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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을 읽다 힘들 때마다 쉬운(?) 책을 펼쳤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쉽지 않았다.





 








1. 해방자 신데렐라

 

해방자 신데렐라라는 책의 제목과 그림의 조합이 절묘하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건 어려운 일이 분명한데, 리베카 솔닛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책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작품 맨 뒤 <작가의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신데렐라는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어떤 소녀가 아니라, 바로 얼마 전 이 세상을 살았던 평범한 소녀였다는 것, 많은 소녀가 신데렐라 같은 결말 없이 신데렐라의 삶을 살았다는데 마음이 동했다. 리베카 솔닛의 외할머니, 리베카 솔닛의 할머니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숱하게 많았을 부엌데기 신데렐라, 식모 신데렐라, 공장노동자 신데렐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2. Who? 오바마 약속의 땅

 

오바마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나도 딱 그 정도만 알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친아버지는 케냐 출신이고, 새아버지는 인도네시아인이며, 여동생 이름은 마야. 아들의 교육을 걱정한 오바마의 어머니는 새벽 4시에 어린 오바마를 깨워 미국의 교과 과정을 직접 가르쳤고, 오바마는 긴 시간 외조부모의 손에 키워졌다는 정도.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건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도네시아에 살던 오바마가 그곳에서의 생활을 접고 하와이의 조부모에게로 돌아왔을 때 오바마가 열 살이었다는 것. 혼자 비행기를 타고 인도네시아에서 하와이까지 날아간 오바마. 오바마 눈이 이렇게 크지는 않다. 만화라서 그런지 유독 크다.


 



친구들과 함께 『약속의 땅』을 읽고 있다.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이라 안타깝지만, 외모상으로 완벽하게 흑인인 오바마(언론도 그렇게 보도한다. ‘흑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백인에 대한 증오심을 발판으로 정치적 입지를 세우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화합을 이야기한 점이 좀 의아했다.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는 흑인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길로 가지 않고, 굳이 돌아가려는 오바마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Who? 오바마』를 읽으면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를 사랑해주고 지도해주고 이끌어주었던 세 사람은 모두 백인이었다. 자신의 백인성을, 설사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존중하고자 했던 오바마의 마음이 보였다. 자신 안에 감추어진 백인성, 적어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지지해 주었던 백인성에 대해 오바마는 부인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을 화합을 통해 이뤄가겠다는 그의 희망은, 그 가능성이나 전망 혹은 한계와 상관없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치적 성과에 관계없이. 오바마는, 희망 그 자체니까.

 

 















3.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내가 읽었던 모든 학습 만화 중에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슈뢰딩거를 아무리 귀엽게 그려도 이건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 책의 의미는(정확히는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는) 물리학자인 슈뢰딩거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다른 영역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는 데 있다. 결론이 나는 누구인가?’, ‘나란 무엇인가?’ 쪽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다음에는 학습 만화 아닌 슈뢰딩거의 책에 도전해 봐야겠다 결심(?)은 했다.


 










 










4. 퀀텀

 

기록 경신. 내가 읽었던 모든 학습 만화 중에 가장 어려웠다. 위의생명이란 무엇인가』 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건, 슈뢰딩거 만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주된 흐름으로 잡고 만화적 요소(우스운 그림이나 가벼운 농담)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데 반해, 이 책은 전하고자 하는 설명 아래의 등장인물들의 농담도 같은 내용을 다른 양식으로 전달한다는 데 있다. 김상욱의 양자역학 강의를 실제로 들었고, 인터넷 강의를 세 번 정도 (다른 곳에서 했던 강의지만 내용은 대동소이) 들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혹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위로하고 싶은데, 소파에 반쯤 기대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본 아롱이가 엄마, 거기에서 모르는 거 있으면 이따가 나한테 물어봐요!’ 이렇게 말해서 난 무척 어이가 없다.   

 






 












 

읽고 싶어요의 시간. 가만히 상상해본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고,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북한 출신의 여성이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메르켈은 무려 16년을 집권했는데, 그걸 상상하는 게 너무 어려운 우리의 현실. 혹은 나의 편견. 메르켈에 대해 검색하다가 메르켈이 양자물리학 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놀라운 우연이여.

 


양자역학의 최고 설명서라고 하니 한 번은 읽어주는 것이 예의다.


 

나는 믿는 사람인 데다가 쉽게 믿는 사람이라서 이런 책을 꼭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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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0-21 1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메르켈 총리 퇴임을 기념하며 (?) 책을 한 권 골라놨는데요. 이 책은 양자역학이나 기억의 조각들이나 뭐 이런 것들 보다는 쉽겠지 하고 있습니다.

실은요.... 저 1차대전 관련 책 읽으면서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 봤다요?

단발머리 2021-10-21 13:12   좋아요 1 | URL
어머! 메르켈 총리 퇴임책은 무엇일까요? 저도 알려주세요. 저도 양자 역학 버리고 그쪽으로 가렵니다.

