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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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 결국 연민을 계속 품고 있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계속 불행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203쪽)

 

안톤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 성으로의 방문이 즐거웠다.

난생처음 나보다 계급이 높은 상관이 계급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를 대해주었다. 그는 내게 부대 생활에 만족하는지, 진급 가능성은 어떤지 등을 물어보았고, 빈에 오거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해주었다. (63쪽)

 

일개 장교에 불과한 자신이 상류층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편안하게 어울리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진귀한 음식들을 대접받았을 때, 호프밀러는 행복했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감탄을 자아냈고,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상상할 수도 없는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뿌듯해했다. (64쪽)

그 뿐이 아니다.

매일 오후 나는 여러 마리의 암탉을 거느린 수탉처럼 두 여자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밝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몸이 노곤노곤해지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나는 난생처음 젊은 여인들과 있으면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나의 모습을 즐겼다. (72쪽) 

 

케케스팔바 성에 속해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수염이 덥수룩한 거친 남자 동료들 대신에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에게 케케스팔바 성은 황홀경이다. 지옥 아닌 천국, 지상 아닌 낙원, 케케스팔바 성과 부대, 호프밀러는 그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겹쳐서 살고 있었다.

케케스팔바는 마치 어린아이나 여자를 쓰다듬듯이 아주 부드럽고 수줍게 내 팔을 어루만졌다. 이 수줍은 손길에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애정과 감사가 담겨 있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깊은 행복감과 절망감이 또 다시 나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67쪽)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지구상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확신(68쪽), 희망 없는 에디트에게 자신이 환희와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에 호프밀러는 계속해서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한다.

하지만, 술집에서 만난 친구들의 조롱 때문에 호프밀러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은 자기를 그저 부자들의 환심이나 사고 저녁식사비를 아끼고 선물이나 받을 요량으로 그 화려한 저택에 드나들고 있다(85쪽)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호프밀러는 자신의 선한 의도가 그렇게 이해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그는 아무런 연락 없이 매일 방문하던 케케스팔바 성에 가지 않는다.

케케스팔바 성은, 케케스팔바 성 전체는,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결국에는 그를 찾는 사람이 그가 죽치고 있던 카페 근처까지 오게 된다. 무심한듯 하지만 사뭇 진지한 초대 때문에 호프밀러는 다음날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다음날, 어설프게 핑계거리를 찾던 호프밀러의 거짓말은 ‘연민으로서는 찾아오지 말라’는 에디트의 솔직함 앞에서 떨어진 낙엽처럼 초라하게 굴러다닌다.

소설 첫 장에서, 호프밀러는 말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19쪽)

 

영 모르겠다니, 내가 알려준다. 호프밀러의 단순한 실수가 죄로 변용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 이 지점부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연민으로써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는 에디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실수다. 자신에게 희생하지 말라는 에디트의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았던 것, 그것이 그의 잘못이다.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는 에디트의 말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그것이 그의 죄다. 바로 이 지점부터, 호프밀러는 ‘연민’의 감정을 ‘우정’으로 위장한 채,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한다. 그와의 모든 시간을 한없이 소중히 여기는 에디트의 본심을 까마득히 모른 채 말이다.

케케스팔바 성에서 한 발짝 발을 빼려 했던 호프밀러는 오히려 콘도어 박사에게 에디트의 병에 대한 진척 여부를 물어봐 주기로 케케스팔바씨와 약속한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케케스팔바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접근해간다. 케케스팔바씨의 딸이자 케케스팔바성의 진정한 주인, 불쌍한 소녀 에디트의 삶 속으로 그렇게 걸어 들어간다.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상대방이 연민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게 됐을 때,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호프밀러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쾌유를 기원하고, 회복 후 그녀 앞에 펼쳐질 밝은 미래를 기약한다. 그는 그녀를 돕기 원했다. 그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그녀를 격려해 주고,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그녀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와 체스게임을 두고, 그리고 그녀와 식사를 했다.

그는 그것이 그녀를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에디트, 아름다운 소녀이자 성숙한 여인, 불구의 몸이나 날개처럼 가벼운 사람.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신비롭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민은, 호기심은, 그리고 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다.

호프밀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에는 아직 나약한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직면하는 에디트와 비교하면 그의 나약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결정을 번복하고, 이별을 연기하고, 사람들의 눈물 어린 부탁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의 이런 우유부단함은 에디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나약한 호프밀러의 연민, 그의 연민에 사랑을 기대하는 에디트, 그런 에디트에 종속되어 있는 케케스팔바성. 아슬아슬하다.

