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 같은 작가, 김애란

지난 주말, 현대백화점에서 딸롱이 청바지를 하나 사고, 8층 영풍문고로 향했다. 김애란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펼쳐져 있었다. 띠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친구 같은 작가,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도 김애란 작가 작품이었지?

2.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의 첫 번째 단편이다. 대학 선배와의 기억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처음 야구장에 데려가 주고, 홍대 인디 문화가 뭔지, 대학로 소극장의 서늘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 건지 알려준 사람. 어느 집단에나 있는 친절하고 인기 많은 남자. (11쪽)

어느 집단에나 있는 친절하고 인기 많은 남자, 대학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멋있고, 너무나도 근사하다. 완벽에 가까운 선배의 모습에 주인공은 선배의 파트너가 되기를 소망하기 보다는, 선배의 그녀까지도 사랑해 버린다. 그런데, 그런 선배의 갑작스런 전화라니.

선배를 돕기 위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은 ‘푸드파이터와의 녹화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녀가 뚱뚱하다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그녀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외양적 특징을 선배는 몰라 봤으려니, 아니 모르고 있겠거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선배는 그녀의 특징을 모르는 척 해왔던 거다. 간만에 연락해 그녀를 간절히 찾았던, 그렇게 좋아하던 선배가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한 치수 작은 레슬링복 바깥으로 몽실몽실한 살들을 드러내며, 핫도그를 꾸역꾸역 밀어넣는 모습이다. 그녀는 부끄럽다. 그런데, 고개까지 들어야 한다니. “고개 좀 들어라, 이 녀석아.” 

선배가 그녀의 감정을 몰랐을 수도 있다. 원래 친절하고 인기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던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친절히 대우받는 것을 당연시 하고. 세상이 편하고, 세상이 즐겁고.

당장 눈 앞에 큰 일이 벌어지니, 선배는 그녀가 생각난 거다. 첫째로는 지금 당장 그녀의 외양적 특징이 필요했던 거고, 둘째로는 그녀라면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한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선배 앞에 선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은 레슬링복 때문에 너무 부끄럽다. 이젠 선배와의 기억이 아름답지 않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병만이의 장례식이 떠오르고, 그 옛날 그녀를 잡아주었던 병만이의 손길이 생각나 엉엉 울어 버리고 만다.

3. 다행이다.

나도 그런 적이 없었는지 생각해 봤다.

나에 대한 호의를, 내가 편한 대로 이용한 적은 없었는지.

모르는 척, 무심한 척 하지는 않았는지.

다행이라 해야겠지.

나를, 나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여자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부가설명이 좀 필요하겠다.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하고만 지낸다는게 짜증 날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중, 여고에서는 보이시한 여자애들이 인기가 많다. 그 애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머리가 짧다. 한마디로 예쁘장한 남자 애 같다. 책상 위에 음료수도 올려져 있고, 다른 선물들도 많이 받는다. 꼭 외모가 보이시 하지 않아도 인기 있는 애들도 있다. 공부도 잘 하고, 성격도 좋고, 말도 잘 하고. 이런 애들은 인기가 있어서 옆자리에 앉아보려 다들 노력하고 난리다. 내겐 보이시 하진 않지만,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인기짱 친구가 있었다. 나는 일학년 때 그 친구랑 친구가 되어, 고등학교 삼년 내내 나름 가까이 지냈는데, 인기짱 친구에 대한 고민, 정확히는 그 친구와 특별한 친구 사이가 되고 싶어하는 여러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나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다시 돌아와서.

역시나, 나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남자 친구도 없었다. 나를 그렇게나 좋아한 사람이 없었다. 헛. 헛웃음이 나오네.

다행이다.

일단 나는 선배 같은 실수를 할 확률이 매우 낮은 사람이다.

