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SF를 쓰는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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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일은, 싱싱한 채소와 꽃 나무로 가득한 마당에 평상을 깔고 앉아 모기향을 피우고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우주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오늘은 우선 내 옆에 사는 생명체를 좀 관리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평상에 앉아 옥수수를 삶아 먹든, 우주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책을 읽든, 아무튼 그 옆에 누워서 낮잠 잘 사람도 한 명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다가...! 

(방금 내가 그 생명체를 나의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으므로, 이제 더 이상 그는 운명이 아니다. 생활이다. 생활! 일상! 반려! ... 흠, 확실히 글로 썼더니 진정 효과가 있구만! 다행이다. 오늘도 이렇게 넘어간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야기로 가득한 나만의 작은 가게에서 우주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책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 P15

그런데 SF를 읽고, SF를 쓰고, SF와 관계를 맺는 행위, 더욱 거친 창조의 바다에 더욱 거칠게 휘몰아친 그 폭풍들은 전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사람들이 작가에게 궁금해하는 점도 바로 이런 부분이다. 무엇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어떤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하신 건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됐어요." 라든가 "무엇에 사로잡혔던 건지는 모르겠네요."라는 식의 설명에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계기를 듣고 싶어 한다. - P25

「우리가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삶에서 운명으로 등장한다.」

칼 구스타프 융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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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통조림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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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짧은 글 18개 담아놓은 『복숭아 통조림』에서 다섯 번째 글 「메르헨 옹」을 통째로 옮겨놓습니다.

 

이 쓴 남의 얘기를 돈 주고 사서 읽었으면 됐지 월요일부터 그걸 베껴 쓰고 앉었냐 너도 참 할 일 없구나? 아닙니다. 할 일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미치겠습니다. 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걸 다 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자니, 이런 글 읽으면서 울고 웃고 그러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내 앞에 떨어진 일, 다 하고 죽을랍니다. 평생 당당하게 살아왔는데, 죽을 때도 당당하게 죽을랍니다. 내가 할 일은 내 땅에 내 집 하나 짓는 일입니다. 결국 그 집은 어릴 때 살던 집, 지금은 허물고 없는 집, 마당 있는 집, 툇마루 있는 집입니다. 햇빛 따사로운 날, 툇마루에 앉아 졸다가 죽자는 계획입니다. 뭐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별로 없습니다만.

 

*

 

  『복숭아 통조림』59-69p., 「메르헨 옹」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정말 못된 노인이었다. 교활한 데다 심술쟁이에 게으름뱅이고 며느리 구박도 심해서 엄마도, 나도, 언니도 호된 꼴을 많이 당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X-데이는 5월의 어느 싱그러운 토요일 밤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밤 12시 경, 할머니가 "얘들아, 좀 와봐. 할아버지가 숨을 안 쉬어" 하고 부엌에서 불렀다. 나와 엄마와 아빠는 깜짝 놀라서 할아버지 방에 갔다. 할아버지는 정말로 숨을 쉬지 않고 입을 떡 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나 바보 같은 얼굴에 나도, 아빠도, 엄마도 힘이 풀려서 헛웃음만 나왔다.

   이윽고 의사가 와서 할아버지의 시신을 보자마자 "아주 평안하게 가셨군요" 하고 말했다. 사인은 행복한 죽음의 조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노화'였다.

 

 

   새벽 3시경, 친척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런 난리 통에도 언니가 자기 방에서 쿨쿨 자던 것이 생각나서 나는 황급히 깨우러 갔다.

   내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라고 말한 순간, 언니는 메뚜기처럼 벌떡 일어났다. '뻥이지?' 하고 묻는 눈은 기대와 흥분으로 빛났다. 나는 언니의 기대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 "있지, 할아버지 죽은 얼굴, 엄청나게 웃겨. 입을 떡 벌리고 말이야. 뭉크의 「절규」, 바로 그거야, 그거. 그렇지만 절대 웃으면 안 돼. 어쨌거나 사람이 죽었으니까 아무리 웃겨도 참아" 하고 몇 번이나 충고했다.

   언니는 조심조심 할아버지 방의 문을 열더니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구르듯이 부엌 구석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아 귀뚜라미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 언니, 아무리 웃겨도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하고 연타를 날리자 언니는 결국 발라당 뒤집혀서 깔깔 웃어댔다.

   덜 죽은 바퀴벌레 같은 언니를 부엌에 남겨두고 나는 할아버지 방으로 상황을 보러 갔다.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까지 아수움 하나 남기지 않고 죽는 것도 여간해서 못 할 일일 텐데.