다만, 호프밀러를 위해 변명 한 마디를 하자면, 이렇다.

호프밀러는 여러 번 케케스팔바 성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에디트의 아버지, 에디트의 주치의, 에디트의 사촌언니, 그리고 케케스팔바 성의 하인들은 그에게 간청하고 또 간청한다.

“제발 이 곳에 와 주세요.”

“내일 아침 일찍 와 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꼭 와 주세요.”

그들에게 에디트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그 자체’이다.

그녀는 불행하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아무도 부럽지 않은 환경속에서 자랐지만, 에디트는 불행하다. 앞으로도 살날이 창창한 그녀는 족쇄같은 기계에 매여 있다. 언제 회복될지 모르며, 효능을 예상할 수 없는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 친구를 만날 수도, 산책할 수도, 걸을 수도, 달릴 수도 없다.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녀는 불쌍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 그 아이가 얼마나 예민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모든 것을 우리보다 훨씬 강하게 느낀답니다. 지금도 자신이 자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자제를 하겠습니까? (56쪽)

 

에디트는 불행하고, 불행한 그 소녀는 스스로를 자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종 자제력을 잃을 수도 있고, 그리고 자신이 자제력을 잃은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많이 불행하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를 자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의 굵은 글씨체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작가가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케케스팔바씨가 말한다.

“... 어떻게 자제를 하겠습니까?“

불쌍한 딸을 둔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사촌언니의 애달픈 마음이, 케케스팔바 성 하인들의 충심이 한데 모아져서, 결국에는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든 욕망을 끝까지 관철시키고야 마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졸도해버리고 마는, 그런 에디트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주, 안톤 호프밀러 소위를 위한 한 가지 변명이다.

결국에는 케케스팔바 성 전체를 파국으로 이끌었지만, 그래도 한 때는, 그 성에서 가장 활기찬 웃음소리를 만들어냈던 남주 안톤 호프밀러를 위한 내 작은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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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4-02-05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현실에서도 이런 적나라한 자기고백적 문장을 술술 구사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은 자기검열(주인공 시점이든, 작가적 시점이든)이 덜할 것 같은 느낌도 드네요. ~ 일단 초조한 마음, 보관함에 넣습니다. 단발님 덕이지요.

볼 때마다 깊이 읽고, 높이 읽으시는 단발님...
열심히 보고 배울게요. 오늘 하루도 상큼하게 출발하시어요.^^*

단발머리 2014-02-05 10:35   좋아요 1 | URL
팜므느와르님,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저는 읽고 쓰는게 아직 서툴러서 솔직히 이렇게 리뷰 올리는게 아직 부끄러워요.
그래도 팜님처럼 응원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얼마나 신나는지 모르겠어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겠습니다.
한 수 말고, 다섯 수, 열 수 가르쳐주세요~~~~~~~~~~~~~~~~~~~


다락방 2014-02-05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엄청나게 좋지요, 단발머리님? 진짜 최고에요 최고!!
구구절절 단발머리님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단발머리 2014-02-05 10:4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다락방님. 진짜 최고라는 말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소재도 특별하지만, 츠바이크가 사건과 심리를 엮어서 전개하는 방식도 너무 좋구요.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가더라구요.

다락방님께서는 [연민]으로 읽으셨다고 하셨죠? 저는 도서관에서 요 책을 만나 '한 번 읽어볼까?'하고 마믐 편하게 시작했다가, 단번에 읽었다는.... ㅋㅎ 요 위에 페이퍼에는 못 썼는데, 번역도 아주 유려하고요.

이 나이에 츠바이크
조금 늦은감 있지만,
이제라도 츠바이크
읽으니 다행이다...

착한시경 2014-02-05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넘 멋진 글~ 저도 이 책 지난달에 구입해 놓고 아직 표지만 구경 중인데~ 단발머리님 글을 읽고 나니 맘이 급해져요~ 빨리 읽고 싶네요^^

단발머리 2014-02-06 09:07   좋아요 1 | URL
착한시경님, 벌써 구입하셨군요. 저는 책을 집어들고 이렇게 빨리 읽게 될 줄 몰랐어요. 폭풍처럼 몰아치는~~ ㅋㅎㅎ 저는 책을 빨리 못 읽거든요. 근데 빨리,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오늘 서울은 별로 안 춥네요. 착한시경님, 즐건 하루 되셔요~~
 
에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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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다시는, 이 책을 읽고, 저 책을 읽어야겠다는 계획이나, 이 책 다음에는 어떤 시리즈를 읽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이제서야 알게 됐는데, 나는 작가 한 명의 책을 연달아 읽지 못 한다. 지루해서가 아니다. 나는 세계 문학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고전, 그 중에서도 소설 분야를 주로 읽고 있는데, 어디 지루할 틈이 있겠나. 졸릴 짬이 있겠나. 