헛.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09-2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씀하신 단편을 [황순원 문학상 작품집]에서 읽었는데, 어우, 막 가슴이 아파가지고. 마치 제가 그런일을 당한것마냥 자존심 상하고...수치스럽고 그렇더라구요. 어휴.. 저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단발머리님께서 언급하신 단편만큼은 참 좋았어요.

단발머리 2012-09-21 11:35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이 작품이 [황순원 문학상 작품집]에서도 나왔었군요. 다락방님 얘기 듣고 알았어요. 그러게요, 저도 제가 레슬링복을 입은 것마냥 기분이 별로였어요. 단편 하나에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거, 대단한 거 같아요. 작가들은 진짜 다 천재인가봐~~~~~


비로그인 2012-09-2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저도 생각해보면 저를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친구/여자친구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다행인지는 그렇지만 모르겠어요! 일단 선배 같은 실수는 안 하겠지만 끙... 사랑 받으면서 실수 안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오랜만에 서재 들려서 반가운 애란씨를 만나고 갑니다 ^ㅡ^ㅋ
 

알랭 드 보통이다.

다음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예정.

 

 

 

 

 

앨리스는 에릭이 언제 분통을 터뜨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149쪽)

그러니까, 앨리스는 에릭이 언제 화낼지 알 수가 없었다는 거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버럭 화를 내던 에릭은 금방 세상에 다시 없는 부드럽고 다정한 남자가 되기도 했다. 앨리스는 자신이 그 남자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에릭은 초조한 앨리스가 점퍼 소매를 잡아당기는 일은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했지만, 그의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일에 대해서는 앨리스를 위로하고, 상황을 해결해줬다.

공개석상에서는 앨리스를 우연히 알게 된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그녀와의 저녁약속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물론, 에릭도 일면 이해가 된다. 휴가지에서도 “우리 둘의 관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하고 새초롬한 얼굴을 들이대며 물어대는 여자는 별로다. 그래도, 나는 앨리스에게 말하고 싶다.

바보야, 갠 그냥 나쁜 남자야.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176-7쪽)

어느 누구와의 사랑이든, 어느 때의 사랑이든,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슬프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집에서 통조림 토마토 수프를 혼자 먹으며 앨리스가 꿈꿔왔던 사랑은 “당신이 ... 하면 정말 좋아.”하고 말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거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는 있겠으나, 그 사랑이, 그 마음이, 그 태도가 계속되리라는 믿음을 가져선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은 내 마음의 방향과 흐름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와 함께 하는 그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일지 아닐지 알 수 없을테니까.

관계를 맺는다는 건 상상하고는 다르리란 말을 하는 거라구. 그건 힘든 일이야.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가계부를 맞추고, 두 사람 다 고단하고 짜증날 때도 감수해야 하고. 거기에 매혹 따위는 없어. 남녀가 관계 맺는 게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키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꿈이나 꿔. (23쪽)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만이 계속될 수 있는 사랑인가.

짝사랑. 짝사랑이 능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요네하라 마리

요즘 관심 작가다. 난 이렇게 항상 한 템포 느리다.

'요미우리 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에세이스트, 고르바초프 등 러시아 주요인사의 방일 때, 직접 그 이름을 거론하며 수행 통역을 하게 했던 일류 동시통역사, 하루에 7권씩 읽어치운 책들을 기록한 서평집 <대단한 책>의 저자,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올가의 반어법>을 쓴 소설가.

2. 사랑의 법칙

마리는 (그녀는 일본 사람인데도, ‘마리’하고 부르면, 웬지 그녀는 백인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만의 느낌일까?) 중학교 후반부터 ‘사랑의 법칙’을 연구했다. 그녀의 의문은 이것이다.

세계 명작에서 남자가 주인공일 경우에는 여자들을 모아 전부와 섹스를 하는 전개가 되는데,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에는 남자를 모아서 기예를 겨루게 하여 제일 뛰어난 남자와 결혼하는 전개가 된다. (34-5쪽)

그 이유는 뭘까?

