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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읽으면서 읽는다기보다는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 같이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도 내게는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600여 페이지니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보다는 감당해낼 만한 분량이다.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가 무한반복되는 복잡한 가계도도, 의외로 그렇게 헷갈리지 않는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졌어도 할아버지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아버지는 호세 아르카디오, 아들은 아르카디오라고 부르는 식으로 조금씩 다르게 부르니까. 게다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 교체가 되면서 선대 호세 아르카디오나 아우렐리아노가 퇴장하니,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나를 압도하는 것은 많은 분량이나 무한반복되는 같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 고독의 무게였다. 

  작품 속 주인공들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에게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전쟁 영웅도, 젊었을 때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도, 외국 문물을 흔쾌히 받아들여 현대화된 신세대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고독을 지녔고, 우르술라처럼 어떤 고난도 강인하게 이겨내며 가문을 이끈 사람도 결국에는 노쇠해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 그들 가족에게 가족애나 유대관계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각자가 지닌 고독을 뚫고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한 명씩 잊혀지고 사라진다. 


페르난도 보테로, <콜롬비아에서의 학살>, 2000.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묘사되는 콜롬비아의 잔혹한 근현대사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콜롬비아의 화가 보테로는 이 잔혹한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이들의 고독에는 이들의 조국 콜롬비아의 고독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 콜롬비아의 잔혹한 근현대사 속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도 깊어진다. 19세기 말부터 콜롬비아에서는 보수파와 자유파가 끊임없이 정쟁을 벌여왔고, 그로 인해 벌어진 내전에서 수십만 명이 죽어갔다. 이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사람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는 보수파가 투표를 조작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유파의 편에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념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전쟁을 하고, 원래도 고독하고 냉정했던 성품이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냉혹해진다. 대령의 조카손자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미국계 바나나 회사에 맞서 노동운동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3천 명이 정부군에게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난 뒤, 그는 트라우마로 인해 남은 평생을 집안에 틀어박혀 살게 된다. 죽은 노동자들의 시체로 가득찬 열차에서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자신 혼자 살아있음을 깨닫고 전율하는 장면은 우리의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 부엔디아 가문이 세운 유토피아였던 마콘도는 이렇게 내전과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과 착취를 겪으며 몰락해간다. 마콘도는 콜롬비아가 근현대사에서 겪었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무대이다. 

 마르케스는 환상과 현실을 자연스럽게 뒤섞으며 남미의 현실과 남미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한다. 신부가 코코아를 마시고 공중부양을 하고, 미녀 레메디오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불에 싸인 채로 승천한다. 그 와중에도 레메디오스의 올케인 페르난다는 레메디오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레메디오스가 걸치고 간 이불을 아까워한다. 비현실적인 사건들과 그 사건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심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어떤 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에 가려졌던 것을 보여준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수천 명이 정부군의 총에 쓰러지고, 그 시체를 실은 기차에서 탈출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무도 시위에서 죽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공식적인 기록 앞에서 그가 겪은 현실은 환상, 비현실로 전락한다. 약자들의 현실을 환상이나 비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역사의 승자들 앞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 마술적 리얼리즘은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미처 마지막 줄을 다 읽어내기도 전에, 그는 자기가 결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거울의 도시, 아니 신기루의 도시가, 바람에 날려 없어질 터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P. 460. (안정효 역)

 600여 페이지 내내 읽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았던 이 이야기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사라진다. 자기가 지닌 고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면서 더 깊어진 고독,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고독이 합쳐져, 누구도 그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마콘도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은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고독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자신과 시대가 만들어낸 고독의 무게를 전한다.

