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중에, 오래오래, 그러니까 책을 읽고 난 후 며칠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머리 속에 잔상을 남기는 단편들이 있는데, 단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강력한 인상을 남겼던 단편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단편 중 하나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블러드 차일드>이다.

 

















다른 단편들은 <윌리엄 트레버> <페기 미한의 죽음>, <화성 연대기> <2005 9, 화성인>, 그리고 <혁명하는 여자들><늑대여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을 읽고 있다. 같이 읽고 있는 책은 새해니까 자기계발서 <Grit>책에서 사랑 찾는 여인들과 함께라면 <라캉, 사랑, 바디우>이다. 두 권 읽다 보면 자꾸 눈이 감긴다. 자간이 좁아서 눈이 금방 피곤해진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눈보다 뇌가 더 피곤한 듯 하다. 눈과 뇌가 동시에 피곤할 때, 옥타비아 버틀러를 읽는다.

 




이런 인터뷰집이라면 모두 다 그렇겠지만, 질문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나는 질문의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인 경우, 그 질문이 좋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대답하는 이(여기서는 옥타비아 버틀러)에게 내가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당신의 작품들을 주의 깊게 읽었다는 느낌을 전하는 질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시간을 이렇게나 많이 소모하는 일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책은 여러 인터뷰를 엮어 낸 것이라, 질문자가 여러 명이고, 질문자의 질문 수준과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흑인 작가라서 혹은 여성 작가라서 SF 분야에 진입하는 일이 더 어렵다고 느끼셨나요?’와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다른 이들도 이미 많이 했음 직한 질문도, 훨씬 더 정교하게, 세련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질문의 질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탈하고 당당하다. 독야청청하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 즉 의도와 해석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다른 <> 시리즈에 비교하자면 두 배에 가까운 두께인데도 신나게(?) 읽어나갈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분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그 문단을 옮겨보면 이렇다.

 


케넌 : … 분명히 SF계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논쟁이 이어질 텐데요. 작가님은 그런 논쟁에 휩쓸릴 때가 있나요?

 

버틀러 : 사실 별로 안 그래요. 그런 논쟁은 1970년대에 크게 타올랐고 지금은 과거에 결론이 난 일 취급을 받죠. 누가 특별히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도 않지만, 누군가가 그런다면 그건 그 사람 일인 거예요…………. 예전에 한번은 제가 일요일 이른 아침 텔레비전 쇼에 출연했는데요, 진행자가 흑인 여성이었고 저 말고도 다른 흑인 여성 작가가 둘 있었어요. 시인 하나, 극작가 하나, 그리고 저였죠. 그런데 진행자가 거의 마지막 질문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다른 두 사람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페미니즘은 백인용이라 여긴다고 했어요. 저는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도 흑인이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러니 난 확실히 페미니스트일 거라고 느낀다고 했어요. (87)

 


흑인 시인, 흑인 극작가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백인 여성들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흑인 여성들이 왜 이것(페미니즘)은 우리(흑인 여성을 비롯한 유색 인종 여성들)와 상관이 없다고 여겼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이, 인종, 계급, 민족의 측면에서 단일한 집단이 될 수 없는 여성들 간의 연대에 대해 생각한다. 이선균의 사망과 관련된 문제로 영페미와 30분간 대판 싸운, 결국에는 무참하게 패배해 버린, 베트남 쌀국수와 팟타이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던 기혼 여성이 생각한다. 내 자리는 어디인가.  

 



 

여러 부분에 밑줄을 그었지만, 특히 마음에 공명한 부분은 여기다. 작가들,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해주는 버틀러의 조언 중 일부다.  

 


소설은 종류를 가리지 말고 읽으세요. 학교에서는 고전을 읽으라고 시킬 테고, 그것도 좋아요. 유용하죠. 훌륭한 작품이 많고, 글에도 도움을 줄 거예요. 하지만 또 그런 작품 다수는 낡은 명작이라서 지금 당신이 쓰는 글에 꼭 도움을 준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러니 현재의 베스트셀러를 읽으세요. 새로운 관심사를 갖도록 만들어줄지 모를 책을 읽으세요. (190)

 


베스트셀러를 읽으세요.


버틀러의 말이다. 제 말이 아니어라.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제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책을 썼죠. 진부한 자기계발서들을요. ‘당하기 전에 먼저 쳐라‘ 같은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1970년대 책은 말고요. <크게 생각할수록 크게 이룬다>* 같은 책을 말하는 거예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진부한 말들이지만, 그런 책들이 제게는 필요했어요. 제 가족이나 친구 중에는 아무도 줄 수 없었던 격려를 대신 해줬어요. 계속 버틸 수 있게 도와줬죠. 전 마치 독실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듯이 그런 책을 찾아 읽곤 했어요. 덕분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죠. - P23

버틀러는 인종과 성별을 활용해 인간의 고독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권력과 초월에 대한 욕망을ㅡ그리고 공동체와 가족,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이런 고독에 다리를 놓고 싶어 하는 갈망을 탐구한다. - P39

작가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작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뭐든 타자기의 먹이로 쓸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끔찍한 일이었다 해도 나중에 써먹을 수가 있죠. - P41

SF는 제가 읽기 좋아하는 장르이고, 제 생각에 작가는 즐겨읽는 것에 대해 써야 해요. 안 그러면 스스로나 다른 모두를 지겹게 만들겠죠. 제가 SF를 쓰기 시작한 건 열두 살 때였어요. 이미 SF를 읽고 있긴 했지만, 이전까지 쓸 생각은 안 했죠. - P43

케넌 : 마지막으로 물어봐야겠는데요. 젊은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조언이 있을까요?

