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영화 -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 51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었다.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고마워 영화』는 총 51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보았던 영화보다 보지 않은 영화가 훨씬 많은 나는, 보았던 영화에 대한 꼭지부터 읽어 나간다. <우리도 사랑일까>는 좋아하는 벗이 선물해 주어 보게 된 영화인데, 알콩달콩한 사랑의 시작과 쓸쓸한 뒷모습이 한데 엉켜 내내 마음에 남았던 영화였다. 저자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쓴다.

 



이 영화는 틈, 인생을 살면서 생기는 틈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 사이에 생기는 틈은 물론이다. 틈은 언제나 생기게 마련이다. 그건 허기 같은 것일 수 있는데 허기가 온다고 아무 것으로 배를 채우면 포만감은 잠시이고 환멸감만 더한다. … 틈이란 비우고 있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런 능력이 있을 때 틈은 관계를 더 견고하게 한다. 나와 세상, 타자와의 관계에 완충작용을 해주는 것도 틈이다. (94)

 


나는 마고가 느끼는 삶에 대한 열망, 사랑에 대한 희구가 이라는 단어로 모아질 수 있다는 걸 알지 못 했다. 그녀의 표정을 통해 어렴픗이 짐작만 했을 뿐, 알아채지 못 했다. 그랬다. 마고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을 견뎌내지 못 했다. 틈이 주는 시간, 틈이 주는 거리, 틈이 주는 허기를 극복하고자 혹은 이해하고자 그녀는 그렇게 사랑하고 또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틈이 주는 시간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어서. 틈이 주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용서라는 주제를 전면으로 다룬 <오늘>이라는 영화는 감독의 이름을 각인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다큐멘터리 PD 다혜는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파괴한 17살 가해자를 용서한다. 가해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는 차츰 자신의 용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자신이 쉽게 용서해버린 17살 가해자가 또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용서를 말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용서를 강요하는 일이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우리 사회는, 우리 문화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그 정도 했으면 됐다고, 이미 지난 일이 아니냐고.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혐오 사회> 속 카롤린 엠케의 말이 겹쳐진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뜻이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한다. 마치 이 엄청난 일에 대한 단죄에도 요구르트처럼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관심이 생긴 영화는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실비아>이다.  

 


새벽 서너 시, 실비아가 창작에 매달리는 시간이다. 이미 다른 여자에게로 간 남편,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미칠 듯이 시를 쓰며 고갈되어가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가끔 아이를 봐주며 휴식 시간을 주던 아파트 이웃노인이 있었다. … 허름한 복도 천장의 낡은 등을 올려다보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는 그녀. 순간이었다! 생의 결정적인 순간! 똑똑똑… (290)

 


천재 시인 실비아, 계관 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 파경과 곤궁한 생활. 그리고 자살. 그녀의 이름을 구글에 넣어 검색한 후에는 테드 휴즈가 선택한 다른 여자가 애시어 웨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미 9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실비아 생애의 마지막 불행이 모두 테드 휴즈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비아를 덜 사랑했다는 것이 그의 잘못일 수는 없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실비아가 자신의 자리라고 선택한 가정, 사랑과 행복의 자리라고 믿었던 그 자리를 테드 휴즈는 하찮게 여겨 떠나버렸고, 실비아는 가난과 추위와 독감과 우울증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애시어 웨빌은? 테드가 선택한 또 다른 여자 애시어 웨빌은 그와 행복했을까?

 

She was continually distraught at his seeming reluctance to commit to marrying and setting up a home with her, while treating her as a "housekeeper".Most of Hughes's friends indicate that while he never publicly claimed Shura as his daughter, his sister Olwyn said he did believe the child was his. … On 23 March 1969, Wevill gassed herself and four-year-old Shura in their London home. She had sealed the kitchen door and window, taken and given to Shura sleeping pills dissolved in a glass of water, and turned on the gas stove. She and Shura were found lying together on a mattress in the kitchen. <https://en.wikipedia.org/wiki/Assia_Wevill>

 



실비아도, 애시어 웨빌도, 테드 휴즈와는 행복할 수 없었다. 테드는 자신이 선택한 여자를, 사랑했던 여자를,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이렇게 떠나버렸다. 쉽게 버렸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이 책의 마지막이 실비아 이야기여서, 아프면서 슬프다.


