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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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경제학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책의 도전이자 주제다.

 

첫번째는 의문문의 형태인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다. 애덤 스미스씨,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이다라는 당신의 주장은 이후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됐죠.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런 주장이 펼 수 있도록, 당신이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돌봐 준 사람들은 어떤가요? 그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나요? 당신에게 저녁을 차려준 당신의 어머니는 이기심 때문에 그 일들을 했던 건가요?

 

이 책의 첫번째 논의는 애덤 스미스의 잊혀진 어머니, 그녀가 그를 위해 수행했던 일들과 관련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30)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는 26세에 애덤 스미스 1세와 결혼했다. 16세 차이가 나는 결혼이었다. 2년 넘은 결혼 생활 중에 애덤 스미스 1세는 세상을 떴고, 6개월 후 아들 애덤이 태어났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불과 두 살에 불과한 애덤 스미스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이 시점부터 마거릿은 금전적으로 아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덤 스미스도 죽을 때까지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290) 애덤의 사촌 재닛 더글러스는 평생 마거릿과 함께 애덤 스미스의 가사를 돌보았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경제학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의 어머니와 사촌이다. 마거릿 더글러스와 재닛 더글러스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들이 했던 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하루 종일 매달려 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은 애덤 스미스에게, 남자들에게, ‘경제적판단의 틀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성은 제 2의 성이다는 세상을 정의하는 남성과 그 외 인물인 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 남성이 중심이고, 여성은 그 다음이다. 남성은 의미 있는 존재이고, 여성은 그 외를 맡을 뿐이다. 남성이 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고,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일 뿐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32) 그렇게 오랫동안 여성이 하고 있는 일이 로서 인식되지 않은 이유다.

 

남성이 노동한 결과는 측정할 수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여성이 노동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털어 낸 먼지는 어느새 다시 쌓인다. 밥을 해 먹여도 금방 또 배고파한다. 아이들은 재우면 다시 일어난다. 점심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를 마치면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이제 또 설거지를 해야 한다. (53)

 

이것 뿐만이 아니다. 여성은 바깥에서 일하느라 지친 남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남성이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특성 감정, 육체, 의존성, 연대감, 자기희생, 부드러움, 자연, 예측 불가능성, 수동성, 인간관계 등 은 전통적으로 여성과 결부되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은 경제적 판단에 근거했을 때, 측정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것이다. 1719년 다니엘 드포가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의 로빈슨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적인 청사진이다.(36) 자기 이익의 추구가 다른 고려 사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유로운 시장 속에서 개인의 특성 없이 지불 능력으로서만 평가받는 존재, 합리적이고 이성에 의해 움직이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 그가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적 논리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80)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성은 이익을 거두는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경제적 인간의 결정은 합리적이라는 경제학적주장만 되풀이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인종, 계층, 성별 등에 대한 의문은 의미 없어진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존재들 아닌가. 콩고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통조림 세 개를 얻기 위해 민병대 군인들과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칠레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과일 수확을 하며 살충제를 들이마셔 2년 후에 신경이 손상된 아이를 출산할 것이다. 혹은 모로코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큰딸을 자퇴시키고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게 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늘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

자유라는 단어는 단어에 불과하다. 정말로 단어에 불과하다. (86)

 

합리적개인의 자유로운선택이라는 주장이 경제학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설득력을 얻어갈 때, 그런 환경은 부자에게, 권력을 가진 자에게, 기업가에게 그리고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85: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와 설명은 <4: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경제학뿐?><5장 경제학이 여성을 가뿐히 무시하는 방법들>에서 다루어진다.) 인간 관계의 근본을 경쟁이라고 여기며,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로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이런 방식으로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220)  


 



애덤 스미스의 주장 뒤에 숨겨진 퍼즐은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다. 하나의 섬처럼 고립되어 경쟁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인과 그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개인.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판단과 결정이 전 세계를 얼마나 불평등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고민.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켜야 하는 페미니스트의 임무(198)를 마음에 새기며 책장을 덮는다.

 

아래의 문단은 이 책에서 제일 인상깊은 문단이고,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생각들을 제공한 문단이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고, 아이가 둘이며, 전업주부이고, 페미니즘과 경제학을 같이 고민하는 내게, 아래의 문단은 생각거리를 준다. 피곤하고 괴롭다. 피곤하고 괴로우며, 기대되고 설레이면 좋으련만. 현재로서는, 피곤하고 괴롭다. 지금은 그렇다.

 

가정 내의 엄격한 분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성인 한 명은 가사노동에, 또 다른 한 명은 직장생활에 전념하는 것이 실제로 가치 있는일인가? 세상이 완전히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족 중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무보수 가사 노동에 쓰고, 다른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수를 받는 노동에 쏟아붓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 누가 무슨 역할을 맡는지 따지지 않는다 해도, 이 분업 관계가 진정 효율적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가 열넷 정도 되고, 식기세척기가 없고, 천기저귀를 날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 삶아야 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자녀의 수가 적어진 현대 사회의 가정에서는 그다지 큰 이득을 볼 수 없는 형태의 분업이다. 또한 식기세척기의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고 진공청소기의 먼지 주머니를 교체하는 일은 10년 내내 그 일을 전업으로 했더라도 더 숙련될 여지가 거의 없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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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3-2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두고 아직 못읽은 수많은 책들중에 이 책이 있어요! 리뷰 읽으니 얼른 읽고 싶네요. 읽으면서 저는 또 얼마나 부들부들할까요..... 잽싸게 읽을게요!

