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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다른 일을 했더라면..

후회 남기지 않으려고,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 이것 저것, 여기 저기, 신청서를 내놓았더니 아이고 삭신이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녹초가 되서 집에 온다. 꿀잠 잔다. 좋다.



가끔은 우리한테도 낚싯대가 건네어졌다. 물고기 살점을 미끼로 단 낚싯줄은 배가 물을 차고 나감에 따라 손 안에서 팽팽해졌다. 그러다가 ㅡ그 흥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ㅡ 휙 잡아채는 느낌이 전해져 오고, 또다시 잡아채면 줄을 당긴다. 그러면 마침내 하얀 물고기가 몸을 틀며 수면 위로 올라와 갑판 위로 던져져서, 거기 떠 놓은 바닷물 속에서 이리저리 퍼덕이게 된다.
한 번은 우리가 성대와 가자미를 연거푸 낚아 올리며 한참이나 열중해 있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다음에 너희가 낚시하러 올 때는 난 오지 말아야겠다. 물고기들이 잡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는 원하면 와도 된다." 완벽한 교훈이었다. 무엇을 비난하거나 금지하는 대신 단지 자기의.느낌을 말하고, 그 점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게 한 것이었다. 미끼를 문 물고기가 낚싯줄을 휙 잡아채는 느낌은 내가 그때까지 알던 가장 짜릿한 전율을 주었지만, 아버지의 말에 그 매력은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 자신의 열정의 기억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그런 활동의 즐거움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사람이 모든 경험을 충분히 해볼 수는 없을진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그려 보는 무엇을 키울 수 있는 무한히 소중한 씨앗 중 하나이다. 종종 우리는 그런 씨앗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다.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의 씨앗 말이다. 나는 그렇듯 ‘낚시‘를 다른 여러 일시적으로 스쳐 간 일들, 예컨대 런던 거리를 거닐 때 지하층에 흘긋 던지는 일별 같은 것들과 함께 분류해 두고 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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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본 창업이 가능한 두 번째 이유는,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초보가 왕초보를 도와주면 된다는 게 내 사업 철학이다.˝

밀리의서재에서 읽다가 어떤 문장에 꽂히면 알라딘 와서 종이책 주문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역행자, 자청》, 이 책은 이제 거의 결말에 다다랐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드만 아... 역시 방심은 금물이다.

˝초보가 왕초보를 도와주면 된다!˝

이 문장이 나를 사로잡는구나.
초보가 왕초보를!!!!!!

잘잘라의 노후를 보장하리로다.
자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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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모욕의 의미

모욕에 대한 논의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쟁점 주위를 맴도는 경향이 있다. 이는 모욕이 본질적으로 (분노나 경멸 같은) 감정을 표현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모욕이 공적인 관심사에서 주변화되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주관적인 표현은 객관적인 사물의 상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누가 나를 돼지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정말 돼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라고 응수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모욕을 이처럼 감정의 표현 내지는 잘못된 재현으로 이해할 때, 말과 몸짓이 지니는 수행적 차원은 간과되고 만다.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 뿐이라면, 나는 그를 무시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둘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침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실제로 돼지가 된다(따돌림받는 아이들이 숱하게 겪는 일이다). - P107

[인격에 대한 의례]

현대 사회이론에 대한 고프먼의 주된 공헌은 사회구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따르는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상호작용 질서를 발견한 데 있다. (주: 고프먼은 상호작용의 질서를 다른 사회질서들과 연관시키지 않고 별도로 다룰 수 있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보았다.[Erving Goffman, "The Interaction Order,"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48) - P111

개인은 (사회화를 거쳐서) 일단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남의 도움 없이 계속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회생활의 모든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음으로써 매번 사람다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이다. - P116

사회적인 타자화가 유아화infantilizationㅡ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쓸 수 있다면ㅡ를 동반하는 예는 많다.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생활보호 대상자도 곧잘 나이를 무시당하고 아이처럼 취급된다.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들으면서 ‘나이‘의 위계에서 돌이킬 수 없이 강등되었다는 공포감을 경험한다. 아이의 이미지는 여기서 그들의 신체와 정신이 더 쉽게 침범될 수 있음을 표시한다. 그들은 더 작은 명예를 지니며, 더 쉽게 모욕당하고, 그러면서 그 모욕의 무게를 평가절하당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 ‘모자라는‘ 사람이다. 그들의 그림자는 남들보다 작고 희미하다.

