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21 | 322 | 323 | 324 | 32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매지너 - 다음 세대를 지배하는 자
김영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스스로 빛나는 존재,
눈부신 아이, 
나의 세 번째 조카, 연서. 

연서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최근 들어 나를 가장 안타깝게 만든 일이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그랬는데,
이제 진짜 제도권 교육에 들어갔으니,
저 빛이 사그러드는 것은 시간 문제다!'
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 집에 살지도 않고,
더구나 지금은 한 동네에 살지도 않고...
천 리 밖 타향에서,
조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
책, 『이매지너』에서 힌트를 얻는다.
만약에 연서가,
'천 리 길 떨어진 곳에 사는 이모가 나를 생각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멋진 생각이다.

지하고 나하고 사는 곳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도 알려주고,
자동차로 몇시간을 달려가야하는지,
터널을 몇 개나 지나야되는지,
길이 얼마나 많은지,
비행기를 타도 되고,
기차를 타도 되고,
배를 타도 되고(배? 배는 좀 그런가? 분당에서 울산 오면서 배타고 오겠다는 사람이 있겠나 어디? 뱃길이 있기는 한가? 어쨌든 현실적이지는 않군 그래. 뭐 어쨌든!)
걸어서는 얼마나 걸리는지,
여기서는 바다가 얼마나 가까운지,
분당에 비가 내려도 여기는 햇빛이 쨍쨍할 수 있다는 걸
모두 말해줘야지!

어떻게 말해줄까?
전화로? 그건 너무 금방 끝나버리겠지?
편지로? 그건 너무 길어질테고...
엽서로? 엽서!
그래 그게 좋겠다!
이왕이면 그림엽서!
그림 실력 모자라면 사진 도움도 좀 빌려서! 좋았어! 

아, 나중에, 10년 뒤에, 20년 뒤에.
연서가 이런 일을 기억해준다면 얼마나 멋진일인가!

이런 즐거운 상상, 행복한 일상 만들어준 책,
『이매지너』 땡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매지너 - 다음 세대를 지배하는 자
김영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0월
품절


프롤로그
_미래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 이매지너!

...

이 책에는 이매지너의 개념과 이매지너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과 실천 방법들이 담겨 있다.
...

이매지너가 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치열해지는 무한 경쟁의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의 가치를 일깨워 줄 능력이 바로 이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매지너가 되는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행복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이매지닝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가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 내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또한 행복해진다면이런 일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지 않은가?-12~15쪽

우리는 농경 시대ㆍ산업화 시대ㆍ정보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대부분 갖추게 되었다. 물질적으로 이미 매우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더 좋은 것,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을 기대한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소중한 'Me Society(나만의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26쪽

"건축가가 가구 디자인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대답했다.
"건축가가 가구를 디자인하는 시대니까 나는 이제 도시를 디자인하겠습니다."-36쪽

"디자인은 엉뚱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디자이너는 모범생보다는 모험생이 되어야 합니다!"-37쪽

피프틴은 자전거의 평균 이동 속도 15킬로미터를 뜻하는 이름으로 자전거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이인 15세의 청소년들을 뚯하기도 한다. 이 피프틴이 비록 자동차보다는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하고 안전한 속도로, 우리를 보다 친환경적이고 살기 좋은 도시로 안내해 주기를 바란다. -46쪽

이노디자인은 2008년도에 한국 최대의 유통기업 홈플러스와 함께 '디자인 실용주의'를 선포하고, 전국 70여 개의 홈플러스 매장에서 이노가 디자인한 생활용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47쪽

'경쟁력보다 창조력이 우선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 시대가 빼앗아 먹기 혹은 나누어 먹기가 아니라 새로운 먹을거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하는 길목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56쪽

좀 더 용감해져라! 도전과 모험 없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56쪽

창의성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전문성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창의적인 디자인이 됐든, 창의적인 경영이 됐는 전문성은 꼭 필요하다. 창의성을 제대로 이해하면 결국은 자기의 전문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창의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59쪽

