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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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친구이며 굳건한 동지인 다락방님은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리뷰에서 린디 웨스트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있다.’ 동의한다. 천천히 깨닫는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고 좋아하는 작가와 이별하는 시간은 슬프고도 아쉽다.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하게 되었을 , 독자는 소설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자가 스스로를 길가메시와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엘리자베스 베넷과 동일시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독자가 스스로를, 롤리타에게 동일시할 일어난다.(246) 저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여자로부터 빼앗은 작품으로서, 독자가 남자의 이야기만을 듣게 된다는 관점에서 『롤리타』에 대해 언급했는데, 남자들은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겠다고 나타나서는, “당신이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다”, “ 책은 사실 알레고리다”, “당신은 예술의 기본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비난한다. (252)



사진, 에세이, 소설, 그밖의 것들은 우리 삶을 바꿀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예술은 세상을 만든다. 나는 한권의 책이 인생의 목표를 정해줬다거나 삶을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안다. 내게는 그렇게 삶을 구해준 한권의 책이랄 만한 없지만, 그것은 그저 수백 혹은 수천권의 책들이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249) 



나를 구해준 수백권(수천권은 아닌 같다) 중에 여자가 읽지 말아야 책이 다수 포진해 있음을 확인한 글은 <여자가 읽지 말아야 80>이다.

 


작가 에밀리 굴드Emily Gould 벨로, 필립 로스, 업다이크, 노먼 메일러는 “20세기 중반 여성혐오자들이라고 명명했는데, 『에스콰이어』 목록에 올랐고 목록에도 오를 남자 작가를 지칭하기에 알맞고 편리한 별명이 아닐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독서 금지 영역에 포함된다. ... 노먼 메일러와 윌리엄 버로스는 독서 금시 목록에서 상위에 오를 것이다. 아내를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쏘지 않은 작가들 중에서도 읽을 작가는 너무 많으니까 ...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모비 딕』마저도 여자가 명도 나오는 책은 모든 인간에 대한 책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비해 여자가 부각된 책은 여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목록(『에스콰이어』 추천남자가 읽어야 최고의 80’) 좇는 독자는 제임스 M. 케인과 필립 로스에게서 여자를 배울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찾아가야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없는 남자들이다.(234-6)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필립 로스의 이름이 번이나 언급됐다. 『유령 퇴장』을 읽을 어떠했나. 나는 누구에게 감정 이입했나. 나는 누구였나. 내가 동일시했던 사람은 누구였나. 



나는 만찬회 같은 데도 참석하지 않고 영화 구경도 가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휴대전화나 VCR DVD플레이어나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계속 타자기의 시대를 살고 있고, 월드와이드웹이 뭔지도 모른다. 선거 같은 것도 더는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대개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보낸다. 독서도 하는데, 주로 학생 처음 접했던 책들을 읽는다. ...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쓴다. 외에는 침묵한다. (15)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스스로를 네이션 주커먼에게 감정이입했고, 소설 속의 주커먼이라고 말할 , 그를 자신으로 여겼다. 나는 주커먼을 사랑한다. 그를 동경하는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주커먼이었고 주커먼이어야 했으므로. 나는 주커먼이 되기를 원했으니까. 



레베카가 말한다. 



나는 점에서만은 진지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용되고 버려지거나, 쓰레기처럼 그려지거나, 침묵하거나, 아예 나오거나, 무가치하게 그려지는 책을 많이 읽으면,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세상을 만드니까. 예술은 중요하니까. 예술은 우리를 만드니까. 혹은 망가뜨리니까. (255) 



이별을 준비하는 작가가 있기는 하다. 『남한산성』을 사랑하지만 다시는 『칼의 노래』를 읽고 싶지 않았던 나를, 나의 감각을, 느낌을 이젠 조금 믿어보려고 한다.   


