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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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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 얘기는 남편한테는 못 하겠어요. 책 살때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 제말 한 권만 다 읽어보고 사라고... 언니한테만 말해야겠어요. 소세키는 아무래도 제 스타일이 아닌가 봐요. 재미가 없어요.” 

아름다운 나쓰메 소세키 시리즈 8권까지 구입을 완료한 상태에서, 『풀베개』만을 완독한 상태에서, 『산시로』를 읽다 포기한 상태에서 내가 말했다.

소세키 전작, 하루키 전작, 밀란쿤데라 전작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김연수도 혀를 내둘렀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도 “음, 그렇게 쉽게 읽히지는 않지.”라고 말하는 H언니가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언니는 『그 후』를 먼저 읽어보라 했다. 나는 소세키 작품은 ‘『산시로』-『그후』-『갱부』’의 순서로 진행해야 하기에 그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나쓰메 소설 6권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언니의 추천대로 『그 후』를 읽기 시작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이런 문장들에서 나는 무릎을 탁 하고 친다. 이런 문장을 쓰는 소세키를 두고 스타일 운운했던 사람은 누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소세키를 좋아한다.

그런 형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극이 없는 대신에 부담스럽지 않고 마음이 편해 좋았다. (83쪽)

다이스케의 입장에서 세이고는 손잡이가 없는 주전자 같은 존재로, 어느 쪽으로 손을 내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85쪽)

 

“젊은 사람이 그런 실패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실성과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게다.”

“성실성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49쪽)

 

다이스케는 매사에 서두르거나 매이는 일이 없다.

“자네 전화 좀 걸어주게. 집으로”

“아, 본가에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죠?”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하고,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반드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게.”

“어느 분께 말씀드리죠?”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잠깐 들르라고 하시는데...... 뭐, 꼭 아버지가 아니어도 되니까 아무에게나 그렇게 전하게.” (26쪽)

 

내가 좋아하는 건 소세키만이 아니다. 나는 다이스케도 좋아한다.

그는 언제나 무사태평이다.

“돈 버는 일이 싫다면 그걸로 좋다. 돈을 버는 것만이 일본을 위한 일은 아닐 테니까. 돈을 벌지 않아도 좋아. .. 그러니까 뭔가 하려고 노력해 보거라. 국민의 의무로서 말이야. 이제 너도 서른이 아니냐.” (48쪽)

 

돈 벌지 않아도 좋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네, 네, 대답하기는 해도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대해서는 자신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도 너무 무사태평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랬던 다이스케가, 소극적이고, 내면지향적이며, 유약해 보이는 다이스케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의 변화는 가히 ‘변신’이라고 할 만하다.

다이스케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아내 미치요를 돕고 싶어한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가여워하며, 그녀를 위한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한다.

다이스케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건 그녀와 함께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다이스케는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있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다.

한동안 말없이 미치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의 뺨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지더니 평소보다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제야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로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이 무의식중에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 데는 2, 3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227쪽)

 

비슷한 장면이 떠오른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 

 

그들은 잠시 서 있었다. 여자는 닫힌 문이었고, 남자한테는 열쇠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미소는 사라졌다. 긴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찰스는 진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는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뛰어내리고 싶다고,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기만 하면 그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띤 감정으로 호응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마침내 그가 속삭였다.

“다시는 단둘이 만나서는 안 되겠소.” (262쪽)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순간에 그들은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가장 흔한 일이며, 가장 희귀한 일이다. 이 일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가장 저급한 이야기이며, 또한 가장 고차원적인 이야기이다.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며, 가장 고상한 이야기이다. 뻔히 그 끝이 보이는 이야기이며, 그 끝을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자연스러운 애정에 근거한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제 와서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세속적인 형에게 동정을 받으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선택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 만족감을 이해해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모두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어 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자신을 빨리 태워 없애기를 간절히 바랐다. (322쪽)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는 아버지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돌봐주는 형도, 편안한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세상도, 이제 그에게는 모두 적일 뿐이다.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다이스케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다. 불길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

평소의 다이스케가 이런 경우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미치요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불편을 피하면서 아버지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결혼을 승낙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이스케는 그런 식으로 쌍방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기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이제 와서 울타리 밖으로 몸을 반만 내민 채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284쪽)

 

결국, 다이스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던 이전의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쌍방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고, 편안하며, 쉬운 일이었지만, 미치요를 선택한 지금,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그는 그 모든 불편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한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 그에게 중요한 단 한 사람, 미치요를 위해서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다.