버틀러 : 몇 가지 없어요.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읽으라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책 읽기는싫어하는지 놀라울 정도예요.

케넌 : 아멘!!!!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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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04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있어요! 어제도 이 책 읽을까 하다가 다른 책 들고 왔는데 크- 읽었다면 단발머리 님과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는건데 말입니다. 아까워라...

아무튼 베스트셀러를 읽으라는 버틀러 님의 말은, 제가 조금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흠흠.

잠자냥 2024-01-04 14:15   좋아요 1 | URL
락방아... 언제까지 서재마다 돌아다니면서 ˝저도 이 책 있어요!˝ 이럴거니? ㅋㅋㅋ 읽어 좀!

다락방 2024-01-04 14:26   좋아요 2 | URL
저 한 십 년은 이 댓글만 달고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오늘 또 책을 사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1-04 14:29   좋아요 1 | URL
<공지사항> 다락방표 책탑 : 그간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는 말끔한 책탑이 다음주 월요일 올라올 것으로 예상됨

잠자냥 2024-01-04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 님 희진쌤이 새해부터 또 강의하시네요. 항상 놓치시고 안타까워하는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https://twitter.com/maumsanchaek/status/1742728019419226292

다락방 2024-01-04 14:27   좋아요 1 | URL
오오~~

단발머리 2024-01-04 14:28   좋아요 1 | URL
우앗!!!!!!!!!!!!! 잠자냥님! 고마워요! 저 트위터 없어서 마음산책 블로그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길도 헤매는 스타일)
이제 막 신청 방법 찾았습니다! 히히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난다!!!

다락방 2024-01-04 14:34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 가서 강의 열심히 들으시고 열심히 필기하시고 열심히 이해하시고 열심히 기록으로 남겨주세요.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단발머리 님의 후기를..

잠자냥 2024-01-04 14:36   좋아요 0 | URL
신청은 바로 요기

https://smartstore.naver.com/maumsanchaek/products/9712861369

단발머리 2024-01-04 14:3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 짱입니다요! 👍🏼

다락방님 / 다락방님, 제가 가기는 할건데... 사실 요즘은 현강 들으러 가는건 선생님을 ‘뵈는 게‘ 목적이라서요 ㅎㅎㅎ 필기 안 한지 꽤 됐어요. 느낌만 받아옵니다. 에너지 ㅋㅋㅋㅋㅋㅋ 뽜야!! 🔥

독서괭 2024-01-0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스트셀러도 좀 읽어줘야 하는군요 ㅎㅎ
영페미와 싸우셨다는 내용이 궁금하군요🤔

단발머리 2024-01-04 15:13   좋아요 0 | URL
베스트셀러 자주 읽는, 저를 위한 문장입니다. 역시 버틀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페미와의 일은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으실 겁니다. 눈물 준비되셨나요? 🥹

독서괭 2024-01-04 15:23   좋아요 1 | URL
🫣 손수건 준비!

단발머리 2024-01-04 17:14   좋아요 0 | URL
손수건으로 안 됩니다. 목욕가운까지 준비해 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미 2024-01-04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단발머리님과 30분만 싸우면 밥을 먹을 수 있는건가요?!!! 저 쭈꾸미 삼겹살과 비빔국수가 먹고싶어요!!ㅎㅎ🙋‍♀️

단발머리 2024-01-04 17:13   좋아요 1 | URL
네, 그럼요!!
화해할 수 있었던 건 사랑 때문이 아니구요, 그가 나를 논리적으로 압도했기 때문입니다ㅋㅋㅋㅋㅋㅋ
쭈꾸미 삼겹살과 비빔국수는 최상의 조합인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4-01-05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5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4-01-05 0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저랑 한바탕 싸우고 교보 가서 베스트셀러 1위 사옵시다, 파전 먹으면서 읽읍시다.
근데 베셀 1위가 요즘 뭐야? 알라딘만 맨날 보니까 교보 베셀 1위가 뭔지를 모르네 -_-

단발머리 2024-01-06 11:00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의견이시구요. 수이님은 메뉴 선정도 탁월하신 분이라 벌써부터 침이 고이네요.
베셀 1위는.... 흠.... 뭘까요? 이기주 신간이 나왔습니다. 초록색이요. 아, 수이님만 보면 왜케 이기주 이야기 하고 싶을까요.
이기주 베셀 예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1-06 11:22   좋아요 1 | URL
사람들의 욕망일까요…… 이기주라……. 전 그냥 베셀 안 읽고 살래요. 내 길이 아닌 거야……………

단발머리 2024-01-06 11:24   좋아요 1 | URL
좋은 생각입니다 ㅋㅋㅋ 그러나 저는 베셀을 좋아하나봐 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1-06 11:37   좋아요 1 | URL
베셀 냅시다!!!!!!!!

수이 2024-01-06 11:38   좋아요 0 | URL
잠깐만요 이기주를 좋아한다는 건가요? 단발님……………..

