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 오베르쉬르우아즈 들판에서 만난 지상의 유배자 클래식 클라우드 30
유경희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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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보고2] 자유와 집착의 경계: 조르바와 반 고흐

1. 비교의 전제

가. 인물의 성격

ㅇ(조르바) 실제 인물 요르고스 조르바스를 바탕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창조한 문학적 인물.

ㅇ(반 고흐) 편지·작품·행적이 기록으로 남은 실존 인물.

ㅇ(비교의 차이) 조르바는 자유로운 인간의 전형으로 다듬어진 인물이고, 반 고흐는 모순과 실패까지 그대로 남은 현실의 인간임.

2. 비교 개념의 정리

가. 자유

ㅇ(자기결정성) 타인의 강제 없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함.

ㅇ(경험의 개방성) 계산과 두려움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임.

ㅇ(타인 존중) 자기 욕망을 따르되 타인의 선택과 경계는 침해하지 않음.

나. 집착

ㅇ(통제 욕망) 자신의 감정과 기대에 맞게 상대를 움직이려 함.

ㅇ(경계 침해) 거절과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접근을 계속함.

ㅇ(현실 왜곡) 실제 현실보다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우선함.

ㅇ(인식 강요) 자신이 믿는 세계를 타인도 똑같이 받아들이기를 요구함.

3. 두 인물의 공통점

ㅇ(사회적 부조화) 기존 질서와 규범에 쉽게 순응하지 않음.

ㅇ(강한 몰입) 감정과 욕망을 숨기지 않고 삶에 강하게 뛰어듦.

ㅇ(경이로운 시선) 평범한 자연과 일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함.

ㅇ(행동성)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옮김.

4. 조르바의 자유

ㅇ(행동하는 인간) 사람들이 체면과 두려움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을 직접 실행함.

ㅇ(삶에 대한 감탄) 순간을 계산하거나 분석하기보다 온몸으로 경험함.

ㅇ(자기 삶의 해방) 사회의 시선보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따름.

ㅇ(타인의 자유) 자기 방식대로 살지만 남에게 똑같이 살라고 요구하지 않음.

→ 조르바의 광기는 자기 삶을 해방하는 자유에 가까움.

5. 반 고흐의 집착

ㅇ(여성관계) 분명한 거절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음.

ㅇ(화가 공동체) 동료 화가의 생각과 생활방식도 자신의 이상에 맞기를 바람.

ㅇ(아를과 일본) 실제 아를과 관계없이 완벽한 일본이라고 규정함.

ㅇ(타인 설득) 고갱과 베르나르에게도 자신이 본 일본을 똑같이 보라고 요구함.

→ 반 고흐의 광기는 타인의 감정과 현실 인식까지 자기 환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집착에 가까움.

6. 자유와 집착을 가르는 차이

가. 광기의 방향

ㅇ(조르바)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겠다.”

ㅇ(반 고흐) “당신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나. 타인에 대한 태도

ㅇ(조르바) 자기 삶의 자유를 추구하되 타인의 선택은 그대로 둠.

ㅇ(반 고흐)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상대의 실제 의사보다 중요하게 여김.

다. 현실에 대한 태도

ㅇ(조르바)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직접 경험함.

ㅇ(반 고흐) 현실을 자기 이상과 환상에 맞게 재해석함.

7. 종합 평가

ㅇ(조르바) 자기만 자유롭게 살며 독자에게 대리적 해방감을 줌.

ㅇ(반 고흐) 예술에서는 천재성을 보여주었으나 인간관계에서는 갈등과 고통을 낳음.

ㅇ(최종 결론) 조르바의 광기는 자유가 되었고, 반 고흐의 광기는 집착이 되었음.

“조르바는 자기 삶만 자기 방식으로 살았고, 반 고흐는 타인의 감정과 현실 인식까지 자기 환상에 맞추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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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 오베르쉬르우아즈 들판에서 만난 지상의 유배자 클래식 클라우드 30
유경희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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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외로움과 우울 속에서 빈센트가 찾을 곳은 단 하나. 위기 때마다 그랬듯이 예술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에 매달렸다.

빈센트 역시 이러한 고갱만이 오로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 주고, 화가 공동체라는 환상을 구현할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여기에는 두 사람간 모종의 비즈니스적인 타협이 있었다. 동생에 빚지고 있던 빈센트는 고갱과 손을 잡으면 다른 전위 화가들을 자극해 형제의 사업을 강력한 입지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고갱의 상승기류를 타고 자신의 작품 또한 팔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하튼 고갱을 확보하면 손해를 볼 리가 없다는, 나름대로 이재를 밝힌과감한 예측이었다.

