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라이드 치킨과 양념 치킨

첫 아이가 18개월이 되었을 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는 아침 시간이 그렇게나 정신없고 바빴는데, 막상 아이와 둘만 지내려니, 시간은 참 더디게 느릿느릿 흘러갔다. 기준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려 읽어본 최신 육아서에 의하면, 아이들의 어휘력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엄마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중에서도 고급 어휘는 일상언어보다는 '책'을 통해 습득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읽어주고, 또 읽어줬다.

아이와 말할때도 아이들의 언어, 일테면 '맘마'나 '빵빵' 대신 '밥', '자동차'처럼 어른들이 쓰는 어휘를 그대로 사용했다. 나는 원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만의 관객, 내 아이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해대고 또 해댔다. 하다하다 이야기거리가 떨어지면, 집에 있는 '치킨집 안내지'를 읽어주곤 했다. 

"이거 봐. 이건 후라이드 치킨이야. 튀김옷을 입혀서 기름에 튀긴 거야. 가격은 11,000원. 이건 '양념치킨'이야. 이건 '후라이드 치킨'에다가 매콤한 양념을 입힌거야. 가격은 11,000원. 보통은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이렇게 주문하지. 그렇게 하면 12,000원이야."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고,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이야기를, 말 그대로 경청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어휘는 점점 빈약해져갔다. 엄마와 18개월 아이 사이에 할 말이란 게.... 
밥 먹자, 손 씻자, 책 읽어줄까? 코~자자, 말고 얼마나 많이 있을까.   

2. 번역물 

우리가 읽는 책들 중 많은 수가 '번역물'이다. 세계 문학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최신의 사회과학서, 경영경제서적 대부분도 번역물이다. 

고 이윤기 선생님처럼 (다른 분들도 많이 계실텐데, 이름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감질나게 번역해주시는 분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번역물'에는 '번역가'의 해석이 개입한 상태다. 원작자의 의도가 최대한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최대한'이다. 

어휘 또한 마찬가지다. 번역 작업이라는 게, 완벽한 일대일 대응을 통해 이루어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대일 대응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번역가'의 역량에 따라, 독자들은 어려운 책을 쉽게 읽을 수도, 쉬운 책을 어렵게 읽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초고 자체가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한글로 쓰여진 책들이 소중하다. 번역가들의 한글사랑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전해진다는 면에서는 아무래도 '한글로 된 책'들이 낫다.   

3. 육박해 들어가다 

 

 

 

 

 

 

 

 

 

 

 

 

 

 

 

 

육박하다 (肉薄--) : 바싹 가까이 다가붙다 


나는 이 단어를 강신주의 책에서 처음 보았다. (무식한 건 자랑이 아니라지만, 솔직한 건 자랑이다.^^) 

육박하다. 일단 이 단어는 한자어인데, 한자들도 아주 단단해 보인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육'은 3번 뜻, 몸으로, '박'은 8번 뜻, 가까워지다로 해석되는 듯하다. 그래서, 뜻은 바싹 가까이 다가붙다. 소리내어 읽을 때, 단어가 주는 강렬한 느낌도 좋다. 육박하다. 육박해 들어간다. 

그래서 인문학을 읽을 때는 그게 시인이든 철학자든 영화감독이든 간에 그 사람의 정신성에 육박해 들어가야 해요. (54쪽) 

결국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는 건 나의 삶이 어떤 철학자나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시를 못 읽어내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철학 책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55쪽)  

철학은 한 사람에게 육박하려고 하는 것인데요. 지금 전문화된 분과를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 그게 철학자의 역할이죠. (61쪽) 

저는 그런 걸 고민해요. 언어를 음악적 리듬에까지 육박시키고 싶다는. 좋은 소설가들은 그 리듬이 있거든요. (184쪽) 

괴테의 작품을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괴테가 보편적 공감의 구조에까지 육박해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괴테가 괴테다운 것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요. (214쪽) 

인문학은 흉내내는 게 아니라 고유명사에 육박해 들어가는 거라는 것. 그걸 배우고 책을 읽었기에 나름 성공한 거예요. 드디어 이제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게 된 거죠. 이제부터는 제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고요. (215쪽) 

무려 철학박사 강신주도 '육박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가 보다. 좋아하다, 좋아하다 보니, 이제는 그가 쓰는 단어도 좋아한다. 이렇게. 

그런데, 저번주에는 '고미숙'의 책을 읽다가 이 단어를 또 만나게 되었다.