단발머리 2024-01-06 11:42   좋아요 1 | URL
베셀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다 찾아 읽지는 않지만… 종종 궁금해하고요. 하지만 이기주의 책을 구입하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1. 올해의 책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지금까지 제일 좋아했던 정희진 님의 책은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였는데, 올해의 신간 따끈따끈한 이 책이 이제 최애의 자리에 올랐다. 또 다른 사유, 또 다른 연구가 더 필요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답을 요구하는 현재문제들에 대해 나 자신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는 소중한 순간이 여러 번 이어졌다. 바로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2. 올해의 작가 : 비비언 고닉

 

1번 책만 아니라면 이 책이 올해의 책이 될 정도로 너무 좋았다. 비비언 고닉도, 이 책의 존재도 알고는 있었지만, 선뜻 찾아보지 못했는데, 눈밝은 독자 쟝쟝님이 이 책을 강력 추천해 주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이 특별히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만났어야 하는 때에 만난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 오래 고민하고 궁금해하던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논픽션 페르소나에 대한 글을 머릿속으로 반 정도 써두었는데,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내내 미루고 있다. ‘나는 이 책으로 나를 가르친다는 이슬아 작가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것도 같다.  

 


















3. 올해의 여성주의 : 여전히 미쳐 있는

 

여성주의 책들은 모두 애정이 깊다. 어려운 책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책을 구입해서 그런 것도 같고, 알라딘 이웃님들과 같이 읽어서 그런 것도 같다. <여성, 인종, 계급> <페이드 포>를 제치고 내가 고른 한 권의 여성주의 책은 <여전히 미쳐 있는>.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오드리 로드 등 시대의 변혁을 주도했던 이들의 삶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제일 감동 포인트는 닥터 질 바이든의 이야기다.

 


질 바이든은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조 바이든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 높은 단계의 영문학 학위를 위해 공부했고 지역 전문대학교의 교수로 일했다. 그녀는 남편의 부통령 재직기간 내내 그 일을 계속했다. 친구인 미셸 오바마의 말처럼, 선거 유세 비행기 안에서도 "질은 항상 과제물 채점을 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보통 '부통령과 바이든 여사'가 아니라 '부통령과 바이든 박사'로 소개되었다. (494)

 


질 바이든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공부를 계속했고, 학위 과정을 밟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박사가 되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신화 베티 프리단의 주장대로 학교로 돌아가 학위를 취득했다’. 3-4문장 속에 깃든 고단함과 열정, 그리고 끈기가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좀 뭉클했다. 결심이나 도전에 무척 소극적인 나이지만, 앞서 있는 여성들의 투지와 노력을, 그 열정과 끈기를 나도 좀 배워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기는 했다.

 

 















4. 올해의 자랑 : 감시와 처벌 

 

크게 자랑할 거 없는 인생이지만, 이 책 완독한 일은 좀 자랑해도 좋겠다. 많이 힘들었다. 사실 내가 읽고 싶은 푸코의 저작은 <광기의 역사>인데…’ 하는 말을 완독할 때까지 입에 달고 살았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은 나를 칭찬하고 싶다.

 

 
















5. 올해의 탈식민주의 : 친밀한 적


이런 이야기가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황금 가면보다 얇은 마스크를 쓰고 굳이 이야기하자면, 작년에 알라딘에 올렸던 여러 글 중에, 이 글(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974222)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경험이 일천하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나이지만, 지금 내가 만나는 세계, 내가 고민하는 문제, 내 힘이 넘치는 범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사회,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더 엄정하게 쓰고 싶다.  

 





 









6. 올해의 동화책 : 두루미 아내


올해는 어느 해보다 동화책을 많이 읽었다. 동화책의 힐링 효과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테지만, 동화책을 읽고 더 감동 받는 사람은, 그림을 눈으로 따라 읽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글자를 읽어주며 그림을 같이 살피는 어른이 아이만큼, 어느 경우엔 아이보다 훨씬 더 감동 받는다. 여러 책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이 책, <두루미 아내>이다. 최근 <정희진의 공부> 12월호에 선물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정희진 선생님은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선물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 책이 떠올렸다.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선물하지 말자. 주지 말자. 그녀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어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도. 주지 말자. 나에게 정말 소중한 그것은, 주지 말자.






















7. 올해의 소설 : 고통에 관하여, 재수사

 

올해의 소설은 우연하게도 모두 한국 소설이다.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건 정보라의 소설이고, 제일 흥미진진했던 건 장강명의 소설이다. 소설을 읽을 때, 나 자신이 부자라고 느낀다. 특히 이번 경우처럼 그 책들이 모두 내 책일 때, 그리고 새 책일 때, ‘호강하고 있다고 느낀다. 소중한 호강 타임을 선사해 준 두 분 소설가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8. 올해의 원서 : Lucy by the Sea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순위도 역시나 바뀌고 말았는데, 부동의 1<Oh, William!>이 아쉽게도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슬픈 소식이다. 드디어,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디어, 나는 윌리엄과 화해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어느 부분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그를 안아주는 루시가 되어 버렸기에, 이제 그를 더는 미워할 수가 없다. 이런…  

 

 















9. 올해의 로맨스 : Unfortunately yours


 

이 책의 특장점이라고 한다면 암스테르담에서부터 날아왔다는 점인데, 그냥 날아온 게 아니라, 소중한 친구의 여행 가방 속에 쏙 담겨 날아왔다. 그에 못지 않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표지. 표지의 그림이 예쁘기도 하지만, 컬러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컬러다. 책표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책의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인 것이다. 내용 또한 마음에 흡족한데, 네이비 실 출신의 남주와 매력적인 사업가 여주는 만날 때마다 최고의 대화 케미를 보여준다. 물론, 다른 케미도 보여준다.