<고갱의 초상>
반 고흐가 그린 고갱의 뒷모습이다. 어떤 이들은 고갱을 수상하게 여겼고, 어떤 이들은 그의 기묘한 매력에 굴복했다. 반 고흐가 하필 고갱의 뒷모습을 그린 것은 그러한 수수께끼 같은 면모를 나타내고자 한 것일까? 삼베에 유채, 33×37센티미터, 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그러나 고갱의 속마음은 달랐다. 그에게 유토피아란 대부분 돈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질적 야망을 지닌 전직 주식 중개인인 그에게는 부양할 여섯 식구와 까다로운아내가 있었다. 그는 테오와 할 수 있는 또 다른 원대한 사업적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예컨대 엄청난 기금을 모아 인상파 전문 화랑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빈센트는고갱의 제안이 터무니없다며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아를에서 빈센트의 발자취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고향을 떠난 뒤 북유럽의 어떤 도시보다도 오래 머물렀고 수많은 대표작을 탄생시킨 곳이지만, 빈센트의 흔적은 가장 적게 남아 있는 도시였다.

노란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자주 간 카페, 첫 번째로 투숙한 호텔, 종종 들르던 매춘업소까지 완전히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사실 빈센트는 값싼 창녀조차 침대 혹은 작업실로 끌어들이는 데 애를 먹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는 말이다.

빈센트는 돈을 아껴 써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무시하고 노란 집의 인테리어를 위해 돈과 시간을 할애했다. 빈센트는 고갱을 만족시키기 위해 버려진 낡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내 장식과 가구에 큰돈을 들였다.

반 고흐의 노란 집이 있었던 자리
반 고흐는 아를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며 200여 점의 그림을 남겼음에도 오늘날 여기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유명한 노란 집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현재는 라마르틴광장 안 중앙 분수대 옆에 반 고흐가 그린 <노란 집>표지판만이 세워져 있다.

빈센트는 노란 집이 남프랑스의 색채를 찾아온 화가들에게 마법 같은 성지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이러한 상상은 그림을 통해 완성되었다. 가로 90센티미터, 세로 60센티미터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라마르틴광장 2번지에 있는 변변찮은 건물을 기념비적인 노란색 건축물로 바꾸어 그렸다.

빵을 사 먹을 돈도 없이 궁색해진 빈센트는 동생에게는 내내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테오가 걱정하자 빈센트는 이런 정도의 사치는 불가피하다고 스스로 변호했다. 융자로 받은 300프랑까지 다 써 버리자 빈센트는 빚이 곧 저축이라며, 그런 공간이 건강을 회복시켜 주고 한결 자유롭게 작업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결국에는 큰돈이 되어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퐁타벤에 있던 고갱은 불화로 인해 추종자들이 모두 떠나고 돈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그때 테오는 도자기 몇 점을 구입해 주고 고갱이 퐁타벤에서 그린 그림을전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유인책으로 50프랑을 주고 나서야 고갱은 미루고 미루던 아를행을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노란 집 >
반 고흐는 노란 집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거점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에 아를을 찾아올 예술가들에게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테오의 돈으로노란 집의 인테리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구를 마구 사들였고, 현관에 둘 협죽도 화분도 두 개 샀으며, 밝은 세계에 대한 오마주 같은 해바라기 연작을 그려 벽면을장식했다. 캔버스에 유채, 91.5×72센티미터, 1888, 반고흐박물관, 암스테르담.

흰색으로 새로 칠한 벽에는 빈센트의 작품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고갱은 벽의 중앙에 걸려 있는 <해바라기>에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감탄스러운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참신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빈센트는 고갱의 방에 어떤 그림을 걸었을까? 세 점의 작품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프러스나무 아래 산책하는 남녀>, <시인의 정원>과 그해 여름에 그린 <해바라기>가 그것이다.

나는 캔버스 세 개를 작업하고 있어. 첫 번째는 초록색 화병 속의 커다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밝은 배경에 그린 15호 캔버스야. 두 번째도 세 송이인데, 그중 하나는꽃잎이 떨어지고 씨만 남았고, 또 하나는 봉오리를 그린 푸른색 배경의 25호 캔버스야. 세 번째는 노란색 화병에 열두 송이의 꽃과 봉오리를 그린 30호 캔버스지. 따라서 마지막 것은 너무나 밝고 가장 멋진 그림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어쩌면 이것으로 끝내지 않을지 몰라. 고갱과 함께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틀리에를 장식하고 싶어졌거든.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말이야. 네 가게 옆 레스토랑 문이 매우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잖아. 나는 그곳 창문의 커다란 해바라기를 언제나기억하고 있어. 이 계획을 실천하려면 열두 점 정도의 그림이 있어야 해. 그 모두는 파랑과 노랑의 심포니를 이룰 거야. 나는 아침 태양이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어. 왜냐하면 꽃은 빨리 시드니 단번에 그려야 하기 때문이야.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테이블에 놓인 책은 빈센트가 아끼던 졸라의 삶의 기쁨」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 역시 빈센트의 심경과 상황을 반영하듯이 탁자 위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는 것. 꽃이 책을 향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빈센트가 이 책에서 교훈을 얻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그에게 협죽도는 자신의 광기 어린 생산력과 애정의 독성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자신이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부터 해바라기 그림에 매달려 있다고, 꽃이 빨리 시들기 때문에 단번에 달려들어 끝내야 한다고 소식을 전했다. 해바라기 그림은 이렇듯신속하고 거칠며 열정적인 붓질에 의해 탄생했다.

