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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라고 하면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적지가 떠오른다. 30여 년 동안 스테디셀러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때문에 이런 인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답사기'라는 제목대로, 이 책의 저자가 찾아간 곳은 근대 이전에 조성된 유적이 아니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거리 구석구석이다. 저자는 왜 이름난 유적이 아닌 일상적인 장소를 답사하는 걸까?

그곳에 우리,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궁궐이나 석탑, 산성 같은 유적지들은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머나먼 과거의 모습을 전하는 존재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영광을 자랑하거나 지키기 위해 만든 경우가 많다. 반면 예전의 행정구역명으로 적혀 있는 표지판이나 문패, '(구 ㅁㅁㅁ)' 같은 식으로 과거의 지명을 또 다른 이름으로 달고 있는 버스 정류장 등 '도시의 화석'은 아주 가까운 과거,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낸 과거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수용소'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데, 이들 지명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수용소가 있던 곳의 흔적이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공인한 전자와 그렇지 못한 후자 모두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이지만, 정부에서나 평범한 국민들이나 전자만을 기억하고 기린다. 게다가 재개발과 재건축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이 땅에서 불과 2, 30년 전의 건물들도 헐려서 사라진다.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보존될 길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현대의 유적과 유물을 우선 답사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저자는 몇 년째 이 현대 한국 답사를 계속해 오고 있고, 거기서 직접 확인하거나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꾸준히 칼럼과 책으로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답사가 자신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대 도시를 답사하는 방법'을 1권의 1부로,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국가와 지배 집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을 이끌어 가기 위해, 거기에 유리한 것만 널리 알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감추거나 없앤다. 그렇기 때문에 답사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나라와 지역을 바라보는 주체적인 관점을 기르는 것이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자신의 활동을 응원하고 동참할 것을 믿기에, 그는 독자들을 '동료 시민'이라 부른다.

'답사 방법'이라고 해서 전문적이거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간판부터 화분, 장독대 같은 일상 풍경의 일부부터 문화주택, 공동주택, 개량 기와집, 아파트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주택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까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맞춤법과 글씨체를 통해 그 간판이 만들어진 시대와 지역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고, 자투리 공간에까지 독특한 무늬를 넣은 계단이나 대문, 창틀을 통해 평범한 시민의 예술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재개발로 인해 수년, 수십 년 동안 운영해 온 가게 문을 닫은 사람들이 남긴 폐업 인사에서 그들이 겪은 경제난과 한숨을 읽어낸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흔적, 역사를 사진과 글로 우리에게 전한다. 이들을 이야기할 때의 저자의 시선과 어조는 더없이 따뜻하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했던 역사, 기억하지 않으려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누구보다 단호하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보다 더 취약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에게 가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성 노동으로 외화 벌이에 일조했지만 '양공주'로 손가락질당했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 직원들의 손에, 새로 정착해서 살아가려고 한 땅의 주민들에게 살해당한 한센병 환자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누린 한국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베트남 난민들. 동료라 믿었던 남성 노동자들과 남성 지식인들에게도 외면당하고 국가의 폭력을 겪어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국가가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들을 외면하고 기억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시민들도 그들을 핍박하고 차별하고 잊어버렸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런 우리 안의 치부를 잊지 말고 직시하길 요구한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권리를 누릴 때 이 나라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국을 답사하고 독자들도 현대 한국 곳곳을 답사하길 바라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자신이 남성이고 지식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전할 통로가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과거의 남성 지식인들이 빠졌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경계한다. 남에게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하기에, 잊혀가는 역사, 평범한 사람의 역사, 약한 사람의 역사를 향한 그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다.

때때로 이런 역사들은 너무 참혹하고 비극적이어서 장엄한 유적, 영광스러운 역사로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역사는 우리 자신의 역사고,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기억해 주지 않는다. 현대 한국 답사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무심코 지나친 것들에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좀 더 찾아보고, 생각해 보고 기억하면 된다. 그 작은 발걸음에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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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7 0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발걸음이 진정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바스티안 2024-03-27 08:33   좋아요 0 | URL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약한 사람들의 역사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저자의 주장에 머리를 맞은 듯했고, 전국을 직접 발로 밟으면서 작은 흔적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수고에 숙연해지더라고요. 제가 했던 답사들도 유명한 문화유산들을 방문하는 거여서 이런 관점으로는 생각 못 했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더 주의 깊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어떤 역사가 남겨져 있을지 모르니까요.