유부만두님은 항상 ‘총체적 독서‘를 하시네요. ~~ 책을 읽으면서 ~~ 책 읽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10-21 14:55   좋아요 1 | URL
저도 저 메르켈 리더십 책인데요?;;;;

하긴 ___ 책 읽다가 ~~~ 책 등으로 곁다리 독서 하는 거, 그거 좋아합니다.
요즘 1차 세계 대전 치르느라 프루스트랑 보부아르 잠시 휴독이고요.

그런데 겨울이 왔더라고요?

단발머리 2021-10-23 09:14   좋아요 1 | URL
저는 곁다리 독서야말로 진정한 독서이자 진짜 공부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제로는 곁다리가 아주 적고 다리 길이가 짧다고 합니다 ㅎㅎ
지금 겨울이에요. 담주에 풀린다는 말, 저는 안 믿는답니다? ㅋㅋㅋㅋㅋㅋ

유수 2021-10-21 1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방자 신데렐라 주변인물 이야기도 너무 좋았어요. 언니들은 사과하고, 새엄마는 그대로고, 엘라는 제이름을 찾은 것도. 인간 뿐 아니라 동물들한테도 변신 끝나고 나서 돌아갈때 대모가 물어본 장면에서도요. 엄마 쥐가 “변신한 게 재밌었지만 내 새끼들에게 돌아가고 싶어요”라는 대답을 하면서도 아이들한테 그날밤 모험담 얘기해주려고 신나서 가는 거요.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메시지같아서 설레고 ㅎㅎ단발머리님 언급하신 다른 책들도 너무 궁금합니다?!!

단발머리 2021-10-21 13:15   좋아요 2 | URL
신데렐라 이야기 넘 좋았죠. ㅎㅎㅎ
저는 임무 마치고 대모가 마차꾼 여자(원래 쥐였죠)에게 이제 어쩔래? 하고 물어볼 때, 자기 새끼들은 다 자라서 세상으로 나갔고, 자기는 마차꾼으로 살면서 더 많은 모험을 하고 싶으니 그냥 마차꾼으로 살겠다는 부분을 캡처했어요. 빈둥지 증후군 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건강한 중년 여성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새로운 책은 계속 나오네요. 하하하!

얄라알라 2021-10-21 1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잡식주의 책읽기시네요. 저도 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릿 책이라 어려운 문장일줄 알았다가 아주 참신했어요^^ 제2의 성 화이팅!!!

단발머리 2021-10-21 13:16   좋아요 3 | URL
동화책 더하기 만화책 열전이었습니다. 북사랑님도 리베카 솔릿 책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제2의 성은.... 화화화화... 화이팅!!!!

얄라알라 2021-10-21 11: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메르켈 총리 전기 읽고, 다른 것보다 양자물리학 박사, 이 이력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어요. 완전 의외^^

단발머리 2021-10-21 13:18   좋아요 4 | URL
벌써 메르켈 총리 전기 읽으신거에요? 우앗!! 저는 읽고 싶어요,라서 일단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좀 기다려야 될듯 해요.
그러게요. 총리가 과학자라니요. 너무 근사한 거 아닙니꽈!!!

붕붕툐툐 2021-10-21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힘들 때는 양자역학이라니!ㅋㅋㅋㅋ 제목부터 넘 재밌었어요!! 힘든 걸 더 힘든 걸로 덮는다 뭐 이런건가 싶기도 하고요~ 읽으신 책들 다 관심 있는 주제에요. 특히 양자역학 관련 책들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모르는 거 있으면 아롱이한테 물어봐도 될까요?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1-10-21 13:21   좋아요 4 | URL
<제2의 성>은 저의 올해의 책으로서 한치의 부족함이 없이 꽉꽉 채워진 퍼펙트 여성주의 바이블이라 하겠으나, 저도 좀 힘든 때가 있었고요. 지금 정체기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양자역학은 유투브에 강의가 많이 나와있거든요. 김상욱 교수의 설명이 제일 대중적이긴한데 전 아직도 어렵고요. 만화에 좀 기대볼까 했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였습니다. 제가 아롱이한테 선생님 이야기를 전해놓겠습니다. 언제든지 전화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1-10-21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울집에도 내가 힘들어 할적에 ‘엄마 모르는 거 있음 물어봐요!‘ 하는 애들이 하나라도 있었음 좋겠다고..아침에 생각하고,지금 적네요ㅋㅋㅋ
소파에 반쯤 기대서 양자역학 읽는 엄마!!! 그것도 좀 멋있구요ㅋㅋㅋ
요즘 단발머리님 멋있는 거 너무 많이 하셔요!!!^^
그리고 저도 양자역학 책 읽게 된다면 아롱이 강의실 대기 2번입니다!!!!!

