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가요. 하지만 그믐 님도 아시잖습니까. 가장 뜨거웠던 사랑도 전부 다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 P-1

"시간만 좀 흐르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전부 차가워져버리고 말지. 혹은 처음부터 뜨거웠던 것처럼 속일 생각이었거나." - P-1

신언서판이라고 했던가. 가장 처음이 겉모습이고 그다음이 말솜씨라는 말처럼 김현은 겉과 속이 전부 완벽했다. 그래서 다들 안타까워했다. 김현 자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전부 그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 P-1

잘나지 못한 집안, 그것도 서자 출신. - P-1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소. 이 좁은 땅과 하늘 말고 더 큰 세상을 보고 싶고 오래도록 살고 싶소. 내 이름이 천세 만세에 남도록 하고 싶단 말이오!" - P-1

그믐. 달이 뜨지 않는 밤. 영원한 어둠. - P-1

소원과 기도, 욕망으로 점철된 공간 안에서 그믐은 인간들의 믿음을 통해 강해졌다. 과학의 시대가 밝아왔다고 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운명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다. 더 밝아지는 부분이 있을수록 더 어두워지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었다. - P-1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빌고 또 빌었고 그믐은 그들의 기도를 바탕으로 한 번 더 일어섰다. - P-1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받아주는 게 아닌데."

"그래서 저 방에 키우시는 영귀들도 다 식물 모양을 하고 있는 거예요?" - P-1

그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보름은 목숨을 가진 것의 무게를 느꼈다. 그건 너무나 가볍고 동시에 너무나 무거웠다. - P-1

신이 직접 인간의 일에 개입하는 건 그만큼 큰 리스크로 돌아왔다. 그래서 보름 역시 자신이 가진 권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보름이 힘을 사용하는 건 적어도 같은 계(界) 내에 속해 있는 악귀나 귀를 상대할 때뿐이었다. - P-1

"당연히 그러시겠죠. 아무튼 상차림, 하실 거죠?"
진짜로 말렸다. 여기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알겠어. 할게, 한다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힘을 협력하고 있는 사이.
친구라고 부르기엔 그렇게 친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또 그것도 애매했다. 아무튼 서로가 어쩌고 있는지 신경은 쓰였으니까.

지금까지는 의미를 두지 않았던 행동과 생각과 마음.

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두어도 괜찮았다. 보름은 자신의 산신이었고 자신은 보름의 산군이었으니까. 알아가는 게 하나씩 늘어난다고 해도 괜히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됐다. 언젠간 지나갈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담아두지 않아도 됐다.

근래 들어서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예감은 마고가 소멸한 뒤 처음 느끼는 거였다. 분명 이 땅에 그릇된 것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올바른 방법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은 그 존재 자체가 부정했기에 그것들을 정체화하기 어려웠다.

흰 사슴은 제주와 모든 섬을 관장하는 산군이었다.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모시던 산신이 죽었다면 산군 역시 응당 따라갔어야지.’
차가웠던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명예롭게 죽었어야 할 것이 이렇게 살아 있다니.’
‘망할 징조다, 망할 징조야!’

내 산군.
그 말이 유독 산호의 귓가에 콱 박혔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진짜로 몰랐네."
"나도 이런 소리 할 줄 몰랐으니까 그냥 듣고 넘겨."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고."
그건 너 없이는 사는 게 재미없을 거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산호의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번 일을 다 마치면 셋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가자. 네가 온 산에 한번 가보는 것도 좋겠지."

"그건 그렇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
"나만큼 위험한 존재가 또 있나?"
장난기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너도 가고 싶은 거잖아, 지금. 그러니까 가야지. 내가 너의 산신이긴 하지만 그건 너를 지배하려고 있는 자리가 아니야. 네가 필요한 곳이고 네가 가고 싶다면 가.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이제 백귀야행이 시작된다."
검은 신당에서부터 시작할 야행의 행렬.