호시우행 2024-03-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시덕 저자를 기억하려합니다.

바스티안 2024-03-27 18:1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문체에서나 독자들을 ‘동료 시민‘으로 부르는 데서나 단체나 국가 이름은 꼭 공식 명칭으로 불러주는 데서나 세심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저도 이분을 기억하려고 해요.
 

 '그대'라는 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데 대중가요에서는 왜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 '햅쌀'은 '쌀'이라는 명사에 '그해에 난'이라는 뜻의 접두사 '햇-'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인데, 왜 '햇쌀'이 아니라 '햅쌀'일까? '케첩'이 원래 중국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상적인 말들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우리 삶 속의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매일 듣는 노래에도, 매일 먹는 음식에도 숨어 있다. 여기, 일상적인 단어들에서 우리가 몰랐던, 또는 너무나 당연해서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책들이 있다. 



1920년대 초 유성기 음반으로 유행가가 발매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는 한 세기에 가깝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삶과 사랑, 시대의 단면들은 크게 달라졌고, 그에 따라 대중가요에서 쓰이는 말들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대중가요에서 쓰이는 말들의 변화를 통해 한 세기 동안 우리 대중가요를 듣고 부르던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음반으로 발매된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알려진 <희망가>가 나온 1923년 이후 조사 작업이 이루어진 2016년까지 나온 26000여 곡의 가사를 분석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가사 속에 특정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빈도를 알아보고, 전체 말뭉치(언어 연구를 위해 컴퓨터가 읽고 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언어 자료)에서 그 단어들이 나타나는 빈도와 비교해 보았다. 왜 이 단어가 특히 노래 속에 자주 등장하는지, 일상에서보다 노래에서 자주 쓰이는지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대'와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지만 노래에서는 자주 등장하는데, 1990년대 이후로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너'라는 2인칭대명사가 점점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손위의 남자 형제'가 아닌 '연인'이라는 의미의 '오빠'는 2000년대에나 처음 등장한다. 술이 등장하는 노래 가사에는 '한 잔'이라는 단어가 따라 들어갈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이유를 알아보면서 우리는 노래 속에 담긴 우리 삶의 모습과,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노래의 언어』의 저자가 『노래의 언어』를 쓰기 2년 전에 냈던 책이다. 『노래의 언어』가 가사 속 단어들의 빈도라는 수학적 통계를 활용한 반면,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는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그 어원을 언어학적으로 파헤친다. 하지만 노래 속 단어들이든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들이든 그 안에 담긴 우리 일상의 단면들을 살펴보고, 그 일상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살펴보고 있으니 『우리 음식의 언어』는 『노래의 언어』로 이어지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 음식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밥에서부터 시작해서 빵, 국수, 국, 채소, 고기 반찬, 생선 반찬, 후식까지 우리 음식을 종류별로 나눈 뒤 그 안에 속하는 음식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말들과 관련된 언어학적인 지식도 흥미롭지만, 음식 자체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지식까지 얻을 수 있어 더 흥미롭다. 중간 중간에 저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 음식의 언어를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세 책 중 가장 나중에 읽었지만 사실은 가장 먼저 출간된 책이다. 『우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 한성우 교수는 『우리 음식의 언어』를 쓰면서 『음식의 언어』를 알게 되었고, 동업자에게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그 동안 연구해 온 것을 빨리 결과물로 엮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직접 읽어보니 한성우 교수가 자극을 받았을 만하다.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에 가려면 몇 개월씩 길고 지루한 항해를 해야 했던 그 옛날에도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멀리, 더 넓게 퍼져나가며 각각의 나라에 맞는 형태로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저자 댄 주래프스키는 케첩, 피시 앤 칩스, 칠면조, 마카롱 등 우리 주변의 음식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느 나라들을 거쳐 지금의 모습과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흥미 있게 풀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 음식의 세계 문화사가 담겨 있다.