이번 주 제2의 성 다 읽어 치우려고 했으나,정말 진도가 더디게 나가네요...이걸 다 읽고 기초 닦아 놓으면 다른 여성주의 책들은 진도가 잘 나가나요???읽으면서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단발머리 2021-10-22 18:21   좋아요 2 | URL
아롱이가 제게 설명을 해주었으나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해하지 못하였고, 소파에 반쯤 기대어 양자역학 만화를 읽던 엄마는 금세 잠들었다는 이야기를 위에는 쓰지 않았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부지런히 읽는다고 읽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지지부진하네요. 주말에 더 힘을 내봐야겠어요. 아자아자 화이팅!!

얄라알라 2021-10-21 15: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저도 who?시리즈를 애용하는지라, 메르켈 총리 전기라고 하기 민망하네요. who?시리즈에 이름 처음 들어본 분들이 많아서 시대 뒤쳐지게 사는가...하는 조바심과 함께 일부러 찾아 읽어요. 아무튼 과학과 정치, 통달한 리더쉽! ^^ 놀라웠어요

단발머리 2021-10-22 18:23   좋아요 2 | URL
저도 메르켈 총리 정리 만화를 읽어봐야겠군요. 2번이 힐러리인거 봤는데 말이지요.
과학자 총리 너무 멋지죠. 진정한 세계의 리더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트럼프 깽판 칠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뭇잎처럼 2021-10-2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메르켈 리더십>을 여기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최근 읽은 인물, 리더십 책 중 발군의 책이였어요. 몸으로 쓴 리더십 책이랄까. 든든한 멘토를 만난 기분도 들고. 동독 출신, 과학자에 이혼녀. 삼중 아웃사이더가 어떻게 가장 신뢰받는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 저자가 아주 실감나게 취재를 했더라고요. 어마어마하게 인터뷰를 해서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써놔서 모처럼 읽는 재미가 있었어요. 저도 좀 쉬우면서도 팔랑거리지 않고 오랜 울림 있는 양자역학 책 찾고 있었는데, ㅎㅎ 담아놔야겠네요. 양자역학 관련 책 사놓은 거 다 실패했거든요. (<제2의 성> 읽으면서 계속 딴데 기웃거리는 건 저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10-22 18:26   좋아요 0 | URL
나무잎처럼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전 이제 막 책만 보고 ‘읽고 싶어요‘에 넣어두었는데요. 메르켈 책은 한 권은 읽어봐야지 했는데 벌써 퇴임이라니 웬지 아쉽습니다.
양자역학 책은 많이 나와있는것 같은데 전 아직은 다 어렵더라구요. 전 양자역학을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를 이야기할 떄, 평행우주나 다중우주요. 그 때가 참 좋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러기엔 앞쪽에 대한 이해가 넘 부족한 ㅋㅋㅋㅋㅋㅋㅋㅋ <제2의 성>이 생각보다 오래걸려서 저도 짬짬히 다른 책들(그러나 만화책)을 보고는 있었죠. 이것은 무척이나 험난한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mini74 2021-10-22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퀀텀이랑 반가운 책 ㅎㅎㅎ 제2의 성 저는 이제 시작 ㅠㅠ 이면서 살포시 해방자 신데렐라를 읽어볼까하늠 마음이 ㅎㅎ ~ 단발머리님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단발머리 2021-10-22 18:28   좋아요 2 | URL
퀀텀 만화라고 꼭, 만화를 붙여주세요^^ <제2의 성> 이제 시작하셨다니 매우 환영드리오며, 앞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참, 해방자 신데렐라는 금방 읽을 수 있어요 (속닥속닥)

공쟝쟝 2021-10-22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아. 너가 양자역학 이겼어..(속닥속닥)

단발머리 2021-10-22 20:08   좋아요 2 | URL
나 이렇게나 <제2의 성> 좋아하는데 쪽수 왜 이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캐롤라인 냅의 『개와 나』가 생각난다. <나와 개>개와 나』는 아주 다르지만.

 


『레베카』를 읽으며 다시는 이 책을 읽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그 책의 여러 부분이 불편했고, 불편함을 느끼는 내 감각을 확인하는 것도 불편했기에 읽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였던가.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은 『Rebecca』 구매 버튼을 클릭하고 있었고, 그리고 며칠 전부터 읽지 않겠다던 그 『Rebecca』를 밤마다 세 쪽씩 혹은 네 쪽씩 읽어가고 있다. 불편했던 구절은 이렇다.

 


He stroked my hand absently, not thinking, talking to Beatrice.

