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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1년여 전 전태일은 "저희들의 아버님"인 ‘국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식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라며 탄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으로 나서기 직전까지 인천산선에서 일했던 김근태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무시당하기만 하며 살아온 노동자들로 하여금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했고, 김근태를 만나면 노동자들은 별별 얘기를 다 했다는 것이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고 언론 현실을 규탄했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기자들 중 막내인 정연주는 성명서 한 쪼가리 얻으려고 학생들이 바리케이드 쳐놓고 농성 중인 곳에 갔다가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라고 쓴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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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저항의 말도, 하나의 저항의 몸짓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 동해 바다로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잡으러 가겠다던 젊은이들의 꿈은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국가시책에 호응하지 않는 것으로 금지되었다.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

박정희는 노동자들의 가난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라며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강조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 첫차를 타고 일 나가는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에는 《또 하나의 투쟁》21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공안기관에 잡혀간 뒤 어떻게 조사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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