이번에도 그렇다. 밀란쿤데라의 [농담]을 다 읽고, 그의 다른 책 [불멸]을 집어들었으나, 들었으나, 아, 첫장을 넘기지 못 했다. 

나는, 두려운 것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연거퍼 읽었을 때, 혹 줄거리가, 주인공의 이름이, 작품의 배경이 서로 서로 섞이는 것은 아닌가. 혹자는 말한다. 그럼 어때. 어떻게 세세히 다 기억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좀 심하다. 나는야 읽고 나서 돌아서면 모두 잊어버리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서, 포스트잇 옮기는 걸 까먹어서 읽은 부분을 다시 읽는 일이 일상 다반사다. 그것도 30페이지 넘게 말이다. 그러니, 한 작가의 작품을 이어서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에 읽은 소설의 남자주인공이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의 여주인공과 키스할 테세다. 이건 아니다 싶다. 

그래서, 연작이 아닌 이상 한 작가의 책을 연거퍼 읽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일단 무기한 보루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제인 오스틴, [에마]다. 

자랑삼을 만한 미모나 총기도 없었다. 젊은 시절은 별다른 일 없이 스러져 갔고, 중년기는 노쇠해 가는 모친을 보살피며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애면글면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바쳐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한 여인이었고, 그 이름을 거론할 때면 누구나 선의를 함께 표하는 그런 여성이었다... 소박하고 쾌활한 성격,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귀감으로 여겨졌고 그녀 자신에게는 지복의 원천이었다. 그녀는 자잘한 화제를 끝없이 펼쳐 놓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어서, 잡담과 무해한 뒷공론을 즐기는 우드하우스 씨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33쪽) 

 

요즈음은 많이 자중하는 편이지만, 사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져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는, '오늘도 조금만 말하자' 혼자 다짐을 하고서는 집을 나선다. 이 책에는 나보다 더 말하기 좋아하는 분이 나오는데, 국보급 이야기꾼 베이츠양이다. 베이츠양에 대한 묘사에서 나는, 제인 오스틴을 본다. 

자랑삼을 만한 미모도 지혜도 재산도 없지만, 소박하고 쾌활한 성격에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녀. 자잘한 화제를 끝없이 펼쳐 놓는 대단한 이야기꾼. 제인 오스틴, 그녀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사실 조금 암울할 수도 있겠다. 미모도 지혜도 재산도 없는 노쳐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적은 수입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처지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행복한 여인'이라고 말한다. 지금 자신의 외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신은 만족한다고, 감사한다고, 그리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베이츠양이 그런 것처럼, 자신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만족한다고, 감사하다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제인 오스틴이 예전보다 좀 더 좋아졌다.  

"해리엇,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규칙은 여자가 남자를 받아들일지 말지 잘 모르겠다면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는 거야. '좋다'라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있다면, 곧바로 '아니요'라고 말해야지. 마음이 반만 기운 채 긴가민가 하는 감정 상태로 결혼에 뛰어드는 것은 안전하지가 못하지. (79쪽)

 

 