아직 필립 로스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자각할 때의 슬픔은, 아직 필립 로스는 아니라고 말하는 나의 몫이다. 머리에 삶의 목적이 오로지 섹스인 인간, 섹스에만 특화된 존재로 그려진 종이, 바로 나와 같음을, 나와 같았음을 기억할 때의 절망 또한 나만의 것이다.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필립 로스를 읽어야 할까. 『유령 퇴장』을, 『휴먼 스테인』을, 『울분』을,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포트노이의 불평』을, 『미국의 목가』를, 『굿바이, 콜럼버스』를, 『전락』을, 『네메시스』를, 『죽어가는 짐승』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해서, 직시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까. 아니면 흐린 기억 속에 그를 묻어, 조금이라도 그를 소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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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14: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휴먼 스테인 읽으면서 얼마나 슬펐던지요. 글을 너무 잘썼는데, 그 잘 쓴 글로 페미니스트를 까는 거예요. 너무 잘써서 설득력이 있는거죠. 그 책으로 여자를 배우면, 페미니스트는 극도의 신경질적인, 젊고 예쁜 여자를 질투하며 자기 모순에 빠지는, 그런 존재인 거예요. 너무 슬펐어요. 그런데 이미 다른 사람은 필립 로스를 읽지 말아야 할 작가에 포함시켰었군요.

단발머리님, 그 감을 저도 믿으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제가 사람들이 다 좋다는 칼의 노래를 읽고, 정체를 뭔지 모르겠는 불편함에 시달리며, ‘김훈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을 때, 남들이 다 좋다 그래도 좋지 않았을 때, 그때 저에게 있었던 감을 저는 이제는 믿어야 하는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감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지금 분노의 포도가 슬퍼요. 여기에 대해 글을 적고 싶지만, 제가 오늘 일이 많아요. 흙.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저를 미워하는 걸 깨달으며 슬퍼요. 페미니스트를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중에 이미 아주 많이 글을 잘 쓰며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슬퍼요. 그래서 스티븐 킹이 더 좋아요, 단발머리님. 스티븐 킹이 세상에 얼마나 강간범이 많은지, 피해자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죄를 뒤집어 씌우는지를 말해줘서 너무 소중해요. 흙흙.

단발머리 2017-09-25 11:47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전, 휴먼 스테인을 읽을 때, 흑/백의 구도에 아주 집중하고 있어서, 솔직히 말씀하신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실... 지금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기도 하구요. 아마 작품을 읽는 그 순간은, 저는 스스로를 흑인임을 속이고 싶어하는 백인.
그것도 백인 남자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크고요. ㅠㅠ

필립 로스는, 자기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인상을 작품에 옮겨 놓았을 테고 그 글은 너무 근사해서... 그래서 설득력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겠죠. 그래, 페미니스트는 이래. 아... 슬프네요.

제게 아주 오랫동안 불편했던 작가가 김훈이거든요. 전,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고.
일면 저도 그 비장한 문장을,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최근에 문학계에서도 김훈의 시선에 대해 평론가가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도 하던데.
아무튼 이제 한 발짝 나아가야 할 시점이기는 해요.

우리의 슬픔이 이제 막 시작이라는 사실에 또 슬퍼지네요.
더욱 슬픈건 다락방님이 좋다고 하신, 스티븐 킹이 전 너무 무서워서... 그게 또 슬퍼요.
스티븐 킹을 읽지 않고 스티븐 킹을 좋아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요.
우린 오늘 슬프네요. 흙흙ㅠㅠ

munsun09 2017-09-25 12:09   좋아요 1 | URL
김훈 작가에 대한 두분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그 불편함이 싫어서 어느순간부터 읽지 않고 있어요. 필립 로스 작품 읽은지 좀 되는데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 오늘 알았네요.
독서에 있어서도 자기 나름의 고집이 어느정도 필요한 거 같아요. 많고 많은 책 중에 나에게 땅기는 거 읽는 다,가 제 독서론! 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쭉 밀어 붙이고 있어요. 주저리주저리^^

단발머리 2017-09-26 09:37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좀 더 믿어야해요. 저는 번역서를 읽다 어려우면 이해못하는 스스로를 탓하지 번역이 이상하다,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이제는 우리 나름의 생각, 판단, 고집도 그것대로 인정하고 비판적 독서의 새 장을 열어야겠어요.
(저... 너무 비장해요?!! ㅋㅋㅋ)
아무튼 굿모닝이예요~~
다락방님, munsun09님^^