옳다, 옳지 않다 했을 때, 그의 행동은 옳지 않다. 바르다, 바르지 않다 했을 때, 그의 행동은 바르지 않다. 하지만, 조용하고 여유롭던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편안하고 행복했던 이전의 삶을 뒤로 하고,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는 다이스케는 의외로 의연하다.

휘청거리며 미치요에게 다가서는 다이스케. 안쓰러운 그의 뒷모습 때문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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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2-0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자연스러운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들이 무의식중에 세상의 속박을 뛰어넘는 데는 2, 3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아...옛추억이 실실~떠오르는 문장이네요.^^


단발머리 2015-02-09 11:51   좋아요 0 | URL
아.... 소세키의 문장이 아무개님에게 옛추억을 떠오르게 했군요.^^

다른 좋은 문장들도 많아요. 요즘 남자주인공들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전 너무 좋더라구요.

˝내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필요해요. 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다이스케의 말에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달콤한 표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그 말처럼 단순하고 소박했다. 오히려 엄숙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 급한 일이라며 일부러 미치요를 부른 것이 유치한 시가 같은 느낌이 들었다. (267쪽)


다락방 2015-02-0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집에 [그 후] 있는것 같은데 읽어봐야겠어요. 불끈!

단발머리 2015-02-09 12:30   좋아요 0 | URL
움하핫!!!
저는 [그후]의 성공으로 소세키를 이어갈 힘을 얻었어요.
8권 중에 2권 완독, 2권은 읽고 있는 중, 그러고도 4권 남았네요. 저도 같이, 불끈!
 
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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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에 갔을 때다. 신혼여행과 괌으로의 짧은 여행을 빼면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던 나는 말 그대로 간만의 해외여행에 잔뜩 들떠 있었다. 싱가폴은 어디에 가나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구경할 곳도 많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구경거리 중에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뭐니뭐니해도 ‘사람 구경(?)’이었다.

대부분의 싱가폴 사람들은 중국계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할 때, 누가 기분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외양상으로는 한국인과 비슷하다.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 있고, 취업을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 관광 온 백인들도 자주 눈에 띄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족 파악이 어려운 사람들(죄송합니다.)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내 시선을 잡아끈 사람들은 단연 인도인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새공원인 주롱새공원에서 특히, 인도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남자 한 명, 여자 2-3명, 그리고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많았다. 인도 전통 의상인 사리 또는 사르와즈 카미즈를 입고, 곱게 곱게, 정말 곱게 곱게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모습은 너무나도 예뻤다. 인도의 젊은 처자도 이뻤고, 인도 아주머니도 이뻤으며, 인도 할머니도 이뻤다.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주롱새공원 푸드코드의 한 점원이었다. 카레와 흰 쌀밥, 그리고 또띠야처럼 생긴 넓적한 빵을 주문하러 계산대 앞에 섰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영어를 못해서라고 생각하면 적당하겠다.) 너무 이쁜 인도 아가씨, 정말 너무 예뻤다. 까만 피부는 반짝반짝 자체발광, 눈은 보석처럼 빛나고, 코는 얼마나 오똑한지, 그려놓은 듯한 입술까지. 완벽한 얼굴, 완벽한 비율이었다. 내가 이미 서구적 미인형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전제하고서라도 정말, 너무 이뻤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 아가씨는 조금 피곤해 보였고, 그리고 많이 바빠 보였다. (영어를 못해서라고 생각하면 적확한 판단이다.) 자리로 돌아와, 동생에게 말했다. 야, 진짜, 진짜 이쁘다. 어쩜 저렇게 이쁘냐. 동생이 말했다. 이쪽 애들이 화장 다~~ 하고 나온 것보다, 쟤네 세수만 하고 나온 게 더 이뻐. 왜 아니겠는가, 나는 까만 그녀에게 완전 반해버렸다.