이와 비슷하면서도 사실 다른 경우의 이야기를 [강신주의 다상담]에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강신주의 다상담을 '들은' 이유는 강연이 책으로 묶여 나올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강연은 두 번, 세 번까지 듣기도 했는데, 들을 때마다 느꼈던 건, 강신주님 답변이 정말 '돌직구'라는 것, 그리고 돌직구 조언 사이사이 그의 진심어린 애정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특별게스트로 김어준님이 나왔을 때였던 것 같다. 이혼을 고민하는 상담이었는데, 강신주님과 김어준님 모두 이혼을 '독려'했다. '이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된다면, 일단은 '이혼을 하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한 번 '이혼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면,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작은 사건 사고에도 그 생각이 이어질 수 있다는 거다. 이혼하고, 한 번에 훅 털어버리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라는 거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혼의 파장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한 번에 밀어붙이기엔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결혼의 3.5 내지 5.5배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혼'을 '생각'할 만한 단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경우이지만, 똑같은 측면에서 에마의 말은 옳다. 어떤 남자를 받아들일지 말지 잘 모르겠다면,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 사귈지 말지 잘 모르겠다면 사귀지 않는편이 낫고, 결혼할지 말지 잘 모르겠다면, 결혼하지 않는게 낫다. 그녀의 말이 옳다. 긴가민가 하는 감정 상태로 결혼에 뛰어드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너 아니면 안 돼, 너 아니면 난 죽어, 해서 결혼해도, 그 다음엔 너 때문에 내가 죽겠다,가 절로 나오는 법이니까. (마지막 문장은 생활 속에서 얻어진 문장이 아님을 '굳이' 밝혀둔다.)

그는 대단히 잘생긴 청년이었다. 키며 태도며 말씨며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고, 표정은 부친을 닮아 활기와 박력이 넘쳤다. 그는 분별 있고 영민해 보였다. ... 그녀는 그가 자기와 친해지려는 생각으로 왔으며 곧 서로 친해질 수 밖에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74쪽)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는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조연까지도 인물이 훤한 것이 특징인가 보다. 프랭크 처칠은 남자주인공급으로, 잘 생긴 외모를 자랑하며 짠~ 하고 등장하고 있다. 그는 대단히 잘생긴 청년이다. 본인 의사와 상관 없이 여러명을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역시 '잘생긴'은 장동건-원빈 태극기 형제가 제격이다. 장동건은 이미 결혼한 관계로, 원빈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나는 굳이 '잘생긴'을 '매력적인'으로 해석하는 바, 프랭크 처칠 등장시에는 별그대 외계인 도민준 김수현을 생각하면서 읽기로 한다.   

 

 

 

 

 

 

나는 대개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을 읽어나간다. [에마]가 아주 유명한 책이기는 하지만, 난 대략의 줄거리도 모른 채였다.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그래서 에마가 프랭크하고도 이어질 수 없게 되나 싶었을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 소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에마는, 에마는 어떻게 되는거야? 누구랑 해피엔딩인 거야? 제인 오스틴 소설의 마무리는 항상 '결혼'인데, 그래서, 에마는 누구랑 결혼하는 거야?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책 뒤쪽을 기웃거렸다. 이 쪽, 저 쪽 페이지를 넘겨가던 중에, 나는 알게 됐다. 에마는 그 사람이랑 결혼을 하게 된 거다. 아하... 

나는 그 사람이 처음 나왔을 떄부터 둘 사이의 대화가 참 건전하고, 진지하고, 교육적이며, 서로에게, 특히 에마에게 유익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소개됐을 때에 알게 된 그의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그 사람을 '신랑 후보군'에서 제외한 상태였다. 그런데, 에마의 짝은, 소울메이트는, 그녀의 결혼상대는 바로 그 사람이었던 거다. 

나는 놀랐다. 제인 오스틴이 그 사람을 일부러 숨겨놓은 것도 아니고, 그녀가 특별한 소설적 기법을 통해 그 사람의 중요성을 감추려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끝까지, 소설을 반 이상이나 읽어갈 때까지, 에마의 배필을 찾아내지 못한 거다. 에마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채지 못한 거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나같은 사람, 꼭 나같은 사람이 여기 하나 있다. 

에마는 즉각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몇 분간 속으로 생각을 되씹으며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몇 분으로 충분했다. 그녀와 같은 정신은 일단 의혹을 품으면 급속한 진전을 보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모든 진실을 문득 감지하고, 인정하고, 확인했다.... 한 가지 생각이 쏜살같이 에마의 뇌리를 스쳤으니, N씨가 자기 말고 누구하고도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591쪽) 

 

자기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해리엇이 그 사람을 연모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음을 알았을 때, 에마는 비로소 알게 된 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란 걸 말이다.  