온전한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민은 여성, 외국인, 장애인, 총체적 시설의 재소자 등등과 비슷하다. 그들은 상호작용의 장 안에 양반, 남자, 국민, 정상인, 일반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의례 교환에 있어서 불평등을 경험한다. - P141

우리는 신분 차별을 장소/자리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더 넓은 틀에서 바라볼 수 있다.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그러므로 신분의 개념은 인정투쟁이나 타자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P142

[사회의 발견]

신분 질서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피라미드 그림을 떠올린다. 꼭대기에는 왕과 귀족이 있고 바닥에는 노예와 농노가 있는, 3층이나 4층으로 된 피라미드 말이다.

- P142

그런데 ‘사회의 밑바닥‘이라는 말과 ‘사회의 가장자리‘라는 말에서 ‘사회‘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게 아니다.

우리는 사회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사회를 구조들(또는 구조화하는 실천들)의 총체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때 ‘사회‘ 안에는 정치•경제•문화•법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사회의 경계는 국민국가의 경계와 사실상 일치한다. 정치•경제•문화•법 등이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것은 국민국가 내부에서이기 때문이다. 구조기능주의와 마르크시즘은 둘 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마르크시즘의 전통은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를 분석의 구체적인 단위로 삼으면서 그 경계를 무의식적으로 국민국가의 경계와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를 상상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코뮤니타스에 대한 터너의 논의나 상호작용 질서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모두 사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을 함축한다. 두 논자는 구조기능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구조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층위에 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 P143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사회이론의 중심 질문은 사회의 기능과 변동ㅡ마르크시즘 용어로는 재생산과 이행ㅡ이다. 사회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지녔다고 믿는 다수의 주체들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그 주체들이 출생과 죽음에 의해 끊임없이 교체되고 있는데도, 사회의 형태가 유지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 P144

한편, 사회를 상상적 공동체로 볼 때 사회이론의 핵심에 떠오르는 것은 성원권의 문제이다. 사회가 상상적 공동체라면 그 경계는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그 사회에서의 성원권 역시 불확정적이다.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의례나 집단적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성원권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원권을 확인받는다.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 P144

[굴욕에 대하여]

앞에서 나는 근대화에 뒤따른 공적 공간의 재편성을 상호작용 질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근대화를 그때까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완전한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이러한 전망이 지나치게 역사주의적이며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근대화는 모욕ㅡ우리는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 모욕, 위반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규약의 위반에 대해 말하고 있다ㅡ를 없애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을 더 넓고 눈에 띄지 않는 싸움터로 옮겼을 뿐이다. 이는 노동과 자본의 대타협에 기초한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 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 P158