  너무나 흔한 음식이지만 오래된 세계사를 품고 있는 음식이 케첩이다. 케첩은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중국 푸젠성으로 이어진 생선 소스에서 유래했고, '케첩'이라는 명칭도 그 소스를 가리키는 푸젠성 방언에서 온 말이다('케'는 정확한 한자를 찾지 못했지만 '첩'은 한자 '즙(汁)'의 푸젠성 방언, 광둥어 발음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중국 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영국 선원들은 이국적이고 자극적인 소스 케첩을 좋아하게 되었고, 케첩은 영국에 수입되면서 조리법이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그러면서 주 재료인 생선이 빠지고 버섯, 호두, 토마토 등 원래 부 재료였던 것들이 주 재료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 중에서도 토마토가 케첩의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고, 미국의 케첩 제조 회사들이 설탕과 식초를 더 많이 넣어 케첩의 저장성을 높이면서 토마토 케첩은 지금과 같이 새콤달콤한 맛이 되었다. 이렇게 케첩 하나만 들여다봐도 세계 경제와 무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와 관련된 문화사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음운학을 통해서도 음식의 언어를 들여다본다. 고급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내는 음식이 진짜 재료를 쓴 좋은 음식이라고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알기에, 메뉴에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반면 중간 가격대의 식당들은 손님들에게 자신들이 내온 음식이 진짜라는 확신을 주고 싶어서 '진짜'라는 것을 강조하고 맛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수식어를 붙인다. 바삭바삭함이 생명인 크래커의 제품명들에는 삐죽삐죽한 느낌을 주는 자음인 T와 D가 많이 들어가지만,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을 강조해야 하는 아이스크림의 제품명들에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자음 L과 M이 많이 들어간다.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음식과 그에 관련된 언어를 다양한 학문들로 풀어내고 있으니, 단순히 '문화사'가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한국 독자로서는 한국 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수 있다. 아랍의 알코올 증류법에서 기원한 각 나라의 토산 증류주들은 '땀'이라는 뜻의 아랍어 '아라크'에서 유래한 이름들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의 전통 증류식 소주는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들어와 '아라길주'라고 불렸고, 지금도 전통 소주 제품들 중 '아락'이라는 말이 제품명에 들어간 것들이 여럿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소주도 저 멀리 아랍 지역에서 기원해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개발된 발효된 콩 반죽이 일본의 미소 된장의 선조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그 중간에 있을 한국 된장은 왜 언급도 되지 않는지. 내가 한성우 교수고 『우리 음식의 언어』를 쓰기 전 이 책을 봤다면 우리 음식과 그에 관련된 언어만 집중해서 살펴보는 책을 쓰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내게 교정교열 일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은 하루에 국어사전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분의 말처럼 언어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쌓아온 다양한 분야의 다채로운 지식과 지혜가 녹아 있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들에 어떤 역사와 문화, 지식들이 녹아 있는지 살펴본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지식을 쌓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 #언어, #인문학, #음식, #노래, #대중가요, #문화사,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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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왔을 때 부모님이 '내 자식이 빨갱이라니'라고 한탄하실까 봐, 부모님이 보시지 않는 곳에 책을 두었다. 지금 정부 편을 들었다고 '얘가 좌파가 다 됐네'라고 말씀하시던 분들이니. 그분들에게 공산주의는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무너뜨리는 몹쓸 것일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인지는 알지 못하신다. 나도 진보 성향이라면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을 뿐이고, 『공산당 선언』을 그때까지도 읽어보지 않았었다. 너무 늦었지만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이 고전을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그 유명한 첫 구절을 지나 바로 다음 문단에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인가 싶은 부분이 나와 놀랐다.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 p. 15.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로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은 야당이 있었던가. 반대파에게 '빨갱이'라는 비난을 퍼부은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이 비난하는 반대파가 실제로 어떤 정치적 노선을 지니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저자들이 마치 먼 나라의 미래까지 들여다본 듯해 오싹하기까지 했다.


