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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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녀 이야기속 배경이 되는 상상 속의 나라 혹은 미래 사회 길리어드는 성경의 가르침 중 남성에게 유리한 부분에 근거해 가부장적, 전체주의적 원칙과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다. 영문판 The Handmaid’s Tale의 헌사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는 성경 구절이 시녀 이야기에는 없다. 본문에 나와 있기 때문에 뺀 것 같은데, 내 생각으론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이 구절이 중요한 부분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관심과 애정 그리고 The Handmaid’s Tale을 함께 보내주신 님께 감사드린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멀리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 야곱은 사촌 라헬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위한 7년 무임금 노동을 라반에게 제안한다. 사랑하는 마음에 7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야곱. 하지만, 결혼식 다음날 아침, 술 깨고 정신차리고 보니, 신부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 야곱은 라반에게 이게 무슨 경우냐며 크게 화를 내고, 라반은 이 동네는 언니 먼저 시집가야 한다며, 라헬도 아내로 주겠으니 7년 더 일하라고 한다. 7 더하기 714. 그렇게 야곱은 자매를 아내로 맞는다. 야곱이 사랑한 건 라헬 Rachel이지만, 아들을 낳은 건 그의 언니 레아 Leah. 남편의 사랑 없이도 레아는 연거푸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이 부분은 그 때 라헬이 한 말이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창세기 30:1-3)

 

시녀 이야기에서도 지체 높은 남자들은 파란 드레스의 아내를 공급받고,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빨간 드레스시녀배급받는다. 시녀는 인격으로서 대우받지 못 한다. 시녀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첩이나, 게이샤나 창녀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를 그 범주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우리들에게서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했고,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다. 특별한 총애 따위는 그쪽이나 우리 쪽에서 미리 알아서 정리할 테니 사랑이 싹틀 발판조차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다. (236)

 

아내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은 남편의 아이를 낳게 될 시녀들을 증오한다. 시녀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눈 앞에서 아내들에게 아이를 빼앗긴다. 시녀의 존재 가치는 출산으로써만 증명될 수 있기에 시녀는 아이 갖기를 소망한다. 남편은, 지체 높은 남자들은 의례의 밤마다 아이 만드는 의식에 참여한다. 시녀와 함께.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시녀와 함께. 그렇게 셋이 함께.

 

폐쇄적인 지배체계가 도래하는 방식 또한 놀랍다.

 

대재앙 직후, 그들은 대통령을 쏘아죽이고 의회를 기관단총으로 쓸어 버렸고, 군대는 계엄령을 선언했다. 당시 그들은 이슬람 광신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침착하십시오. 그들은 텔레비전에 나와 말했다. 상황은 완벽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

 

그 때가 바로 그들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을 때다. 그들은 한시적인 조치라고 했다. 거리에선 소요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밤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298)

 

대통령 사살(체포/감금), 의회 강제 해산, 계엄령.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 눈물이 날 지경이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동요하지 마라, 일상의 생활을 계속하라. 가만히 있으라.

그들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철저하게 물리력에 근거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가임 여성, 임신이 가능한 기혼과 미혼의 여성들을 시녀로 차출해 가는 과정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 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남성, male)이 아니라 F(여성, Female)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306)

 

그들은 여성의 은행 잔고를 동결시킨다. 여성의 돈을, 여성에게서 빼앗으면서부터, 여성의 돈을 남편에게 귀속시키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특별 조치를 필두로 여성에 대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시작된다. 이제 여성은 돈을 가질 수 없고,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도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행복했던 과거를 흔적 없이 잊어버리는 것이 절망적인 현재를 사는데 더 나을 것인지 생각했다. 이건 꿈일거야,라고 말하며 악몽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또 다시 지옥 같은 현실을 살 때의 절망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 생각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와 아이 낳는 그릇으로서의 여자, 그리고 그 와중에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읽는 시간 내내 무겁고 힘들었다. 무겁고 힘들었는데, 다시 알라딘에 들어가 검색창에 커서를 놓는다. 그리고는 자판을 두드려 이렇게 쓴다.

 

마거릿 애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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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안 읽을 수 없게 만드는 ‘폭력적인‘ 리뷰네요...

단발머리 2017-09-06 14:31   좋아요 0 | URL
저의 폭력성이 syo님에게 잘 전해졌군요.
그럼 성공입니다. ^^

2017-09-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강렬하네요! 딱히 상상, 미래사회 같지 않아요 ㅠㅠ
마거릿 애트우드.

