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여행 - 작은 휴식을 꿈꾸다!
임병국 지음 / 팜파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 [간이역] 노선 지분율 상위 5대천왕 노선 분석 보고

1위 경전선: 25개 / 141개 = 17.7%
2위 영동선: 17개 / 141개 = 12.1%
3위 전라선·옛 전라선: 13개 / 141개 = 9.2%
4위 경춘선: 12개 / 141개 = 8.5%
5위 중앙선: 9개 / 141개 = 6.4%

상위 5개 노선 합계: 76개 / 141개 = 53.9%

1. 경전선(지분율 17.2%)
가. 역 수: 25개(전체 노선 중 최다 비중)
나. 특징: 남해안의 험난한 지형을 극복한 노선으로, 토공량 최소화를 위한 등고선 추적 선형 설계 같은 토목 기술의 지혜가 집약됨.

2. 영동선(지분율 11.7%)
가. 역 수: 17개
나. 특징: 태백산맥을 횡단하는 험준한 산악 구간의 대명사로, 스위치백 및 인클라인 등 급경사 극복을 위한 토목 기술의 변천사가 반영됨.

3. 전라선(지분율 9.0%)
가. 역 수: 13개
나. 특징: 해안 경관 및 항만도시의 성장과 연계된 노선으로, 근현대 물류 수송 기능 및 지역의 문학적 배경을 공유함.

4. 경춘선(지분율 8.3%)
가. 역 수: 12개
나. 특징: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는 청춘과 낭만의 상징으로, 대학생 MT 및 여가 생활 등 문화적 추억과 서사를 내포함.

5. 중앙선(지분율 6.2%)
가. 역 수: 9개
나. 특징: 한국 철도의 핵심 대동맥으로, 수려한 산세 및 지역 문화유산과 깊이 연계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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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여행 - 작은 휴식을 꿈꾸다!
임병국 지음 / 팜파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 『간이역 여행 1·2』 노선별 역 정리 통합본, 총 141개역

1. 경의선(2개 역)
ㅇ 신촌역, 일산역

2. 용산선(1개 역)
ㅇ 서강역

3. 경원선(2개 역)
ㅇ 동안역, 신탄리역

4. 경춘선(12개 역)
ㅇ 청량리역, 화랑대역, 사릉역, 대성리역, 청평역, 가평역, 강촌역, 백양리역, 경강역, 김유정역, 남춘천역, 평내역

5. 중앙선(9개 역)
ㅇ 팔당역, 운길산역, 능내역, 구둔역, 매곡역, 반곡역, 풍기역, 안동역, 의성역

6. 경부선(6개 역)
ㅇ 천안역, 부강역, 김천역, 왜관역, 동대구역, 심천역

7. 충북선(3개 역)
ㅇ 삼탄역, 공전역, 동량역

8. 장항선·장항화물선(7개 역)
ㅇ 원죽역, 광천역, 청소역, 선장역, 판교역, 장항역, 장항화물역

9. 군산선·군산화물선(4개 역)
ㅇ 임피역, 군산역, 군산화물역, 군산항역

10. 강경선(2개 역)
ㅇ 연무대역, 신연무대역

11. 호남선(4개 역)
ㅇ 익산역, 연산역, 개태사역, 신흥리역

12. 전라선·옛 전라선(13개 역)
ㅇ 춘포역, 구 곡성역, 곡성역, 가정역, 압록역, 서도역, 주생역, 옹정역, 금지역, 여수역, 만성역, 율촌역, 오류역

13. 광주선(1개 역)
ㅇ 극락강역

14. 화순선(1개 역)
ㅇ 복암역

15. 경전선(25개 역)
ㅇ 화순역, 만수역, 석정리역, 입교역, 도림역, 이양역, 명봉역, 광곡역, 보성역, 벌교역, 남평역, 평화역, 원창역, 하동역, 진상역, 양보역, 북천역, 다솔사역, 갈촌역, 반성역, 진주수목원역, 평촌역, 함안역, 군북역, 원북역

