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간 내가 여기서 보고 들은 건 모두 충격이었네. 벽돌이다, 수레다, 도르래다……. 다들 조선에선 못 본 것들뿐일세. 우리는 청에 비해 낙후돼도 한참 낙후됐어. 그런데도 다들 공자왈, 맹자왈 하느라 정작 백성에게 필요한 건 거들떠도 안 보지."

"백성을 살리는 건 죽은 글이 아닐세. 기술과 상업이야. 자네 같은 상인들도 사농공상이라 해서 천대받을 게 아니라 존중하고 육성해야 마땅하네."

만복이 연암을 찬찬히 뜯어봤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나리도 꽤나 괴짜시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듣네."
연암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 어쩌면 이 사람도 모난 돌인지도 몰라, 하고 선노미는 불현듯 생각했다. 자신을 기담회에 초대한 것도, 이런 중요한 사행길에 굳이 저를 데려온 것도 여느 선비라면 하지 않을 일이다. 방금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했는데, 어쩌면 연암 나리도 예전에 정을 맞은 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선노미는 연암이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백골 따위는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마마신도 마찬가지고요. 무서운 건 사람이죠.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는 실제로 봤으니까요."

모난 돌은 정을 맞게 마련이지.
이건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모난 돌, 괴짜, 이단아……. 모두 이제껏 숱하게 들었던 말들이니까. 멀쩡한 양반집 자제로 태어나 관직에 나갈 생각은 안 하고 서얼들과 어울리며 듣도 보도 못한 요상한 학문이나 하는 자신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래봤자 과거 시험도 못 보는데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젠가 경준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암은 그가 서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경준을 헐뜯은 자들이 그의 배다른 형제라는 것도. 정실부인 자식인 그들은 경준보다 학문이 한참 못 미쳤다. 열등감 때문인지 사사건건 경준을 괴롭혔다. 첩 자식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고개를 빳빳하게 처들고 다녀. 나중에 우리가 벼슬길에 나가면 굽실거릴 녀석이.

"과거 시험장을 박차고 나왔다고? 나 같으면 시험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일 텐데."
경준의 말에 연암은 처음으로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이 부끄러웠다. 경준 앞에서 생각 없이 그 말을 내뱉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긴 자네도 나처럼 모난 돌이니까. 나는 서얼 주제에 쓸데없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모난 돌, 자네는 양반 주제에 쓸데없는 짓이나 하는 모난 돌."
경준이 킬킬거리며 자신과 연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난 돌은 결국 정을 맞게 돼 있어."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같은 피라도 때로는 더 진한 피가 있고 덜 진한 피가 있다는 걸 향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세간의 뜬소문 따위는 믿지 않으니 걱정 말게. 그게 얼마나 허황된 건지는 누구보다 과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

"그나저나 새삼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구려. 따지고 보면 외모란 얼굴 가죽 한 장 차이인데, 다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려 들지 않소."

홍명복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이가 젊을수록 외모에 현혹되기 십상인데,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않은 청년이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용서받고자 몸소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아담은 그렇게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비의 죄를 물려받는다는 대목이 희한하게 수긍이 가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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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록강 뱃사공
 
하늘을 뒤덮고 있던 잿빛 구름이 어느새 제법 걷혔다.

노심초사하는 일행들 사이에서 태연자약했던 건 연암밖에 없었다. ‘애태운다고 뭐가 달라지나. 갤 때가 되면 개겠지’라면서 숙소에서 혼자 홀짝홀짝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사공은 참 묘한 직업이군. 매일 강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니 말일세. 마치 두 세계를 이어주는 안내인 같네."

"하지만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죠. 그런 겁니다, 안내인은."

"그런 연유로 제 배는 절대 뒤집힐 일이 없답니다. 그러니 나리들께서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양에 사는 백성 수는 선대 임금들을 거치는 동안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그들을 수용할 만큼 주택 수는 넉넉하지 못했다. 찾는 사람은 많은데 물건은 부족하니 당연히 가격이 뛸 수밖에 없다. 임금이 바뀔 때마다 한양 집값이 몇 배씩 뛴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양반들까지 부족한 집과 더불어 치솟는 집값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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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의 시작
잔뜩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장맛비가 쏟아질 것처럼 꾸물거렸다. 잿빛 하늘과 맞닿은 검푸른 강물도 잔잔한 수면을 일그러뜨리며 높게 출렁거렸다. 성이 난 것 같기도, 곧 하늘에서 떨어질 폭우를 기다리느라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저만치 하늘과 강물이 하나가 된 수평선이 끝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리까지 이어졌다.