한국에 돌아와 ‘세계의 인종’을 검색해보았다. 인도인은, 이렇게 예쁜 인도인은 도대체 무슨 종족이냐. 코카서스인종, 아르메니아인종, 몽골인종, 니그로인종, 말레이인종, 오스트레일리아 인종.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검색에 검색을 계속하다가 코카서스 인종, 흔히 백인종이라고 통칭되는 이 인종의 피부색이 다 새하얀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인도인들의 선조 중 아리아인이 있는데, 인도․아리아인은 키가 크고 피부는 백색에 가깝고 코가 높고 눈이 깊숙한 용모로 유럽인과 가까운 특징을 보이며, 현재 인도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추측건대 내가 만난 어여쁜 아가씨는 대부분의 인도인처럼 혼혈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피부가 까만 인도아리아인이었을 것이다. 동생이 말한 ‘검은 백인’이 맞는 말이었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나만 사람구경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를 구경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남자, 젊은 여자, 아이 둘. 외모는 싱가폴 사람과 비슷한데, 복장은 너무 자유스러운, 관광객 같지 않은 모습들. 우리도 그들을 구경하고, 그들도 우리를 구경했을 테다. 제일 재미있는 건, 역시 사람 구경이다.

 

아하, 이제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잠깐, 주스 한 잔 마시고.

『휴먼스테인』은 내 진정 애정하는 필립 로스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일흔 한 살의 남자로 최근에 아내와 사별한 전 대학학장이자 저명한 고전학 교수 콜먼인데, 그는 요즘 사랑에 빠져있다. 

    

콜먼은 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래가 없으니까. 콜먼은 일흔한 살이고 그 여자는 서른네 살이니까. 콜먼이 그런 관계에 뛰어든 것은 뭔가를 배우거나 계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험을 하기 위해서다. 콜먼이 그런 관계에 뛰어든 것은 포니아와 마찬가지로 즐기기 위해서인 것이다. (『휴먼스테인』 1권, 61쪽) 

 

콜먼이 사랑에 빠진 여자는 포니아라는 젊은 처자로서, 콜먼이 전에 학장으로 있던 대학의 청소부다. 콜먼과는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그 어떤 유사성도 발견하기 어려운 여자다. 그는 그녀에게 완전 빠져버린다. 일흔 한 살 남자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된 포니아를 위해 콜먼의 모습을 잠깐 보여주는 게 예의라 생각된다.

 

콜먼이 몸에 걸친 거라곤 청반바지와 운동화가 전부였다. 뒤에서 보니 이 일흔한 살 먹은 남자는 채 마흔도 안 되어 보였다. 그것도 날씬하고 건강미 넘치는 마흔 살 말이다. 콜먼의 키는 기껏해야 5피트 8인치를 약간 넘었고, 근육이 울툭불툭한 체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 안에 엄청난 힘이 있었고, 고교 운동선수 같은 활력과 기민함, 생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적극적인 행동력도 여전히 있었다. ... 전반적으로 콜먼은 나이에 비해 말쑥하고 매력적인 외양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유태인치고는 코가 작은 편이라 턱 쪽에 무게감이 실리는 얼굴이었고, 사람들이 백인으로 착각하는 피부색이 옅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살짝 모호한 분위기의 누르스름한 피부에 머리가 곱슬인 유태인이었다. (『휴먼스테인』 1권, 32-3쪽)

 

매력적인 용모의 콜먼, 그리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포니아. 두 사람을 묶어주는 여러 가지 요소 중 가장 강력한 기제가 섹스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작가의 분신 주커먼은 말한다.

섹스는 언제나 삶의 일부인데 “아니,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없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섹스라는 오염물은 인류를 이상으로부터 분리하고 우리의 물질성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우리를 구원하는 타락인 것을. (『휴먼스테인』 1권, 68쪽)

 

