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小寒
매서운 추위 너머로 보이는 새 희망 - P261

 눈송이가 일으키는 흥취 
눈이 내리는 걸 한참 보고 있으면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눈송이가 반짝이며 하늘하늘 내리다가 어느샌가 무수한 흰 꽃송이로 빙빙 돌면서 쏟아지는 걸 보면 정말 눈이 일으키는 상상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다. - P261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가면을 쓴다. 착하고 순한 성품의 인물로 비춰지고도 싶고,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과하게 인정받고 싶기도 한 것이 인간이다. 그 때문에 무언가 느끼는 바나 말하고 싶은 점이 있어도 이리저리 재단한 뒤 판단을 하는 버릇이 생긴다. - P263

 코끝 쨍하게 매서운 겨울날에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특히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겨울날 코끝이 쨍하고 시린, 콧구멍에 고드름이라도 달릴 법하게 매서운 날이정말 좋다. 그런 날이면 일부러 산책을 나설 정도다. 매서운 추위의 맑은 겨울날을 좋아하게 된 것은 십대 후반부터였다. 그 매서움은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던 내 마음에 날카로운 긴장을 만들어주고, 무언지 모를 서늘함을 선사해준다. 그런 게 좋았다. - P264

대한大寒이 소한 집에 놀러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있을만큼 소한 무렵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다. 거기에 눈보라라도가세하면 움직이는 것은 천지에 찾아볼 도리가 없다. - P265

눈보라 종일 불어 창문과 사립문 때리니
궁벽진 골목엔 인적 없고 새도 날지 않는다.
백발 노인은 흙덩이처럼 홀로 앉아
적적하게 오직 병과 서로 의지해 있다.

雪風終日打窓扉
窮巷無人鳥不飛
白髮老翁塊獨坐
寂家唯與病相依
신익상申翼相, 
<소한 하루 전 눈이 내린 뒤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小寒前一日 雪後大風>, 《성재유고醒齋遺稿》 3책 - P265

대숲에 소리 없이 쌓이는 눈과 눈보라를동반하면서 창문으로 몰아치는 눈은 전혀 다르다. 소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눈보라까지 쳐서 바깥출입은 엄두도 못 낸다. - P266

작중 화자는 곤궁하고 궁벽스러운 골목 안쪽에서 살아가는 도시의 가난한 선비다. 평소에도 인적이 없을 법한 골목길 안쪽으로 눈보라가 종일 몰아치니 더더욱 사람 기척은 없다. 평소에는 더러 오가던 새 역시 자취조차 없다. 그 쓸쓸한 집 밖의 풍경처럼, 집안의선비 역시 외롭고 힘든 현실을 견디고 있다. 노쇠한 몸의 백발노인은 마치 흙덩이처럼 아무 움직임도 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한다. 그렇게 앉아 있는 표면적 이유는 몰아치는 눈보라에  있지만, 실제이유는 몸에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병과 서로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말에서, 우리는 그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왔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 P266

노장에 조예가 깊던 분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은 말년에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고 한다.제자가 문병을 갔다가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그분은이렇게 말씀하셨다. "병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면 잘 모시고 살면서 대접을 잘 해줘야지." - P266

푸른 적삼 홀로 소한날에 길을 가며
달빛과 닭소리에 새벽길을 헤아려본다.
말의 언 발굽에선 버석이는 소리 들리고
여러 산 다가오는 형세 분명히 각인된다.
늘그막 인생에 되려 나그네 되니
세상 일 탈도 많아 다시 서울로 들어가네.
어디일까. 깊은 계곡에서 신선 노래 부르며
눈보라에 사립 닫는 일 모를 곳은.

靑衫獨犯小寒行 月色鷄聲蒲曉程
一馬凍蹄聞寂歷 衆山來勢認分明
人生抵老猶爲客 世事多端又入京
何處芝歌深谷裏 不知風雪掩柴荊

신광수, <신미년 겨울 막바지에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가다가 도중에 공무 때문에 다시 발길을 돌려 서울로 들어갔다. 새벽에 갈산을 출발하였는데, 이날은 소한이어서 추위가 너무 심했다. 그때 말 위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甲申冬末, 受由下鄕, 中路以官事, 牽回入京, 曉發葛山, 是日小寒寒甚, 馬上得一首>,《석북집石北集》8 - P268

대한大寒
늦겨울과 새봄 사이의 변화의 기운 - P271

겨울의 끝자락에서
양력을 중심에 놓고 날짜나 절기를 헤아리는 지금의 감각으로보면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바로 섣달 그믐이다. 그러나 음력으로 보면 겨울의 끝자락에 대한이 위치한다. 겨울에서봄으로 옮겨가는 중간 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만난다. - P271

