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통의 아줌마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내’가 있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가 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이 규정하는 나는 보통의 ‘아줌마’다.

큰 아이가 18개월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참동안, 아니, 근래에도 나는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일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일단 외모는 ‘일하는 여성’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실상은 ‘노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도, 전업주부 자신들도, 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말했다. 가사노동은 노동의 범주에서도 ‘소외’된다고. ‘가사 노동’은 ‘노동’이 아니기에, 나는 ‘노는 사람’, ‘쉬는 사람’, ‘집에서 애 보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책을 읽어주고, 책을 골라준다. 게다가, 게다가 나는 가끔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책을 읽는다. 나는, 나 자신이 ‘보통의 아줌마’는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보통의 아줌마’로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4년 다니다가, 지금은 집에서 ‘애를 보는’, 집에서 ‘노는’ 그런 보통의 아줌마로 본다. 나는 보통 아줌마다.

2. 기독교 비판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이들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각 개인에게서 오늘을 빼앗는 건데, 그건 사랑을 빼앗는 거거든요. 어떤 형식이든 구조는 똑같아요. 우리의 억압 체제를 비판하려면 자본, 기독교, 권력을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해요. ...(중략)

기독교는 붕괴돼야 해요. 인간에게는 악의 축이에요. 인문학자는 반드시 기독교를 비판해야 해요. 인문학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남루한 거예요. 인간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그래서 고통의 폭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그보다 작은 고통을 지닌 사람을 품어줄 수 있어요. 글에 힘이 있고. ... 신을 죽인 그 곳에서, 그 피를 기억하는 곳에서 인문학자는 살아나가는 거예요. 인간을 제외한 일체의 것들에 기대지 않겠다는 자세로 불행이든 뭐든 우리가 끌고 가야 하는 거예요. (410쪽)

만약 강신주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형교회의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해서, 이를 테면 부자 세습에 대해서, 화려한 교회 건물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에 대해서, 보수화에 대해서, 우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라면 난, 긴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잘못된 일이다.

대형 교회 당회장직의 부자 세습은 잘못된 거다. 지나치게 화려한 교회 건물은 잘못된 거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해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의 보수화 및 우경화는 우려할 수준을 넘어섰다. 많은 부분에 있어,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기득권층의 권익 보호에 적극적일 뿐 아니라, 이미 자신들 스스로가 ‘기득권층’이다.

그런데, 강신주가 비판하는 기독교는 현재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독교의 부정적 행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 가지 괴물, 자본, 기독교, 권력을 비판할 때, ‘기독교’ 그 자체를 비판해야만, 즉, ‘신을 죽여야’만 인간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안 죽으려면 내가 악마가 되면 돼요. 조금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고 단호하게 공격해야 해요. 종교 비판 책은 그렇게 써야 해요. 일체의 틈을 안 줘야 해요. ‘나는 사실 기독교 신자지만 요즘 교회는 비판해요’ 이것도 허용하면 안 돼요.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113-4쪽)

‘나는 사실 기독교 신자지만 요즘 교회는 비판해요’. 이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중학교 1학년 여름, 아니면 봄. 토요예배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토요예배가 ‘학생회 모임’, 표현 그대로 ‘학생들만의 자치 활동’이어서 별다른 순서가 없었다. 찬양을 30분정도 한 후에, 전도사님의 말씀을 잠깐 듣고, 그 후에는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특별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아, 주로 ‘노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게임도 하고, 새로운 찬양도 배우고, 부활절 즈음엔 계란을 삶아 포장하고, 어버이 주일엔 꽃을 만들고,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그리고 가끔 청소를 하고, 그런 식이었다.

그런 토요일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찬양 시간을 갖던 중, 그 날 따라 이 찬양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주시는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찬양하기 원하네

예수 처음과 나중되시는

오 예수 날 위해 고통당하신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예수 왕의 왕이 되신 주

예수 당신의 끝없는 사랑

오 예수 목소리 높여 찬양해

가장 귀한 귀한 그 이름

듣는 사람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끔찍하게 느껴질 만한 가사라는 거, 나도 안다. 아마 강신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다.

나는 걸음마를 막 떼었을 때부터 사촌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었다. 그 때가 중 1이었으니, 시간으로 따진다면 거의 10년 가까이 교회 교육을 받아온 터였다. 그래서, 그 날, 그 토요일 오후, 내가 느낀 충만한 감정들과 내가 나의 것으로 인식했던 생각들 전부가 어쩌면 ‘내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과 관념이, 그리고 느낌과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 난 설명할 수 없다.

