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전제 : 나는 아이들 책, 어른들 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학교 2학년 겨울, 『태백산맥』을 읽었다. 지리산 빨치산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다양한 인간 군상과 함께 내 눈앞에 거대하게 펼쳐질 때, 나는 지하철에서 당당히 책을 펼치지 못 했다. 그건 그 이야기가 ‘빨갱이’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내용이 너무 ‘야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단언코 이전까지 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들어보지도 못했던, 감히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최고조의 야함’이 서울 한복판 대중교통 수단 안에서 펼쳐질 때, 나는 두 번, 세 번 책을 덮어야 했다. 대학교 2학년 때니까, 내 나이가 스물 하나. 스물 하나에 감당하기 어려운 ‘야함’이었다. 나는 조정래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었고, 개정판도 구입해 놓았지만, 언제 다시 읽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더 ‘야한 걸’ 좋아하게 되는 어느 날에, 담담한 마음으로 야한 장면들을 지나쳐 갈 수 있을 때,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밑바닥 삶을 살아야 했던 민중의 처참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을 때, 그 때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태백산맥』 이야기가 아니고.
어제 저녁부터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가 50여쪽 남았는데, 도서관에서 대출을 해 왔더니, 너무 궁금해서, 정말 너무 너무 궁금해서 일단 책을 집어 들었다.
<알라딘 책소개>
삼십대 중반의 필립 로스를 미국의 대표 작가로 수직 상승시킨 작품. 사춘기 소년의 자위행위에 대한 상당한 양의 상세하고 창조적인 묘사 때문에 1969년 출간 당시 미국 도서관들이 금서로 지정하고, 호주에서는 금수 조치되어 펭귄북스가 밀매까지 단행했던 문제작이다.
☆★ <타임> 선정 100대 소설
★☆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100대 영문소설
★☆ <가디언> 선정 ‘모두가 꼭 읽어야 할 소설 100권’
언제쯤 나오려나, 두려움 반, 기대 반을 가지고 읽어나가던 차에, 나는 주인공의 어머니를 대하고서 활짝 터뜨린다. 웃음꽃을 말이다. 위생과 정리정돈에 ‘강박증’을 보이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어느 날 밤,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인간이야 쥐야.
왜 이러니! 너처럼 잠재력 많은 아이가! 너의 소양! 너의 미래! 하느님이 너에게 아낌없이 주신 모든 선물. 아름다움, 두뇌라는 선물. 그런데도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그냥 굶어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해?
네 평생 사람들이 비썩 마른 아이로 멸시하며 내려다보기를 원하니, 아니면 당당한 어른으로 우러러보기를 원하니?
사람들이 너를 마구 밀치고 놀려대는 꼴을 당하고 싶은 거야? 다른 사람들이 재채기만 해도 자빠지는, 뼈하고 가죽만 남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아니면 존경을 받고 싶니?
커서 어느 쪽이 되고 싶니? 약한 사람이야 강한 사람이야? 성공한 사람이야 실패한 사람이야? 인간이야 쥐야? (28쪽)

오늘 아침, 아롱이가 속으로는 아침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말로는 학교에 늦었다며 두어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식탁에서 일어서려 한다. 나는 책을 펼치고는, 이 부분, 정확히 이 부분을 읽어 내려간다. 아롱이가 웃고, 저기압 딸롱이도 웃는다.
인간이야 쥐야?
오늘의 전제 : 나는 아이들 책, 어른들 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 읽던 책이 재미있으면 딸롱이에게 말한다. 무얼 어떻게 해보려고 딸롱이에게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제일 자주 얼굴을 대하는게 딸롱이라서 그렇다. 내가 읽는 책, 내가 감동 받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좋아하는 구절은 읽어주고, 책도 보여준다. 물론! 딸롱이는 건성건성 보고 만다.
오늘 아침의 책은 가히 딸롱이, 아롱이 모두 좋아했던 거라, 혹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기들도 이 책을 읽어보겠다, 덤비지는 않을까. 나도 아직 ‘결정적으로 야한’ 부분은 만나지 못한 상태라 조금 걱정이 된다. 다행이다. 아침에 아이들한테 책 제목은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숨겨야겠다.
오늘의 전제는 잊어라. 사람의 생각은 의외로 쉽게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