단발머리 2017-09-06 14:32   좋아요 0 | URL
네, 행복했던 과거와 암울한 현재가 계속해서 교차되는데, 아....
전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반했습니다.
애정과 경외의 반함이요^^

꼬마요정 2017-09-06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찾았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데 말입니다. 요즘 재조명 되면서 마치 어제 읽은 것처럼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아마 제가 여자라서일지도요.

단발머리 2017-09-06 14:33   좋아요 0 | URL
아... 꼬마요정님은 진작에 읽으셨군요.^^
전 이 책을 통해 처음 이름을 들었구요. 오늘 아침에서야 <눈먼 암살자>도 그녀의 작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 이제 막 끝나서 강렬함에 아직도 두근두근~~

cyrus 2017-09-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에게 ‘파란 드레스‘, ‘빨간 드레스‘를 입도록 강요하는 남성중심사회가 과거 현실에도 있었습니다. 마녀로 낙인 찍힌 여성, 창녀에게 특정 색깔의 옷을 입혔어요. 그렇게해서 남성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단발머리 2017-09-06 14:35   좋아요 0 | URL
폐쇄적 통제 사회 속에서 남자들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편안합니다. 여자들의 희생으로 얻는 편안함이죠.
복잡하고 세세한 규칙 속에 여자를 밀어넣고 강제하는 건 남자들이고,
밤마다 규칙을 벗어난 여자들 혹은 벗어나도록 용인해준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남자들이죠.
흐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리아 페이- 베르퀴스트·정희진 외 62인 지음, 김지선 옮김, 알렉산드라 브로드스키 & 레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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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We want more.’의 외침이 현실로 이루어진 유토피아를 한국과 미국의 페미니스트 64인의 에세이, 픽션, , 그림, 인터뷰로 담아냈다. 정희진의 <동네급식소>를 읽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배운 여성이었던 어머니가 전업주부가 되어 아버지의 ()’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차려 놓은 밥도 못 드시는 아버지. 수저통에서 수저가 나와 있어야 하고, 옆에서 생선을 뜯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밥을 드시는 아버지(54). 물론이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 아버지들이 그러했고, 요즘에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에도, 바로 이 순간에도 오늘 저녁 반찬을 걱정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취업, 계층, 비혼 여부를 불문하고 머릿속에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산다. 계급을 초월해 남성들은 이 고민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들은 그 시간에 정치와 문학과 술과 여자를 논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주의 이론에서 여성들 간의 공통점, 즉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가능한 것은 섹슈얼리티(성폭력과 모성)라고 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밥이다. (55)

 

모든 여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똑같은 고민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모든 남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이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 가끔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저녁에는 뭐 먹어? 이런 경우는 고민이라기보다는, 고민에 대한 을 구하는 경우다. 오늘 저녁에는 뭐 하지?가 아니라, 오늘 저녁에는 뭐 할거야?의 물음.

 

정희진은 그 해결책으로 동네 급식소를 제안한다.

 

여성들의 식사 준비 스트레스, 노동, 고민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또 음식 낭비를 막기 위해서 최소한 열 가구 단위로 급식소가 있어야 한다. 이주민이든 관광객이든 누구나 언제든지 들러서 이용할 수 있다. 노숙자도 줄어들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우선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친환경 유기농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24시간 개방 무료 식당이 500미터 간격으로 있는 것이다. 이 정도 간격이면, 식후 걷기를 위해서도 좋다. 편의점이나 ‘00 바게트100미터마다 있지 않은가!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농촌은 배달 차량을 운영한다. 한마디로, 집에서는 취미외에는 식사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56)

 

 

무척이나 애청하던, 시즌 2를 고대하는 <알쓸신잡>에서는 이런 장면을 보았다.

    

 

 

 

 

 

 

김영하 : 저희 집은 요리는 거의 다 제가 해요. 제 처는 졸업했어요, 요리.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있더라고요. 주부니까. 아예 그런 걸 없애기 위해서 은퇴를 공식적으로 하고.

 

집에서 자신의 저녁밥을 차려주는 여성(남성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 여성)을 고용할 수 있는 극소수의 여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똑같은 고민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뭐 할까에 자유로운 사람을, 한 명, 찾기는 찾았다. 여기 있다, 은수씨.