참아 줄 수 없는 허영심으로 그녀는 모든 사람의 숨겨진 감정을 자기가 안다고 믿고, 용서할 수 없는 교만으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조정하겠노라고 나댔다. (598쪽) 

현명한 중매자를 자처한 에마, 정작 자기의 앞가림은 하지 못한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또는 읽기를 결정하면서 기대했던 것, 바랬던 것들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1. 단편소설이나 시보다 장편소설에 대해 부가되기 마련인 사회적 목적, 즉 소설이 개혁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일말의 주장에 대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어떻게 답하는가?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 21 제인 오스틴, [에마], 216쪽) 

 

 


2. 작가로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이 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작은 거실 한쪽에 놓인 일인용 책상에 앉아 소설들을 써 나갈 때, 글을 쓰는 여자 제인 오스틴의 사회적, 역사적 위치는 어떠한가? (작품 해설, 704쪽) 

3.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에마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한편 가장 비호감인 인물에게조차 공감을 표시하는 일, 즉 셰익스피어로부터 배운 것이 분명한 이 어려운 작업을, 제인 오스틴은 어쩌면 이리 유려하게 해낼 수 있었는가?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 21 제인 오스틴, [엠마], 219쪽)   

4. [에마]의 배경이 되는 영국 귀족 사회에서, 결혼이 가능한 또는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가문 사이, 사회적 지위간의 층위는 얼마나 다양한가? 

그런데, 나는 하나도, 단 하나도 대답을 찾지 못 했다. 

내가 알아냈던 건, 에마가 자신이 누군인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끝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마처럼 소설 속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소설 바깥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나도, 에마가 정말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에마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책 뒤쪽을 펴보기 전까지는 정말, 까마득히 몰랐다는 거다. 

고전의 위대한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내가 이 에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진짜 남자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채 간다고 해서야 그 사람이 자기 사람임을 눈치채는, 책 뒤쪽을 펼쳐봐야 내용을 알게 되는,   

내가 바로 에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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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4-01-2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재밌어요~ 내가바로에마다 ㅎ 이런 맛과 멋에 태그다나 보다~
써머셋 모옴이 쓴, 작가 비평전이라고 해야 하나 대여섯명의 작가에 대한 평전을 썼는데,,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이라는 책을 보면, 제인 오스틴이 있는데 ㅋㅋ~ 참 맛나게 읽은 책 중 하나죠... 책 비주얼은 두껍고 글밥 많은 게 하품나게 생겼는데요~ 혹시 읽어보셨을 수도 ㅎㅎ

온다 리쿠의 흑과 다의 환상을 보면, 주인공이 네명인데, 그중에 한명 세스코라는 여성이 있어요~
어릴 떄는 소심했고, 친구도 없었는데,,, '친구'를 바라지 않으면서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세쓰코에게, 심히 반했었죠~

"친구, 우리는 이 말에 얼마나 큰 공포를 느끼고 살아왔을까. 이 악의 없고 진부한 말을 중얼거릴 때, 누구나 가슴 속에 복잡하고 씁쓸한 감정을 품을 것이다."라고 내레이션하는 세스코...

눈썹을 찡긋찡긋하면서 능란하게 대화를 뒷받침하는 세쓰코의 쾌활함....ㅋㅋ ㅇ 이여성도 작중 수다대마왕인데~ ㅋㅋ

단발머리 님 이야기 듣고 있으니까 생각나서뤼..

단발머리 2014-01-24 09:04   좋아요 0 | URL
icaru님, 말씀하신 서머셋 모음이 썼다고 하는 책은 처음 들어봤어요. 외국 쪽에서는 제인 오스틴에 대한 연구가 많은것 같아요. 갑자기 영화 <제인 오스틴 북 클럽>도 생각나고요. 아직 못 봤거든요.

서머셋 모음이 썼다고 하면, 웬지 믿을만 하겠는데요. 사실, 제인 오스틴 작품, 읽은게 얼마 안되네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몇 개 안 되는데... 참, 그렇죠?

수다대마왕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들어도 재미있군요. 멀리갈 것도 없이 제가 '수다대여왕'인 관계로다가... ㅋㅎㅎㅎㅎㅎㅎㅎㅎ
 