P. S 1. 안정효 역인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조구호 역인 『백 년의 고독』 을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면서 읽었다.  두 가지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읽느라 더 진이 빠졌다. 아무래도 영어판을 토대로 중역한 안정효 역보다는 스페인어 원서를 직역한 조구호 역이 더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안정효 역은 인물들의 이름에서 오류가 보인다.(계속해서 메메를 레메로, 레나타를 레난타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다만 조구호 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이사벨라 여왕으로 오역했다. 스페인 이름 이사벨라와 영어 이름 엘리자베스 모두 성녀 엘리사벳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런 오역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조구호 역은 작품 속의 소소한 상징까지 역주로 해설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다만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느껴지는 건 안정효 역이어서, 조구호 역의 문장이 너무 복잡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안정효 역을 참고했다. 조구호 역은 한 문장이 몇 페이지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원문 문장의 느낌을 살리려 했고, 안정효 역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읽히게 하려고 문장을 끊었기 때문일 것이다. 

P. S 2. 영상화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영화보다는 좀 더 긴 호흡으로 원작을 담을 수 있는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드라마 제작자나 연출자라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드라마화하는 데 도전해 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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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두 친구의 60여 년에 걸친 우정과 애증을 담은 소설 네 편을 출간했다. 두 친구의 어린 시절을 그린  첫 번째 책  『나의 눈부신 친구』, 젊은 시절을 그린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중년 이후의 삶을 그린『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나폴리 4부작'으로 불린다. 이 네 권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권『나의 눈부신 친구』는 주인공 레누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유명 작가인 레누는 66세가 되던 2010년,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던 릴라가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릴라와의 평생에 걸친 우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야기는 50여 년 전 둘이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권은 둘이 친구가 된 이후부터 성장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네 권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적고,  둘이 짊어진 삶의 무게도 성인 시절에 비하면 가볍기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마을에서의 폭력, 가난이 둘을 괴롭히지만, 다음 권들에서 나올 삶의 무게와 막장 드라마에 비하면 약과다.  지식에 목마르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레누와, 어린 시절부터 당돌하고 거침없었던 릴라의 모습에서 이후 둘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 짐작할 수 있다.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레누와 릴라는 성년이 된다. 레누는 고향 나폴리를 떠나  피사의 노르말레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반면 릴라는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지만 고향 마을에서 복잡한 애정과 원한 관계에 얽히며 자기 나름대로의 전쟁에 임한다. 이야기는 둘의 이야기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 유럽을 휩쓸었던 청년 운동, 정치 개혁, 페미니즘 운동으로 확장된다. '새로운 이름'은 둘이 결혼을 하면서 얻은 새로운 이름(남편의 성)일 수도, 둘이 어른이 된 이후로 보고 듣고 겪는 새로운 것들일 수도 있다. 