16. 진해선(3개 역)
ㅇ 경화역, 진해역, 통해역

17. 경북선(7개 역)
ㅇ 김천역, 상주역, 점촌역, 용궁역, 개포역, 예천역, 영주역

18. 문경선·가은선(5개 역)
ㅇ 불정역, 진남역, 주평역, 문경역, 가은역

19. 대구선(2개 역)
ㅇ 반야월역, 동촌역

20. 태백선(3개 역)
ㅇ 예미역, 자미원역, 태백역

21. 정선선(5개 역)
ㅇ 구절리역, 아우라지역, 나전역, 선평역, 별어곡역

22. 영동선(17개 역)
ㅇ 도경리역, 봉성역, 양원역, 승부역, 강릉역, 경포대역, 도계역, 통리역, 심포리역, 흥전역, 나한정역, 하고사리역, 안인역, 정동진역, 옥계역, 망상역, 동해역

23. 삼척선(2개 역)
ㅇ 추암역, 삼척해변역

24. 동해남부선(6개 역)
ㅇ 해운대역, 송정역, 좌천역, 남창역, 서생역, 불국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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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삽화와 소묘를 그리는 것은 그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퇴 정도의 학력을 가진 빈센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가문의 사업이던 화랑에서 그림 파는 일을 하기도 했고, 서점에서도 일했으며,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도 했고, 벨기에 탄광촌의 전도사로도 일했다.

그는 파리에서 엄청난 소외와 고립을 맛보았고 금세 염증을 느꼈다. 그리하여 평소에 추구해 오던 이상향을 재빨리 불러냈고, 그곳이 바로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인생 자체가 노마드였던 그는 37년의 삶 속에서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의 스무 개가 넘는 도시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부모로부터 내쳐져 원하지 않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던 사건은 평생토록 지속될 빈센트의 정신적 방황에 단초를 제공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노마드적 삶은 그의 평생 동안 함께한 실존적 조건이 되었다. 따라서 스스로 타자로 소외되었던 그가 또 다른 타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다 객사한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300여 점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300여 점은 빈센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다. 걸작의 탄생으로 점철된 마지막 3년은 수만 볼트의 빛이 한꺼번에 켜졌다 사라져 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나의 여정도 바로 이 마지막 3년, 그러니까 아를, 생레미,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집중되었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300여 점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300여 점은 빈센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다. 걸작의 탄생으로 점철된 마지막 3년은 수만 볼트의 빛이 한꺼번에 켜졌다 사라져 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아를은 네덜란드인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친숙한 동양의 일본을 투사한 장소였다. 이 시절의 빈센트에게 좋은 것, 멋진 곳, 이상적인 것, 훌륭한 것은 모두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아를의 거리<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까마귀가 나는 밀밭>, <꽃핀 아몬드나무> 등 오늘날의 반 고흐를 있게 한 대표 걸작들은 그가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장 폭발적으로 분출한 생의 마지막 3년에 탄생한 것이다. 그 마지막 여정의 시작점이 남프랑스의 아를이었다. 사진은 아를 시절 반 고흐가 즐겨 찾던 카페로, 코발트색의 하늘과노란색의 카페가 조화를 이룬 그의 또 다른 걸작인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빈센트는 병세가 완화되어 자신을 치료해 줄 정신과 의사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보낸 1년 3개월 남짓 동안 그토록 꿈꾸던 화가 공동체는 폴 고갱과의 불화로 결렬되고,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아를 시절은 끝이 났다. 그 후 근처작은 도시인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 입원하여 또 약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일본의 선승들에게도 매료되었던 빈센트는 그들처럼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에 부풀었다. 물론 그는 일본에 가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건조하고바람이 강한 아를의 기후는 일본의 습한 기후와 전혀 달랐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아포리즘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내 삶을 관통하는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단박에 빈센트를 떠올렸다.