그동안 콜먼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명망, 노력하지 않아도 바쳐졌던 권위, 사려 깊은 존경의 표현은 모두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녀를 선택함으로써 콜먼은 자녀에게서, 친구에게서, 변호사에게서,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비난과 지탄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포니아가 막 떠나려고 할 때, 콜먼은 마침내 자신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이 여자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도, 아들들도, 포니아의 전 남편이나 델핀 루도 상관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삶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이 걸린 문제다, 콜먼은 생각했다. ... 생기 넘치는 아이 넷을 키우는 데, 전투와도 같았던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데, 고집불통인 동료 교수들을 움직이는 데, 그리고 이천오백 년쯤 묵은 문학작품을 매개로 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아테나 대학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무기가 되었던 성실함으로부터 자신을 풀어 놓을 때였다. 이제 이 단순한 갈망을 지침으로 삼아 몸을 내맡겨야 할 때였다. 저들의 비난을 넘어서자. 저들의 고발을 넘어서자. 저들의 평가를 넘어서자. 죽기 전에 저들의 역겹고 멍청하고 분노에 찬 비난이 지배하는 구역 바깥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자. 콜먼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휴먼스테인』 1권, 106쪽)

 

이것이 일흔 한 살의 콜먼, 더 잃을 것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마지막 사랑 포니아에게 그는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했을까. 물론 콜먼은 그의 비밀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니아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 그녀의 전남편 레스터 팔리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녀에게 집착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그와 비밀을 나눌 사람은 오직 그녀, 포니아 단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수려한 외모의 엘리트로 그려지는 혼혈 흑인 주인공은 이른바 ‘비극적 혼혈(tragic mulatto)'로서 첫 미국 흑인소설인 『클로텔』에서부터 전통적으로 등장해온 가장 대표적인 한 유형이다.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해설> 천승걸, 204쪽)

 

콜먼은 외모로 보았을 때,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이 모호한 사람이다. 사춘기 시절, 콜먼은 누군가 일부러 묻지 않는다면 굳이 자신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권투 코치의 조언을 듣는다. 군대 입대 지원서에는 자신을 ‘백인’이라고 표기해 백인으로서 군생활을 했지만, 술을 마시고 사창가에 들어갔을 때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미국 남부지방에서의 ‘한방울 규칙(one-drop rule; 조상 중에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흑인으로 간주했던 제도)’에 의하면, 그는 흑인이다. 피부색이 하얀, 흑인. 하얀 흑인. 비극적 혼혈.

콜먼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솔직히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한 때 사랑했던 흑인 여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녀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 마음에 드는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콜먼은 자신의 가족과 절교한다. 오직 백인으로서만 살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극적 혼혈’이란, 1840년부터 19세기와 20세기 미국 문학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이들은 ‘백인 세계’나 ‘흑인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적응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슬프다 못해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하는 삶을 살 것으로 여겨지는 혼혈인, 물라토를 말한다. (Wikipedia, 'tragic mulatto')

 

콜먼은 ‘백인’으로 살기로 선택한다.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형과 절교한다.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신이 가공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스로를 백인으로 설정한다. 그의 인생 말년에 찾아왔던 비극은 그의 선택에 대한 가장 적확한 ‘응답’이다.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며, 지적이고, 전혀 흠 잡을데라고는 없는 완벽에 가까운 인간의 전형, 콜먼 실크.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이 남자는 다르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우리 반 교실로 들어와서 선생님에게 뭐라고 이야기한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렇게 말했다. “백인 학생들은 잠시 모두 일어서주세요.” 나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어섰다. 그러자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넌 잠시 앉아 있다가 나중에 다른 아이들이랑 함께 일어나라.” 나는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선생님, 뭐라고 그러셨어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금은 앉았다가 나중에 다른 아이들이랑 함께 일어나.“ 나는 멍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때 흑인이었던 사람의 자서전』, 19쪽)

 

그 날 저녁, 눈물로 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굳게 믿고 있던 어머니의 생김새가, 어머니의 피부색이 자신이 어울리는 많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또 다시 망설인다. 그도 콜먼처럼 그녀를 잃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걸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를 내 품에 안고 싶은 욕망을 물리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많은 행복의 희생제단이 되어온 그것, 즉 ‘의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내 손에 꼭 쥔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요, 정말 사랑해요. 하지만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더 있어요.” 그러고는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손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올려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이기라도 하듯 황량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상한 눈빛 아래서 나는 내 피부가 검어지고 얼굴이 두툼해지고 머리가 곱슬머리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 그러더니 (그녀는) 머리를 피아노에 떨어뜨리고 가냘픈 몸이 떨리도록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한때 흑인이었던 사람의 자서전』, 192쪽)

 

두 사람은 오로지 사랑의 힘으로 둘 사이의 장애를 극복한다. 결혼을 하고 아주 예쁜 아이들을 낳는다. 이렇게 『한때 흑인이었던 사람의 자서전』은 해피엔딩이다.

