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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콘셉트와 내용이 겹치는 책들이 종종 보인다. 얼마 전에 일본 작가 나카노 교코가 화가들의 유작을 소개하는 책『내 생애 마지막 그림』을 읽었는데, 한국 작가 이유리가 화가의 유작을 소개하는 책『화가의 마지막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확히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고, 어느 쪽이 다른 한 쪽을 모방했다고 단정짓고 싶지도 않다. 그저 두 책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는 참 비교하기를 좋아하니까.


(위) 반 고흐의 유작으로 흔히 알려진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아래) 네덜란드의 반 고흐 연구자들이 밝혀낸 유작 <나무 뿌리>(1890)


 두 책 모두가 다루는 화가가 둘 있는데, 한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산드로 보티첼리이다. 공정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화가 반 고흐에 대한 태도에서『화가의 마지막 그림』『내 생애 마지막 그림』보다 훨씬 좋은 인상을 주었다. 나카노 교코는 조금만 검색하면 나올 정보들만 나열하면서 반 고흐에 대한 경멸과 짜증을 숨기지 않고,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이라는 통설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반면 이유리는 네덜란드 연구자들이 2012년에 발표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아니라 <나무 뿌리>가 반 고흐의 유작이라는 근거를 꼼꼼하게 제시한다. 어조에서나 반 고흐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보여주는 열정에서나 반 고흐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느껴진다. 반 고흐의 팬으로서는 당연히 이쪽이 더 끌릴 수밖에 없다.


(위) 산드로 보티첼리, <아펠레스의 모략>, 1494. 

(아래) 산드로 보티첼리, <신비한 탄생>, 1501.


 반면 보티첼리 관련 장에서는 각 화가에 대해 좀 더 깊이 분석하는『내 생애 마지막 그림』의 장점이 돋보인다.『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화가의 마지막 그림』보다 다루는 화가의 수가 적기도 하고, 소단원의 서문마다 화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보충설명해, 화가가 살던 시대, 화가의 전반적인 삶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두 책 모두 광신적인 설교자 사보나롤라에게 감화된 이후 보테첼리가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화가의 마지막 그림』이 <신비한 탄생>(1501)을 통해 단순히 보티첼리가 종교적 주제에 몰두했다는 것만 이야기하는 반면,『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 <아펠레스의 모략>(1494) 속 딱딱하게 그려진 누드를 통해, 보티첼리가 종교적 열정과 금욕적인 자세 때문에 원래의 자연스럽고 우아한 누드를 잃어버린 것까지 이야기한다. 화가의 삶과 그가 산 시대를 소개하는 측면에서는『내 생애 마지막 그림』의 내용이 좀 더 풍성하다. 


마크 로스코, <무제>, 1970. 로스코의 시신이 발견됐을 당시 화실에 이 작품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가의 마지막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는『화가의 마지막 그림』의 두괄식 구성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화가의 마지막 그림』의 거의 모든 챕터는 화가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마크 로스코의 시신이 발견된 화실에 걸려 있었던 유작 <무제>(1970), 에곤 실레 자신이 아내와 같은 전염병으로 죽기 며칠 전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죽기 직전의 에디트 실레>(1918), 아내와 함께 세상에게 보내는 고별인사 같은 에드워드 호퍼의 유작 <두 코미디언>(1976) 등 화가의 마지막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은 시작부터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화가의 마지막 작품과 최후를 보여주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다시 화가의 마지막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는 구성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화가의 마지막'을 더욱 강렬히 전달한『화가의 마지막 그림』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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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 일본에서 한 포르투갈 선교사가 배교했다그 소식을 듣고 또 다른 선교사가 일본에 찾아 왔지만 그 또한 배교하고 일본에 귀화했다사실관계만으로 따져보면 그들은 배교자들이다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을까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된 작품이다작가는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관찰자적 시점과 전지적 시점을 넘나들며 열의 넘치는 선교사였던 그들이 어떻게 배교하게 되었는지배교한 뒤의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는지 그들의 심리적 여정을 따라간다주인공의 심리적 여정에 따라 어떻게 서사 방식이 바뀌는지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작품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역사서처럼 페레이라 신부와 그가 겪은 박해그리고 로드리고 신부가 어떻게 페레이라 신부를 따라가게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서술한다그 안에 페레이라 신부가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가 삽입되어 있다작가의 객관적 서술이 페레이라와 로드리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이들의 여정이 시작된 계기를 독자들에게 설명해 준다면페레이라의 편지는 일본에서의 박해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이러한 복합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이 로드리고의 육체적 여정과 심리적 여정을 머리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1장에서부터 4장까지는 로드리고의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로드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로드리고의 편지는 그가 마을 주민 기치지로의 밀고로 체포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로드리고가 체포된 이후인 5장부터는 로드리고가 화자인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뀌어 로드리고의 심리를 묘사한다두 부분 모두 로드리고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는데왜 굳이 서로 다른 시점으로 서사를 진행했을까