  페이지를 넘기니 지금의 이야기인가 싶은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온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냥 해맑던 내가 어른이 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게 되면서 느낀 자본주의의 비정함은, 백여 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부르주아들)은...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경건한 광신, 기사의 열광, 속물적 애상의 성스러운 전율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 속에 익사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고, 문서로 확인되고 정당하게 획득된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 자유로 대체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들로 은폐된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 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이제까지 존경받으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모든 직업에서 그 신성한 후광을 걷어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을 자신들에게서 돈을 받는 임금 노동자로 바꿔놓았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졌던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찢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 관계로 전환시켰다." -p. 18~1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과 인간 관계의 본질을 변질시키는지 문학적인 문장들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자본주의 비판 중에서도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다'는 말이 특히 뼈저리게 와 닿는다. 나 자신이 잘 팔리지 않는 상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면접 때마다 나의 상품 가치를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면접관은 나보다 상품 가치가 더 높아 보이는 지원자를 선택한다. 그때마다 다시는 팔리지 않아 아무 데도 쓰이지 못한 채 영영 한구석으로 밀려나서 잊힐까 두렵다. 운이 좋아 내 노동력을 사는 사람이 나타나도, 나보다 더 적게 받고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며 불평하지 않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까 걱정한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데 나 자신이 존엄하다고 주장해도 누가 그걸 믿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교환 가치에 따라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해관계, 금전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 붕괴할 가능성을 품고 있어 더욱 위험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대한 생산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를 '자신이 주문을 외워 불러낸 괴물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마법사'에 비유한다.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깨지는 경제 공황은 사회 전체를 위기와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승리할 것이라는 그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경제 공황은 자본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 체제가 필요하지 않은지 의문을 품게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전해 온 과정을 설명한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에 쏟는 비난들을 하나하나 반박한다.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려는 데 경악하지만,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사적 소유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이라고.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세상에는 게으름이 만연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노동하지 않으면서 얻기만 하는 부르주아 사회는 진작에 끝장났어야 했다고. 공산주의자들이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부인을 생산 도구로만 보기에 생산 도구를 공유하자는 주장을 부인 공유제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성을 희롱하고 결혼을 했어도 부정을 저지르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부도덕하다고 분개하는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정작 공산주의자들은 부인들이 단순히 생산 도구로만 여겨지는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려고 하고 있다.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신성한 가족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을 착취하도록 방치하고 아이들을 노동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그들이다. 이렇게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뒤집어 당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철저히 현실에 입각해 사상을 펼쳐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병폐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해결책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이들이 이야기하는 조치들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체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정책들 중에는 전체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는 것들(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노동 강제, 국가의 수중에 운송 제도 집중 등)이 있다. 실제로 이후에 세워진 공산주의 국가들 중 말로만 공산주의이지 실제로는 전체주의가 되어버린 국가들도 많다. 


  하지만 고율의 누진세, 모든 아동의 무상 공공 교육, 모든 아동의 공장 노동 폐지 등 이들의 대안 중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거나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들도 있다. 여성들을 아이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에서도 페미니즘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의 이상향은 모든 사람들의 뜻을 일치시키는 획일화된 사회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대였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발전시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낸다. 


『공산당 선언』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고 지금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낡아버렸다. 하지만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정신, 가족 제도, 사회 질서 등 기존의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기보다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게 하기 위해 싸우려 했던 투쟁 정신은 아직도 생생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낡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기 전 영국의 만화가 마틴 로슨이 그린 만화 버전 『공산당 선언』을 미리 읽어 보았다. 내가 읽은 책세상판 『공산당 선언』이 독일어 원문을 번역한 반면, 이 만화 버전은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가 직접 감수한 1888년 영어판을 번역한 것이라니, 번역의 신뢰도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처음 『공산당 선언』을 읽은 나와 달리, 로슨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눈에 『공산당 선언』은 얇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포괄하며 엄청난 권능을 지닌 책이었다. 그는 이때 받은 강렬한 인상을 수십 년 뒤 만화로 그려냈다. 


마틴 로슨의 만화 버전 『공산당 선언』에서 타이프라이터와 변기가 합쳐진 모습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얻어낸다. 종교조차 자본주의 앞에 힘을 잃은 현실을, 자본주의 앞에서 달아나는 성직자들로 묘사했다.


 페이지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지옥도가 넘실댄다. 타이프라이터 머리를 단 변기로 묘사되는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노동자들을 갈아내고 쥐어짜며 이윤을 얻어낸다. 노동자들은 아예 팔다리가 방직기의 나무 틀로 변해 버려 인간 기계가 되어버렸다. 강물은 노동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지옥도를 누비면서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대사는 『공산당 선언』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대사 곳곳에 주석을 꼼꼼히 넣었다. 글자가 워낙 작아 대충 읽다가는 주석 표시를 놓칠 수 있다.