 

 



알라딘이 소중한 건 알라딘 서재 이웃님들이 화면 저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눈팅만 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리고(올해에는 좋아요좀 눌러 주세요), ‘좋아요눌러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고(올해에는 댓글좀 달아 주세요),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께 감사드린다.

 


읽기와 쓰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고, 다른 취미 생활에 비해 돈도 적게 드는 편이다(예외인 분들, 본인들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ㅎㅎ). 읽고 쓰는 즐거움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

 


누구도, 내게서 그 즐거움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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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03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혹시 올해의 책 리스트일까 두근거리며 왔는데 역시나 맞네요. 으하하하하. <루시 바이 더 시>가 오 윌리엄을 제쳤다고요? 오 마이 갓.. 얼른 번역본 나왔으면 좋겠어요. <Unfortunately yours> 완독하신 것도 축하합니다. 대화 케미 말고 어떤 다른 케미가 있다는건지 전혀 전혀 짐작이 안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저 책의 번역본을 기다립니다. 제발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번역 좀 해주었으면..

올해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써주세요. 2024년 정리 페이퍼에서는 저랑 겹치는 책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새해에도 잘 부탁합니다, 단발머리 님!!

(그런데 읽기와 쓰기라는 돈 안드는 취미에 예외인 사람은 대체 누구래요?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슝 =3=3=3=3

단발머리 2024-01-03 14:12   좋아요 1 | URL
<루시 바이 더 시> 정말 좋았는데, 제게는 화해의 책, 용서의 책이며 ㅋㅋㅋㅋㅋㅋㅋ <Unfortunately yours>의 대화 케미 말고 다른 케미는........ 직접 확인 부탁드려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온갖 기예가 ㅋㅋㅋㅋㅋㅋ 차고 넘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열심히 읽고 쓰는 단발머리가 되려고 해요. 다락방님과 더 많이 겹쳐 읽으면서, 더 많이 읽고 쓰고 싶고요.

그나저나 그 분들을 모르시다니 정말 놀랍네요. 골프채 하나만 해도 30만원 아니 100만원이 넘는 물건이 상당하다고 하니 2만원 3만원 책값이 무척 저렴하다 할 수 있겠지만, 한 주에 두 번씩 결제하고, 한 번에 8만원 이상씩 결제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대요. 세상에 이럴 수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ueyonder 2024-01-03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시는 단발머리 님, 즐거운 독서와 글쓰기 하시는 한 해 보내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단발머리 2024-01-03 17:01   좋아요 2 | URL
blueyonder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 말씀은 다락방님께 잘 전해드릴께요! ^^

다락방 2024-01-03 17:05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블루 님? 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4-01-03 17:08   좋아요 1 | URL
읽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시는 다락방님, 올 한 해도 건승과 책탑과 요리 사진 부탁드립니다!!

blueyonder 2024-01-03 22:41   좋아요 2 | URL
앗 제가 실수를… ^^;;; 단발머리 님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찌할까 하다가 위에 처음 올린 제 댓글을 수정했습니다~

단발머리 2024-01-04 21:11   좋아요 1 | URL
블루님~~ 새해 복 더블로 많이 받으시고요! 올해도 서재에서 자주 뵈어요^^

2024-01-03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3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4-01-03 1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올해 잡기 시작하여 찬찬히 읽어가고 있는 책은 <공부하는 글쓰기>라는 책인데요.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방식으로의 글쓰기 입니다. 엄정하게 쓰고 싶다는 말에서 찌릿- 단발님의 명료한 사유 과정을 쫓아가고 싶어요. 부지런히 읽는 건 원래 잘하시니 즐거이 써주시며 과정 나눠주시는 2024년 기대합니다. -애독자n 올림-

단발머리 2024-01-03 17:02   좋아요 0 | URL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방식으로의 글쓰기.... 기억할게요.
즐거이 나누고 싶지만 밑천이 얼마 안 되서 금방 재료 소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독자님, 감사합니다!

건수하 2024-01-03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외 몇 분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제가 서재에 연착륙했지요. 단발머리님의 지분이 매우 큽니다.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해에도 잘 부탁드려요.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벌써 다 읽으셨어요? 전 여기저기 얻어맞아 어질어질 하던데... 마저 열심히 읽어봐야겠어요 :)
<상황과 이야기> 랑 <멀리 오래 보기> 다 좋다고 들어서... 기대가 됩니다. <사나운 애착>이나 <짝 없는 여자와 도시>보다 좋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감시와 처벌>... 고생하셨어요. 제 책장에 남아있는 책이 약간 불쌍해요... ㅎㅎ

단발머리 2024-01-03 17:07   좋아요 1 | URL
제 지분이 크다고 하시니 건수하님 우량주 쭉쭉 상승하시어 저도 돈벼락을 맞아 보고 싶습니다. 일단 우산 준비하겠습니다 ㅋㅋㅋ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은 몰아서 읽었어요. 어질어질해서 후다닥 읽었습니다. 바로 다시 읽으려고 하고요.
건수하님은 고닉책 많이 읽으셨나봐요. 전 <상황과 이야기> 읽고 <멀리 오래 보기>만 준비해두었습니다. <사나운 애착>이 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다 읽어볼 심산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님댁 <감시와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고, 아까 제게 메모 전해주고 갔습니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4-01-03 17:53   좋아요 0 | URL
비비언 고닉은 번역된 것 중 <상황과 이야기> 랑 <멀리 오래 보기> 빼고 세 권을 읽었습니다 :)

<감시와 처벌>이요...? 저런, 왜 제게 직접 말하지 않고.... ==33

단발머리 2024-01-03 20:24   좋아요 1 | URL
<감시와 처벌> 그 친구가 참.... 수줍음이 많더라구요. 조심스레 메모를 건네더라구요.