  3권『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레누와 릴라의 삶이 더욱 더 복잡해진다. 둘은 여성으로서 커리어, 출산, 육아, 결혼생활, 애정관계에서 끝없는 난관에 부딪친다. 막장드라마와 다를 게 없는 복잡한 상황들에 독자까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레누와 릴라는 항상 현명하지 않고 어리석은 결정들도 내린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이제 이야기는 둘의 30대, 중년을 지나 레누가 릴라와의 우정을 회상하기 시작하던 2010년대로 돌아온다.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를 넘어 나폴리, 이 세상의 온갖 기쁨과 슬픔, 부조리함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됐던 이야기는 다시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폴리 4부작'의 장점은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사는 내버려두고 한없이 내면으로 가라앉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소설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가 주인공의 절친과 동거하고 주인공의 시누이가 주인공의 구남친과 사귀며, 주인공은 불륜에 빠져 앞뒤 안 가리는 막장드라마가 펼쳐지지만, 막장드라마만큼이나 흡인력이 뛰어나다. '나폴리 4부작'은 60여 년에 이르는 긴 이야기인 만큼 네 권의 분량을 합치면 2400여 페이지에 이른다. 그럼에도 내가 4권 모두를 읽는 데 일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기만 하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호평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장점은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섬세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많은 창작물들이 여자들의 우정이 깨지는 이유가 남자 문제인 것으로 묘사한다. 레누와 릴라 사이에 남자 문제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 문제는 레누와 릴라 사이의 기나긴 애증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레누는 평생 동안 릴라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릴라는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며, 사람들을 자기가 뜻한 대로 이끄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녔다. 글재주 또한 전문 작가인 레누 못지 않다. 아니, 레누가 오히려 릴라의 타고난 글재주를 부러워할 정도이다. 레누는 릴라를 본보기로 자신을 늘 갈고 닦아 훌륭한 작가가 되지만, 늘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제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릴라가 레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지 보이는데, 정작 레누는 열등감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4권 내내 둘이 서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는 모습은 우리가 친구들과 겪었던 우정과 애증을 떠올리게 하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 소설은 둘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을 녹여낸다. 노골적으로 정치적 이념이나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에게 주입하려는 소설보다, 등장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당시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소설이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을 더 와 닿게 한다.  그런 점에서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를 좋아하는데, '나폴리 4부작' 역시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이탈리아는 가부장제와 남성 과시적인 문화가 강한 나라이고, 레누와 릴라도 가부장제의 폭력에서 자유롭게 못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잘사는 북부 지방과 못하는 남부 지방의 대립이 심하며, 가난하고 낙후된 남부 지방을 대놓고 못마땅해하는 극우정당이 종종 득세하는 북부 지방과 달리, 남부 지역에서는 공산당과 좌파정당이 득세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주요 캐릭터들의 고향은 남부 지방인 나폴리이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다.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청년들의 반체제 운동인 68 운동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이탈리아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레누 역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된다. 대학교에서 68 운동을 접한 레누와는 달리, 공장 노동자로서 힘겹게 살아가던 릴라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하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갖추게 된다. 둘의 삶을 통해 우리는 1950년대 이후부터의 나폴리, 더 나아가 유럽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소설에서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도,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더 섬세하게 그려주기를 기대하는 독자도,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기를 기대하는 독자들도 만족할 수 있는 소설이다. 2천 페이지가 넘는 긴 여정이 되겠지만, 여정을 마치고 나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여정은 아니겠지만, 두 친구와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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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콘셉트와 내용이 겹치는 책들이 종종 보인다. 얼마 전에 일본 작가 나카노 교코가 화가들의 유작을 소개하는 책『내 생애 마지막 그림』을 읽었는데, 한국 작가 이유리가 화가의 유작을 소개하는 책『화가의 마지막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확히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고, 어느 쪽이 다른 한 쪽을 모방했다고 단정짓고 싶지도 않다. 그저 두 책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비교해 보고 싶었다. 나는 참 비교하기를 좋아하니까.


(위) 반 고흐의 유작으로 흔히 알려진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아래) 네덜란드의 반 고흐 연구자들이 밝혀낸 유작 <나무 뿌리>(1890)


 두 책 모두가 다루는 화가가 둘 있는데, 한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산드로 보티첼리이다. 공정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화가 반 고흐에 대한 태도에서『화가의 마지막 그림』『내 생애 마지막 그림』보다 훨씬 좋은 인상을 주었다. 나카노 교코는 조금만 검색하면 나올 정보들만 나열하면서 반 고흐에 대한 경멸과 짜증을 숨기지 않고,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이라는 통설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반면 이유리는 네덜란드 연구자들이 2012년에 발표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아니라 <나무 뿌리>가 반 고흐의 유작이라는 근거를 꼼꼼하게 제시한다. 어조에서나 반 고흐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보여주는 열정에서나 반 고흐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느껴진다. 반 고흐의 팬으로서는 당연히 이쪽이 더 끌릴 수밖에 없다.


(위) 산드로 보티첼리, <아펠레스의 모략>, 1494. 

(아래) 산드로 보티첼리, <신비한 탄생>, 1501.