<꽃핀 복숭아나무>1888년 2월, 반 고흐는 그가 존경한 선배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랬듯이 화가 공동체라는 새로운 꿈을 안고 시끄러운 파리를 떠나 최고의 밝음을 자랑하는 아를로 왔다. 이른 봄, 사방으로 꽃이 만개한 아를의 풍부한 색채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것을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 화사한 풍경은 마치 그의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약속처럼 보였을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60.2×80.9센티미터, 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사실 그는 일생 동안 기성세대의 보수적 이념과 구태의연한 체제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으로 경계하며 저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빈센트와 만나 수년간 동거했다. 그 동거는 정주가 아닌 탈주의 동거였다.

지긋지긋했으나 지극히 투명한 지복의 시간이었다. 빈센트와 떠난 정신적인 여행, 그러니까 빈센트로 시작해 나에게 도달한 이 영적인 여행은 감히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생레미의 광장에서평생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하고 낯선 곳을 떠돌았던 반 고흐의 여정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고 한 자크 라캉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상의 망명자인 양 그의삶은 늘 고달프고 애처러웠지만, 그 탈주의 드라마는 영원으로 이어진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켰다.

"화가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 할 때 자연과 나는 조화되고 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빈센트는 광인인가?
빈센트에 대한 세간의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광기에 치달아 죽어 버렸다는 것, 그러니 너무나 불행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가 불행한 인간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불행한 화가는 아니었다고.

죽기 1년 전, 갑작스럽게 습작 시절에나 하던 밀레 모사로 돌아간 것 역시 자기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를 두고 ‘신성한 불만족‘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 역시 신경증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빈센트는 단연코 행복했던 인간이다. 우울하기만 했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그려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생명력을 오롯이 활기 있게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갱과 동료 화가들도 빈센트 안에 사랑스러운 면모와 참을 수 없는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갱은 빈센트의 성격이 얼마나 급작스럽고 격렬하게 바뀌었는지를 회상했다. 지나치게 떠들썩했다가 불길할 만큼 조용한 태도로 돌아왔다가는 다시 이전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빈센트에 관한 또 하나의 오해는 그가 세속적인 성공과 무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성공이라는 불가능한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감정적 욕구와 예술적 야심이 결합되어 부지런히 광적으로 작업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화가로 산 10년 동안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예술가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얼마간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광인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초월적 상상력을 지닌 자로 간주되었다.

테오는 자주 형이 이중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두 명의 인물이 한 존재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하나는 놀랍도록 재능이 많고 섬세하고 훌륭하며, 다른하나는 이기적이고 무정하다는 것이다.

존 피터 러셀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는 늘 부랑자 같은 모습이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 비뚤어진 입, 무섭도록 반짝이는 가느다란 눈, 선명하게 붉은 머리카락,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모습등 누구도 그를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신 파리 시절에 알게 된 존 피터 러셀이 그린 이 초상화만큼은 좋아해서 테오에게도 잘 관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러셀은 반 고흐의 옆모습을 살짝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모습으로 그렸는데, 반 고흐가 이 초상화를 좋아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는 말도 된다.
캔버스에 유채, 45.6×60.1센티미터, 1886,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부모는 빈센트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유쾌하고 명랑하며 농담도 잘 던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뚱하고 신경질적이며 성질을 부리고 쉽사리 우울해한다며 그런 기질을 문제라고 여겼다.

절친인 에밀 베르나르 에 따르면 빈센트는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발전시키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토론은 지루하고 장황할 때가많았다. 이견을 참지 못했고, 이로 인해 성질을 부리고 예민해졌다.

정상은 아니지만 해가 되지는 않는오해를 받을 만한 여러 속성을 겸비한 빈센트는 예측 불허의 사람이었다. 한 내면에 두 개의 상반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 고흐의 방아를시절의 반 고흐 방을 재현한 것이다. 반 고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감정과 드높은 예술적 열망으로 인해 늘 어딘지 불안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해보였다. 오직 자연과 그림만이 그의 불안을 잠재워 주는 차단막이 되어 주었다.

빈센트의 인정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일종의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다시 말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주는 스타일이다.

스물여섯 살 때 그는 "나는 정열의 인간이고, 다소 무분별하고 지나친 행동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종종 후회하기도 해. 더욱 참고 기다리는 편이 좋았을 때도 바로 말을 뱉거나 행동하는 경우도 자주 있어.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라고 했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지만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왜곡하고 힘들어했다. 그로 인해 그에게 남은 것은 뼈저린 실망과 상처뿐이었다.