˝단발머리님, 건수하님과 친하신 거 같던데요.... 가능하시면 올해 안에 저 좀 이 책장에서 꺼내달라고.... 건수하님께 말 좀 잘해 주세요. 저도 항상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부탁드립니다. <감시와 처벌> 드림˝

건수하 2024-01-03 20:34   좋아요 1 | URL
일단… 마음은 잘 알겠다고 전해주십시오…. 😌

단발머리 2024-01-03 20:43   좋아요 1 | URL
얼른 연락주세요. 저한테 날도 잡아 달라 했어요. 🤪

자목련 2024-01-03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 읽으면서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선물하지 말자‘, ‘읽고 쓰는 즐거움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 를 꼭 기억할게요!
페이퍼의 마지막 자신은 역시나 좋고요!

단발머리 2024-01-03 17:09   좋아요 0 | URL
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입니다. 나 혼자만 쓸거야, 라고 맨날 다짐을 ㅋㅋㅋㅋㅋㅋㅋ 다짐을 한답니다.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자주 뵈어요!!

독서괭 2024-01-03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론, 다른 케미도 보여 준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감시와 처벌> 완독에 박수 백만번 보내드립니다👏👏👏👏👏👏👏👏👏👏 고생하셨어요!
올려주신 책들 중 그래도 페이드포 읽었고, 여미쳐 거의 다 읽었네요. 두루미 아내? 읽어봐야겠습니다.
읽고 쓰는 즐거움 누가 빼앗으리! 우리 꼭 쥐고 놓치지 말아요~ 단발님 올해도 함께해요~^^

단발머리 2024-01-03 20:29   좋아요 1 | URL
다른 케미가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1독을 권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앗 뜨거워라!!

<두루미 아내>는 제 생각엔 동화라고 하기엔 좀 그래요. 잔혹동화라면 또 모를까요.
읽고 쓰는 즐거움, 올 한해도 한껏 누려보아요, 독서괭님!! 같이 갑시다!!

거리의화가 2024-01-03 1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친밀한 적 리뷰 기억나요. 비록 댓글은 못 달았지만. 리뷰 읽고 그 책 꼭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역시 생각만이었다는… 탈식민주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읽어보겠습니다. 댓글다는 것이 생각과 정리를 요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서 항상 뒤로 밀립니다. 앞으로는 댓글 다는 횟수를 좀 더 늘려볼게요. 단발머리님 올해도 즐독하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기를^^

단발머리 2024-01-03 20:50   좋아요 1 | URL
거리의화가님이 읽으신다면 새로운 <친밀한 적>의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댓글도.... 저도 자주 달고 싶기는 한데, 거리의화가님 말씀대로 댓글다는 게 조심스러운 일이기는 한 것 같아요.
내년에도 거리의화가님의 좋은 리뷰, 좋은 사유 기대하겠습니다. 올해네요 ㅋㅋㅋㅋㅋㅋ 올해에도 자주 뵈어요^^

2024-01-04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4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4-01-04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닉 언니는 저한테도 올해의 언니입니다!!!!! 저는 상황과 이야기보단 <사나운 애착>과 <짝 없는 여자와 도시>가 더 좋긴 했지만요! ㅎㅎㅎ
솔직히 감시와 처벌 완독하신건 창문에 플랜카드 붙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게도 알라딘과 단발님이 넘 소중합니다!! 2023년 넘 감사했어요 단발님~❤️ 올해도 잘부탁드립니다!! 뽀뽀!!!!!!!!! 💋💋💋💋💋💋💋💋💋💋

단발머리 2024-01-04 21:15   좋아요 1 | URL
고닉 언니까지 섭렵하셨으니 이제 이 동네 언니들은 다 은오님 관리하에 들어갔다고 보면 되겠네요. <사나운 애착>, <짝 없는 여자와 도시>도 좋다고 하셔서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플랜카드는 함 생각해 볼게요. 제가 진짜 플랜카드를 좋아하거든요! 경! <단발머리 감시와 처벌 완독> 축!
뽀뽀는 감사하기는 한데.... 위 댓글을, 결혼도 해 주지 않으면서 맨날 약올리는 잠자냥님이 싫어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syche 2024-01-05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와서 좋아요만 누르고 지나가려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하시길래 댓글 남겨요.
단발머리님 잘 지내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단발머리 2024-01-06 11:02   좋아요 0 | URL
프시케님~~~~~~~ 제가 맨발로 ㅋㅋㅋㅋㅋㅋㅋㅋ 나옵니다.
그냥 지나가시지 않으시고 댓글 눌러주셔서 감사해요. 프시케님도 잘 지내시죠? 읽은 책 올리시는 거 제가 잘 보고 있습니다.
프시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올해에도 잘 부탁드려요!

라로 2024-01-08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님처럼 좋아요만 누르고 가려고 했는데 Lucy by the Sea를 올해의 원서에 올려놓으신 것과 새해인사를 하고 싶어서 댓글남깁니다. Lucy by the Sea가 호불호가 좀 갈리는지 미국 독자들은 별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프님이 그러셨는데 저는 좋았거든요.ㅎㅎㅎ 단발머리님 늘 열심히 읽으시고 좋은 글들 써주셔서 감사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단발머리 2024-01-08 14:0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라로님! 저는 스트라우트 책 중에 이 책이 제일 좋았거든요. 다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저는 루시가 나오는 시리즈가 맞는 것 같아요 ㅎㅎ 이 책 읽으면서 윌리엄도 용서(?)하게 됐고요.
라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올 한 해도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일들 다 이루시는 한 해 되시길요!!
 