단발머리 2017-03-20 15:40   좋아요 0 | URL
네~~ 전 페미니즘과 경제학의 이 조합이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가부장제‘만은 아닌 게 확실한 것 같아요.
자본주의,도 여성을 억압하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인가 봐요.
여성을 억압하는 생각, 제도가 참.... 종류별로 다양하네요. ㅠㅠ

블랙겟타 2017-03-2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다니요.. 단발머리님 리뷰를 보고 얼른 사서 읽고 싶어졌네요.

단발머리 2017-03-20 15:44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저도 좋네요.
페미니즘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다양한 예시와 해석을 통해서 펼쳐지는데, 그 과정이 아주 흥미로와서 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블랙겟타님께도 즐거운 시간 되시길요^^

AgalmA 2017-03-20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가정을 너무 감성적으로 보는 데 익숙한데 가정은 생물적으로는 가장 기본단위의 이익집단이죠. 물질, 정신적 보상 등등을 수급할 수 있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또다른 이익 추구~ 가정의 경제 구조와 노사의 경제 구조가 착취와 예속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
페미니즘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아들 편하게 모든 걸 보조하는 마거릿 더글러스의 저 예처럼 그런 식으로는 이 사회에서 남녀 평등 문제는 아주아주 지루하게 계속되겠죠.

단발머리 2017-03-23 18:29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 동감해요.
사회에서의 압박이 심하더라도 가정에서 지켜지면 좋은데....
페미니즘에 눈 뜨고 제일 절망하게 되는 곳이 사실.... 가정일 때가 많죠. ㅠㅠ

아무개 2017-03-2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는 사실 더이상 가부장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자신들이 더이상
사회제도 내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 권위는 절대 포기하지 않죠.
무직인 남편의 가사활동이
오히려 거의 없는게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자가 살림하고 돈도 벌고 출산에 육아까지 해야할때
남자들은 돈을 벌거나 안벌거나 못벌거나 그뿐이죠.
나의 주장으로
세상 남자 모두를 변하게 하는것보다
내 남편하나 바꾸는게 더 어렵다고들 하네요.
참 쉽지 않아요. . .

단발머리 2017-03-24 13:13   좋아요 0 | URL
무직자 남편이 가사활동을 돕지 않죠. 일하는 여성은 돈을 벌고, 가사를 돌볼 뿐 아니라,
‘집에서 노는 남편, 기 죽지 않게‘ 감정적으로도 돌봐줘야 합니다.
이게 현실이죠.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합이 여성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짝짝궁이 딱 맞아 떨어진 셈이요. ㅠㅠ

해피북 2017-03-22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독서모임에 참여한적이 있는데요. 그때 ‘오부아르‘라는 두꺼운 소설책을 읽고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독서모임 참여하신 분들은 남자 회장님 한분하구 다른 분들은 다 여성분이셨어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데 회장님이 책 다 읽으셨나고 물어보셨죠 그러자 주변에서 너무 두껍더라 시간이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자기도 새벽에 일어나 겨우 다 읽었노라 말씀하셨는데 그때 여자회원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밥을 안하니까 볼 수 있지‘라고요

그러자 주변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ㅎ 실은 이 책 제목보고 그분이 쓰셨나 착각했다는요 ㅎ

단발머리 2017-03-24 13:16   좋아요 0 | URL
어머나~~~ 해피북님의 실제의 예가 이 책이랑 아주 딱 맞아떨어지네요.
그 전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집안일을 고되게 하고, 책을 펴고 딱 자리에 앉으면, 막 졸음이 쏟아지잖아요.
아휴...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나봐. 나는 열정이 부족해....
사실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일, 밥하고 설거지하고, 쓸고 닦고... 일하고 왔는데, 그런것은 잘 보이지가 않으니까요.

아무튼 그 여자회원분 아주 냉철하신대요. ㅎㅎㅎ
아주 시원~~ 합니다.
 
선택의 순간들 - 2002년 노무현 대선승리의 기록
구술자 12인 지음,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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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국민창여경선에 나서자 당내 중진으로는 유일하게 지지를 선언. 후보의 정치 고문, 선거 캠프의 실질적 좌장)

 

대권을 잡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하는 것이 그동안의 정치였는데, 그 사람이 협력하면은 대통령 될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낙선할 것이 십중팔구인 상황에서 자리 약속하는 짓하고 대통령은 안 되겠다라는 결심을 해서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정치인은 노무현밖에 없을 거예요. 나는 그것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남다른 면모를 웅변해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해요. 사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의 하나가 그 사건이었어요. (42)

 

 


이해찬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

 

여론조사 상으로 단일화한다고 할 때는 한 80만 표 이기는 걸로 나왔었거든. 근데 결과는 50 몇 만 표 이겼잖아요? 20만 표는 달아난 거지. 마지막에 인터넷이나 젊은 사람들 전화가 안 터졌으면 질 뻔했지. 나중에 들어 보니까 그날 하루에만 2천만 통화가 이뤄졌다고 하더만. KT 역사상 최고라고 그러더구만. 그게 전부 투표 독려하는 전화인 거지. (SK 텔레콤 집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두 시간 동안 통화량은 1 800만 건에 달했다. KT 18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시외 통화량이 1천만 통에 달해 평상시보다 30%이상 증가했고, 서울 시내 통화량까지 합하면 총 통화량이 2천만 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74)

 

 

이재정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주임사제, 2002년 대선에서 후보 교육특보, 중앙선거대책위 유세본부장)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굽이굽이 그런 감동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가슴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이지 그냥 통상적인 보통의 생각으로는 역사를 뒤집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가 기본적으로는 정책 선거죠. 정책은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선자를 만드는 요인은 감동입니다. 감동적인 상황이 있어야 되는 거죠. (98)

 

 