사랑이 충만한 시간 크리스마스에 내가 만난 실비아는, 잃어버린 사랑에 절망했으니.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했던 그녀는, 사랑받지 못했다. 그렇게나 열망했던 사랑이 보답 받지 못 했다.

실비아는 그리고 애시어 웨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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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2-23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실비아 책을 샀는데 단발님도 같은 감상을 가진 것 같아 무척 기뻐요 :)

단발머리 2017-12-24 23:06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연기해서 그런가 비극적인 이야기가 더 슬픈거 있죠.
그리고 실비아만큼 불행했던 애시어 웨빌 이야기도 맘에 걸리더라구요.

저도 기뻐요~~ 우리가 같은 감상을 갖고 있다는 게, 그리고 그걸 서로에게 말할 수 있다는게요^^

2017-12-24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8-01-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이 좋으네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

내가 본 영화 리뷰만 먼저 골라 읽었어요~13편 뿐이지만...

단발머리 2017-12-27 09:4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책이예요. 영화와 영화읽기가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려서 저도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물론 저는 본 영화가 거의 없어서~~ 영화 읽기가 주였지만요~~ ㅎㅎㅎㅎㅎㅎㅎ

잘 지내시죠~~~~~
올해도 너무 수고많으셨어요, 순오기님~~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요~~복되고 희망찬 한 해 맞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전쟁과 평화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5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겨울엔 장편이고(from 유ㅂㅁㄷ님), 장편은 역시 러시아 장편이 제 맛이다. 문학동네 톨스토이 탐험단이 되어(from A 님 페이퍼) 『전쟁과 평화 1』를 선물 받았다.


톨스토이라고 한다면,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문호이다. 소설가, 시인이라는 설명을 넘어 사상가라는 호칭 또한 당연시된다. 고전은 지금 읽고 있다는 표현이 부적절한, 이미 읽었어야 했던 혹은 이미 읽은 책으로서,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해야 옳겠지만.

얼른 가보자. <전쟁과 평화>는 처음이다.



1권은 3부로 이루어져있다. 1부는 각 인물이 소개되고, 화려한 사교계의 면면을 통해 당시의 문화를 보여준다. 2부는 러시아군의 일상이 소개되고, 3부는 모스크바 사교계와 러시아군의 전장을 오가며 그려진다.



소설의 중심에는 베주호프 백작(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베주호프)의 아들인 피예르(표트르 키릴로비치[키릴리치] 베주호프, 키릴, 페탸, 페트류샤, 피에르)가 있다. 100여쪽을 읽어가는 동안 주요 등장인물이 소개된 맨 앞장을 연거푸 확인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빈 연습장에 인물이 등장하는 순서대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적어보지만, 그런 수고로도 부족할 때가 다반사다. 피예르는 베주호프 백작의 유일한 아들이지만 서자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 운명이다. 다른 남자들보다 몸집이 큰 편이라 유독 눈에 띄어, 겁먹은 듯한 태도 역시 화려하고 세련된 예법의 사교계 사람들에게 조용한 놀림감이다. 이랬던 피예르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베주호프 백작이 되다니,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독하나 근심 걱정 없는 신세였던 피예르는 별안간 부유한 베주호프 백작이 되어, 밤에 침실에 들어서야 비로소 혼자가 될 정도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바쁜 몸이 되었다. .. 전에는 피예르의 존재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가 만나고 싶어하지 않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화를 내거나 비관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390)



활짝 갠 피예르의 인생에, 태양이 그 빛을 멈추고 어떤 먹구름이 끼게 될지는 다음 권에서



처음에 읽게 되었을 때는, 이런 부분이 좀 이상했다. 안나 파블로브나와 바실리 공작의 대화다.