강제적 이성애와 무성애의 섬 (feat. 수하님)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18년이었다. 이미 품절 상태였고, 친절한 알라디너님은 애인이 비싼 중고를 구해주었다 자랑하시기도 했다. 애인 없는 나는 원서를 구입해서는 2쪽 읽고 바로 고이 보관 모드로 들어갔고, <성 정치학> 2020년에 재출간되었다. 당시 책소개에 이런 문단이 있어 페이퍼에 적어 두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알라딘 책소개는 좀 바뀌어 있어서, 그래24의 책소개를 가져와 본다.


《성 정치학》은 케이트 밀렛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이러한 관심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기원에 의문을 제기한 밀렛에게 전통적인 이성애적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저명한 비평가 어빙 하우는 “이른바 시대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대충 어지럽게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면서 “배운 티를 내려 애쓰고 있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결정적으로 레즈비언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도중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밀렛은 힘겹게 “레즈비언”이라고 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이라며 치켜세웠던 《타임》은 “페미니스트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하는 회의론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렛의 고백 이후 많은 진보적 페미니스트가 등을 돌렸다. (<Yes 24 책소개>)   



나는 이걸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케이트 밀릿은 레즈비언이었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꺼려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의 질문에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책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게 읽힌다.


















동성애자와 여성의 해방운동에 관한 어느 모임의VER패널로 참가했을 때는 한 청중으로부터 'L 워드'를 사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500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레즈비언이에요? () 그렇다고 말해! 네가 레즈비언이라고 말해!' 라면서.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까. 마치 파시스트의 칙령처럼 융통성 없는 저 말은, 양성애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그렇다고,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것이었다." (<여전히 미쳐 있는>, 205)



자신이 급진주의자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밀릿의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대답(206). 혹은 그러한 대답에 대한 압박은 페미니즘 운동이 불꽃처럼 타오르던 시기에 레즈비언니즘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은 이론이며 레즈비어니즘은 그 실천이라는 의식이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 전체를 좌지우지했고, ‘라벤더 위협의 힘으로 급진적 레즈비언 단체를 여성주의 운동과 분리시키고 싶어했던 베티 프린단 같은 세력의 반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런 저런 사정들로 인해 여성주의 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됐다.


한국에서도 그런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화살표는 전후좌우 방향이 없었다. 남성이 여성을 검증(?)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묻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성이 여성에게 묻는 경우도 있었다. “당신 페미니스트야?” 대답은 Yes or No.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의가 천차만별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왜 당신은 대답하지 않느냐, 왜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느냐의 질문이 페미니즘의 고전을 저술한 사람에게까지 이어졌다. 밀릿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파시스트의 칙령같은 질문.




이성애는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버팀목 중 하나이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그리고 남성과 여성과의 구별이 이성애를 떠받치고 있다. 하지만, 공기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이성애 가부장제 속에서 우리가 진짜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대답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저는 결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거짓 의식을 '세뇌당한' 상태로 헤맨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표현이 유용하거나 심오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호모포비아는 너무 널리 퍼진 용어라 이성애 페미니즘의 성적 유아론을 밝혀내고 대화를 나누기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에세이를 통해 저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나아가 적대적으로 검토해 보길, 자신이 속한 제도를 비평해보기를, 여성의 자유를 위해 그 규범과 함의를 놓고 투쟁하기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제시하는 수많은 자료에 좀 더 마음을 열어주기를, 이성애 제도 안의 개인적 특권과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자는 해결책에 안주하지 않기를 요청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84)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도전은, 나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남자와의 연애와 사랑과 섹스를, 그 경험을 적대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성애 제도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특권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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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3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23 2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엄머 찹쌀떡아이스 인절미?? 맛있겠네요 ㅎㅎ
제 지인도 몇년 전에 여자가 결혼을 꼭 해야하는가,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이 입는 불이익에 대해 말했다가 상대 여성이 “너 페미니스트야?”라고 물어서(검증어조로) 황당했다고 하더군요..
단발님 화이팅!!

단발머리 2023-12-24 17:51   좋아요 1 | URL
너무 맛있다는 소식입니다! 아주 맛나요! 그런 질문들은 그래도 뭔가(?) 아시는 분들이죠. 전 은근슬쩍 이야기하면 듣는 분들이 아~~ 그런가? 그렇네… 이런 분위기에요.
독서괭님도 화이팅!! 💕🎄

2024-01-1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6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커리어 그리고 가정

 


2012년의 이 옛날 사진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나서 첫 페이지를 찍어둔 것이다. 그때 써둔 페이퍼를 찾아보니 이 페이지가 특히(!) 마음에 들어 출판사에 전화를…. (제가 이렇게 자주 출판사에 전화하는 사람이었네요. 몰랐어요, 나도) 지금 사도 저 페이지는 똑같나요? 물었더니 초판 일부에만 저 부분이 들어간 거라고 해서 눈물을 머금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러니까 저 책이 내게는 장하준의 첫 번째 책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그대로 두지 말고 공정하게경쟁이 이루어지도록 공평한 경기장을 만들자는 주장이 너무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은 책은 대중에게 더 다가간다는 느낌이 강하다. 요리 혹은 식재료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도 이전의 관점을 놓치지 않고 주장에 대한 여러 경제학 통계와 그에 대한 장하준식해설이 곁들여 있다. 특히 아내의 권유에 따라 용기를 내어 기술했다는 <챕터 13장 고추>돌봄 노동부분이 눈에 띈다.