타자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동일시의 투사라고 부른다. 상대방과 나, 나와 타자가 하나라는 생각은 그만큼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다는것이다.

<울고 있는 여인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남달랐던 반 고흐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는 예수가 그랬듯이 노동자, 창녀, 빈민, 정신병자 등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목회자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고 그림으로 세상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 종이에 분필, 31.4×50.2센티미터, 1883, 시카고미술관, 시카고.

인내와 성실의 다른 이름, 천재그렇지만 유일하게 빈센트를 아프게 하지 않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림만이 그를 덜 외롭게 했다. 그림에 몰입하는 것만이 그의 자존감을 세워 주었다.

부르주아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빈센트는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에서는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한 가운데 그들과 일체되고자 했다.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도 고통에 빠진 환자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했고 잘 동화했다. 이렇듯 그는 정신병자, 창녀, 빈자, 노동자, 농민, 탄광 인부, 어린아이 등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함께 생활하고자 했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환경에서 보람을 느꼈다. 그는 소외된 자들과 함께할 때 고독감도 덜 느꼈다.

반 고흐가 쓰던 화구반 고흐는 정규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제도권의 보수적이고 틀에 짜인 교육 방식은 그와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독학으로그림을 익힌 그는 약 10년이라는 화가로서의 짧은 경력이 무색할 만큼 특유의 거침없는 스타일로 엄청난 양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빈센트 역시 테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재능은 오랜 인내의 선물이고, 독창성은 강한 의지와 예리한 관찰을 통한 노력에 의해 얻어진다"라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폴 발레리는 "천재! 오긴 인내여"라고 했고, 샤를 보들레르 역시 "영감은 일상적인 훈련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고 했다.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달아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 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거라고 말해 주어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흔히 천재성을 ‘일정한 훈련 없이도 생산적인 결과를 산출해 내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빈센트에게 이 말은 일부만 옳다.

빈센트가 이런 천재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정규 미술 교육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로 출발하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화가가 되어 서른일곱 살에 생을 마감한 빈센트는 10년 동안 1000점의 작품을, 그중에서도 마지막 3년 동안은 300점을 그렸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것도 빨리 그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 짧은 시간에 작품성이 탁월한 수많은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일까?

반 고흐의 어머니반 고흐의 예술적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생산성에는 왕실 제본사의 딸이자 아마추어 삽화가였던 어머니 아나 카르벤튀스의 영향이 컸다. 어린 빈센트는 어머니에게서 미술을 비롯하여 책 읽기와 음악 등을 배웠다. 또한 어머니는 늘 아이들에게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려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캔버스에 유채, 32.5×40.5센티미터, 1888, 노턴사이먼미술관, 패서디나.

이런 막대한 소비에 대해 그는 "많이 쓸수록 빨리 성공하고 많이 발전할 겁니다"라고 장담했다. 더군다나 유화를 시작하자 "번개처럼 빨리 그릴 것이며, 내 붓에 더많은 활력을 불어넣겠다"라고 다짐했다. 건강한 남자답게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는 유일한 방식은 주저 없이 칠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매일을 분투하다빈센트에게 ‘예술가‘라는 의미는? 그것은 바로 ‘나는 탐구한다, 나는 분투한다, 나는 열중한다‘는 뜻이다. 빈센트는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생기면 몰입의 강도가 막강한 존재였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성실했으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한 남자, 그의 지나친 노력과 헌신은 과도한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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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37년 짧은 생을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는 서른 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중 이 그림은반복되는 발작과 불안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남프랑스 생레미 시절에 그린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54×65센티미터, 1889, 오르세미술관, 파리,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화가
반 고흐의 대표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꾸며진 전시실을 거니는 사람들. 반 고흐는 살아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림이 지금은 팔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제 그는 누구나 그 이름을 알 만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다.