『한때 흑인이었던 사람의 자서전』도 물론 그렇지만, 『휴먼스테인』은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사회적 시선을 뒤로하고 일흔 하나의 나이에 자신의 딸보다 어린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준다. 섹스를 섹스 이상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포니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글자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내가 읽은 얼마 되지 않는 책들 중,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번 읽었던 문장을 적어본다.

살아 있으라,고 말하는 이 잔잔한 외침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라,고 말하는 이 조용한 외침은,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 속에서 들려온 이야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외침은 울림의 강도가 결코 작지 않다.

인간 유형들 간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불균형에 대한 나의 매혹, 성관계 방식이 지닌 비획일성과 가변성과 넘치는 불규칙성에 대한 나의 매혹, 인간과 소라는 대단히 구별되면서도 거의 구별되지 않는 우리에게 살아 있으라고, 그것이야말로 난제이자 삶이 지닌 무의미한 의미심장함이니,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라고, 계속해서 받고 주고 먹이고 젖을 짜고 진심으로 인정하라고 하는 명령에 대한 나의 매혹, 이 모든 것이 수만 개의 세세한 인상으로 현실처럼 기록되었다. (『휴먼스테인』 1권,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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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인이 지나가면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요. 피부색과 외형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라서 시선을 많이 받기 쉽잖아요. 괜히 뚫어지게 쳐다보면 외국인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느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5-02-01 19:3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럴때가 많아요.
척 봐도 관광객인 경우는 눈이 마주쳤을 때 그냥 가볍게 미소지을 수 있는데(어제 지하철에서 그랬거든요.)
이 곳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경우에는, 뭐랄까, 그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 같아요.
모르는데 아는 척 하면 이상하게 여겨지고요.
cyrus님 말씀처럼 그런 시선을 싫어할 수도 있구요.

다락방 2015-02-0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먼 스테인 짱 재미있겠어요!! >.<

단발머리 2015-02-02 08:40   좋아요 0 | URL
네, 완전 킹왕짱 재미있어요.
저는 최근에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 중에는 이 작품이 제일 좋아요.
곧 바뀔지도 모르지만요. >.<

라로 2015-02-02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페이퍼 읽고나니 휴먼스테인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아요~~~~ㅋㅎㅎ

단발머리 2015-02-02 08:48   좋아요 0 | URL
아.... 아닙니다요.
실제로 읽으시면 제 페이퍼 100배의 즐거움을 얻으실 수 있을거예요, 비비아롬나비모리님.

참, 비비아롬나비모리님, 아롬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비비아롬나비모리님을 옛날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좋아서요. 헤헤, 아롬님~~~

아무개 2015-02-02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방울 규칙`이 미국 남부에서만의 규칙인가봐요?
전 미국의 법이나 뭐 전체가 다 인정하는 규칙인줄 알고 있었다는 ㅎㅎ

저도 아롬님처럼 단발머리님 페이퍼 읽은걸로 휴먼스테인은.....^^:::::


단발머리 2015-02-02 12:0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한방울 규칙`을 정확히는 모르는데요. 이 책 읽으면서 찾아봤는데, 사전에는 그렇게 나와있더라구요.

미국에 안 가본 제 생각으로는요.
외양이 중요한것 같아요. 일단 우리가 오바마를 보면 딱! 흑인으로 인식하잖아요. 헷갈릴게 없지요.
근데, 주인공 콜먼 같은 경우는 사실, 가족들 모두 흑인이고, 책에는 `피부색이 옅은`으로 나오던데요.
흑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콜먼은 백인으로 살고 싶어서 백인 아내를 맞이했구요. 아이들은 모두 백인. 일단 겉으로는요.
과거를 숨긴데 성공하죠.

아.... 읽으셔야됩니다. 넘넘 재미있어요.

icaru 2015-02-0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읽고 싶어요!!!
두권짜리인거예요??

단발머리 2015-02-02 12:06   좋아요 0 | URL
읽으시면 후회없으실겁니다.
두 권입니다. 근데 두껍지는 않구요.