  로드리고가 체포되기 전까지 독자들은 로드리고의 시점 안에서만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독자들은 젊고 미숙한 사제 로드리고와 함께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상황들을 거치게 된다로드리고는 체포된 뒤 이노우에 부교와 통역관배교한 페레이라를 만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그리고 페레이라가 처했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이 때 화자가 전지적 작가로 바뀌면서독자들도 로드리고의 시점으로 볼 때보다 좀 더 폭넓게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어떤 일이 있어도 배교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로드리고는페레이라처럼 배교를 해야 신도들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다그가 자신의 신념 대신 사랑을 택하자 신은 침묵을 뚫고 그에게 목소리를 들려준다그가 자신의 좁은 시야에 갇혀 있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이렇게 로드리고의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작품 속 사건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야도 넓어지게 되고로드리고와 함께 새로운 사실들을 직면하면서 배교에 이르게 되는 그의 심리에 공감하게 된다

  로드리고가 배교하기까지그리고 배교한 이후에도 그의 내면 변화에 집중하던 서사는 두 곳에서 로드리고와 거리를 두고 겉으로 보이는 그의 상황만을 관찰한다하나는 일본을 찾은 네덜란드 상인의 시점에서 배교한 로드리고가 페레이라와 함께 일본 정부의 천주교 탄압 정책을 돕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네덜란드 상인 요나센의 일기이 부분에서 그들을 일본 정부에 영합해서 살아가는 비루한 배교자로 보는 타인의 시선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뒤로 로드리고와 기치지로의 대화로드리고와 신의 대화가 이어지면서로드리고의 내면의 진실이 드러난다로드리고의 심리에 가까이 다가갔던 시점은 마지막 부분인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에서 또 다시 거리를 두고 로드리고를 관찰한다실제 역사 기록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이 부분은 로드리고의 내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 사실 관계만 전달한다그로 인해 독자들은 로드리고의 내면에 감정이입하는 대신신의 시점에서 그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앙을 지키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와 같이 작가는 서사 방식의 변화를 통해 독자들을 로드리고의 심리적 여정으로 인도하고로드리고의 심리적 여정을 함께 경험하게 하고때로는 신의 시점에서 로드리고를 지켜보게 한다이렇게 복합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침묵은 로드리고에게 감정이입하는 시점이나 그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시점 중 하나만으로는 볼 수 없었던 로드리고의 내면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은  침묵의 한국어 번역본들에 실리지 않았다. 실제 역사 기록을 등장인물 이름만 바꾼 채 거의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소설의 일부가 아닌 참고자료로 착각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대신 침묵의 해설서인  침묵의 소리』에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 전문이 실려 있어, 그 책을 통해 읽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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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우리 고전 소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책 『파격의 고전』이 출간되었다. 익숙한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책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6년 전에 이미 권선징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전을 범하다』가 출간되었다. 두 책 모두 기존의 해석과 권선징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선으로 고전을 바라본다.  두 책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우리 고전을 재해석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작품별 분석 VS 주제별 분석


우선 『전을 범하다』는 한 챕터에 한 작품씩 작품별로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장화홍련전」 에서는 체제 자체의 문제점을 계모 한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가부장제의 실상을,  「적벽가」에서는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선 개인들의 다양한 대응을 파헤치는 등 한 작품 당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든다. 이런 분석 방식은 독자들 또한 차례차례 각 작품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파격의 고전』 은 주제별로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한 주제 안에서 여러 작품이 언급되기도 하고, 한 작품이 여러 개의 주제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가부장제 안의 모순이라는 주제 안에서 「사씨남정기」, 「김씨열행록」, 「장화홍련전」 등 여러 점의 고전 작품이 분석되고, 「심청전」이 효라는 윤리적 이념에 대한 도전과 공동체의 경제라는 두 가지 주제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런 분석 방식은 한 작품을 다양한 측면에서 탐구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 작품이 다루어지는 여러 개의 주제나 서로 연관성이 있는 주제들을 묶어 소단원으로 만들었다면 독자들이 더 유기적인 흐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개의 작품 두 개의 해석