‘That’s what I do to Jasper,’ I thought. ‘I’m being like Jasper now, leaning against him. He pats me now and again, when he remembers, and I’m pleased, I get closer to him for a moment. He likes me in the way I like Jasper.’ (『Rebecca』, 114p) 

 


It was over then. The episode was finished. We must not speak of it again. He smiled at me over his cup of tea, and then reached for the newspaper on the arm of his chair. The smile was my reward. Like a pat on the head to Jasper. Good dog then, lie down, don’t worry me any more. I was Jasper again. (132)

 


자유로운 신분이지만 하녀에 가까운 삶을 살던 는 맨덜리 저택의 주인 맥심의 청혼에 신데렐라와 같은 인생역정을 이뤄냈다. 맥심이 살던 맨덜리는 너무 크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완벽하다. 갈 곳 없는 처지였던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드윈터 부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맨덜리의 안주인이 되었지만, 나의 지위라는 것은 너무나 위태로워 내가 의지할 사람은 맥심뿐이다. 스무 살 연상에 무심하고 바쁜 맥심. 내게 청혼해서 나를 밴호퍼 부인에게서 구원해준 사람.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가끔 나를 쓰다듬어주는 사람. 나는 맥심의 발치에 앉아 그의 팔에 기댄다.

 


여자에게 운명처럼 강요되는 결혼(『2의 성』, 579)에서 여자의 선택권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개인으로 존재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집단 간 상호 합의에 따라 증여되는 제공물 중의 하나(580)일 뿐이다. 결혼을 통해 여자는 남자에게 예속되고, 여자에게는 처녀성과 엄격한 정조를 남자에게 바쳐야 할 의무가 생긴다(583). 남녀 모두 결혼을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더 희생하는 쪽은 여자다(588). 『레베카』에서 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맥심의 기분을 살핀다.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 무얼 원하는지 궁금해한다. 그의 옆에 붙어서 그의 관심을 받으려 애쓴다. 한편으로는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돌아온 그를 뛰어가서 맞이한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밖에 볼 수 없음을 안다. 나는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고, 그 속에서 내 삶을 만들어간다. 결혼이 나의 선택이었던 것만큼 동시에 그것은 사회적 압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관습에 기초한 결합에서도 사랑이 싹틀 기회가 많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선(609)이라는 보부아르의 주장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사랑이 반드시 열정적인 육체적 욕구의 실현 속에서만 구현되는가, 라고 묻게 된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서로를 구속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 관계의 배타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고자 하는 마음이 학습된 것인지 궁금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단단히 구속되기 원하는 그 이중적인 마음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사랑하기 때문에 양보하는 마음과 양보할 수밖에 없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여자는 하녀이지만 동시에 여왕일 수 있다. 남자는 주인이지만 또한 심부름꾼일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심기를 살피고 그를 안아주고 위로한다. 남자는 야구를 보면서도 옆 눈길로 여자의 눈치를 보고, 여자의 말을 기억해 먼 길을 돌아 여자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 준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 무엇일까. ‘여자는 우상이며 하녀’(『2의 성』, 227)라는 보부아르의 주장과 훨씬 더 적나라한 실비아 페데리치의 말 우리는 하녀이자 매춘부이고 간호사이자 정신과 의사’(『혁명의 영점』, 45)라는 말 그 너머에, 어쩌면 결혼이라는 제도적 모순 속에서도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 강고한 이성애 선호와 행복한 나의 집종류의 핵가족 신화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합리적인 구조 속에서도 가끔 그럴 듯하고 괜찮은 인간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다는 말? 그런 걸까. 보부아르의 결론은 이렇다.

 


결혼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개인들에게 있지 않다. 그것은 보날드, 콩트,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제도 자체가 근원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675)

 


『레베카』의 와 맥심은 범죄의 공모를 통해 둘 사이의 침묵마저 편안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세상의 유일한 '우리'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도움이 될 것 같아 미리보기 몇 장을 읽는다. 『2의 성』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흐미, 두꺼운 것.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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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0-2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뭐라고 주저리 주저리 썼다가 지웠어요! 보부아르의 저 문장은 속시원하긴 합니다만, 이미 결혼하신 분들에게는 뭐 어쩌라고 싶을수도.... 실패한다고 안할 수는 없던 사회보다는 점점 선택의 문제가 되어가고 결혼을 완결로 보는 세태에 비판이 많은 지금이 그시대보다는 낫다고 그저 위안을...

단발머리 2021-10-22 20:15   좋아요 0 | URL
주저리주저리 좋은 이야기 왜 지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것이 정말 궁금합니다. 사노 요코라고 아시겠지만, 일본의 유명한 동화책 작가이자 우리나라에는 에세이로 널리 알려진 (나만 아는 거 아니죠? ㅋㅋㅋㅋㅋㅋ) 암튼 그 분이 젊어서 보부아르를 끼고 다니셨습니다. <처녀 시절> 막 이런거요. 근데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 낳고 이혼하고 그랬죠. 보부아르 보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당신은 몰라요. 그렇게 살았으니 모를 수밖에... 라고 책에 썼어요.
쟝쟝님 말이 맞고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가고 있어서 위안을 얻습니다. 결혼하지 않아도 여자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지금이 낫죠. 난 항상 그럼에도,를 생각하기는 해요. 그런데도 연애를, 사랑을, 구속을 원하는 인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런 거요.
 