미디어는 날마다 천국을 보여주면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가르친다. 완벽한 비주얼, 유창한 영어 발음, 그리고 ‘예능감‘은 청빈, 겸손, 근면이라는 고전적 덕목들을 대신하여 구원을 약속하는 최신의 덕목들이다. 하지만 소비주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캘빈주의가 그랬듯이, 항상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할 뿐 누구의 죄도 결정적으로 사해주지 않는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ㅡ‘노바디‘건 ‘썸바디‘건ㅡ 끊임없는 굴욕과 강등의 위협에 시달린다. - P159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있다. 굴욕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예인의 ‘굴욕 사진‘을 퍼나르면서 네티즌들은 자기들이 누군가를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연예인이 ‘자기 관리를 못 해서‘ 굴욕 당한다고 생각한다.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 P160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 P160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존엄dignity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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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항목들을 ‘전통 사회‘에 오른쪽의 항목들을 ‘현대 사회‘에 귀속시킨다면, 우리는 이것을 현대화가 개인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의 대차대조표로 읽을 수 있다. 버거는 우리가 명예의 세계를 떠나 존엄의 세계로 옮겨왔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일견 바람직해 보인다. 명예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지만, 존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존엄의 관념은 위계를 부정하고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평등은 벌거벗은 인간들의 평등, 역할의 갑옷을 벗고 사적인 공간으로 물러난 고독한 개인들의 평등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좌표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 도표가 현실의 차이가 아니라, 가치의 대립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의하도록 하자. 규범과 자유의 대립은 현대인이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규범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옷을 입은 인간과 벌거벗은 인간의 대립은 현대인이 옷을 입은 자기 즉 남들에게 보여지는공적인 자기를 진짜 자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P96

어째서 현대인은 규범을 지키면서도 규범에 거리를 느끼는가? 어째서 그는 벌거벗은 상태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그의 영혼이 깊은 곳에서 세계와 불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도표는 현대성의 핵심에 세계와 자아의 불화가 있음을 나타낸다.

현대인은 일종의 자기 분열로써 이 불화에 대처한다. - P97

결국 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매킨타이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는 이 개념에 의지하여 역할과 자아를 분리하는 사르트르의 관점과, 자아를 역할들 속으로 해체하는 고프먼의 관점을 모두 넘어서려고 한다. 사르트르는 덕이 있는 삶의 본보기들을 모두 ‘인습적‘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에게 있어 진실한 것은 인습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아의 태도뿐이다. 사르트르적인 자아에게 평판이나 명예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고프먼은 그와 반대로 체면을 유지하는 데 과도하게 몰두하며 그 이상의 어떤 가치도 추구하지 않는 자아를 그린다. - P99

"명예의 세계에서 존엄의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버거의 명제는 현대적 인간상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부각시킨다는 장점을 지닌다. 인권의 주체인 인간은 아무런 구체적 내용도 갖지 않는, 비어 있는 범주이다. 그는 역사도 전통도 미덕의 관념도 알지 못하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인권이 인류의 모든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명예와 존엄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옷을 입은 인간‘에 그리고 후자를 ‘벌거벗은 인간‘에 귀속시킴으로써, 버거는 존엄 역시 문화적인 관념이며, 사회적인 의례를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벌거벗은 인간 역시 무언가를 입고 있으며, 그의 존엄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버거가 제시하는 이행의 도식ㅡ한쪽에는 명예와 역할 자아, 그리고 규범과 위치 감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존엄, 역할에서 벗어난 자아, 자유, 좌표 상실이 있는ㅡ을 다시 살펴보자. 이 이분법의 문제점은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는 구조, 즉 역할들의 체계와 동일시되며, 역할의 옷을 벗는 것은 사회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 개인은 구조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사회 바깥으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즉 이 모델은 행위자에게 순응주의냐 내면으로의 침잠이냐라는 양자택일만을 남긴다.

규범 또는 가치 체계가 구조의 산물이자 구조의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계기로 여겨지는 한, 구조에 대한 저항은 모든 규범의 거부로 귀결될 것이다(매킨타이어가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도덕적 진공상태이다). - P102

하지만 사회는 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역할의 수행이나 구조의 재생산과 무관한, 순수한 상호작용의 층위를 발견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는 것이나 낯선 장소에서 길을 묻는 것같이,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채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그러한 예이다. - P102