"나의 신, 나의 달."
갠 하늘 위로 그동안 숨어 있던 보름달이 떴다.
휘황찬란한 빛이 세상 만물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신문물을 알려주래? 몇백 년을 각자 산속에만 있어서 외로운 양반들이야."

바다 안에서 산호가 발견한 인간 기둥, 그 사이에 마고의 정기를 받은 어린 산신이 있었다. 그건 김현이 만든 미끼였다. 산호와 보름을 갈라놓기 위한 미끼.
그러나 동시에 마고의 미끼이기도 했다.

마침내, 산호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 이것들을 전부 무너지게 만들 수 있도록.

"달은 이미 셋째 삭이 잘 다스리고 있어. 그리고 여기가 내 집인걸. 가족들도 여기 있고."

"그러니 나는 여기 있을 거야."
그건 새로운 신이 새로운 세상에서 하는 첫 번째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에게 달과 산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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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그런 일을 해결하긴 하지만 무당은 아니야." - P-1

"하하! 아, 뭐야. 생각보다 용한 무당이었네? 허주신도 없는데 그런 걸 다 보고. 그럼 난?" - P-1

매일 같이 힘들여 일하는 것에 비해서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들의 지나온 세월이나 대충 읊어주면 돈이 생겼으니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신’들이 점점 연화의 몸과 생각과 말을 훔치기 시작한 게. - P-1

신이 떨어져 나갔다는 걸 안다면 손님들은 연화를 죽이려 들 거였다. 돈도 없고 의뢰도 들어주지 못하는 무당은 쓸모없는 존재였으니까. - P-1

"그런 잡귀들을 신이라고 받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너도 느꼈을 텐데. 조금만 더 그대로 놔뒀다가는 잡귀들이 네 몸을 차지하고 너인 척 굴었을 거다." - P-1

"그러면 안 되냐고요! 어차피 이렇게 사는 것도 짜증 나요. 더 살고 싶지도 않고요. 그냥 죽지 못해서 사는 거예요. 그게 잡귀든 신이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돈을 벌어줬으니까. 지금까지 거절만 당하면서 살아온 나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잖아요. 그게 뭐 그렇게 나쁜 거예요?" - P-1

"인간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니까. 별것도 아닌 일로 신내림을 받게 하거나 귀들을 불러들이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들이 해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 P-1

"요새는 인간들이 귀들보다 더 약았어. 못됐고." - P-1

"저는…… 저는 또다시 쓸모없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 P-1

"너, 인간도 아닌 것이 어디서 인간 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녀?!" - P-1

"고작 박수무당 주제에 시비를 걸고 다니면 명줄이 짧아지잖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하라는 옛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살아." - P-1

"어찌됐든 도우러 와줘서 고맙군. 가끔 저런 치들이 있거든. 틀린 말은 아니지. 인간이 아닌 게 인간인 척하고 있는 건 맞으니까." - P-1

‘네 이름은 산호다. 산군 호랑이라는 뜻이지.’
산군(山君). - P-1

그건 산신을 모시는 동물을 의미했다. 산신이 다스리는 산을 지키고 그 산 안에 사는 것들을 돌보고 산신의 뜻을 전달하는 존재. - P-1

땅과 산과 신을 지키는 게 산군이 해야 할 일이었다. - P-1

신은 믿음으로 존재를 유지한다. - P-1

인간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산과 땅은 그저 돈벌이의 일부였고 그들은 그것들을 마음대로 사고팔았다. 그리고 일어난 전쟁들. - P-1

"그냥. 달이 오늘따라 밝길래." - P-1

보름 역시 산호의 시선을 따라 커다랗게 뜬 달을 한 번 바라보았다. 달. - P-1

사랑.
그래,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거짓된 것. - P-1

보름은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도망쳤다. 세상의 끝까지. 그러나 떨어져 내린 곳에서 보름이 마주쳤던 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 P-1

