의 잔혹한 정책(원주민 어린이를 원가족 및 원주민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분리시켜 백인 가정에 보냈던 일, 70년 동안 강제 분리 정책으로 최소 10만 명의 원주민 어린이가 고통을 겪었다고 알려짐)을 고발하면서, 호주인들이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 <이제는 이들을 집으로>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쓴다.

 


몸으로 형상화된 국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통에 반응하면서 원주민의 몸을 대신한다. 원주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일, 타자의 몸(여기서는 국가의 몸)을 회복시킨다는 이유로 타자에게 공감하는 일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이 국가의 고통으로 전유되고 타자의 상처가 국가의 손상된 피부로 물신화되는 일에 대해 타자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89)

 


핵심은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공감은 타자에 대한 폭력이다. 섣부른 이해, 과한 공감이 타자의 고통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들어야 한다. 고통에 대해 듣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 불가능한 일을 함께하는 것. 그녀/그에게 듣는 것. 그것을 배우는 일이, 외부로서의 내가, 혹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연휴 첫날에는 시아버지를 모신 곳에 다녀왔다. 5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앞에만 서면 순간적으로 멍해진다’. 연휴 둘째 날에는 시댁에 갔다. 아침을 먹고 치우고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먹고 치우고 과일을 먹고 돌아왔다. 연휴 셋째 날에는 교회에 갔다가 엄마 아빠와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돌아왔다. 연휴 네째 날에는 밀린 빨래를 하고 배불러서 밥은 많이 먹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마셨다. 책을 링크할 수도, 제목을 말할 수도, 작가 이름을 말할 수도 없는 로맨스를 한 권 읽었다. (궁금하신 분 비댓 달아주시면, 제가 그 분에게만 살짝쿵 ㅋㅋㅋㅋㅋㅋㅋ) 가끔 주위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한다며, () 영어 공부의 목표가 무엇이냐 물을 때가 있다. 누가 묻던지 내 대답은 하나인데, 영어책을 빨리읽고 싶어요, 가 내 답이다. 읽고 싶은 책을 빨리 읽는 것. 내가 이렇게 빨리 읽는 사람인지 몰랐다. 0.6, 정확히는 4-5시간 만에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어제 아침에는, 음식이 뜨거울 때는 간이 잘 안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몰랐던 건 아닌데,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까맣게 잊어버렸던걸, 친구가 알려줬다. 너무나 확실한 맛없음에 실패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육전이 그래도 먹을 수 있는육전으로 변신한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나는, 그만두고 갔으면 좋겠는데. 세월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내가 그리 좋은지. 손목을 휙 잡아채서는 확확 끌고 간다. 이렇게 시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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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2-14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하지 않지만, 비댓으로 여쭤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도 영어책을 빨리 읽고 싶어요. 300 words 2월에 시작해보겠다던 다짐은 저 멀리 가버렸네요.

단발머리 2024-02-14 10:19   좋아요 1 | URL
비댓으로 여쭤보시면 언제든 알려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건수하님에게는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 제목을 말하고 싶은 저의 마음이 뾰족뾰족 다 드러났는가 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일전에 구입한 504를 마저 하고 ㅋㅋㅋㅋㅋㅋ 근데 건수하님, 방금 확인해보니 그 시리즈 거의 다 품절됐네요.
601 words 빼고는 다 이북만 남았네요.

건수하 2024-02-14 10:4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그럼 300은 끝내신 건가봐요!! 멋져요!

저에겐 1100이 있습니다... 왜 그런 걸 샀었을까요... =ㅁ=

단발머리 2024-02-14 11:27   좋아요 1 | URL
앗! 사실 그게 ㅋㅋㅋㅋㅋㅋ 제가 알라딘 이웃님 이 시리즈 공부하시는 거 보고 ‘읽고 싶어요‘를 했는데 라파엘님이 보시고는 300 보고 504 가시려거든, 건너뛰고 가도 된다 하셔가지고요 ㅋㅋㅋㅋㅋ 제가 바로, 네~~ 하고는 ㅋㅋㅋㅋㅋㅋ
겹치는 단어도 많고 그 시리즈 중에서는 504가 제일 활용도가 높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이 책 스프링 분철도 했습니다. 모양을 버리고 실용을 택했건만.........