창의성이란 어떤 사람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관련한 것으로 오히려 책보다는 어떻게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가와 같은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이 한 사람의 창의성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60쪽

창의력은 일종의 상호작용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서로 영감을 주고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를 서로 협력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창의력의 핵심이다. 창의성은 인간과 인간의 교류에서 나오는 것이다. -61쪽

홍석우 중소기업청장과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홍 청장이 내게 물었다.
"김 대표님, '혼돈주'라고 들어 봤습니까?"
"아니요."
"그럼, '막소사'라는 말은 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그게 뭐죠?"
홍 청장의 설명에 따르면 막소사란 막걸리에 소주와 사이다를 섞은 일종의 폭탄주라고 했다. 그러더니 즉석에서 막소사를 만들어 내게 먹어보라고 권했다. 처음 먹어 본 막소사는 그 맛이 아주 훌륭했다.
"어떻습니까? 맛이 괜찮습니까?"
홍 청장이 평소 막걸리 같은 우리 술 사랑으로 유명한 나의 반응을 살폈다.
"네,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혼돈주는 또 뭐죠?"
홍 청장은 혼돈주란 조선시대에 마시던 폭탄주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그때에도 막걸리에 자홍주라는 붉은 색 소주를 섞어 마시는 폭탄주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71쪽

Creation? NO, Re-creation!
파블로 피카소는 "제일 먼저 창조한 사람보다 두 번째 창조한 사람이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말했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진정한 창조의 전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에게는 창조(creation)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창도(re-creation)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창조는 재창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없다. 그러나 '이매지너'의 눈으로 보면 기존에 있던 것도 전혀 새로운 콘셉트의 디자인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진정한 크리에이터라면 그 다음을 창조해야 한다. -81쪽

"사람들이 자기 외모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헬스, 태닝, 성형 수술 같은 것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창의력도 일상 속에서 훈련을 통해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래, 좋지.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두뇌 트레이닝 게임이라도 해야 되나?"
"아니. 그건 그렇게 일차원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머릿속에 있는 것을 현실로 끌어내는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지.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혁신 프로그램 같은 것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야. 게다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이지."
"뭐야, 그렇게 좋은 게 있어?"
"물론 있지. 바로 이배니징이야!"
이매지닝이란 '전략적 상상'을 의미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남는 시간에, 혹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할애하여 우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하나의 가치 있는 생산물로 탄생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96쪽

사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상상가'로 태어난다. 어린아이를 키우거나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른들이 깜짝 놀랄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곤 한다. -99쪽

안타까운 점은 그렇게 타고난 뛰어난 상상력이 불과 일곱 살만 되어도 급격히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 많은 창의력 연구 학자들이 제도권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곤 한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질서와 지식을 가르친다는 교육이 실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갉아먹고 있는 셈이다. -100쪽

'Design'이라는 말에 담긴 뜻
디자인(edsign)을 풀어 보면 'de+sign'이다. 즉, 기호(sign)의 구조를 파괴한다(destruct)는 뜻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 변화를 추구한다(making change)는 뜻이 될 것이다. 다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다.-120쪽

내가 이매지닝을 하고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히트상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의 기쁨을 누리고, 내가 만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 나의 뜻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번에 나의 이런 나눔의 정신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 하나를 만들어 냈다. 바로 내가 창안한 '디자인2.0'(www.designtwoionto.com)이라는 사이트다. 이 사이트는 세상의 수많은 차세대 이매지너,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의 디자인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또 좋은 디자인이 필요한 수많은 기업들에게는 디자인 솔루션을 찾을 만남의 장소를 마련해 줄 것이다. -24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일하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경제의 모든 것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4
짐 스탠포드 지음, 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 사람들 걱정 중에서 돈 걱정 빼면 뭐가 남을까?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자본주의 사회에 살려면 어쩔수 없는 걸까?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아무래도 그냥 못넘어가겠다. 제목에 딴지좀 걸어보자.
'사용설명서'를 보면 대개 작동법, 사용시 주의사항, 문제 발생시 대처법 등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을 보면서 제일 크게 기대한 것이 바로
돈걱정에 대한 대처법이다. 책에서 그런걸 알려줄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용설명서'라는 단어가 그런 허황된 기대를 하게 한다. 
나도 철없지만, 그런 기대를 하게 하는 제목도 좋지는 않다.
이 책은 번역서고,
원서의 제목은 「ECONOMICS FOR EVERYONE」이라고 하니까,
이쯤하고 넘어가자.