AgalmA 2017-09-26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들레르도 여성혐오 대단했다고 하죠ㅎ; 유명한 작가 상당수가 혐의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죠. 그러면서 여성에게 매혹도 되니 미치겠지ㅎㅎ
남성이라는 상징적 본성이 아니라 각자가 그 시대를 살면서 가지게 된 젠더 인식이 반영된 거라 봐야 할 텐데 그 상태에서 작품을 쓰니 벗어나기 쉽지 않죠. 끊임없는 문단 내 성폭력도 그런 우월주의가 깔려 있어서이기도 하고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보란 말은 일종의 면죄부가 되기 쉽죠. 인식이 반영되지 않는 글, 작품이란 게 가능합니까. 입력된 정보로 움직이는 컴도 그건 불가능하던 걸요ㅎ 데이터축적으로 온갖 차별과 비하 발언을 하던 뉴스가 나오기도 했잖아요ㅎㅎ;
존 쿳시 <포> 읽었을 때 남성작가가 여성을 이렇게 깊게 이해할 수도 있구나 놀란 적 있습니다. 존 쿳시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대개 그랬어요. 환경적으로 많이 겪고 보다 보니 쿳시는 온갖 차별에 대한 반감을 작품에도 늘 드러내죠. 노벨상 받을 만 하다는. <포>는 꼭 읽어 보시길^^

단발머리 2017-09-27 10:53   좋아요 0 | URL
여성을 혐오하거나 지나치게 숭상하는 건 하나의 뿌리라는 생각이 요즘에 많이 들어요.
너무 좋으니까 너무 싫은 것 아닌가. ㅎㅎㅎㅎㅎ

존 쿳시의 작품은 <포> 밖에 안 읽어봤는데, 오래전에 읽었을 때는 큰 감동을 못 느꼈어요.
Agalm님이 노벨상 받을만하다 하시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AgalmA 2017-09-2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가 흑인 노예 프라이데이를 더 부각시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를 썼듯이 <포>도 남성 로빈슨이 아니라 여성 주인공을 부각했다는 게 첫번째로 중요했고요. 서술의 방식도 남성적 서사 방식-뚜렷한 줄기가 아니라 여성적- 호소, 내밀함을 잘 살려 냈다는 점입니다. 남성적-여성적 발화방식을 가르는 것도 차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으니 감정의 섬세함을 더 다루려 했다 정도로 하죠^^

단발머리 2017-09-29 08:44   좋아요 0 | URL
아니.... 우리 선생님은 왜 Agalma님처럼 야무지고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Agalma님은 페이퍼도 페이퍼지만, 댓글마저도 독서를 부르네요.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오늘 아침에 읽은 책에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글이 있더라구요.
감정의 섬세함, 여성적-호소, 내밀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기도 하구요.
오늘 아침에는 바람이 쌀쌀하네요~~~ 이제 정말 가을인가봐요^^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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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있다. 극중주의를 주창한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 '극좌''극우'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반면에는 '극중'이 있습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극중주의'입니다." (출처 : 2017.8.29. 프레시안 <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6835&ref=nav_search)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극중주의란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긴다는 건데, 극한의 중간이 정말 국민의 뜻에 가까운가. 촛불을 들었던 국민의 요구는 명확했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국민의 뜻 또한 정확하다. 오해의 소지가 1도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보수, 정확히는 극우를 포기하지 못 해, 보수를 넘어 극우까지를 포용하여 정확히 반을 잘라, 그 가운데선을 굳건히(?) 지켜가겠다고 하니. 그 가운데선은 필시 보수의 땅 위에 그려져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정말 모르고 있단 말인가. 더 이상 실망할 여유조차 없다.