윔피 키드 8 - 절친의 법칙 윔피 키드 시리즈
제프 키니 글.그림, 양진성 옮김 / 푸른날개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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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피키드는 전 세계 초딩들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이 책을 사면 예쁜 머그컵과 알사탕 300개를 줍니다. 감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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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31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미 뜨거운 것들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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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그리운 나무]를 4권 샀다. 처음에는 친구꺼 하나, 내꺼 하나 하면서 샀다. 시집을 손에 든 친구는 "내 친구 중에 아직도 시집 읽는 애가 있구나."하며 감동받은 얼굴의 진수를 보여줬다. 나는 내 꺼 하려고 했던 시집을 다른 친구에게 선물했다. "선물 좋~지"하며 웃으며 빠이빠이하던 친구는 시집을 받고는, 시집 때문인지, 내 메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동의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친구들의 감동과 감탄에 탄력받은 나는 시집을 두 권 더 주문해 독서모임하는 언니들과의 연말모임에 들고 나갔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J언니는 "웬, 선물?"하면서 시집을 받아들었다. 최인훈의 [광장]을 석사 논문으로 썼던 H언니에게는 보충 설명도 했다. "언니, 국문과에게 시집을 선물한다는 게... 예전꺼는 언니가 다 읽으셨을거 같아, 최신간으로 준비했어요." 

다음날 오후, 같이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국문과 H언니가 말했다. 
"아, 자기야, 어제 그 시집 참 좋더라." 
"네. (전날 저녁 늦게 들어갔는데...) 읽어보셨어요?" 
"응, 오늘 아침에 다 읽었어." 
"다 읽었다고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J언니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응, 다 읽었어." 

일순간 우담바라처럼 찾아오는 놀라운 깨우침 하나. 아, 국문과는 시를 빨리 읽는구나. 시를, 빨리 읽어도 되는 거구나. 

그래, 이전에 팟캐스트 빨간 책방에서도 허은실 작가이자 시인이 나왔는데, 허시인도 시를 낭독할 때, 엄청 빠른 속도로 하더라. 그래서, 이동진씨랑 김중혁 작가가 "하아, 우리는 보통 시를 천천히 읽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시인들은 시를 무척 빠르게 읽네요."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지난 3월에 구매한 함민복 시인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을 여지껏 읽고 있는데, 아껴서, 아껴서 읽고 있는데, 그래, 시도 빨리 읽는 거였구나.  

나는 왜 시를 천천히 읽었을까. 생각해보니, 이거였다. 나는 시를 읽을 때 성경책 읽듯 했다. 성경책을 읽을 때, 대부분의 경우 정독을 한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주의해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는다. 나는 시를 읽을 때도 그랬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읽어가다가 크게 감동받은 시가 있을 때는, 그 날의 시읽기를 중단했다. 시의 감동을 오롯이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시집 한 권을 읽는데, 석 달이 걸리기도 하고, 넉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렇게 읽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단숨에, 아니다, 단숨에는 아니고, 두 번에 나눠 이 시집을 읽었다. 

옛날 남자친구 

나와 놀고 싶어서, 
너는 나의 도시에 왔다
말벗이 필요해서
너의 여자가 아닌 내게 
(……)

사랑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꽃을 받았다 
고마워요. 
향기를 맡는 척, 고개를 숙였지만
내게는 너무 무거운 꽃바구니.
7년의 세월만큼이나 어색한 
너의 선물은 내게 거추장스러운 짐. 
내게는 너를 담을 유리병이 없어 

너와 충분히 놀아주지 못하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려진 국화들.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배우처럼 
이름값도 못하고, 꽃값도 못하고 
나를 유혹하지도 못하고 
노랑 분홍 자주, 요란한 색을 뽐내지만 
너는 곧 죽을 운명. 
(……)

나와 놀고 싶어서, 
나를 갖고 싶어서, 너는 꽃을 샀다 
내 마음을 사려고,
내 마음을 사지 못해, 너는 비싼 꽃들을 샀다 
그런데 나는 쓸쓸한 국화 향기가 싫거든
하얀 안개꽃에 둘러싸인 국화는 더더욱 싫거든 
초상집 냄새가 나서……
(……)

나와 놀고 싶어 내가 사는 도시로 찾아와 비싼 꽃다발을 내미는 너. 나는 꽃을 받는다. 사랑이 아닌 줄 알면서도 꽃을 받는다. 그리고 말한다. 고마워요. 너가 내미는 꽃바구니는 내게 무겁다. 내게는 너를 담을 유리병이 없다. 너의 꽃바구니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뿐이다.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운다.  