사람들이 다 아는 필립로스를 전 작년 말에 발견해서요.
하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요^^

icaru 2015-02-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 이름만 익숙한 작가입네당 ㅋㅋ

단발머리 2015-02-02 12:11   좋아요 0 | URL
저는 얼굴에 익숙해지고 싶은 작가예요.
제 스타일입니다. 푸핫~~~~~~

책읽는나무 2015-12-31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북플에 님의 요글 읽어보라라고 뜨네요?^^
필립로스!!
저의 2016년 도전해볼 작가에요
님 덕택입니다^^

단발머리 2015-12-31 19:30   좋아요 0 | URL
아핫.... 그렇군요.^^
이 책을 읽으며 행복하게 책장을 넘겼던 때가 어제같은데, 올초에 읽었던 책이네요.
정말.... 시간 이렇게 빨리 가는건가요?

책 읽는 나무님도 필립 로스를 좋아하시게 될지, 어떤 책을 가장 좋아하실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ㅎㅎ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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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책이었는지, 폴 오스터의 책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책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요즘엔 뭐 읽어?”

“응, 지금은 츠바이크 읽고 있어.”

“세계 문학 알파벳 순으로 읽는 거야? 츠바이크(Zweig)면 거의 다 끝나가네.”

이런 식이다. 나는 Stefan Zweig면 S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 이야기라도 안 한다면, 이 슬픈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하릴없이 적어 보았다.

짧은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편지를 읽기 직전에 여유로운 남자의 모습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온 의문의 편지, 그리고 편지를 다 읽은 후에 충격을 받은 남자의 모습. 물론 소설의 대부분은 편지 내용 속에 들어 있다.

여기 한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당신이 지금도 여전히 저를 사로잡는 특유의 성마르면서도 경쾌한 동작으로 차 발판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요. 무의식적으로 당신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는 쪽으로 다가서다 하마터면 당신과 부딪칠 뻔 했습니다. 당신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감싸는 듯한 눈빛으로, 그래요, 다정한 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고 제게 미소 지었습니다. 네, 다정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그때 당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허물없는 사이처럼 말했지요.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지만 전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느낀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져버렸습니다. (99쪽)

<별그대>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던 홍진경은 또래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말한다.

“그래, 그렇다니까. 예고 같은 건 없어.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거야. 사랑이란 게 그래.”

드라마를 보여 제일 집중했던 건, 그리고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던 건 단연 독보적 남주 김씨의 말과 행동이었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홍진경의 대사였다. 사랑은 그렇게, 훅 들어오는 거라는 것.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그녀는 말한다. 당신의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느낀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져버렸습니다. 그녀를 행복하게 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불행에 빠뜨렸는지, 사랑에 빠지지 않은 모든 제3자들의 판단을 거부하는 이 아름다운 사랑은 이렇게, 이렇게 쉽게, 이렇게 짧은 순간에 시작되었다.

당신은 놀란 듯이 바라보았지요. 전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나를 알아봐, 제발 나를 알아보라고. 저의 눈빛은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친절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다시 한 번 키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지요. 전 황급히 문 쪽으로 갔습니다. (144쪽)

이 소설 전체를 다섯 음절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나를 알아봐.

이 소설 전체를 아홉 음절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제발 나를 알아보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난 잘 모르겠다. 자신이 귀여워한 예쁜 아이를, 자신이 유혹한 순결한 처녀를, 갖고 싶어 안달 났던 화려한 창부를, 어쩌면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나.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열 셋, 어린 소녀가 열 여덟의 어여쁜 숙녀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어린 소녀가 희망 없고 헌신적이며, 너무나 굴종적이고 애타게 기다리는 열정적 사랑(101쪽)으로 그를 사랑했다 할찌라도 한창의 나이, 청년의 그는 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열 세 살의 여자아이가 열 여덟살의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래, 못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런 그를 이해한다.