 


돌봄 노동에 대한 관점과 관행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 …. 셋째, 관점과 관행의 변화는 제도 변화를 통해 공고히 해야 한다. 무보수 돌봄노동에 대한 인정과 인식 변화는 복지체제의 변화로 공식화되어야 한다. 양성 모두에게 유급 돌봄휴가(어린이 양육하기, 노인 돌보기, 병든 친척과 친구 돌보기 등을 위한)를 더 길게 허용해야 하며, 집에서 풀타임으로 아이를 돌보는 부모나 보수를 받는 일을 하는 부모 모두에게 값싼 보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263)

 


보이지 않는 모든 종류의 돌봄 노동이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것이 무료로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진단. 돌봄 노동을 가시화하는 여러 방식에 대한 논의 또한 이어진다. 여성의 임금이 상승했을 때 가정 경제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주장과 논거가 이어지는데, 이 당연한 말을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않는다. 남녀 임금 격차를 좁히고,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적이었던 직군에 여성이 더 쉽게 진출할 수 있게 하는 것, 보수를 받는 돌봄 노동의 임금 상승을 위해 최저 임금을 올리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262). 202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의 <커리어 그리고 가정> 역시 성별 임금 격차의 핵심 원인을 밝혀낸' 책으로 주목받고 있다다정한 이웃님이 선물해 주셔서 고이 모셔놓고 있는데, 이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2. 녹색 평론 184호 

 


일론 머스크가 내놓은 테슬라 로봇 옵티머스 2세대는 보완할 부분이 몇 가지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충분히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다. 물리적으로 완벽한 물체(신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에 자신의 뇌를 다운로드해서 다른 행성(구체적으로는 화성)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꿈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구가 녹색이기를 바라는 마지막 바람은 이 책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녹색평론> 사서 읽는 사람 아닌데 정희진 선생님 글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구입했다. 물론, 다 읽지는 않고 정희진 선생님 글읽었다. [딜레마가 아닌 파국;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발전주의에 대한 비판과 기술 발달로 인해 인류가 얻게 된 핵무기라는 결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희망이라는 게 가능한가.

 


나는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 아류 러다이트주의자다. 다시 말해 '멈춤'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찰적 과학자의 질문, "다시 한번 묻는다. 인공지능 그리고 그다음을 이어갈 또다른 과학의 발전은 계속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과학기술은 발전하면 할수록 인류를 불행하게 한다. 이익을 보는 이들은 지구를 버리고 화성에 가서 살고 싶은 극소수 자본가뿐이다. (198)

 


인류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끝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녹슬지 않는 새로운 몸을 입고 화성으로 이사 가려면, 일론 머스크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3. 트렌드 코리아 2024

 

베스트셀러 읽는 엄마라서(나의 끈질김을 보라. 우리 집 얘들은 제 글을 읽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하고자 합니다. 얘들아, 나의 끈질김을 보라!) 일 년에 한 번은 꼭 훑어본다. 자세히는 안 보고 쓱~~ 본다. 신문도 안 읽고, 주간지도 안 읽는 나여서, 그래서 본다. 2024, 내년의 트렌드는 무엇인가. 영어 알파벳 조합에 따라 키워드 10개를 꼽았단다. 여기에도 보이는 돌봄경제’.

 







 













4. 나일 강의 죽음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처음 읽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은애가 중학생일 때, 집 근처 새 도서관에서 반짝반짝 새 책으로 시리즈 빌려다 주던 사람이 바로 나인데. 이번에는 내가 읽으려고 빌렸다. 처음에 예상한 사람이 범인인 것은 맞았는데, 아가사의 설명 따라가다가 잠시 헷갈렸다. 두 권 정도 더 읽어야겠다 싶다.

 



 














5. Nine Lives / The Kind Worth Saving / The Christmas Guest  


 

피터 스완슨은 이 책까지 총 3권 읽었고, 두 권 더 주문해서 (알라딘 미안, 교보가 만원이 싸더라) 총 다섯 권이다.


 

첫 페이지에 9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여남이 섞여 있고, 나이도, 직업도, 사는 지역도 제각각이다. 5분의 1 정도 읽으면서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모두 ‘having an affair’, '불륜 중'. 전문 용어로 바람을 피고 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벌써 3명이나 죽었다. (이런!!) 유튜브에 오디오북이 있어서 어제는 찬찬히 읽다가 맘이 급해서 오늘은 줄거리만 따라 허겁지겁 읽어가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어렸을 때 읽던 책 이야기를 하는데 아가사 크리스티가 나온다. 한 명은 크리스티 소설을 다 읽었다고 하고, 한 명은 그 중에서 어떤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제목이 기억 안 난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제목(<The A. B. C. Murders>)을 알려주는 훈훈한 장면이 이어진다. 아가사 크리스티 딱 한 권 읽은 사람이고, 내가 읽은 책은 언급이 안 되었지만 뿌듯한 마음에 혼자 웃었다. 아무도 없어서 크게 웃어도 되는데 조용히. 이럴려고 내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한 권 읽은 거야.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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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22 14: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글 좋다고 쓰려다가 마지막 사진 보고 다 날아가버리네요. 사진이 너무 좋아서요. 뒤에 저 훌륭한 배경하며..!!
단발머리 님 열심히 읽고 계셔서 너무 좋네요. (저는 게을리 읽고 있습니다만..)