2024-02-14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4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4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02-14 10:41   좋아요 0 | URL
표지가 2개에요. 제 꺼는 파란색입니다. 굳이 밝힘 ㅋㅋㅋㅋㅋㅋㅋ

2024-02-14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02-14 10:49   좋아요 0 | URL
전 이북으로 사서 그 책을 들고 다닐 일은 없었습니다만은 ㅋㅋㅋㅋ 살색은 좀 ㅋㅋㅋㅋㅋㅋ

은오 2024-02-14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양념치킨도 떡볶이도 식었을때 먹는걸 더 좋아해요 단발님!! ㅋㅋㅋㅋㅋㅋ 육전도 식은게 더 맛있군요?!
그냥 읽고싶어서 아니고 “빨리” 읽고 싶어서 영어공부하신다는 단발님이 너무 멋집니다.....🤧

단발머리 2024-02-14 11:28   좋아요 1 | URL
아.... 역시 은오님 따라해야 해요. 저도 떡볶이 식었을 때 더 맛있다는 걸 느끼고는.... 오늘 이 집 맛있게 잘했네...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은오님은 미리 알고 있었다!!!
‘빨리‘ 읽고 싶은 제 마음은 멋질 수도 있는데, 어쩌죠. 저는 계속 ‘느리게‘ 읽는 사람이랍니다.

잠자냥 2024-02-14 13:29   좋아요 1 | URL
육전은 아닐걸.....;;;

단발머리 2024-02-14 13:31   좋아요 2 | URL
맛있었다구요! 첫날보다 둘째날이!!
먹어볼테에요, 잠자냥님!! 😡

은오 2024-02-15 19: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2-14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연휴기간 바쁘셨네요! 공감이 때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마음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제목을 말할 수도, 작가 이름을 말할 수도 없는 로맨스˝ ㅋㅋㅋㅋㅋ 왜요? ㄷ님은 책표지도 막 올리셨던데 ㅋㅋㅋ 저도 그런 책 왕년에 여러권 읽었습니다만 ㅋㅋㅋ 우리 서로 묻지 않기로 해요 ㅋㅋ

단발머리 2024-02-14 11:30   좋아요 1 | URL
바쁘지 않았는데 저도 혼자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구요. 애들이랑 복작복작 (고3인데 집에서 공부함 ㅋㅋㅋㅋㅋ) 그렇게 지냈습니다.
묻지 않으셔서 제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떤 분이 표지 보시고 (어이쿠) 깜짝 놀랐다는 후문 전해주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 독서괭님께 따로 묻기로 하겠습니다!

2024-02-14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4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02-14 12:10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ㅋㅋㅋㅋㅋㅋㅋ

2024-02-14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4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4-02-14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식적으로 공감을 거부하려는 ‘터프’한 시도의 개척(?)자에 우리의 아렌트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젠더화된 공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읽었더랬는데, 단발님(혹은 아메드)처럼 몸-고통-텍스트(해석, 혹은 재현의 윤리려나요.)로도 한번 더 읽어봐야지 싶어져요.
‘감정이 대상에 대한 해석과 따로 떨어져있지 않은 작동’이며 ‘어떤 기호’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메드의 말대로 감정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유? (실은 희망에 차서 읽기시작했더이다) 구러나 있다 손 치더라도 자본이 생산하는 들뜨고 헛한 정동의 속도(즉 세계를 더 나쁘게 만드는 속도)엔 못미칠 듯 한데… -from. 아… 그리하여 문화정치 읽다 말고 다른데에 또(!) 정박해 있는 사람ㅋㅋ

단발머리 2024-02-14 18:25   좋아요 1 | URL
얼마나 터프한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파농>을 읽고 있는데(아직도) 아렌트가 파농을 그렇게 대차게 까더라구요. 저자는 아렌트를 ㅋㅋㅋㅋㅋㅋㅋ 책 읽던 저는 아렌트를 까는 저자 쪽으로 많이 기울어서, <전체주의의 기원> ‘읽고 있어요‘인 사람으로서 커다란 자괴감을.....

이 책의 포인트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정치‘라고 전 생각합니다. 고통과 공감, 사과의 문제를 국가가 그 스스로를 주체로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설명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 부분보다 ‘고통‘ 그 자체에 대한 아메드의 통찰에 많이 공감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두꺼운 밑줄을 그었구요.