 

 

아침에 읽은 책 속에 인용된 시를 재인용한다(오라, 거짓 사랑아, 문정희, 민음사, 2003).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

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

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 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시를 따라 쓰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이 멈춘다. 오늘 저녁 뭐 할까. 감자국 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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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7-08-30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씀 중 저 부분이 가장 멋졌어요.
어쩜 단발머리님이 똬악~캡쳐를!!!
멋집니다^^

단발머리 2017-08-30 21:15   좋아요 1 | URL
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 뭐, 이런 행복한 경우가 있나~ 해서요 ㅎㅎㅎ

AgalmA 2017-09-02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담배 안 피는 여성인데도 폐암 선고 받은 일 관련해 여러가지 요인 추정이 있었는데요. 간접흡연보다 더 충격적인 건 부엌에서 일 많이 하면 가스불 흡입량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얘길...도시괴담인지 확인은 못 했지만 여성들이 이제껏 오죽 부엌데기였으면 이런 말이 나올까 싶기도 했다는...

단발머리 2017-09-05 20:56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저도 그런 기사 본 것 같아요.
그래서 가스레인지도 광파가스레인지로 많이 바꾸기는 하던데....
요리 자주 안 했던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ㅠㅠ
 
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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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린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 나라에 그런 현상이 조금 더 심하다는 걸 고려해도 그렇다. 많이 팔리는 책이 더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더 많이 팔린다.

 

하루키의 문학세계에 대해서라면 덧붙일 말이 없다. 상실의 시대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읽은 전부다. 1Q84해변의 카프카를 도전했다 실패했다. 에세이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그냥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전 세계적인 판매량에 대한 무심한 태도, 외국에서의 소박한 삶, 일본 문단과의 의도적 거리 설정, 달리기, 수영, 새벽 기상 그리고 30년 넘는 작품 활동. 그런 것들 말이다.

 

 

  

  

일인칭 소설을 쓸 때, 많은 경우 나는 주인공인 (혹은 화자인) ‘를 대략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나 자신으로 인식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제의 나는 아니지만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의 모습니다. 그런 형태로 가지를 쳐나가면서 나는 나 자신을 분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46)

 

 

소설 바깥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하루키 자신으로 분할된 주인공들을 본다. 그들은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하루키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큰 냄비에 물을 끓이고, 토마토를 중탕해 껍질을 벗기고, 칼로 잘라 씨를 뺀 다음 과육을 으깼다. 커다란 스텐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다가 으깬 토마토를 넣고 충분히 끓였다. 수시로 거품을 걷어냈다. (275)

 

두 사람은 식탁에 앉고, 나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으로 만든 소스를 소스팬에 부어 데우고, 양상추와 토마토와 양파와 피망으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물이 끓자 파스타를 삶고 그 사이 파슬리를 다졌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티를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2권, 27)

 

 

나는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없다. 하지만, 하루키가 혹은 하루키의 분신이 이렇게 요리하는 장면들을 읽고 있노라면,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막 생기려고 한다.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으로 만든 소스를 부은 파스타라니.

 

초상화 작가인 와 모델이 된 마리에의 대화는 좀 뜬금없다. 문화센터 선생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대담한 대화, 가슴과 성기에 대한 대화를 나눌 여고생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다.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0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읽기를 멈추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아주 재미있다고는 못 하겠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읽게 되네. 좀 맹숭맹숭한 느낌인데 말이야, 멈출 수가 없어.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간장 양념장을 끼얹은 연두부 같은 느낌이랄까. 보기에 예쁘고 먹기에 편하고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도 좋지만, ~~맛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지는 않은.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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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27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었을 때 당혹스러웠어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 않은 19금 대화가 많다고 느껴졌어요.. ^^;;

단발머리 2017-08-28 12:16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교 2학년 때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읽었지요.
저 역시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秀映 2017-08-28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기사단장 죽이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어요
한번더 읽어보면 부족함을 채울수 있을까요
그리고 남자주인공이 1Q84의 주인공과 오버랩되는 느낌도 많이 받았구요

단발머리 2017-08-28 12:19   좋아요 0 | URL
전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힘에 관해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 했어요.
아직 2권을 다 읽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구요.
뒷부분이 힘없이 끝나버린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남자주인공이 1Q84의 주인공과 비슷하군요. 전 그 작품도 읽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모두 다 하루키의 분신이니까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가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blanca 2017-09-0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망설이는 중이에요. 저도 하루키를 좋아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일부만 아주 좋아요. 소설의 어떤 부분에서는 하루키 개인과 동일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친 남성 본위의 성적 환타지가 느껴져 곤혹스러워져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삶과 사물과 사건에 대한 담담하고 겸허한 하루키적 자세가 좋아요. 단발머리님 글 읽으니 더욱 관심이 가네요. 2권까지 읽으신 감상이 궁금합니다.