오늘 축하연은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그런 축하연이니 불꽃놀이니 하는 것이 모두 못 견디게 싫어졌어요.”

당신이 그런 기분이란 것을 알았다면 그 축하연은 그만둘 걸 그랬는데요하고 공작은 태엽이 감긴 시계처럼 대답했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믿길 바라지 않는 말을 할 때 나오는 입버릇이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그건 그렇고, 노보실초프의 긴급 공문서 건은 어떻게 결정됐죠? 당신은 다 알고 계실 테죠?” (15)



이탤릭체는 무슨 이유로 등장하는가,의 의문. 일러두기를 읽지 않아 생긴 일이다.

<일러두기>

5. 원서의 프랑스어(또는 기타 언어) 부분은 이탤릭체로 처리했고, 강조 부분은 고딕체로 처리했다.



말 중간 중간에도 프랑스어를 섞어서 말한다는 뜻인데,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우아한 프랑스어로 말하는, 혹은 말하겠다는 러시아 귀족들의 뜻 모를 도취감이 이탤릭체의 모양 그대로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나는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눈앞에 있는 듯 세심하게 인간 군상을 그려내는 톨스토이의 솜씨에 감탄하고 박수치고 또 감탄한다. 다만 입이 반쯤 벌어진 모습이 예쁜가, 하고 묻고 싶다.



젊은 볼콘스카야 공작부인은 금수를 놓은 벨벳 손가방에 뜨갯감을 넣어가지고 왔다. 엷은 솜털로 약간 가뭇하게 보이는 귀여운 윗입술은 이가 드러날 만큼 짧았으나 오히려 입술이 빠끔히 벌어져 귀여웠고, 어쩌다 가끔 아랫입술에 닿아 입을 다물면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더없이 매력적인 여자에게 흔한 일이지만, 윗입술이 짧고 입이 반쯤 벌어진 그녀의 결점은 오히려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여겨졌다. (23)



입이 반쯤 벌어지면 더 예뻐 보이나. 눈에 아무리 힘을 줘도 입을 반쯤 벌리면 사람이 좀 멍해 보이지 않던가. 더없이 매력적인 여자에게 흔한 일이라는데. 미의 기준이 바뀐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취향인가 혹 아니면, 멍해 보이는 여자가 예뻐 보이나. 그런가 혹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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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12-1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영합니다!!!!! 여긴 겨울의 장편 소설 나라에요~~~~ 천천히 부담 없이 같이 읽어요, 우리....*^^*

단발머리 2017-12-17 22:54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서재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전쟁과 평화> 4권과 러시아어 수능 특강이 눈 앞에 아른거리네요~~
오랜만의 장편이라 먼 길 잘 갈수 있을지 조금 걱정됩니다.
유부만두님 응원에 힘입어 달려보렵니다. 화이팅~~!!!

2017-12-1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18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서구 남성들은 입을 살짝 벌린 여성에 성적 매력을 느꼈어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남성 중심의 시선이 많이 반영된 그림이에요.

단발머리 2017-12-23 17: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소녀는 그렇게 멍해보이지는 않던데....
자세히 봐야겠군요, cyrus님처럼^^
 

이제 11월이 20분 정도 남았고
이 책은 470 페이지 정도 남았다.


바람 부는 겨울밤
나는 차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책을 읽어 나간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모두 잠들어 고요한 밤에
나 혼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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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12-01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스플레인이 ‘내 앞에 꿇어‘ 심산이겠으나 요즘은 ‘나랑 싸우자!‘ 이꼴...뭐, 싸워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만 이런 정신 상태인 사람과 바람직한 대화가 이뤄지기 쉽지 않죠.

단발머리 2017-12-01 12:19   좋아요 1 | URL
으흠... 그러게요. 레베카의 실화가 증명하듯이 여자가 말해도 말이예요. 지금 맨스플레인할 타임이 아니예요~ 해도 그냥 직진이죠.
바람직한 대화 어려워요. 쉽지 않죠~~^^

다락방 2017-12-01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좋네요. 전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 단발님은 또 벌써! 저보다 먼저! 읽으시네요. 아아. 왜이리 갈 길이 먼겁니까!