제목은 마음에 들지않지만, 나는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첫째, 누군가 나에게 속임수를 쓴다는 생각을 하는게 싫고,
둘째, '물질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지적 삶의 과정 전반을
결정한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와 닿았기 때문이며,
셋째, 죽은 경제학자들의 노예라는 말이 기분나빴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경제와 관련된 질문에
이미 만들어진 해답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이다."
-조앤 로빈슨, 영국의 경제학자(1960)(17쪽)

"물질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지적 삶의 과정 전반을 결정한다."
-카를 마르크스, 독일의 철학자 및 경제학자(1859)(34쪽)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생각은 옳고 그름을 떠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사람들도 대부분 죽은 경제학자들의 노예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영국의 경제학자(1936)(71쪽)


그래서 보람이 있었나?
그건 잘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나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고,
나의 물질적 생산양식을 바꿀 기회를 틈타고,
여전히, 죽은 경제학자들의 영향을 무시하고싶기만 하다.

그래도 한가지 고마운게 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그저 '노동자'일 뿐이었는데,
책을 읽고 보니, 나는 그냥 노동자가 아니라,
어찌보면 노동자보다 훨씬 힘든 '자영업자'가 되려고
기를 쓰는 이상한 노동자가 아닌가!

이 문제는 확실히 한 번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다시 한 번 찬찬히 나의 물질적 생산양식을 살펴봐야겠다.

쉼표 하나를 얻었다.
그게 이 책을 읽은 보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 분노와 콤플렉스를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정조
김용관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 임금 ‘영조’ 하면 정조, ‘정조’ 하면 영조가 생각난다.
학창시절 시험기간엔 영조ㆍ정조가 헤깔려서 ‘영-탕-정-규’로
앞글자만 이어서 외웠던 기억도 난다.
‘태정태세문단세에~ 예성연중인명서언~ ♪’ 입에 붙은 멜로디로
임금 이름이나 겨우 외우는 나에게 ‘역사는 너무 어려워~’ 흐흐.

그래도 드라마 「이산」을 보고 난 뒤로는 좀 나아졌지?
이젠 ‘영조’ 하면 이순재, ‘정조’ 하면 이서진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서 헤깔리지를 않잖아!^^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드라마 덕분이라니깐~ 땡큐「이산」!

하긴. 책에서 만나는 정조와, 이서진이 연기한 정조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
처음엔 그걸 맞춰보느라고 책에 빠져들지 못했는데
나중엔 그것마저도 한가지 재미로 추가해서 생각해버렸지.
(흠흠- 아주 현명한 독자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나본 정조는 참 독한 사람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왕이 되었고, 끝까지 왕으로 살아냈다.
그 기간이 짧았든 길었든, 결실을 맺었든 못맺었든,
중요한 건 그가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이 생각한 그 길을
갔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책 제목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니. 왜?
정조가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기 때문에?
실물경제에 지식과 관심이 많았던 왕이라서?
...... 아무리 그래도 정조는 왕이지 CEO가 아니다.
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이렇게 저렇게 갖다 붙이자면 안될것도 없겠지만.
그렇다해도,
명령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던 조선시대의 왕에게,
실적을 내지 못하면 얄짤없이 퇴출당하고 마는 기업의 CEO가,
대체 뭘 물어보겠다는건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책 제목이 마음에 안들어도 재미있는 책이 있고,
삼분의 일 분량까지 지루하게 읽다가도 중간부터 재미있어지는
책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재미와 더불어 이 책은 나에게 또 한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새겨주었다. 견디고 참아내고 인내하고 그러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는! 질긴 그것!


