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들」 (Daughters of the Vicar)

초고는 「두 결혼」(Two Marriages)이라는 제목으로 1911년에 씌어졌으나 거듭된 개작에도 불구하고 잡지의 지면을 못 얻고, 다시 한 번 손질을 거쳐 단편집 『프로이센 장교』에 수록되었다. 리비스가 그의 저서 『소설가 D. H. 로런스』 (D. H. Lawrence: Novelist)에서 따로 한 장을 할애하여 거론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고 지금도 ‘명작 단편선’ 같은 데 흔히 끼는 작품은 못 된다. 그러나 중편 길이에 육박하는 규모뿐 아니라 작품 자체의 무게로도 로런스 소설선의 표제작이 되어 손색이 없다고 본다. (작품해설, 331쪽)

목사의 두 딸들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두 결혼」이라는 제목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목사의 딸들」이 더 나은 것 같다.

“매시 씨가 저한테 청혼을 했어요, 엄마.” 메리가 말했다. 린들리 부인은 계속해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감정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래, 그래서 뭐라 그랬니?”

그들은 둘 다 차분함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엄마하고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어요.”

이것은 질문과 같았다. 린들리 부인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부인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긴 의자에서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메리는 입을 꼭 다물고 차분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별로 나쁜 짝이 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더구나.”

어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모두가 냉담하고 마음을 닫아건 채였다. (77쪽)

 혼기가 찬 딸,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딸을 ‘결혼’을 통해 치워버리려 하는 엄마 린들리 부인, 부모의 의도를 알고 있는 사려 깊은 큰 딸 메리,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 아빠 린들리 목사. 메리의 결혼은 이렇게 결정됐다. 결혼하게 될 사람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간직한 채 메리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녀를 보면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콜린즈 목사가 ‘꿩 대신 닭’의 정신으로 일궈낸 청혼을 받아들이는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트의 사정이 더 나아 보인다. 그녀도 경제적 상황, 즉 부모님과 남동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결혼을 결정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기꺼이, 자신을 선택해 준 그 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갖게 해 줄 그 사람에게, 기꺼이 갔다. 메리는 아니었다.

메리는 자신이 남편하고 있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사생활은 그녀의 수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감출 수 있었다. 그녀는 철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의 목사관에 거의 고립된 채 살았다. (79쪽)

그녀의 동생 루이자는 달랐다.

그의 피부는 아름답도록 하얗고 흠이 없었다. 불투명체의 견고한 흰빛이었다. 차츰 루이자는 그것을 보았다. 이 역시 그의 모습이었다. 그것에 그녀는 끌렸다. 그녀의 이질감이 스러졌고, 이들 모자와의 접촉을 꺼리는 마음이 없어졌다. 이 생동하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녀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쳤다. (111쪽)

루이자가 알프레드에게 매력을 느낀 지점이 ‘육체적 아름다움’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랬다. 알프레드는 신분과 외모에서 그녀의 형부 매시 씨와 완벽하게 대비되는데, 루이자는 그의 열등한 신분을 상쇄할 만한, 가히 상쇄할 만한 그의 육체적 매력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물론 인간은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니다. 육체적 매력이라는 것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언제나 속절없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인간인 이상 육체를 입어야하고, 육체 속에 살아야하고,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내가 가길 원하세요?” 억제된 가운데도 격렬한 고통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마치 그 말들이 그녀 자신의 개입 없이 그녀 속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탄가루 속의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요?” 무엇엔가 떠밀린 듯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그가 두려움에 젖어 물었다.

“내가 가길 원하세요?” 그녀는 반복했다.

“왜요?” 그도 다시 물었다.

“난 당신과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요.” (128-9쪽)

작품해설에서는 루이자의 ‘숙녀답지 않은’ 적극성이야말로 그녀의 참 용기요 작품의 독창적인 일면이며, 그녀의 접근이 두렵고 괴롭기조차 하면서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꿈’으로 끝까지 회피하지 않고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는 알프레드 역시 그 나름의 용기와 적극성을 보였다(작품해설 333쪽)고 설명되어 있다.

나 역시 이 작품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루이자가 현대적 의미에서도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로런스가 이 작품을 쓰고, 100여년이 지났지만, 연애 및 결혼에 있어 남성 우위의 문화는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최근에는 결혼 시 여자의 학력이 남자보다 더 높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지만, 내 생각에 그건 어디까지나 ‘남성 우위’의 ‘기타 기반조건’이 확인된 후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더욱 극명하다. 대부분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부분의 여자 주인공들보다 돈이 많다. 집안이 좋다. 학벌이 좋다. 외모가 좋다. 이 네 가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조건은 당연히 ‘돈’이다. 그도저도 안 되면 ‘나이’라도 많아야한다. 사랑에 빠지기 전, 사랑에 빠진 후에라도 여자 주인공들은 항상 남자 주인공들보다 돈이 적기에, 집안이 좋지 않기에, 학벌이 좋지 않기에, 외모가 좋지 않기에, 나이가 어리기에, 연애와 결혼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쉽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난다.

책은 1년 전에 2권 초반까지 읽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에서는 브론스키가 안나보다 연하로 그려졌다. 다른 조건, 이를 테면, 경제력이나 집안, 학벌등도 안나가 크게 부러워할 상황은 아닌 듯 싶다. 오직 외모, 그리고 ‘저돌적 구애’로 브론스키는 안나를 얻는다. 물론, 나는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돌진할 만한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가능했던 여러 요인 중 가장 주요한 것을 안나의 ‘바람끼’라고 진단했다.

「목사의 딸들」로 돌아와서, 알프레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빛나는 그의 육체’, 그의 몸뚱아리 하나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휘어감는 이 느낌에 대해서, 이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에게 ‘루이자’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알프레드는 말한다.

“어떻게 할 거요?” 그가 물었다.

“뭘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답하기가 겸연쩍었다.

“나를 말이오.” 그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녀가 웃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132쪽)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진정한 의미의 ‘여성 상위 시대 - 사랑이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여성의 주도적 역할’이 아주 적절하게 그려진 작품이라 생각된다.

상대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규범적 제재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도 뜨겁다. 흔하다고 할 수 있는 분홍색이지만 흐리멍텅한 분홍이 아니라, 야무진 분홍이다. 거칠지만, 마음에 감동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