쟝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저도 잘 모르겠군요. 책 읽다가 알게 되면 연락줘요. 010-1234-5678

그레이스 2024-02-27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장하준교수가 말한 경제를 정치와 나눌수 없다는 말 경제학을 아는것은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했던 그 말이 모든 것이 정치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인사이트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피곤을 느끼게 되죠.

단발머리 2024-02-27 21:12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댓글 너무 좋아요. 장하준 교수 이야기 100% 동감합니다.
돈에 의한 지배, 탐욕에 의한 지배를 우리가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요.

피곤하다는 말씀 역시 공감합니다. 이제 곧 선거철인데 피곤함 이겨내고 투표로 이어가야 할 텐데요......... (먼 산)
 



친구 왈, 글에정치를 묻히지 말라 했다. 대구전에 밀가루 묻히는 것도 아니고, 자꾸정치를 묻히려 한다고. 그런 강박을 버리라고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내 글을 나보다 더 꼼꼼히 읽는 친구라서, 나는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정치 묻히지 마. 정치 섞지 마. 그런데, 이런 건 어쩌죠.

 
















사라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 5장은다른 이들 앞에서 느끼는 수치심이다. 구체적 예시는 과거 호주 정부, 백인 정부가 호주 원주민(조상때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행했던잔인한 폭력 행위에 대해명시적 사과를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사과, 라고 하면 최근에 우리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사과 이슈가 있기는 한데. 나는 그 사안이 사과의 문제라기보다는수사를 진행할 것이냐 말것이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언론은 묘하게사과로 초점을 모아가는 듯 했다. 녹화 방송 대담에서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과가 보상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과가 느낌을 담은 표현이 아니라 책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353)

 


사과란 잘못의 인정이고, 그 후에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한 다음에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사과'가 지닌 힘은 사라질 수 있다.(354)

 


사과에 뒤따르는 다른 행동을 할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과가 없어야 한다.  

 


결국 사과에 뒤따르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선택지만 남는다. (357)

 



우리나라 대통령의 경우,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다른 방법을 택한다. 대통령은, 면담하는 사람이 준비해 간 외국 회사 조그마한 백(우린 보통 명품백이라고 부르는 걸 KBS 간판앵커는 이렇게 부르더라)를 대통령 부인이 박절하게 내치지 못해 생긴 일이라 말했다.

 


엘리자베스 스펠먼이 지적한 것처럼 안타까움을 표명하는 일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360

 


대통령은 사과 없이 국민 걱정하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국민은 걱정하는 게 아니고, 화가 났는……..

 



사람 아메드를 읽는 순간, 사과에 대한 모든 문장은 우리의 현실로 날아온다. 사과는 없고 안타까움은 있다. 명품백은 없고 파우치는 있다. 다큐는 있고 대답은 없다. 용산 집무실은 있고 대통령은 없다. 디올백은 없고 디올쇼핑백은 있다.


 



 


1차 행사 마치고 가볍게 2.


 



3차 행사를 마치고 대망의 4차 행사에 돌입했다. 전을 맡았던 동서가 갈비찜을 해온다고 해서 내가 전을 맡게 됐는데, 동서처럼 맛나게 예쁘게 부칠 자신이 없어 백화점에 갔다. 흐미, 비싸구나. 하지만, 할 수 없으니 저는 구입합니다. 커피를 한 잔 사가지고 집에 돌아와 어제 사 둔 고기와 부침가루, 계란을 꺼냈다. 백종원의 <명절 음식 소고기 육전으로 끝내 드립니다>를 두 번 봤다. 고기에 부침가루 바르고 계란 묻혀 튀기면 맛없기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맛이 없다. 부침가루 쓸 거면 고기 후추 소금에 재어 두지 않아도 된다고 백종원이 그랬는데, 아무 맛이 안 나서, 다시 소금 뿌리고 계란에도 소금 넣고. 그래도 맛이 없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나 보다. 우리집 비밀 창고에는 디올 파우치도 없는데, 나는 사과합니다.