"오늘도 안 되겠는가?"
나루터에서 정사(正使) 박명원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사는 사절단 일행을 이끄는 총 책임자다. 연암의 팔촌 형님으로, 나라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시는 양반이라고 했다. 연암이 정사의 수행을 돕는 자격으로 사절단에 끼었으니, 연암의 시종 노릇을 하는 선노미로선 정사 나리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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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시작

ㅇ 삼개주막 기담회
1. 주최자 연암, 2. 전기수? 선노미
3. 참가자(회원) 연암의 제자들?
[회원님들]
1. 세현-여우, 2. 진석-올빼미,
3. 무광-노루, 4. 종훈, 5. 석호-너구리
아쉽게도 연암의 제자들?은 실명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관직도. 종훈만 사관으로 나올뿐.

종훈은 춘추관 지하 서고에서 130년뒤 경술국치일을 예견하는 죽은 사관이(귀신) 전해주는 자색 표지의 책자를 보게되고, 130년뒤의 일을 알고도 아무것도 할수 없는 자신을 탓하며 선노미에게 언문을 가르쳐주고 떠난다.

때는 1780년, 책본문 내용으로 추리한 결과.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에 연암이 청나라 건륭제 생일 축하 사절로 간다는 야그가 나온다.

선노미는 삼개주막의 주모 김씨의 장남, 한번 들은 내용은 기맥히게 기억하는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그래서, 주막을 찾았던 연암이 그 재주를 기특히 여기고 주막에서 보고들은 기막힌 이야기를 자신의 벗들에게도 들려주고자 삼개주막 기담회를 만들고 선노미는 그 기담회의 주역이 된다.(선노미는 사실 주모 김씨의 아들이 아니다.)

연암은 선노미의 그 재주를 아껴 청나라 사행원으로 갈때 수행원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청나라에 가면 신문물을 자세하게 기록해 책으로 낼 생각이다. 그때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다.”
선노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연암 을 바라봤다.
“그리고 하나 더.”
그런 선노미를 모른 척하며 연암이 말을 이었다.
“기록과는 별개로 오가는 길에 기담도 수집할 생각이다. 그러니 기담회 주인공인 너 말고 더 좋은 선택이 없지.”

더 기대되는 3권입니다.
열하로 가는 과정이 어떻게 그려질지 완전 기대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물에 견줘도 손색이 없는거 같네요.(2권까지 읽고 어제의 맘이 바뀌었다.)

열하일기: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음에도 사절단으로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조의 부마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삼개주막은 한양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십 리쯤 떨어진 마포나루 어귀에 있었다. 마포나루, 혹은 삼개나루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한양을 거슬러 오는 장삿배들과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에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괴이하고 신기한 이야기가 모여들었다.
신기한 이야기가 만나는 곳에서 선노미와 연암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야기를 통해 이어진 소년과 괴짜 선비는 이제 이야기를 찾아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삼개주막 기담회 2 | 오윤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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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 하나가 저녁 무렵 삼개주막을 찾아왔다. 얼굴에 아직 애티가 남아 있는데, 나이도 많이 쳐줘야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듯싶었다.

나례는 고려 때부터 전해져 온 악귀 쫓는 의식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각종 재앙을 불러오는 악귀를 쫓아내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한다는 게 나례의 취지다. 원래 궁중에서 시작된 나례는 조선 후기엔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돈 좀 있는 양반이나 양인들은 한 해를 떠나보내는 기념으로 성대하게 나례 연회를 열고, 연회장에 광대나 기생들도 부르곤 했다. 복쇠가 한양에 온 이유도 어느 지체 높은 양반가의 나례 연회에 동원된 기방(妓房)이 행사에 쓸 가면을 여럿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시끄러워서 귀신보다 사람 귀청이 먼저 떨어지겠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는 가면이라……. 꽤 으스스하군."