자연을 사랑한 화가
반 고흐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34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쉬르우아즈라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는 거친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이곳의 밀밭을 거닐며 <까마귀가 나는 밀밭>, <먹구름이 드리운 밀밭> 등 몇 점의 풍경화를 남겼다. 그가 묻힌 곳도 밀밭의 양지 바른 곳이다.

반 고흐의 생애와 예술 공간
 
37년에 걸친 반 고흐의 짧은 인생은 크게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에서 보낸 전기와, 프랑스의 파리, 아를, 생레미드프로방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보낸 후기로 나눌 수 있다. 그는 그림 파는 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한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종교인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그는 예술을 통한 구도의 길로 눈을 돌렸고, 파리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사조를 접하면서 그의 그림도 밝고 화사한 색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밝은 빛과 따뜻한 색채가 있는 곳에서 예술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아를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꿈꾼 예술의 유토피아는 폴 고갱과의 갈등 끝에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정신 질환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그는 1890년 7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가슴에 총을 쏘았다.

➊ 쥔데르트 네덜란드
반 고흐가 태어난 곳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에 네덜란드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인 쥔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인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어머니 아나 코넬리아 카르벤튀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➋ 런던 영국
구필화랑 런던 지점이 있던 곳
1869년, 구필화랑 덴하흐 지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반 고흐는 스무 살이던 1873년 6월에는 구필화랑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아 이듬해 가을까지 몸담았다.

➌ 보리나주 벨기에
탄광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한 곳
그림 파는 일을 그만두고 신학 공부를 하던 반 고흐는 1878년에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 인근에 있는 광산촌 보리나주로 가서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지독하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곁에서 스스로 모든 안락을 거부하는 가운데 아픈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➍ 뉘넌 네덜란드
〈감자 먹는 사람들〉의 배경지
에턴, 덴하흐, 드렌터 등을 떠돌며 예술가의 길을 모색하던 반 고흐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뉘넌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교회 목사관 뒤편의 부속 건물을 화실로 쓰다가, 몇 달 뒤 마을의 가톨릭 교회 관리인의 집에 방을 얻어 나왔다. 2년간 뉘넌에서 머무는 동안 고흐는 약 200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중 〈감자 먹는 사람들〉은 초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➎ 파리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들을 접한 곳
1886년, 서른세 살의 반 고흐는 파리에 도착했다. 곧이어 그는 정기적으로 모델을 보고 그릴 수 있는 코르몽의 화실을 드나들었지만,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출입을 그만두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도시 내외곽 풍경을 계속해서 그렸는데, 당시 핵심 사조인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그의 그림도 어두운 화풍에서 벗어나 밝고 강렬한 색조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➏ 아를 프랑스
예술 공동체를 꿈꾼 곳
1888년, 반 고흐는 밝고 원색적인 빛과 색채를 찾아 남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아를에서 밀레와 루소 등의 바르비종파 같은 예술 공동체를 실현하고 싶어 했다. 이에 동료 예술가들에게 아를로 오라고 제안했는데, 고갱만이 반 고흐의 초대에 응했다. 그러나 둘 간에는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의 꿈과 열정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➐ 생레미드프로방스 프랑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곳
환각에 시달리던 반 고흐는 1889년에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생폴드모솔요양원에 들어갔다. 그것은 자신의 평화뿐만 아니라 타인의 평화를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는 반복되는 정신 발작으로 고통을 받다가도 어느 정도 괜찮아지면 다시 붓을 들었다. 그리하여 요양원 정원의 라일락과 붓꽃을 비롯하여 멀리 알피유산맥, 포도밭, 아몬드나무, 밤의 풍경 등 약 150점의 그림을 남겼다.