안희정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아마 6월 지방자치선거 끝나자마자 얘기가 나왔을 거예요.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면서 느꼈던 현실은, 우리는 우승해도 우승컵을 절대로 집에 못 가져가더라고. 내가 내 책에도 썼지만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전 과정을 보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보면 우리의 승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 안 하더라고 깜이 안 되는 애한테 졌다. 이 승부의 결과를 난 인정할 수 없다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 후보가 돼서도 당이 그러지. (125)  

 

 

이광재 (노무현 대통령후보 선거캠프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기획팀장)

 

제 기억으로는 1993년도 최고위원선거 전후인가 잘 모르겠는데 광주역에 갔었어요. 저녁 술자리에 갔었죠. 누가 뭐라고 하니까 노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술잔을 깨 버렸죠. ‘내가 부족한 게 없어 가지고 민주당 하는 줄 알아? 이 나라가 이렇게 분열되면 죽는 거 아니냐. 나 같은 놈이 없으면 호남은 고립되는 거야그래 가지고 자리를 숙연하게 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 기개가 있는 사람이죠. <웃음> 그러니까 나는 노 대통령 스스로가 인생을 굉장히 절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유인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그냥 느끼는 게 아니고 자기의 아픔으로 느껴서 그걸 절실하게 이해하죠. (148)  

 

그 다음에 후보 단일화 얘기 나오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단일화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가, 정몽준 후보가 지지 안 해 주니까 거의 후보를 협박하는 수준으로 갔다가, 단일화에 성공하고 나니까 정말 당사가 미어터지도록, 엘리베이터가 네 대인가 여섯 대인데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 그런데 마지막 하루 전날 후보 단일화가 깨졌어. 깨져 가지고 내가 일찍 출근했어요. 그 때 안희정, 명계남, 천호선, , 몇이 모여 있는데 정말 선거 당일 날 당사 전체의 그 썰렁함이란. 사람이 없어, 당사에. (154)  

 

 

유시민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후보 노무현을 도움. 개혁국민정당을 창당)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정치인이, 그 개인의 경력으로 보나 사회적 기반으로 보나 정치적 기반은 비주류의 비주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없어요. 근데 그 시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를 가진 분이었어요.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노무현이라는 이 캐릭터에서 어느 한 대목인가를 자기 마음에 들어 하고 그래서 난 노무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에요. 많은 결점과 더불어서 많은 미덕을 가진 분이었잖아요. 이분이 지금 대선에 나온다면 안 된다고 봐요. 또는 그전에 나왔더라면 역시 안 됐으리라고 봐요. 이거는 그때 딱 일회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캐릭터를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안 생길 거라고 봐요. 우리나라 같은 조건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분이에요. (214)

 

 

문성근 (늦봄 문익환의 3. 2001년부터 노사모’,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활동을 통해 노무현을 응원)

 

우리의 국민후보 노무현. 군사독재 잔존세력과 족벌신문의 공격으로, 그 스스로 자신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온 몸에 피멍이 든 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 찢어진 민주당 깃발 들고 서있습니다. 애초에 이 깃발을 만들어 세울 때 달려들었던 사람들이 마치 개뗴처럼 달려들어서 스스로 자기 깃발을 찢어발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찢어발기는 동안 이 깃발도 한 번 본 적 없는 우리 노무현 후보는, 이 우직한 사람은, 그래도 그것이 민주화 세력의 법통을 잇고 있는 깃발이라면서 손에서 놓지 않고 벌판에 서서 비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외롭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을 왜 보지 못하겠습니까? 편안한 길, 비단길 다 마다하고 국민을 위해서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 사람입니다. 지역감정의 저 놓은 벽을 향해서, 제 머리 짓이기며 저항해 온 사람, 그렇게 처참하게 깨지고도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를 울린 사람입니다. (237)


 

탄핵이 결정나기 전날 밤부터 이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탄핵 결정을 앞둔 대통령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 국회로부터 탄핵 소추되었던, 하지만 많은 수의 국민들로부터 탄핵 무효’, ‘국회 퇴장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업무에 복귀했던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에 대한 구술 기록을 읽었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이야기가 많았다.

 

2002 39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열여섯 개 시도에서 치뤄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펼쳐진 각본 없는 드라마는 16일 광주경선이 하일라이트였다.(12) 광주의 위대한 선택. 나는 그 날을 이 문구로 기억한다.  4 5일 대구 경선에서 노무현이 누적득표 1위를 탈환하자, 전후로 이인제 측은 색깔론으로 맞섰고, 노무현의 장인 좌익 시비를 제기한데 이어 4일 노무현이 언론사 국유화와 폐간 등을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 내용을 5일자 1면 머리기사로 냈다. 다음날 6일 인천경선장 단상에 오른 노무현은 말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앞으로도 그럴 생각 해 본 적 없습니다. 소유지분 제한 포기하라는 언론의 압력에 굽히지 않아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동아, 조선은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장인을 둘러싼 색깔론에도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며 정면 대응했다. (13)

 