 

 

 

 

 

 

 

 

 

 

 

 

 

 

강의 변경을 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들었는데, 그때 얼떨결에 <춘향전>,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인생행로가 급선회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원전으로 읽은 고전들은 기묘한 울림으로 내 신체에 육박해 들어왔다. (21쪽) 

반가웠다.^^

 

이제 응용편.

강신주의 모든 책이 내 삶 깊숙히 육박해 들어온다.

강신주는 말한다. 
인문학 고전 읽기를 통해 네 삶이 철학자,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갈 수 있도록, 네 삶을 더욱 심화시켜라.
육박해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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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8-22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인의 일상사가 늘 '육박전'에 가까운지라 저는 익숙한 단어입니다만. ㅋㅋ

단발머리 2013-08-22 11:1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야클님~~

혹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예전에 다락방님 서재에 놀러갔는데, 야클님이 한 줄짜리 댓글을 남기셨지요.

"글 남기려고 백만년만에 로그인하는 이 마음을 알아주~~"

이런 내용이었거든요. 혼자서 막 웃었어요.
야클님, 영광입니다.^^ 로그인해서 들어오셨군요.
아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요, 저는 '육박전' 코앞입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3-08-2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페이퍼 엄청 좋아요, 단발머리님. 추천!

조카가 우리집에 오면 우리엄마, 그러니까 조카에겐 할머니가 밥을 먹여주거든요. 어느날 여동생이 조카에게 밥을 먹이려는데 조카가 '엄마가 믹여줘' 라고 하더래요. 믹여줘라니, 믹여줘란 말을 어디서 배웠을까 생각해보니 딱 우리 엄마더래요. 그래서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는 결코 믹여줘란 말을 한 적이 없으시단 거에요. 먹여줘 인데 왜 믹여줘 란 말을 쓰겠냐면서요. 그런데 그 뒤로 조카가 와서 밥을 먹을 때마다 우리 엄마가 이러시더라고요.


이리와, 할머니가 밥 믹여줄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것 같아요.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를 따라합니다.


그나저나 치킨 천단지라니, 참신한데요! 우리 조카는 치킨 전에 족발..을 먼저 배웠던것 같아요. 하핫.

단발머리 2013-08-22 10: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애들은 정말 뭐든지 잘 배워요. 생존을 위해서 그런거겠죠?

헤헤, 치킨 전단지만이 아니구요. 종이란 종이는 다 읽어줬거든요..
족발은 가르칠게 별로 없네요. 대자, 중자, 소자. 아니면 보쌈 ㅋㅎㅎ

다락방님 조카 애기할 때마다 항상 궁금했는데, 그 때 사진 한 번 보고 나도 왕팬됐어요.
저도 사실, 겁나게 이쁜 딸을 키웠거든요. 근데.......

다락방님 조카 넘~~~~ 이뻐요. 이모의 미모던가, 엄마의 미모던가, 아빠의 준수함이던가.
확인만 남았군요.ㅋㅎㅎㅎㅎ

mira 2013-08-22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신주님의 글보고 육박이 이처럼 좋은의미구나를 알았는데 ㅎㅎ, 저도 이분의책 좋더라구요

단발머리 2013-08-22 16: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mira-da님. 반갑습니다. ^^

제가 배운 단어가 '육박하다' 뿐이겠습니까마는, 전 특히 '육박하다'라는 단어에 끌리네요.
저도 강신주를 좋아해서요.

앞으로 mira-da님이랑 강신주 얘기 좀 많~~이 하고 싶네요.

감은빛 2013-08-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에게 치킨집 안내지(보통 찌라시라고 하죠?)를 읽어주는 모습이 정말 재밌어요.
막 제가 우리 아이에게 읽어주는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

단발머리님의 이 재밌는 글이 제게 육박해 들어오네요.
즐거운 금요일 밤, 편안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 2013-08-26 13:01   좋아요 0 | URL
네..저는 이렇게 일상이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치킨집 안내지도 책처럼 진지하게 읽어주죠.

감은빛님, 즐거운 주말 되셨나요?
저는 주말도 좋은데요, 조용한 월요일 아침도 좋네요.
아이들이 학교 가서는 아니구요~~~~~
 

1. 엄마와 딸

요즘 들어 딸롱이와 같이 읽는 책이 부쩍 많아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서도, 딸롱이의 책 읽는 수준이 높아서라기보다는 내 수준이 낮아서이다.