단발머리 2023-12-23 16:57   좋아요 0 | URL
제 책이면 좋을텐데요 ㅋㅋㅋㅋㅋㅋㅋ 도서관입니다. 저 자리가 원래 책상 자리였는데 오랜만에 가보니 편안한 스타일로 바뀌었더라구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찰칵! (소리 안 나는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ㅋㅋㅋ)
다락방님도 열심히 읽으세요! (촤락~~~~~~~~~~~~~~~~~~)

은하수 2023-12-23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 . 글 너무 좋네요... 사진도요^^
더 이상 말이 필요없네요.
<커리어 그리고 가정>은 저도 읽는 중인데... 진도가 안 나가요.
어렵진 않은데 그러네요.
꾸준히 읽고 계신 모습 넘 멋지십니다!

단발머리 2023-12-23 16:58   좋아요 1 | URL
<커리어 그리고 가정>을 가지고 계시군요? 저도 곧 시작해야지 하고 일단 책장에서 꺼내 두었습니다.
꺼낸 다음에는 쌓아놓기는 하지만, 일단 2단계에 진입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은하수님의 격려 말씀 듣고 나니 더 꾸준히 읽어야겠다! 결심하게 되네요. (불끈!!)
 













읽지 않아도 책 구비에 진심인 사람인지라 오후 수업에서 신경 쓴 부분은 다양한 동화책을 준비해 놓는거였는데, 학교 도서관만 이용하기에는 권수가 부족해서 동네 도서관 두 곳의 책을 대출해 준비해 놓기는 했다.

 


이 책에서는 이 페이지가 제일 근사했다. 주몽과 세 친구가 부여 금와왕 아들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 책에는 시퍼런 강물이라고 나오는데, 연두색과 초록색의 조화, 아니면 에머랄드빛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두 페이지가 시원하게 하나로 엮여 바다를 멋지게 표현했다. 바다, 하니까 떠올라서 핸드폰을 뒤져보니 오키나와 갔을 때의 사진이 있어서 그것도 같이 올린다. 여름, 그립다.

 


 






주몽은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주몽은 우리처럼 사람인데 어떻게 알에서 태어났나. 이런 이야기를,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야 하는데, 주인공의 난관에 같이 함몰되어야 하는데. 난생, 태생, 난태생. 우리 포유류는 난생이야, 태생이야? 오리너구리 이야기도 잠깐 해주시고.

 


길이길이 남기고 싶은, 알라딘에 박제하고 싶은 건 이 페이지다. 나는 이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이번에 처음 들었고 처음 알았다. 해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정을 통한 사이인데, 하백은 해모수가 영 마뜩잖았다. 해모수를 시험하기로 한 하백, 프랑스 파리의 한식 전문점에서 대통령이 재벌들 불려서 술 멕이듯, 해모수에게 술을 만땅으로 먹이고는 유화와 함께 가죽 상자에 가두어 두었다. 아침이 되고, 다섯 용이 황금 수레(해모수 자가용)를 끌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부릉부릉 부르릉하니, 잠에서 깬 해모수는 깜짝 놀라




 

해모수는 얼른 유화의 비녀를 뽑아 가죽 상자를 찢고는 혼자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어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나. 혼자 간다, 해모수가. 아이구야. 화가 잔뜩 난 하백은 그 길로 유화를 집에서 쫓아내고. 그다음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 해모수가 떠나듯 주몽도 부여를 떠난다.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다들 떠난다. 남겨진 건 여자 그리고 아이. 혹은 엄마 그리고 아이. 해모수가 가죽 상자에서 탈출하려 할 때 필요한 게 유화의 비녀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유화 소유의, 유화를 위한 도구를 해모수는 자신의 탈출을 위해 사용한다. 그리곤 버린다. 유화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비녀는 저만치서 나뒹군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하지 않는다. 어머, 해모수 혼자 간 거야? 정도에서 접는다. 지나친 개입은 옳지 않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고, 아이들이라고 그걸 하지 못할 리 없다.

 

 


계약 만료는 지난 금요일이라 이제 퇴사 2일차다. 집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었는데도 겨우 몇 개월만에 시간에 대한 개념이 바뀐 듯하다. 아니면 퇴사 2일차라 그럴 수도 있겠다. 자꾸 시계를 쳐다보게 된다. 지금 이 시간쯤에 나는 출근 중이었고, 다음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리고 **이를 만나고 있었고. 지금 이 시간에는 책상을 닦고 있었다. 집은 안 치워도 책상 위는 항상 깔끔했던 나. 과거의 나.

 


오랜만에 집에서 커피를 내렸더니 너무 진하게 됐다. 물을 더 부어야겠다. 따뜻한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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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21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선생님으로 일하셨군요!! 국어수업? 독서교육? 너무 잘 어울려요. 퇴사생활에 다시 적응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알라딘 서재에서 더 많은 활동을 기대합니다.
집은 안 치워도 책상은 깔끔하셨군요. 전 책상도 안 치우는데.. 흠..
커피를 한약처럼 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4 17:52   좋아요 1 | URL
국어수업도 하고요. 독서교육은 안 하지만 같이는 읽어요^^
알라딘 서재에서 더 많은 활동을 제가 계획했었지요. 계획을 했습니다. 그러나 ㅋㅋㅋㅋ
집에서는 아메리카노로 마시니까요. 과자 없으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당최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