부르주아들 앞에서 스탠딩 코미디 쇼를 하는 마르크스는 온갖 야유와 아우성 속에서도 꿋꿋하게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부르주아들의 비난에 반박하는 내용은, 어느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쇼를 하는 마르크스와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부르주아들로 각색했다. 이 만화에서 가장 박진감 있는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앞에서 아우성치는 부르주아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열변을 토한다. 부르주아들이 아내를 단순한 생산 도구로 간주한다는 부분에서는 공장의 기계가 되어 말 그대로 아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 위 컷에서는 아이들이 상품처럼 가득 실린 상자가 그려져 있고, 그 상자에는 '애새끼 제조 회사'라고 적혀 있다. 부르주아들의 성적 타락과 위선을 비판하는 다음 장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부르주아에게 성추행당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은 거리낌 없이 세상의 추악함을 그려내는 그림체 덕분에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강력한 마지막 구절로 마무리되고, 로슨은 그 구절과 함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노동자들을 이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그려넣는다.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로슨의 만화는 이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화는『공산당 선언』이후의 모습까지 묘사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은 세월의 풍파를 겪어 녹아버렸고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머리만 PC로 바꿔 단 채 노동자들을 페이스북으로 현혹시킨다. 거리에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이 낡은 스피커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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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난생 처음 한 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클래식 음악에 관심 있어?

B: <베토벤 바이러스할 때 잠깐 클래식에 빠졌었는데 지금은 그때만큼 좋아하지 않아사실 클래식 음악이어서가 아니라 이 시리즈 자체를 좋아해서 읽게 됐어.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한다는 제목을 줄여서 난처한’ 시리즈라고 부르는 인문 교양서인데너무 얕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아서 좋아해.

H: 난 좀 더 어려운 책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 책에도 호기심이 생기네.




H: 글씨가 두 가지 색으로 인쇄되어 있는 게 특이해.

B: 가상의 청자와 저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거든그래서 독자는 청자에게 이입해서 저자에게 직접 클래식 강의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대사 색깔이 서로 다르니까 청자와 저자의 대사를 구분하기도 쉽고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더 강해지고.



H: 그러네그런데 페이지 중간 중간에 있는 스피커 표시랑 QR 코드는 뭐야?

B: 포털사이트 QR 코드 검색이나 QR 코드 인식기 어플로 이 QR 코드를 인식하면그 QR 코드에 해당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페이지로 연결돼스피커 표시 아래에 숫자 보이지?



B: 시리즈 공식 사이트가 있어서음악 듣기 게시판에 가면 숫자 차례대로 스피커 표시가 되어 있는 음악들을 들을 수 있어.

H: 음악에 대한 책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직접 듣게 한다니괜찮은 아이디어네종이로 인쇄된 책을 QR 코드로 온라인 콘텐츠와 연결한다는 발상도 기발하고.



B: 사실 QR 코드로 음악 링크를 연결해서 직접 음악을 듣게 할 수 있게 한 건 이 책이 처음이 아냐몇 년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클래식 노트』 라는 책에서 이미 시도했었어.

H: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리즈를 만든 사람들이 처음 생각해낸 건 아니었구나.

B: 이 책이 후발주자이긴 한데음원 링크 관리에서는 『클래식 노트』보다 낫다고 생각해『클래식 노트』는 유튜브에 있는 영상 링크를 활용하다 보니그 영상이 저작권 문제 때문에 삭제되면 음악을 들을 수 없거든그래서 지금은 연결되지 않는 링크가 꽤 많아그런데 난처한’ 클래식 수업 시리즈는 음원 링크가 모두 나오는지 관리하고 있더라고일단 내가 읽었을 때는 모든 음원 링크가 제대로 나왔어.

H: 이런 새로운 시도들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내용이잖아내실이 있는 책이야?

B: 여기 악보 보이지곡의 특징이 어떤지 악보에 표시해서 보여주면서 그 부분만 음원으로 들을 수 있어코드 개념만 약간 아는 나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하나하나 떠 먹여줘.

H: 음악에 대한 책이니까 음악을 제대로 다루는 게 좋네음악가들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B: 음악가들의 개인사나 시대적 배경도 나오긴 하는데흥미를 끌기 위해서 넣은 내용이 아니어서 좋아그 음악가와 작품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내용들이야시대적 배경도 자세히 설명해 주니 역사 공부도 같이 하는 기분이 들어.

H: 음악 자체와 배경지식의 밸런스를 잘 잡고 있구나그런 점에서 괜찮은 음악책이네그런데 책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여글씨는 크고 여백은 많은데 책은 얇아.