*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정조의 다양한 면모를 옮겨본다.
양이 꽤 된다.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고,
내가 다음번에(정조를 다시 만나보고 싶을 때)
좀 더 쉽게 만나보기 위한 조치다.


필자는 정조를 알기 위해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 밑에서 착실하게 후계자 교육을 받던 14년의 세손 시절, 그리고 집권 24년을 세세히 기록한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을 꼼꼼하게 여러 번 읽었다. 그렇게 실록을 아주 꼼꼼하게 읽는데 약 반년이 걸렸다.(4p._머리말)

권력은 언제나 상대가 있는 법이다. 권력(權力)이라는 낱말의 ‘권(權)’이 저울추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의미다. 권력은 아주 정밀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는 종합예술이다. 정치가 혐오의 대상이 된 상황은 누구보다 올바른 정치지도가자 없어 그렇다. (5p._머리말)


∎‘인권’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군주

1778년 1월 12일 발표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한 ‘나폴레옹 법전’과도 같은 인권법의 시작이다. 1804년 프랑스혁명을 통해 나폴레옹이 집권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어 유럽 최초의 인권 법률안을 만들었다면 조선에서는 이미 1778년 정조에 의해 인권법이 처음 사용된 것이다. 이 법의 첫 서문은 인권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고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정확한 법적 근거와 형량(매를 맞는 회수와 매의 치수까지 기록)을 준수하게 했다.

1789년 2월 4일, 정조는 한양 성 밖 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유골들을 수습해서 작은 무덤을 만들어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런 지시는 조선 역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작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명을 받은 진휼청에서는 4월 13일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37만 개의 유골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조치는 애민사상이 가슴 깊이 있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작지만 정조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 1777년 5월 5일, 기우제를 지낼 때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담배는 피우게 했다. “매번 기우제를 지낼 때 관리들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하니 오히려 담배 생각이 간절해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사람이 즐기는 것을 금하게 해서 마음이 어수선한 것보다 차라리 담배는 허용하고 술만 금하게 하라.” 담배를 기우제 때 피우지 못하게 하니 담배를 몰래 피우기 위해 나갔다 들어왔다 혼란스런 광경을 보고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정조의 예민함을 드러난다.

1789년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뒤 정조는 능행을 자주 했는데 특이한 것은 관리들에게 능행 때 반드시 도시락을 지참하게 했다. 능행을 가는 길 주변 민가의 피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임금도 도시락을 지참하고 능행에 나섰다.(121~122p.)




∎기념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임금

정조는 1년 중 5월 13일에는 모든 정사를 접고 칩거했다. 즉위한 첫 해 아버지 기일에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한 가지는 아버지 묘에 비문을 직접 써서 새겼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숙의 문씨(淑儀 文氏)를 ‘문녀’라고 호칭했는데 그녀의 죄악을 일일이 열거하며 분노했다. 그 다음 해 1777년에는 아예 5월 13일 기록은 없고 5월 14일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올린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1779년 5월 정조는 공식적으로 5월 13일부터 22일까지 공식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것을 승정원에 명해 매년 그걸 공식화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하루에 많은 일을 했다. 부지런한 것은 할아버지 영조를 빼닮았다. 그러나 영조는 매사 토론은 오래하지만 결단력이 약해 일을 성취함이 적었다. 하지만 정조는 치밀하고 매사 매듭짓고 정리하는 것이 강단 있어 많은 일을 추진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눈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신을 혹사시켰다. 그런 정조는 해마다 5월 13일은 자숙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주었다. 1년 가운데 약 1주일 정도 휴식을 겸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장차 해야 할 일과 앞으로의 계획들을 면밀히 점검했다.