처음에는 딸롱이 독서모임에서 <엄마 발표 시간>을 준비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요즘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내가 시작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1권을 빌려와,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만화의 힘이라고나 할까. 조금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만화이기에 만만히 보고, 시작할 수 있다. 만화 작가님들, 죄송합니당^^), 그 다음에는 신랑이 읽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딸롱이가 합류했다. 나는 대부분 1번 읽고 마는데, 딸롱이는 2번은 기본, 3번씩 읽은 책도 꽤 여러 권이다.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역시 내가 추천한 책이다. 위대한 개츠비 구매시에, 서비스로 받게 된 책인데, 친구 만나러 가는 길에 들고 나갔다가, 친구 만나는 재미만큼 큰 재미를 안겨 주었다. 그날 밤, 딸롱이에게 지나가는 말로 앞부분을 살짝 이야기해 주었는데, 많이 좋아하며 자기도 읽겠다고 했다.

 

 

 

 

 이 책은 딸롱이가 먼저 읽은 책이다.

2학년 때던가, 고전도 읽으면 좋은데, 하며 도서관에서 <심청전>을 내밀었다. 조금 읽어보던 딸롱이는 이 시리즈가 꽂혀 있는 자리로 가서 목록을 살펴보고는 <춘향전>을 대출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렇게나 열씸히 <춘향전>을 읽어댔다. 내가 도서관에서 슬쩍 봤을때는, 2학년인데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게 웬걸, 초등 2학년 어린이는 ‘어화 둥둥 내 사랑’을 그렇게나 좋아할 수 없었다.


저번주에는 같은 시리즈 중, <장화홍련전>을 집어들더니, 한 자리에 그림처럼 앉아 열독을 해댄다. 내 책이 있었지만, 나도 그 책을 집어든다. 생각보다 재미있다. 딸애가 조용히 속삭인다.

“거봐, 재미있지?”

2. 더울 땐 역시 스릴러

“누, 누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정동호는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질렀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림자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동호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귀신을 노려보았다.

“아니, 너는?”

귀신은 어여쁜 여인이었다. 연두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자태가 마치 꽃봉오리 같았지만, 기운은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한여름인데도 소름이 돋을 만큼 냉기가 흘렀다. 여인은 정동호 앞에 서서 공손히 절을 올렸다. (155쪽)

 

찾아온 여인은 홍련이었다. 언니의 어이없는 죽음을 대하고, 밤마다 연못 주위를 떠돌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원통함을 풀기위해 관아를 찾은 혼령이었다.

장화와 홍련의 억울한 사정이야 백분 이해하지만, 이들의 등장에 모골이 송연해 이 세상을 하직한 관아의 새 부사들도 안 됐다. 정동호처럼 심기일전했어야 하건만.

<장화홍련전>에서 제일 서늘한 이야기는 계모 허씨의 행적들이다.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오직 자기 자식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 질투심이 폭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울 땐, 역시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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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여름처럼 더운 여름이 있었나 싶다. 어떻게 여름은 매해 더 더워지는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도 방안은 낮의 열기로 후끈하고, 어제는 안방 옆 수납장 있는 곳으로 갔는데, 바닥이 난방을 한 것처럼 뜨듯하기까지 했다. 이열치열로 이겨낼 수 있는 더위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본다.
 
이럴 때는 역시 책읽기를 통해 상상의 세계로 탈출하는 게 최고다. 나는 여름에 읽는 책과 겨울에 읽는 책들을 나름 분류해 놓고 있다.    

2. 여름 독서의 특징 : 날도 더운데, 내용이 지루하면 체온 상승의 불운이 찾아 올 수 있다. 재미있는 책이면 좋고, 약간 가벼운 내용의 책도 좋다. 배경이 겨울이면 좋겠지만, 다른 계절이어도 상관없다. 다만, 문체는 시원해야 한다. 



1) 김훈 <남한산성> 

 


김훈의 소설은 모두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남한산성>이다. 사실, 김훈의 작품은 모두 읽어야 함에도, 아직 다 읽지 못 했다. 그의 작품 중,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칼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칼의 노래>를 읽던 중 불편했던 순간이 많아, 그보다는 <남한산성>을 더 좋아한다. 

작품의 배경이 겨울이라서 여름 독서에 적합하다기 보다는,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때문에 시원한 책읽기가 가능하다. 서늘한 문체가 1월의 칼바람을 만나, 가슴 속 깊이 시원하게 해 준다. 

 

 

 

 

2) 에드가 알렌 포 <우울과 몽상> 

 


아직 더워지기 전, 신랑이 이 책을 들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여름엔, 이런 거 읽어야지." 