 















정상적인 성행위는 사실상 여자를 남자와 종에 예속시킨다. (513)

 


많은 남자가,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자가 성교를 원하는지 혹은 그저 거기에 복종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죽어 있는 여자와도 동침할 수 있다. 성교는 남자의 동의 없이 일어날 수 없으며, 자연적 종료도 남자의 충족에 의해서다. (514)

 


초경 이후 여자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흔해, 첫 번째 성행위에서 수치심과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남자에게서 자신의 몸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한다는 것(523), 남자의 먹이로 주어지는 것이 자신의 육체임을 인식하는 것(511), 사회적인 동시에 내면적으로 그토록 중시되어왔던 처녀성 상실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직 남자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더욱더 그렇다. 성교하는 동안 남녀의 위치, 성행위 중 남자와 여자의 움직임조차 전적으로 남자에게 달려있다. 남자는 여자를 상대로 쾌락을 얻고, 그녀에게 쾌락을 준다. (529)

 



젊은 처녀의 첫 경험은 사실상 강간이며, 남자는 추악하고 난폭한 모습을 드물지 않게 드러낸다. (525)  

 


신랑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을 결심한 릴라가 첫날밤을 보낸 후 얼굴에 멍이 가득한 채로 나타났던 장면이 기억난다. 젊은 처녀의 첫 경험. 추악하고 난폭한 남편.



 














릴라는 자리에 앉지 않고 내내 서 있었다. 앉는 자세가 고통스러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행 중 그 누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릴라의 어머니마저도 딸의 오른쪽 눈이 시꺼멓게 멍들어 부어 있고 아랫입술이 찢어지고 팔에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57)

 



레즈비언 파트에서는 이 문단이 인상 깊다. 그녀들은 남자들과 싸우는 데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녀들은 상호 간의 유사성 때문에 서로에게서 완전한 친밀성을 발견한다.

 


여성 예술가와 작가 중에는 동성애자가 많다. 그녀들의 성적 특이성이 작품을 창조하는 에너지의 원천이거나 우월한 에너지의 존재를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지한 작업에 몰두해 있는 그녀들은 여자의 역할을 하거나 남자들과 싸우는 데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녀들은 남자의 우월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560)

 


동성애는 더 진정성 있게 영위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이 부부일지라도 상대방 앞에서 다소 체면을 차린다. 특히 여자는 남자로부터 항상 명령을 받고 사는 처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여자는 남편과 애인이 있는 데서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다. 여자 친구 옆에서는 으스대지 않고 본심을 감추지 않아도 되며, 그녀들이 서로 닮았기 때문에 숨김없이 서로를 보여 줄 수 있다. (570)

 



아직도 많이 남았다. 더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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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0-15 0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1등 하긴 했는데...제 이름의 북플님이???ㅋㅋㅋ내 닉넴인데 낯설다!!!
기억나요..기억나!!!!!
최근 읽은 페이지라 기억 잘나고,잊고 있었던 릴라의 이야기도....ㅜㅜ
레즈비언이 선호되는 이유도 그녀들에게선 남성의 폭력이 없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구도 좀 가슴 아프게 읽혔어요.
밤이 넘 늦어 일단 굿나잇 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10-16 08: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등 축하드리고요.
릴라 이야기랑 최근 페이지까지 겹치니 책나무님과 저는 진정한 책친구 되겠네요. 릴라 이야기는 이번에 기억나서 찾아보는데 나폴리 시리즈에 푹 빠졌던 그 시간들도 막 떠오르고 하더라구요.
아침이 되고 벌써 주말이 되었네요. 즐건 주말 되세요, 책나무님!
 



















그 때문에 청소년기는 여자에게 무척이나 어렵고 결정적 시기이다. 지금껏 그녀는 자율적인 개인이었으나, 이제 자기의 주권을 포기해야만 한다. (467)


 

여성이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기의 주권을 포기해야만 하는 과정과 상황에 대한 설명은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에 잘 나와있다. 몸과 성, 외모, 엄마가 되는/되지 않는다는 것,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성 정체성 그리고 여성을 둘러싼 온라인과 여성 혐오, 대중문화, 환경, 과학, 노동 등 모두 열두 가지 주제로 소녀들에게 다채로운 페미니즘 이야기(알라딘 책소개)를 소개했다. 책이 있으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을 텐데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라 지금 없다. 친구들과의 우정에 흠뻑 빠져있던 소녀들이 또래 남자 아이들의 시선에 자신을 맞춰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은얼어붙은 여자』인데, 이 책도 지금은 없다.  