 

성의 구별이 사회적 억압 제도가 아니라 단지 대칭 집단이라는 사고방식은, 최근 몇 년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기승을 부린 극심한 미소지니(misogyny, 여성에 대한 혐오) 현상과 이에 대항한 여성들의 대응을 남혐으로 명명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 집단에게 가장 많이 취조한 내용은 여성주의는 일베와 다를 바 없다.”, “여혐이나 남혐이나 같은 이혐(異嫌)이다.”, “여성의 저항에는 동의하지만, 일베와 같은 방식에는 반대한다.”였다. (24)

 

성별 관계는 계급, 인종 문제처럼 정치적인 것이다. 지배 대 피지배, 중심 대 주변, 강자 대 사회적 약자, 주체 대 타자의 관계다. 그러나 대개 젠더 관계는 남녀상열지사’, ‘음양의 조화처럼 상///우가 균형 잡힌 대칭(/, sym/metry)으로 생각한다. (25)

 

양성 평등에 반대한다는 과격한 제목이 가능한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남성의 지위와 여성의 지위는 대칭적이지 않다(22, 소제목). 어느 책에선가, 여성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미소지니(misogyny)’여성혐오로 번역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소지니여성혐오로 번역되면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어. 너희가 하고 있는 건 남혐(남성혐오)’이야. 너희가 여혐을 말한다면 우리는 남혐을 말할거야.

 

원래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인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 살해)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가시화되면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이 같은 여성들의 사회 운동에 대해 여자들이 남성을 싫어하고 혐오하고 비난한다며 이를 남혐현상으로 명명했다. 여성과 남성은 상호 혐오를 통해 드디어 평등해진 것일까? (10,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일까?>)

 

여당, 야당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쟤네가 더 많이 잘못했지만, 너희에게도 잘못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한 걸까. 기계적 중립이 정의일까. 죽다 살아나거나, 죽을 뻔 하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여성들이 여혐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도 불편한 적이 많았어,라고 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아니, 제대로 된 반응일까. ‘우리도, 우리도~~’라는 응석이 성인에게, 성인 남성들에게 이렇게나 많이 애용(?)되고 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비유하자면,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에 몇 배에 해당하는 발본적(撥本的, radical)인 변환이다.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 여성을 임의적,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여성 노동력 동원을 일과 가정의 양립정책이라고 속이지 말고, 시민 사회와 여성 운동 세력은 여성의 과다한 노동 상황을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운동의 발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53)

 

그녀의 제안은 여성을 직장으로보다는 남성을 가정으로에 가깝다. 남성의 가사 노동 참여, 군대식 직장 문화 개선등을 통해 일과 육아,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노동하는 여성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정의의 문제이자, 남성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고 주장하는데(56),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남성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시 칼퇴근, 정해진 날짜에만 가능한 회식, 남성의 육아 휴직 강제, 획기적인 육아 수당 지급 등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런 강제력이 우리의 문화로 자리 잡히게 된다면, 자신의 예쁜 아기를 아기띠로 매고 아내 손을 잡고 밤산책을 나가는 남성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선선한 가을 밤, 아내와아기와의 산책을 행복한 순간이라 느끼는 남성들이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런 남자가 많다고, 아주 많을 거라고, 난 믿고 있다.

 

매주 토요일만 기다리게 만들었던 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99일자로 연재를 마쳤다. 인기 코너였고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연재가 끝나게 되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이미 절판되어 어떻게 구해야 하나 걱정스러운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서평의 일부다. “이 책은 2의 성과 함께, 내가 여성학 공부를 시작할 때 외워버린 책이다.” 이런 구절에 혼자 흥분해서는, 2의 성을 바짝 끌어안고는 둥가둥가를 하곤 했다. 그녀는 내 글을 읽지 못하겠지만, 나는 굳이 여기에 이렇게 쓴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희진님.