<협죽도가 있는 정물 >
반 고흐의 협죽도 그림은 해바라기 연작만큼이나 아름다운 정물로 꼽힌다. 녹색 잎과 주황색 꽃, 푸른색의 꽃병과 노란색의 책과 밝은 녹색의 배경 등의 색채 대비가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책은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도 그가 특히 좋아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다. 이 책은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그린 <성서가 있는 정물화>에도 등장한다. 캔버스에 유채, 73×60센티미터, 1888,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모델들이 빈센트의 그림이 이상하고 화가도 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 모델을 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100년 뒤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일, 혼이 담긴 초상화를 그려 내고 싶다고 토로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흥미로운 사람이면 그리고 싶어 했다. 당시 인상주의는 인간 탐구를 포기하다시피 했고, 인물도 자연을 그릴 때처럼 순간적으로만 포착할 뿐이었다.

빈센트가 사로잡힌 것은 초상화였다. 그는 "인간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다. 인간의 얼굴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 가장 진지한 것의 표출이다"라고 말했다.
평생을 모델을 찾는 데 열중했던 그에게 초상화란 유일하게 사람을 소유하는 경험을 해 주는 장르였다. 그는 모델을 선정해 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그 자신이 주도적인 위치가 된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그는 개성 있는 모델을 구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게 되었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사람들이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는 아를 여자들은 정말로 아름답단다. 그들은 프라고나르나 르누아르가 그린 여자들 같아"라고 썼다. 빈센트에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그리는 것은 언감생심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호의적인 드라가르카페의 여주인인 지누 부인을 그리는 일은 비교적 손쉬웠을 것이다.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지낼 때도 아를로 외출할 때 가장 만나고 싶어 한 사람은 지누 부인이었다. 부인도 자기처럼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동병상련의정을 느꼈던 것 같다.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의 초상 >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 관심이 많았던 반 고흐는 특히 아를 시절에 마흔여섯 점 정도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조제프 룰랭과 그의 가족을 단골로 그렸다.
반 고흐와 룰랭의 인연은 비록 짧았지만 순수하고 호탕한 데가 있던 룰랭은 화가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 캔버스에 유채, 54×65센티미터, 1889, 크뢸러뮐러미물관, 오테를로.

<룰랭 부인의 초상>
반 고흐는 룰랭보다도 그의 아내를 더 많이 그렸다. 그중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그녀가 요람을 흔드는 모습을 담은 초상을 여섯 점이나 남겼을 만큼 그녀의 모성적 이미지에 깊이 감응했다. 캔버스에 오일, 73×92센티미터, 1889, 크뢸러뮐러미술관, 오테를로.

< 아를의 여인 >
아를의 드라가르카페 주인인 지누 부인도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의 단골 인물이었다. 화가는 그녀를 우울과 상실감에 젖어 있지만 관대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이렇듯반 고흐는 인물의 개성과 영혼을 포착하여 허식 없이 담아 내려 했다. 캔버스에 오일, 73.5×92.5센티미터, 1888, 오르세미술관, 파리.

아마 빈센트가 포착한 것은 우울과 상실감으로 나이보다 노쇠해진, 그러나 신뢰할 만한 관대한 여인상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를 책 읽는 여자로 묘사한 것! 그녀 앞에는 엉클톰스 캐빈』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놓여 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지성적인 여인으로 변모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빈센트가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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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 손 안의 미술관, 가츠시카 호쿠사이 내 손 안의 미술관 4
김정일 지음 / 피치플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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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내 손 안의 미술관, 가츠시카 호쿠사이』

1. 책의 개요

가. 기본 사항

ㅇ (도서 성격) 『내 손 안의 미술관,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일본 우키요에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생애와 대표작을 소개한 미술 교양서

ㅇ (주요 인물)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1760년에 태어나 1849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대표적 우키요에 화가

ㅇ (주요 작품)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가이 지방의 가지카자와」,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 등 호쿠사이의 대표작 수록

ㅇ (독서 시점) 2021년 9월 독서노트에 기록한 책으로,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호쿠사이 그림을 다시 살펴본 독서

ㅇ (현재 작성 관점) 기존의 호쿠사이에 대한 관심, 2021년 독서 기록, 2025년 도쿄스카이트리에서 구입한 스노우볼의 기억을 함께 정리


나. 책의 특징

ㅇ (쉬운 해설) 미술 전문지식보다 작품을 직접 보고 느끼게 하는 방식의 구성

ㅇ (작품 중심) 호쿠사이의 대표작을 통해 자연, 인간, 움직임의 표현 방식을 소개

ㅇ (감상 유도) 그림을 단순히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입문서 성격

ㅇ (개인적 의미) 이미 좋아하던 그림을 책을 통해 한 번 더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 계기


2. 주요 내용

가. 호쿠사이의 삶과 태도

ㅇ (평생의 관찰)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며 그림에 매달린 화가

ㅇ (끝없는 향상심) 일흔 살 이전의 작업까지도 스스로 충분하지 않게 본 태도

ㅇ (노년의 집념) 백 살이 넘으면 점 하나, 선 하나까지 살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은 예술관