침묵이 효과적인 것은 비열한 상대가 사방에 넘쳐날 때다. 적은 언제나 외부에 있는 것 같지만 침묵을 유지하다보면 내 안에 더 무서운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 무서운 적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 바로 침묵이다.

정조에게 매년 5월 13일에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열흘 동안 침묵하고 자숙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의 일을 치밀하게 구상하는 시기였다. 1년 가운데 중간 무렵이 그런 시간이라면, 마무리가 돌 무렵인 12월 3일은 좀 다른 의미에서 각별하다. 1775년 11월 20일, 그러니까 영조가 승하하기 불과 3개월 전, 영조는 고령이라 세손에게 대리청청을 수행케 하려 했지만 좌의정 홍인한 등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러자 1755년 12월 3일 행사부직 서명선이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정조가 집권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매년 해가 끝나가는 12월 3일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인물들을 초청해서 다과회를 갖고 그날의 뜻을 기렸다. 그것은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144~146p.)




∎현란한 화술로 상대를 설득하다

정조는 정치인 혹은 관리들은 말과 글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래서 정조는 집권 초부터 신하들의 상소문을 꼼꼼하게 살피고 잘못된 양식이나 문체에 비판을 가했다. 종조는 조선 군주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 평가받는 선조와 비슷하게 머리가 비상했다. 그래서 한 번 읽은 책은 대개 외웠다. 책을 읽는데 깊고 넓게 읽었다. 그런 폭넓은 지식을 정조는 신하들을 만나 적절하게 잘 구사했다. 집권 초반부터 정조는 신하들과 논쟁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조실록』은 임금과 신하의 논쟁거리들을 담고 있어 지루한 편이다. 그런데 대개 논쟁에서 정조가 억지로 눌러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고대 역사의 여러 사례들을 들어가며 논리정연하게 설득했다.

1772년 2월 어느 날 정조는 신하들과 야간 대담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수 있고 내가 아는 것을 당신들이 모를 수 있으니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정조는 정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다 흡수하려 했다. 이 점이 선조와 달랐다. 선조는 총명했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지적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50~151p.)


1783년 10월 도승지를 비롯한 비서관 회의에 참석해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세상은 세속이 날로 야박하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도 같은 당 사람이 아니면 모른 척한다. 국가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고 저 한 몸 편하게 지내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무모릉(無模稜)’ 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간다는 모습을 정조는 ‘무모릉’이라 표현했다. 또 그 무렵 사자성어 신어를 만들었는데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종종 썼다. 열심히 했다가 도리어 졸렬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는 뜻을 말한다. 집권 7년이 지났지만 정조는 노론의 비협조적인 자세에 답답함을 느끼고 ‘욕교반졸’이란 말로 그들 졸렬함을 비판했다.(153p.)


1789년 2월 4일, 귀양을 간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을 특별히 방면하라 하면서 정조는 이런 말을 했다. “쥐를 잡으려다가 아끼는 그릇을 깨뜨릴 수도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효도가 근본이다. 그에게 90세 노모가 있다고 한다.” 윤시동을 아끼던 정조는 그의 굳은 심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집권 초부터 길들이는 작업을 했다. 1776년 6월에 서명선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남해로 유배를 보냈던 정조는 1년 뒤 그를 다시 특별히 석방시킨다. 그리고 4년을 참은 뒤 공조판성 임명했지만 그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길 여러 차례 집요하게 설득하던 정조는 1788년 11월 그를 다시 귀양 보낸다. 그런데 그가 건강이 많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쥐를 잡으려다 아끼는 그릇을 깰 수 있다.” 윤시동의 고집은 쥐다. 그러나 윤시동의 목숨은 아끼는 그릇이란 뜻이다. 뜻이 강한 사람을 좋아했던 정조는 정교한 솜씨로 날선 기질의 윤시동을 좀 무디게 한 뒤 1795년 12월 우의정으로 발탁했다. 그렇다고 기개까지 꺾지는 않았다.(153~154p.)