그런데 역할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질서ㅡ의례적 질서ㅡ 속에 있다. 그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표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예의 바른 무관심을 보여주면서, 타인의 몸을 둘러싼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길을 묻는 사람은 타인에게 다가갈 때와 헤어질 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한다. 지위와 역할이 다른 개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사회 공간 안에 현상하는 것은 이러한 의례들에 힘입어서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의례적인 실천들의 바탕에 있는 규범을 단순히 "진정한 자아"와 대립하는, 외적이고 강제적인 힘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들은 그 규범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다.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상호작용과 그것을 조율하는 규범의 존재야말로 버거가 "존엄의 세계"라고 명명했던 현대 사회의 특징인 것이다. - P103

그러므로 명예와 존엄의 대립은 재고되어야 한다. 버거는 명예는 표현적 질서에 속하지만 존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모욕은 (존엄이 아닌) 명예에 대한 공격으로만 이해된다. 존엄이 표현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면, 표현을 통해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엄을 이처럼 초월적인 장소로 옮겨놓을 때, 명예의 쇠퇴라는 가설은 모욕이 사회적 삶의 주변부로 추방되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모욕은 여전히 중요한 공식 의제이다. 사회운동의 역사를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민권운동에서 게이-레즈비언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체성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 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103

모욕을 명예의 훼손으로 정의할 때, 이런 문제들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명예훼손은 주로 평판이나 위신 등의 손상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협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법적으로 모욕 또는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행위의 ‘공정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 외에 그 행위를 보거나 들은 제삼자가 있어야 한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욕설을 한 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사회학 연구에서 모욕이라는 키워드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회학은 모욕을 개념이 아니라 현상으로만, 즉 인종차별이나 성폭력의 장면들을 구성하는 요소로만 다룬다. 현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념이 그것을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욕을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면 그것을 존엄과 연관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호작용 의례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이러한 접근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매킨타이어는 고프먼이 모욕을 공적 갈등의 영역에서 사적 감정의 영역으로 추방하였다고 비판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의례적 성격을 강조하는 고프먼의 시각은 오히려 모욕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 장에서 나는 고프먼의 통찰에 기대어, 모욕이 언어라면 이 언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설명할 것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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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노릇
사람 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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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사람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람 노릇 한다고 애썼다. 잘잘라야. 이제 그만 할까. 아니야. 그러지 마. 그 사람도 이제야 알아챈 거 같은데.. 다시 시작해.
다시 시작해.




1장 사람의 개념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 P31

절대적 소유권, 즉 배타적인 지배란 주인이 노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제삼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그 행위가 승인된다는 것, 다시 말해 노예의 완전한 고립과 무력함powerlessness을 함축한다. 패터슨이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소유권이란 사람과 물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 P39

여기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아렌트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아렌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인은 언제나 복수형으로, 즉 ‘주인들‘로 나타난다. 아렌트에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2자적인 관계가 아니라 3자적인 관계이다. 주인과 노예가 일대일로 대결하는 2자적인 관계에서는 결코 권력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우리‘를 만드는 능력이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행위하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 현상 공간인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 "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반면 노예는 고립되어 있기에 무력하다. - P39

군인

사람의 개념이 내포한 인정의 차원을 드러내는 세번째 예는 전쟁터의 병사다. 현대전에서 병사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이는 전시에 적군을 죽이는 것이 ‘인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권 담론은 모든 인간에게 생명권이 있다고 엄숙하게 선언하면서도, 전쟁에 관해서만큼은 예외를 인정한다. 교전 상황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은 살인도 아니고 전쟁범죄(이 단어는 전쟁 자체는 범죄가 아님을 함축한다)도 아니다. 인권 담론이 개입하는 것은 군대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공격했을 때처럼, 전쟁의 규칙을 위반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정당방위의 논리로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군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전의 규칙은 정당방위 이론의 기초에 있는 개인들 각자의 생명에 대한 권리 주장과 무관하다. - P41