2학년 때였나, 변변찮은 영어실력으로 <검은 고양이> 를 읽어가던 중, 마지막 충격반전에, 나의 독해 실력을 다시 한 번 의심하며, 페이지를 뒤적였던 기억이 있다. 

등골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좋아한다면, 여름엔 에드가 알렌 포가 최고다. 

 

 

 

3. 겨울 독서의 특징 : 겨울의 밤은 여름의 밤보다 길다. 겨울의 밤은 일찍 시작해, 늦게서야 겨우 끝난다. 또 여기저기 놀러가고 싶은 여름보다는 겨울은 실내에 있으면 더 포근한 느낌이 든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기에, 장편소설도 도전해 볼 수 있고, 만연체의 문장도 큰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1)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일단 러시아 소설은 겨울에 읽어야 한다. 작품이 잉태된 곳이 겨울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이름 때문에. 이름 때문에 겨울에 읽어야 한다. 

로지온 로마노비치/로마니치, 로쟈, 로자까는 라스꼴리니꼬프이고, 소피아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 소네치까는 소냐이다. 이건 또 어떤가. 아말리야 표도로브나/이바노브나/류드비꼬브나는 립빼베흐젤 부인이다.  
 
더운 여름에 주인공 이름이 헛갈려 책 앞 페이지를 여러번 왕래하다 보면 체온 1~2도 상승한다. 

2) 조정래 <태백산맥> 

 


장편을 읽기엔 역시 겨울이다. 긴 겨울, 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1권, 2권, 3권 해치우다 보면, 어느새 봄이 찾아온다. 약간의 인내심을 더해 3월말까지 장편을 밀어붙여본다면, 10권의 장편소설은 한 해 겨울에 가뿐히 완독할 수 있다. 

 

 

 

 

 

 

 

3) 알베르 카뮈 <이방인> 

지중해의 뜨거운 햇볕이 말 그대로 작열한다. 그가 왜 살인을 했던가. 뜨거운 태양 때문 아니었나.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69쪽)  

 

 

 

 

 

 

 

 

4. 그런데, 지금... 

1) 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몇달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반정도 읽고 반납했는데,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에서 이 책에 대한 강신주의 애정을 새삼 발견하고는, 처음부터 다시 읽는 중이다. 내 사랑이 그에게 가 닿을 수 없더라도, 나는 내 사랑을 멈추지 않으리라. 

 

 

 

 

 

 

 

 

 

2)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미숙이야말로 여름 독서에 적합하다. 유쾌하고, 발랄하다. 그녀가 말한대로 문체가 그녀 자신, 그녀의 몸 자체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작품 속에서, 박지원도 열하의 더위에 헉헉대고 있다는 것. 

 

 

 

 

 

 

 

 

3)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후반부로 갈수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적나라해지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베르테르가 항상 고뇌에 차 있었던 건 아니고, 그도 사랑으로 인한 기쁨을 누렸던 때도 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한다. 적확히는 외출용이다. 밖에 오래 있을 게 아니고, 잠깐 외출할 때 가방 속에 챙기는 책이다. 근래는 가족들과 함께 외출하는 경우가 많아서, 들고는 다니는데, 읽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여름이 다 지나면, 독서의 계절 가을이 찾아온다. 몇번의 기사를 기억해 보면,  가장 책을 안 읽는 계절 내지는 책구매가 가장 적은 계절이, 바로 독서의 계절 가을이라고들 한다. 

더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말고, 메뚜기도 한 철이라, 더위를 식힐 시원한 독서를 해야겠다. 

 

하지만, 하지만...

 

아~~~ 너무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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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8-1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이문열의 초한지를 읽고 있습니다. 어디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이나 시원한 카페에서 책읽는 것이 가장 좋더군요.

단발머리 2013-08-17 08:10   좋아요 0 | URL
저도 시~원한 카페에서 책읽는 거 좋아해요. 문제는 초등생인 제 딸도 그 맛을 알아버렸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문열의 초한지는 읽어보지 않았어요.
재미있을까요? 급 궁금해지네요*^^*

노란곰 2013-08-2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전 여름엔 정민 책을 읽는데 좋더라구요. 작년엔 가장 덥고 잠이 안 오는 휴가땐 삶을 바꾼 만남을 읽었고 올해는 다산의 재발견을 읽기 시작했어요. 물론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 한권에 집중하긴 힘들지만요. 괜히 제가 좋아하는 강신주, 고미숙 님의 책이 보여 반가운 맘에...^^*

단발머리 2013-08-28 09:0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노란곰님. 반갑습니다~~

정민은 신랑이 좋아하는 작가예요. 저는 정민의 책은 완독한게 없네요. 다산의 재발견은 전부터 눈독들였었는데, 두께 때문에 망설이고 있답니다. 내년 여름쯤 도전해볼까요?