그러고 보니 그렇다. 한 명의 남자주인공은 여러 명의 여자를 상대(?)하고, 상대하려 하고, 실제로도 상대하는데, 왜 한 명의 여자는 여러 명의 남자를 상대하지 않는가. 제일 훌륭한, 테스트에 통과한 승자 오직 한 명만을 상대하는가. 서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유럽엔 ‘돈 후안’, 일본엔 ‘겐지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엔 ‘구운몽’이 있다.

마리의 결론은 이렇다.

가능한 한 많은 암컷과 섹스를 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지상과제인, ‘출산할 수 없는 성’인 남성과, 가능한 한 우수한 수컷과 섹스를 해서 질적으로 우수한 자손을 남기고 싶은 ‘출산하는 성’인 여성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34쪽)

꽤 설득력있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 일부일처제에 정착한 남자들은 이러한 본성을 감추고 사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는? 아니지, 일단은 섹스가 우수한 자손을 남기겠다는 목적 이외에도 다른 기능과 역할이 있음을 전제하고 생각해 봐야겠지. 그렇다면, ... 흠...

아, 모르겠다.

3. 외국어 배우기 - 독서야말로 가장 좋은 학습법

내가 지금 모국어인 일본어와 제1외국어인 러시아어를 그럭저럭 자유롭게 구사해 그 사이를 오가며 돈을 벌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언어로 多讀다독과 濫讀남독을 한 덕분이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유지할 때도 독서는 가장 고통스럽지 않은 학습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통역사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어학 실력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독서를 즐길 정도의 어학 실력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외국어뿐만 아니라 일본어에도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118쪽)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멀리는 미국에 나가 페이퍼백으로 영어 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읽어가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영어가 모국어처럼 술술 읽혀지기 시작했다는 일본 작가가 있고, 가까이는 ‘책을 많~~~이 읽어야 돼.“ 하며 자신의 영어 비결을 독서로 들었던 과친구가 있다. 다만, 나는 궁금할 뿐이다. 많~~~이란 얼마큼이냐. 얼마큼이 많~~~이냐.

4. 읽고 싶은 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09-12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원서를 좀...읽어봐야 될까요? 그런데 그건 읽는게 아니라 그냥 '보는'거 아닐까요..뭘 알아야 '읽죠' ㅜㅜ. 그렇지만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2-09-13 06:47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다락방님. 저도 뭐, 득도의 단계가 아니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그냥 알고 있기로는, 원래의 실력보다 조금 쉬운 책으로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원래 내 실력으로 읽을만한 정도요.

너무 소박한가요? 가장 좋은 방법 맞겠죠? ㅋㅎㅎㅎ
 

 

1. 언니의 죽음, 그리고 하루에 한 권

언니가 죽었다.

환하게 빛나는 우상같은 존재였던 언니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언니는 똑똑한데다 직감이 뛰어나서 거짓말과 바보짓을 꿰뚫어보곤 했다. (28쪽)

예쁘고, 똑똑한 언니. 아니, 똑똑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어떤 상황이나 문제, 노력의 모든 측면을 편견 없이 보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희귀한 재능의 소유자(29쪽)였던 사람. 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설계도, 사진, 건축학적 세부 사항을 검토하고, 추리소설을 읽던 사람. 부모님보다 더 인정받고 싶었던, 더 많이 좋아했던 큰언니, 앤 마리.

마흔 여섯에 떠난 언니를 잊으려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던 지은이는 이렇게 해서는 언니를 잊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더 빨리 뛰어가도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한 건 책읽기.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고, 서평을 쓰기로 한다.

다른 설명은 필요없고, 아들이 넷이라는 거, 막내가 막 어린이집에 맡길 나이라는 정도다. 그 정도면 100% 상황 판단이 된다.

