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신비 이매진 컨텍스트 6
베티 프리단 지음, 김현우 옮김 / 이매진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1963, 다른 여성들처럼 부엌 바닥 왁스칠을 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 저자 베티 프리댄은 처음에 이것을 자신만의 문제라고 느꼈다.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로 규정되는 자신의 삶에 등장하는 의문부호를 지각(서문과 감사의 말, 47)하고 나서 그녀는 스미스대학을 졸업한 지 15년이 지난 동창들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하게 되고,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고민과 그녀가 아는 여성들의 일관된 증언, 그리고 심층 면접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 책을 쓰게 된다. 주니어나, 재니, 에밀리의 엄마로서, 아니면 B. J.의 부인으로서 삶을 향유하더라도, 여전히 스스로 각자 고유한 권리를 지닌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이나 사상을 감춘 채 살아야 했던 미국 여성들의 불안과 갈등에 대해 그녀는 이름 없는 문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외의 멋진 저택에 사는 주부. 젊은 미국 여성들이 꿈꾸는 자화상이며, 전세계 모든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여성들. 건강하고 아름답고 유식하며, 자기 남편과 아이, 집에만 관심을 두는 여성들. 가정주부이자 어머니로서 행복한 삶을 살던 그녀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침대를 정리하면서, 식품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의자 커버를 씌우면서, 아이들과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아이들을 소년단과 소녀단으로 태우고 다니면서, 그리고 밤에 남편 옆에 누워 있으면서 이 조용한 물음 – “이것이 과연 전부일까” – 을 자신에게조차 던지기 두려워했다. (54)



여성들은 이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공허함을 느낀다고, 불완전하다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진정제를 복용한 여성들도 있었고, 아이들에게 굉장히 화를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때때로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하고, 집안에 처박혀 울기도 한다고 했다. 청바지 차림을 한 23세 된 어머니의 이야기다.



왜 이렇게 불만스러운지 스스로 물어봐요. 내겐 건강하고 착한 아이들이 있고, 아름다운 새 집과 충분한 재산이 있어요. 남편은 전자기술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에요. 남편은 이런 감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내게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고 하면서 주말에 뉴욕에 가자고 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게 아니에요. 난 항상 우리가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혼자서는 책을 읽을 수 없어요. 아이들이 낮잠을 자면 내 시간이 한 시간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이럴 땐 아이들이 깨기를 기다리면서 집 안을 돌아다닐 뿐 아무것도 못해요. … 어느 날 아침 깨어나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게 된 듯한 기분인 거죠. (65)



프리단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고통 속에 있는 여성들은 교육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1950년대 이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많은 여성들이 의사를 찾아갔을 때, 이 문제를 조사한 어느 의사는 놀랍게도 가정주부 피로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성인에게 필요한 수면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인 하루 10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며, 그네들이 실제 집안일에 소모하는 에너지는 개인 능력의 한도까지 혹사 시킬 정도의 양은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그렇다면 왜 그녀들은 이런 무기력감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



저자는 1949년 이후 <레이디즈 홈 저널>, <맥콜>, <굿 하우스 키핑>, <우먼즈 홈 컴패니언>등의 각종 여성 잡지들이 편집 방향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남성 필진들에 의해 여성의 신비를 강화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여성의 신비는 여성의 가장 큰 가치와 유일하게 전념해야 할 목표가 자신의 여성다움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99), 주부를 모든 여성의 이상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성의 신비에 의하면, 자기 완성이란 단지 하나의 의미, 즉 어머니, 아내, 주부라는 의미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을 걸치고 요리, 빨래, 청소 그리고 아이 낳는 일에 억압되고 길들여진 존재 양식을 모든 여성이 본받아야 한다고 강제했다.



여성지의 주부 주인공은 정숙한 부인형’, 혹은 관능적인 창부형뿐이었다. 이전에 간간히 등장하던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 즉 자기 이야기를 갖는 독립된 주체인 여성 주인공이 사라져버렸다. 여성은 오직 남편과 아이들을 통해서만, 또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여성지들을 통해 직업-가정주부라는 미국 여성의 새로운 이미지가 신화로 굳어졌다. 누가 이러한 거짓 신화를 만들어 냈는가.


나는 어느 날 아침 한 여성지의 편집실에서 실마리 하나를 찾아냈다. 그 편집자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여성으로, 저 옛날의 여성상이 만들어지고 있던 즈음을 지켜본 사람이다. 의지에 찬 직업여성의 옛 이미지는 여성 필자와 편집자들이 주로 창조한 반면, 현모양처인 새로운 여성상은 주로 남성 필자와 편집자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111)



젊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고 나서 많은 여성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새로 등장한 남성 필자들은 자신들이 그려왔던 신화적 여성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모유 수유를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여성은 아이를 낳는 순간에만 성취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여성 잡지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됐다.



하필 왜 여성 잡지일까? 여성 잡지의 그런 기사가 무슨 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결혼을 하기 위해 고등학교나 대학을 그만둔 젊은 주부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여러 의식조사들이 알려 주고 있다. 잡지만 읽는다는 것이다. (109)



그렇다. 당시의 미국 여성들은 잡지, 그 중에서도 여성 잡지, 여성만을 위한 여성 잡지, 여성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한 잡지만을 읽었다. 그리고, 그 잡지의 편집 방향은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와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줄, 혹은 어루만져줄 것으로 예상되는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만을 그려냈다. 여성의 신비에 몰두하는 모습만을 미화했다. 남성에게 이상화된 여성의 모습. 남성이 보고자 하는, 보고 싶은 여성의 모습. 오직 가정에만 몰두하는 여성. 남편과 아이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규정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여성. 그런 인간 말이다.