확실한 건, 그 날, 그 토요일 오후에, 나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했다는 것이다.

2000년 전, 로마의 식민지였던 작은 나라의 촌구석에서 태어나, 특별하고 권위 있는 설교로 대중을 사로잡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그 남자, 로마에 대한 반란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실망과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했던 그 남자,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어졌다. 그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었다는 그 말이, 믿어졌다.

강신주는 말한다.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는 바로 지적했다.

그가 말한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을 확인하는 핵심적인 물음 중의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자신의 삶의 주권을 “예수님”에게 내어 놓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핵심적 가치이다.

나는 ‘인문학자’가 아니고, ‘인문학 서적 편집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보통의 아줌마’다. 내 안의 믿음, 내적 확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믿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4.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싫다고 할 때...

인문학자로서 대척해야 하는 결정적 지점은 결국은 ‘종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신주는 조금 후에,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좀 더 견고해진 후에, ‘악마’가 되어, 조금의 빈틈도 없이 ‘기독교 철학’을 공격하는 책을 내겠다고 했다.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

2010년, 처음 강신주의 책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강신주가 너무 좋았다. 서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니, 수정해야겠다. 서인국만큼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남자는 섹시하다. 자유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인문학자, 자신의 삶과 앎을 일치시키려 하는 남자,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일이라며 지방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 하루에 4명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남자, 설악산을 100번이상 올라갔다는 남자, 이런 남자가 어떻게 섹시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한다. ‘신’에 기대어 살려는 사람, ‘기도로 퉁쳐 버리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싫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토요일 밤, 새벽 3시까지 이 책을 손에 잡고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내가 싫다고,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말이다.

답은 아직도 찾지 못 했다. 당연하다. 강신주는 변하지 않을 테고, 아마 그의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책을 왜 읽는 걸까. 내 생각을 바꿀게 아니라면, 그럴 게 아니라면, 왜 그의 책을 읽는 걸까.

더운데, 속상해서 더, 더운 오후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해서, 난 더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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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해 드릴 댓글을 달고 싶지만, 어떤 말도 찾을 수가 없고요,
다만 이 글이, 이 페이퍼가 정말 좋다고, 그 말씀은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이 책 읽어볼게요.

단발머리 2013-06-07 17: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감사해요.
다락방님 댓글과 졸리의 미소가 저를 위로해줍니다.
이 책 읽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다음 달에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요. *^^*

2013-06-19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9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5 0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어느 순간 유령으로 변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던 지승호가 강신주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얼굴’에 대면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강신주도 맨얼굴이다. 생얼의 남자 둘, 멋있다.

1. 그가 바라는 것

그렇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저의 책이나 강연이 여러분 스스로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삶을 돌아보고, 자신만의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여러분을 자극했으면 좋겠다는 것 말입니다. (597쪽)

프롤로그를 읽어 지승호의 마음을 헤아리고, 에필로그를 읽어 강신주의 마지막 당부를 먼저 확인했다. 그렇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문학자인 그가 책을 읽는 내게 바라는 바다.

2. 삶이 투영되는 책읽기

아까도 얘기했지만, 체제는 항상 우리를 사랑 못 하고 교감 못 하게 쪼개놔요. 경쟁시키고. 그래서 마르크스도 분업이 최악의 원리라고 한 거예요. 시는 그걸 가로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를 읽고 고전을 읽으면서 동시대와 교감하고 윗세대와 공감하며 교감의 폭을 넓혀야 해요. 자기가 반영돼 있는, 자기의 삶이 투영되는 책 읽기를 해야 하는 거죠. (215쪽)

아름다운 미사어구에 감동받거나, ‘내가 시집을 읽는다’는 여유에 빠질 때가 아니다. 시를 통해 동시대와 교감하고 윗세대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반영하는 투명한 책 읽기를 해야 한다.