 

 

   

여성주의는 남성과 대립하고, 남성을 대체하고, 남성에 대항하는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안하는 사유이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반(反)담론(counter discourse)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양한 인식자의 위치를 드러내고, 그 입장과 조건을 경합하는 사유이다. (12쪽)

"계급 역할(당신은 가난하므로 공부하면 안 된다)"이나 "인종 역할(당신은 흑인이므로 실업자가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은 없다. 반면, 성 역할(gender role, "여자는 애를 낳아야지")이란 단어의 존재는 성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인지, 젠더가 얼마나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인지, 얼마나 탈정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24쪽)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정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참여하지도 않으며, 약속은 계속 변화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오해, 오식, 편견,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객관적, 중립적, 보편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진리가 폭력이 될 수도 있고, 백해무익한 정보가 절실한 신앙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는 신이 만든 공정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적 산물이다. 누군가 먼저 말한 사람(주체)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언어는 필연적으로 당파적이다. 이분법은 언어가 만들어지는 가장 일차적인 원리다. (29쪽)

젠더(gender, 性別)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33쪽)

평등 개념은 개인의 고유함(in/dividual, 타인과 공통분모가 없는, 양도 불가능한, 분할할 수 없는 몸)에 근거를 둔 가치다. 다시 말해, 평등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sameness)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과 공정한 대우(fairness)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경합적이다. 또 평등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적용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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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22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계적 중립 정말 화가 납니다.
제 프사 보이시죠? 화 잔뜩 난 거.

단발머리 2017-09-22 14: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앞으로 어떻게 될려고~
근데 syo님 프사는 귀여운 맛이 있어서 화낸 마음 평가절하되겠어요 ㅋㅋㅋ

syo 2017-09-22 14:18   좋아요 2 | URL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얼굴이 시뻘개졌구만 ㅋㅋㅋ
컨셉은 ˝분노의 포도알갱이˝입니다.

단발머리 2017-09-22 14:33   좋아요 1 | URL
네, 자세히 보니 그렇군요.
가을은 포도의 계절~~
이제 분노의 포도알갱이가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기계적 중립, 극중주의라며 어정쩡한 스탠스로 국민을 속이려 한다면!!!
저도 분노의 포도알갱이로 변신하겠습니다!!! ㅎㅎㅎ
 
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시녀 이야기속 배경이 되는 상상 속의 나라 혹은 미래 사회 길리어드는 성경의 가르침 중 남성에게 유리한 부분에 근거해 가부장적, 전체주의적 원칙과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다. 영문판 The Handmaid’s Tale의 헌사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는 성경 구절이 시녀 이야기에는 없다. 본문에 나와 있기 때문에 뺀 것 같은데, 내 생각으론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이 구절이 중요한 부분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관심과 애정 그리고 The Handmaid’s Tale을 함께 보내주신 님께 감사드린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멀리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양치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 야곱은 사촌 라헬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위한 7년 무임금 노동을 라반에게 제안한다. 사랑하는 마음에 7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야곱. 하지만, 결혼식 다음날 아침, 술 깨고 정신차리고 보니, 신부는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 야곱은 라반에게 이게 무슨 경우냐며 크게 화를 내고, 라반은 이 동네는 언니 먼저 시집가야 한다며, 라헬도 아내로 주겠으니 7년 더 일하라고 한다. 7 더하기 714. 그렇게 야곱은 자매를 아내로 맞는다. 야곱이 사랑한 건 라헬 Rachel이지만, 아들을 낳은 건 그의 언니 레아 Leah. 남편의 사랑 없이도 레아는 연거푸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이 부분은 그 때 라헬이 한 말이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창세기 30:1-3)

 

시녀 이야기에서도 지체 높은 남자들은 파란 드레스의 아내를 공급받고,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 빨간 드레스시녀배급받는다. 시녀는 인격으로서 대우받지 못 한다. 시녀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첩이나, 게이샤나 창녀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를 그 범주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우리들에게서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했고,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다. 특별한 총애 따위는 그쪽이나 우리 쪽에서 미리 알아서 정리할 테니 사랑이 싹틀 발판조차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다니는 성배다. (236)

 

아내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은 남편의 아이를 낳게 될 시녀들을 증오한다. 시녀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눈 앞에서 아내들에게 아이를 빼앗긴다. 시녀의 존재 가치는 출산으로써만 증명될 수 있기에 시녀는 아이 갖기를 소망한다. 남편은, 지체 높은 남자들은 의례의 밤마다 아이 만드는 의식에 참여한다. 시녀와 함께.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시녀와 함께. 그렇게 셋이 함께.

 

폐쇄적인 지배체계가 도래하는 방식 또한 놀랍다.