∎적은 항상 앞에 두고 싸워라!

... ... ...

결국 1786년(정조10) 12월 9일,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1786)의 역모사건으로 연루된 구선복은 남대문 밖에서 효수됐다.

... ... ...

한편 정조가 구선복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언급한 것은 구선복을 죽이고도 한참 뒤여다.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치를 떨었다. 내가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그 자의 얼굴을 보면 심장과 뼈가 모두 떨려 차마 하루라도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병권을 움켜쥐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 갑자기 처치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움을 참고 견디었고 드디어 나쁜 짓이 발각돼 법으로 처결했다. 전후 흉악한 역적들을 끝내 성토하고 처벌하지 못한 것은 실로 선왕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었는데 의리가 이로 인하여 어두워질까 나름대로 염려해 왔다.”

이런 말을 정조는 1792년 영남 유생들 1만 명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접하고 처음 내뱉었다. 정조가 이런 말을 구선복을 죽인 뒤 곧바로 하지 않은 것은 끝에 언급한 것 처럼 그 일로 인해 다시 대궐에서 복수의 칼바람이 일어날까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인내심이고 치밀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만약 감정이 격해 구선복 일가를 소탕하면서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면 1786년 정국은 끝없이 혼돈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포도대장이었다. 그는 별명이 ‘뒤주대장’이었다.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놀리거나 핍박했다는 소문은 대궐 안팎에 자자했다. 그런 소문을 정조는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소문만 가지고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때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24년 만에 아버지의 원수를 제거한 것이다.(174~179p.)


∎책으로 낚시질을 하다

1781년 3월, 화성유수로 임명됐지만 규장각 일까지 맡아 보던 유언호가 약간 태만한 기운을 보이자 정조는 다음과 같은 따끔한 글을 남겼다.

“활에는 느슨함과 팽팽함의 뜻이 있고, 화살에는 굳세고 곧은 성질이 있다. 내가 지금 이 활과 화살을 경에게 주는 뜻은 그 물건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경은 아무쪼록 규장각 각신들을 양성하는 일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이 활과 화살처럼 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춘장대에서 활을 자주 쏘았다. 50발을 쏘면 49발은 정중앙에 명중시키고 나머지 한 발은 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신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정조는 조선의 임금 가운데 태조 다음으로 명궁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활쏘기를 즐긴 정조는 그것을 다분히 스포츠로 즐긴 것이 아니라 정신 수양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규장각 제학으로 있던 유언호가 화성유수까지 보면서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버거워 하자 정조는 유언호에게 활과 화살을 주면서 한 말이다. 일에 있어 느슨함과 팽팽함을 잘조화시키라는 의미였다

정조는 이렇게 따끔한 충고와 함께 전복죽 50상자를 규장각에 보내 그들을 격려했다. 정조는 이렇게 신하들에게 자주 자기 마음이 담긴 선물들을 자주했다. 정조는 더위가 시작되면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선물의 대상도 정승 반열의 대신들에서부터 저 아래 규장각의 검서 이덕무 같은 인물까지 챙겼다. 아픈 신하들에게는 스스로 지은 약제들을 선물했다. 책을 좋아하는 정약용 같은 인물들에게 죽기 불과 한 달 전까지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회고록에서 “노론 벽파들의 모함에 걸려 형조참의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 은둔하고 있었는데 달이 훤한 5월 어느 날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주상의 당직 내관이 보자기를 풀면서 『한서(漢書)』(중국 후한시대의 역사가 반고가 저술한 기전체의 역사서) 5권짜리 두 질을 보이며 한 질은 집안에 보관하고 다른 한 질은 다시 편집해 올리라는 어명을 건네고 황급히 돌아갔다”고 회고하고 있다.(180~182p.)