구운 감자요리는 세계만큼 크지 않으며, 거실 마루바닥을 청소하는 일은 충분한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지력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일이 아니다. 여성은 헝겊 인형이나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인간의 자신의 사고력으로 사상과 비전을 세우고, 미래를 만들어 나가면서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음식과 섹스가 필요하지만, 사랑할 때, 인간으로서 사랑할 때, 그리고 과거와 다른 미래를 발견하고 창조하고 계획할 때 비로소 한 사람, 한 인간일 수 있다. (131)



여기까지가 1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들>, 2<행복한 주부 여주인공> 133쪽까지의 요약 정리다. 나는 이제서야 막 시동이 걸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급박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수 있지만, 현재 시각 오후 2 13. 이제 청소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구운 감자요리가 세계만큼 크지는 않지만, 집안의 미세먼지를 해체 시켜야 할 책임이 내게는 있고, 내게 아이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엄마, 배고파!”를 외치는 작은 새끼새의 배를 채워줄 책임도 내게 있다. 이 모든 걸 무시하고, 읽고 적고 쓰고 싶지만, 이 모든 걸 무시하고 읽고 적고 썼을 때, 내가 얼마만큼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일단, 지금은 청소를 한다.


구운 감자요리 대신 밤죽을 끓이고, 바닥 왁스칠 대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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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성의 신비‘에 맞서고자 할 때
    from 책이 있는 풍경 2017-05-12 13:50 
    완벽한 교외 주택 단지에 거주하며 행복한, 혹은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는 전업 주부들. 여성의가장 큰 가치와 유일하게 전념해야 할 목표는 가정 안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완성이라고 가르치는 ‘여성의신비’에 사로잡힌 전업주부들에 대한 면담과 연구를 통해 저자 베티 프리댄은 ‘여성의 신비’ 시작점과 그것이 사회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과정, 그리고 여성의 신비 신화의 직접적인 수행자이자 피해자인 여성들의 삶을 조망한다.677쪽, 이 책을 거칠게
 
 
다락방 2017-04-07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벌써 읽고 계시군요. 존경합니다, 단발머리님. 계속 읽고 계속 써주세요!

단발머리 2017-04-07 17:07   좋아요 1 | URL
네... 읽고 있어요. ㅎㅎㅎㅎ
원래 한 권을 집중해서 못 읽는데 만나기 어려운 책이라서요. 계속해 볼께요.
글구 존경합니다, 말고
사랑합니다,로 해 주세요.
사랑하는, ❤️하는 다락방님^^

2017-04-07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만 읽을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17-04-10 16:2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
제가 부탁을 드려야죠. 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쑥님~~~~*^^*

푸른희망 2017-04-0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리뷰도 기대합니다.
늘 생각하지만 단발머리님 리뷰는 참 깔끔하고 쏙쏙 잘 들어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단발머리 2017-04-10 16:27   좋아요 0 | URL
부족한 면이 많은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들으니 더 잘 쓰고 더 잘 옮기고 싶은 마음이 한껏 드네요.

저도 사랑합니다, 푸른희망님~~~~ *^^*

보슬비 2017-04-0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덕분에 절판된 책 리뷰를 읽을수 있게 되어 좋아요. 저도 사랑합니다~~ ㅎㅎ

단발머리 2017-04-10 16:28   좋아요 0 | URL
여러분의 사랑과 응원에 좋은 리뷰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불끈합니다. ㅎㅎㅎㅎㅎㅎ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랑의 힘으로 이어가볼께요.

저도 사랑합니다, 보슬비님~~~~~~ *^^*

해피북 2017-04-21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가정주부 피로증‘인가 봅니다. 주말에는 폭팔해버리는. 뭐 평소라고 많은 가사일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주말 만큼은 저도 읽고싶은 책을 마져 읽을 권리, 서재에 글 올릴 때 방해 받지 않을 권리, 커피 한잔 마시며 읽을 책들 탐색할 권리가 있음 좋겠어요 ㅋㅋ 식사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요~~ 저희 집에사는 대왕 독수리를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독서 사이에서의 갈등에 때론 고달파지는거 같아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주말, 그 시간 속에 여성은 주방이라는 친숙한 공간에 더 오래 깊이 머무르는거 같아요~ 하지만 저도 이 모든걸 무시 해버리기에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얼마 만큼 행복할 것인가에 자신이 없다는..생각입니다 ㅎ

다른 글에서 바보같은 댓글을 달고와서 그렇지만, 저도...사....사..랑~~꺄~~~~~(해요~)

단발머리 2017-04-24 15:0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도 그렇습니다. 주말에는 진짜 밥 하기 싫죠.
식사 시간은 항상 어김없이 돌아오구요. 저희집도 1일 3식을 고수하기에, ㅎㅎㅎ
암요, 대왕 독수리는 굶기지 말아야죠~~~~
그래서 저는 주말에는 외식도 하고, 테이크 아웃 음식도 자주 먹고 합니다.

그리고, 해피북님~~~ 사랑합니다. 꺄약!!!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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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걱정>은 그런 시다. 차디찬 방에 찬밥처럼 담겨 이리저리 몸을 뒹굴이며 엄마를 기다리는 어떤 아이. 그 아이의 서글픈 마음이 눈앞에 보이는.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옛날하고 아주 먼 옛날, 천재 시인 기형도의 이름은 언뜻 들어봤지만, <질투는 나의 힘>이 그의 시인지 몰랐던 그 옛날,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만나 가슴이 헛헛했다. 과거는 미화되고 기억은 왜곡되기에, 과거는 아름답게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가난은 얼마나 무거운 이름인가. 가난할 때 추위를 견디어야 하고, 가난할 때 보고 싶은 엄마를 만나기까지 한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이가 되었다. 추운 방에 누워 해석이 어려운 소리들을 해석하려는 그 아이가 되어 엄마를 기다렸다. 오지 않는 엄마, 돈 벌러 시장에 간 엄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두번째 읽었을 때는, 엄마가 되었다. 날은 어둑해지고 열무 삼십 단 판 돈으로 아이 먹일 것을 두 손 가득 들고서는 걸음을 재촉하는데,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이에게 간다. 마음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다리는 천근만근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다. <엄마 걱정>은 나에게 그런 시다.