"그럼 이제 우리도 우리 일을 해야지. 산군과 신이라고 해도 돈은 있어야 이 세상에서 사는 거잖아?" - P-1

그림자 같기도 하고 도사리고 있는 어둠 같기도 한 것들. 그건 이곳에 모인 집념이었다. 차 있어야 할 곳이 비면 거기엔 다른 것이 깃들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런 빈 공간에 모였다. 그리고 마치 땅 주인처럼 행세를 했다. - P-1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오래 남았다. 좋지 않은 것일수록 더욱더. - P-1

원한을 가지면 성불하지 못한다고 하던가. - P-1

선한 마음은 고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전해지고 퍼져서 남는다. 그러나 악의는 달랐다. 그대로 가라앉고 썩는다. 그리고 다른 희생자를 찾아 잡아먹는 것이다. 이 빌딩에 고인 것은 그런 썩은 마음에서 시작된 악귀들이었다. - P-1

"……누가 호랑이 아니랄까 봐 잘 뛰어다니네."
"그렇게 대답하는 걸 보니 괜찮군." - P-1

죽은 뒤에도 남아서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존재는 인간 말고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름의 눈앞에 있는 건 뱀이었다. 그것도 크기가 어마어마한 뱀. 저런 악귀가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 P-1

신은 그 자체가 존재 의의였다. 그렇기에 다른 무엇을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스스로의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태양과는 다르게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달은, 어둠을 밝히는 달은 그 특성상 더 많은 기도가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 보름은 산호의 울음소리를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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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색색 연등의 그림자가 깨끗이 쓸어낸 절 마당에 드리워졌다.
"날씨 좋네." - P-1

"제 아무리 권세가 있다고 해도 인간인데 죽지 않고 버텨? 살 맞은 놈치고는 숨이 길긴 했지만." - P-1

"그래서, 좋으냐?"

연화의 물음에 순간 윤재의 얼굴에 싱그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입고 있는 검은 소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 P-1

"당연하지요. 선녀님 덕분에 저 새끼가 죽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내가 이 칠성파를 키우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줬는데 그걸 다 잊어버리고 새 부인을 들이려고 하다니. - P-1

사진 속 사람은 윤재의 남편이었다. 윤재가 사주하고, 앞에 앉아 있는 연화선녀가 살을 날려 죽인 남자. - P-1

남편을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선수 치지 않았으면 오늘 영정 사진 속에 있는 건 윤재 자신이었을 테니까.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P-1

‘신 받은 지 얼마 안 됐거든. 이럴 때 기도를 해야 효험이 좋아.’ - P-1

분명 같은 계열이었다. 신을 모시는 무당이나 술사가 아니라면 저런 힘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 P-1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사람들은 전부 연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연화가 갓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라는 것을 알면 모두 태도가 달라졌다. 연화에게는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수단이 있었으니까. - P-1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연화를 무서워했고 그만큼 극진히 모셨다. - P-1

최근 젊은 여성들의 실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당 사건들과 관련하여……. - P-1

"그럼 괜히 묻지를 말던가. 그러는 넌 맨날 똑같은 메뉴잖아."
보름이 산호가 들고 있는 소떡소떡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 P-1

"호랑이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맨날 그것만 먹어. 질리지도 않냐?"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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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90조, 공서양속.(우리나라 민법 제103조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에 해당 옮긴이 주)

민법상 원칙적으로 개인과 개인 간에 맺을 수 없는 약속이나계약은 없다. 그것이 바로 법은 개인 간의 행위에 개입할 수 없다는 사적자치라는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이 있으면 예외도 있기 마련이었다. 개인 간의 계약이 너무 악질적이라면 법률로 이를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그법이 바로 공서양속 위반에 따른 무효이다. 흔한 예로는 첩 계약이나 살인 청부 계약이 있었다.

"이 유언은 무효가 될 수도 있어."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살인범에게 대가를 주는 게 말이 되겠어? 이건 공서양속 위반으로 무효화 될 가능성이 커. 어쩌면 이 유언으로 범인이 자수하게 만든 다음, 막상 범인이 자백을 하면 유언을 무효화해서 유산을 주지 않으려는 주도면밀한 계획일 수도 있어."