맛이 없어요. 맛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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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2-10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그렇고 앵커의 변명은 더 그렇고요 ㅠㅠ

단발머리님께서 맛 없다고 느끼시지만
기름 냄새 맡지 않고 그저 먹는 사람들은 다 맛있을 겁니다.
육전은 언제든 맛있어요^^

단발머리 2024-02-12 13:01   좋아요 1 | URL
앵커로 말하자면.... 질문도 아주 특이했죠. 참... 심기경호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페넬로페님 이 댓글 읽을 때만 해도 제 맘은 ㅠㅠㅠ 이랬는데요. 그 다음날 시댁 가서 먹는데, 식으면서 약간 간이 배었다고 할까요? 맛있지는 않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먹을만 한거에요.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합니다.
페넬로페님 응원 진심 감사드립니다!!!

감은빛 2024-02-11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글 너무 좋은데요. 친구분께서 꼼꼼히 읽으실 수 밖에 없는 글을 쓰는 분이시죠. 단발머리님은. 케이비에스는 다시 땡전뉴스 시절로 되돌아가버렸나 봐요. 아니면 이메가 시절이나 그네공주 시절일수도 있겠지요.

제사음식은 원래 다 맛 없는 거 아닌가요? 전은 집에서 부치면 맛 없더라구요. 사먹는 전이 제일 맛있더라구요.

단발머리 2024-02-12 13:0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이 좋다고 해주시니 저도 ‘좋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ㅎㅎ 우리는 KBS를 이렇게, 이런 식으로 잃어버리는건가 싶어 너무 아쉽습니다. 생각보다 노골적이어서 더 슬펐습니다.

저희집은 제사음식은 없지만서도, 전은 구입해 먹었는데 맛있었구요. 제가 만든 육전은 첨에는 난감한 형국이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먹을 수 있을 만한 음식이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이네요. 오늘까지 여유만만 즐거운 연휴되시기 바래요!!

공쟝쟝 2024-02-13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에는 정치를 묻히고 .... 소금이랑 후추는 미리미리 고기에 묻혀두고 ....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2-13 10:40   좋아요 1 | URL
위에 읽었나요, 쟝쟝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선생은 부침가루 쓸거면 소금간 필요없다고 했다니깐요!!
그러나 너무 맛이 없었고. 나는 슬펐으며........
그 다음날 먹는데 먹을만해서 난 놀랐습니다. 먹을 수는 있었어요, 고기라서 그럴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2-13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건 백선생이 잘못 한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음식은 뜨거울때는 간이 잘 안느껴지는 법입니다!!!!미리미리 재워둔다. 부침가루 믿지말자 ㅋㅋㅋㅋ (이래뵈도 집에서 맛다시쟝으로 불림)

단발머리 2024-02-13 12:43   좋아요 1 | URL
제가 다르게 말한 유튜브도 보긴 했는데 아…. 그래도 백선생을 믿었ㅋㅋㅋㅋㅋㅋ
앞으로는 맛다시쟝님과 상의해야겠어요.
from 뜨거울 때 간이 잘 안 느껴지는 거, 이번에 확인한 사람 😁
 
공교로움. 해체되어야 합니까?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독특함이다. 저자 이경원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딱히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문학술서로 보이기도 힘든 이 책은 정신의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의 온갖 범주를 넘나든다. (55/624)

 


파농의 정신과 삶은 사망 이후, 그가 선택한 조국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서서히 흩어지고 만다. 오히려 파농을 가장 파농답게기억한 곳은 생전에 파농이 가장 싫어했던 미국이라고 하는데, 특히 1960년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파농의 부활이 어떤 방식으로든 파농의 순치와 전유를 수반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대한 복합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식민지 원주민의 주체 구성을 분석한 것이라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대한 평가는 온당하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백인이 되고자 했던 파농 자신의 열망과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프랑스를 조국이라 생각하고, 프랑스어를 모국어라 여기며, 아프리카의 흑인을 니그로라고 생각하되 자신은 니그로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마르티니크 흑인 노예의 후손과 그 혼혈 가족들. 파농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파농을 이런 층위로만 묶어 두지 말라는 저자의 말에 밑줄을 긋고 그다음으로 넘어간다.

 


나는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가 현재로서 여성이 선택할 만한 가장 합리적인 위치라고 생각한다. 전략적 본질주의를 한 번 더 인용한다.