기형도는 사진으로 만났고, 허은실은 목소리로 만났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작가들이 초대될 때, 작가 프로필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는데, 그 때 임자는 뉘시오?’라는 두 마디를 찰지게 발음해 주는 이가 허은실 시인이다. 목소리가 아주 맑고 청아해 나는 여러 번 그녀의 얼굴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시집으로 만난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목소리와 많이 다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시는 시인의 더 깊은 곳, 더 아픈 곳을 보여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녀의 첫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중에서 나는 <이별하는 사람들의 가정식 백반>, <입덧>, <유전>이라는 시가 좋았다. , ‘~~ 꽃이 피었다<치질>도 좋았는데, 제일 좋았던 시는 <둥긂은>이라는 시다.





둥긂은


                                                                   허은실



아이 가진 여자는 둥글다 젖가슴은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

알은 둥글다 살구는 둥글다 살구의 씨는 둥글다 씨방은 둥

글다 밥알은 둥글다 별은 둥글다 물은 둥글다 은 둥글다

그 밤 당신이 헤엄쳐 들어간 난자는 둥글다


멀리까지 굴러가기 위해

굴러가서 먹이기 위해

….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사랑이 된다

종내는 무덤의 둥긂으로

우리는 다른 씨앗이 된다

0이 된다


제 속을 다 파내버린 후에

다른 것을 퍼내는

누런 바가지

부엌 한구석에 엎디어 쉬고 있는 엉덩이는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알에서 시작되어 사람이 되고, 그리고 둥글게 안아 입 맞추고 안고 뒹굴며 사람이 사랑이 되어 간다. 마지막에는 둥그런 무덤 속에 가지런히 눕게 되고, 그리고 다른 씨앗이 되어 버리는데, 그렇게 처음의 둥긂은 다시 0이 된다. 동그라미 한 세상,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100년을 살았다던 할머니가 인생 잠깐이야.”라고 했다던가. 100년도 눈깜짝할 새 그렇게 지나쳐 간다. 오늘이, 내일이 그렇게 간다.



즐겁고 기쁘고, 슬프고 억울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삶의 순간 순간을 그렇게 산다.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흐르고 사랑이 저만치 간다. 그 순간의 어느 찰나에, 나는 잠깐 설웁다.


나는 잠깐 설웁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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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7-04-04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이렇게 읽어야 하는가 봐요~~ 단발머리님 처럼! 저는 아직 시의 맛을 찰지게 느껴보지 못했는데, 시를 느낀다면 이렇게 느껴야겠구나 하고 단발머리님 글을 읽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즐겁고 기쁘고, 슬프고 억울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삶의 순간 순간을 그렇게 산다.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흐르고 사랑이 저만치 간다. 그 순간의 어느 찰나에, 나는 잠깐 설웁다. ‘ 이 부분은 몇 번씩 읊조리게 되고요 ㅎ


그리고 허은실작가님! 빨책에 자주 이름이 자주 들리던데, 아마도 빨책의 메인 작가님이신거 같던데요. 그분의 시도 참 맛깔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오늘은 이래저래 단발머리님 덕분에 시의 맛을 알고 가는거 같아요~ 감사해요 ㅋ

단발머리 2017-04-10 16:19   좋아요 0 | URL
아주 아주 부끄러워요. 많이 부족한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이예요.

얼마전 빨책에서 허은실 작가님편이 방송되었더라구요. 저는 일부러 시 읽고 들을려고 다운로드만 받아놓았어요.
시인에게서 직접 설명을 들으면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시집 다 읽었으니, 해피북님 보내주신 커피 마시면서
우아하게 들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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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경제학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책의 도전이자 주제다.

 

첫번째는 의문문의 형태인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다. 애덤 스미스씨,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이다라는 당신의 주장은 이후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됐죠.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런 주장이 펼 수 있도록, 당신이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돌봐 준 사람들은 어떤가요? 그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나요? 당신에게 저녁을 차려준 당신의 어머니는 이기심 때문에 그 일들을 했던 건가요?

 

이 책의 첫번째 논의는 애덤 스미스의 잊혀진 어머니, 그녀가 그를 위해 수행했던 일들과 관련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30)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는 26세에 애덤 스미스 1세와 결혼했다. 16세 차이가 나는 결혼이었다. 2년 넘은 결혼 생활 중에 애덤 스미스 1세는 세상을 떴고, 6개월 후 아들 애덤이 태어났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불과 두 살에 불과한 애덤 스미스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이 시점부터 마거릿은 금전적으로 아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덤 스미스도 죽을 때까지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290) 애덤의 사촌 재닛 더글러스는 평생 마거릿과 함께 애덤 스미스의 가사를 돌보았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경제학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의 어머니와 사촌이다. 마거릿 더글러스와 재닛 더글러스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들이 했던 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하루 종일 매달려 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은 애덤 스미스에게, 남자들에게, ‘경제적판단의 틀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성은 제 2의 성이다는 세상을 정의하는 남성과 그 외 인물인 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 남성이 중심이고, 여성은 그 다음이다. 남성은 의미 있는 존재이고, 여성은 그 외를 맡을 뿐이다. 남성이 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고,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일 뿐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32) 그렇게 오랫동안 여성이 하고 있는 일이 로서 인식되지 않은 이유다.