   그때, 처음 보는 초로의 여성이 도착했다. 할아버지의 사촌 누나인지 육촌 누나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핏줄이라고 하면서 울었다.

   생전에 가족과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는 그를 보고, 나는 문득 '우는 여자'를 떠올렸다. 우는 여자란, 동아시아 어딘가의 나라에서 장례식이 있으면 슬픈 분위기를 고조하려고 일부러 울러 오는 여자를 말한다.

   이곳 시미즈에도 '우는 여자' 문화가 전파된 걸까. 한 명의 눈물을 무시하고 장례식 준비는 진행됐다.

 

 

   "할아버지의 입을 다물게 해줘야 하지 않아? 보기 흉하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로도 재미있으니 문제없지 않나 생각했지만 장례를 치르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는 모양이다.

   "하얀 천으로 할아버지 머리에서 턱까지 감아주고 싶은데 천 있나?" 친척 중 한 남자 어른의 제안에 엄마와 할머니는 열심히 집을 뒤졌지만 천을 찾지 못했다. 심야여서 사러 가지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시신에 사후경직이 일어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마침 집에 있는 수건을 쓰게 됐다.

   그런데 그 수건은 마을의 봉오도리 대회에서 나눠준 것으로, 물방울 무늬에 '축제'라고 빨간 글씨가 인쇄된 것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물방울 무늬 축제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경사스러운지 경사스럽지 않은지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얌전하게 안치됐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는 맨날 축제겠네"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언니한테 "할아버지 입에서 축제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아"라고 했더니, 언니는 또 부엌의 바퀴벌레처럼 돼버렸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치매를 앓았는데, 그 치매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모르는 척하고 내 저금통에서 돈을 훔쳐가기도 하고, 목욕하는 걸 들여다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면 먹었으면서도 안 먹었다며 시치미를 떼고 더 먹으려 했다.

   나는 일부러 치매인 척한 거라고 100퍼센트 믿고 있다. 노인 질병인 '치매'까지 교묘하게 이용하다니 얼마나 불량한 노인인가.

   그런 할아버지가 남긴 물건은 꼬질꼬질한 안경과 그보다 더 꼬질꼬질한 틀니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상조회 사람들이 왔다. 관이니, 꽃이니 제단을 엄청난 속도로 조립했다. 어마무시한 상조회였다.

   흑백의 막이 장례식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제단의 등롱이 선향 냄새를 피웠다.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지만 키가 커서 관 크기가 맞지 않는지 몸을 조금 구부려서 관에 넣었다. 염주로 감은 손이 뺨 언저리에 와 있다.

   몸을 S자로 구부리고 뺨에 손을 포갠 할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꿈을 꾸는 메르헨 동화 속 소녀 같았다. 몸 주위에 국화꽃을 가득 꽂아서 할아버지의 메르헨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다.

   드디어 관 뚜껑이 닫혔다. 이것으로 메르헨 옹과도 이별인가 생각했더니, 관 뚜껑에 작은 창이 있어서 그 창문을 열면 메르헨 옹이 악몽처럼 나타나는 구조로 돼 있었다.

 

 

   나는 장례식 접수를 맡게 됐다. 말이 접수지, 출입구에서 문상객에게 간단한 답례품을 전하는 역할이다.

   이웃 아주머니들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얼마나 슬프세요."라고 할 때마다 "아뇨, 전혀 그런 것 없어요" 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할 것 같아서 내심 아슬아슬했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이 "아, 이 집, 장례식이다. 엄지 감춰!" 하고 외치며 걸어간다. 나는 속으로 좀 창피했다.

   이윽고 스님이 와서 불경을 읽었다. 스님의 불경에 맞춰서 어린 사촌 동생이 "보즈카뵤브니죠즈니보즈노에오카이타"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숙모가 얼른 사촌 동색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스님의 독경에 맞춰서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보즈가뵤브니.....'라는 문구가 빙빙 돌아다녔다.

   밤샘을 하며 나는 관에 달린 메르헨의 작은 창을 열어봤다. 그랬더니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확 흘러나오고 금방이라도 기타로의 콘서트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할아버지의 ㅇ러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 상조회 영구차가 신속하게 도착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 상품을 파는 '왕의 아이디어' 같은 가게에서 주문하면 살 수 있을 듯한 이 차를 살아 있을 때 한번은 타보고 싶었다.

   영구차에 관을 싣는 모습을 본 아빠가 "허어, 할아버지도 출세했네"라고 중얼거렸다. 참고로 '허어' 하는 무의미한 소리는 대단한 발언도 아닌데 주목을 받고 싶을 때 내는 아빠의 쓸데없는 말버릇이다.