 반면 보티첼리 관련 장에서는 각 화가에 대해 좀 더 깊이 분석하는『내 생애 마지막 그림』의 장점이 돋보인다.『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화가의 마지막 그림』보다 다루는 화가의 수가 적기도 하고, 소단원의 서문마다 화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보충설명해, 화가가 살던 시대, 화가의 전반적인 삶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두 책 모두 광신적인 설교자 사보나롤라에게 감화된 이후 보테첼리가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화가의 마지막 그림』이 <신비한 탄생>(1501)을 통해 단순히 보티첼리가 종교적 주제에 몰두했다는 것만 이야기하는 반면,『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 <아펠레스의 모략>(1494) 속 딱딱하게 그려진 누드를 통해, 보티첼리가 종교적 열정과 금욕적인 자세 때문에 원래의 자연스럽고 우아한 누드를 잃어버린 것까지 이야기한다. 화가의 삶과 그가 산 시대를 소개하는 측면에서는『내 생애 마지막 그림』의 내용이 좀 더 풍성하다. 


마크 로스코, <무제>, 1970. 로스코의 시신이 발견됐을 당시 화실에 이 작품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가의 마지막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는『화가의 마지막 그림』의 두괄식 구성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화가의 마지막 그림』의 거의 모든 챕터는 화가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마크 로스코의 시신이 발견된 화실에 걸려 있었던 유작 <무제>(1970), 에곤 실레 자신이 아내와 같은 전염병으로 죽기 며칠 전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죽기 직전의 에디트 실레>(1918), 아내와 함께 세상에게 보내는 고별인사 같은 에드워드 호퍼의 유작 <두 코미디언>(1976) 등 화가의 마지막 이야기가 담긴 작품들은 시작부터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화가의 마지막 작품과 최후를 보여주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다시 화가의 마지막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는 구성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화가의 마지막'을 더욱 강렬히 전달한『화가의 마지막 그림』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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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 일본에서 한 포르투갈 선교사가 배교했다그 소식을 듣고 또 다른 선교사가 일본에 찾아 왔지만 그 또한 배교하고 일본에 귀화했다사실관계만으로 따져보면 그들은 배교자들이다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을까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된 작품이다작가는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관찰자적 시점과 전지적 시점을 넘나들며 열의 넘치는 선교사였던 그들이 어떻게 배교하게 되었는지배교한 뒤의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는지 그들의 심리적 여정을 따라간다주인공의 심리적 여정에 따라 어떻게 서사 방식이 바뀌는지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작품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역사서처럼 페레이라 신부와 그가 겪은 박해그리고 로드리고 신부가 어떻게 페레이라 신부를 따라가게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서술한다그 안에 페레이라 신부가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가 삽입되어 있다작가의 객관적 서술이 페레이라와 로드리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이들의 여정이 시작된 계기를 독자들에게 설명해 준다면페레이라의 편지는 일본에서의 박해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이러한 복합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이 로드리고의 육체적 여정과 심리적 여정을 머리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1장에서부터 4장까지는 로드리고의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로드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다로드리고의 편지는 그가 마을 주민 기치지로의 밀고로 체포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로드리고가 체포된 이후인 5장부터는 로드리고가 화자인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뀌어 로드리고의 심리를 묘사한다두 부분 모두 로드리고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는데왜 굳이 서로 다른 시점으로 서사를 진행했을까

  로드리고가 체포되기 전까지 독자들은 로드리고의 시점 안에서만 상황을 바라볼 수 있다독자들은 젊고 미숙한 사제 로드리고와 함께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상황들을 거치게 된다로드리고는 체포된 뒤 이노우에 부교와 통역관배교한 페레이라를 만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그리고 페레이라가 처했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이 때 화자가 전지적 작가로 바뀌면서독자들도 로드리고의 시점으로 볼 때보다 좀 더 폭넓게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어떤 일이 있어도 배교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로드리고는페레이라처럼 배교를 해야 신도들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다그가 자신의 신념 대신 사랑을 택하자 신은 침묵을 뚫고 그에게 목소리를 들려준다그가 자신의 좁은 시야에 갇혀 있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이렇게 로드리고의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작품 속 사건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야도 넓어지게 되고로드리고와 함께 새로운 사실들을 직면하면서 배교에 이르게 되는 그의 심리에 공감하게 된다