2.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

나는 반스가 조용하고 단순한 기쁨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그 구절을 정말 좋아한다. 나는 다시는 갓 태어난 내 아기를 안아보는 기쁨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이 주는 즐거움, 공원에서 산책하는 즐거움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미래에도 틀림없이 온다. (64쪽)

나는 이게 잘 안 된다. 나는 항상, 대부분의 일에서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내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고, 아쉬움이 끌려나오는 모양은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다.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를,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를, 대학때는 고등학교 때를, 회사에 들어가서는 대학 때를 그리워한다.

결혼한 후에는 결혼 전을, 퇴사한 후에는 회사 다니던 때를, 아이를 낳은 후에는 신혼인 때를 아쉬워한다.

딸이 네 살 된 해는 딸이 돌쟁이였던 때를, 아들이 네 살 때는 아들이 젖먹이였던 때를,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딸이 아무 기관에도 속하지 않았던 때를,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는, 아침 일찍 아들과 도서관 가던 때가 좋았다고 말한다.

서른 여섯에는 서른 다섯일 때를, 다섯일 때는 넷일 때를, 넷일때는 셋일 때를, 이십였던 때를, 십대였던 때를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는 나름 괜찮았다. 학교 가는게 즐거웠다. 학교에 가면 좋아하는 애를 만날 수 있었다. 방학 때는 개학 때를 기다렸고, 학년이 바뀌면 그 애와 같은 반이 되었나 궁금해했다. 행복했다. 내 인생 최고로 순수하고, 최고로 어설펐던, 어설펐지만 어설픈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런 때였다.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가 아쉬웠다. 중학교에는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애가 좀 더 많았고,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 했다. 등굣길, 양쪽으로 늘어선 노란 완장의 2학년 선도부 옆엔 물이 가득 채워진 양동이가 머리에 무스나 스프레이 뿌리고 온 귀여운 중딩들의 머리를 시원하게 감겨주기 위해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가 그리웠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할 게 너무 많았고, 무거운 문제집을 비싼돈 주고 사서 풀고 풀어도 성적이 나아진다는 보장이 전혀, 완전 전혀 없었다. 매달 모의고사와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리고 성적표. 그래, 성적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서는 고등학교 때가 그리웠다. 교정의 잔디는 푸르렀지만, 잔디의 싱그러움을 함께 나눌 싱그런(?) 남학생이 없었다. (난 여고를 다녔기에 고등학교 때도 남학생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꿈에 그리는 캠퍼스 라이프엔 남학생이 꼭 등장했다. 필수라고나 할까.) 고등학교 때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지만, 이젠 목표가 없었다. 그냥, 그냥 하는 거였다. 전공 공부를 그리고 영어 공부를. 두 개가 사실 같은 건데, 난 두 가지 다 잘 못했다. 아, 아쉽다. 그땐 그랬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대학교 때가 그리웠다. 회사일은 ABC 처음 배우듯,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거였고, 과장님의 빨간 밑줄에 “This refers to your letter of September 1, 2012.”는 ”Thank you for your letter dated September 1, 2012."로 바꿔야했다.

결혼해서는 싱글이 부러웠다. 물론 이 부러움은 32세 이후다. 왜 그렇게 결혼을 빨리 했냐고요? 왜요?

딸아이가 다섯 살이 넘어갈 때부터, 길거리 여자아이들의 프릴 달린 쫄바지만 보면 정신이 없어졌다. “아, 그래, 저걸 입혔어야 했어.”, “아, 저 치마 좀 봐. 저걸 입혔어야 했어.” 아쉬움은 프릴 달린 쫄바지에만 머무른게 아니었다.

아들의 모유수유가 끝나고 난 이후부터 젖먹는 아이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폭풍 집중”을 하게 됐다. “아, 저 때가 진짜 좋았지, 젖먹일 때.”

아,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난, 그렇게 후회하며 살았다. 지난날을, 과거를 그리고 또 어제를.

여기 아들 넷을 낳은 여자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천연자원수호위원회 담당 변호사였던 여자가, 줄줄이 낳은 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둔 여자가 있다. 그녀가 말한다.