   영구차가 화장터에 도착하고 할아버지의 화장이 시작됐다. 그제 저녁때만 해도 태연한 얼굴로 밥을 먹던 할아버지가 오늘은 불에 태워질 줄은 화장터의 굴뚝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대기실에서 주스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백 살까지 살 거다"라고 말하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만약 정말로 할아버지가 백 살까지 살면 나는 대체 몇 살이 돼있을까 계산하며 시간을 보냈다.

   화장이 끝나고 우리는 절로 갔다. 뼈를 묻기도 하고 스님의 독경을 듣기도 했지만, 조사 낭독을 할 때는 그 거창한 내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유조 씨, 당신은 1963년 노인회 발족 당시부터 회장을 역임하여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일해주셨습니다. 노인회는 당신의 노력 덕분에 이렇게 활동을 계속해 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인회 이야기였다.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라는 구절이 조사를 읽는 사람과 별로 친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어서 은근 재미있었다.

집에 돌아온 뒤 할머니는 "난 그 조사에 감동했어"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장례식 도시락이 굉장히 기대됐다. 절에서 스님의 독경을 들을 때부터 줄곧 도시락 생각만 했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에 좀 무리해서 주문한 그 도시락은 너무 맛있어서 나는 '할아버지도 처음으로 세상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뭘 좀 하셨네' 하고 그의 죽음에 삼가 감사하면서 방어 데리야키 구이를 우적우적 먹었다.

 

 

   할아버지의 법명은 '거사'였다. 나는 죽으면 무조건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이 세상의 시스템에 새삼 놀랐다. 만약 할아버지가 정말로 부처님 제자가 된다면 부정을 저지르고 술을 퍼마셔서 하루 만에 파계 당할 것이다.

   그런데 거사라니, 내가 "훌륭한 법명 얻어서 좋겠네"라고 엄마한테 말했더니 엄마는 "난 살았을 때 좋은 일만 겪을 수 있다면 거사든, 거지든 아무거나 좋아" 하면서 장례식 답례로 나눠주는 만주를 맛있게 먹었다.

   위패가 조금 기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끝)

*

 

*

 

 

 

 

(- 다 옮기고 나서 혼잣말: 분량 반도 더 남은 지점부터 손가락 아프고 커피 마시고 싶고, 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네, 아, 그만할까, 아, 아, 아, 그래도 읽기만 했을 땐 몰랐는데, 엄청 세심한 글이다.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마디씩이라도 다 적어두었다. 음, 이렇게 꼼꼼하게 장례식 후기를 써서 출판까지 하는 손녀딸이라니! 하하하! 잊지 못할 메르헨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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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7-26 12: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장례식이 이렇게 유쾌 발랄 해도 되나요 ㅎㅎ 불량노인ㅎㅎ 잘잘라님 고생덕애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잘잘라 2021-07-26 13:44   좋아요 2 | URL
mini74님 *^____^*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당~~


-부록-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땀이 줄줄나는 느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여름처럼,
가만히 있어도 글이 줄줄 써지는 계절이 있으면 좋겠다는 둥,
부질없는 생각도 줄줄~
줄줄~~

레삭매냐 2021-07-26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카피해서 정독했습니다.

메르헨 옹의 미래는 화장터
의 굴뚝도 미처 몰랐을 것
이다에서 정말 빵 터졌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곡쟁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들은 것
같습니다. 아니 책으로 만났던가.

잘잘라 2021-07-26 17:11   좋아요 1 | URL
‘카페에서 정독‘하셨는 줄...아이고 ㅋㅎ

(*1965년생인 작가는 2018년에 유방암으로 작고하셨습니다. 향년 53세. 돌아가 할아버지를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 나누며 지낼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달 초에 갔던 장례식장에서 가족들보다 더 크게 더 오래 울고 와서 그런지, 저는 메르헨 옹의 장례식에 다녀온 듯한 느낌에 빠져있습니다.


scott 2021-07-26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모코는 저의 일본어 실력을 급 상승 시킨 고마운 작가, 특히 이책 복슝아 통조림은 일본어 시작 6개월만에 첫 원서 완독을 하게 만든 책! 잊지 못할정도로 잼나는 에피소드가 가득 들어간 웃음보따리 입니다 ^ㅅ^

잘잘라 2021-07-26 17:28   좋아요 2 | URL
와! scott님 일본어 6개월 만에 원서로요?!! 대단하심!

모모코는 scott님 웃음보따리,
scott님은 잘잘라 웃음보따리!!

scott님 짱!

