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나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나나는 반년 전부터 기르고 있는 고양이다.

쇼타는 아직 대학 입학 선물을 받지 않았으니 그 대신이라고 설득해 결국 허락을 받아냈다. 참고로 7년 전에 같은 대학에 입학한 아쓰코는 50만 엔에 달하는 명품 백을 선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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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죠, 앞서 브루니가 피렌체를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도시라고 찬미했듯 실제로 피렌체는 경쟁을 통해 도시의 큰 프로젝트를담당할 작가를 정하기 시작해요. 덕분에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대결 중 하나인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결투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 P242

맞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삭은 아브라함이100세에 본 아들이었습니다. 얄궂게도 신은 아브라함에게 그 귀한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순종해 아들을 죽이려는 찰나, 천사가 내려와 아브라함을 말립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 덤불에 뿔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던숫양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죠. 결국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신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 P243

강렬한 게 인상에 깊게 남을 테니 아무래도 브루넬레스키가 경연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겠군요.
아닙니다. 승리한 건 기베르티였어요. 역사적으로는 브루넬레스키가 낸 안을 높이 평가합니다만 당시 시민평가위원회의 판단은 달랐던 거죠. 일반 시민의 경우 눈에 익은 친숙한 스타일을 선호하는경향도 있고요. - P248

브루넬레스키는 이 실패를 계기로 인생의 대전환을 맞이했습니다.
지금도 큰 시험에 떨어지면 훌쩍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죠? 세례당 청동문 경연에서 떨어진 브루넬레스키도 로마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에 후배 조각가 도나텔로도 동행했다고 기록되어있어요. - P256

늘 이와 같은 훌륭한 조각을 보며 지나다닐 수 있었던 피렌체 사람들은 대단한 행운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축적된 안목이 있었으니 피렌체에서 계속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나올 수 있었겠지요. - P270

피렌체는 1400년대에 이르러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본격화했다. 이 프로젝트는르네상스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으며, 레오나르도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들이 나올 수 있었던 기반이 되어 주었다. - P271

오르산미켈레 외벽에 있는 14개의 제대마다 길드를 대표하는 성인 조각을 채워 넣는각 조각들에는 후원한 길드들의 단서가 들어가 있음. 여기에서프로젝트를 진행함.
-도 A타입과 B타입의 미술을 발견할 수 있음.
A타입 도나텔로: 거칠지만 힘찬 느낌. 몸이 잘 드러나며 건축적인 느낌을 줌.
참고 도나텔로, 성마르코, 1405~1417년
B타입 기베르티: 반듯하게 정리된 느낌. 우아한 옷자락. 몸이 잘 드러나지 않음.
참고 기베르티, 세례자 요한, 1411~1416년 - P271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에서 실패로 걸어가는 것이 성공이다.
- 윈스턴 처칠 - P272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1300년을 기준으로 삼는 연구자가있는 반면, 1400년으로 잡는 연구자도 있죠. 일단 저는 1400년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 P273

첫 번째 사건은 피렌체 대성당 위에 거대한 돔을 올린 겁니다. 위 사진을 한번 보시죠. 돔은 주변의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에 마치 산처럼우뚝 솟아 있습니다. - P274

그런데 대성당에돔이 올라갈 때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원근법의 등장입니다. 이때 나온 원근법은 20세기 추상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두 사건 모두 1400 년대, 즉 15세기 피렌체에서벌어졌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걸 모두 한 사람이 해냈다는 거예요. - P275

혼자서 이런 일을 해냈다고요?
네, 바로 브루넬레스키죠, 브루넬레스키는 청동문 프로젝트 경연대회에서 기베르티에게 패해 방황을 거듭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러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엄청난 변화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는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 P275

인생 역전이군요. 드디어 브루넬레스키에게도 기회가 온 건가요?
당시 나이로 마흔 살이면 오늘날로 치면 여든 살 이상이라고 볼 수있거든요. 늦게 찾아온 기회치고는 엄청난 기회였어요. 지금부터이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보려고 합니다. - P279

오늘날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는 아래와 같은 나무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공모전에 제출했던 돔의 모델로 추정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런 나무 모델과 함께 나무 프레임 없이도 돔을 올릴 수 있는 안을 내서 시민평가위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해요. - P281

여기저기서 자꾸 간섭이 들어오자 견디다 못한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가지고 와서 "이 달걀을 내가 한번 세워 보이겠다"고합니다. 사람들이 "달걀을 어떻게 세우겠냐?"고 반문했더니 달걀아래를 깨서 세웠다고 해요. 자기를 믿고 따라달라는 호소인 거죠. - P282

그게 콜럼버스가 아니라 브루넬레스키가 먼저였던 건가요? - P282

흔히 콜럼버스가 그런 식으로 달걀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콜럼버스보다 브루넬레스키가 먼저예요. 그런데 사실 피렌체 정부의 불안감에도 근거는 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아이디어를 남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았어요. 실제로 남긴 드로잉도 거의 없고요. - P282