나는 다시는 갓 태어난 내 아기를 안아보는 기쁨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이 주는 즐거움, 공원에서 산책하는 즐거움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미래에도 틀림없이 온다. (64쪽)

내게 필요한 것은 이거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는 것.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인생의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걸 기대하는 것이다. 내게 최고로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는 걸 말이다.

3. 서평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도, 하던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주말에는 밤중에 읽어야겠지만 그래도 좋다. 피자를 주문해주고, 적어도 식사 한 번은 남편에게 맡길 수 있다. 서평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도 가족을 맞아들이고 운전하고 장을 보고, 식사를 차려주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벗이 되어주고, 조언을 해주고, 규율부장 노릇을 하고 (남편을,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사랑해주고, 전체적으로 이 본부의 지배자 노릇은 할 수 있을 것이다. (68쪽)

물론, 당연히 물론, 책 읽기 계획이 지은이의 예상대로 진행되진 않았기에, 그녀는 매일 밤 늦게까지 책과 노트북과 씨름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제일 필요한 건 역시 체력인가. 어째요, 저는 저질체력도 아니고 바닥체력입니다.

4. 바빠요? 네, 일하는 중이에요.

“바빠요?” 전화 건 사람이 묻는다.

“네, 일하는 중이에요.” 고양이는 가까이 있고, 나는 의자에 앉아 굉장한 책을 읽고 있다. 그것이 금년의 내 일이고, 좋은 일이다. 봉급은 없지만 매일매일 깊은 만족감을 얻는다. (129쪽)

사실, 어제도 그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하시지요~.”

“아, 저.....저는.............. ”

“시간 많잖아요. 집에서 놀잖아요.”

저 안 놀아요. 아, 사실 좀 놀기도 하지요. 하지만, 항상 노는 거 아니구요. 나름 일도 좀 한단 말이에요. 유치원, 학교 다녀온 아이들이랑 이야기 나누는 것도, 사실 일은 아니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런것도 일로 치면, 저 일 많거든요. 저도 일 많아요.

저도 바빠요! 에잇!

독서가 주는 편안함과 책 한 권을 들고 내 보랏빛 의자에 앉는 즐거움을 고대하고 있었고, 그것을 일이라 규정했다. 일이라 부름으로써 그것을 신성하게 만들었다. (50쪽)

그래, 나도 그렇게 할거야.

(전화 좀 걸어주세요~)

“바빠요?”

“(책을 읽으면서) 네, 일하는 중이에요. (좋~~~~!았어.) 무슨 일인지는 안 가르켜 주~~~지!”

5. 읽고 싶은 책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2-09-11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이런 페이퍼라니!!
저도 최근엔 '혼자 책읽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네요.
영양가 없는 일이 줄줄이 쏘세지라서...ㅜㅜ

단발머리 2012-09-11 07:32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요즘 '시간'은 좀 있는데, '혼자 책읽는 시간'이 없는 거 있죠? 그 많은 시간 다들 어디 간 겁니까......
순오기님, 너무 보기 좋아요. 숲해설가 일도, 늘푸른 작은 도서관 일도, 척척 해 내시잖아요. 인제 '혼자 책 읽는 시간'만 찾으시면 되겠어요. ㅋㅎㅎ

비로그인 2012-09-1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읽고 싶은 책들' 목록이 제 맘에 쏙 들어요. 몽글몽글하면서 기냥 좋아라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일 것 같아요. 물론 저는 바쁘지 않아서! 조만간 어린이 도서관에 행차하게 될지도... ( '')

단발머리 2012-09-12 05:44   좋아요 0 | URL
오호호~ 그래요? 전 <잭 파일>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구요, <탐정 해리엇> 먼저 읽고 싶은데, 영어로 읽을까, 한글로 읽을까 쫌~~ 생각 중이랍니다. 저두 바쁘지 않아서 도서관 자주 가거든요. 각 도서관, 각 층 사서분들을 다 알고 있다고 할까요. ㅋㅎㅎ 말없는 수다쟁이님, 즐건 하루 되세여~~

이진 2012-09-1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를 보니 초등학생 시절이 마구마구 떠올라요. 와, 저 책 정말 되게 오랜만이다. 친구랑 이 책 읽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었는데. 그 추억이 생각나면서 왠지 가슴이 아릿하네요.