➑ 오베르쉬르우아즈 프랑스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
1890년 5월, 반 고흐는 파리에서 멀지 않은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그는 드넓은 고원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그림 같은 곳"이라고 했다. 특히 거친 하늘 아래 광대하게 펼쳐진 들판은 그의 내면에 쟁여져 있던 지독한 슬픔과 고독을 소환해 내며 거대한 풍경화를 그리게 했다. 불안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녔고, 결국 1890년 7월 27일에 그는 들판에서 제 가슴에 총을 겨눔으로써 이승의 삶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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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여행 - 작은 휴식을 꿈꾸다!
임병국 지음 / 팜파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특별기고] 인클라인과 스위치백

<산을 넘기 위한 느린 철도의 꾀>
영동선 통리재로 보는 산악철도 급경사 극복의 역사

1. 들어가며

철도는 경사에 약하다. 자동차는 어느 정도 급한 언덕도 올라가지만, 철도는 쇠바퀴와 쇠레일이 맞닿아 움직이기 때문에 경사가 급해지면 힘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 그래서 철도는 산을 만났을 때 늘 고민해야 했다. 산을 돌아갈 것인가, 산을 뚫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올라갈 것인가.

오늘날에는 긴 터널을 뚫어 산을 곧게 통과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렇게 쉽게 긴 터널을 뚫기 어려웠다. 공사비도 많이 들고, 기술적 한계도 컸다. 그래서 험한 산악지형에서는 여러 가지 우회 방법이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이다. 인클라인은 차량이나 화차를 케이블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 스위치백은 열차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둘 다 빠른 철도는 아니다. 오히려 느리고 번거로운 방식이다. 하지만 바로 그 느림 속에 산을 넘기 위한 철도의 꾀가 들어 있다.

2. 인클라인의 원리

인클라인은 급경사 구간에 레일을 놓고, 차량이나 화차를 케이블과 권양장치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일반 열차처럼 기관차가 자기 힘으로 경사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견인장치가 차량을 위로 끌어당긴다.

쉽게 말하면 레일 위의 케이블카에 가깝다. 경사면 아래쪽에 있는 차량을 위쪽 권양기에서 케이블로 당기거나, 위쪽 차량이 내려가면서 아래쪽 차량을 끌어올리는 식으로 운영된다. 광산, 댐, 산악 공사장, 산업시설 같은 곳에서 많이 쓰인 방식이다.

인클라인은 매우 급한 경사를 짧게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운행 방식이 복잡하고, 일반 여객열차가 그대로 통과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클라인은 간선철도의 일반 운행보다는 화물 수송이나 특수 목적의 산악 운반시설에 더 가까운 성격을 가진다.

3. 우리나라 인클라인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인클라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곳은 영동선 통리~심포리 구간이다. 이곳은 태백산맥을 넘는 급경사 구간으로, 도계·통리 일대의 산악지형을 철도로 넘어야 하는 어려운 구간이었다.

통리~심포리 1.1km 구간에는 케이블로 화차를 끌어올리는 강삭철도, 즉 인클라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강삭철도는 화물열차 위주로 운행되었고, 객차는 무거워 끌어올리지 못해 승객들이 심포리와 통리 사이 구간을 걸어서 이동한 뒤 다시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꽤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기차라고 하면 타고 앉아 있으면 계속 목적지까지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통리재 인클라인 시절에는 달랐다. 산이 너무 험해서 화차는 케이블로 끌어올리고, 사람은 내려서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 시절 철도는 편리한 교통수단이기 전에, 산과 싸우며 겨우 길을 이어가던 시설이었다. 통리재 인클라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철도가 산을 쉽게 이기지 못하던 시절, 사람들은 케이블의 힘을 빌려 화차를 끌어올렸다.

지역에서는 이런 인클라인 철도를 ‘마끼’라고 부르기도 했다. 탄광지대의 철도와 산업시설은 표준어보다 현장말이 먼저 남는 경우가 많다. 인클라인이라는 말보다 ‘마끼’라는 말이 더 생생하게 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4. 스위치백의 원리

스위치백은 인클라인과 다르다. 인클라인이 케이블로 차량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라면, 스위치백은 열차가 자기 선로 위에서 방향을 바꾸며 고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산을 직선으로 오르면 경사가 너무 급해진다. 그래서 선로를 지그재그로 놓는다. 열차는 한쪽 선로로 들어갔다가 멈추고, 선로를 전환한 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다시 중간에서 방향을 바꾸고, 또 다른 선로로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열차는 전진만 하지 않는다. 어떤 구간에서는 후진도 한다. 승객 입장에서는 기차가 가다가 멈추고, 갑자기 뒤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주 독특한 느낌을 받는다. 요즘 철도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스위치백은 느리고 번거롭다. 열차를 멈춰야 하고, 선로를 전환해야 하며, 후진 운전도 해야 한다. 그러나 긴 터널을 뚫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매우 현실적인 산악철도 방식이었다. 산을 뚫지 못하면, 선로를 꺾어 산을 오르면 되었다.