ㅇ (인상적 대목) 이미 명성을 얻은 뒤에도 완성을 말하지 않은 겸손함

ㅇ (화가의 태도) 재능만으로 설명하기보다 평생의 관찰과 반복으로 이해되는 인물


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ㅇ (작품 개요) 거대한 파도, 작은 배, 멀리 보이는 후지산을 한 화면에 배치한 호쿠사이의 대표작

ㅇ (파도의 힘) 화면을 압도하는 물결과 발톱처럼 갈라지는 파도 끝의 강렬한 표현

ㅇ (후지산의 배치) 작지만 화면 중심을 잡아 주는 정적인 존재로서의 후지산

ㅇ (인간의 위치) 거대한 자연 아래 놓인 작은 배와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작음

ㅇ (감상 핵심) 움직이는 파도와 변하지 않는 후지산의 대비가 주는 긴장감

ㅇ (개인적 인상)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그림이지만, 책을 통해 파도뿐 아니라 배와 사람, 후지산의 관계까지 다시 보게 된 작품


다. 「가이 지방의 가지카자와」

ㅇ (작품 개요) 거친 물가와 바위 위에서 낚싯줄을 드리운 인물을 그린 작품

ㅇ (인물 표현) 화면에서 작게 배치되었으나 자연 속에서 버티는 존재감 부각

ㅇ (장면의 의미) 아름다운 풍경보다 생계를 위한 사람의 긴장감과 절박함이 먼저 느껴지는 구성

ㅇ (감상 핵심) 자연을 감상 대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보여주는 그림

ㅇ (개인적 인상) 거친 물가에서 낚싯줄을 내리는 인물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남는 장면


라.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

ㅇ (작품 개요) 바람에 종이와 모자가 날아가고 사람들이 몸을 숙이는 장면

ㅇ (바람의 표현) 보이지 않는 바람을 종이, 모자, 나무, 사람의 자세로 표현

ㅇ (장면의 재미) 우스운 듯하면서도 자연의 힘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모습 부각

ㅇ (감상 핵심) 정지된 그림 속에 움직임과 방향감이 살아 있는 작품

ㅇ (개인적 인상) 바람 자체를 그리지 않고도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느끼게 하는 점이 인상적인 작품


3. 인상 깊은 점

가. 자연의 표현

ㅇ (자연의 주인공화) 파도, 바람, 산, 물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그림의 중심으로 배치

ㅇ (아름다움과 두려움) 아름답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자연의 힘을 동시에 표현

ㅇ (인간의 작음) 자연 앞에서 작게 배치된 사람을 통해 삶의 현실감 부여

ㅇ (관찰의 깊이) 자연의 형태뿐 아니라 움직임과 힘까지 붙잡아 내는 시선

ㅇ (감상의 특징) 예쁜 풍경보다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힘이 먼저 다가오는 그림


나. 후지산의 의미

ㅇ (반복 등장) 호쿠사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 소재

ㅇ (화면의 중심축)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그림 전체를 안정시키는 역할

ㅇ (정적인 대비) 파도와 바람의 움직임에 맞서는 변하지 않는 존재감

ㅇ (상징성) 일본의 풍경, 생활, 기억이 겹쳐진 대표 이미지로 이해

ㅇ (개인적 기억) 책을 읽은 뒤에도 후지산과 파도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이후 여행지에서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 소재


다. 호쿠사이의 태도

ㅇ (완성 거부) 이미 대가로 인정받은 뒤에도 스스로 완성을 말하지 않은 자세

ㅇ (노년의 가능성) 늙음을 쇠퇴가 아니라 더 깊이 보는 시간으로 받아들인 태도

ㅇ (예술가의 집념) 점 하나, 선 하나까지 살아 움직이기를 바란 치열함

ㅇ (개인적 인상) 천재성보다 오랜 관찰과 반복이 만든 화가라는 인상

ㅇ (배울 점) 한 분야를 오래 바라보고 끝까지 붙잡는 태도의 중요성 확인


4. 독서와 개인적 경험의 연결

가. 오래된 관심과 2021년 독서

ㅇ (기존 관심) 호쿠사이와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그림

ㅇ (독서의 의미) 2021년 독서는 새롭게 호쿠사이를 알게 된 계기라기보다, 이미 좋아하던 그림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본 계기

ㅇ (감상의 확장) 단순히 인상적인 파도 그림으로 보던 작품을 후지산, 배, 사람, 바람, 자연의 움직임까지 함께 보게 된 경험

ㅇ (취향의 확인) 책을 읽으며 호쿠사이의 그림을 좋아했던 이유를 다시 확인한 독서

ㅇ (독서 기록) 당시 독서노트에 남긴 감상과 댓글을 통해 그림에 대한 관심이 일회성 감상이 아니었음을 확인


나. 2025년 도쿄스카이트리에서 다시 만난 호쿠사이

ㅇ (여행 중 재회) 2025년 12월 도쿄스카이트리 방문 당시 호쿠사이 스노우볼을 발견

ㅇ (구입 이유) 새롭게 관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호쿠사이 그림을 기념품으로 만난 반가움 때문에 구입

ㅇ (기념품 구성) 후지산과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입체적으로 담은 스노우볼 2점