단발머리 2012-09-13 06:50   좋아요 0 | URL
와우, 소이진님, 멋진대요.

워터십을 읽은데다가 친구랑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고요? 전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제목에 혹해서 올려 본 건데, 이거 완전 읽고 싶네요. 대기자 명단에 넣어야겠어요.ㅋㅎ
비가 올 거 같아요, 소이진님. 아, 날씨가 꾸물꾸물하네요.
 

어떤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사는 것이 그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고, “그 사람이 읽는 것이 그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도 그만큼 많이 들어봤다. 나는 이 책을 읽었고, 지금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쓰고 있으니,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다.

주목받는 위치일수록 개인의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 - 찬양 팀의 리드 싱어 역시 주목받는 리더십의 중심에 있게 된다. 이처럼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민감하고 찬양과 기도로 회중을 인도해 나갈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며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자질을 갖는 것이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51쪽)

주목받는 위치일수록 개인의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잊으면 안 되는 것.

찬양팀 보컬이 솔로로 부를 때처럼 독특한 스타일로 노래하는 것은 회중의 찬양을 방해할 수 있다. - 보컬 리더는 회중이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기본 멜로디를 안정감 있는 톤으로 풍부하게 부르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174쪽)

난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러면 전체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단다. 많이 듣던 말이고, 그렇게 많이 들으면서도 항상 귓등으로 듣는 말이지만, 이제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아하, 이것이 바로 전문가의 힘?

찬양팀 싱어는 자신이 찬양 인도를 하지 않는 날이라도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께 헌신해 삶의 열매가 보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들 앞에 설 때나 회중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을 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음악적인 역량이 뛰어날수록 믿음은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된다. (176쪽)

여기에 대한 나의 지론 한 가지. 같이 노래할 때도, 다른 사람과 같이 하기에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치 솔로 파트를 노래하듯이,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노래한다.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찬양한다. 나의 하나님 앞에서.

시작, 마침 그리고 전환부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연습하라 -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부분에 집중에서 연습하라. 빠르기가 정확해야 하고 도입부가 안정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라. 각 곡마다 다른 구성 요소들을 확인시켜 주라. 곡 사이의 전환과 조바꿈을 연습하고, 보컬이 안정적으로 들어가는지 들어 보라. 각 곡의 끝 부분에서 끝맺음이나 리타르단도를 연습하라. (285쪽)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팀과 맞춰볼 때, 나는 이렇게 연습한다. 나는 이미 이렇게 하고 있다. ㅋㅋ

인내하라. 그리고 성실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찬양 사역으로 부르셨다면, 그 분이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적합한 교회로 인도하고, 예배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은사를 성실히 가꾸라. 말씀을 공부하고, 새로운 음악적 기술을 익히며, 찬양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라. ... 케빈 나바로 (Kevin Navarro)는 ‘완성된’ 찬양 인도자의 네 가지 영역을 신학, 제자도, 예술적 재능, 리더십이라고 했다. ... 불신자들조차 그 재능의 근원을 궁금해할 만큼 놀랄 만한 연주자가 되기 바란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겸손히 섬기는 리더가 되기 바란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믿음으로 가득한 가사를 쓸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도 홀로 영광 받으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찬양 받으시기를 기도한다. 아멘! (302쪽)

나 또한 그러하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 않는다. ‘완성된’은 아니더라도, '성숙하‘고, ’예술적으로 잘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되기를,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내가 그런 사람 되기를, 꼭 그러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