 

대재앙 직후, 그들은 대통령을 쏘아죽이고 의회를 기관단총으로 쓸어 버렸고, 군대는 계엄령을 선언했다. 당시 그들은 이슬람 광신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침착하십시오. 그들은 텔레비전에 나와 말했다. 상황은 완벽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

 

그 때가 바로 그들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을 때다. 그들은 한시적인 조치라고 했다. 거리에선 소요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밤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298)

 

대통령 사살(체포/감금), 의회 강제 해산, 계엄령.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 눈물이 날 지경이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동요하지 마라, 일상의 생활을 계속하라. 가만히 있으라.

그들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철저하게 물리력에 근거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가임 여성, 임신이 가능한 기혼과 미혼의 여성들을 시녀로 차출해 가는 과정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 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남성, male)이 아니라 F(여성, Female)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306)

 

그들은 여성의 은행 잔고를 동결시킨다. 여성의 돈을, 여성에게서 빼앗으면서부터, 여성의 돈을 남편에게 귀속시키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특별 조치를 필두로 여성에 대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시작된다. 이제 여성은 돈을 가질 수 없고,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도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행복했던 과거를 흔적 없이 잊어버리는 것이 절망적인 현재를 사는데 더 나을 것인지 생각했다. 이건 꿈일거야,라고 말하며 악몽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또 다시 지옥 같은 현실을 살 때의 절망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 생각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와 아이 낳는 그릇으로서의 여자, 그리고 그 와중에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읽는 시간 내내 무겁고 힘들었다. 무겁고 힘들었는데, 다시 알라딘에 들어가 검색창에 커서를 놓는다. 그리고는 자판을 두드려 이렇게 쓴다.

 

마거릿 애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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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안 읽을 수 없게 만드는 ‘폭력적인‘ 리뷰네요...

단발머리 2017-09-06 14:31   좋아요 0 | URL
저의 폭력성이 syo님에게 잘 전해졌군요.
그럼 성공입니다. ^^

2017-09-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강렬하네요! 딱히 상상, 미래사회 같지 않아요 ㅠㅠ
마거릿 애트우드.

단발머리 2017-09-06 14:32   좋아요 0 | URL
네, 행복했던 과거와 암울한 현재가 계속해서 교차되는데, 아....
전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반했습니다.
애정과 경외의 반함이요^^

꼬마요정 2017-09-06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찾았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데 말입니다. 요즘 재조명 되면서 마치 어제 읽은 것처럼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아마 제가 여자라서일지도요.

단발머리 2017-09-06 14:33   좋아요 0 | URL
아... 꼬마요정님은 진작에 읽으셨군요.^^
전 이 책을 통해 처음 이름을 들었구요. 오늘 아침에서야 <눈먼 암살자>도 그녀의 작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 이제 막 끝나서 강렬함에 아직도 두근두근~~

cyrus 2017-09-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에게 ‘파란 드레스‘, ‘빨간 드레스‘를 입도록 강요하는 남성중심사회가 과거 현실에도 있었습니다. 마녀로 낙인 찍힌 여성, 창녀에게 특정 색깔의 옷을 입혔어요. 그렇게해서 남성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단발머리 2017-09-06 14:35   좋아요 0 | URL
폐쇄적 통제 사회 속에서 남자들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편안합니다. 여자들의 희생으로 얻는 편안함이죠.
복잡하고 세세한 규칙 속에 여자를 밀어넣고 강제하는 건 남자들이고,
밤마다 규칙을 벗어난 여자들 혹은 벗어나도록 용인해준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남자들이죠.
흐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리아 페이- 베르퀴스트·정희진 외 62인 지음, 김지선 옮김, 알렉산드라 브로드스키 & 레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페미니스트 유토피아‘We want more.’의 외침이 현실로 이루어진 유토피아를 한국과 미국의 페미니스트 64인의 에세이, 픽션, , 그림, 인터뷰로 담아냈다. 정희진의 <동네급식소>를 읽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배운 여성이었던 어머니가 전업주부가 되어 아버지의 ()’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차려 놓은 밥도 못 드시는 아버지. 수저통에서 수저가 나와 있어야 하고, 옆에서 생선을 뜯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밥을 드시는 아버지(54). 물론이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 아버지들이 그러했고, 요즘에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에도, 바로 이 순간에도 오늘 저녁 반찬을 걱정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취업, 계층, 비혼 여부를 불문하고 머릿속에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산다. 계급을 초월해 남성들은 이 고민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들은 그 시간에 정치와 문학과 술과 여자를 논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주의 이론에서 여성들 간의 공통점, 즉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가능한 것은 섹슈얼리티(성폭력과 모성)라고 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밥이다. (55)