ㅇ (개인적 의미) 오래된 취향, 2021년 독서, 도쿄 여행의 기억이 책장 위 작은 기념품으로 이어진 사례

ㅇ (현재의 감상) 스노우볼을 볼 때마다 호쿠사이의 파도, 후지산, 2021년 독서 기록까지 함께 떠올리게 되는 물건


5. 독서 소감

가. 그림을 보는 눈의 변화

ㅇ (첫인상의 변화) 기존에는 강렬한 파도와 색감이 먼저 들어오는 그림으로 인식

ㅇ (세부 요소 발견) 책을 읽은 뒤 파도, 배, 사람, 후지산의 관계를 함께 보게 됨

ㅇ (감상의 확장) 그림 한 장 안에 자연의 힘과 인간의 삶이 함께 담겨 있음을 확인

ㅇ (독서 효과) 작품 설명이 이미 알고 있던 그림을 다시 보고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

ㅇ (감상 방식) 유명한 그림도 다시 보면 새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는 점 확인


나. 책의 장점

ㅇ (접근성) 분량과 설명이 부담스럽지 않아 미술 입문서로 적합

ㅇ (작품 중심성) 이론보다 실제 작품 감상에 초점을 둔 구성

ㅇ (전자책 장점) 작품 이미지를 보면서 바로 설명을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함

ㅇ (흥미 유발) 호쿠사이의 다른 작품까지 더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힘

ㅇ (독서 만족도) 어렵게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그림을 다시 보게 만드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


다. 개인적 감상

ㅇ (가장 강한 인상)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의 압도적 파도와 작은 후지산

ㅇ (기억에 남는 장면)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의 바람에 날아가는 종이와 모자

ㅇ (묵직한 장면) 「가이 지방의 가지카자와」의 거친 자연 속에서 버티는 인물

ㅇ (종합 느낌) 아름다운 그림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삶의 긴장을 담은 그림이라는 인상

ㅇ (개인적 취향) 파도와 후지산처럼 단순하면서도 강한 이미지가 오래 남는 작품에 대한 선호 확인


6. 종합 의견

ㅇ (호쿠사이 재인식) 호쿠사이를 단순히 유명한 일본 화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을 오래 관찰한 화가로 이해

ㅇ (우키요에의 매력) 당대의 생활과 풍경, 자연의 힘을 담은 대중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회화로 인식

ㅇ (작품의 지속성) 한 번 보고 끝나는 그림이 아니라 볼수록 새로운 요소가 드러나는 작품

ㅇ (관심의 지속)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그림이 2021년 독서로 다시 확인되고, 2025년 도쿄 여행의 기념품으로 이어짐

ㅇ (독서의 의미) 그림을 많이 아는 것보다 한 장을 오래 보는 태도의 중요성 확인

ㅇ (개인적 연결) 책, 여행, 책장 위 스노우볼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호쿠사이에 대한 취향을 더 분명하게 만든 경험


7. 결론, 소회

ㅇ (핵심 소회) 익숙한 그림도 제대로 보면 전혀 새롭게 보일 수 있다는 점 확인

ㅇ (감상 변화) 처음에는 파도, 다음에는 후지산, 이후에는 배와 사람의 몸짓까지 보이는 경험

ㅇ (기존 취향의 확인) 호쿠사이는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된 화가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한 대상

ㅇ (개인적 연결)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호쿠사이 그림이 2021년 독서로 한 번 더 깊어지고, 2025년 도쿄스카이트리의 스노우볼 구입으로 다시 이어짐

ㅇ (호쿠사이의 힘) 순간의 재능보다 평생의 관찰과 집념이 만든 작품이라는 인상

ㅇ (마무리) 이 책은 호쿠사이를 처음 알게 한 책은 아니지만, 이미 좋아하던 그림을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든 독서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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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 오베르쉬르우아즈 들판에서 만난 지상의 유배자 클래식 클라우드 30
유경희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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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보고1] 광인 - 1 = 천재; 천재와 광인의 경계, 그리고 반 고흐

1. 공식의 기본 의미

가. 천재와 광인의 관계

ㅇ(한 끗의 차이) 천재와 광인은 완전히 반대되는 존재라기보다 거의 같은 선상에 놓여 있으며, 결정적인 한 끗에서 갈림.

나. 광인과 천재의 공통 요소

ㅇ(공통 성향)

• 현실감각 부족
•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
• 집착
• 강박적인 몰입
• 비상한 상상력
• 사회와의 부조화

2. 공식의 해석

가. 광인 - 1 = 천재

ㅇ(공식의 의미) 광인이 가진 위 요소는 그대로 두되, 현실 판단의 붕괴나 자기 통제의 상실 같은 결정적 하나가 줄어들면 세상은 그 사람을 광인이 아니라 천재라고 부름.

광인 - 1 = 천재

나. 광인 = 천재 - 1

ㅇ(반대 해석) 천재에게서 다음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무너지면 광인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음.

• 현실 판단
• 자기 통제
• 타인에 대한 공감
• 사회적 적응

광인 = 천재 - 1

3. 반 고흐에게 적용

가. 예술에서는 천재

ㅇ(몰입) 짧은 활동기간 동안 1,000점에 가까운 작품을 제작함.