27일 서울경선 승리를 더해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러나(우리가 두려워하는 단어, ‘그러나’)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 참패로 민주당은 내홍을 겪었고, 급기야 의원 34명이 주도한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이 발족되어 후보 흔들기에 나섰다. ‘후보 흔들기에 맞선 후보 지키기움직임도 있었으나, 당 안팎의 후보 단일화 요구 속에 월드컵 4강 신화와 모종의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를 등에 업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공식 제안한다. 정몽준의 국민통합 21과 민주당 선대위와의 합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노무현 후보는 후보 단일 협상의 걸림돌이 되어 온 마지막 쟁점에 대해 국민통합 21 쪽의 주장을 전격 수용하겠다고 발표한다. 거센 내부 반발을 무릅쓴 노무현 후보의 결정은 승리로 돌아왔다.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로 확정되었다. 단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정몽준은 한동안 유세에 동참하지 않고, 공동정부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서면으로 요구했으나 노무현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선을 엿새 남긴 12 13, 첫 공동 유세가 이루어졌다. 투표를 여덟 시간 정도 앞둔 12 18일 밤 10시경, 종로유세 직후 국민통합 21측은 노무현과의 지지철회를 공식발표한다. 노무현은 참모들의 거듭된 설득에 정몽준의 서울 평창동 자택을 찾았지만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지지철회가 나온 18일 밤부터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문자와 전화, 인터넷 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오후 6시에 출구조사 결과는 모두 노무현이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1 201 4 277(48.9%)의 지지를 얻어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료번호 162992002 12 18, 서울 명동 유세 모습이다. 나는 현장에 있었는데, 5개월 임산부의 몸이라 앞쪽 가까이는 갈 수 없어, 한 쪽 구석에서 흐뭇한 미소를 띄며 노후보님을 응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같이 갔던 회사 동료와 마주보며 이야기했고, 웃었고, 그리고 박수를 쳤다.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응원할 수 있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정치인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행복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진지하게 마치지 전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의 모든 구술자들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본인이 크게 기여한 것을 정확히인지하고 있다. 그 일들의 역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본인의 역할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님은 이미 노무현 후보가 경선 운동할 때 사람들에게 모두 뒷받침을 해주도록 앞에서 뒤에서 지시했던 분이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정몽준과의 단일화 제안에서부터 단일화가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총괄하신 분이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파기되었을 때 집에 가겠다는 노무현 후보를 설득해 정몽준의 집 앞까지 모셔 갔던 분이고, 안희정 충남지사는 노무현 후보가 힘든 시절, 마구 퍼붓는 화도 담아냈던 사람이다. 유시민 작가님은 노무현 후보가 식사도 잘 못하시고 좀 그런 상태일 때, 수행팀에서 후보님 좀 만나달라고 전화하는 사람이고, 문성근씨는 750만원짜리 캠프의 카메라를 본인의 돈으로 구입해 전국을 다니며 노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던 사람이다. 명계남씨는 광주경선이 있기 직전,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대의원 다섯 명 모아 놓은 데 가서 무릎 꿇고 빌고 막 울고 하면서 노후보에게 한 표를 부탁해 광주경선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던 사람이다. 노사모 회원들은 하루 종일 자기 돈으로 택시를 타고 다니며 노무현 후보를 소개했고, 손편지 쓰기 운동을 통해 노무현 지지를 호소했다.

 

모든 구술자들 중, 아니 노후보를 도왔던 사람들 중 한 명만 없었어도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 노무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을 도우면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사랑할 만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을 가질 수 있어서, 역사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이 우리 앞에 있어서, 참 좋다고 말했다. 원칙을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 설사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옳다고 믿는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간 노무현을, 이 시대에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시대라서, 그가 우리의 지도자라서. 그가 우리의 대통령이라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 2002 12 18일이 다시 시작됐다. 좋아하는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기다렸던 그 밤이, 추억이 아니라 미래로 펼쳐지려고 한다.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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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15 17: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회되고 반성하는 것 중에 하나가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그땐 몰랐어요..잃고 난뒤에 떠난 애인마냥..그립기만한.~~~~노무현~

단발머리 2017-03-15 20:20   좋아요 2 | URL
노무현 대통령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yureka01님과 같은 마음일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대통령이 되시고 나서 언론에서 그렇게 도에 넘은 비난을 할 때도 무심했어요. 알아서 잘 하시겠지...
시간이 흘러도 아쉬움과 그리움은 줄지를 않네요. 그리운 분입니다. 맘 깊은 곳에서부터... ㅠㅠ
 
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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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0.1 %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었다곧 태어날 아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로 이사를 결심한 저자. 그 곳에서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화려한 옷차림과 명품백이 준비물인 어퍼이스트사이드 아파트 구하기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졸리는 오후시간에 이루어지는 어린이집 입학 오디션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인맥을 총동원한 각고의 노력 끝에 아들을 제일 유명한 어린이집에 등록시킨 후, 저자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일 운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커피 한 잔을 함께할, 이야기 나눌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로서, 객관적 관찰자로서 특이습성의 어퍼이스트사이드 문화를 연구하려 했던 저자는 방향을 선회한다. 그것은 사회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등 영장류의 하나인 그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학계는 동화를 불가피하고 유익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연구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들 집단이 지지하는 신념의 일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내면화하는 동안 자연히 일어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 현장연구가가 대개 처음 느끼는 감정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 같은 고립감과 압박감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적응하다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본인을 사모아인으로여기기 시작한다. 혹은 아카족 Aka으로, 혹은 어퍼이스트사이드 주민으로. (121)

 


제일 큰 의문은 어린이집에서 만난 엄마들이 새로운 이주자에게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대하냐는 것이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의 놀이약속을 위한 전화, 문자, 이메일을 대놓고 무시해 버리는 집단적 행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른 아침에도 런어웨이를 방불케 하는 완벽한 패션의 엄마들. 보톡스로 본래의 표정과 생기를 숨기고, 출산 후에는 피지크 57 - 전문 발레리나들이나 가능한 고난이도의 운동을 수행하고,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들간의 놀이약속을 챙기며, 아이들의 생활과 학업에 올인하는 고학력 전업주부 최상류층 여성들. 완벽한 패션, 완벽한 미모, 완벽한 엄마들. 저자는 자녀에 대한 그녀들의 집착을 모성 집약적 육아때문이라고 보았다.

