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커서 ㅣ 문학동네 시인선 81
김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나는 커서
김현서
나는 커서 눈 밑의 반점
나는 커서 선물 상자
나는 커서 빨강 머리 소녀
나는 커서 잠이 깼을 때
나는 커서 죽은 지 6년 된 굴참나무
나는 커서 밑동에서 자라난 독버섯
나는 커서 방문을 열고 나갔지
나는 커서 깜빡거리는 별똥별
나는 커서 피아노
나는 커서 외발 당나귀와 길을 걸었지
나는 커서 눈을 감고 생각했지
나는 커서 까만 털에 붙어사는 이상한 벌레
...
나는 커서 알게 되었지
나는 커서 사라진 토끼
커서 뭐가 되겠다고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야한다고 말해주는 어른도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전에 이미 어른만큼 커버렸다. 나도 모르게 훌쩍 커버리고 나니 그 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돼버렸다. 진짜 크고 나서야, 엄마라는 이름, 며느리라는 이름을 갖고 나서야, 그제서야 제대로 크고 싶다는, 바르게 커야겠다는 생각을, 말 그대로 뒤늦게 하게됐다.
이 시집의 시가 다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는데, 시집 한 가운데에 자리한 이 시가 참 좋았다. 3연 2행의 ‘나는 커서 피아노’가 특히 좋다. 마음에 쏙 든다.
나는 커서 피아노.
요즘엔 키보드나 신디사이저도 좋은 제품이 많아 터치감이 좋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아노의 터치감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묵직한 피아노의 터치. 항상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 연주해주길 기다리는 피아노. 그 곳이 어디든 스스로 자리한 그 모습 그대로 우아한 기품을 품기는 피아노. 특별한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바이올린이나 플릇과 달리 아무나 와서 건반을 누르면 건반 그대로의 소리를 들려주는 피아노. 소리를 내 주는 피아노. 노래하고 연주하고 두드리고 만지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한 피아노.
나는 피아노
나는 커서 피아노
나는 커서
피아노가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