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건 불법이다. 

원래는 불법인데, 그 때는 그렇게들 했다. 

3학년 2학기 제일 만만해 보이는 국문과 수업을 신청했다. 교재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찾아가라 했다. <현대 소설 강독>. 

 

 

 

원래는 불법인데, 그 때는 그렇게들 했다. 교수님께서 아름다운 작품으로만, 주옥같은 명작으로만 고르셔서, 각 단편의 수록본을 복사해서, 그 복사본을 제본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현대 소설 강독>. 

 

 

 


다른 뜻이 있어, 국문과 수업에 들어간 건 아니었고, 과소개나 과순서 열거상 국문과가 우리과 바로 옆에 있는지라, 나름 적응에는 큰 어려움 없으려니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무참했다. 

우리과 친구 한 명,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 한 명이 어떤 글을 써 가든 교수님께 극칭찬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과는 '한국말도 모른다'며 초전박살, 멸공수준의 폭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수업중에도 머리가 띵해지곤 했다. 내가 여기를 왜 들어왔을까, 왜 들어왔을까 하면서도 끝까지 수업을 들었던건(F학점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 교수님의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심오한 내용도, 그렇게 특별한 내용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교수님의 수업은 뭔가 좀 달랐다. 아주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시지만, 그 안에 필요한 말들이 모두 들어있었다. 잘못된 것을 가차없이 지적하셨지만, 잘된 글에 대해서는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명확히 하셨다. 폭격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2. 김승옥의 [무진기행]

불법제조된 그 책에 실린 단편 중 김승옥님의 [무진기행]이 참 좋았다. 이전에도 읽어본 듯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문장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 닿았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했다. 우리는 약속했다. 

한 번만 배반을 눈감아 달라는, 무책임을 긍정해 달라는,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해 달라는 주인공의 애원이 22살, 그 때는 그렇게도 멋있었다. 

난 일반적으로 말하는 '평범한' 학생의 범주, 조금 더 좋게 봐준다면 '모범생'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었다. 선 밖을 넘어가는게 쉽지 않았다. 사실, 선 밖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22살, 무책임을 긍정하자는 그의 말이 내게 솔깃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선을 넘을 수 없는 나는, 한 번만, 꼭 한 번만 선을 넘어가겠다는 그에게 기회를 준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만, 단 한 번 만이에요, 하면서 말이다.  

나는 소리내 책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눈으로 읽다가 이내 소리내 읽었다. 소리내 읽다가 다시 눈으로 읽었다. 22살, [무진기행]을 읽었다. 



3. 이동진의 <빨간 책방> 

이 책을 다시 찾아보자 생각한 건, <빨간 책방> 오프닝 멘트 때문이었다. 나는 오프닝 멘트는 모두 작가가 써 주는 줄로 알았는데 (더 예전에는 오프닝 멘트는 진행하는 사람이 쓰는 줄 알았다.) 

 

핑키님 페이퍼에서, 46회 오프닝은 진행자인 이동진씨의 책, [밤은 책이다]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심한 사춘기를 앓던 10대의 어느 시기, [무진기행]을 필사했다는 이동진씨의 이야기가 이 책을 기억나게 했다. 나에게 특별한 이 책은, 이동진씨에게도 특별한 책이다. 흐뭇하다. 

 

 



 

 

 

 

 

 

 

 

 

 

 

계속 이 불법제조된 책으로 읽을 수 없어, [무진기행]을 찾아보았더니, <김승옥 소설 전집>이 눈에 띈다. 

 

 

 

 

 

 

 

 

 

 

 

 

요즘엔 전집이 대세인가. 여기 알라딘서재 분들은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모두 모두 사셨나 알라딘서재는 요즘 '소세키'로 대배 중이다. 나도 사고 싶다. 

 

 

 

 

 

 

 

 

 

 

 

 

 

 

 

 

 

 

 

 

 

 

 

 

 

 

 

최근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도 전집으로 모셔 두면 너무 너무 폼날텐데, 불법이 용인되지 않는 이 시대에, 다만 현금이 필요할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3-10-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금 좀..

단발머리 2013-10-17 17:22   좋아요 0 | URL
카드 결제도 가능하기는 하지요^^
사실, 다락방님께는 좀 드리고 싶네요.
조카가 둘이니, 아무래도 현금이 많이 필요하실 거예요.
어쩌죠~~ 저도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