 

소녀가 여성으로 변하는 과정은 소년이 남성으로 변하는 과정과 사뭇 다르다. 소년에게 모험과 도전이 장려되는 반면에 소녀에게는 안전과 체념의 정서가 강요된다. 소녀를 가장 강제하는 건 몸에 대한 고정관념을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모든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나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존재 의미를 규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아름답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과 아름다움을 판매하는 자본주의 논리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초경 이후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에 대한 비난 역시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탐구를 극도로 저어하게 만든다.

 


더 읽어보겠다.






그(남자 아이)는 하나의 같은 동작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데, 이와 반대로 여자는 애초부터 이미 자율적인 자기 존재와 자기의 ‘타자 - 존재‘ 사이에 충돌이 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고, 자기를 객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 P403

공주는 양치기 소녀든 간에 사랑과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뻐야만 한다. 추하다는 것은 잔인하게도 심술궂다는 것과 결부되어 버린다. - P418

그들은 저마다 다른 두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남자보다 핸디캡을 가장 덜 느끼는 사람은 바로 여자 운동선수들이다. 신체적 연약함이 여자에게 폭력을 배울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 P464

남자의 관심을 끌고 남자를 감탄시키는 데 긍지를 느끼는 그녀는 역으로 그런 일을 당하면 격분한다. 사춘기를 겪으며 그녀는 수치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수치는 그녀의 교태와 허영심에 뒤섞여 있다. 남자들의 시선은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 그녀는 자기를 보이고 싶은 범위 내에서만 보이기를 원한다. 그녀의 두 눈은 언제나 지나치게 날카롭다. - P487

하지만 젊은 처녀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기를 성취하기가 젊은 남자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녀의 가족도 사회적 풍습도 그녀의 노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가 독립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녀는 자기 인생에 남자와 사랑이 차지할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만약 그녀가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면, 그녀는 여자로서의 운명을 놓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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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10-14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단발머리님 500쪽 넘기셨네요!👍👍👍

단발머리 2021-10-14 10:31   좋아요 4 | URL
저, 지난 달에 <프랑스어 책읽기 모임>의 <제2의 성> 읽기 진도를 따라가고 있어서요. 앞쪽 부분 패쓰하고 읽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앞에 380쪽 남아있습니다. 헐 ㅠㅠㅠㅠ

미미 2021-10-14 10:32   좋아요 4 | URL
앗ㅠㅠ 그래도 프랑스어 책읽기를 하신다니 너무 멋쪄요!!ㅋㅇㅋ👍👍

단발머리 2021-10-14 10:34   좋아요 4 | URL
그러나 매우 부끄러운 읽기입니다. 다른 분들은 진짜 읽으시고요. 저는 글자 맞추기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리랑 글자 맞추기만 하고 있어요^^

막시무스 2021-10-14 19: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면서 여성의 탄생부터 중요한 생의 변곡점마다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이성적인 요소등을 정리된 텍스트로 읽어 가며 이해해가는 묘한 매력같은게 있는것 같아요! 다만 저는 남자라서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100% 감성적으로 느끼는데는 한계가 있는것 같기도 하구요!ㅎ 맛점하시고 화이팅하십시요!

단발머리 2021-10-14 13:36   좋아요 4 | URL
막시무스님이 잘 짚어 주셨는데요. 저도 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여성‘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육체적, 심리적 압박이나 상황, 환경을 적확한 언어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서만 이해가 되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이면서도 저 역시, 페미니즘을 말하는 사람들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거든요.
막시무스님 쭉쭉 진도나가셨다는 소문 익히 들었어요. ㅎㅎㅎ 저도 더 부지런히 읽어야겠어요. 좋은 오후되세요^^
 





 













5년 전쯤이던가, 근처 도서관에서 주차를 하다가 화단 벽을 받아버렸다. 화단은 멀쩡했고 내 차에만 벽돌색 스트레치가 선명했는데 아픈 마음은 차치하고 어쩌다 이랬나 하는 생각에 크게 상심했다. 화단이 낮아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도 삐삐소리가 들렸을 텐데. 급하지도 않았고 워낙 천천히 후진하는 나인데 이게 정말 웬일인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때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던 것 같다. 김동률을. 무려 김동률을.

 

후진만 안 되는가 전진할 때도 김동률은 안 된다. 운전할 때 자세는 앉아 있는 자세다. (이미 아시는바) 오른발로 차의 전진과 멈춤을, 핸들로 방향을 조정한다. 실제로, 차는 스스로 움직인다.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고 (주로 브레이크에 발 올려놓는 사람), 엑셀을 살짝살짝 밟아가면서 핸들을 양쪽으로 살살 돌리면, 차는 스스로 잘도 간다.

 


김동률의 노래를 듣는다. <답장> 8번 트랙, <Contact>. 멈춰버린 것 같은 3초가 흐르고 김동률이 말한다.