전쟁이라는 게임 속에서, 적대하는 두 국가는 각각 인구의 일정 부분을 차출하여 그들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빼앗고,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소모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군인은 적에 의해서도 죽지만, 자기 편에 의해서도 죽는다(명령을 위반할 경우). 사실 군인이 적에 의해 죽는 것은 이미 자기 편에 의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아니 어떤 의미에서 죽어 있는 존재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 P42

군대에서 이런 과정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군인들의 인격을 부정하여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렇게 인격을 박탈당하고 물건처럼 사용되는 동안에도 국가들 사이에서는 인격적 관계가 유지된다.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동맹을 맺고, 우의를 다짐하고, 돈을 꿔주거나 갚고, 축구 시합을 하기도 하는 인격체들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은 이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는 논리는 전쟁놀이를 할 때 각자 제일 아끼는 장난감은 건드리지 말기로 하자는 아이들의 약속과 비슷한 것이다. - P44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예는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노예는 이제 자신의 노동에 의해 변화된 기술적 세계에서 군림한다. 노예는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와 더불어 해방투쟁을 위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을 창조해낸다.

유감스럽게도 이 우화는 노예제의 본질에 대한 인류학적 통찰과 거리가 멀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주인들은 이미 상호 인정 속에 있기 때문에, 즉 ‘우리‘라는 복수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 주인들과 노예의 삼자 관계에서 노예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항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들에게 노예는 인정투쟁의 상대가 아니라, 인정투쟁이 일어나는 장의 외부를 상징한다. 노예의 복종이 주인의 위신을 높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의 자부심은 노예의 굴욕을 대가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이 곧 주인의 명예가 노예의 인정에서 비롯됨을 뜻하지는 않는다. 노예는 아무런 명예를 갖지 못한 존재이기에, 타인을 인정할 수도 모욕할 수도 없다. 이는 신분이 낮은 자는 결투를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결투는 "생사를 건 위신투쟁"의 완벽한 예인데, 결투의 승자가 패자를 노예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투쟁은 상대방의 성원권(사람 자격 또는 신분적 자격)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다. - P60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정투쟁이 지향하는 타자는 적이 아니라 우리이다. 즉 인정투쟁은 성원권 투쟁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의 논의는 인정투쟁을 인간의 본질이나 실존적 조건과 관련시키는 접근들(헤겔주의건 라캉주의건)을 모두 배제한다. 인정투쟁이 성원권투쟁이라면, 인정투쟁의 양상은 한 사회에서 성원권이 분배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P63

한편,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가 문화적 자격을 요구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 지식이나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미 사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은 사회성sociability
과 별개임을 인식해야 한다.

‘히키코모리‘에게도 사회적 성원권을 보장해야 하듯이, 외국인에게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는 데 ‘동화‘나 ‘적응‘을 조건으로 내걸어서는 안 된다. - P65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스티그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외국인이 그 자체로 낙인찍힌 범주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그들이 우리 문화의 장점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그들이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게 판명된다면, 가령 그들이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데다 남의 나라에와서도자기네 방식을 고집한다면, 게다가 금방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자들을건드린다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환대는 철회될 것이다. 스티그마가 있는 개인이 그에게 추천되는 특정한 행동 노선 line of action에서 벗어났을때처럼 말이다. 즉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을 구별하는 사람은 결국 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69

오염의 메타포

사람임을 사회적 성원권으로 정의하고, 사회를 물리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장소로 이해하는 것은 오염의 메타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왜 어떤 범주의 사람들(흑인, 재일조선인, 불가촉천민 등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럽다고 여겨지는가?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옷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속옷이 나와 있는 것 등은 더럽다."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New York: Routledge, 2002, pp. 44~45.) - P73

이 글은 오염의 메타포를 성원권에 대한 부정 또는 위협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성원권의 문제는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이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더글러스의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주적 질서 안에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또한 그 자리들이 높고 낮음이 있을지언정, 우주적 질서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실제로는 여성의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허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와 호주제(성균관 유생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2005년에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안/밖의 구별이 결코 대칭적이지 않으며, ‘집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남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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