ㅇ(상상력) 눈앞의 풍경을 자신의 감정과 내면이 담긴 새로운 화면으로 바꿈.

ㅇ(색채감각) 강렬한 원색과 보색 대비로 자연과 밤하늘에 생명력을 부여함.

ㅇ(독창성) 인상주의와 우키요에의 영향을 자기만의 색채와 붓질로 변화시킴.

→ 천재

나. 인간관계에서는 광인

ㅇ(거절의 부정) 상대의 분명한 거절을 최종 의사로 받아들이지 못함.

ㅇ(자의적 해석) 상대의 뜻보다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우선함.

ㅇ(끝없는 집착) 진심과 열정을 보이면 결국 상대가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믿음.

ㅇ(현실 판단의 실패) 실제 사람과 장소보다 자신이 머릿속에서 만든 이미지를 더 믿음.

→ 광인

4. 같은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 이유

ㅇ(그림을 향한 집착) 캔버스 안에서는 강박과 상상력이 색채와 형태로 조직되어 작품이 됨.

ㅇ(사람을 향한 집착) 인간관계에서는 상대의 선택과 경계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나타남.

ㅇ(관념을 향한 집착) 아를을 ‘완벽한 일본’으로 믿고 다른 화가에게도 같은 시선으로 보도록 요구함.

ㅇ(결정적 차이) 내면의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할 때는 천재였지만, 이를 현실과 타인에게 강요할 때는 광인의 모습을 보임.

5. 종합 평가

ㅇ(두 얼굴) 반 고흐는 예술에서는 천재였고, 인간관계에서는 광인에 가까웠음.

ㅇ(최종 해석) 그림을 향한 집착은 천재성이 되었고, 사람과 현실을 향한 집착은 광기가 되었음.

“그림은 천재다. 사람은 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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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고통당하고 소외감을 느낄 때마다 그는 무작정 걷거나 독서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한 켤레의 구두>반 고흐는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낡은 구두 그림들을 보면 가난한 방랑자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캔버스에 유채, 41.5×37.5센티미터, 1887, 개인 소장.

북유럽의 습기와 혹한 속에서 수십 킬로미터의 황무지를 몇 시간씩 걷는 것이 몸에 밴 빈센트에게 걷기는 훗날에도 현실을 잊게 하는 동시에 살게 하는 수행법이 되었다. 언제나 부랑아 같은 남루한 옷차림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로 걷고 또 걷는 고행을 거듭하는 일이 평생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했던 빈센트는 남프랑스에 와서도 밤마다 산책길에 나섰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멀리 있는 행성들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한 상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지상에서는 창조할 수 없을 것 같은 천국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졸라는 빈센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졸라의 추종자인 모파상, 알퐁스 도데, 장 리슈팽, 조리 카를 위스망스,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의작품들도 읽었다. 특히 도데의 쾌활한 타르타랭같은 희극 작품은 자신과 테오와 여동생 빌레미나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어쨌거나 빈센트를 만든 것의 8할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맹렬한 탐서가였다. 상당히 폭넓은 독서를 했던 그는 누구와도 폭넓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논쟁과 토론에 능했던 것도 바로 오랜 기간 습득해 온 독서력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글솜씨 또한 탁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읽기는 쓰기의 80퍼센트라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빈센트의 사회사상, 즉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19세기의 수많은 예술가, 저술가, 철학자 들이 공유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낭만주의 저술가인 토머스 칼라일, 디킨스, 미슐레가 자본주의 이전의 문화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19세기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비판했다는 점에 빈센트는 크게 공감했고, 그것이 그의 사회사상을 형성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크리스마스 캐럴, 엘리엇의 『애덤 비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등을 참된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다. 빈센트가 아를 시절에 그린 마담 지누의 초상화에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빈센트가 재정적인 불안감으로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결코 지출을 아낄 수 없었던 부분이 책이었다.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도 구독했다.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 >
탁자 위의 책들은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 당대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당대의 삶을 담은 소설은 성서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캔버스에 유채, 93×73센티미터, 1887, 개인.

<낮잠 >
잘 감동할 줄 알았던 반 고흐에게는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특히 밀레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생레미 시절에 밀레의 소묘 작품인 <한낮>을유화로 모사한 것이다. 말년의 반 고흐는 발작에서 벗어날 때면 이렇듯 자신의 예술 행보가 시작된 밀레로 돌아갔다. 캔버스에 유채, 91×73센티미터, 1890, 오르세미술관, 파리.