 

남성이 노동한 결과는 측정할 수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여성이 노동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털어 낸 먼지는 어느새 다시 쌓인다. 밥을 해 먹여도 금방 또 배고파한다. 아이들은 재우면 다시 일어난다. 점심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를 마치면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이제 또 설거지를 해야 한다. (53)

 

이것 뿐만이 아니다. 여성은 바깥에서 일하느라 지친 남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남성이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특성 감정, 육체, 의존성, 연대감, 자기희생, 부드러움, 자연, 예측 불가능성, 수동성, 인간관계 등 은 전통적으로 여성과 결부되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은 경제적 판단에 근거했을 때, 측정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것이다. 1719년 다니엘 드포가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의 로빈슨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적인 청사진이다.(36) 자기 이익의 추구가 다른 고려 사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유로운 시장 속에서 개인의 특성 없이 지불 능력으로서만 평가받는 존재, 합리적이고 이성에 의해 움직이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 그가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적 논리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80)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성은 이익을 거두는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경제적 인간의 결정은 합리적이라는 경제학적주장만 되풀이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인종, 계층, 성별 등에 대한 의문은 의미 없어진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존재들 아닌가. 콩고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통조림 세 개를 얻기 위해 민병대 군인들과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칠레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과일 수확을 하며 살충제를 들이마셔 2년 후에 신경이 손상된 아이를 출산할 것이다. 혹은 모로코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큰딸을 자퇴시키고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게 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늘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

자유라는 단어는 단어에 불과하다. 정말로 단어에 불과하다. (86)

 

합리적개인의 자유로운선택이라는 주장이 경제학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설득력을 얻어갈 때, 그런 환경은 부자에게, 권력을 가진 자에게, 기업가에게 그리고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85: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와 설명은 <4: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경제학뿐?><5장 경제학이 여성을 가뿐히 무시하는 방법들>에서 다루어진다.) 인간 관계의 근본을 경쟁이라고 여기며,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로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이런 방식으로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220)  


 



애덤 스미스의 주장 뒤에 숨겨진 퍼즐은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다. 하나의 섬처럼 고립되어 경쟁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인과 그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개인.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판단과 결정이 전 세계를 얼마나 불평등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고민.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켜야 하는 페미니스트의 임무(198)를 마음에 새기며 책장을 덮는다.

 

아래의 문단은 이 책에서 제일 인상깊은 문단이고,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생각들을 제공한 문단이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고, 아이가 둘이며, 전업주부이고, 페미니즘과 경제학을 같이 고민하는 내게, 아래의 문단은 생각거리를 준다. 피곤하고 괴롭다. 피곤하고 괴로우며, 기대되고 설레이면 좋으련만. 현재로서는, 피곤하고 괴롭다. 지금은 그렇다.

 

가정 내의 엄격한 분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성인 한 명은 가사노동에, 또 다른 한 명은 직장생활에 전념하는 것이 실제로 가치 있는일인가? 세상이 완전히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족 중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무보수 가사 노동에 쓰고, 다른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수를 받는 노동에 쏟아붓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 누가 무슨 역할을 맡는지 따지지 않는다 해도, 이 분업 관계가 진정 효율적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가 열넷 정도 되고, 식기세척기가 없고, 천기저귀를 날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 삶아야 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자녀의 수가 적어진 현대 사회의 가정에서는 그다지 큰 이득을 볼 수 없는 형태의 분업이다. 또한 식기세척기의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고 진공청소기의 먼지 주머니를 교체하는 일은 10년 내내 그 일을 전업으로 했더라도 더 숙련될 여지가 거의 없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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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3-2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두고 아직 못읽은 수많은 책들중에 이 책이 있어요! 리뷰 읽으니 얼른 읽고 싶네요. 읽으면서 저는 또 얼마나 부들부들할까요..... 잽싸게 읽을게요!

단발머리 2017-03-20 15:40   좋아요 0 | URL
네~~ 전 페미니즘과 경제학의 이 조합이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가부장제‘만은 아닌 게 확실한 것 같아요.
자본주의,도 여성을 억압하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인가 봐요.
여성을 억압하는 생각, 제도가 참.... 종류별로 다양하네요. ㅠㅠ

블랙겟타 2017-03-2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다니요.. 단발머리님 리뷰를 보고 얼른 사서 읽고 싶어졌네요.

단발머리 2017-03-20 15:44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저도 좋네요.
페미니즘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다양한 예시와 해석을 통해서 펼쳐지는데, 그 과정이 아주 흥미로와서 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블랙겟타님께도 즐거운 시간 되시길요^^

AgalmA 2017-03-20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가정을 너무 감성적으로 보는 데 익숙한데 가정은 생물적으로는 가장 기본단위의 이익집단이죠. 물질, 정신적 보상 등등을 수급할 수 있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또다른 이익 추구~ 가정의 경제 구조와 노사의 경제 구조가 착취와 예속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
페미니즘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아들 편하게 모든 걸 보조하는 마거릿 더글러스의 저 예처럼 그런 식으로는 이 사회에서 남녀 평등 문제는 아주아주 지루하게 계속되겠죠.

단발머리 2017-03-23 18:29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씀 동감해요.
사회에서의 압박이 심하더라도 가정에서 지켜지면 좋은데....
페미니즘에 눈 뜨고 제일 절망하게 되는 곳이 사실.... 가정일 때가 많죠. ㅠㅠ

아무개 2017-03-2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는 사실 더이상 가부장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자신들이 더이상
사회제도 내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그 권위는 절대 포기하지 않죠.
무직인 남편의 가사활동이
오히려 거의 없는게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자가 살림하고 돈도 벌고 출산에 육아까지 해야할때
남자들은 돈을 벌거나 안벌거나 못벌거나 그뿐이죠.
나의 주장으로
세상 남자 모두를 변하게 하는것보다
내 남편하나 바꾸는게 더 어렵다고들 하네요.
참 쉽지 않아요. . .