5. 우리나라 스위치백의 역사

우리나라 스위치백의 대표 구간도 영동선 도계~통리 일대다. 영동선에는 심포리~흥전~나한정~도계 구간에 스위치백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중 흥전~나한정 구간이 후진 운전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5월 스위치백 철로가 도입되면서 영주에서 강릉까지 이어지는 영동선이 완전히 연결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인클라인만으로는 일반 여객과 화물 수송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어려웠고, 결국 산을 돌아 내려가는 스위치백 방식이 본격적인 철도 운행의 해법이 된 것이다.

이 구간은 통리역, 심포리역, 흥전역, 나한정역, 도계역으로 이어지며 고도 차가 큰 산악지형을 오르내렸다. 해발 높은 통리 쪽에서 낮은 도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급했고, 그 급경사를 한 번에 처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선로를 꺾고, 돌리고, 되돌리는 방식이 필요했다.

스위치백은 철도 운영자에게는 불편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객에게는 잊기 어려운 체험이었다. 기차가 앞으로 가다가 멈추고, 다시 뒤로 움직이고, 산허리를 따라 방향을 바꾸는 모습은 보통 철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래서 영동선 스위치백은 단순한 철도시설이 아니라, 한국 산악철도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었다. 특히 흥전~나한정 구간은 기차가 후진으로 움직이며 고도를 극복하던 현장으로 기억된다.

6. 인클라인에서 스위치백으로

영동선 통리재 일대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면 인클라인에서 스위치백으로 넘어간 역사다.

처음에는 케이블로 화차를 끌어올렸다. 이것이 인클라인이다. 하지만 인클라인은 여객과 화물을 한 번에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어려웠다. 승객이 내려서 걸어가야 하는 불편도 있었다. 산을 넘는 철도는 있었지만,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철도는 아니었다.

그 뒤 스위치백이 등장하면서 열차가 산악 구간을 계속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느리고 번거로웠다. 그래도 승객과 화물을 같은 철도 흐름 안에서 이어줄 수 있었다. 인클라인이 케이블의 힘을 빌린 방식이라면, 스위치백은 선로 배치와 운행 방식으로 산을 넘어간 방식이다.

이 변화는 철도 기술의 발전이기도 하지만, 지역 생활의 변화이기도 했다. 인클라인 시절에는 산에서 철도가 끊기는 느낌이 있었다면, 스위치백 이후에는 기차가 통리재를 넘어 강릉 쪽으로 이어지는 경험이 가능해졌다.

결국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은 서로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둘은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한 다른 시대의 답이었다. 문제는 하나였다. “이 험한 산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인클라인은 케이블로 답했고, 스위치백은 지그재그 선로로 답했다.

7. 솔안터널의 개통과 스위치백의 퇴장

2012년 6월 27일, 영동선 동백산~도계 철도이설구간이 개통되면서 솔안터널이 운영에 들어갔다. 이 사업은 스위치백 방식의 안전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되었고, 솔안터널은 긴 나선형 철도터널로 건설되었다.

솔안터널 개통으로 동백산~도계 구간의 운행시간은 크게 줄었고, 운행거리도 단축되었다. 철도 운영만 놓고 보면 효율성과 안전성이 크게 좋아진 셈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동선 스위치백은 본선 기능에서 물러났다. 기차가 산을 오르기 위해 멈추고, 선로를 바꾸고, 후진으로 움직이던 장면은 더 이상 일반 열차 안에서 보기 어렵게 되었다.