 『파격의 고전』 의 서문에서 저자는 2004년에 처음 이 책을 구상했다고 밝힌다. 그러니 『파격의 고전』 이 2010년에 출간된 『전을 범하다』의 아이디어에 편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작품이 먼저 나왔을 때 나중에 나온 작품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편승한 아류로 취급당하기 쉽다. 이런 선입견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먼저 나온 작품의 의견을 뒤집거나, 먼저 나온 작품 못지않게 좋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것. 『파격의 고전』은 두 가지 전략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파격의 고전』은 『전을 범하다』의 고전 해석을 반박하거나 『전을 범하다』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측면들을 다룬다. 『파격의 고전』의 전체 페이지 수(517페이지)가 『전을 범하다』의 전체 페이지 수(285페이지)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책의 해석이 가장 뚜렷하게 갈라지는 작품은 「심청전」이다. 『전을 범하다』에서는 심청의 죽음을 '효라는 윤리적 이념을 위한 공동체의 희생 제의'로 보고 있다. 자신이 죽으면 눈먼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심청은 인당수에 뛰어들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의 희생으로 눈을 뜰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심 봉사도, 마을 사람들도, 심청을 친딸처럼 아끼던 장 승상댁 부인도 심청의 희생을 슬퍼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아비를 위해 딸이 죽을 수 있다는 희생의 당위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을 범하다』 의 저자는 심청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효라는 이념, 희생의 당위성에 저항하지 못하고 희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파격의 고전』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목적이 아니라 심 봉사 개인의 목적이기에 심청의 죽음을 공동체의 희생 제의로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공양미 3백 석은 상인들이 이익을 내기 위해 모은 거대한 잉여분이고, 심청이 속한 공동체로서는 이러한 막대한 물자를 대신 감당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심청이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심청의 죽음을 통해, 전통적인 공동체 내부로 침입한 상업 경제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렇게 같은 작품을 두고도 두 책의 재해석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도발적이고 발랄한 재해석 VS 인문학적 깊이를 지닌 재해석


  그러나 한 작품을 둘러싼 두 개의 해석 중 한 쪽만이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두 해석 모두 서로가 보지 못한 면들을 발견하면서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해석을 제공한다. 각 저자의 서로 다른 해석 방향은 두 책에 각각 다른 매력을 부여한다. 

『전을 범하다』 의 고전 재해석은 도발적이고 발랄하다. 『전을 범하다』의 저자는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어린 소녀가 목숨을 잃는 것이 선이라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폭력적인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장화홍련전」 에서 악역으로 몰린 계모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어느 한 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를 포착하고, 「춘향전」에서 춘향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순수한 사랑, 열녀라는 자긍심이라는 허울 아래 이기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권선징악이라는 해석의 틀 안에 '선'으로 규정되어 왔던 것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기존의 권선징악적 해석에 도전하는 것이다. 또한 알의 형상으로 태어났지만 알이라는 허물을 벗고 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김원전」과,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하찮은 악역 박명수의 캐릭터에서 하찮고 못난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재해석은 신선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하다. 

 반면 『파격의 고전』은 인문학적 깊이를 지닌 고전의 재해석을 추구한다. 저자는 집을 나가서 의적 활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왕의 신하로 인정 받으려 몸부림치는 홍길동의 모습에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라캉의 '인정욕망' 개념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기존 사회에 대한 반항아로 해석되어 왔던 것과 달리, 홍길동은 자신의 욕망를 규정하는 부모, 권위자, 법, 사회적 규범 같은 타자의 인정을 구하려는 욕망,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한 타자의 욕망인 인정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문학적 개념뿐 아니라  「심청전」과  「흥부전」 속 공동체 경제와 상품 경제의 대립,  「왕수재전」과  「전우치전」의 변신술이 보여주는 인간 세계의 질서와 그 질서 밖에 있는 외부 세계까지 저자는 경제학, 생태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러한 재해석을 통해, 저자는 기존의 고전 해석보다 더 풍부한 의미들을 고전에서 이끌어내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각각의 매력과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을 범하다』와 『파격의 고전』 중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거나 타당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각각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고전의 새로운 의미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쪽에서 다루어진 작품이 다른 한 쪽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또한 권선징악이라는 틀에 거침없이 도발하는 『전을 범하다』을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낀다면,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풍부한 의미들을 찾아내는 『파격의 고전』 을 읽으면서는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책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두 책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 고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한 쪽만을 추천하기보다는 두 책 모두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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