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눔의 세계』
옮긴이 김화영씨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은 카뮈 개인의 생애보다는 작가 카뮈의 작품과 행동, 그리고 그의 지향을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 정리, 배열하여 작가의 삶과 창조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카뮈 자신과 관련된 사진, 작품, 원고, 서한문 뿐 아니라 지중해(알제리,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유럽, 러시아와 동구진영, 아메리카의 아름다운 풍광 뿐 아니라, 카뮈가 사랑한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엮여 있다. (284쪽)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들도 눈길을 끌지만,
<스페인 메노르카의 비니베카 풍경>
<시에나 지방의 몬테풀치아노>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카뮈, 인간 카뮈를 볼 수 있는 사진이다.
나는 오로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취하는 직업, 혹은 일에
파묻혀 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했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내게 직업이란 없다.
오로지 소명받은 천직이 있을 뿐. 그리고 나의 일은 외로운 일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값하는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런데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며 행복해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나는 왠지 울적한 기분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작가수첩Ⅲ』, 218, 107쪽)
카뮈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바치는 헌사를 보면서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읽다 포기했던 옛날을 생각한다.
나는 스무 살 때 이 작품을 처음 만났는데
그때 받은 충격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나는 『악령』이 『오디세우스』
『전쟁과 평화』, 『돈키호테』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처럼 인간정신이 창조하여 쌓아올린
어마어마한 업적의 최고봉을 장식하는 서넛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위하여』, 1957년, 플레이아드 전집Ⅳ, 590)
2. 『나는 누구인가』
부제는 ‘인문학 최고의 공부’이다. 강사는 강신주/고미숙/김상근/슬라보예 지젝/이태수/정용석/최진석. 2013년 가을 학기에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개최된 제3회 인문학 공개강좌의 강연 내용을 담고 있다. 강연을 묶어 출간되는 비슷한 유형의 책들이 많은데, 아무렴, 당연히, 물론 나는 ‘강신주’라는 이름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강신주-고미숙-지젝-정용석으로 이어지는 환상 조합에, 목소리가 익숙한 강신주님은 음성 지원을 받으면서, 다른 분들의 강의는 나름대로 상상해가며 즐겁게 강연을 들었다.
그러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봉착한 몸의 소외, 욕망과 능력의 이 간극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동의보감』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바로 ‘마이너스 건강법’입니다. 『동의보감』이 만들어지던 때는 지금 우리처럼 잘 먹고 많은 것을 즐기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거기에 기술된 양생술을 보면 기본적으로 마이너스 건강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덜 먹고 덜 쓰고 모든 것을 덜어내고 배설해야 합니다. 배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익숙한 것과의 결별입니다. 이 결별을 잘하지 못하면 숱한 과거를 질질 끌고 다녀야만 합니다. 미련과 집착으로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앓는 공통의 질병입니다. (고미숙, <현대인을 이해하는 세 가지 화두: 몸, 돈, 사랑>, 58쪽)
각 정자와 난자의 주인들이 이처럼 무작위하게 서로를 선택하여 한 아이가 탄생하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 아이가 지니게 되는 유전정보의 고유성은 10⁴²²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고유함이 곧 여러분들 각 사람이 지닌 정보의 정체성입니다. (정용석, <나는 이미 기적이다>, 261쪽)
3.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저자는 조한별. 초등학생 때 한 번, 중학생 때 한 번 학교를 휴학하고 가족들과 세계여행을 다녔고, 세인트존스 대학교를 졸업했다. 부잣집 딸도 아니고, 영어를 잘하지도 않는다는 그녀가 어떻게 세인트존스 대학교 수업을 잘 마칠수 있었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내가 실제로 관심있었던 건 당연히 세인트존스 도서 목록인데 생각보다 어마무시하다.
1학년 세미나 리딩 리스트.