그나저나 남자들이 맨스플레인하는 걸 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쵸?

단발머리 2017-12-01 12:25   좋아요 1 | URL
좋죠좋죠~~~162쪽, 235쪽 가히 압권입니다.
우리의 갈길은 멀지만 함께 가니까 좋아요.

저는 제인 오스틴이 작품에서 맨스플레인 은근하게 까는 거 보고서 깜놀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해요. 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더라구요. ㅎㅎㅎㅎㅎㅎㅎ 웃어야지요 ㅎㅎㅎ

stella.K 2017-12-0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은 대체로 쌍방향소통이란 걸 잘 못하는 경우가 많죠.
맨스플래인이 곧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화 좀 하려고 하면 싸우자고 덤비는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여자들도 그것을 묵인 방조해왔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대화의 기술을 좀 배우면 좋을텐데.ㅠ

단발머리 2017-12-03 22:35   좋아요 0 | URL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자 중에도 쌍방향소통을 할 수 있는, 할 만한 남성도 있을 거라는 희망^^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때 많은 경우, 남자들은 화를 내더라구요.
여자들이 그걸 묵인방조했다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상황이 별로였다는 생각도 드네요.
 

 




나는 포도가 새겨진 거울을 청소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본다. 응접실의 오후 햇살에 비친 내 피부는 희미해져 가는 멍 자국처럼 옅은 자주색이고, 이는 푸르스름하다.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

 


여기 38쪽까지 읽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2의 성』을 펼쳤다.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해둔 페이지들을 훑었다. 생각보다는 금방 찾았다.




신화를 설명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신화는 손쉽게 파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신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결코 고정된 대상으로서 의식의 정면에 놓이는 일이 없다. 너무나도 변덕스럽고 모순 투성이라 그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데릴라(삼손을 유혹한 여자)와 유디트(적장을 죽인 열녀의 전형), 아스파지아(고대의 탕녀)와 루크레티아(정숙한 여자의 전형), 판도라(미녀의 상징)와 아테네(제우스의 딸, 지혜의 여신)처럼, 여자는 이브인 동시에 성모 마리아이다. 여자는 우상이고, 하녀이며, 생명의 원천이고, 암흑의 세력이다. 진리의 소박한 침묵인가 하면 기교이고, 수다이면서 거짓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의사이며 마술사이고, 남자의 먹이이며 파멸의 씨앗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없으나 남자가 갖고 싶어하는 전부이며, 남자의 부정이고 남자의 존재이유이다. (192)

 


우상이며 하녀, 생명의 원천이며 암흑의 세력. 침묵이며 수다이고 의사이며 마술사. 남자가 아닌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전부.

 

여성이 현실이 아닌 신화의 자리에 있을 때, 여성은 추앙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순결한 성녀가 아니면 몸을 막 굴리는 년이고,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천성이(라고 믿어지는) 분명한 모성을 거부한 매정한 어머니가 되어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시몬 드 보부와르의 글은 김이설에게까지 닿는다.


 



윤서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성적에 목숨 건 여자아이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성적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따라다니면서 화장이나 하는 골빈 여자애였다. 윤서도 내 딸아이도 요즘 여자애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 <「경년」, 김이설>

 

 





여자에게는 중간이 없다. 여자는 미녀이거나 추녀이며, 성녀이거나 마녀이다. 그 중간은 없다. 어떤 사람이 인간답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자는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인간 표준 중의 하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기준이 되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항상 모자란 사람으로,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여자가 아닌가.

 


38쪽까지 읽고 너무 길었다.