3.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내가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읽히는데, 내가 베르테르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고 베르테르가 나였으면 나처럼 사랑했을 거라는 경지에 오를 때 느껴지는 공감과 울림이 있어요. 이게 인문학적 독법의 핵심이에요. 역사책을 읽든 고전을 읽든.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의 의사소통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315쪽)

책 전체를 통틀어 서너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이다. 진짜 제대로 사랑을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제대로 읽힐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책을 읽었다. 5학년으로서, 5학년만큼의 생각의 범위 내에서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제대로 읽었다. 그 때, 나는 베르테르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유치하고, 미숙하고, 어설프기는 했지만, 그 때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제대로 읽었다.

4. 뇌사와 장기기증

의학 분야에서는 미국만 해도 육체를 줄 수 있다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미국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문제는 우리 출판계가 미국 책을 너무 많이 번역한다는 거예요. 뇌에 대한 책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뇌사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됐잖아요. 그런데 뇌사는 그렇게 나이브하게 볼 문제가 아니라고요. 장기 기증의 문제가 없으면 뇌사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뇌에 대한 문제는 곧 장기 기증 문제라고요. 뇌사가 한 번 죽음으로 인정돼버리면 장기는 소유주가 없는 게 된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기증하기로 했다거나 가족이 없다면 장기의 소유권이 없는 거예요. 마치 해부학 실험실에 있는 시체처럼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사물이 되는 거예요. 그게 위험한 거죠. (456쪽)

한 때, 장기 기증 서약을 하는 게 유행인 때가 있었다. 특히, 각막에 대한 기증 서약이 유행했는데, 유명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서약에 동참했다. 나는 미래의 ‘언젠가’ 불의의 ‘사고’가 나서, ‘뇌사 판정’을 받아, 내 ‘각막’을 ‘전해준다’는 가정 자체가 무서웠다. ‘각막’을 준다는 건, 의학적으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전제할 테니까.

5. 자살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난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485-6쪽)

6. 자기 계발서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우리 사회가 <쇼펜하우어 인생론>의 자본주의화된, 세속화된 버전이거든요. 열심히 자기를 계발하는 거죠. 계발하면 자본주의가 좋아해요. 노예가 되기 위해서 노예적 기능을 익히는 거예요. (488쪽)

7. 글쓰기

블로그는 초보적 글쓰기로는 괜찮은 것 같아요. 블로그의 매력은 자기가 쓴 글에 코멘트가 달린다는 거예요. 이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를 보는 걸 통해 글의 수준을 올릴 수 있으니까 블로그가 활성화되면 굳이 대학원 안 가도 돼요. 왜냐하면 문과대 대학원은 사실상 글쓰기 연습이거든요. 철학과 같은 경우는 자기가 글 써서 발표하고 코멘트 듣는 과정이 있고요. 매번 리포트라든가 완성된 글을 쓰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교수한테 평가도 받고. 그런데 블로그에 쓰면 구태여 대학원 다닐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글쓰기 연습은 될 수 있죠. (508쪽)

강신주는 초보적 글쓰기로 블로그를 추천한다. 블로그가 활성화되면 굳이 대학원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한다. 초보적 글쓰기라, 좋았어, 한 번 해 보자. 초보적 글쓰기.

8. 산

산에 가면 저는 거의 안 먹어요. 사람들 끌고 가느라. 기질적으로 그렇게밖에 못 해요. 치명적으로 저 자신을 해쳐요. 끊어버려야 하는데 못 끊어요. 시작하면 끝까지 가요. 혼자 속 아파하면서. 짐이 무거워서 힘든 게 아니에요. 저를 의지하고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하면 업고도 가요.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 배신감, 이런 게 상처가 되고 힘든 거죠. (512쪽)

강신주는 사진을 보던, 인터넷 강의를 잠깐 보던, ‘강하다’는 인상이 지배적이다. 날카롭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런데, 지방 강의 얘기라던가,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가감없이 느껴진다. 자신이 말한 대로, 인문학적 정신에 입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맨얼굴’로 대하다 보면, 상처를 많이 받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팍한 세상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려니, 순수하게, 정직하게 살아가려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든다.

9. 맨얼굴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동심을 가져야 해요. (586-7쪽)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을 만나지 말자.

10. 추천도서

<시여 침을 뱉어라>, <벽>은 확인해야봐야 한다.

이성복, 황지우, 함민복, 김현, 김윤식의 글은 찾아봐야 한다.

<이상연구>, <이광수와 그의 시대>, <임화연구>, <파시즘의 대중심리>,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무소유>, <오래된 미래>, <스펙타클의 사회>는 읽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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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신랑이 책을 들고 왔다. 나도 도서관에 신청해놓았는데, 신난다, 주말엔 가볍게.