  로드리고가 배교하기까지그리고 배교한 이후에도 그의 내면 변화에 집중하던 서사는 두 곳에서 로드리고와 거리를 두고 겉으로 보이는 그의 상황만을 관찰한다하나는 일본을 찾은 네덜란드 상인의 시점에서 배교한 로드리고가 페레이라와 함께 일본 정부의 천주교 탄압 정책을 돕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네덜란드 상인 요나센의 일기이 부분에서 그들을 일본 정부에 영합해서 살아가는 비루한 배교자로 보는 타인의 시선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 뒤로 로드리고와 기치지로의 대화로드리고와 신의 대화가 이어지면서로드리고의 내면의 진실이 드러난다로드리고의 심리에 가까이 다가갔던 시점은 마지막 부분인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에서 또 다시 거리를 두고 로드리고를 관찰한다실제 역사 기록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이 부분은 로드리고의 내면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 사실 관계만 전달한다그로 인해 독자들은 로드리고의 내면에 감정이입하는 대신신의 시점에서 그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신앙을 지키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와 같이 작가는 서사 방식의 변화를 통해 독자들을 로드리고의 심리적 여정으로 인도하고로드리고의 심리적 여정을 함께 경험하게 하고때로는 신의 시점에서 로드리고를 지켜보게 한다이렇게 복합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침묵은 로드리고에게 감정이입하는 시점이나 그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시점 중 하나만으로는 볼 수 없었던 로드리고의 내면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은  침묵의 한국어 번역본들에 실리지 않았다. 실제 역사 기록을 등장인물 이름만 바꾼 채 거의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소설의 일부가 아닌 참고자료로 착각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대신 침묵의 해설서인  침묵의 소리』에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 전문이 실려 있어, 그 책을 통해 읽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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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우리 고전 소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책 『파격의 고전』이 출간되었다. 익숙한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책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6년 전에 이미 권선징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전을 범하다』가 출간되었다. 두 책 모두 기존의 해석과 권선징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선으로 고전을 바라본다.  두 책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우리 고전을 재해석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작품별 분석 VS 주제별 분석


우선 『전을 범하다』는 한 챕터에 한 작품씩 작품별로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장화홍련전」 에서는 체제 자체의 문제점을 계모 한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가부장제의 실상을,  「적벽가」에서는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 선 개인들의 다양한 대응을 파헤치는 등 한 작품 당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든다. 이런 분석 방식은 독자들 또한 차례차례 각 작품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파격의 고전』 은 주제별로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한 주제 안에서 여러 작품이 언급되기도 하고, 한 작품이 여러 개의 주제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가부장제 안의 모순이라는 주제 안에서 「사씨남정기」, 「김씨열행록」, 「장화홍련전」 등 여러 점의 고전 작품이 분석되고, 「심청전」이 효라는 윤리적 이념에 대한 도전과 공동체의 경제라는 두 가지 주제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런 분석 방식은 한 작품을 다양한 측면에서 탐구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 작품이 다루어지는 여러 개의 주제나 서로 연관성이 있는 주제들을 묶어 소단원으로 만들었다면 독자들이 더 유기적인 흐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개의 작품 두 개의 해석