선노미가 입을 딱 벌렸다. 조금 전까지 감사해하던 마음이 싹 가셨다. 아니 그 양반은 선물을 줄 거면 그냥 줄 것이지 말을 왜 그따위로 하냐고! 속마음이 무심코 얼굴에 드러났는지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나리를 오래 모신 내가 풀이해주자면, 그 말은 ‘그걸로 언문 공부하라’는 뜻이야. 아마도 네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선노미는 어안이 벙벙해서 멀어져가는 남자와 제 품에 안긴 선물 보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마음에 드셨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어쩌면 그분도 속마음과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건가?

그곳에선 아이 잡아먹는 귀신이 나오기 때문이다.

큰 마님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귀신을 달래기 위한 거라며 하인들에게 주기적으로 밥과 고기로 상을 차려 별채에 내가게 했고, 며칠에 한 번씩 남몰래 광 문을 열어 여자가 차려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보안을 기울인 덕분에 비밀은 그동안 잘 지켜졌다.

‘나도 아기 잡아먹는 귀신이었어. 그 여자처럼.’
달밤에 만났던 여자는 유순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았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쓸쓸한 미소에 그토록 가슴이 아렸던 것도, 여자가 자신을 향해 그토록 환하게 웃어 보였던 것도 서로가 아기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인 걸까.

‘아기 잡아먹는 귀신은 실제로 있어요!’
유순이 울부짖던 소리가 귓전에 되살아났다. 김씨는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김씨도 아기 잡아먹는 귀신을 만난 적이 있다. 옥이가 아직 돌이 안 될 무렵이었다. 남편은 시름시름 앓아누웠고, 김씨는 남편 병간호하랴, 혼자 주막일하랴, 아직 어린 선노미와 복이 돌보랴,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눈물과 땀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텼다.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워준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귀신한테서 널 지킬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김씨가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잊고 싶었던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서인지 주책스럽게도 뜨거운 눈물이 김씨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임오(壬午)년, 임금이 아들인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다.’

‘130년 뒤인 경술(庚戌)년, 치욕스럽게 나라를 빼앗기다.’
한참 동안 자신이 쓴 글을 내려다보고 있던 종훈은 먹이 마르자, 뒤편에 제 이름을 적어넣었다.
‘경자(庚子)년, 사관 박종훈 쓰다.’

결국 세상 물정에 밝은 복동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식리인(殖利人)에게서 돈을 빌렸다. 그게 파국의 시작이었다.
 
식리인은 전문적으로 사채를 빌려주는 사람들이다.

"민심은 말이지."
만수가 무겁게 입을 뗐다.
"꽤 무서운 거란다. 높으신 양반 나리들도, 나라님도 민심을 무시할 순 없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민심이 모이면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울 수도 있다."

연암이 말했다.
"우리한테 백성들이 입는 피해를 알리고 싶었겠지. 그래서 춘성 같은 사람들을 구제해 줬으면 했을 거다."
선노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연암이 뭔가 해답을 제시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한텐 그만한 힘이 없다. 문벌 가문 출신도, 높은 벼슬에 있는 것도 아닌 한량들이니."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연암이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요?"
"그래, 이야기의 힘은 생각보다 크단다.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니까. 어쩌면 고관대작의 상소보다 더 세다고 할 수 있지."

"가체를 만드는 게 아니야. 내가 만드는 건 꿈이고, 욕망이지."
"욕망이요?"
"그래, 욕망.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아.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지면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귀한 걸 꿈꾸지.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이 계속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거야."

• 가체 금지령: 영조는 1758년 가체 금지령을 발표했으나, 사대부의 거센 반대 로 1764년 가체가 부활했다. 이후 1788년 정조가 다시 가체 금지령을 내렸다.
• 형암: 실학자 형암(炯庵)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올 때 급히 가체를 머리에 쓴 며느리가 목이 부러져 죽 은 실제 사건을 언급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 세상은 썩어빠졌어. 양반이란 게 대체 뭐길래 종을 개돼지처럼 취급하냔 말이야. 양반으로 태어난 것 말곤 잘난 게 하나도 없는 것들이."

"인생이란 기이한 일의 연속이지. 우리 인생 자체도 하나의 기담이다."
선노미는 연암이 하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암도 그걸 눈치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하고 말했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아들을 기다리던 김씨가 문득 분이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김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마도 분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분이가 김씨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아들을 잘 키워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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