책은 무겁지만, 가볍게.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으나...

 

 

 

 

 

 

 

 

 

 

 

 

 

 

프롤로그, 에필로그까지는 괜찮았는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이건 뭐, 사방에서 난도질.

 

책을 덮었다. 신랑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부담스럽다. 부담스럽다, 강신주가."

 

언제나 그렇듯이 신랑의 대답은 담백하다.

 

"읽지 마."

 

근데 그럴 수가 없다.

 

"근데, 좋아. 막, 궁금하고, 읽고 싶고. 근데, 너무 부담스럽고."

 

내가 좋다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싫다고 한다.

정확히는 나같은 사람이 싫다고 한다.

난 어쩌냐.

 

난 강신주가 좋고, 그의 이야기가 좋지만,

그가 말하는 대로, 내 삶을 바꿀 수는 없을 거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읽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싫다고 할 때는...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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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12일, 대통령 탄핵안 소추라는 헌법사상 유래 없는 ‘초국가적 위기 상황’에 온 국민이 뉴스를 통해 새삼스레 ‘사회 교과서’의 ‘대통령 탄핵’ 파트를 다시 공부하고 있던 때, MBC 손석희의 100분 토론에 유시민이 나왔다. (이 때는 'MBC'와 ‘손석희’가 모두 언론 공정 보도의 대명사였는데, 이제 ‘손석희’와 ‘공정성’은 떠나고, ‘MBC’만 남아있다. 나는 이 단락을 5월 7일에 썼다. 손석희는 진작에 ‘프리’ 선언을 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계속 맡아오던 터였다. 그런데, 5월 10일이던가, ‘손석희의 시선집중 하차와 JTBC행’ 뉴스를 들게 되었다. MBC를 완전히 떠났다. 이건 또 뭐야, 내가 쓰면 쓰는 대로 되는 거야?)

아수라장이 된 국회, 서로 밀고 당기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탄핵안이 가결되던 순간 단상에 올라 울부짖던 한 사람. 그 모습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었는데,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유시민이 그 날 TV 화면에 등장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요, 아무리 대통령이 미워도요,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요.”

오랫동안 내 머리 속에 남아있던 유시민의 모습은 그 때의 모습이다. 넥타이를 풀어헤쳤던가, 아니면 넥타이를 아예 매지 않았던가. 조금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 평소의 그와 다른 그 때의 그 모습이다.

나는 맞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글을 썼다. 진술서를 쓰는 동안만큼은 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는 게 정말 괴로웠다. 수사관들만 팬 것이 아니다. 무술 유단자라는 헌병들도 ‘군기’를 잡는다면서 근무자가 바뀔 때마다 팼다. 수사관은 몽둥이로 팼지만 헌병은 손과 발로 팼다. 체육관 천장에 매달린 샌드백이나 격파 시범용 송판이 된 기분이었다. 잠시라도 매를 피하려면 진술서를 써야 했다. 하루에 백 장을 쓰기도 했다. (151쪽)

나는 199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가서, 00학번이 학교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유시민이 말하는 시대를 겪지 않았고, 그런 시대를 겪었던 선배들도 보지 못 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신입생일 때, 선배들, 그러니까, 그 때 3학년이었던 선배들은 그런 선배들의 선배들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조금은 기억해보고 노력했던 것 같다.

첫 번째 과MT, 화기애애한 분위기, 부회장 언니는 정성들여 쓴 게 분명해 보이는 대자보를 한 쪽 벽면에 붙였다. 처음 보는 노래였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됐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바위? 웬 바위? 하면서 노래를 따라불렀다. 내용은 동요같은데, 리듬이, 그러니까 곡의 분위기는 동요도 아니고, 가요도 아닌, 그 때로서는 생소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특별할 ‘느낌’이었다. 그게 ‘민중가요’였다는 건 한참 후에야 알게됐다.

그러니, 맞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글을 썼다는 그의 이야기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런 성의없는 문장으로 지나치기엔 우리의 현대사가 가슴 아프다. 지금, 참 좋은 세상에 살게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세월들을 지나쳐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좋은 시절 오는가 싶더니만, 작금은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던 사람들과 그 패거리들이 ‘도덕성’ 내지는 ‘여자 인턴 다루는 법’을 ‘잃어버려’ ‘국제적으로’ 찾으러 다니는 세월이다.)