 


서구사회의 부유층 특유의 모성 집약적 육아intensive mothering’ 문화는 내가 연구한 엄마들에게 확실히 재앙이었다. 이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새런 헤이즈Sharon Hays는 모성 집약적 육아를 자녀 양육에 엄마가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게 (의무화)하는 성편향적 육아방식이라 정의한다. 끊임없는 감정적 소모를 감당하고, 아이의 심리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꾸준히 활동을 제공하고, 아이의 지능발달촉진하는 것까지 전부 다 엄마의 역할로 간주되며, 그 모든 역할에 철저하지 못하면, 심지어 자유방임하기만 해도 엄마로서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라고 헤이즈는 전한다. (265)

 

극도의 생태적 해방과 극도로 경쟁적인 문화 안에서, ‘성공적인자녀는 엄마의 지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아이의 성공을 이끌고 아이를 대신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엄마의 소명이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엄마란 위험부담이 크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는 직업이다. 엄마로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인 동시에 그것이 아이의 성패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 내 친구이자 작가인 에이미 퍼셀만 Amy Fusselman마치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 삶도 신분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낳은 것 같았다고 했다. (96-7)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여성들에게 (혹은 엄마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자신의 아이를 지속적인 성공과 행복의 경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녀들의 지상 과제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다. ‘품위 유지비라 불리는 그녀들의 지출사례를 대충 살펴보자.




 


그녀들이 뉴욕 최상류층 0.1%임을 감안한다해도, 외모에 대한 그녀들의 집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 그녀들은 외연을 꾸미는 일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저자의 진단이다.

 


같은 종의 동성 간 경쟁을 말하는 성내 경쟁은 진화적 선택에 따라 보편화한 현상이다. … , 침팬지, 호모 사피엔스 등 포유류 암컷은 번식의 기회를 잡기 위해,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경쟁한다. … 영장류 암컷은 수컷이 새로운 상대에게 끌린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에 새로 들어온 암컷을 바짝 경계하고 적대한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 둘의 비율인 어퍼이스트사이드처럼 성비가 수컷에 유리하게 기울어 있는 환경에서는 기존 암컷의 텃세가 특히 심하기 마련이다. (210)

 


첫번째 이유는 불균형한 성비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이 둘인 상황에서,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또는 내가 선택한 이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암컷은 무리에 들어온 새로운 암컷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재로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내 것이어야만 하는 수컷을 내 곁에 두기 위해, 가까이 잡아두기 위해.

 

두번째 이유는 여성 호모 사피엔스의 의존성 때문이다. 이 부분은문장과 문단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판단이고 자유지만, 이 문장들은,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참, 좋아할 만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옮겨본다.

 


여성 호모 사피엔스는 비인간 영장류 세계에 유례가 없는 근본적인 곤란을 겪는다. 즉 호모 사피엔스 여성은 특이하게도 의존적이다. 우리는 음식과 자원을 집약적으로 공유하는 유일할 영장류로, 많은 사회의 여성이 주거와 생활을 남성에게 의존한다. 어미 새와 침팬지, 에페족 엄마 들은 새끼가 있다고 해서 먹이 구하러 다니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밥벌이를 하면 힘이 생긴다. 내키는 대로 동반자 관계를 벗어나고, 애인을 취하고, 자유롭게 드나들고,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칼라하리 사막과 동남아 우림지에서처럼,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도 자원이 관계의 핵심이다. 덩이뿌리와 샤 뿌리를 캐오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하면, 결혼생활의 약자가 된다. 세상의 약자가 된다. 무조건. (239)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픗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243)

 


물론이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노동은 임금으로 변환될 수 없기 때문에,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 또한 남편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기 때문에 아내는 별 수 없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마미노믹스Mommynomics(엄마경제)’에 항복하게 되는데, 아이들 학교의 기념식 준비, 소식지 편집, 도서관 운영, 수제 빵 판매 행사 개최등이 그녀들의 무료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학교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남편의 고수입 덕분에 일할 필요가 없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은 여성의 경제활동을 가로막고, 고스펙 고학력의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아이들과 학교를 위한 활동에만 사용하게 되어, 여성은 경제적으로 더욱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먼저 시작한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서문에서부터 여성주의를 표방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푹푹 박힌다. 아프면서 시원하다. 반면 이 책은 좀 다른 느낌으로 시작한 책이다. 뉴욕 0.1% 최상류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순수하게 궁금했고,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을 비인간 영장류의 생태 및 행동과 비교하는 저자의 설명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이들의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슨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겠다. 일례로, 어퍼이스트사이드 사회에 완벽히 동화된 저자는 버킨백을 구입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이야기가 한 챕터다. 그러니까 한 챕터가 온통 버킨백 이야기라는 뜻이다. 가방 하나에 왜 이렇게 목숨을 거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명품백에 대해 두근두근한 마음 잠시라도 가졌던 사람이라면, 나름 공감하며 읽을 수도 있겠다.

 

243쪽의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에서 생각 있는 여자라는 표현을 원서에서 찾아봤더니, 대강 이렇다.  “… just sensing the disequilibrium, the abyss that separates your version of power from your man’s, could keep a thinking woman up at night.”

 

a thinking woman up at night.