 『파격의 고전』 의 서문에서 저자는 2004년에 처음 이 책을 구상했다고 밝힌다. 그러니 『파격의 고전』 이 2010년에 출간된 『전을 범하다』의 아이디어에 편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작품이 먼저 나왔을 때 나중에 나온 작품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편승한 아류로 취급당하기 쉽다. 이런 선입견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먼저 나온 작품의 의견을 뒤집거나, 먼저 나온 작품 못지않게 좋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것. 『파격의 고전』은 두 가지 전략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파격의 고전』은 『전을 범하다』의 고전 해석을 반박하거나 『전을 범하다』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측면들을 다룬다. 『파격의 고전』의 전체 페이지 수(517페이지)가 『전을 범하다』의 전체 페이지 수(285페이지)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책의 해석이 가장 뚜렷하게 갈라지는 작품은 「심청전」이다. 『전을 범하다』에서는 심청의 죽음을 '효라는 윤리적 이념을 위한 공동체의 희생 제의'로 보고 있다. 자신이 죽으면 눈먼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심청은 인당수에 뛰어들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의 희생으로 눈을 뜰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심 봉사도, 마을 사람들도, 심청을 친딸처럼 아끼던 장 승상댁 부인도 심청의 희생을 슬퍼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아비를 위해 딸이 죽을 수 있다는 희생의 당위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을 범하다』 의 저자는 심청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효라는 이념, 희생의 당위성에 저항하지 못하고 희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파격의 고전』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목적이 아니라 심 봉사 개인의 목적이기에 심청의 죽음을 공동체의 희생 제의로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공양미 3백 석은 상인들이 이익을 내기 위해 모은 거대한 잉여분이고, 심청이 속한 공동체로서는 이러한 막대한 물자를 대신 감당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심청이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심청의 죽음을 통해, 전통적인 공동체 내부로 침입한 상업 경제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렇게 같은 작품을 두고도 두 책의 재해석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도발적이고 발랄한 재해석 VS 인문학적 깊이를 지닌 재해석


  그러나 한 작품을 둘러싼 두 개의 해석 중 한 쪽만이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두 해석 모두 서로가 보지 못한 면들을 발견하면서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해석을 제공한다. 각 저자의 서로 다른 해석 방향은 두 책에 각각 다른 매력을 부여한다. 

『전을 범하다』 의 고전 재해석은 도발적이고 발랄하다. 『전을 범하다』의 저자는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어린 소녀가 목숨을 잃는 것이 선이라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폭력적인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장화홍련전」 에서 악역으로 몰린 계모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어느 한 대상에게 전가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를 포착하고, 「춘향전」에서 춘향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순수한 사랑, 열녀라는 자긍심이라는 허울 아래 이기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권선징악이라는 해석의 틀 안에 '선'으로 규정되어 왔던 것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기존의 권선징악적 해석에 도전하는 것이다. 또한 알의 형상으로 태어났지만 알이라는 허물을 벗고 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김원전」과,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하찮은 악역 박명수의 캐릭터에서 하찮고 못난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재해석은 신선하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하다. 

 반면 『파격의 고전』은 인문학적 깊이를 지닌 고전의 재해석을 추구한다. 저자는 집을 나가서 의적 활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왕의 신하로 인정 받으려 몸부림치는 홍길동의 모습에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라캉의 '인정욕망' 개념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기존 사회에 대한 반항아로 해석되어 왔던 것과 달리, 홍길동은 자신의 욕망를 규정하는 부모, 권위자, 법, 사회적 규범 같은 타자의 인정을 구하려는 욕망,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한 타자의 욕망인 인정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문학적 개념뿐 아니라  「심청전」과  「흥부전」 속 공동체 경제와 상품 경제의 대립,  「왕수재전」과  「전우치전」의 변신술이 보여주는 인간 세계의 질서와 그 질서 밖에 있는 외부 세계까지 저자는 경제학, 생태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러한 재해석을 통해, 저자는 기존의 고전 해석보다 더 풍부한 의미들을 고전에서 이끌어내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각각의 매력과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을 범하다』와 『파격의 고전』 중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거나 타당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각각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고전의 새로운 의미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쪽에서 다루어진 작품이 다른 한 쪽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또한 권선징악이라는 틀에 거침없이 도발하는 『전을 범하다』을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낀다면,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풍부한 의미들을 찾아내는 『파격의 고전』 을 읽으면서는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책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두 책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 고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한 쪽만을 추천하기보다는 두 책 모두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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