아마 일찍부터 누군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져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기베르티와 겨뤘던 청동문 프로젝트에서 패배한 트라우마가 오랫동안 작용했던듯도 싶고요. - P282

고대 로마의 돔에서 얻은 아이디어 
그런 아이디어를 혼자서 생각해낸 건가요? 대단한데요.
아마 로마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었을 겁니다. 판테온은 돔 규모가 직경 43 미터로 피렌체 대성당의 돔과 거의 비슷합니다. - P283

과 닮았다고 해서 ‘물고기 뼈 쌓기‘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헤링본 테크닉(Herringbone technic)‘이라고 부릅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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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사야마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쇼타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야마로서는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공부만 할 줄 알지 상대방 마음을 헤아리는 법은 배우지 못했나 봐"

영양사 전문학교에 다니는 아야카 입장에서는 유명 대학에 다니는 쇼타의 말과 행동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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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초 베키오가 지어지기 전에는 팔라초 바르젤로를 정부 청사로썼습니다. 지금 팔라초 바르젤로는 조각 박물관이 되었습니다만 이전에는 오랫동안 경찰서와 감옥으로, 범죄자들을 처형하던 곳으로사용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 같은 육중한 건물에 종탑이올라가 있어 팔라초 베키오와 비슷해 보입니다. - P228

피렌체 정치를 책임지던 상공인들은 이 정도 규모의 정부 청사에 만족하지 못했을 거예요. 피렌체의 번영과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확실히 알릴 수 있는 보다 웅장한 건물을 갖고 싶었을 겁니다.
결국 그걸 모두 담은 팔라초 베키오를 짓게 된 거죠. - P229

르네상스의 본고장이라 할 만한 피렌체는 11세기부터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상공인들의 조합인  길드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공화정을 유지했다. 피렌체 사람들은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구성원들의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환경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자부심은 피렌체의 각종 거대한 건축물에 잘 드러난다. - P235

르네상스 근대의 시작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부활한 시대. 피렌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
피렌체의 역사적 배경 고대 로마 때 퇴역군인들의 거주지로 만들어졌다가 11세기부터본격적으로 발전. - P235

피렌체의 공화정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오랫동안 공화정을 유지. 귀족 출신이 아니라 상공인들의 조합인 길드를 중심으로 의사가 결정됨. - P235

모든 새로운 시작은 다른 시작의 끝에서 온다.
-세네카 - P236

1300년을 앞두고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대성당 공사를 시작한 뒤곧바로 시청사까지 지어 나갔던 때가 바로 피렌체의 번영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후 피렌체는 점점 위기에 빠져듭니다. - P237

무엇보다도 흑사병으로 입은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피렌체 인구의60% 가까이 죽었다고 하니 거의 도시가 붕괴된 수준입니다. 이때피의 반란까지 일어나 극심한 내분이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외부에서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이 북부 이탈리아를 제패하면서피렌체를 강하게 위협했어요.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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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요 법령을 정비하면서 "공직에 나가 국가 운영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길드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조항이들어갑니다. 원래 피렌체에서 경제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길드에가입해야 했는데, 이 시기부터는 정치 활동에도 길드 가입이 필수가 된 거죠. 귀족 출신이었던 단테도 공직에 나가기 위해 길드에 들어가야 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길드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할 수 없었던 겁니다. - P206

중세 피렌체의 경제 축
첫 번째는 지중해 중계무역입니다. - P206

두 번째는 섬유 산업입니다. - P207

세 번째는 앞서 주목했던 은행업입니다. - P207

당시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자기 앞에 조그만 테이블을 놓고 손님을 상대했는데, 테이블은 중세 이탈리아어로 ‘방카(Banca)‘라고 합니다. 은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뱅크(Bank)‘는 여기서 유래한 말이죠. 또 은행이 파산할 때 이 테이블을 부숴버렸다고 해서 ‘뱅크럽트(Bankrupt, 이탈리아어 Banca rotta)‘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 P207

중세 피렌체의 번영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바로 피렌체의 대성당입니다. 정식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인데간단하게 두오모라 부르죠. 아래 사진을 보세요. 도시에 대한 피렌체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아내듯 웅장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 P209

자부심이 강해질수록 탑은 높아진다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조토는 건축과 토목 기술에도 능했습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피렌체 형 인재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죠. - P216

앞서 피렌체의 경제적 번영과 길드의 역할을 이야기했었죠? 사실피렌체를 이야기할 때 경제가 중요하긴 합니다만 역시 정치를 빼놓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피렌체는 공화국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어요.
피렌체의 공화제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 P221

브루니가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혀 있기 때문이죠.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인의 명예의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오도 이성당에 묻혀 있고요, 묻힌 곳만 보면 브루니는 당시 피렌체 사람들에게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오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죠 - P222

무엇보다도 브루니의 책에 따르면 피렌체인들은 피렌체가 공화국이었다는 사실에큰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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