강신주님, 고미숙님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두요~~~ 앞으로 자주 뵈요.
 

 

1. 알라딘 10주년, 축하합니다. 

 

내가 얼마나 이벤트에 약한지, 이 세상 모든 안내문을 얼마나 대충 읽어치우는지 단박에 밝혀진다. 난 "서재 10주년 <알라딘 서재 10대 뉴스> 이베트 참여"를 생각없이 클릭하고, <레 미제라블> 페이퍼를 작성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오늘 아침에 들어와보니, 이벤트 화면에 모두들 '알라딘, 축하해요.', '알라딘, 계속 번창하세요.'하시는데, 나만 코제트 얼굴을 해 가지고 '사랑, 그 아름다운 이름' 어쩌고, 저쩌고 하고 있다. 사실, 그 글을 어디에 써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여기에다가. 

 

알라딘 10주년, 축하합니다. *^^

 

시작은 2010년부터인데, 본격적으로 글도 쓰고 알라딘서재 글 읽은건 2011년 말부터이다. 책 좀 읽으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글 좀 쓰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싶은 사람, 알라딘서재에 오시면 되겠다.

 

얼굴을 모르지만, 서로의 글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고, 같이 좋아해주고, 같이 슬퍼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난 항상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는 사람이 진짜 내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알라딘 서재엔 그런 분들이 많다.

 

알라딘을 칭찬해 주고 싶은건, (결제를 유도했기에 칭찬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ㅋㅎ) 이벤트 상품들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거다. 예를 들면, 이런 애들... 

 

 

 

 

 

 

 

 

 

 

 

 

 

 

이런 애들도 있다.

 

 

 

 

 

 

 

 

 

그냥 구입할 수 있지만, 리바이벌 이벤트를 기다리는 이런 애들도 있다.

 

 

 

 

 

 

 

 

 

 

 

칭찬 한 가지 더, <땡스투, 영어로 쓰면 안 보이는...>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한 번 더 읽어보게 하고, 내가 좋아하는 분들께 100원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여기서 놀고, 여기서 배우고 싶다. 알라딘, 영원하라! 알라딘 서재, 영원하라!

 

 

2. 고미숙의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녀의 책은 한결같이 1) 심오하고 2) 재미있고 3) 읽기 쉽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초판, 2003)의 출간 10주년 기념 개정신판이 나왔다.

 

집에 이 책 있는데, 새 책으로 읽고 싶다. 쩝...

 

 

 

 


 

 

 

 

 

 

 

 

 

3. 허영만의 <허허 동의보감>

 

 

 

 

 

 

 

 

 

 

 

 

 

북펀딩 안내문을 본게 어제같은데 (참여하고 싶었으나 1)참여 신청이 어려워보였고 2) 마감이 되어서 하지 못 했다.), 벌써 1권이 나왔다. 딸롱이가 그 때부터 사달라고 엄청나게 졸라대고 있다. 나도 보고, 만화 좋아하는 딸롱이도 보고, 건강에 관심 많으신 엄마도 볼 수 있을테니, 아무래도 구입해야겠다. 신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이어 '엄마와 딸'이 같이 보는 책 시리즈 2탄이다.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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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말에 ‘올해의 책’ 페이퍼를 쓰게 된다면

일단 『레 미제라블』은 따놓은 당상이다. 권수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내용이 좋아서,라고 말해야 하겠으나, 너무 오랫동안 읽어서, 일단 본인은 그런 말 할 처지가 못 된다.

 

 

 

 

 

 

2. 반년치는 커녕 한 달치도 제대로 받지 못 했다.

그녀의 4월이 그녀에게 왔던 것이다.

가난하고 인색한 사람들이 잠을 깨는 것 같고, 졸지에 궁색에서 호사로 변하고, 온갖 낭비를 다하고, 갑자기 빛이 나고, 돈을 헤프게 쓰고, 사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을 사람들은 때때로 본다. 그건 정기 급여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제 기간 만료된 금액이 있었다. 처녀는 그녀의 반년치 금액을 받은 것이다. (3권, 230쪽)

삐쩍마른 몸매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던 코제트가 불과 몇 개월 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한다. 강남 성형외과의 의료적 도움 없이 말이다.