빈센트는 특별히 매료된 화가는 밀레였다. 밀레의 작품은 노동의 신성함을 찬미한 당시의 소박한 농촌 그림과는 달리 과격한 정치적 주장을 내포한 것처럼 보였다.
주지하듯 빈센트가 본 그림은 원화가 아니라 흑백의 동판화였기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색과 빛이 더해진 원화는 성스러운 제단화 같기는 하지만 정치적 선전성은 약하다. 빈센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가장 처음으로 몰입한 그림 중 하나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반에이크와 한스 멤링 같은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브뤼셀까지 갔고,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걸작이라고 판단한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준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아를에 와서는 빈센트의 그림 그리는 방식이 달라졌는데,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영향이 컸다. 즉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들라크루아적 감각에 따라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더욱더 자유롭게 구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빈센트는 일찌감치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일본 그림을 보고 몸살을 앓았다. 당대 유럽에서는 ‘일본주의‘ 혹은 ‘일본 취향‘을 일컫는자포니슴이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화가들 중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모든 만물을 처음 보듯 감탄했던 것처럼. 그래서 "되도록 많이 감탄하려무나.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감탄하지를 않아"라고 테오에게 보낸 조언은 비단 테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하고자 하는 존재 모두에게, 아니 그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잡지나 전단지처럼 가볍게 취급되었고, 유럽으로 수출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구겨진 우키요에를 펼쳐 보던 화가겸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은 그 새로운 미감에 충격을 받았고, 친구인 마네와 드가 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한낱 포장재에불과하던 우키요에가 희귀하고 신비로운 보물로 격상되는 순간이 아닌가!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로, 주로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우키요에라는 말은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우키요浮世‘와 ‘그림‘을 뜻하는 ‘에絵‘가 결합한 것이다. 본래 전국시대 계속되는 내전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이승에서의 덧없는 삶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에도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자 대중의 일상과 쾌락적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그림을 가리키게 되었다.

자포니슴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예술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즉 유럽의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조형적 특질을 자기 작품 안에창조적으로 살리는 태도를 말한다. 1854년, 일본이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일본 미술의 영향이 서구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862년의 런던만국박람회와 1867년의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도자기와 차 문화,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도 열렬해졌다.

빈센트는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너무나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학을 만나게 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적인 감각과 묘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파리에 오기 전 빈센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암울한 작품을 그렸지만,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그의 그림은 차츰 밝아지고 화사해지고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원색의 색채, 대담한 형태와 같은 표현법은 우키요에를 벤치마킹한 덕분이었다.

빈센트가 우키요에에 이끌린 것은 그 독특한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할 때도 유럽 국가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한 나라다. 빈센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온 도자기, 공예품, 우끼요에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런던에 살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은 1886년에 파리로 간 뒤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멋진 것, 훌륭한 것, 이상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가장 완벽한 대상이었다. 그러니 실제 일본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일본은 그저 빈센트가 추구하고 싶은 가장먼 곳이자 미지의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일본과 우키요에에 대한 그의 사랑도 짧은 연애처럼 막을 내렸다.

우키요에 전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빈센트였다. 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같은 유명 판화가의 우키요에를 모사했다. 파격적인 각도의 히로시게의 다리 그림은 빈센트의 아스니에르 철교 그림에서 재현되었다. 빈센트 역시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우키요에의 가장 혁신적인 방법론을 인용하고 실험했다. 즉 원색을 사용한 단순하고 선명한 색조와 윤곽선과 평면적인 구성 기법은 그의 그림을 명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귀에 붕대를 두른 자화상>
아를시절,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을 보면 배경에 사토 토라키요의 우키요에인 <게이샤가 있는 풍경>이 걸려 있다. 일본에 대한반 고흐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캔버스에 유채, 49×60센티미터, 1888, 코톨드미술관, 런던.

그가 찬양하던 일본으로 착각한 아를, 그곳에서 고갱과의 동거가 파국으로 끝나고 공동체의 이상이 결렬되자 비센트는 더 이상 일본도 우키요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다리 >
런던만국박람회와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미술과 문화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유럽의 예술가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 역시 우키요에의독특한 구도와 색채와 질감에 매료되어 직접 모사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54×73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화가들은 우키요에 덕분에 원근법이라는 서양미술의 오랜 규범을 파괴하게 되었다. 특히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림을 그리는 데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키요에는 서양미술의 원칙, 즉 화면의 중심에 꼭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명암 구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생각, 그림의 중심이 되는 대상을 그릴 때 그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서유럽에서 자포니슴의 바람은 1910~1920년 사이에 사라져 갔다. 이는 자포니슴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미처럼 그저 동양에 대한취향의 하나로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음을 말해 준다. 자포니슴의 소멸은 그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하는데, 서구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를 대변하는 신비로운 타자이던일본이 이웃 나라를 무참히 짓밟는 나라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더 이상 일본은 신비한 유토피아로서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 여인>.
클로드 모네가 1876년에 열린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모델은 모네의 첫 번째 아내인 카미유다. 캔버스에 유채,
142.3×231.8센티미터, 1876, 순수미술박물관, 보스턴.

화가 공동체라는 이상을 찾아서빈센트는 1886년에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아를에 도착한 것은 1888년 2월 20일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이후 그는 1889년 5월 3일까지 1년 하고도 두 달 반 동안 아를에서 살면서 200점 이상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이상의 수채와 소묘를 그렸다.

329년,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아를은 로마제국 제3의 도시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735년부터 4년간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855년부터 사실상 독립 왕국인 아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9세기에 바이킹과 사라센 해적의 침공을 받으며 쇠퇴했고, 이로써 프로방스의 중심지는 마르세유로 옮겨졌다.