나는 시를 빠르게 읽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빠르게 그녀의 시집을 읽어나간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나를 외로운 공주로 만들어, 나에 대한 자신의 열등
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집과 아내와 아이가 있는 그의 고독
이, 집도 남편도 아이도 없는 나의 고독보다 무섭다는 사실
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나를 감성만 살아 있는 여류시인으로 만들어, 창
조적인 지성에 압도당한 자신들의 무력감을 숨겼다. 여자보
다 강하고 여자보다 똑똑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조선
의 선비들은 상상력이 빈곤해,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못한
다. 뿌리가 자유롭지 못한 나무가 가지를 뻗고 풍성한 열매
를 맺을 것인가. 유행을 따르는 허접스런 문자유희로 넘치
는 지식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말도 어렵게 비틀고
꼬아야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시인을 외로운 공주로 만들어, 자신의 허약한 뿌리를, 열매 없는 가지를 숨기려는 조선의 선비들. 같은 말도 어렵게 비틀고 꼬아서 지식인 대접을 받으려 하는 상상력이 부족한 지식인들. 무력감을 숨기기 위한 그들의 같잖은 노력과 그들의 행태를 째려보고 있는 시인. 

나는 계속해서 빠르게 시를 읽어나간다.   

탄식 

아무에게도 
주지 않은 육체가 
거울 속에서 시들고
하늘로 날려버린 여름, 여름들……

창밖의 비를 맞으며 
청춘도 중년도 흘려보내고

나를 차지하려고 
그렇게들 덤비더니
폭풍우 속을, 
나 혼자 가는구나 

아, 나를 차지하려고 그렇게들 덤비더니, 지금, 누군가의 손길이, 어깨가, 가슴이 필요한 지금, 폭풍우 속을 걸어가는 지금, 지금은 나 혼자구나. 나 혼자 가는구나. 

책장을 빨리 넘긴다. 벌써 마지막 시다. 

서울의 울란바토르     

(……) 

짝이 맞는 옷장을 사지 않고
반듯한 책상도 없이 
에어컨도 김치냉장고도 없이 
차도 없이 살았다 그냥. 

여기는 대한민국.
그가 들어가는 시멘트 벽의 크기로, 
그가 굴리는 바퀴의 이름으로 평가받는 나라. 

정착해야, 소유하고 축적하고
머물러야, 사랑하고 인정받는데 

(……)  

나를 접으면, 
아주 가벼워질 거야  

나를 접으면 가벼워질 거야. 마지막 시의 마지막 연이다. 시집 한 권을 다 읽었다. 다음으로는 발문. 

나는 그때 그녀를 마주하며 시원스레 큰 키를 감싸고 있는 외투가 아주 오래된 것이고, 그럼에도 아직 화사한 맵시를 잃지 않고 있으며, 그녀가 외로움과 의무와 싸우고 있지만 아직 혼절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자기 삶과 문학을 지켜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발문,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큰 키에 오래된 외투를 걸쳤음에도 화사한 맵시를 잃지 않은 그녀. 자신을 보호해줄 아무것도, 누구도 가지지 못한 그녀. 먼 도시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옛 남자친구에게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그녀. 쓰레기통에 꽃을 던져버리고는 울어 버리는 그녀. 인터뷰를 마치고 시를 쓰는 그녀. 늙으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녀. 옷장도, 책상도, 김치 냉장고도, 자동차도 없이 사는 그녀. 기댈 것이 없는 그녀. 나를 접어 가벼워지는 삶을 살겠다는 그녀. 고집 센 그녀. 

그녀는 어려운 말로 자신을 치장하는 지식인의 열매 없는 얇은 가지를 보여주고, 이제는 자기 것이 아닌 지나온 사랑에 손 내미는 사람의 이기심을 슬퍼하고, 청춘과 중년을 흘러보내는 자신의 육체를 아쉬워하며, 그가 굴리는 바퀴의 이름으로 평가받는 나라, 대한민국의 위선을 꼬집는다. 그리고, 나는 부끄러웠다. 

그녀는, 내게, '너는 속물이야.'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그녀의 시를 다 읽고나자 나는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됐다.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두 가지에서다. 한 가지는 내가 지정의, 인지, 감정, 의지의 측면에서 진짜 '속물'인 거였고, 또 하나는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속물'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는 거였다. 두 가지 면에서 나는 '속물'이다. 

두어달 전이다. 