단발머리 2017-03-24 13:13   좋아요 0 | URL
무직자 남편이 가사활동을 돕지 않죠. 일하는 여성은 돈을 벌고, 가사를 돌볼 뿐 아니라,
‘집에서 노는 남편, 기 죽지 않게‘ 감정적으로도 돌봐줘야 합니다.
이게 현실이죠.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합이 여성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짝짝궁이 딱 맞아 떨어진 셈이요. ㅠㅠ

해피북 2017-03-22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독서모임에 참여한적이 있는데요. 그때 ‘오부아르‘라는 두꺼운 소설책을 읽고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독서모임 참여하신 분들은 남자 회장님 한분하구 다른 분들은 다 여성분이셨어요.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데 회장님이 책 다 읽으셨나고 물어보셨죠 그러자 주변에서 너무 두껍더라 시간이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자기도 새벽에 일어나 겨우 다 읽었노라 말씀하셨는데 그때 여자회원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밥을 안하니까 볼 수 있지‘라고요

그러자 주변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ㅎ 실은 이 책 제목보고 그분이 쓰셨나 착각했다는요 ㅎ

단발머리 2017-03-24 13:16   좋아요 0 | URL
어머나~~~ 해피북님의 실제의 예가 이 책이랑 아주 딱 맞아떨어지네요.
그 전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집안일을 고되게 하고, 책을 펴고 딱 자리에 앉으면, 막 졸음이 쏟아지잖아요.
아휴...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나봐. 나는 열정이 부족해....
사실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 일, 밥하고 설거지하고, 쓸고 닦고... 일하고 왔는데, 그런것은 잘 보이지가 않으니까요.

아무튼 그 여자회원분 아주 냉철하신대요. ㅎㅎㅎ
아주 시원~~ 합니다.
 
선택의 순간들 - 2002년 노무현 대선승리의 기록
구술자 12인 지음, 노무현재단 엮음 / 생각의길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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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2002년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국민창여경선에 나서자 당내 중진으로는 유일하게 지지를 선언. 후보의 정치 고문, 선거 캠프의 실질적 좌장)

 

대권을 잡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하는 것이 그동안의 정치였는데, 그 사람이 협력하면은 대통령 될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낙선할 것이 십중팔구인 상황에서 자리 약속하는 짓하고 대통령은 안 되겠다라는 결심을 해서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정치인은 노무현밖에 없을 거예요. 나는 그것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남다른 면모를 웅변해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해요. 사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의 하나가 그 사건이었어요. (42)

 

 


이해찬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

 

여론조사 상으로 단일화한다고 할 때는 한 80만 표 이기는 걸로 나왔었거든. 근데 결과는 50 몇 만 표 이겼잖아요? 20만 표는 달아난 거지. 마지막에 인터넷이나 젊은 사람들 전화가 안 터졌으면 질 뻔했지. 나중에 들어 보니까 그날 하루에만 2천만 통화가 이뤄졌다고 하더만. KT 역사상 최고라고 그러더구만. 그게 전부 투표 독려하는 전화인 거지. (SK 텔레콤 집계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두 시간 동안 통화량은 1 800만 건에 달했다. KT 18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시외 통화량이 1천만 통에 달해 평상시보다 30%이상 증가했고, 서울 시내 통화량까지 합하면 총 통화량이 2천만 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74)

 

 

이재정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주임사제, 2002년 대선에서 후보 교육특보, 중앙선거대책위 유세본부장)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굽이굽이 그런 감동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가슴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결국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이지 그냥 통상적인 보통의 생각으로는 역사를 뒤집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가 기본적으로는 정책 선거죠. 정책은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선자를 만드는 요인은 감동입니다. 감동적인 상황이 있어야 되는 거죠. (98)

 

 

안희정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

 

아마 6월 지방자치선거 끝나자마자 얘기가 나왔을 거예요.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면서 느꼈던 현실은, 우리는 우승해도 우승컵을 절대로 집에 못 가져가더라고. 내가 내 책에도 썼지만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전 과정을 보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보면 우리의 승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 안 하더라고 깜이 안 되는 애한테 졌다. 이 승부의 결과를 난 인정할 수 없다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 후보가 돼서도 당이 그러지. (125)  

 

 

이광재 (노무현 대통령후보 선거캠프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기획팀장)

 

제 기억으로는 1993년도 최고위원선거 전후인가 잘 모르겠는데 광주역에 갔었어요. 저녁 술자리에 갔었죠. 누가 뭐라고 하니까 노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술잔을 깨 버렸죠. ‘내가 부족한 게 없어 가지고 민주당 하는 줄 알아? 이 나라가 이렇게 분열되면 죽는 거 아니냐. 나 같은 놈이 없으면 호남은 고립되는 거야그래 가지고 자리를 숙연하게 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 기개가 있는 사람이죠. <웃음> 그러니까 나는 노 대통령 스스로가 인생을 굉장히 절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유인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그냥 느끼는 게 아니고 자기의 아픔으로 느껴서 그걸 절실하게 이해하죠. (148)  

 

그 다음에 후보 단일화 얘기 나오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단일화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가, 정몽준 후보가 지지 안 해 주니까 거의 후보를 협박하는 수준으로 갔다가, 단일화에 성공하고 나니까 정말 당사가 미어터지도록, 엘리베이터가 네 대인가 여섯 대인데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 그런데 마지막 하루 전날 후보 단일화가 깨졌어. 깨져 가지고 내가 일찍 출근했어요. 그 때 안희정, 명계남, 천호선, , 몇이 모여 있는데 정말 선거 당일 날 당사 전체의 그 썰렁함이란. 사람이 없어, 당사에. (154)  

 

 