이것은 범인에 대한 나의 복수다.
주는 것은 곧 빼앗는 것.
범인은 내가 준 재산으로 일생을 살게 될 것이다. 즉 내 지배하에서, 내 망령에 휘둘리면서 살게 될 것이다.
범인을 꼭 잡아달라는 취지에서, 범인이 잡히지 않으면 내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기로 했다.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변호사협회 도서관에 틀어박혀 유언의유효성에 관한 판례와 학설을 찾아봤다. 그중에는 소설 《이누가미 일족》 (재벌인 이누가미 사헤가 젊은 시절 자신을 도와준은인의 손녀와 결혼하는 손자에게 모든 유산을 주겠다고 유언을남기는 내용의 소설- 옮긴이 주)에 나오는 이누가미 사헤의 유언마저 유효라고 보는 법학서도 있었다.

"셀로판테이프랑 논리는 어디에나 갖다 붙일 수 있거든."
내 입에서 무심코 나온 그 말은 로펌 상사인 츠츠이 변호사가자주 쓰는 말이었다. 나는 츠츠이 변호사의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열이 올랐다. 화를 억누르며 얼른 에이지의 유언으로 다시 생각을 돌렸다.

남자들은 왜 이렇게 자신의 눈부신 과거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것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이 하도조르니까 어쩔 수 없이 해준다는 태도로 말이다. 남자들의 그런 태도는 항상 귀찮았다.

이웃한 두 부족의 예시를 들어 간단히 설명해 볼게요. 두 부족이 선물을 주고받는데규칙을 하나 지켜야 해요. 규칙은 아주 간단해요. ‘받은 것보다 좋은 것으로 보답할것!‘이라는 거죠. 그 규칙대로 선물을 주고받다 보면 점점 선물 규모가 커져서 어느한쪽이 더는 보답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보답하지 못한 부족은 망하게 되죠.

"아마 레이코 씨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어서 본인이 타인에게 선물을 받을자격이 있다고 믿는 성격일 거예요."
토미하루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나도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부모님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신기술로 아기를 만들었고, 그렇게 태어난 게 제동생 에이지예요. 에이지가 태어나자마자탯줄에서 혈액을 만드는 세포를 추출해서제 골수에 이식했어요. 제가 일곱 살 때 있었던 일이에요."

"쓸데없는 걱정 말게!"
츠츠이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외치더니, 삶은 문어처럼 벌건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츠츠이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평소에풍기는 온화한 분위기와 사뭇 달라 주눅이 들 뻔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건 싸움이었다. 밀릴 수는 없었다. 나도 따라서 츠츠이를 노려보았다.

"레이코 씨, 이렇게 대담한 수에 능한 걸 보면 얌전한 대형 로펌 변호사보다 의외로 동네 개업 변호사가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요?"

유키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휴지를내 것인 양 한 장 뽑아 유키노에게 건넸다.
유키노가 휴지로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왠지 레이코 씨네 집 같네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립되는 거예요. 상대에게 갚을 수없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갖게 하고, 그걸 이용해 상대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 포틀래치의 본질이니까요."

돈은 없지만 행복한 삶 따위는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돈은 당연히 많을수록 좋다.
왜 다들 기짓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랑 그 친구, 변호사. 그 친구 몫까지 오래 살아줘요.‘
임종 순간에 무라야마는 그렇게 말했다.

결국 또 돈인가. 나 자신이 너무 비루해서 슬퍼졌다.

그렇다. 법 앞에서는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고, 고쳐 쓸 수도 없는 악랄한쓰레기조차도 고귀한 선인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돈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의뢰인에게 나는 멋대로 열등감을느꼈고 돕기를 거부했다. 그래서는 악인도 인간임을 이해하지못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딱히 의뢰인의 감정에 공감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새겨듣고 프로로서 그 기대에 부응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 도움을 원하는 의뢰인이 있는 한...

