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미있는 이야기
원래 읽으려 했던 책은 [고래]였다.
내가 이용하는 지역 도서관은 모두 6곳인데, 한 곳에서 5권씩 모두 30권의 책을 대출할 수 있다. 최근에는 집에서 가까운 곳 3곳만을 이용했는데, 이용이 소원했던 도서관에서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구입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상호대차로 [고래]를 신청하고 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과천 과학관에 갔던 날, 가져갔던 책이 너무 지루해 아이패드에 저장되어 있는 ebook을 살펴보다가 이 책을 읽게 됐다. 후에는 책으로 읽게 되었는데, 두꺼운 책 두 권이었지만,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
보통 혼자 있으면 심심하다고 느끼지만, 요즘에는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는 스마트폰이 있어, 실제로 혼자라는 느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연인이 마주 하고 있어도, 친구를 만났어도 다들 자기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럴거면 왜 만나는 건지.... 묻고 싶다.
나는 핸드폰이 2G라 혼자 있을 때 혼자라고 느끼는데, 소설을 읽고 있으면 혼자라도 심심하지 않다. 이 책처럼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혼자 키득거리며 책을 읽어가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읽고 있는 나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런 문장을 써내려간 작가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그런 생각 말이다.
그리고 10분이 멀다하고 집으로 뻔질나게 전화를 해보더니 급기야 쑥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래도 말도 안 하고 나오는 바람에 곱창녀가 잔뜩 화가 난 것 같다며, 아무래도 임신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것 같다며, 아무래도 더 늦게 들어갔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며, 아무래도 삼촌은 어리니까 이해를 못하겠지만 나중에 여자가 생기면 자신의 마음을 다 알게 될 거라며, 그러니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빨리 순대라도 사들고 들어가는 게 좋겠다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1권, 229쪽)
그는 한동안 침을 튀기며 으악새 배우로 사는 것에 대한 서러움과 전망의 부재, 문화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개발도상국의 척박한 문화 환경에 대한 개탄과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성토, 그러다 뜬금없이 마누라의 구박과 절대 일찍 장가갈 생각하지 말라는 애잔한 충고, 그러다 또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그때 마누라가 임신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라는 회한과 만일 자신이 오디션에 참가했으면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됐을 거라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신감, 그래서 또 할리우드 가서 말론 브란도 만나고 비비안 리 만났다는 바로 그 얘기! (2권, 30쪽)
이들은 활동 근거지에 따라 삼거리파, 사거리파, 오거리파, 중앙시장파, 종점파 등으로 나뉘어 싸웠는데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이거파와 라이온파, 타이거파와 라이온파가 연합한 라이거파, 라이거파에 반기를 든 신라이거파, 그 모든 파들이 다시 헤쳐모인 범라이거파가 전쟁에 합세했고 또 여기에 토끼가 헤체한 역전파에 향수를 가진 논두렁건달들이 모여서 만든 구역전파, 신역전파, 신구연합역전파, 범역전파 등 온갖 조직들이 난립해 활개를 쳤다. (1권, 380쪽)
이렇게 재미있는 글의 첫 번째 독자는 물론, 작가 자신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고 제일 먼저 웃음 지은 사람도, 킥킥거린 사람도 바로 글쓴이 자신일 것이다. 제일 먼저 웃는 사람은 글쓴이다.
2. 사람, 사람들
삼촌, 이소룡이기를 원하나 실제로는 무협영화 으악새 배우. 나, 자신없고, 할 줄 아는 게 없고, 하고 싶은 게 없는 보통사람. 종태, 이오를 잃고 가정의 비극을 온 몸에 지고 살아야했던 건달. 원정, 너무 큰 가슴 때문에 사랑받고 버림받았던 불운의 여배우. 마사장, 배신한 사랑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순정의 여인. 칼판장, 사랑까지 외면하는 진정한 자유인이자 거짓말 고수. 도치, 호떡 100개를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게워낼 수 있는 불굴의 땅딸보. 토끼, 토끼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폭력배 두목. 오순, 독극물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여고생. 역마, 사형선고와 곡갱이자루.
이 책에는 의도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얽히고 섥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이라는 가정은 이들의 불행 앞에서 너무나 사치스러울 뿐이다. 특히, 이오의 이야기가 너무나 가슴아팠다.
삼청교육대에 대한 부분은, ‘삼청교육대’라는 단어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삼청교육대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 가장 ‘쎈 이야기’는 아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서 위통을 벗어부친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어깨에 무거운 봉을 메고 체조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사회악 일소를 목적으로 검거된 범죄자와 불량배들로 순화교육을 받는 삼청교육대원들이라고 했다. 하나같이 흉악한 인상에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있어 한눈에 딱 봐도 사회악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몰골들이어서 반드시 순화와 정화가 필요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한 두려움이 들게 하는 한편, 이제야 뭔가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뿌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런 애매한 양가감정이 우리가 처음 목격한 죽음의 순화교육, 삼청교육대의 첫인상이었다. (1권, 294쪽)
불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 혐오감을 주는 사람들, 불쾌감을 주는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교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모가 불순하고, 언행이 불량스럽기 때문이다.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모습 자체로도 자신들에게 위화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끌려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과가 없는 사람들이고, 노숙자들처럼 사회 안전망 밖에 있는 약자들이었고, 더 많은 숫자는 반정부 시위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었다. ‘교화’와 ‘사회 정의’를 앞세워 자신들의 정권 안위를 보장하려했던 수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행태가 가능했던 것은 일반인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놈들은 혼 좀 나야된다느니, 저런 놈들은 따끔한 맛을 봐야 된다느니.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삼청교육대’라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지옥을 현실에서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악의 없는 생각들이, 보통보다 조금 더 못된 사람들을 지옥으로 떠민 것이다.
3. 영화 vs 영화
제목를 보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바로 연상된다. 자동이다.
으악새 배우 삼촌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무협영화이다. <사대소림사>, <소림대사>, <남소림 북태권>, <기문사육방>, <마검야도>, <소림사 용팔이>.
몸 전체가 에로틱한 원정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에로물이다. <먹다 버린 능금>, <차라리 불덩이가 되리라>, <몸 전체로 사랑을>.
4. 행복해 하면서 쓰다
이 소설을 즐겁게 썼을거라는 내 예상은 맞았다. 더 정확히는 ‘행복해 하면서’이다.
그러다 봄이 오면서 난생 처음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카페로 가서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원처럼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하듯 카페에 가서 언제나 똑같은 커피를 주문하곤 했지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웃음소리 사이로 Laura Fygi의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 같은 달콤한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마치 광고의 한 장면처럼 말입니다. 오후의 햇살은 따뜻했고 담배 연기가 떠다니는 카페에서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자주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작가의 말, 372쪽)
깊은 산 속 동굴 속에서, 새하얀 손수건에 각혈을 토해가며 써 내려간 이야기도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작가 자신이 행복해하며 써내려간 이야기를 읽는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소설 쓰는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달콤한 추억 하나가 되었다고 작가가 말한다면, 나도 이렇게 말한다.
이 두 권의 소설을 읽었던 그 시간이 제게 행복한 추억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