유시민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후보 노무현을 도움. 개혁국민정당을 창당)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정치인이, 그 개인의 경력으로 보나 사회적 기반으로 보나 정치적 기반은 비주류의 비주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없어요. 근데 그 시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를 가진 분이었어요.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노무현이라는 이 캐릭터에서 어느 한 대목인가를 자기 마음에 들어 하고 그래서 난 노무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에요. 많은 결점과 더불어서 많은 미덕을 가진 분이었잖아요. 이분이 지금 대선에 나온다면 안 된다고 봐요. 또는 그전에 나왔더라면 역시 안 됐으리라고 봐요. 이거는 그때 딱 일회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캐릭터를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안 생길 거라고 봐요. 우리나라 같은 조건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분이에요. (214)

 

 

문성근 (늦봄 문익환의 3. 2001년부터 노사모’,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활동을 통해 노무현을 응원)

 

우리의 국민후보 노무현. 군사독재 잔존세력과 족벌신문의 공격으로, 그 스스로 자신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온 몸에 피멍이 든 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다 찢어진 민주당 깃발 들고 서있습니다. 애초에 이 깃발을 만들어 세울 때 달려들었던 사람들이 마치 개뗴처럼 달려들어서 스스로 자기 깃발을 찢어발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찢어발기는 동안 이 깃발도 한 번 본 적 없는 우리 노무현 후보는, 이 우직한 사람은, 그래도 그것이 민주화 세력의 법통을 잇고 있는 깃발이라면서 손에서 놓지 않고 벌판에 서서 비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노무현 후보,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외롭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을 왜 보지 못하겠습니까? 편안한 길, 비단길 다 마다하고 국민을 위해서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 사람입니다. 지역감정의 저 놓은 벽을 향해서, 제 머리 짓이기며 저항해 온 사람, 그렇게 처참하게 깨지고도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를 울린 사람입니다. (237)


 

탄핵이 결정나기 전날 밤부터 이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탄핵 결정을 앞둔 대통령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 국회로부터 탄핵 소추되었던, 하지만 많은 수의 국민들로부터 탄핵 무효’, ‘국회 퇴장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업무에 복귀했던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에 대한 구술 기록을 읽었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이야기가 많았다.

 

2002 39일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열여섯 개 시도에서 치뤄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펼쳐진 각본 없는 드라마는 16일 광주경선이 하일라이트였다.(12) 광주의 위대한 선택. 나는 그 날을 이 문구로 기억한다.  4 5일 대구 경선에서 노무현이 누적득표 1위를 탈환하자, 전후로 이인제 측은 색깔론으로 맞섰고, 노무현의 장인 좌익 시비를 제기한데 이어 4일 노무현이 언론사 국유화와 폐간 등을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 내용을 5일자 1면 머리기사로 냈다. 다음날 6일 인천경선장 단상에 오른 노무현은 말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앞으로도 그럴 생각 해 본 적 없습니다. 소유지분 제한 포기하라는 언론의 압력에 굽히지 않아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동아, 조선은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장인을 둘러싼 색깔론에도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며 정면 대응했다. (13)

 

27일 서울경선 승리를 더해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공식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러나(우리가 두려워하는 단어, ‘그러나’)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 참패로 민주당은 내홍을 겪었고, 급기야 의원 34명이 주도한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이 발족되어 후보 흔들기에 나섰다. ‘후보 흔들기에 맞선 후보 지키기움직임도 있었으나, 당 안팎의 후보 단일화 요구 속에 월드컵 4강 신화와 모종의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를 등에 업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공식 제안한다. 정몽준의 국민통합 21과 민주당 선대위와의 합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노무현 후보는 후보 단일 협상의 걸림돌이 되어 온 마지막 쟁점에 대해 국민통합 21 쪽의 주장을 전격 수용하겠다고 발표한다. 거센 내부 반발을 무릅쓴 노무현 후보의 결정은 승리로 돌아왔다.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로 확정되었다. 단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정몽준은 한동안 유세에 동참하지 않고, 공동정부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서면으로 요구했으나 노무현의 강력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선을 엿새 남긴 12 13, 첫 공동 유세가 이루어졌다. 투표를 여덟 시간 정도 앞둔 12 18일 밤 10시경, 종로유세 직후 국민통합 21측은 노무현과의 지지철회를 공식발표한다. 노무현은 참모들의 거듭된 설득에 정몽준의 서울 평창동 자택을 찾았지만 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지지철회가 나온 18일 밤부터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문자와 전화, 인터넷 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오후 6시에 출구조사 결과는 모두 노무현이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1 201 4 277(48.9%)의 지지를 얻어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료번호 162992002 12 18, 서울 명동 유세 모습이다. 나는 현장에 있었는데, 5개월 임산부의 몸이라 앞쪽 가까이는 갈 수 없어, 한 쪽 구석에서 흐뭇한 미소를 띄며 노후보님을 응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같이 갔던 회사 동료와 마주보며 이야기했고, 웃었고, 그리고 박수를 쳤다.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응원할 수 있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정치인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행복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진지하게 마치지 전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의 모든 구술자들은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본인이 크게 기여한 것을 정확히인지하고 있다. 그 일들의 역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본인의 역할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님은 이미 노무현 후보가 경선 운동할 때 사람들에게 모두 뒷받침을 해주도록 앞에서 뒤에서 지시했던 분이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정몽준과의 단일화 제안에서부터 단일화가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총괄하신 분이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파기되었을 때 집에 가겠다는 노무현 후보를 설득해 정몽준의 집 앞까지 모셔 갔던 분이고, 안희정 충남지사는 노무현 후보가 힘든 시절, 마구 퍼붓는 화도 담아냈던 사람이다. 유시민 작가님은 노무현 후보가 식사도 잘 못하시고 좀 그런 상태일 때, 수행팀에서 후보님 좀 만나달라고 전화하는 사람이고, 문성근씨는 750만원짜리 캠프의 카메라를 본인의 돈으로 구입해 전국을 다니며 노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던 사람이다. 명계남씨는 광주경선이 있기 직전,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대의원 다섯 명 모아 놓은 데 가서 무릎 꿇고 빌고 막 울고 하면서 노후보에게 한 표를 부탁해 광주경선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던 사람이다. 노사모 회원들은 하루 종일 자기 돈으로 택시를 타고 다니며 노무현 후보를 소개했고, 손편지 쓰기 운동을 통해 노무현 지지를 호소했다.