 


탈식민주의 비평가 스피박(Gayatri hakravorty Spivak)이 페미니즘의 여성주체 논쟁에서 본질주의의 모순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본질주의를 전유하기 위해 제안한 개념이다. 가령 가부장제의 억압주체 '남성'을 데리다의 해체론을 이용하여 해체하면서 저항주체 '여성’을 구성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요 이론적 허구이지만, 저항담론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일종의 본질주의적인 범주를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이 주체가 된 저항담론이 아예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농>, 595/624)

 



인류 초기 시대부터 여성이 하나의 집단으로 억압당해 왔음을 인식하는 일, 그러한 자각 없이는 저항 주체 여성이 주체가 된 저항 담론이 불가능하다. 쟝쟝님의 페이퍼에는 이 문장이 굵은 글씨로 표기된다. 근대적 주체성은 젠더화와 동시에 본격화되었다.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자연, 식민지, 여성이 동시에 타자화되었다는 주장(혹은 그런 주장이라고 여겨지는데)인데, 여성에 대한 타자화의 시작점을 언제로 보는가에 따른 차이는 존재하지만, 근대의 백인-유럽-비장애인-남성이 인간의 표준으로 개념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억압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고 생각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할 때, 왜 여성은 단결하지 못했나. 혹은 왜 단결하지 않았나. 여성은 같은 성별(이점을 명확히 하려면 조금 더 복잡해질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여겨지는을 뜻한다)의 여성보다 같은 계급의 남성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민족이 만들어진 관념인 것처럼, 여성은 관념이고 그래서 진짜 남자가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진짜 여자또한 실재가 아니라 환상이라는 걸, 이제 우리는 안다. 하지만.  

 


아직도 각종 차별과 억압, 가난과 멸시, 감금과 폭력이 종교와 문화, 관습과 사회적 통념의 비호 아래 자행되는 현실 속의 여성들을 생각할 때, 그 여성들의 고통이 여자라는 이유가 아님을 증명하기 어렵다. 여전히 여성들은 억압받는 하나의 집단이다.

 



이를 주체 구성의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 본다면, 나는 제3세계 사람이고, 유색인이며, 게다가 심지어!! 기혼 여성이기도 하지만, 그런 내게 주체의 죽음이 의미 있는 이유는, 주체와 자아에 대한 인식과 해석 없이, 다른 이의 정의와 규정에 매여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로서 존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필리스 체슬러에게서 답을 찾는다. 자유로워지는 것. 많은 일들, 많은 생각,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자아 정체성은 제한적이고 특정한 타인들을 위한 관심사와 몇몇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은 어떻게든 바뀌어야 하고 강인한 개인으로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것에 닻을 내려야 한다. 여성은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 많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어떻게든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아 초점을 그처럼 급격하게 옮긴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모든 여성적인신경과 감정이 날카롭게 자극되면서 심각한 대가가 따르게 된다. 어떤 여성은 그처럼 급격하게 초점을 이동시킬 때 미쳐버린다. (<여성과 광기>, 526)

 

 


앎비앎 친구님의 이 문단이 인상적이었다. 댓글로 쓰다가 또 길어져서(고질병임) 페이퍼로 썼다. 부지런히 더 읽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더 명확하게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아침이다. 그럴 능력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해볼 수는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허심해지기로 했으니까.

 


아마 나는 아주 엉망으로 개념들을 활용/오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공부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결단한다. 나에겐 내가 쓰는 것의 진위 여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없지만 부지런히 읽었다는 것으로 정당화하련다. 부끄러움마저 책임지고 감당하기로 한다. 해체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허심해지기로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떠들었다면 그건 기꺼이 고치면 된다. 다 허물어도 된다.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자국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 자신이 구축한 판타지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무리 어떤 성을 쌓고 그림을 그린 대도. 바람은 파도는 불가항력

 

- 공쟝쟝,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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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1-31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이 글 역시 좋네요. 특히 체슬러 인용된 문장이 다시보니 뼈를 때립니다. 자아에 초점을 이동시키는 것!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나 자신의 변화를 느껴보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단발머리님 굿 모닝!!

단발머리 2024-01-31 11:48   좋아요 1 | URL
이북은 엄청 빨리 읽게 되는데 이 책은 쉬운데도(?) 진도가 더디네요. 지금 반 정도 읽었는데, 또 할 이야기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는 푸코 나온당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주에는 모닝이 일찍 시작되어서 지금은 매우 졸리네요. 쟝쟝님, 굿애프터 눈!
 