 

모든 여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똑같은 고민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모든 남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이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 가끔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저녁에는 뭐 먹어? 이런 경우는 고민이라기보다는, 고민에 대한 을 구하는 경우다. 오늘 저녁에는 뭐 하지?가 아니라, 오늘 저녁에는 뭐 할거야?의 물음.

 

정희진은 그 해결책으로 동네 급식소를 제안한다.

 

여성들의 식사 준비 스트레스, 노동, 고민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또 음식 낭비를 막기 위해서 최소한 열 가구 단위로 급식소가 있어야 한다. 이주민이든 관광객이든 누구나 언제든지 들러서 이용할 수 있다. 노숙자도 줄어들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우선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친환경 유기농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24시간 개방 무료 식당이 500미터 간격으로 있는 것이다. 이 정도 간격이면, 식후 걷기를 위해서도 좋다. 편의점이나 ‘00 바게트100미터마다 있지 않은가!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농촌은 배달 차량을 운영한다. 한마디로, 집에서는 취미외에는 식사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56)

 

 

무척이나 애청하던, 시즌 2를 고대하는 <알쓸신잡>에서는 이런 장면을 보았다.

    

 

 

 

 

 

 

김영하 : 저희 집은 요리는 거의 다 제가 해요. 제 처는 졸업했어요, 요리.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있더라고요. 주부니까. 아예 그런 걸 없애기 위해서 은퇴를 공식적으로 하고.

 

집에서 자신의 저녁밥을 차려주는 여성(남성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 여성)을 고용할 수 있는 극소수의 여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계급을 초월해 똑같은 고민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뭐 할까에 자유로운 사람을, 한 명, 찾기는 찾았다. 여기 있다, 은수씨.

 

 

아침에 읽은 책 속에 인용된 시를 재인용한다(오라, 거짓 사랑아, 문정희, 민음사, 2003).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

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

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 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시를 따라 쓰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이 멈춘다. 오늘 저녁 뭐 할까. 감자국 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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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7-08-30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씀 중 저 부분이 가장 멋졌어요.
어쩜 단발머리님이 똬악~캡쳐를!!!
멋집니다^^

단발머리 2017-08-30 21:15   좋아요 1 | URL
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 뭐, 이런 행복한 경우가 있나~ 해서요 ㅎㅎㅎ

AgalmA 2017-09-02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담배 안 피는 여성인데도 폐암 선고 받은 일 관련해 여러가지 요인 추정이 있었는데요. 간접흡연보다 더 충격적인 건 부엌에서 일 많이 하면 가스불 흡입량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얘길...도시괴담인지 확인은 못 했지만 여성들이 이제껏 오죽 부엌데기였으면 이런 말이 나올까 싶기도 했다는...

단발머리 2017-09-05 20:56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저도 그런 기사 본 것 같아요.
그래서 가스레인지도 광파가스레인지로 많이 바꾸기는 하던데....
요리 자주 안 했던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ㅠㅠ
 
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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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린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 나라에 그런 현상이 조금 더 심하다는 걸 고려해도 그렇다. 많이 팔리는 책이 더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더 많이 팔린다.

 

하루키의 문학세계에 대해서라면 덧붙일 말이 없다. 상실의 시대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읽은 전부다. 1Q84해변의 카프카를 도전했다 실패했다. 에세이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그냥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전 세계적인 판매량에 대한 무심한 태도, 외국에서의 소박한 삶, 일본 문단과의 의도적 거리 설정, 달리기, 수영, 새벽 기상 그리고 30년 넘는 작품 활동. 그런 것들 말이다.