 

모든 구술자들 중, 아니 노후보를 도왔던 사람들 중 한 명만 없었어도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 노무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그의 당선을 도우면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사랑할 만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을 가질 수 있어서, 역사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이 우리 앞에 있어서, 참 좋다고 말했다. 원칙을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 설사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옳다고 믿는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간 노무현을, 이 시대에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시대라서, 그가 우리의 지도자라서. 그가 우리의 대통령이라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 2002 12 18일이 다시 시작됐다. 좋아하는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기다렸던 그 밤이, 추억이 아니라 미래로 펼쳐지려고 한다.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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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15 17: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회되고 반성하는 것 중에 하나가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그땐 몰랐어요..잃고 난뒤에 떠난 애인마냥..그립기만한.~~~~노무현~

단발머리 2017-03-15 20:20   좋아요 2 | URL
노무현 대통령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yureka01님과 같은 마음일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대통령이 되시고 나서 언론에서 그렇게 도에 넘은 비난을 할 때도 무심했어요. 알아서 잘 하시겠지...
시간이 흘러도 아쉬움과 그리움은 줄지를 않네요. 그리운 분입니다. 맘 깊은 곳에서부터... ㅠㅠ
 
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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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0.1 %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었다곧 태어날 아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로 이사를 결심한 저자. 그 곳에서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화려한 옷차림과 명품백이 준비물인 어퍼이스트사이드 아파트 구하기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졸리는 오후시간에 이루어지는 어린이집 입학 오디션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인맥을 총동원한 각고의 노력 끝에 아들을 제일 유명한 어린이집에 등록시킨 후, 저자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일 운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커피 한 잔을 함께할, 이야기 나눌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로서, 객관적 관찰자로서 특이습성의 어퍼이스트사이드 문화를 연구하려 했던 저자는 방향을 선회한다. 그것은 사회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등 영장류의 하나인 그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학계는 동화를 불가피하고 유익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연구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들 집단이 지지하는 신념의 일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내면화하는 동안 자연히 일어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 현장연구가가 대개 처음 느끼는 감정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 같은 고립감과 압박감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적응하다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본인을 사모아인으로여기기 시작한다. 혹은 아카족 Aka으로, 혹은 어퍼이스트사이드 주민으로. (121)

 


제일 큰 의문은 어린이집에서 만난 엄마들이 새로운 이주자에게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대하냐는 것이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의 놀이약속을 위한 전화, 문자, 이메일을 대놓고 무시해 버리는 집단적 행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른 아침에도 런어웨이를 방불케 하는 완벽한 패션의 엄마들. 보톡스로 본래의 표정과 생기를 숨기고, 출산 후에는 피지크 57 - 전문 발레리나들이나 가능한 고난이도의 운동을 수행하고,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들간의 놀이약속을 챙기며, 아이들의 생활과 학업에 올인하는 고학력 전업주부 최상류층 여성들. 완벽한 패션, 완벽한 미모, 완벽한 엄마들. 저자는 자녀에 대한 그녀들의 집착을 모성 집약적 육아때문이라고 보았다.

 


서구사회의 부유층 특유의 모성 집약적 육아intensive mothering’ 문화는 내가 연구한 엄마들에게 확실히 재앙이었다. 이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새런 헤이즈Sharon Hays는 모성 집약적 육아를 자녀 양육에 엄마가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게 (의무화)하는 성편향적 육아방식이라 정의한다. 끊임없는 감정적 소모를 감당하고, 아이의 심리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꾸준히 활동을 제공하고, 아이의 지능발달촉진하는 것까지 전부 다 엄마의 역할로 간주되며, 그 모든 역할에 철저하지 못하면, 심지어 자유방임하기만 해도 엄마로서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라고 헤이즈는 전한다. (265)

 

극도의 생태적 해방과 극도로 경쟁적인 문화 안에서, ‘성공적인자녀는 엄마의 지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아이의 성공을 이끌고 아이를 대신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엄마의 소명이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엄마란 위험부담이 크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는 직업이다. 엄마로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인 동시에 그것이 아이의 성패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 내 친구이자 작가인 에이미 퍼셀만 Amy Fusselman마치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 삶도 신분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낳은 것 같았다고 했다. (96-7)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여성들에게 (혹은 엄마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자신의 아이를 지속적인 성공과 행복의 경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녀들의 지상 과제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다. ‘품위 유지비라 불리는 그녀들의 지출사례를 대충 살펴보자.




 


그녀들이 뉴욕 최상류층 0.1%임을 감안한다해도, 외모에 대한 그녀들의 집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 그녀들은 외연을 꾸미는 일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저자의 진단이다.

 


같은 종의 동성 간 경쟁을 말하는 성내 경쟁은 진화적 선택에 따라 보편화한 현상이다. … , 침팬지, 호모 사피엔스 등 포유류 암컷은 번식의 기회를 잡기 위해,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경쟁한다. … 영장류 암컷은 수컷이 새로운 상대에게 끌린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에 새로 들어온 암컷을 바짝 경계하고 적대한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 둘의 비율인 어퍼이스트사이드처럼 성비가 수컷에 유리하게 기울어 있는 환경에서는 기존 암컷의 텃세가 특히 심하기 마련이다. (210)

 


첫번째 이유는 불균형한 성비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이 둘인 상황에서,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또는 내가 선택한 이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암컷은 무리에 들어온 새로운 암컷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재로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내 것이어야만 하는 수컷을 내 곁에 두기 위해, 가까이 잡아두기 위해.