B: 나도 그 점이 아쉬워이 책의 전 시리즈인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시리즈에 비하면 한 권 한 권의 분량이 절반 정도밖에 안 돼더 깊이 들어가고 내용이 더 풍성했으면 좋았을 텐데재미있는 책인데 분량이 적으니까맛있는 음식을 조금밖에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감질나나처럼 분량이 적은 게 아쉬웠는지 전편의 깊이는 어디로?’라고 쓴 단평도 있더라.

H: 이 정도 분량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랑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니까하지만 나도 다음 권들 분량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이야다음 권들에선 좀 더 깊이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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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는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옆에 끼고 공부했고, 지금은 책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 앱을 켠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수십만 개나 되는 단어의 뜻을 일일이 사람이 정리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몇 번 해 봤지만. 명성 높은 영어사전인 메리엄 웹스터 사전의 편찬자 코리 스탬퍼가 쓴 에세이『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짐작만 했었던 사전 편찬자들의 고충과 보람을 알게 되었다. 영어사전을 만드는 영어 원어민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국어사전을 만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웹사전 기획자 정철의 대담집『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다. 미국과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서로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고충을 겪고 있지만, 사전 편찬자로서 공통된 고민을 품고 있었다. 


영어 VS 한국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내내, 내가 아는 영어는 전체 영어의 아주 작은 일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hella(캘리포니아에서 '아주'라는 뜻으로 쓰이는 부사)', 'irregardless(앞에 부정접두사 'ir'이 붙어 있어서 정반대의 뜻일 것 같지만 regardless(무관한)와 동의어이다.)' 등등 이 책에서 난생 처음 본 영단어들 때문만은 아니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영어 문법이 영어 교재에 정리되어 있는 문법들처럼 질서정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they(그들)'가 3인칭 복수라고 배웠지만, they는 단수로도 쓰일 수 있다고 한다. "The crowd are loving it(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이 미국 영어에서는 비문이지만 영국 영어에서는 비문이 아니다. 집합명사인 'crowd(군중)'는 미국 영어에서 단수로 취급되지만, 영국 영어에서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비롯한 웹스터 사전 편찬자들조차 예외와 불규칙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영어 문법의 늪에 빠져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저자는 영어를 사랑스럽지만 통제불능인 아이에 비유한다. 수십 년간 영어사전을 만들어온 원어민조차 영어를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영어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 독자인 나는 어떻겠는가. 머릿속 한쪽에 묻혀 있던 영어 문법 지식을 끌어올려도 저자가 말하는 영어에서의 미묘한 어감 차이와 문법상의 혼란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한국인이 쓴 국어사전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백과사전, 한국어-외국어사전 등 다양한 사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국어사전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수십여 개 국가 수십 억 명이 사용하는 영어는 어느 한 국가 한 지역을 기준으로 표준을 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어는 국가가 어문 정책과 사전 편찬에 깊이 개입해 표준어 규범을 제시한다. 저자는 언어의 사회성을 위해 일관성 있는 규정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그 규정이 언어의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되고, 국어사전은 규범보다는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영어 사전에 대한 고민은 아무래도 남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어와 국어사전에 대한 고민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고민이다. 또한『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에서는 번역자가 친절하게 번역해도 포착할 수 없었던 미묘한 어감 차이를 이 책에서 포착할 수 있다. '딱 부러지다'는 결단력을 뜻하는 쪽에 가깝고 '똑 부러지다'는 정확하다는 뜻에 가깝다. '만들다'와 '짓다'는 동의어지만 '친구를 만들다'는 자연스러워도 '친구를 짓다'는 어색하다. 한국어 원어민만이 포착할 수 있는 어감 차이다. 물론『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통해 영어에 담긴 영미권의 역사, 문화를 알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우리말에 대한 고민과 우리말 속 미묘한 어감의 차이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 내 몸에 맞는 옷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에세이 VS 대담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는 저자가 사전 편찬자로서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고충과 보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에세이다.  어린 시절부터 활자 중독이었으며 언어, 특히 모국어인 영어와 사랑에 빠진 저자에게도 사전 편찬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get', 'take' 같은 간단한 단어에 수십 가지 뜻과 용법이 담겨 있어 'take' 항목 하나를 수정하는 데만 한 달 가량이 걸렸다. 하이픈을 단어에 넣을지 말지, 넣는다면 어느 위치에 넣을지 같은 사소한 문제들 앞에서도 언어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단어의 정의를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매일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고충들조차도 저자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유쾌하게 그려낸다. 반쯤 자포자기한 사람의 자조적인 농담이긴 하지만, 그 속에는 자기 직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보다 좀 더 무게감 있는 대담집이다. 저자는 다음Daum 어학사전을 담당하고 있는 웹사전 기획자로서, 어느새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사전과 사전 편찬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을 기획했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사전을 만들어 온 편찬자 여섯 명과의 대담을 통해 우리나라 사전이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사전의 현재를 진단하고 사전의 미래를 꿈꾼다. 편찬자들의 사생활도 이야기하고 농담도 주고받긴 하지만 사전에 대한 좀 더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종이사전 편찬자 VS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웹사전 기획자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원서와『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같은 해(2017)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둘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르다.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저자 코리 스탬퍼는 수십년 간 종이사전을 만들어 온 사람이고, 이 책에서도 종이사전을 만들고 개정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책 마지막에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이 무료로 웹사전을 찾아보게 되면서 사전 편찬자들이 겪는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에 종이사전을 만들던 이야기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아날로그 시대부터 수십 년간 사전을 만들어 오던 사람들과의 대화이지만,『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보다 디지털 시대 사전이 맞게 된 미래와 위기에 좀 더 많은 비중을 쏟는다.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 관련 기술이 발달하면서 웹으로 예문을 수집할 수 있게 되었고, 단어가 어느 연령대, 어느 분야에서 얼마만큼 쓰이는지도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웹사전은 종이사전에 비해 분량의 제약을 덜 받고, 언제든지 수정 가능하다.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든다면 웹사전에서는 '북한 모드'와 '남한 모드'를 각각 만들어 변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종이사전을 옮겨받은 포털 사이트들은 웹사전의 내용을 채우고 수정하는 데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는다. 웹사전 편찬자인 저자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을 할 뿐이다. 그러니 수십년 간 종이사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경험은 전수되지 않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웹사전 기획자는 아날로그 시대의 종이사전 편찬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사전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한다. 