아주 오랜만에 대학교 친구, 후배들을 만났다. 후배들도 한 두살 어리니까, 사실 후배라 할 것도 없이 그냥, 친구들이었다. 이 모임의 친구들은 대학교 4학년 때 알게 됐다. 학교를 오고가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 친구들이 아니었고, 특별한 목적에 의해서,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만나고, 맡은 일을 같이 하게 된 친구들이었다. 소소하게 추억을 쌓을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모두들 (나처럼) 순하고, 착하고, 바르고 (헤헤), 아무튼 그런 친구들이다. 전국 각지도 부족해 미국에까지 흩어져 살고 있어 자주는 만나지 못하고, 그 날도 미국에 사는 친구를 빼고 국내파들만 만나 잠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커피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찰나,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가방, 구두' 이런거를 보면 Y가 생각나고, '책'을 보면 J(나)가 생각나." 이러는 거였다. 가장 흐뭇하고 찐한 웃음은 내 꺼였지만, 아무튼 다들 까르르 웃었다.
Y가 말문을 열었다. 
"근데, 나 이전부터 사실, 불만이었어. 왜 '가방, 구두' 이런거를 보면 내가 생각나고, '책'을 보면 J가 생각나?" 
이야기를 시작한 친구는 일순 당황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생각이 나는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바로 '그냥' 아니던가. 정확히 이 지점에서 Y는 폭발하고 만다. 
"그러니까, 왜 '가방, 구두' 이런거를 보면 내가 생각나고, '책'을 보면 J가 생각나냐고! 명품가방 좋아하고 관심갖는 사람은 J지, 나는 하나도 없어. 그리고, 난 맨날 강의 다니고, 논문 쓰고. 이래뵈도, 나 박사야!!!" 

박사 친구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번 더 까르르 웃었다. 명동 투썸 플레이스 남자 직원이 짜증난 얼굴을 우리 테이블로 보내왔다. 우리는 내몰라라 했다. 역시나, 엄지 손톱만하고 가격이 4,400원인 수제 초콜릿보다 찐한 웃음은 내 꺼였다.   
 
보다 못한 친구가 수습에 나섰다. "넌 이쁘잖아~~." 
정확한 이유였다. 박사 친구는 예쁘다. 박사인데, 예쁘기까지. 
1년을 같이 일하면서 뒹굴다 보면 평소에 가족들이나 볼 만한 희귀한 장면들을 서로 서로 보여주고, 보게 되기 마련인데, 박사 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든 박사 친구는 정돈된 모습이었다. 새벽 6시에 만나도,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아이라이너를 곱게 그린 모습이었다. 당연히 남학생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졸업 후의 생활은 대학 때하고는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대학 때 언니가 입다입다 폐기처분한 버버리코트 입고 다니던 예쁜 박사 친구는 '가방, 구두'의 화신으로,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다'는 말은 절대 안 했지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던 나는 '책'의 화신으로 정리된 거다. 순진한 친구는 그 패러다임에 넘어갔고, 박사 친구는 '나, 박사야!'를 외치고, 나는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말은 절대 안 하지만,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 사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책이 아니라, 책이 아니라 가방이다. 그것도 그냥 가방이 아니라, 명품가방.

나는 명품가방을 좋아한다. 가방은 명품이 아니어도 되고, 사실 명품가방 들고 다닐만한 형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명품의 가치를 모른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단순한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구별할만한 안목이 없다. 내가 아는 명품 브랜드는, '샤넬, 루이비통, 구찌'가 전부다. 다른 가방들은 로고를 바꿔 내밀면 어떤게 어떤건지 구별하지도 못 한다. 내가 좋아하는 명품가방은, 내가 거리에서 많이 마주쳐서 익숙해진 것들 뿐이다. 

현재 30대 후반에서 40대를 이루는 제2세대 명품족들은 거품뿐인 부동산시장의 졸부의 느낌이라는, 알고 있는 두 세 개의 명품브랜드를 맹목적으로 구입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내 얘기다. 명품이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김어준의 글도 읽었다. 그래도 아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소비가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쓸쓸한지, 개성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 유행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명품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을 읽는다. 
 
명품가방에서 꺼내서 읽은 이 시집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기댈 아무것도, 누구도 없는 그녀. 책상도, 에어컨도, 자동차도 없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꼿꼿하게, 고고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굳이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을 기어코 갖고 싶어하는 내가 보인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내가 보인다. 

그녀가 보이고,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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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 교실 1 - 개정판
정효숙 지음 / 삼호뮤직(삼호출판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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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과 일반형이 있는데, 첫 수업에 다녀온 딸롱이가 일반형을 원해 이것으로 구매합니다. 아롱이는 드래곤 빌리지를 완전 정복하고, 딸롱이는 플루트를 ㅋㅎㅎ 완전 정복은 좀 그렇고, 즐거운 연주 및 연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구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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