 

나는 원체 잠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밤잠을 이루는 일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몇 일간 좀 심난하기는 했다. 나가서 무슨 열매라도 주워 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과 그러면 내가 열매 주으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무얼 할까, 하는 생각. 아직은 최소공배수 구하기를 가르쳐 줘야한다는 생각과 어차피 최소공배수 구하기가 끝나면 내가 아이들의 공부 봐주기는 어려워질거라는 생각. 지금은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내가 읽은 페미니즘이 가능해지도록 일을 해야할 때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지 않고 딸기, 감자, 양파, 베이컨을 사느라 돈만 쓰고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a thinking woman up a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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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7-03-0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출간한 책들 중 가장 흥미로운 부제를 단 책 같아요. 급 읽어보고 싶으나.. 반년 미루기로.. ^^ 대신 단발머리님 리뷰로 대신하고요

단발머리 2017-03-10 09:30   좋아요 0 | URL
네, 이 책 부제 잘 지었다는 이야기가 솔솔 들리더라구요. 책을 다 읽은 저도 같은 생각이구요^^

책 뒷부분에서,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 (유산의 경험)을 갖게 되는데요, 그렇게도 살벌하고 냉정했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작가를 위로해 줬어요. 작가는 이렇게 썼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누군가는 내게 연락했다. 나를 점심모임에 데려가거나, 꽃을 보내주거나, 우리 가족을 자기네 여름 별장에 초대하거나, 이메일로 그저 안부를 묻기도 했다. (333쪽)

수이 2017-03-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급호감_

단발머리 2017-03-10 09:32   좋아요 0 | URL
완전 급호감, 누구에 대해서일까요?
1) 작가
2) 책
3) 단발머리

정답은?!?!?

AgalmA 2017-03-1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존성에 대해서라면.... 가장의 역할을 서로 바꾸기만 해도 그게 시스템이 만든 성질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요ㅎ 남성들이 잘 못한다고 여성의 그 능력(주부 9단 같은)이 더 뛰어나다는 논리는 명백히 잘못된 것.
여성이 아버지, 남편, 아이에 의해 신분과 권력을 잡는다는 설정, 한국 막장 드라마 아니어도 여전히 전세계적 프로파간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삶엔 리셋 버튼이 없으니 참 힘든 나날입니다.

단발머리 2017-03-15 16:00   좋아요 1 | URL
이 책 속의 냉혹한 현실에서 동물의 세계를 방불케하는 행동을 보이는 여성들은 대부분 고학력의 부유층 전업주부들인데요. 그녀들도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남편은 대단한 부자이지만 자신은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요. 그러니, 화려한 옷차림으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 이름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해요.
완벽하게 예쁘고, 완벽하게 날씬한 여자들이요.
어찌 보면 돈만 많다 뿐이지, 부럽지가 않네요.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할까 싶기도 하구요.
 
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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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퇴장』을 다시 읽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마흔 살 연하의 여자에게 굴복한 유명작가에게 매료된 게 사실이다.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옆, 새나 들짐승이나 드나드는 곳. 뉴욕에서 128마일, 가장 가까운 이웃도 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십일 년 동안 살았던 사람(45). 영화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휴대전화, VCR이나 DVD 플레이어, 컴퓨터도 가지지 않는 사람. 하루 종일 글을 쓰고,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사람(13). 내가 반한 사람이 이 사람이다. 사회로부터의 존경과 자신의 것이 분명한 명예를 내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기를 고집하는 남자. 내가 반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다.

 

그가 제이미에게 빠진다. 상류층 가문 출신의 텍사스 사람이 쓰는 억양에 자신이 아름다움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 신중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의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나는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평화로운 순간이라곤 없었다. 어쩌면 내 평생 처음으로 젊은 여성의 여성스러움을 응시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생애 마지막으로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나는 차마 그녀를 만져볼 생각도 못하고 떠났다. 그녀가 증언조서라도 받는 것 같다고 묘사한 그 대화 내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보다 훨씬 가까이 그녀가 앉아 있었는데도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만져볼 생각조차 못했다. ...  나는 실성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일흔한 살에 배우고 있었다. 아직도 자아 발견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164)  

 

젊음을 제외한 모든 걸 가진 남자. 명성과 지혜,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오히려 그녀를 숭배한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자신과 같은 감정을 일으킬 수 없기에 슬퍼한다. 완벽하게 절망한다. 그녀를 대하는 그의 방식. 그녀와 단둘이 방 안에 있고 싶다며 그녀를 찾아오고, 자넨 날 수집했네,라고 말하는... 그녀의 애인을 질투한다 말하고, 욕망에 이끌려 키스하지 않겠다 말하는. 질문하고 듣고 또 말하는

 

이번에 읽을 때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던 문단은 다르다

 

매니(로노프)는 호손과 그의 누이 엘리자베스와 관련된 교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학계의 추측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에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상징할 ― 당신 말처럼 그를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모하게 만든 그 놀랍고 낯선 감정들을 모두 면밀하게 검토해볼 ― 이야기를 찾던 중에 호손과 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누나에 관한 그런 추측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거예요. ... 그에게 소설이란 무언가를 묘사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하는 것이었죠. 그는 생각한 거예요.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요.“ 이야기하는 동안 실은, 나 또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현실을 내 것으로, 에이미의 것으로, 클러먼의 것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그리고 이후 한 시간 동안 나는 눈부신 수사를 동원해 내 주장의 타당성을 설파했고 결국 스스로도 그것을 믿기에 이르렀다. (264)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든다. 소설가가 만든 세계 속에서 소설가는 산다. 살고 생각하고 경험한다.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한다. 소설의 현실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믿고 그 속에서 산다.

 

로노프는 호손과 그의 아름다운 누나에 대한 추측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에이미에게 말한다. 로노프의 연인 에이미는 그가 말한 현실, 누이와의 근친상간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로노프의 전기를 쓰려하는 클러먼은 그녀가 말한 현실, 근친상간의 현실을 사실로 해석한다. , 로노프의 추종자이며, 한때 그의 연인 에이미를 사모했던 나는, 그 현실이 로노프가 만든 것이라 주장한다.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믿는 에이미의 현실,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믿고 싶어하는 클러먼의 현실을 자신의 생각대로 재구성한다. 근친상간은 로노프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로노프가 만든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고, 자신도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상상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일까.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추측일까.