아무튼 맹렬하게 진술서를 쓰는 와중에 그는 자신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한다. 맞으면서, 맹렬하게 맞으면서 발견한다.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4쪽)  

국제 가수 싸이, 은반의 여왕 김연아, 백신 박사 안철수, 밀리언셀러 작가 혜민 스님, 국민 미남 장동건도 부럽지만 열등감은 없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나무를 오르고 있을 뿐이다. 나도 적당한 나무를 골라 오르면 된다. 그게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가 아니면 어떤가. 내게 맞고 오르는 것이 즐거운 나무라면 된 것 아니겠는가. (44쪽)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은 새겨둘 만하다. 경쟁은 얼마나 깊숙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와 있는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니다. 생후 6개월부터 시작되는 영어, 수학, 과학, 창의력, 논술 수업에, 미술, 피아노, 바이올린, 태권도, 발레, 골프, 바둑, 학교 수업은 더 말할 나위 없다. 6개월 선행은 기본이요, 1년, 2년 선행도 보통에 속할 정도다. 사회가 학교의 서열에 따라 학생들을 평가하니,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우수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출혈경쟁‘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 사람을 그 자체로 보아 주는 것, 한 인간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 그것은 정말 불가능할까. 현재로선 불가능한 것 같다. 학업 성적 이외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대학 이름 말고는 물어보지 않는다. 아무도.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는 건, 김연아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다. 한 때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 했던 아사다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즐기면서 경쟁에 임할 수 있는가. 방법은 경쟁이 느슨해지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경쟁의 강도를 느슨하게 할 수 있을까.

초등 1학년, 4학년 엄마로서 제안 하나 하자면, 초등학교에서 ‘시험’의 빈도를 줄여 보면 어쩔까 싶다. 내 생각으로 최소한 3학년까지는 학교시험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기본적인, 정말 기본적인 평가를 위해 시험이 꼭 필요하다면, 1년에 2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가는 게 재미있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책읽기를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초등 저학년 ‘학습’의 처음과 끝이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강도의 학습이란 것은 그 이후에도 할 수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이후에도 공부하고, 시험 볼 시간은 창창하다.

‘특별수행원’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따라다니면서, 국무총리가 그 나라 임금님이나 장관들을 만날 때 아무 말 없이 좌우에 앉아 모양을 내 주는 사람이다. ‘외교는 의전이 절반’이라고 하니,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지만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의전 임무’를 수행했다고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196쪽)

나는 이런 식의 유머를 좋아한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따라다니면서 좌우에 앉아 모양을 내 주는 사람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가 조금 중요한 일을 했으면, 꽤 중요한 일을 했다고 하고, 자기가 비교적 중요한 일을 했다면, 아주 중요한 일을 했다고 한다. 자기가 진짜로 중요한 일을 했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시민은 말한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지만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의전 임무’를 수행했다고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나는 이런 자세가 좋다. 힘이 들어간 사람은 넘어지기 쉽다. 힘이 들어간 사람이 넘어지면, 다치기도 많이 다친다.

지금의 5060은 그렇게 한 시대를 살았다. 그렇게 자기의 시대를 살면서 대한민국을 산업화와 민주화 둘 다 모두에서 성공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와 인권유린, 부정부패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전적으로 정당하지만 그것이 그 시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여겨진다면 일정한 반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5060세대가 독재자의 딸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지난 시대와 자기 개인의 삶을 동일시하는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231쪽)

지난 대선 이후에, 대선 패배에 대한 분석 중, 나는 유시민의 이 분석이 가장 설득력있다고 본다. 투표율이 높다고 헤헤거렸는데, 개표 해 보니, 결과는 예상 외였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투표했지만, 더 많은, 훨씬 더 많은 수의 5060이 투표에 나섰고, 박정희의 시대를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는 5060은 투표장에서, 기표소 속에서 박근혜를 선택했다. 이제 더 절망할 일은, 더 창피할 일은, 이제는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사건 사고 참 다양하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유시민을, 말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유시민이 좋고, 수없이 회자되는 ‘강력한 싸가지 없음’과 웬만하면 포기하기 싫다는 그의 ‘아메리카노’도 사랑하지만, 하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다. 책 제목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완전히 수긍될 정도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무거운 고민이 역력히 드러난 그의 글을 읽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랑하며, 연대하며 살고 싶다는 유시민을 말릴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오랜 세월을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아쉬울 뿐이다. 다만이 아니다. 많이 아쉬울 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5월 23일이다.