금빛 어린 아름다운 밤색 머리에, 대리석 같은 이마, 장미 꽃잎 같은 뺨, 핼쑥한 살빛, 눈부시게 흰 살결, 번개처럼 미소가 떠오르고 음악처럼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아리따운 입, 라파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주었음 직한 머리와 그 아래에 장 구종이 비너스에게 주었음 직한 목. (3권, 228쪽)

바야흐로 그녀의 4월이 그녀에게 왔다. 그녀를 감싸는 아름다고 화려한 옷들도 그녀의 미모를 감당할 수 없다. 영화 <레 미제라블>의 캐스팅은 참 적절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외모를 아만다의 미모와 비교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반년치’는 아니더라도, 두 달치, 아니 한 달치라도 제대로 금액을 받은 적이 있었나, 하는 것이다. 활짝 피어나 봄처럼 활기차고, 비 온 뒤 공기처럼 청명해 여름처럼 싱그러운 날들이, 그런 날들이 있었나, 하는 것이다. 금액을 못 받은 것은 확실한데, 지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어디에 물어봐야 하는지 모르겠고, 게다가 반년치 금액을 받은 사람이 ‘처녀’이기에 하는 말이다.

3. 그는, 원래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라. 부자를 격려하고 빈자를 보호하라. 빈궁을 절멸하라. 강자에 의한 약자의 부정한 착취를 종식시켜라. 이미 도달한 자에 대한, 가고 있는 중에 있는 자의 부당한 질투를 억제하라. 노동 임금을 수학적으로, 그리고 우애적으로 조정하라. 어린이의 성장에 무상 의무교육을 주고 학문으로 성년의 기초를 만들어라. 손을 활용하면서도 지능을 계발하라. 강력한 국민임과 동시에 행복한 인간들의 가족이 되라. 소유권을 폐지하지 않고 보편화함으로써 시민 누구나가 예외 없이 소유자가 되도록 소유권을 민주화하라. 이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인데, 간단히 말해서 부를 생산할 줄을 알라. 그리고 그것을 분배할 줄을 알라. (4권, 41-2쪽)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에서 세계 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패널 한 사람이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경우는요, 사실 빚에 많이 쪼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양을 늘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길게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하지만, 빅토르 위고 같은 경우는, 그 사람 자체가 할 말이 많은 경우지요. 원래, 자기가 하고 싶던 이야기가 많았던 거지요. 혼자 듣다가 혼자 웃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

가난을 절멸해야 한다고, 어린이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하라고, 소유권을 민주화하라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가는 말한다.

곁말은 부패의 고유 언어이므로 빨리 부패한다. 뿐만 아니라, 노상 숨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듣는다 싶어지면 이내 변형돼 버린다. 다른 모든 식물과는 반대로, 햇빛에 닿기만 하면 다죽어 버린다.. 곁말은 십 년 동안에, 일반 언어가 10세기 동안에 걷는 것보다 더 많은 길을 걸어간다. (4권, 294-5쪽)

이 부분이 제2 마의 삼각지대로서, 제1 마의 삼각지대 2권의 전투신보다 더 가혹했다. 이 또한 ‘곁말’에 대해, 위고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리우스를 들쳐 업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고개를 떨구던 장 발장은 땅 밑, 하수도를 통해 혁명의 아수라장을 탈출하게 되는데, 장 발장이 거기에 있었다. 하수도에. 그리고는 파리의 하수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물론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다.

파리는 매년 2500만 프랑을 물에 던진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낮과 밤에. 무슨 목적으로? 아무 목적도 없다. 무슨 생각으로? 그걸 생각지도 않고. 왜 그렇게 하는가? 아무 이유도 없다. 무슨 기관으로? 그의 내장으로. 그의 내장이란 무엇인가? 그의 하수도다. (5권, 150쪽)

할 말이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고 다시 돌아온다. 장 발장에게로.