 

분명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장갑을 식탁에서 발견하거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열쇠를 원래 놓았던 자리에서 찾는 일처럼, 분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오해고 착각이다. 이 소설, 필립 로스가 그려놓은 이 세계 속에서, 필립 로스는 말한다.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

 

맙소사, 그가 말한 대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만들었고, 그가 만든 현실은 그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 나는, 그가 만든 현실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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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쇠
    from 마지막 키스 2017-02-22 08:42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다. 아니 이런 말은 너무 거창한가... 기억이란 뜬금없고 연상이란 것도 역시 뜬금없는 것. 나는 위에 먼댓글로 연결한 단발머리님의 리뷰를 오늘 아침에 읽었다. '필립 로스'의 《유령 퇴장》에 관한 리뷰였고, 나 역시 그 책을 읽었으며 일전에 단발머리님의 글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부터 내가 생각한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단발머리님의 리뷰 중에 잠깐 '열쇠'란 단어가 ...
 
 
다락방 2017-02-22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이 리뷰를 읽고 저는 엉뚱하게도 쉼보르스카의 시 한 편이 생각났어요. 리뷰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나 ‘열쇠‘라는 단어 때문에요. 아아, 저를 용서하세요.


열쇠
-쉼보르스카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 -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너를 향한 내 애타는 감정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이미 너와 나,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니.
누군가의 낯선 손에 들어 올려져서는
아무런 대문도 열지 못한 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열쇠‘의 형태를 지닌 유형물로 존재하게 될
내 잃어버린 열쇠처럼.
고철 덩어리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녹(綠)들은 불같이 화를 내리라.


카드나 별자리, 공작새의 깃털 따위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점괘는 종종 나온다.

단발머리 2017-02-22 08:33   좋아요 1 | URL
전혀, 전혀 엉뚱하지 않아요. ㅎㅎㅎ
쉼보르스카,.... 아, 예전에 제가 남자로 알았던 그 시인.
<충분하다>의 그 쉼보르스카의 시를 댓글로 달아주셔서
제 서재의 품격이한껏~ 올라갔네요.^^

잃어버렸다 혹은 잊어버렸다는 점에서 이 리뷰와 딱 맞아떨어지는 시예요.
<유령퇴장>에서는 주커먼이 에이미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에이미가 오지 않았잖아요.
전화번호를 메모해둔 종이를 찾지못해 그녀에게 연락도 못하고, 호텔에 돌아와 방안을 샅샅이 뒤진후에야,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지갑에서 발견했죠.

˝나는 피에를루이지에 그걸 가져가는 걸 잊은 게 아니라
가져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


 
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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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규정된 대상이 아니다


비체로서의 여성은 대상과도 다르다. 만약 남성들이 부여한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즉 착한 대상에 머무른다면 여성은 멸시받기는 하지만 혐오되진 않는다. 그 대상은 적어도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며, 주체로서의 경계를 뒤흔든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이 재생산을 위한 성녀임을 입증하는 한, 어느 정도의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가 되는 순간 여성은 멸시를 넘어 혐오된다. 여성혐오는 여성 대상이 아니라 여성 비체를 향한다는 것이다. (36)



여성 혐오의 시작점이자 놀이터, 여혐의 절대 온상 일베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희진님은 2016 7 31, 한겨레신문 특별기고문에서 나는 일베가 남성 하위문화, 실업으로 인한 좌절, 여성 지위 향상에 대한 반발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베 헤비 유저 출신의 <한국방송> (KBS) 수습기자 사건이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한국의 평균 혹은 그 이상 수준의 남성들이다. 일베 사용자 중에는 찌질남도 있지만 지구화 시대 대한민국의 위상을 고민하는 새로운 건국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은 우익 시민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데올로그들, ‘엘리트들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의 저자 이현재님은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듯 하다.


가상공간에는 새로운 여성 비체의 존재방식을 불편하게 느끼는 남성들, 비체들의 경계허물기에 반발하면서 자신의 경계 지키기에 집중하는 남성들이 그들끼리의 공간을 만들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화의 과정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여성, 명품을 소비하는 여성,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 등 젠더적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여성 비체에 대한 반발심으로 결집한다. (68)


일베 유저들이 페미니스트들을 남성의 권리를 약탈하는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로 비하하면서 혐오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과열된 성취인정의 논리에 집착하고 나아가 인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개별적 성취 인정에서 경험한 자존심의 붕괴를 회복하려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적 인정 논리를 통해 남성의 집단적 우월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왜곡된 인정욕망의 반영일 뿐이다. (103)


서울대, 연대, 고대에 이어, 이번에 불거진 홍익대 단톡방 사건은 멀쩡하게 생긴, 소위 명문대 대학생들이 얼마나 일베스러운 문화와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지 확실히 보여준다. 보통의 남자들에게 일베혐오의 단어인지 공감코드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베 그리고 메갈. 가장 격렬한 항의는 중 2의 여학생으로부터 온다. 일반 남성 뿐 아니라, 기혼여성, 남자 어린이, 남자 노인에게까지 무차별 언어 폭력을 퍼붓는 메갈도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제일 가슴 아픈 말은 메갈도 일베랑 똑같아.’이다. 메갈이 어떠한지, 일베가 어떠한지 나는 사실 잘 모른다. 특별히 찾아가 메갈의 글을, 일베의 글을 읽지 않는다. 읽어본 적이 없다. 메갈도, 일베도 잘 모르지만, 어쩌면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 때마다 똑같은 말을 한다.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야.” (정희진, 한겨레신문)


아무도 일베에 저항하지 못 해. 여성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도, 내가 좋아하는 그 정당도. 만 원짜리 티셔츠 하나에 모두 벌떼처럼 달려들어 결국에는 항복 선언을 받아내잖아. 아무도 일베에 저항하지 못 해. 메갈을 빼고는.