하지만, 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그녀를 잊어버린다. 그녀를 잊어버리고 그녀를 찾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은 그녀가 말한다.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모습 그대로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늘 그래왔고 지금도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123쪽)

열 여덟 어여쁜 숙녀에게서 열 세 살 소녀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한 그를 이해한다. 하지만, 열 여덟의 숙녀가 스물 아홉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뜨겁게 사랑하지만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신은 바깥 출입문에 못 미쳐, 외투 보관소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나오자 당신의 눈이 밝게 빛났습니다. 미소 지으며 서둘러 저를 맞아주셨지요. 그때 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예전의 그 아이, 그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당신은 저를 낯모르는, 처음 보는 여인으로 다시금 붙잡은 셈이지요. (138쪽)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 보는 여인으로서 자신을 붙잡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절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미 그의 노예 다름 아닌 그녀는, 그녀를 청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럼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요.”

“혹시 지금도 가능할까요?”

“네, 가시지요.” (139쪽)

끝까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 자신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자신을 거리의 여자로 대하는 남자, 지난 밤 사랑을 고액지폐로 계산하려는 남자. 평생을 바쳐 사랑한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참담한 그녀는 서둘러 방을 나선다. 나는, 어떻게, 그녀가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대로 그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소리치지 않고, 그의 뺨을 때리지 않고, 어떻게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그 방을 나선다.

서둘러 나가다가 현관 앞에서 하마터면 당신의 하인 요한과 부딪칠 뻔했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더니 제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어요. 그 일 초 동안의 짧은 순간에 - 당신 듣고 계신가요 - 제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나이 드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눈길에 움찔하는 광채가 비쳤습니다. 그 짧은 순간 - 당신 듣고 계신가요 - 그 일 초의 순간에 그가 저를 알아보았던 겁니다.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저를 본 적이 없는 그분이 말입니다. 저는 하마터면 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출 뻔했습니다. 전 당신이 저에게 채찍처럼 휘두른 그 지폐를 얼른 머프에서 빼내어 그분께 슬쩍 쥐어주었습니다. 그는 놀라 떨면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저에 대해, 어쩌면 당신이 평생 해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저를 떠받들고, 모두가 저에게 잘해주었는데 ...... 오로지 당신, 오직 당신만이 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44-5쪽)

나는, 이런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잊어버린 그를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한결 같이 지켜가는 이런 사랑을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랑은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내 결혼식에 꼭 와라, 니 결혼식에 꼭 갈게, 그래, 꼭 와, 어차피 넌, 내 결혼식에 오게 될 테니까. 시답잖은 농담. 연애편지를 손에 들고 무조건 찾아갔던 그 애가 다닌다는 교회. 불 꺼진 교회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천 번도 더 돌려보았을 그 애의 전화번호. 백번은 들었음직한 그 애의 ‘여보세요’. 그 애를 생각하며 지켜본 수많은 저녁 놀. 그 애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설레었던 00서적에서의 몇 시간. 베이지색 바지에 청자켓. 여기저기서 보이는 그 애. 그 애의 모습.

나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사랑이라고, 사랑이었다고, 말할 만한 사건이, 추억이 없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숨쉬고 있었던 그 모든 시간을 백번, 천 번 다시 되새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한 그녀가 이해된다. 그리고,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잊어버린 왜 그를 사랑했는지, 왜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 행복하세요.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킨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그녀의 삶과 함께 말이다.

끝까지 그녀의 순수한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그만 남았다.

낯선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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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4-12-1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에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샀는데, 이 책은 잊어버리고 못 찾았어요. 슈테판 츠바이크도 찾아보면 책이 많겠죠.
단발머리님이 쓰신 정성가득한 리뷰를 읽고나면, 저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구요.

단발머리 2014-12-16 08:59   좋아요 0 | URL
슈테판 츠바이크 책도 사실, 다 찾아 읽고 싶은데, 여기 저기 출몰하는 책들이 많네요^^
그래도 이 짧은 단편은 읽으시기를 추천드려요. 제 리뷰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감동을....
예약해드립니다 :)

icaru 2014-12-1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애를 생각하며 지켜본 수많은 저녁놀까지 와서,, 넙죽 업드려요~ 울대가 멍멍... 어깨가 시큰~
생각해보니,, 저도 있어요...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보낸 장소, ㅎ 근데,,누구였을까 그이는요~ 단발머리님의 그... ㅎ

앗 근데,, 체스이야기, 부분에서 시선을 확,, ㅋ 체홉의 단편에도 있다던데,, 츠바이크의 작품에도 있었나봅니다... 체스..
저는 츠바이크 제트로 시작하는 작가 중에 유일하네 싶네요~ ㅎ 또 누가...있더라요?

