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을 때는 그냥읽는다. 물론 작가에 대한 기본 정보는 찾아보고 출판사 소개도 대충 훑어보고, 리뷰를 읽어보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은 모르는 이야기를 그냥 읽는방식으로 읽는다. 그렇게 무작정 읽다보니 줄거리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뭐 그렇다고 특별히 억울하지는 않다손 치더라도 가끔은 제대로 읽은 건가, 제대로 가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럴 때, 혼자 소설을, 고전을 읽고 나서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혹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말들의 향연이 아니라, 정말 훌륭한 해설을 듣고 싶을 때, 그럴 때는 이 책이 제격이다.  

막상 책을 펼치고 목록을 살펴보니, 대부분의 책을 읽지 않았다. 고전이니 그런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잠시 위로하고.

주홍 글자는 정말 오랜만이다. 여러 번 듣고, 읽고, 썼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명을 읽으며 따라갈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 있다. 이를 테면, “지상에서 받는 형벌이 구원에 한층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그대와 함께 죄를 저지르고 함께 고통 받고 있는 그 사내의 이름을 밝혀달라는 딤스데일 목사에게 헤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너무나 깊이 낙인 찍혀 있어요. 그래서 떼어버릴 수가 없죠. 바라건대 저 자신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그분의 괴로움까지도 제가 짊어지고 싶어요.” (58)

 

자신과 간통을 저지른 남자를 보호하겠다는 그녀, 그 몫의 죄까지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말하는 그녀를 상상한다. 단죄 받는 순간까지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헤스터는 만약 이 청교도 무리 속에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면 이 여인네 모습에서 성모마리아를 떠올렸을 것는 호손의 서술에서 빛을 발한다. 결국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가정 하에 이 세 사람을 감히 판단해 본다면, 호손은 헤스터를 죄에서 가장 멀리 있는 인간, 완벽에 가장 가까운 인간으로 설정한 것 같다. 반성하며 자책하면서도 불륜의 대상을 찾으려 복수심에 불타는 칠링워스나 가슴에 주홍 글자를 스스로 새겨 넣었지만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죄를 고백한 딤스데일보다는 헤스터다. 헤스터야말로 죄의 대가를 치루고, 죄에 대한 징벌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마담 보바리, 주홍 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 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 손님

 

 

 

 

 

 

 

 

 

 

 

 

 

 

 

 

 

 

 

 

 

 

 

 

 

 

 

 

 

 

들은 대로, 익히 아는 대로, 알려진 대로 제일 흥미로운 책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될 터이고, 마담 보바리또한 관심이 가지만,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을 단 한 개만 고르라면, 석상 손님.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남편의 무덤 앞에서 미망인을 유혹하는 마초적 매력의 돈 구안. 돈 구안부터 만나봐야겠다.

예전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너무 또렷하게 떠올라 괴로웠다. (어릴 때는,이라고 쓰려했지만, 아직도 나름 젊다고 생각하고 싶어 예전에는,이라고 쓴다.) 황당한 말실수, 오버 액션, 허둥거림,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감추고 싶은 일들이, 그렇게도 강렬하게 또렷하게 생각나고 또 생각나 괴롭고 힘든 밤이 또 그렇게나 길고 길었다. 요즘에는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빨리 잊힌다. 그렇게도 즐겁고 강렬한 경험이었는데도, 마치 1년 전의 일처럼, 아니 5년 전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 때 그 시간의 느낌이, 생각이 그렇게나 멀게 느껴진다.

나는 늙은 건가. 늙고 있는 건가.

 

 

    

19세기에 와서는 밀란 쿤데라가 ‘묘사 소설’이라 이름 붙인 형식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 묘사 소설의 대가가 플로베르입니다. 그러니까 묘사 소설이 본디 있었고 플로베르가 그 연장선상에서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자기 식의 소설을 새롭게 발명한 것입니다. 플로베르의 소설 방법론은 일물일어(一物一語)설로 잘 알려져 있는데, 하나의 대상에 한 단어를 대응시킨다는 뜻입니다. (19쪽)

17~18세기 작가들은 소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주의 작가들은 자의식 면에서 조금 남달랐어요.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러시아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인데, 이들은 소설을 생계 수단이나 재미로 쓴 것이 아니라, ‘뭔가와 경쟁하기 위해’ 썼습니다. 이를테면 톨스토이는 역사와 경쟁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역사학이란 게 역사의 진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톨스토이가 보기엔 역사서라는 게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기엔 대단히 불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식 소설을 씁니다. 《전쟁과 평화》 같은 소설이 그냥 읽을거리라면 그렇게 길게 쓸 필요가 없겠죠. 그게 19세기 소설입니다. (38쪽)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것입니다. ..... 코니는 귀족 부인이고 분명히 지배계급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 계급 내부에서는 여전히 남녀 간의 차별이 있는 거죠. 신사들의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신사들의 세계라는 것은 지극히 정신주의적인, 그저 말의 세계죠.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이나 관계는 결여되어 있는 세계. 코니는 거기에 대해서 조금씩 환멸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99쪽)

로렌스의 성에 대한 생각의 핵심은 진정한 만족은 어느 한쪽만의 만족으로 얻을 수가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자기만족이란 상대방의 만족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121쪽)

《파우스트》는 수수께끼 같은 말,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는 문구로 마무리됩니다. 만약 파우스트와 상대적인 것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라면 파우스트를 ‘영원히 남성적인 것’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원히 남성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요? 파우스트의 편력은 이렇게 말해주는 듯합니다. ‘타협하지 않는 것, 끝까지 가보는 것’ 혹은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 그것이 파우스트 스타일입니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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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8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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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08: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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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0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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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0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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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1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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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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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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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6-08-0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는게 아니라,,, 음... 성숙해지고 있는 겁니다. 누님처럼.. 서정주 님네 누님처럼 ㅎㅎ!

단발머리 2016-08-09 22:31   좋아요 0 | URL
전 언제까지나 성숙과는 먼 삶을 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예순에도 칠순에도 철이 안 들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재작년에 건강검진 받으러 갔는데, 세상에!!!
키가 1센티나 큰 거예요. 보통 제 나이 즈음해서는 줄거나 아니면 그대로잖아요.
저는 키가 큰 거예요. 그래서 흥분해서!! 자기야, 나 키 컸어!
그랬더니 신랑이 아직 철 안 들어서 키 크는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