추석과 파농




 












<파농>을 읽는다.

 


해설서를 읽는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가 안내해 주는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꿈의 해석을 읽다>는 양자오가 이해한 범위 안에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우치다 다쓰루, <현대사상입문>은 지바 마사야가 안내하고 설명한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경우, 당연히 저자에 대한 신뢰가 독서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설명과 통찰이 번뜩이는 경우라면, 원래 만나려던 책이나 인물보다 그에게 빠지는 경우도 가능할 텐데, 최근에 읽은 슬라보예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이 그런 경우였다. 그의 말에 현혹되어(?) 이미 품절되었다는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를 도서관 찬스를 이용해 서둘러 준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해설서 읽기의 장점이라면, 프로이트와 푸코와 바르트와 라캉의 정수를 혹은 엑기스를 살짝 맛볼 수 있다는 것인데, <꿈의 해석>을 혹은 <감시와 처벌>, <에크리>를 읽기 겁나는 경우에는, 이런 해설서는 친절하고 야무진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파농>의 저자는 이경원이고, 그래서 이 해설서는 이경원의 파농이다.

 


저자는 후대인들이 파농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고전적 파농주의와 비판적 파농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우선 고전적 파농주의는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연계되어 있었기에 혁명적 실천성을 띠고 있었던 반면 비판적 파농주의는 파농 연구가 서구의 제도권 학계로 편입되면서 탄생한 것이기에 파농의 제3세계적 맥락과 급진적인 색채가 희석되어 버렸다. 또한 파농이 전유한 이론의 두 축이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때, 고전적 파농주의는 오직 '마르크스적 파농'만 부각해왔고 비판적 파농주의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프로이트적 파농'에만 주목하고 있다. (90/624)

 
















고전적 파농주의의 대표작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고, 비판적 파농주의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파농의 저작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다. 고전적 파농주의에서의 파농은 혁명가이고, 비판적 파농주의에서의 파농은 정신분석학자이다. 저자는 파농에 대한 이런 상반된 접근방식이 진짜 파농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파농을 정신분석학이나 탈구조주의의 틀로만 해석하는 것이 파농을 이해하기에 부족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만으로 파농을 해석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예를 든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은 어떤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파농을 찾지 않는다. 그들이 파농에 눈길을 돌리는 이유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무관심한 제3세계 민족주의의 맹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 파농이라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파농에게서 제3세계적 페미니즘, 즉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연대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88/624)

 


나는 이 단락에서 놀라고 말았는데, 파농의 책을 딱 1권 읽은 사람으로서, 비판적 파농주의, 정신분석학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고 정확히 위의 문단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석과 파농: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050226)

 



내 영혼의 가장 검은 부분으로부터 [흑백] 줄무늬 지대를 가로질러 단번에 백인이 되려는 저 욕망이 솟아오른다. 

나는 흑인으로 인정받고 싶지 않다.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그리고 이 점이 헤겔이 기술하지 않았던 인정 형태인데-백인 여성이 아니라면 다른 누가 그렇게 해주겠는가? 그 여성은 나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백인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준다. 나는 백인 남성으로서 사랑받는다. 

나는 백인 남성이다. (63) 

 


한 번밖에 읽지 않았으니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흑인과 결혼하지 않으려는 물라토(백인과 흑인 간의 혼혈) 여성에 대한 적의와 백인 여성의 사랑을 쟁취해 백인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한 명의 흑인 남성 안에 혼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 차별이라는 폭력 앞에서 백인 여성에 대한 숭배와 흑인 여성에 대한 멸시가 교차하고 있다. 더 하얘지기 위해 백인이 필요하고, 더 검게 되지 않기 위해 흑인을 피하고 싶은 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두 번 버림당한, 혹은 버림당할 운명의 흑인 여성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내가 발견한 파농은, 탈식민을 시도하는 지식인이되, 완벽한 인간 백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백인 여성이 필요한 혹은 백인 여성을 도구화’  해야만 하는 유색인 남성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로 니그로로 규정된 남성이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화,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혹은 인식이 내 읽기 방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렇게 읽혔다. 이 책의 저자는, 파농을 그렇게읽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파농을 이해하기 위한 용어 해설>이라는 챕터가 있다. 여러 개념 중에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가 눈에 띈다.