솔안터널은 현대 철도의 방식이다. 산을 돌아가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나선형으로 고도를 조정하며 빠르게 통과한다.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이 산을 우회하거나 단계적으로 오르는 방식이었다면, 솔안터널은 산속으로 들어가 급경사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장면은 사라졌다. 이것이 철도 인프라 변천의 두 얼굴이다.

8. 직접 타본 영동선 스위치백

영동선 스위치백은 책 속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다. 2012년 겨울, 도계~통리 구간을 왕복하며 스위치백이 폐선되기 전 흥전~나한정 구간을 직접 경험했다.

기차가 평범하게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넘기 위해 방향을 바꾸는 장면은 확실히 특별했다. 철도는 보통 곧고 빠른 길을 지향하지만, 이 구간에서는 오히려 느리고 복잡한 방식 자체가 풍경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타본 것이 참 다행이다. 솔안터널 개통 이후에는 그 방식이 본선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위치백은 불편한 철도였지만, 한 번 경험한 사람에게는 오래 남는 철도였다.

『간이역 여행 2』에서 영동선 스위치백 대목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이 설명하는 철도시설을 실제로 몸으로 겪어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흥전, 나한정, 통리, 도계라는 역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산을 넘어가던 느린 철도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9. 일본 다테노역에서 다시 만난 스위치백

스위치백의 기억은 일본 여행에서도 다시 이어졌다. 구마모토에서 아소산 쪽으로 가는 길에는 다테노역(立野역) 일대의 스위치백 구간이 남아 있다.

2023년과 2024년에 그 구간을 두 차례 경험했다. 한국의 영동선 스위치백이 사라진 뒤라 그런지, 다테노역에서 만난 스위치백은 더 반가웠다. 단순히 일본 철도의 특이한 시설을 본 것이 아니라, 한때 우리나라 영동선에도 있었던 산악철도의 방식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스위치백은 빠른 철도 시대에는 불편한 구조다. 하지만 직접 타 보면 그 불편함 속에만 있는 맛이 있다. 열차가 멈추고, 방향을 바꾸고, 다시 움직이는 동안 승객은 산의 높이와 철도의 수고를 몸으로 느낀다.

10. 간이역 여행과 산악철도의 기억

『간이역 여행 1·2』를 읽다 보면, 간이역은 단순히 작은 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은 그 지역의 지형, 생활, 산업, 기억과 함께 존재한다. 영동선 스위치백도 마찬가지다.

심포리, 흥전, 나한정, 통리, 도계 같은 이름은 철도 지도 위의 역명만이 아니다. 그 이름들은 산을 넘기 위해 철도가 얼마나 많은 방식을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인클라인은 탄광과 화물 수송의 거친 기억을 품고 있고, 스위치백은 산을 지그재그로 넘던 여객철도의 특이한 체험을 남겼다. 솔안터널은 현대 철도의 효율을 보여주지만, 그 아래에는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의 시간이 깔려 있다.

그래서 산악철도는 단순히 경치 좋은 철도가 아니다. 산을 어떻게 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기술을 썼는지, 어떤 불편을 감수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그래야 철도가 가진 진짜 무게가 보인다.

11. 맺음말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은 느린 철도였다. 빠른 철도 시대의 눈으로 보면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산을 넘기 위해 애쓴 시대의 지혜가 들어 있다.

긴 터널이 뚫리고, 선형이 곧게 펴지고, 오래된 시설이 본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철도의 자연스러운 발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의 방식이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은 산악철도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 길을 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인클라인은 케이블로 화차를 끌어올렸고, 스위치백은 선로를 꺾어 기차가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리고 솔안터널은 산을 뚫어 빠르게 지나가게 만들었다.

결국 철도는 산을 만나면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끌어올리고, 돌아가고, 방향을 바꾸고, 마침내 뚫고 지나갔다. 그 과정이 바로 산악철도의 역사다.

인클라인과 스위치백은 이제 대부분 기억 속의 철도가 되었지만, 그 느리고 복잡한 방식들 덕분에 사람과 물자는 산을 넘을 수 있었다. 산을 넘기 위한 느린 철도의 꾀, 그 말이 이 두 시설을 설명하는 데 가장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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