아를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에 위치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적 도시다. 지리적으로는 론강 하류를 끼고 있으며, 삼각주를 형성하는 카마르그 평원에 위치해 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아렐라테Arelate라고 이름 지었는데, ‘늪지 속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빈센트라는 유명 화가가 아를을 이상향으로 낙점한 것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로 향하는 낭만적인 여행을 상상하고는 한다. 이렇듯 욕망은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기 마련이다.

‘갈리아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고대 로마의 번성한 도시였던 아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를 도와 마르세유를 침략한 뒤 점령한 기원전 49년부터 발전하기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시적이거나 동양적이거나 환상적인 파라다이스를 추구하는 화가들의 꿈이 공동체의 형식으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빈센트는 화가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고자 베르나르, 로트레크 등 여러 동료 화가들에게 아를로 올 것을 제안했다. 화가의 천국을 프로방스에 세우겠다는 꿈을 함께 실현해 보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당대 화가들 사이에서는 파리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그림 같은 장소를 여행했다. 클로드 모네는 앙티브로, 베르나르와 폴 시냐크와 카미유 피사로는 노르망디나 브르타뉴로 갔다. 고갱도 브르타뉴, 파나마,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타히티로 떠났다. 게다가 프로방스에는 빈센트가 좋아하는 화가인 몽티셀리와 세잔이 머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파리를 떠날 즈음 사실 그는 알코올에 빠져 있었다. 거의 알코올중독자 수준이었으며, 매춘의 쾌락과 매독의 위험에도 빠져 있었다. 테오도 이전처럼 형을말리기는커녕 전위적인 유행을 퍼트리는 트렌드 세터로서의 새 역할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아를에는 지금도 그 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1888년 2월, 화가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품고 밝은 빛과 아름다운 자연이있는 이곳에 도착한 반 고흐는 고대 원형 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빌렸다. 3개월 뒤에는 라마르틴광장에 있는 작고 노란 집을 빌려 이사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에게 그 꿈의 실현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빈센트는 자신이 아를로 떠난 이유를 보다 드높은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늘 추구해 오던 화가 공동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북쪽 출신의 사람답게 빛과 태양을 찾아서, 파리의 추위와 소음을 피하기 위해, 파리 사람들의 냉정함과 동료 화가들의 끝없는 경쟁과 당파성이 싫어서, 신경쇠약과우울증 때문에 휴식이 필요해서, 돈 걱정을 덜해도 되는 건강한 시골 생활을 위해, 그림 구매자가 원하는 주제를 찾기 위한 사업적 모험을 위해, 새로운 예술적 탐색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빈센트의 전략적인 행동과 테오의 연줄로도 단 한 작품도 판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빈센트를 남프랑스로 향하게 했다.

아를과 일본의 유사성은 전혀 없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실 아를은 해안 지역도 아니고 특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사람들은 아를을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아주 잠시 동안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남프랑스에서 ‘완벽한 일본‘을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바로 눈앞에 일본이 있다고, 그저 자기 앞에 있는 것을 그리기만 하면 된다고 과장했다.

몽마주르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아를 전경반 고흐는 아를 인근에 있는 몽마주르수도원의 유적지를 적어도 50번은 다녀왔다고 했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한때 성지순례지로 유명했지만, 반 고흐 당시에는 많이 쇠락해 있었다. 화가는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순례하듯이 그곳을 자주 찾았다. 그는 수도원이 자리한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를 전경에 깊이 심취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먼저 아를은 남쪽 도시들 중 네덜란드와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를 주변의 평원은 개척지여서 네덜란드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상인이나 포주와 싸웠고, 물감과 캔버스를 대 주던 장사꾼과도 싸웠으며, 파리로 보내는 소포와 운임 때문에 우체국 직원과도 싸웠다. 예민한 위장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과 싸웠고, 여지없이 그를 조롱하는 10대 아이들과도 싸웠다. 호텔 주인과는 난방과 관리비 문제, 불량한 화장실 상태, 포도주 맛 같은 사소한 이유로 싸움질을 해 댔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그들을 따분한 사람, 놈팽이, 건달, 비열한 욕심쟁이라고비난과 불평을 쏟아 냈다.

빈센트는 자포니슴에 홀딱 빠져 있던 베르나르에게 일본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풍경을 아를에서 볼 수 있다면서 함께 살자고 부추겼다. 베르나르가 거절하자빈센트는 로트레크를 비롯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 화가들에게까지 편지를 써 가며 화가 공동체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갱만이 가능성을 비추는 답변을 해 왔다.

그는 아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마르세유 같은 프로방스의 다른 지역으로 떠날까 하고 생각했다.

<아를의 정원>
아를의 화사한 봄은 반 고흐를 진정으로 매료시켰다. 파리 시절부터 시도한 그의 인상주의적 색채는 아를에 와서 완연히 무르익었다. 캔버스에 유채, 91×72센티미터, 1888, 덴하흐미술관, 덴하흐.

빈센트가 아를에 가장 초대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고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동생 테오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구필화랑을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아를에서 살자고 했다. 그럴 수 없다면 최소 1년 동안만이라도 휴가를 내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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