단발머리 2017-09-06 14:45   좋아요 0 | URL
저도 blanca님 의견에 동의해요. 정확히, 남성 본위의 성적 환타지에요.
저도 하루키의 다른 소설을 읽다가 포기한 지점이기도 하구요. 고급 포르노,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성에 대한 묘사나 성에 대한 주인공의 집착이 하루키 문학의 한 부분인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 정도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때가 있구요. 결국 <쓰기>라는 건, 작가 자신이 제일 우선되는 거니까 그것도 하루키의 선택일 테지만, 그러면에서 저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좋아한다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2권 감상 곧 업데이트 됩니다.

전, 오늘 아침에 ‘마거릿 애트우드‘ 찾다가 ‘눈먼 암살자‘로 들어가서, blanca님 리뷰 읽고 왔어요. ㅎㅎㅎㅎ
한 번 읽어보세요. 정말 정말 근사한 리뷰입니다.
 
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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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신간이 나온다고 다 찾아 읽지는 않는데, 이번 신간은 유독 눈길이 간다. 집 근처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모두 <대출중>인 데다가, 허용인원 초과라 읽을 날짜를 가늠할 수 없다. 기다릴 수 없어 주문했다.

 

 

“ ... 전 누구나 인생에서 그렇게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포인트가 찾아오면 재빨리 그 꼬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쳐서는 안 돼요. 세상에는 그 포인트를 붙들 수 있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다 도모히코 씨는 전자였죠.”

 

대담한 전환. 그 말을 듣자 문득 <기사단장 죽이기>의 광경이 떠올랐다.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는 청년. (175)

 

 

대담한 전환. 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하루키의 삶이 생각났다. 대담한 전환의 시기에 그 꼬리를 붙들고,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치지 않아 소설가가 되었다. 오늘에도 소설을 쓰는, 팔리는 소설을 쓰는, 소설 때문에 독자를 줄 세우는 그런 소설가가 됐다.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틀고, 알라딘 샤르트르 글라스에 오미자를 한 잔 따르고, 얼음을 동동 띄우고, 군옥수수맛 꼬깔콘을 꺼낸다.

 

하루키 읽을 준비 끝.

2017 여름,의 중간쯤이라고 할 때,

현재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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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7-08-0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디 부러운 여름독서타임이로군요!^^
사르트르 글라스에 얼음 띄운 오미자차와 꼬깔콘과 하루키!
뭔가 오묘한 조화로군요.하루키키키

기사단장은 평이 반반이긴 하던데 (제 북플에 올라오는 알라디너분들 위주에요!^^) 그래도 하루키니까,읽어야지 않을까?싶어 저도 매번 도서관 가서 검색중인데 매번 퇴짜!!!!ㅜㅜ
신간이나 유명책들은 대출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구입할까?고민중인 책들이 많아요.
여튼 책 읽기에 몰입도가 가장 좋은 계절인 여름독서(물론 단발머리님처럼 쾌적한 환경이 갖춰져야겠죠?^^)
덥겠지만,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17-08-10 21:41   좋아요 0 | URL
제일 자랑스러운건 물론 샤르트르 유리컵이구요.
(설거지할 때 너무 조심하느라 불편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루키죠.

전, 하루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많이 읽지도 않았구요.
제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 스타일 같아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살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쓰고 달리고 수영하고... 그런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1권을 마쳤는데, 아직까지는 ‘역시 하루키‘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이번에 하루키 구입하게 된 동기가 ‘허용 인원 초과‘였거든요.
동네 도서관 5군데에서 2권씩 주문해도 그러더라구요.

전 작년에 덥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요. 더위를 안 타는데도 진짜 덥더라구요.
차라리 올해는 포기 모드. 이제 여름은 계속 더우려나봐 ㅠㅠ
책읽는나무님도 무더위 잘 견디시기 바래요~~~~

쇼코 2017-08-1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저는 하루키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책은 이상하게; 당겨서 구매했어요. 그런데 정작 사놓고 읽지는 않고 있었는데 단발머리님 발췌해 놓은 부분을 보니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도 샤르트르 글라스가 있어요. 먼가 반갑네요. ㅎㅎ 기사단장 죽이기를 안주삼아 샤르트르 글라스에 씨언한 맥주 마시면서 하루키와 찐한 이야기 나누어 볼랍니다. ㅎㅎㅎ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7-08-14 17:5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쇼코님~~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딱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저는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뭐랄까요, 역시 하루키! 하면서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뵈요.
쇼코님도 하루키 단상 올려주시구요.^^
 
제2의 성 동서문화사 월드북 108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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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승리는 우연도 아니고 폭력적 혁명의 결과도 아니었다. 인류의 태초부터 남성은 생물학적 특권 때문에 자기들을 지배적 주체로 확립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특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06)

 

 

생물학적 특권 때문에 남자들은 남성보다 여성’, 혹은 남성과 여성’, 또는 여성과 남성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보다 우위에 있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확립했다. 남성 우위의 사회는 현재에도 강건하다.