바람돌이 2021-07-27 0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그림에서 빵!!!
오늘 저를 웃게 하셨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모든 일이 술술술 풀려서 잘잘라님 집 마련 계획에 큰 도움이 있을거라죠. ^^

잘잘라 2021-07-28 11:05   좋아요 2 | URL
땀 줄줄
일 술술
바람돌이님 에너지 뿜뿜!!!

바람돌이님 댓글 읽고 힘 나서 커피 한잔 원샷했습니다. ^___^

바람돌이님 고맙습니당~~
 


눈보라 치는 날 길이 얼어붙은 바사 공원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아스트리드가 발목을 삔 것이다. (중략) 의사는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발목이 나을 때까지 4주 동안 푹 쉬라고 했다. - P195

오늘로 결혼한 지 13년이 됐다. 그 옛날 얼굴을 붉히던 신부는 이제 누워 있는 신세가 돼 버렸는데, 이 생활은 확실히 금세 지루해진다. 아침마다 누군가 훈제 연어를 곁들이 빵과 차를 가져다주고, 침대도 정리해 주니 좋긴 하다. 하지만 밤이면 스투레는 옆에서 쿨쿨 자는데 나는 압박붕대 때문에 발목이 화끈거리고 가려워서 도통 잠들 수가 없다. 나는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삐삐 롱스타킹 이야기를 쓰고 있다. - P196

1944년 4월, 카린(딸)에게 입으로 들려주던 삐삐 이야기를 종이에 적으면서 아스트리드는 그 당시에 글을 쓸 때 일반적이던 손글씨나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1926~27년 스톡홀름의 바록 직업 학교에서 배우고, 여러 직장에서 변호사나 교수, 사무실 관리자들과 일하면서 익숙해진 멜린식 속기법을 활용했다. - P196

속기에 필요한 도구는 펜과 노트뿐이라서 침대에 누워서도 일할 수 있었다. 그 방식은 침대를 벗어나기 어려운 아마추어 작가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적어 내리기에 안성맞춤이었으므로 아스트리드는 이후 작가 활동을 하면서 모든 초고를 속기로 작성했다. 그중 상당수는 침대에 누워서 썼다. - P197

1947년 12월 13일의 전쟁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침대에 누워서 삐삐 3권의 내용을 몇 줄 적고 있다." 1952년 『스톡홀름스티드닝엔』 기자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 뭐냐고 묻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 잠옷이죠. 이제 스웨덴 사람들은 내가 너무 게을러서 침대에 누운 채 그을 쓴다는 사실을 다들 알게 되겠군요."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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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08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자세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어깨 무지하게 아픈데..... 하고 저의 어깨를 두들깁니다. ㅎㅎ

잘잘라 2021-07-08 12:32   좋아요 1 | URL
어깨가 아파도 저 자세, 지금 몹시 하고 싶은 자세입니다~!!^^
 
끝과 시작 (리커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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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에서,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전문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시를 쓰지 않았던 엄마를 닮아,

역시 시를 쓰지 않았던 아빠를 닮아

시를 쓰지 않는 언니의 지붕 아래서 나는 안도를 느낀다.

언니의 남편은 시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 시가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린다해도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언니의 서랍에는 오래된 시도 없고,

언니의 가방에는 새로 쓴 시도 없다.

언니가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해도

시를 읽어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끓인 수프는 숨겨진 모티프가 없이도 그럴싸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절대로 원고지 위에 엎질러질 염려가 없다.


가족 중에 시 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그런 가족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결국 시인이 나왔다면 한 사람으로 끝나진 않는다.

때때로 시란 가족들 상호간에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세대를 관통하여 폭포처럼 흘러간다.


우리 언니는 입으로 제법 괜찮은 산문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온 엽서가 전부다.

엽서에는 매년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

돌아가면 이야기해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 * * 

약속 이행.

약속 이행 현장.

약속대로, 언니는 돌아와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언니의 동생인 내가,

들은 이야기를 기억해

잘 살고,

다른 동생에게 엽서를 쓰고,

돌아가면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줄게,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약속 이행.

멋지다.

돌아가면
이야기해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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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도착해서 모든 것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라세는 의자에 배를 깔고 엎드려 소리 없이 울었다. 어차피 어른들 마음대로 할 테니까 울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아챈 듯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울다니! 그 눈물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흐르고 있다. 아마 내 생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 흐르겠지. 어쩌면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어린이 편을 드는 것도, 옹졸하고 젠체하는 공무원들이 어린이를 별생각 없이 이리저리 보내는 모습에 분노를 참지 뮷하는 것도 그 눈물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은 어린이가 어디서나 금세 적응한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어린이는 새로운 환경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그저 체념할 따름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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