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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에 반대한다 ㅣ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평점 :
극중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있다. 극중주의를 주창한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 '극좌'나 '극우'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반면에는 '극중'이 있습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극중주의'입니다." (출처 : 2017.8.29. 프레시안 <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6835&ref=nav_search)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극중주의란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긴다는 건데, 극한의 중간이 정말 국민의 뜻에 가까운가. 촛불을 들었던 국민의 요구는 명확했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국민의 뜻 또한 정확하다. 오해의 소지가 1도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수, 정확히는 극우를 포기하지 못 해, 보수를 넘어 극우까지를 포용하여 정확히 반을 잘라, 그 가운데선을 굳건히(?) 지켜가겠다고 하니. 그 가운데선은 필시 보수의 땅 위에 그려져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정말 모르고 있단 말인가. 더 이상 실망할 여유조차 없다.
성의 구별이 ‘사회적 억압 제도’가 아니라 단지 ‘대칭 집단’이라는 사고방식은, 최근 몇 년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기승을 부린 극심한 미소지니(misogyny, 여성에 대한 혐오) 현상과 이에 대항한 여성들의 대응을 ‘남혐’으로 명명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 집단에게 가장 많이 ‘취조’한 내용은 “여성주의는 일베와 다를 바 없다.”, “여혐이나 남혐이나 같은 이혐(異嫌)이다.”, “여성의 저항에는 동의하지만, 일베와 같은 방식에는 반대한다.”였다. (24쪽)
성별 관계는 계급, 인종 문제처럼 정치적인 것이다. 지배 대 피지배, 중심 대 주변, 강자 대 사회적 약자, 주체 대 타자의 관계다. 그러나 대개 젠더 관계는 ‘남녀상열지사’, ‘음양의 조화’처럼 상/하/좌/우가 균형 잡힌 대칭(對/稱, sym/metry)으로 생각한다. (25쪽)
『양성 평등에 반대한다』는 과격한 제목이 가능한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남성의 지위와 여성의 지위는 대칭적이지 않다(22쪽, 소제목). 어느 책에선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미소지니(misogyny)’가 ‘여성혐오’로 번역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소지니’가 ‘여성혐오’로 번역되면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어. 너희가 하고 있는 건 ‘남혐(남성혐오)’이야. 너희가 ‘여혐’을 말한다면 우리는 ‘남혐’을 말할거야.
원래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인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 살해)가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가시화되면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이 같은 여성들의 사회 운동에 대해 “여자들이 남성을 싫어하고 혐오하고 비난한다”며 이를 ‘남혐’ 현상으로 명명했다. 여성과 남성은 상호 혐오를 통해 드디어 ‘평등’해진 것일까? (10쪽,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일까?>)
여당, 야당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쟤네가 더 많이 잘못했지만, 너희에게도 잘못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한 걸까. 기계적 중립이 정의일까. 죽다 살아나거나, 죽을 뻔 하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이 ‘여혐’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도 불편한 적이 많았어,라고 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아니, 제대로 된 반응일까. ‘우리도, 우리도~~’라는 응석이 성인에게, 성인 남성들에게 이렇게나 많이 애용(?)되고 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비유하자면,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에 몇 배에 해당하는 발본적(撥本的, radical)인 변환이다.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 여성을 임의적,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여성 노동력 동원을 “일과 가정의 양립” 정책이라고 속이지 말고, 시민 사회와 여성 운동 세력은 여성의 과다한 노동 상황을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운동의 발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53쪽)
그녀의 제안은 ‘여성을 직장으로’ 보다는 ‘남성을 가정으로’에 가깝다. 남성의 가사 노동 참여, 군대식 직장 문화 개선등을 통해 일과 육아,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노동하는 여성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정의의 문제이자, 남성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고 주장하는데(56쪽),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남성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시 칼퇴근, 정해진 날짜에만 가능한 회식, 남성의 육아 휴직 강제, 획기적인 육아 수당 지급 등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런 강제력이 우리의 문화로 자리 잡히게 된다면, 자신의 예쁜 아기를 아기띠로 매고 아내 손을 잡고 밤산책을 나가는 남성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선선한 가을 밤, 아내와아기와의 산책을 행복한 순간이라 느끼는 남성들이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런 남자가 많다고, 아주 많을 거라고, 난 믿고 있다.
매주 토요일만 기다리게 만들었던 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는 9월 9일자로 연재를 마쳤다. 인기 코너였고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연재가 끝나게 되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이미 절판되어 어떻게 구해야 하나 걱정스러운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 서평의 일부다. “이 책은 『제2의 성』과 함께, 내가 여성학 공부를 시작할 때 외워버린 책이다.” 이런 구절에 혼자 흥분해서는, 『제2의 성』을 바짝 끌어안고는 둥가둥가를 하곤 했다. 그녀는 내 글을 읽지 못하겠지만, 나는 굳이 여기에 이렇게 쓴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희진님.
여성주의는 남성과 대립하고, 남성을 대체하고, 남성에 대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하는 사유이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반(反)담론(counter discourse)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양한 인식자의 위치를 드러내고, 그 입장과 조건을 경합하는 사유이다. (12쪽)
"계급 역할(당신은 가난하므로 공부하면 안 된다)"이나 "인종 역할(당신은 흑인이므로 실업자가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은 없다. 반면, 성 역할(gender role, "여자는 애를 낳아야지")이란 단어의 존재는 성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인지, 젠더가 얼마나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인지, 얼마나 탈정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24쪽)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정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참여하지도 않으며, 약속은 계속 변화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오해, 오식, 편견,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객관적, 중립적, 보편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진리가 폭력이 될 수도 있고, 백해무익한 정보가 절실한 신앙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는 신이 만든 공정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적 산물이다. 누군가 먼저 말한 사람(주체)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언어는 필연적으로 당파적이다. 이분법은 언어가 만들어지는 가장 일차적인 원리다. (29쪽)
젠더(gender, 性別)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33쪽)
평등 개념은 개인의 고유함(in/dividual, 타인과 공통분모가 없는, 양도 불가능한, 분할할 수 없는 몸)에 근거를 둔 가치다. 다시 말해, 평등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sameness)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과 공정한 대우(fairness)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경합적이다. 또 평등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적용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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