변천은 엄청났다. 도시의 바로 한복판에서, 장 발장은 도시에서 나갔고, 눈 깜박할 사이에, 뚜껑 하나를 들어 올렸다가 그것을 다시 닫는 시간에, 그는 대낮에서 완전한 어둠으로, 정오에서 자정으로, 소란에서 정숙으로, 천둥의 회오리바람에서 무덤의 정체로, 그리고 폴롱소 거리의 급변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급변에 의해, 가장 극심한 위험에서 가장 절대적인 안전으로 이동했다. (5권, 182쪽)

작품해설에는 빅토르 위고가 35년 동안 마음 속에 품어 오던 것의 소산이 이 소설이라고 말한다. 시작은 한 신문의 잡보 기사였다. 가난한 농부 피에르 모랭이라는 사람이 빵집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치고, 5년의 징역형을 받아 형을 마치고 일거리를 찾았으나, 모든 집들이 그의 누런 통행권 앞에 그를 외면했을 때, 디뉴의 주교 미올리 신부가 그를 형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주교에게 헌신했다. (5권, 498쪽, 작품해설) 이러한 사실을 듣고 위고는 1828년 무렵부터 이 소설을 쓰기로 계획했다. 1845년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마지막 5부가 탈고 출판되기까지 장장 17년이 걸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4. 사랑, 그 찬란한 이름

우주를 단 하나의 인간으로 환원하는 것, 단 하나의 인간을 신에까지 확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4권, 190쪽)

 

『망각과 자유』에서 강신주는 말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어려운 문제는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에게는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혹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 있습니다.

우주가 하나의 인간으로 환원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그도, 그이도 나와 같기를. 그 사람도 내가 느끼는 대로 느꼈기를.

하지만, 그에게 나에 대한 사랑을 강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그가 나를 사량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그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그도 나와 같기를.

“ ... 아시겠어요? 당신은 나의 천사예요. 좀 오게 해 주세요. 나는 곧 죽을 것 같아요. 당신이 아신다면! 나는 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나는요! 아, 용서하세요.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아마 당신을 화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당신을 화나게 하고 있습니까?“

“아이고머니!”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 가듯이 주저앉았다. (4권, 206쪽)

연애경험은 일천하지만, 주위에서 주워 들은 연애상식은 조금 있는지라, 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의 구애, 그것도 첫 번째 구애에 바로 “네, 좋아요.”하고 바로 넘어가버리는 코제트가 조금 철없어 보인다. 예쁜 여주인공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생각해보니 줄리엣도, 춘향이도, 모두 첫 번째 구애에 냉큼 “네, 좋아요.”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가 보다. 어서 대답하라. 냉큼. 네, 좋아요.

5. 그대는 인생에 들어가고 있고, 나는 나오고 있소.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아흔한 살 늙은이에게 새파란 젊은이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대는 인생에 들어가고 있고, 나는 나오고 있소. 그대는 극장에, 무도회에, 카페에, 당구장에 드나들고, 재치가 있고, 여자들 마음에 들고, 미남 총각이오. 나는 한여름에도 깜부기불에 가래를 뱉고 있소. 그대는 유일무이한 재산인 젊음을 갖고 있는 부자지만, 나는 늙은이의 모든 가난을, 병약과 고독을 갖고 있소... 그대는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야 말할 것도 없지, 나는 세상에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그런데도 그대는 나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 (4권, 366쪽)

마리우스의 할아버지 질노르망 씨가 결혼 허락을 받으러 집으로 돌아온 마리우스에게 한 말이다. 자기에게 굽혀주기를 바라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고집 때문에 사랑하는 손자를 두 번이나 잃어버린다. 후에,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손자를 보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 정말, 이 애는 죽었소. 정녕 죽었소.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어요. 나 역시 죽었소. 그는 일을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았소. ... 그리고 육십 년 이래 튈르리 궁전의 욕심쟁이들의 무리를 질겁하게 하는 혁명을, 그리고 너는 이렇게 피살되면서까지 매정했으니, 나는 네 죽음을 슬퍼하지조차 않을 거다. 알았느냐, 살인자야!”

“마리우스”하고 노인은 부르짖었다. “마리우스! 내 귀여운 마리우스! 내 아기! 내 사랑하는 아들! 네가 눈을 뜨는구나. 나를 보는구나. 살아있구나, 고맙다!”

그리고 그는 실신하여 쓰러졌다. (5권, 248쪽)

결국엔 그렇다. 부모는 자식에게 질 수 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지속적으로 강력한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예외다. ‘이건희 삼성 가족’ 정도가 되겠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는 자식에게 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는 새삼 말해 무엇하랴.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지게 되어 있다.

인생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이 한 쌍 더 있는데, 장발장과 코제트이다. 만약, 코제트가 홀아버지 밑에서 곱게 자란 외동딸이었다면, 난 장발장에게 말했을 것이다.