icaru 2014-12-16 15:11   좋아요 0 | URL
체홉 단편에 있는 게 아니라, 츠바이크만 있네요 ㅎㅎ 또 제가 잘못알고 있던 정보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ㅋㅋ

단발머리 2014-12-17 09:22   좋아요 0 | URL
잘 살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전해오는 소식에는.... 잘 됐어요. 잘 됐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icaru님은 아는 게 많으셔서 헷갈리시기도 하네요. 저는 체홉 단편은 아직 시작도 안 해봐서요.
츠바이크를 처음 읽고 흥분했던 시간이 떠오르네요.
아직 많이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참, 세상에 좋은 작가가 많아요. 그쵸?

icaru 2014-12-17 09:34   좋아요 0 | URL
아는 게 많긴요,, 단발머리 님이 읽고 풀어놓으신 유려한 글들 중에서 제가 알법한 것들,, 빙산의 일각만 아주 그냥 열정적으로 아는 척 하고 있으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죠~~
저는 이 글, 책은 논외로 하더라도,, 단발머리 님 글쓴 의도와는 무관할지 모르지만, 몹시 짜르르 한게.. 가을도 다 가고,, 겨울의 맹위를 떨치는 이 마당에, 마치 가을을 타는 것처럼 그리운 사람들도 호명하고 싶고,, 마음이 그냥그냥 .. 막 그냥.. 그러하였었네요.. ㅎ;;

단발머리 2014-12-17 09:38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예요.
저는 무식함을 양식으로 유머를 날릴 뿐입니다. ㅎㅎ
체홉의 단편도 읽고는 싶어요.
사실, 저 <체스이야기>도 아직 안 읽었다는... 단편도 일단 하나만 읽고, 리뷰씁니다.^^

가을도 다 가고, 겨울이 매섭네요. 오늘 아롱이 알림장을 다 써서 아침 일찍 문방구 다녀왔는데, 완전 춥더라구요. 아롱이에게 말했죠. 추운데, 고생해라~~
그리운 사람, 여기 알라딘서재에서 호명하시면 안 될까요? icaru님 이야기 듣고 싶어용~~~

2014-12-17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8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4-12-17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읽더라도요 ^^ 그렇게 하는 게 멋지다는 생각입니다~~ㅎ

단발머리 2014-12-18 09:11   좋아요 0 | URL
헤헤... 너무 안 읽고 살았던 저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예요.

- 갈 길이 멀어서 조금 숨찬 단발머리가

2014-12-24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6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반짝 2015-03-2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네요^^ 저도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다가 그 안에서 츠바이크에 대해 나오기에 이 책을꺼내서 읽었답니다^^

단발머리 2015-03-23 09: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안녕반짝님~~~
오늘 리뷰책에도 `츠바이크` 이야기가 많아서요, 저도 츠바이크 책 여러 권 찾아 읽고 싶어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로이스 로리 4부작 세트 - 전4권 - 기억 전달자 + 파랑 채집가 + 메신저 + 태양의 아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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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이스 로리는 현대문학의 고전이 될 만합니다.
작품성과 재미,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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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4-12-0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권이나 있군요. 전 기억전달자만 아네요^^; 그것도 제목만^^;;

단발머리 2014-12-02 13:00   좋아요 0 | URL
저도 [기억전달자]만 읽었는데요. 딸롱이는 이 시리즈를 그렇게나 좋아해요. 사실 전에도 100자평 쓴 거 같은데, 올해의 책 쓰다가 적립금 추첨 있다길래 몇 자 썼더니 여기에 등록되네요.
놀라운 건 `품절`이라네요. 역시나~~입니다^^

서니데이 2014-12-0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 이란 말인가요. 아쉽네요. 미리 샀어야하는데. 아직 못 읽어봐서요.

단발머리 2014-12-03 08:40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곧 다시 나올것 같아요.
제가 알아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구요.
제 생각엔, 이 책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요. <기억전달자> 읽고 나서 이어서 읽는 사람들도 많구요.
다시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엄마니까 뚝딱, 내 아이의 아침밥
다소마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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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은 꼭 먹어야 하지요. 뚝딱 만들어 먹이려는데, 항상 뜻대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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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6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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