 


탈식민주의 비평가 스피박(Gayatri hakravorty Spivak)이 페미니즘의 여성주체 논쟁에서 본질주의의 모순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본질주의를 전유하기 위해 제안한 개념이다. 가령 가부장제의 억압주체 '남성'을 데리다의 해체론을 이용하여 해체하면서 저항주체 '여성’을 구성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요 이론적 허구이지만, 저항담론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일종의 본질주의적인 범주를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이 주체가 된 저항담론이 아예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595/624)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 범주(category)로서 젠더가 작동하기에, 젠더에 대한 고려 없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103)이지만, 젠더가 성차별, 구체적으로는 여성 집단에 대한 억압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다.  ‘여성이 주체가 된 저항 담론으로서의 파농 읽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측면에서 탈식민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이었으되 백인 여성을 희구했던 파농의 한계 역시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의 온 삶을 불태우며 흑인성식민주의타파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파농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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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4-01-29 16:55 
    내가 경계하게된 종류의 화법이 있다. 나 자신은 저들과 무관하다는 자기 인식이 드러나는. 너도 그래, 너도 똑같아라고 뱉어주려다가 참는다. 말해줘도 못 알아먹으니까. 어쨌든 나 자신은 무고하다고 항변하지만 이 구조 속에 있는 한 모두 한 비탈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무고하고,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이들을 인정하고 있다. 헌데 그게 백인성이고 그게 근대성이고 그게 애석한 (가끔 흠씬
  2. 저항주체인 여성의 전략적 본질주의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4-01-30 11:01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독특함이다. 저자 이경원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딱히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문학술서로 보이기도 힘든 이 책은 정신의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의 온갖 범주를 넘나든다. (55/624) 파농의 정신과 삶은 사망 이후, 그가 선택한 조국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서서히 흩어지고 만다. 오히려 파농을 가장 ‘파농답게’ 기억한 곳은 생전에 파
 
 
다락방 2024-01-29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부터 읽어봐야겠네요.

음, 좀 많이 다른 얘기인데, 나를 부정하기 위해서 혹은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 여성을 도구화 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또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파농은 인종에 대해 그랬다면, 저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확실히 인식하기 위해 여성을 도구로 이용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영화를 싫어합니다.

이 페이퍼 읽으니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도 생각나고요.

저는 인종(차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이렇게 단발머리 님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써주실 때마다 좋아서 읽습니다.

단발머리 2024-01-30 11:08   좋아요 0 | URL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그 측면을 전 쪼금 알거 같은데요. 그니깐 전 그 영화도 책도 안 봤지만 말입니다. 둘이 아름답게 사랑할 때 그 여자아이에 대해.... 그게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과 좀 혼동되기는 하는데, 암튼 전 그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여름 배경이니까 겨울에 읽자 심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

<휴먼 스테인>은 완전! 연관 도서 맞다고 생각해요. 뮬라토.....의 위치와 고민과 갈등이 자세히 나오니까요.

은오 2024-01-29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국 또 여성 도구화 ㅋㅋㅋ 그쵸 흑인 남성도 그점에선 마찬가지고 xy의 한계....
오늘도 역시 지적임이 묻어나는 단발님의 글!!!!! 잘읽었습니다

단발머리 2024-01-30 11:04   좋아요 1 | URL
xy의 한계를 알아차린, 진즉에 알아차린 이 영리한 여성들을 보라!
퀴즈대회 1위에 빛나는 은오님 축하합니다! 한 번 더 축하할 일이에요. 번호 건은 조금 아까비.................

공쟝쟝 2024-01-29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파농에 나의 알튀세르 읽기를... 접 붙이는 글을 작성하고 트랙백을 걸었습니다.......... (거기다 비비면 안된다구요?ㅋㅋㅋ 힘듭니다.)

단발머리 2024-01-30 11:02   좋아요 0 | URL
짧은 글에 트랙백 걸었습니다. 일할 때이니 알라딘 금지인데 말이에요. 그죠? ㅋㅋㅋㅋㅋㅋ
힘내서 일하세요, 사장님!!!