정조가 집권한 뒤 윤시동은 곧바로 남해로 유배됐다. 당파 갈등의 주범이라며 보낸 귀양이다. 정조의 윤시동 다듬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그는 석방됐다. 석방된 후 4년 만에 윤시동을 공조참판으로 제수했지만 아직은 거친 면이 강한 그는 바로 정조의 뜻을 거부했다. 여러번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1782년에는 이번에는 대사간 자리를 제수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나서지 않자 정조는 1786년 2월 그를 특별히 불러 책자 하나를 주었다.

그거이 바로 『갱장록(羹墻錄)』이다. 정조는 마음에 드는 신하들을 유인할 때 책으로 낚시질을 했다. 선비들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임금이 신하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나와 뜻을 함께하자는 의미다.

정조는 그 책을 주며 다시 편찬하자고 한 것이다. ‘갱장(羹墻)’은 선왕을 추모한다는 뜻이며, 요임금이 죽은 뒤 순임금이 그를 생각하며 지은 것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정조는 선왕 영조 이전 임금들의 언로⋅인재 등용⋅민생⋅각종 제도⋅국방⋅풍속 순화⋅경제 정책 등이 수록된 그 책을 주면서 윤시동을 크게 쓰고자 함을 암시했다. 8권의 그 책을 받아들고 윤시동은 정좌 가고자 하는 세상을 본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그 책을 통해 윤시동의 자기 사람 만들기가 성공한 것이다.(183~18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평등의 경제학>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불평등의 경제학
이정우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평등 경제학』을 읽기 전과 후, 무엇이 달라졌나.
환경은 여전한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또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답이 없다. 갑갑하다. 
기껏 생각해낸 게 '다음 대통령 선거는 언제지?' 라니.
하는 수 없다. 이게 딱 내 수준인걸 어쩌겠나. 
그나마 책을 읽고 확실한 기준 하나를 얻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선거때만 되면 허무주의자로 변신해서,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이왕이면 제일 잘 생긴 후보, 또는 제일 젊은 후보를 뽑자"는 허무개그나 날리던 내가,
다음 선거에는 최소한 '진보'냐 '보수'냐를 따져보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말이다.
하나 더. 그게 가능하다면, '성장'이냐 '분배'냐 역시 꼭 따져봐야겠지.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 개발독재 시절부터 먼저 파이를 키운 뒤 나중에 갈라 먹자고 하는 이른바 '선성장 후분배'의 철학이 워낙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40년간 성장에 매진해 왔으면서도 좀처럼 분배에 관심을 돌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 '선성장 후분배'가 아니고 '선성장 무분배'가 아닌지? _(서문11p.)

 
   

크크. 농담같은 진담, 선성장 무분배! 

   
 

우리나라가 상당히 높아진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진국이 못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배계급의 역사의식 부족과 지상주의 매몰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이런 풍조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고 싶어서다. _(서문12p.)

 
   

아, 예~ 교수님! 그런데 어쩌죠. 저는 지배계급도 아니면서 이 책을 읽었구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배계급이 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역사의식이 아주 많이 부족하거든요.
(부족한게 아니라, 실은, 역사의식이 아예 없습니다.)
아무튼, 교수님이 쓰신 책을 읽고 야트막하게나마 역사의식의 씨앗을 심긴했는데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도록 나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제가 지배계급과 함께 그 열매를 나눠 먹을 수 있을지? 그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지배계급에게 교수님의 책을 읽어보도록 권해야할텐데 말이죠.
뭐.. 지금의 지배계급에게 권하기 어렵다면, 차기 지배계급에게라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책 끝에,
'성장 만능주의의 결과'로 오히려 우리가 불행에 빠졌고,
'이제야말로 40년 성장 만능주의를 반성하고, 정상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할 때다.',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_(13장 한국의 불평등 499p.)
'고 하신 말씀을
그들과 꼭 함께 나누고 싶은데 말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21 | 322 | 323 | 324 | 32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