그 날처럼, 오늘도 그렇게나 푸르른 날이다. 그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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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6-21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도 감동과 뭉클~물결이 출렁입니다~

단발머리 2013-06-21 08:4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생각해보면 평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던거 있죠.

노무현 대통령님 당선되신 일이나, 탄핵때문에 대통령 직무가 중단된 일이나, 다시 대통령 업무로 복귀하신 일이나, 5월 23일의 일이나, 모두 다요.

너무나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고, 부끄럽고, 억울한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도 사랑하면서 연대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해야겠죠.

가슴 한 구석 너무 시리고 아프지만, 희망을 생각해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요.........

 

1. ㄱ초등학교 도서관, ‘교사용’ 코너에서 골랐다. 신랑이 자기가 읽는다고 가져가버려 반납도 못 했다. 연체다.

2. 불안하고 불온하고 불쌍하다, 청춘들의 뇌 - 정재승 교수

아이의 전전두엽은 계속 발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고요. 25살이 넘도록, 사실은 30살 가까이 되도록 전전두엽은 계속 발달하고 성숙합니다. 그들이 전전두엽을 많이 쓰도록 시간을 확보해줘야 합니다. 하루 2-3시간 정도는 혼자 책상에 앉아 낑낑대면서 두세 문제를 풀 때, 학원에서 스무 문제 쭈르륵 푸는 것보다 전전두엽이 훨씬 더 발달합니다. 좋은 부모가 할 일은 선생님으로부터 학교로부터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TV로부터 게임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가 혼자 세상과 대면할 수 있도록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시도하게 하고, 실패를 용납해야 하는 거죠. 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전전두엽으로 뭔가를 시도하고 스스로 규제하고, 그게 실패하면 어떤 게 잘못됐다고 얘기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89쪽)

 

좋은 부모가 할 일은 아이에게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억지로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나는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안 될까.

3. 청춘은 따로 없다, 내 스타일이 있을 뿐! - 김어준 총수

반드시, 열심히, 연애를 하라

그래서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수컷들의 수작을 의심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검증하려 하는 암컷들의 후예들입니다. 이게 생물학적으로 정확성이 있는 거예요. 여자들의 치러야 할 비용이 훨씬 컸기 때문에, 들이대는 건 남자들의 몫인 거예요. (141쪽)

 

김어준 총수가 말하는 연애 시 주의할 점

여자 : 마마보이를 조심하라

남자 : 주의할 점 없음. 무조건 들이대라.

아침을 먹고 있는 딸롱이에게 말했더니, ‘컥’하고 웃는다. 알고 웃는 건 아닐텐데. 딸롱아, 그 의미를 알아라. 꼭 알아야 한다.

남자가 연애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건 거절이에요. 반면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시절로 돌아가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유기 공포가 연애를 지배합니다, 무의식중에. 어쨌든 정리하면, 남자는 여자의 관심을 과대 추정하고, 여자는 남자의 관심을 과소 추정하게 돼 있어요. (142쪽)

 

“남자는 여자의 관심을 과대 추정하고, 여자는 남자의 관심을 과소 추정한다.“

나는 여자사람이니 남자의 경우는 모르겠고, 여자부분은 맞는 것 같다. 난 연애경험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정도인데, 김어준 총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좀, 많이 후회했다. 아, 연애 좀 많이 할 것을. 지금은 할 수 없을거 같은데... 쩝.

하고 싶은 일을 그냥 하라

그런데 말이지요. 어떤 일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하는 거예요. 거기에 거창하고 대단한 의미는 없어도 돼요.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겁니다. 안 되면 할 수 없지요, 뭐. ^^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핑계만 만들고, 이유를 만들고, 스스로 설득되고, 그러고 나서 그 일을 꾸미려 합니다. ... 그냥 하세요. 이유를 달지 말고,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뭐 대단한 일이 있다고 세상에. 그냥 하면 돼요. (145쪽)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단다. 통쾌하고, 시원하다.

나도 이유, 의미, 핑계 그만 찾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하고 싶은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금, 지금 당장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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