 

 

거의 모든 여자들 85% 이상 은 이 기간에 장애를 나타낸다. 출혈하기 전에 혈압이 오르고 그 다음에는 내린다. 맥박수와 체온이 때때로 오르고, 열이 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복부에 통증도 느낀다. 변비 다음에 설사가 따르는 경우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또 간장비대·요폐·단백뇨의 증세도 자주 나타난다. 많은 여자들은 후점막의 충혈(인후통)을 보이고, 어떤 여자들은 청각·시각의 장애를 호소하기도 한다. 땀이 많이 나고, 월경 초에는 특유한냄새를 수반하는데, 이는 아주 지독하기도 하고 월경기간 내내 지속되는 수도 있다. ... 중추신경 계통이 침해되어 자주 두통이 일어나고, 자율신경계통은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 (56)

 

 

여성은 남성과는 다르게 혹은 남성이 전혀 추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어린애를 낳을 준비를 하고, 빨간 주름의 붕괴 속에서 유산을 한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육체의 주인이지만, 여자의 육체는 그녀 자신과 별개의 것이다.(57) 암컷은 몸 전체가 모성의 노동에 적응하게 되어 있고, 모성에 지배된다. 암컷은 종의 먹이인 셈이다.(49)

 

여성이 한 달에 한 번씩 임신을 위한 준비와 임신 실패의 뒤처리를 감당하게 된 것은 여성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물론이다. 남성들이 바랐던 일도 아니다. 한 달 30일 중, 짧게는 5, 길게는 7일 동안 여성이 겪게 되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여성의 선택이 아니다. 물론이다. 이것 역시 남성이 여성에게 짐 지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과는 다르게 생리라는 생물학적 조건 속에 처할 때, 남성에게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겪어낼 때, 이에 대한 해석은 여성에게 불리할 때가 많다. 이 일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리 중이라는 이유로 죽어가는 여자들 ··· 네팔의 끔찍한 악습> (2017/07/13, SBS 뉴스)에 의하면, 2005년부터 공식적으로 불법이 되었음에도 네팔의 많은 여성들이 <차우파디>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차우파디는 힌두교의 오랜 관습으로, 생리 중인 여성이나 산모를 부정한 존재로 여기고 이들을 격리시키는 공간을 의미한다. 격리가 되면 우유를 마실 수도 없고, 평소 같은 식사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생리 중인 여성이나 산모는 집 밖의 헛간이나 오두막에서 생활해야 한다. 야생동물, 뱀의 위협과 더위와 추위, 성폭행의 위험 속에서도 어린 소녀들, 젊은 여성들, 아이들의 엄마는 매달 생리할 때마다 헛간으로, 오두막으로 쫓겨 간다.

 

여성이 생리를 한다는 것은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남성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성장할 때 겪게 되는 여러 과정의 하나, 매우 성가시고 불편한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생리 중인 여자는 불경하다는 생각, 생리하고 있는 여자가 집 안에 있으면 불행을 가져온다는 생각들이 여자들을 이런 위험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옳지 않은 생각, 잘못된 생각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문화 또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학대를 정당화하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받게 되는 핍박과 고통.

먼 나라에서 오늘에도 일어나는 이 안타까운 일들은,

60년 전, 시몬 드 보부아르의 통찰이 정확히 가닿는 지점이다.

암컷. 종의 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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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2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책도 읽으셨습니까....
존경합니다, 단발머리님.
멋져요!

그런데 네팔에 저런 악습이 있다는 거 저는 몰랐어요. 하아-
여성을 향한 저런 악습은 대체 제가 모르는 곳에 얼마나 더 많이 있는걸까요..

단발머리 2017-07-25 10:39   좋아요 0 | URL
아직 읽고 있는 중이예요. 이제 막 200쪽을 넘겼습니다^^

저도 네팔의 이런 악습에 대해서는 기사를 보고야 처음 알았어요. ㅠㅠ
우리가 아는 세상과 우리가 모르는 세상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고 넓은 것 같아요.
더 알게 될수록 더 많이 깨닫게 되는 나의 무지와 나의 무심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