다시 그레이스에게로 간다. 그녀가 왜 괴물이 됐는지 아니, 그녀가 정말 괴물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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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1-29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여러분 빨리빨리~~ 페이퍼로 <현남오빠에게> ebook 특별이벤트 알려줘서 고마워요.
한참 후에나 찾아 읽었을텐데, 다락방님 덕분에 ‘손 안의 책‘이 됐어요. 땡큐요~~*^^*

다락방 2017-11-29 15:33   좋아요 1 | URL
우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되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짱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참 잘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쓱으쓱)

단발머리 2017-11-29 15:46   좋아요 1 | URL
참 잘했어요~~~ 다락방님^^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여전히...
참 잘했어요~~~~ : )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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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달링턴 홀의 집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새주인이 빌려준 포드를 타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길,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기억을 되살려 지난 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책뒷면의 줄거리 부분에서는 자신이 평생을 충직하게 모셔왔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서 자신이 지켜왔던 명문과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지나가 버린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라고 적혀 있는데, 좀 허술한 서술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황혼 녘에 비로소 깨달은 잃어버린 사랑, 그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라는 문구가 광고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스티븐스에게 켄턴 양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던가,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를 건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영국의 진정한 집사, 위대한 집사의 대열에 설 만한 사람이라는데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평생 동안 자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서도 업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진정한 신사를 모시고 있음에 대해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지금은 뭐라고 말하는가.


 

그래, 노인장이 정말 그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 아니요.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그분이 달링턴 가문으로부터 그 저택을 사셨거든요.” (153)

 

얘기해 봐요, 스티븐스. 그 달링턴 경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죠? 보아하니 그 사람 밑에서 일한 모양인데.”

아닙니다, 부인. 아니에요.”

, 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157)

 

당신은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의 대답은 이를 데 없이 단호하다. 물론, 나치의 지지자로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던 옛 주인 달링턴을 옹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주인이 하고 있는 일에 관여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를 벗어난 일이라고 판단했다. 더 넓은 세상을 대면한,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한 주인의 의견이 무조건 옳은 것이라 한결같이 믿어왔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하녀들을 저택에서 내쫓으라는 잘못된 지시를 묵묵히 수행한다. 그는 옛 주인 달링턴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집사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했다. 달링턴 집사로서의 삶은 그의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주인을 모른 척 하고 있다. 그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 바쳤던 충성스러웠던 그의 인생 전부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양새다.

 


여행길에서 보여 준 스티븐스의 언행은 어처구니없는 정도를 넘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포드 자동차에 여느 신사와 다름없는 우아한 옷차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예법과 고급스러운 어투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그를 모두 진정한 신사로 생각한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한다. 물론 스티븐스가 유도한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꼈다면 자신은 진정한 신사가 아니라, 신사를 모시던 진정한 집사였음을 밝혀야 할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는 이전의 단호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실례합니다만 선생님, 혹시 처칠 씨도 만나 보셨나요?”

처칠 씨요? 그분도 저희 집에 여러 차례 오셨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 테일러 부인, 제가 중대한 문제들에 한창 깊이 관여하던 시절의 처칠 씨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조차 받지 못했답니다. … (232)

 


시골 사람들은 처칠 씨를 직접 보았다는 스티븐스의 말에 모두 존경과 감탄을 연발한다. 저명인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모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니라고 아니하셨으니,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주세요. 진짜 신사의 예리한 포착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을 때, 스티븐스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홀가분하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그 홀가분한 일을 왜 그렇게 미뤄 두었을까.

 

마지막까지 좋아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스티븐스씨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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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1-29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어째서..왜때문에... 단발님이 별 셋을 준 이 리뷰를 읽고 이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겁니까? 망설이지 않아도 좋긴 해요. 책은 이미 집에 사두었으므로... 몇 년전에....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17-11-29 13:19   좋아요 1 | URL
별점 조금 더 줘야겠어요. 3.5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니, 근데 다락방님은 이 책을 몇 년전에 사두었다는 말이예요?
역시, 다락방님의 안목~~ 가즈오를 미리 알아보셨군요.
저는 노벨문학상 때문에 이 작가를 알게 되었고, syo님이 가즈오 소설 주르르 읽는 거 보고 자극받아서 ㅋㅋㅋㅋㅋ
그래서 읽습니다. 한 권 더 읽으려고요. <나를 보내지 마>, 보내지 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