긴지가 말하길, 히라이 부사장의 얼굴은 젊은 시절의 미요와붕어빵이라고 했다. 나는 긴지의 기억력이 정말 감탄스러웠다.게다가 모리카와 가문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렸겠지만, 미요의성은 ‘히라이‘였다고 했다.

긴지는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히라이가 사용한젓가락을 훔쳤다. 그리고 젓가락에 묻은 성분을 토대로 자신과친자 검사를 했고, 예상대로 친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무라야마의 ‘법무법인 삶은 망했지만, 무라야마가 변호사로서 담당하던 사건은 내가 전부 이어받았다.

선량한 동네 사람들의 자질구레한 사건들뿐이라 돈이 되는 사건은 전혀 없었다. 나는 원래 독하게 돈을 끌어모을 계획을 꾸미는 의뢰인들과 함께 뛰고 싶었다. 하지만 시노다의 말이 내 가슴에 박혀 오히려 동기부여가 되었기에 이제 돈이 되지 않는 사건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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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신카와 호타테, 전직 변호사, 도쿄대학교 법학부 졸업
1991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온 후미야자키현에서 자랐다. 그녀는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수재로 24세에 사법시험을 합격한 전직 변호사이기도 하다. 사법연수원 이수 중 일본마작협회 최고위전에서 프로 마작선수로도 활동했다. 16세 때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감명을 받아 오랜기간 작가를 꿈꾸어왔고, 2021년 《전남친의유언장》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9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수상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돌풍을 일으켰다. - P-1

옮긴이 권하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통번역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일번역을 전공하였다. - P-1

노부오가 내민 반지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오와 나는 도쿄스테이션호텔 프렌치레스토랑에서 풀코스 만찬을 시켜 디저트까지 다 먹은 참이었다. - P-1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물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꽃다발을 들고오는 레스토랑 직원을 보고 이미 노부오의 의도를 눈치챘다. - P-1

"이거 까르띠에 솔리테어지? 전형적인 프러포즈용 반지인 건 알아. 그렇지만 너무 저렴한 것아니야? 이 다이아 작은 것 좀 봐. 0.25캐럿도 안돼 보이네. 까르띠에에서 이런 작은 다이아를 용케도 구했구나?" - P-1

노부오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져 가는것이 보였다. 노부오는 야구장 홈베이스처럼 각진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나와 반지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마다 뿔테 안경이 노부오의 큰 코위에서 조금씩 흘러내렸다. - P-1

"오해하지 마. 나는 당신을 비하하는 게 아니야.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반지를 준비한 건지, 그 의도를 알고싶어." - P-1

"딸애가 학교 때 성적은 좋아서 원래는 기획재정부에 들어갔으면 했는데, 애가 근성이 없어서 결국 민간으로 내려갔어요."
아버지는 관청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사람이라 관청 이외의 회사를 ‘민간‘, 공무원 이외의 사람을 ‘민간인‘이라고 불렀다. - P-1

‘켄모치 레이코 님. 연락 감사합니다. 저는 모리카와 에이지씨를 돌봐드리던 하라구치라고 합니다. 에이지 씨는 지난 1월30일 새벽에 별세하셨으며, 얼마 전 조용히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 P-1

1. 내 전 재산을 나를 죽인 범인에게 줄 것.
1. 범인 특정방법은 별도로 무라야마 변호사에게 맡긴 제2유언의 내용을 따를 것.
1. 사후 3개월 이내에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을 경우, 내 전 재산을 모두 국고에 귀속시킬 것.
1. 내가 타인에 의해 살해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내 전 재산을 모두 국고에  귀속시킬 것. - P-1

"이렇게 많은 축복을 받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신은 대체 어떤 의도로 내게 이런 축복을 내린 것일까. 나는 내가 받은것들을 세상에 나눠줄 의무가 있는 것인지도 몰라." - P-1

이런 말을 하면서 곧바로 가까운 편의점 모금 코너로 달려가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기부한 적이 있었다. 돌아갈 차비도 남기지 않고 다 기부하는 바람에 집에 돌아갈 때 내가 에이지에게 천 엔을 줬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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