 

널 첨으로 스친 순간

절로 모든 시간이 멈췄고

 


그때, 김동률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 순간, 어깨에 힘이 빠진다. 핸들을 잡고 있는 팔꿈치를 지나 손목, 그리고 손가락 끝을 거쳐 내 몸의 어떤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내 몸 안의 모든 힘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212.

 


네가 나를 만지면 그 작은 울림에 쏜살같이 멀리 튕겨서

빛이 다른 공간에 한없이 떠돌다 타버릴지 몰라

널 놓치지 않게 나를 잡아 줘

 


김동률이 노래할 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0그램이 된다. 이언 맥큐언의 『속죄』 (많은 분이 읽지 않으셨기를)서재 장면’ (많은 분들이 기억하지 못하시길) , 토미가 된다. 내가 했던 모든 약속을 파기해 버리고 싶다. 내가 했던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꿈꿨던 모든 시간이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토미가 서 있는 낭떠러지에 내가 서 있다. 김동률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다.

 

어디에선가 우울증 초기 증세 중 하나가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거라고 하던데, 나는 십 년 전부터 그랬다. 나는 노래를 딱 하나, 앨범에서도 딱 하나만 듣는다. 물론 전체를 다 듣고, 그 노래가 바뀌기도 하지만, 듣는 노래는 딱 하나이고, 그 하나를 들을 때는 딱 그 노래 하나만 듣는다.  

 

 



여기까지다. 컴퓨터에 이렇게 써놓은 게 몇 달은 되었고, 김동률 음반을 넣어 페이퍼로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지지난 주에 도서관에 갔다가 책추천 친구 북트럭을 만났고, 『한낮의 우울』을 뽑아왔다. 예전에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내게 , 우울증 같아. 나 우울증 걸린 것 같아라고 말할 때,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궁금했다. 우울증 증세가 있는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 우울증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자신이 그걸 인지할 정도면 우울증이 아닌 거 아닌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우울함이 확 밀려왔어라고 자주 말하기에 그 친구를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책을 대출했다.

 

어떤 사람은 훨씬 더 쉽게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게 정말 뇌 혹은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의사를 만나고 약을 처방받고 제대로 관리하면 정말 증세가 호전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노력해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영원히 나을 수 없다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1년에 350일 이상 명랑한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친구를 위해 이 책을 읽어봐야지 했다.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들이 우울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들의 우울함이 내게 무거워서. 그런데 이 책을 읽다 이런 구절을 만났다.

 


우울증 환자들은 고통에서 광기로의 이행을 묘사할 때 항상 "벼랑 끝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매우 물리적인 묘사로 심연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다. 벼랑 끝은 실제로 극히 추상적인 은유이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런 표현을 쓴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벼랑 같은 데서 떨어져본 사람은 거의 없으며 심연으로 떨어진 사람은 더욱 없다. 그랜드 캐니언? 노르웨이의 피오르?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 심연은 발견하기조차 어렵다. 사람들에게 심연에 대해 물으면 거의 일치된 대답이 나오는데 그 첫째는 암흑이라는 것이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은 햇빛으로부터 캄캄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38)


 

김동률을 들으면서 내가 느끼는 막연함, 그 아득한 느낌이 우울증 환자들이 그들의 절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비유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내게 김동률은 나의 미세한 우울함 상자를 여는 비밀 열쇠라고 할까. 김동률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그런 걸까. 정말 그런 걸까. 김동률을 들으면 난 더 우울해지는 걸까. 책을 조금 더 읽어보고 싶은데 도서관 책이라 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3일 뒤에 찾아오리. 알아보리. 꼭 밝혀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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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10 17: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이번주에 김동률 앨범을 많이 들었는데 우울증 초기 증상일까요? 저는 CD로 음악을 들어서 한 음반을 반복해서 듣는데 그렇다면 종합 우울증? 😅 전 책 읽으면서 김동률 음악은 금지 입니다.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ㅎㅎ

Contact 노래 너무 좋아요. 듣다보면 그렇게 사라져 버릴것 같아요 ㅋ 답장 리페키지에 있는 곡들 다 좋아요 ㅜㅜ

단발머리 2021-10-10 22:21   좋아요 2 | URL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새파랑님~~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ㅎㅎ 김동률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해진다는 거요.
근데 저도 새파랑님과 비슷해서 책 읽으면서 음악을 못 듣습니다. 음악에 집중하게 된다지요.