3학년 도서인 『걸리버 여행기』, 『오만과 편견』, 『주홍글씨』는 무척이나 반갑지만, 라이프니츠의 『철학 논문집』, 흄의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루소의 『사회계약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함께라니, 보기만 해도 겁나는 도서 리스트다. 한글로도 읽기 어려운 책들을 원서로 읽는다는 건 얼마나 힘들까. 그녀는 나름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어렵지만 배울 것이 많은 고전을 읽고 온 학생들은 수업 시간마다 자신들이 읽은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한다. 나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그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용을 알고 수업에 가고 싶었다. 내용을 알면 토론의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독 능력은 며칠 공부한다고 확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어판 책을 샀다. (189쪽)
시간적 제한이 있는 환경에서, 짧은 시간에 읽기 능력을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어판’ 선택은 나름 최고의 선택이다. 오에 겐자부로도 선택한 방법 아닌가.
4. 『계속 열리는 믿음』
어제 시수업이 4주차다. 그냥 4주차가 아니라, 이야호! 4주차다. 4번 수업을 했고, 이제 4번 남았다. 다음 주에는 작품을 읽는 시간이라 숙제도 없다. 이야기하자면 A4 2장은 나오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원래부터 시수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시수업은 괜찮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가져와 같이 읽고, 감상을 말하고, 아~ 정말 좋아요~ 이런 시수업 말이다. 수업 첫 날, 30분 정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나는 이 수업의 중심이 '시창작'임을, '시를 써서 제출'하는 것임을, '합평'하는 것임을, 이 수업은 ‘정영효 시인과 함께 떠나는 시여행'이 아니라, '정영효 시인과 함께 떠나는 시창작 여행’이라는 걸 이해했다. 숙제를 안 해가자며 굳은 다짐을 나눴던 야나님은 선생님의 가늘고 흰 손가락에 넘어가 배신을 때리고, 맞은편과 좌우에 시 좀 읽으시는 분들의 시 사랑과 열정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카페라떼, 딸기에이드 얼음이 단박에 녹아 버리곤 한다.
어제 수업에서는 저번 주에 배웠던 시에서의 ‘상투성’, ‘기시감’에 더해 ‘사고의 획책’에 대해 배웠는데, 선생님이 했던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래의 이 문장이다.
“이게 좋다는 걸 아셔야 돼요!”
바로, 이거다. 바로 이게 문제다. 나는 ㅆ님의 ‘별’도 좋고, ㄲㅅ님의 ‘바퀴’도 좋다. S님의 ‘숙제’도 좋고, 야나님의 ‘당신’도 좋다. 나는 다 좋은데, 다 좋은 것 같은데,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것 같은데, 선생님은 이게 좋고, 저게 좋지 않다 하시고, 시 사랑에 흠뻑 빠진 학생들은 정말 그러하다,고 탄성에 탄성을 더한다. 아...
나는 산문적 인간이다.
나는 스스로를 산문적 인간이라 생각한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고, 잘 줄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길게 쓰는 사람이고, 시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참, 수업이 힘들다.
어제는 숙제를 생각하며, 숙제의 내용이 아니라 숙제 자체를 생각하다가, 시창작 숙제 때문에 시가 싫어지면 어쩌지, 하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내가 추구하는 나는, 시를 읽는, 시를 읽을 줄 아는 우아한 1인인데, 지금의 나는 시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내 평생에 다시는 ‘시창작 수업’을 들을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시창작 수업’을 들을 기회도, 시간도, 여유도, 마음도 없을 거라는 생각말이다. 그렇다면, 일생일대의 이 기회, ‘시창작 수업’에 참여하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4주밖에 안 남았다. 다시는 ‘시창작 수업’을 들을 일이 없을테니, 남은 이 네 번의 수업을 야무지게 잘 마무리해야겠다, 나한테는 진짜 안 어울리는 말이지만,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솔솔 올라왔다.
숙제를 미리 해 놓으면 좋겠지만, 언감생심,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고, 선생님의 시집을 다시 펼쳐봐야겠다.
이제 4주밖에 안 남았으니까. 한 번 해보지, 뭐. 후훗!
관람
정영효
우리는 극장에서, 극장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많은 사람
들에 섞여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쪽으로 바라보며 남의
말에 재빨리 수긍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 혼자서는
사건이 되지 못하면서, 광장 같은 함성이 들리는 쪽으로 이
미 무서워진 응대와 찬성에 묻힌 채 모르는 사람들끼리 서
로의 이름을 도와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