“딸만 바라보지 마시구요, 딸에게 유산 모두 물려주지 마세요. 이제는 하고 싶은 것 하시면서 사세요. 친구들도 만나시고, 여자친구도 사귀시구요. 취미생활도 하시고, 여행도 다니세요. 그렇게 딸만 쳐다보며 살지 마시구요.”

하지만, 장발장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그가 양육한 딸이기 전에, 그의 구원이었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위해 살았다. 이것은 장발장이 코제트를 위해서 살았을 뿐 아니라,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장발장은 코제트를 위해, 마리우스를 바리케이트의 아수라장에서 구출해 온다. 오직 그녀, 코제트를 위해서다.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장발장은 자신을 멀리하려는 마리우스의 마음을 깨닫고 조금씩 코제트에게서 멀어진다. 그것은 빛에서 어둠에서, 희망에서 절망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르는 길이었음에도, 장발장은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디딘다. 오직 코제트,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다.

니콜레트는 장 씨의 집에 들어가면서, 자기 안주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왜 장 씨가 어제 오시지 않았는가.”를 알아오라고 마님이 보냈다고. “내가 안 간 지 이틀이 되오.”하고 장 발장은 조용히 말했다. (5권, 426-7쪽)

이 부분에서 코제트가 미웠다. 어떻게, 장발장에게, 우리의 장발장에게 그럴 수 있나. 어떻게 자신을 방문하지 않는 장발장을 잊어버릴 수 있나. 어떻게 장발장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나. 친절하신 작가님, 연거푸 말씀하신다.

그녀는 잊어버리기 잘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경솔했다. 사실은, 그녀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던 그 사람을 무척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한결 더 사랑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마음은 다소 평형을 잃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5권, 432쪽)

내가 다른 데서 말했지만, 자연은 ‘제 앞만 바라본다.’ 자연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오는 자’와 ‘떠나는 자’로 나눈다. 떠나는 사람들은 어둠 쪽을 향해 있고, 오는 사람들은 빛 쪽을 향해 있다... 젊은이들은 인생의 싸늘함을 느끼고, 늙은이들은 무덤의 싸늘함을 느낀다. 이 가엾은 아이들을 나무라지 말자. (5권, 433쪽)

코제트, 작가님께 고마운 줄 알아라.

6. 진보는 필연코 잠을 깨고

지난 대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고, 폭풍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나는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 때문에 우리의 암담한 정치 현실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시민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시민들이 2만명, 3만명이 모여도 공중파 어느 곳에서도 보도하지 않는다. 방송이 이명박 낙하산으로 장악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뼛속깊이 깨닫게 된다.

4학년인가, 5학년 사회 과목을 배울 때, 도시, 그 중에서도 대도시와 농촌 생활의 장단점에 대해 배운다. 도시 생활의 장점 중에 하나가 “문화 생활이 용이”하다는 것인데, 이건 맞는 말이다. 돈이 없어 못 볼 뿐이지, 클래식 연주회, 뮤지컬 공연, 콘서트, 미술 전시회가 서울을 중심으로 열린다. 멀어야 두 시간, 가까운 곳은 한 시간이면 도착 가능한 곳들이다. 서울에 산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런가하면, 이런 점도 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삼십 분, 길어야 사십분이면 도착하는 곳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규탄 촛불 집회”가 열린다. 오늘 저녁 10만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대도시 서울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감을 느낀다.

“아, 내가 나가줘야 되나... 이렇게 가깝게 사는데... 내가 힘을 실어줘야 하나...”

아무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데, 나 혼자 생각이다.

“아, 내가 도와줘야 하나...”

 

이 사진에 어울리는 말이다.

위고는 천재가 분명하다.

오늘, 이 시간을, 위고는 눈에 본 듯 말한다.

절망하는 자는 잘못이다.

진보는 필연코 잠을 깨고, 결국, 진보는 심지어 잠들어 있어도, 전진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그것은 성장했으니까.

진보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더 높아진 것을 본다. (5권,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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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느와르 2013-08-1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잊을 뻔한 레미제라블을 환기시켜주시는군요.
글이 참 좋습니다. 전 언제나 코제트보단 에포닌에 한 표죠 ㅋ

단발머리 2013-08-12 09:40   좋아요 0 | URL
네, 팜므느와르님.

저도 역시나 영상세대라 영화 볼 때는 역쉬, 코제트! 했는데요, 책 읽고 나니 에포닌이예요.
요즘엔 보기 어려운 사랑이지요.
진짜 사랑이라 그런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