 

사전 편찬자들 모두의 고민

 

  두 책은 영어와 한국어, 미국과 한국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고민과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웹스터 사전의 편찬자들이 문법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단어들, 비속어들을 사전에 넣었다고 항의를 받을 때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어떤 신조어를 넣고 넣지 않을지 고민한다. 사전에 실렸다는 것은 그 단어가 언어 속의 한 단어로 인정 받았다는 뜻이니까. 사전은 독자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여겨지기에, 영미권의 사전 편찬자들이나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이나 그에 따른 책임감을 질 수밖에 없다. 


  단어를 선정하고 난 다음에는 단어의 뜻풀이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얼마나 자세히 써야 할까. 백과사전만큼 자세히 써야 할까, 백과사전이 있으니 간단한 정의만 적으면 될까. 단어의 이 뜻은 단어의 저 뜻과 사실상 같은 말이 아닐까. 나는 이 단어의 뜻이 너무 자세하게 분류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편찬자는 그렇게 자세하게 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단어를 정확한 단어로 표현했을까? 개는 개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개과는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포함하는 생물 분류다, 이런 식으로 돌고 도는 뜻풀이를 한 것은 아닐까? 사전 편찬자들은 수십 만 개 단어 하나하나의 뜻풀이를 놓고 매일 고민한다. 


  단어의 뜻풀이로 한 항목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그 단어가 실제 언어 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주려면 예문을 넣어야 한다. 사전 편찬자들은 직접 예문을 만들기도 하고, 단행본과 신문, 잡지에서 모은 예문들 중에서 예문을 고르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웹으로 예문을 수집할 수 있어 한결 일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그 예문이 적절한지는 웹이나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없으니, 사전 편찬자들은 오늘도 적절한 예문을 찾아 헤맨다. 


  두 책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언어생활과 지식을 더 풍요롭게 만든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혼자 최초의 영어사전을 만든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척박한 땅에서 따분한 일을 계속하는 무해한 노역자"들은 종이사전, 아니 사전의 위기 앞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아날로그 시대에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디지털 시대에도 이어지면서 우리의 언어와 지식에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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