메갈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패러디로서의 미러링 전략은 패러디를 수행하는 비체가 기존의 지배적 남성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그녀들은 패러디의 과정에서 자신이 패러디하고자 하는 남성성에 잠정적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동일시 때문에 그녀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와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면하게 된다. 따라서 패러디의 성패는 그녀들의 패러디적인 동일시가 잠정적이라는 점과, 패러디의 과정에서 그녀들이 두 개의 입장을 전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달려 있다. (41)


모방의 모방은 효과를 거두었다. 일베는 메갈이라는 단어에 반응한다. 반응하고 있다. 이제 그녀들의 패러디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그녀들이 두 개의 입장을 전유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어쩌면, 저자의 이런 훈수(?)를 메갈은 한가한 꼰대의 잔소리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메갈이 어느 길로 가는지, 어느 길로 가게 될 건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비합리적 모욕과 차별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할 수 있다. 저항해야 한다.  1955-6년 미국의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과 백인을 차별을 당연시했던 몽고메리시 조례에 저항했다. 버스 보이콧에 대해 앨라버마주는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고 참가자들을 탄압하며, 주동자들을 직장에서 해고시켰지만, 그럼에도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결국 버스에서의 흑백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 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저항도 있다. 여성참정권 운동을 주도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시위와 가두 연설, 의회 방문, 수상 면접과 국왕 알현 요구 방식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투쟁했지만, 효과가 가장 빠른 것은 재산 파괴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폭력의 언어만을 이해하는 남성들에게 폭력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는 것이고, 그녀의 이런 전략은 성공했다. 센 여자, 몸으로 대항했던 여자,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우체국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갇혔던 그녀, 그녀들 덕분에, 나는 올해 조기대선에서 투표 수 있게 되었다.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서의 동정심을 넘어, 자아와 타자의 동일성에 기반한 동감을 지나, 자아와 타자의 결합과 상호의존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공감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상호감응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비체, 비체들은 즐겁게 소란스럽게 연대할 수 있을까. 남성은 여성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남자 또는 여자가 아니라 사람, 둘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인식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페미니즘 책을 읽고 난 후의 글은 항상 물음표로 끝난다.


그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목소리를 모방함으로써 크레온의 목소리가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듯이, 메갈리안인들은 남성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들이 어떤 폭력적 배제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메갈리안들의 거울은 단순히 남성의 주체성을 확인시키는 착한 대상의 거울이 아니다. 그녀들의 미러링은 남성들만큼 여성들이 남성들을 모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이자 남성인,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의 거울이다. (40쪽)

비체 되기의 전략들은 바로 그 비체성 때문에 혐오의 타깃이 된다. 기존의 인식틀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행위자의 등장은 기존의 젠더 경계를 교란한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러한 전략들은 모두 손에 잡히는 착한 타자로서의 여성성을 벗어나기 위한 것들이다. 비체는 주체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상대적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인식틀을 벗어나는 ‘급진적 타자’이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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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7-02-14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서적 읽을때마다
많은 순간 물음표로 끝이나요.
정말 이게 가능해? 뭐 이런 질문들이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꾸어야 그 목표의 반이라도
이룰수 있는거겠죠?
말하고. 싸우고. 연대하고.
그리고 꿈꾸고!

단발머리 2017-02-14 10:33   좋아요 0 | URL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사회를 기대해요.
아주 옛날일이죠. 출산 휴가 3개월이라 했더니,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야, 너희 회사 좋다~~ ㅠㅠ
출산 휴가 사용하면 책상 치운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들렸던 때가 있었죠.
더 좋아질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꿈꿔요.

cyrus 2017-02-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합리한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낙관적인 희망을 제시해주는 것보다 독자가 불합리한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반성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페미니즘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단발머리 2017-02-15 12:07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불합리한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희망을 말하고 싶네요. 낙관이 아니라 희망이요. 희망마저 기대할 수 없다면 암울한 현실에 더 울적해질것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2-1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체 개념이 줄리아 크레스테바의 << 공포의... >> 아, 갑자기 까먹었네요....
하여튼 이 책에서 비체 개념을 처음 들었는데 꽤 흥미진진한 개념이었습니다.

단발머리 2017-02-15 12:3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개념들은 사실 읽다가 길 헤맬때가 대부분인데 ‘비체‘ 개념은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내가 비체라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조금 했어요. 말씀하신 책은 검색해 보니 <공포의 권력>이네요. 전 처음 본 책인데 함 찾아봐야겠어요^^

AgalmA 2017-02-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러링은 양날의 검 같은 성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의 폭력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보여줘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죠. ‘김치녀‘에 ‘한남충‘으로 맞받아치는 건 한때의 전쟁일 뿐이죠. ‘일베랑 똑같다‘는 말은 반목과 문제점이 발견될 때 늘 발생하는 프레임이기도 하지만(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다는 말처럼),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폄하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며, 일반 다수를 설득할 정도까지는 안 되는 그들의 부족함과 한계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문제는 늘 대결 구도로 판이 짜여져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단발머리 2017-02-15 12:40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 댓글을 제 페이퍼 뒤에 붙이고 싶습니다. ㅎㅎㅎ 아갈마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여아살해 및 유기처럼 출생부터 불리한 여성들이 사회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게 여전히 힘든 일이니까요. 대결을 넘어 공존과 화합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텐데... 남성들 스스로가 그렇게 할지는... ㅠㅠ 저는 그러지 않는다,에 500원을 걸고 싶네요.

Nebula 2017-09-2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들이 왜 출생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