망고 2024-02-08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진짜 옛날에 읽어서 기억도 안 나요ㅋㅋㅋㅋㅠㅠ 하지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읽어보고 싶습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4-02-10 00:04   좋아요 0 | URL
예전도 아니고 옛날에~~~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읽으신 망고님, 제가 존경합니다!
즐거운 설연휴 되시길요. 벌써 빨간 글씨 2일차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쌓아놓은 책/읽고 있는 책들을 모른 척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은 <Christmas Guest>. 피터 스완슨 책인데 얇아서 어제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낮에는 다른 거 하다가 못 읽고. 밤에 책을 펼쳤는데, 심상한 기운이 스르르 몰려온다. 무서운 거 못 읽는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책을 펼친다.

 


나와 엠마, 그리고 엠마의 잘생긴 오빠 애덤이 묘한 삼각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인류의 원초적 공포와 금기인 근친상간나오는 건가, 의심하면서 한 장 한 장 넘겨간다.  

 


 









작년 말부터 어제까지의 책을 올려둔다. 가끔 K문고(주로 원서)와 그래24를 이용하기도 해서, 그 책을 샀던가? 하고 헷갈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 두니 좋았다. <사진>에 들어가 책 이름을 검색하면, 그 책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언제 샀는지도 알 수 있고. 그 후로는 바로 사진을 찍어 둔다. 처음 두 개의 사진에서 누워 있는 책들은 내가 '산 책이고, 당당하게 서 있는 책은 선물 받은 책들이다. 마지막 사진은 책이 두 권이라 둘 다 세워보았다.

 


책 표지에 관한 한 외모 지상주의자인 나를 배려한 친구들의 뛰어난 안목에 항상 감탄하는 나로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찬탄과 기쁨과 감사를 친구들에게 돌려드린다.

 

















잠자기 전에 읽는 책은 이 책이다. 내 평생에 가장 사랑하는 제인 에어의 어린 시절과 형제자매들과의 행복한 습작 시기 등을 보여주는 책인데, 하루에 2장씩 아껴서 읽는다. 선물해 준 친구가 아껴 읽지 말고 편하게 마음 갈 때 읽으라고 했는데, 나는 아껴 읽는다. 하루에 4페이지, 하루에 2장씩. 아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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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5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4-01-26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너무 좋은책은 아껴읽는게 안되던데 단발님은 아껴읽기가 가능하시군요 ㅋㅋㅋ 좋은책일수록 허겁지겁 읽게되더라고요 ㅋㅋㅋ
저 분홍색 책 너무 귀엽습니다 🥹

단발머리 2024-01-27 15:38   좋아요 0 | URL
저 아껴읽다가 후회된 적이 많은데... 좋아하는 책 아껴읽습니다. 가끔 홀랑 읽고 다시 천천히 읽는 경우도 있구요.
저 분홍색 책 ㅋㅋㅋㅋㅋㅋㅋ 어쩌나, 책 아니고, 다이어리에요. 책 사야 준다기에 책을 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고많으세요, 은오님! 1등 확정 귀염둥이 화이팅!!!

수이 2024-01-26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책 선물해주는 친구라니 단발님은 역시 주변에 멋진 이들이 한가득! 단발님 전생은 대체 어땠을까? 저 혼자 가끔 궁금해합니다.

단발머리 2024-01-27 15:3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친구들의 안목에 항상 감탄하는 단발머리입니다.
제 전생은...... 하하하! 궁금하네요, 저도요!!!

미미 2024-01-26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이 서점이 어디예요?
서점 이름으로 <감탄><표지 지상주의>도 괜찮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01-27 15:41   좋아요 1 | URL
저기 위의 사진이라면ㅋㅋㅋㅋㅋ 다 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책상이 너른 나무책상이라 그런가봐요.
<표지 지상주의> 서점이름으로 좋아요. 혹 제가 서점 내게 되면 ㅋㅋㅋㅋㅋㅋ 애용할까봐요.

그레이스 2024-01-26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해봤습니다.
사진찍어서 검색하는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단발머리 2024-01-27 15:43   좋아요 1 | URL
아~~~ 그레이스님 검색 가능하셨다니 넘 좋은데요. 핸드폰마다 다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전 그거 알게 된 이후로 구입한 책들 사진 꼭 찍어둡니다. 원래 책사진을 많이 찍기는 하지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