 

두번째 이유는 여성 호모 사피엔스의 의존성 때문이다. 이 부분은문장과 문단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판단이고 자유지만, 이 문장들은,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참, 좋아할 만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옮겨본다.

 


여성 호모 사피엔스는 비인간 영장류 세계에 유례가 없는 근본적인 곤란을 겪는다. 즉 호모 사피엔스 여성은 특이하게도 의존적이다. 우리는 음식과 자원을 집약적으로 공유하는 유일할 영장류로, 많은 사회의 여성이 주거와 생활을 남성에게 의존한다. 어미 새와 침팬지, 에페족 엄마 들은 새끼가 있다고 해서 먹이 구하러 다니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밥벌이를 하면 힘이 생긴다. 내키는 대로 동반자 관계를 벗어나고, 애인을 취하고, 자유롭게 드나들고,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칼라하리 사막과 동남아 우림지에서처럼,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도 자원이 관계의 핵심이다. 덩이뿌리와 샤 뿌리를 캐오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하면, 결혼생활의 약자가 된다. 세상의 약자가 된다. 무조건. (239)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픗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243)

 


물론이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노동은 임금으로 변환될 수 없기 때문에,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 또한 남편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기 때문에 아내는 별 수 없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마미노믹스Mommynomics(엄마경제)’에 항복하게 되는데, 아이들 학교의 기념식 준비, 소식지 편집, 도서관 운영, 수제 빵 판매 행사 개최등이 그녀들의 무료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학교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남편의 고수입 덕분에 일할 필요가 없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은 여성의 경제활동을 가로막고, 고스펙 고학력의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아이들과 학교를 위한 활동에만 사용하게 되어, 여성은 경제적으로 더욱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먼저 시작한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서문에서부터 여성주의를 표방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푹푹 박힌다. 아프면서 시원하다. 반면 이 책은 좀 다른 느낌으로 시작한 책이다. 뉴욕 0.1% 최상류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순수하게 궁금했고,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을 비인간 영장류의 생태 및 행동과 비교하는 저자의 설명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이들의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슨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겠다. 일례로, 어퍼이스트사이드 사회에 완벽히 동화된 저자는 버킨백을 구입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이야기가 한 챕터다. 그러니까 한 챕터가 온통 버킨백 이야기라는 뜻이다. 가방 하나에 왜 이렇게 목숨을 거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명품백에 대해 두근두근한 마음 잠시라도 가졌던 사람이라면, 나름 공감하며 읽을 수도 있겠다.

 

243쪽의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에서 생각 있는 여자라는 표현을 원서에서 찾아봤더니, 대강 이렇다.  “… just sensing the disequilibrium, the abyss that separates your version of power from your man’s, could keep a thinking woman up at night.”

 

a thinking woman up at night.

 

나는 원체 잠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밤잠을 이루는 일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몇 일간 좀 심난하기는 했다. 나가서 무슨 열매라도 주워 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과 그러면 내가 열매 주으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무얼 할까, 하는 생각. 아직은 최소공배수 구하기를 가르쳐 줘야한다는 생각과 어차피 최소공배수 구하기가 끝나면 내가 아이들의 공부 봐주기는 어려워질거라는 생각. 지금은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내가 읽은 페미니즘이 가능해지도록 일을 해야할 때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지 않고 딸기, 감자, 양파, 베이컨을 사느라 돈만 쓰고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a thinking woman up a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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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7-03-0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출간한 책들 중 가장 흥미로운 부제를 단 책 같아요. 급 읽어보고 싶으나.. 반년 미루기로.. ^^ 대신 단발머리님 리뷰로 대신하고요

단발머리 2017-03-10 09:30   좋아요 0 | URL
네, 이 책 부제 잘 지었다는 이야기가 솔솔 들리더라구요. 책을 다 읽은 저도 같은 생각이구요^^

책 뒷부분에서,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 (유산의 경험)을 갖게 되는데요, 그렇게도 살벌하고 냉정했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작가를 위로해 줬어요. 작가는 이렇게 썼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누군가는 내게 연락했다. 나를 점심모임에 데려가거나, 꽃을 보내주거나, 우리 가족을 자기네 여름 별장에 초대하거나, 이메일로 그저 안부를 묻기도 했다. (333쪽)

수이 2017-03-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급호감_

단발머리 2017-03-10 09:32   좋아요 0 | URL
완전 급호감, 누구에 대해서일까요?
1) 작가
2) 책
3) 단발머리

정답은?!?!?

AgalmA 2017-03-1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존성에 대해서라면.... 가장의 역할을 서로 바꾸기만 해도 그게 시스템이 만든 성질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요ㅎ 남성들이 잘 못한다고 여성의 그 능력(주부 9단 같은)이 더 뛰어나다는 논리는 명백히 잘못된 것.
여성이 아버지, 남편, 아이에 의해 신분과 권력을 잡는다는 설정, 한국 막장 드라마 아니어도 여전히 전세계적 프로파간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삶엔 리셋 버튼이 없으니 참 힘든 나날입니다.

단발머리 2017-03-15 16:00   좋아요 1 | URL
이 책 속의 냉혹한 현실에서 동물의 세계를 방불케하는 행동을 보이는 여성들은 대부분 고학력의 부유층 전업주부들인데요. 그녀들도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남편은 대단한 부자이지만 자신은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요. 그러니, 화려한 옷차림으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 이름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해요.
완벽하게 예쁘고, 완벽하게 날씬한 여자들이요.
어찌 보면 돈만 많다 뿐이지, 부럽지가 않네요.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할까 싶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