 

 

  

  

일인칭 소설을 쓸 때, 많은 경우 나는 주인공인 (혹은 화자인) ‘를 대략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나 자신으로 인식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제의 나는 아니지만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의 모습니다. 그런 형태로 가지를 쳐나가면서 나는 나 자신을 분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지도 모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46)

 

 

소설 바깥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넓은 의미에서 가능성으로서의 하루키 자신으로 분할된 주인공들을 본다. 그들은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어쩌면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하루키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큰 냄비에 물을 끓이고, 토마토를 중탕해 껍질을 벗기고, 칼로 잘라 씨를 뺀 다음 과육을 으깼다. 커다란 스텐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다가 으깬 토마토를 넣고 충분히 끓였다. 수시로 거품을 걷어냈다. (275)

 

두 사람은 식탁에 앉고, 나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으로 만든 소스를 소스팬에 부어 데우고, 양상추와 토마토와 양파와 피망으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물이 끓자 파스타를 삶고 그 사이 파슬리를 다졌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티를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2권, 27)

 

 

나는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없다. 하지만, 하루키가 혹은 하루키의 분신이 이렇게 요리하는 장면들을 읽고 있노라면,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이 막 생기려고 한다. 아스파라거스와 베이컨으로 만든 소스를 부은 파스타라니.

 

초상화 작가인 와 모델이 된 마리에의 대화는 좀 뜬금없다. 문화센터 선생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대담한 대화, 가슴과 성기에 대한 대화를 나눌 여고생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다.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00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읽기를 멈추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뭐랄까. 아주 재미있다고는 못 하겠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읽게 되네. 좀 맹숭맹숭한 느낌인데 말이야, 멈출 수가 없어.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간장 양념장을 끼얹은 연두부 같은 느낌이랄까. 보기에 예쁘고 먹기에 편하고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도 좋지만, ~~맛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지는 않은.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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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27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었을 때 당혹스러웠어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 않은 19금 대화가 많다고 느껴졌어요.. ^^;;

단발머리 2017-08-28 12:16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교 2학년 때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읽었지요.
저 역시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秀映 2017-08-28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기사단장 죽이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어요
한번더 읽어보면 부족함을 채울수 있을까요
그리고 남자주인공이 1Q84의 주인공과 오버랩되는 느낌도 많이 받았구요

단발머리 2017-08-28 12:19   좋아요 0 | URL
전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이야기 자체가 가지는 힘에 관해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 했어요.
아직 2권을 다 읽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구요.
뒷부분이 힘없이 끝나버린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남자주인공이 1Q84의 주인공과 비슷하군요. 전 그 작품도 읽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모두 다 하루키의 분신이니까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가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blanca 2017-09-0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망설이는 중이에요. 저도 하루키를 좋아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일부만 아주 좋아요. 소설의 어떤 부분에서는 하루키 개인과 동일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친 남성 본위의 성적 환타지가 느껴져 곤혹스러워져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삶과 사물과 사건에 대한 담담하고 겸허한 하루키적 자세가 좋아요. 단발머리님 글 읽으니 더욱 관심이 가네요. 2권까지 읽으신 감상이 궁금합니다.

단발머리 2017-09-06 14:45   좋아요 0 | URL
저도 blanca님 의견에 동의해요. 정확히, 남성 본위의 성적 환타지에요.
저도 하루키의 다른 소설을 읽다가 포기한 지점이기도 하구요. 고급 포르노,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성에 대한 묘사나 성에 대한 주인공의 집착이 하루키 문학의 한 부분인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 정도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때가 있구요. 결국 <쓰기>라는 건, 작가 자신이 제일 우선되는 거니까 그것도 하루키의 선택일 테지만, 그러면에서 저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좋아한다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2권 감상 곧 업데이트 됩니다.

전, 오늘 아침에 ‘마거릿 애트우드‘ 찾다가 ‘눈먼 암살자‘로 들어가서, blanca님 리뷰 읽고 왔어요. ㅎㅎㅎㅎ
한 번 읽어보세요. 정말 정말 근사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