겨울의 끝이 보일 무렵이면 겨울 방학도 거의 끝물이고, 새로운학년으로의 진급을 눈앞에 두게 된다. 새로운 교과서와 선생님, 친구들이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는듯 우리는 종일 밖으로 나돌았다. 연도 날리고, 공터에서 비석치기나 자치기 등을 하기도 했다. 여럿이 모이면 좁은 공터에서 축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하루가 가는지 모르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그리하여 겨울이 끝날 때쯤이면 남은 것은 여기저기터서 갈라진 손등과 감기뿐이었다. 이런 기억 때문에 겨울과 봄이교체되는 때가 되면 나는 언제나 감기를 떠올리는 것이다. - P273

새봄과 섣달 모두 아련한데
살짝 내린 눈에 겨울 매화는 대나무 울타리에 비친다.
술 떨어지자 강가 나그네 돌아가려 하고
석양 옮겨가자 들새들 막 돌아온다.
병이 두려워 약 구하는 것도 그만두었으니
근심 물리치려 부질없이 시 짓는 일도 쓸데없다.
오직 물과 구름 아득한 천리의 꿈만 있어
푸른 도롱이에 긴 젓대로 하늘 끝을 지나간다.

新春殘臘共依依 小雪寒梅映竹籬
江客欲歸沾酒盡 野禽初返夕陽移
還因畏病休求藥 不用排愁浪作詩
唯有水雲千里夢 綠蓑長笛過天涯

이경전 李慶全, <동지 지난 뒤에 臘後>,
《석루유고石樓遺稿》권2 - P274

병은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나이의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아무도 없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신선의 세계를 구축한다. 건강할 때는 내 삶의 기쁨을 누릴 줄 모르지만, 막상 호되게 아파본 경험이 있다면 건강할 때의 기쁨을 충분히 알아차린다. 물론몸이 나아서 다시 건강하게 되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들수록 병은 자주 찾아오고, 이제 그 병은 벗이 되기까지 한다. - P276

한해 동안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결실 맺은 것들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겨울에 주로 하게 된다. 노동의 윤리와 그 현실적 결과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조만간 맞은 새봄에는 어떤노동이 필요한가를 점검한다. 이것이 바로 겨울의 역할이다. - P277

텅 빈 창에 눈 들이쳐 촛불 가물거리는데
달은 솔 그림자 체질하며 서쪽 지붕머리에 어른거린다.
밤 깊자 산바람 지나가는 걸 알겠나니
담장 밖으로 우수수 대숲에서 소리 난다.

雪遍窓虛燭滅明 月篩松影動西榮
夜深知得山風過 墻外騷蕭竹有聲
이우李, <우계현 동헌에서羽溪縣軒韻>,
 《송재집松齋集》권1 - P277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독서가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항상 반문하게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서경덕徐敬德의 독서는 참 흥미롭기도하고 부럽기도 하다. - P278

글 읽던 당년에는 경륜에 뜻을 두어
해 저물어도 도리어 안회의 가난을 달가워했지.
부귀는 다툼 있어 손대기 어려웠지만
자연은 금하는 이 없어 몸 편안히 할 수 있었다.
나물 뜯고 낚시해서 충분히 배채웠고
달과 바람 읊조리어 정신을 펴기에 넉넉했다.
배움이 의심 않는 데에 이르면 쾌활해짐을 아나니
헛되이 백년인생 되는 건 면하게 했네.

讀書當日志經綸 歲暮還甘安氏貧
富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採山釣水堪充腹 詠月吟風足暢神
學到不疑知快活 免敎虛作百年人

서경덕, <마음속 생각을 쓰다>, <화담집花潭集> 권1 - P279

서경덕은 조선 전기 선비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독서에 마음을 쏟았던 인물이다. 천하를 다스릴 뜻을 품고 열심히 글을 읽던당시에는 가난을 달갑게 여겼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총애하던 제자요 성인의 경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집의 쌀독이 자주빌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도를 즐기는 이른바 ‘안빈낙도 安貧樂道‘ 고사의 주인공이다. 
서경덕 역시 가난한 생활이지만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그 가난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 P279

새봄을 눈앞에 두고 나 자신의 한해 살림살이를 돌아본다. 나는과연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는가. 절기의 순환과 함께 나의몸은 잘 변화하였는가. 그에 따라 내 마음 역시 바뀌었는가. 이런저런 상념에 겨울밤이 깊어간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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