Contact 노래 너무 좋지요. 전 이 노래랑 <사랑한다 말해도>랑 아이유랑 부른 <동화>를 좋아합니다^^

독서괭 2021-10-10 18: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김동률 노래에 대한 최고의 찬사인 것 같네요^^ 목소리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한낮의 우울 흥미가 생기지만 넘나 두껍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1-10-10 22:23   좋아요 3 | URL
그걸 좀 김동률씨가 알아줬으면 합니다. 미쿡에 있으니 알 수 없겠지요. 목소리는 뭐, 국보급이죠. 20년이 한결같습니다.
한낮의 우울은 일단 그 두께로 말합니다. 우울의 무거움, 우울의 끝없음 같은 것을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1-10-10 20: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윽.....김동률!!!!!!
가장 좋아하는 가수에요.근 20 년 넘게 해바라기 하고 있어요.^^
단발머리님의 이런 글은 제가 더 설레는군요^^
저는 김동률 가수가 참 수줍고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백하고,미안하다 사과 많이 하는 가수의 이미지를 품고 노래를 줄곧 들어왔었는데(주로 취중진담,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출발,감사,기억의 기억의 습작등의 노래만 반복해 들어서 그런가 봐요??) ...오늘 다시 답장과 contact 들어 보니 허~~~억!! 충분히 우울감을 품고 있네요?ㅜㅜ
근데 답장 뮤비를 오늘 첨 봤는데 헐~~현빈!!!!
현빈이 등장하니 절대고독!!!!!ㅋㅋㅋ

근데 전진후진 김동률 금지란 제목이 얼추 맞는 것 같아요.제게 있어 김동률은 첫사랑 같은 가수라 늘 20살 시절 느낌으로 듣는데 우리 신랑은 전진할때 차안에서 김동률 노래 틀어 놓음 졸음 운전 한다고 금지시켜 달라는군요ㅜㅜ
나랑 너무 안맞는 남편이지요ㅜㅜ
그나저나 한낮의 우울 책도 구입하셔야 겠어요.제2의 성과 같은 두께라니.....
도서관 재대출 반납을 여러 번 하셔야 겠네요ㅋㅋㅋ

단발머리 2021-10-10 22:29   좋아요 2 | URL
아, 책나무님도 김동률 좋아하신다니 언제 한 번 김동률 콘서트라도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한 번도 안 가 보았지만 말입니다. 올려주신 곡들 정말 다 좋아요. 특히 저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하고요. 아, 베스트를 꼽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기억의 습작 아니겠습니까. 꺅!!!!

책나무님 이미 아시겠지만 전람회 2집이 또 우울감으로서는 정말 최고봉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노래자랑 시간이네요) 전람회 수록곡 중에 <이방인> 넘 좋아요. 유투브에서도 금방 찾아지니까 한 번 들어보세요!
저는 제가, 명랑하고 가볍고 큰 걱정없는 제가, 이렇게나 김동률을 좋아해서 항상 신기합니다.

한낮의 우울은 한 번만 더 대출해 보고 구입할지 결정하려고요. 사는 것도 문제지만 놓아둘 데가 없어서요^^

붕붕툐툐 2021-10-10 2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요를 진짜 안 듣는 편인데, 그나마 김동률은 좋아하고 잘 듣는 편이라 단발머리님 이야기를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거 같아 다행이에요~~ <한낮의 우울> 다 읽고 꼭 얘기해주세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 거 넘 멋진거 같아요. 전 항상 나, 나, 나밖에 없는 거 같아 반성합니다~

단발머리 2021-10-10 22:32   좋아요 3 | URL
저도 가요를 진짜 안 듣는 편입니다. 친구들이 알려줘야 겨우 찾아듣고 하거든요. 음반 사서 듣고 싶은 가수라지요, 김동률은요. 툐툐님도 김동률 좋아하신다니 넘 반가워요.

한낮의 우울은 일단 <제2의 성>의 거대한 파도를 넘은 뒤에 (혹은 넘으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성하지 마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반성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부만두 2021-10-10 21: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요새 종현 노래 반복해서 들어요. … ㅜ ㅜ

단발머리 2021-10-10 22:33   좋아요 2 | URL
전 종현 노래 이하이가 부른 <한숨> 밖에 모르지만 들을 때마다 넘넘 슬퍼요. 유부만두님도 그만 들으세요 ㅠㅠㅠㅠㅠ

mini74 2021-10-10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평생을 따라다닌 검은개가 있다는 처칠 말이 생각나요. 단발머리님의 검둥개는 김동률입니까 ㅎㅎㅎ 저도 김동률 정말 좋아해요.

단발머리 2021-10-10 23:15   좋아요 2 | URL
처칠이 그런 말을 했었군요. 저는 김동률을 아주 좋아하고 또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한낮의 우울>에서 제가 김동률을 들을 때의 감정에 대한 부분을 읽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 마음은 그대로이지만요 ㅎㅎㅎ

hnine 2021-10-1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낮의 우울> 저 책. 두툼한데도 긴장하며 끝까지 읽었던 책이어요. 우울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롯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것, 뿌리칠 수 없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1-10-11 08:39   좋아요 0 | URL
아… hnine은 벌써 완독하셨군요. 정리해주신 문장이 이 책의 핵심 같아요. 인간이라면 모두 우울을 뿌리칠 수 없다는 말씀이요. 얼른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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