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의 희로애락 - 아랍문학을 통해 아랍인의 삶을 보다 문명지평 11
김능우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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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 아랍 문학 작품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을 때, 『아라비안나이트』를 제외하고는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영어권 문학이나 일본 문학이 서가 몇 개씩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아랍 문학은 겨우 서가 하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 문화권 사람들의 현실과 꿈, 삶과 가치관, 정서를 모두 담고 있는 것이 문학이기에, 이 두 가지가 아랍 문화권과 우리의 거리가 아직 멀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랍 문학 연구자 김능우 교수의 책 『아랍인의 희로애락』은 우리와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먼 아랍 사람들의 삶과 정서, 현실이 아랍 문학 작품들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개관하고 있다.


  3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장은 고대와 중세의 문학 작품을 통해 본 아랍인의 삶이다. 근대 이전의 문학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성립되고 아랍 전역에 퍼져가기 이전인 고대, 이슬람교가 성립되고 아랍 전역에 퍼져나간 이후인 중세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설명과 실제 문학 작품들의 일부가 함께 실려 있어, 때로는 문학 작품이 역사책보다 더 생생히 당대 사람들이 겪은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몽골이 1258년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왕과 왕족들, 백성들을 학살했던 사건은 세계사 책에 몇 줄 적혀 있지만, 그때 아랍 사람들이 겪었던 충격과 슬픔, 고통은 시인들의 시 구절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랍 시인들의 시에 담긴 참혹한 그때의 이미지들(학살당한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든 티그리스 강물과 베일이 벗겨진 채 몽골군에게 끌려가는 여인들, 길거리에서 노예로 팔려가는 귀족 가문의 아이들)은, 바그다드 함락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 전체를 뒤흔들고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재앙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두 번째 장은 아랍에 전해져 오는 민담을 통해 아랍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 희로애락을 살펴보고 있다. 이 장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랍 세계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 종교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이다. 저자는 아랍 세계와 아랍인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지만, 아랍 세계 안에서의 소수자인 이슬람교 외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유대인, 콥트인), 소수 민족(베르베르인)의 민담도 함께 전하면서 그들의 시각에서 본 아랍인들의 모습도 전하고 있다. 종교가 다른 백성들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베푼 군주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정책을 펼친 군주들도 있었다. 소수자들의 민담에서는 아랍 사회의 다수인 무슬림 아랍인이 악역으로 나오는데, 여기서 아랍 문화권 안에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했고 오랜 세월 동안 갈등을 겪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장에서는 현대 문학 작품 속 아랍인들의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태도를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 다루는 다섯 편의 작품 중 네 편이 한국에 이미 번역 출간된 작품이고, 모두 저자가 번역한 작품이다.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한 작품 「전직(前職) 장관 나리의 죽음」은 저자가 직접 전문을 번역해 이 책에 실었다. 여기에서 저자가 아랍 문학 작품을 한국에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 힘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된 현대 아랍 문학 작품 중 세 편이 아랍 여성 작가들의 작품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앞의 두 장에서 아랍 여성은 문학 작품의 주체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남성 작가들이 찬탄하는 대상, 영감을 일으키는 소재로만 등장하는 반면 이 장에서는 아랍 여성은 비로소 문학 작품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낸다. 현대에 들어 아랍 세계에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증가한 결과다. 아랍의 여성 작가들은 신변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가부장제의 권위에 도전하고 아랍 여성들이 겪는 억압적인 현실을 폭로하며 그녀들의 삶과 희로애락, 꿈과 소망, 욕망을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3장은 문학을 통해 아랍 세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장이다.


  각 챕터가 책의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각 하나의 논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논문집 형태이지만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의 난이도는 평이한 편이다. 각 글의 주제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지만, 아랍 문학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기 위해 대략적인 내용만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쿠란』이나 『아라비안나이트』외에 더 풍성하고 다양한 아랍 문학의 세계가 있고, 그 안에 아랍인들의 삶과 현실,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문학 작품 중 한국에 번역 출간된 것들을 찾아서 직접 읽어본다면(이 책에서는 그 작품들을 분석하기에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를 당하고 나서 책을 읽게 되겠지만), 먼 아랍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울고 웃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그들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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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21-12-0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바스티안 2021-12-09 18: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잭와일드 2021-12-0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바스티안 2021-12-09 22: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바보배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6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 노성두 옮김 / 읻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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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들을 태우고 떠다니는 배들이 있었다는 중세시대의 기록들이 있다이런 바보배는 어떤 항구에서도 정박을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배에 탄 바보들은 하염없이 강과 바다 위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르네상스 시대 독일의 인문주의자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dt, 1457-1521)에게는 세상 자체가 바보들로 가득 찬 바보배였을 것이다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이후로 그 세력을 점점 넓혀가며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데왕들과 귀족들은 권력다툼으로 바쁘고 성직자들은 부패해 있으며 서민들도 나태함에 빠져 쾌락만 좇고 있었다하느님이 주신 지혜즉 이성을 잃어버린 채 무지와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방향을 잃은 세상이런 당대의 세상을 바보배에 빗대어 쓴 연작시가 바보배(Das Narrenschiff, 1494).


바보배』는 시 본문과 관련된 짤막한 문구와 시 본문의 내용을 나타낸 판화, 시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문구와 판화는 책을 열심히 사들이기만 하고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보를 풍자하는 것이다.


 『바보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권력에도 종말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권력에 취해 있는 왕들부터 그들에게 아첨하는 아첨꾼들돈을 바라고 성직자가 되어 품성도 성경에 대한 지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성직자들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채업자들순진한 사람들에게서 수임료나 뜯어가는 변호사들까지 당대를 살아가는 바보들이란 바보들은 다 모았다그렇게 모은 바보들의 유형은 110여 가지나 된다권력이나 부를 갖고 있다 해서 브란트의 신랄한 풍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브란트는 자기 자신마저도 풍자의 대상에서 빼놓지 않고자신 또한 바보배의 일원이라고 말한다시 한 편에 판화 하나씩 함께 실려시에서 묘사한 바보의 추태를 시각적으로 한 번 더 접하며글을 모르는 문맹 독자도 어리석은 자신과 세상을 돌아볼 수 있었다.


  『바보배에 담긴 당대 사회를 향한 서릿발 같은 비판 정신과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통찰력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지침이 되어주었고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아이러니하게도 브란트는 르네상스형 인간이나 종교 개혁가보다는 보수적인 중세인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바보배에서 그는 세상 만물의 이치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보다는 하느님의 지혜를 중시하고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지만 가톨릭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오히려 루터보다 먼저 새로운 교회를 꿈꾸었던 후스파(신도들을 사악한 교리를 퍼뜨리는 이단이라고 비난하고 있다바보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되라는 훈계다하지만 절대왕정을 지지했던 토머스 홉스가 사회계약설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브란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판 정신은 인문주의의 발전과 종교 개혁에 주춧돌 하나를 제공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거울이었던 바보배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당대를 바라보는 창이 되고 있다유난히 긴 99편 시에서 브란트는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자국의 이익만 찾지 말고 협력해서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키자고 호소하고 있다여기에서 당시 유럽 사람들이 이슬람 세계로 인해 느꼈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브란트는 103편 시에서 인쇄업자들이 돈만 되면 어떤 글이나 다 책으로 찍어내고나라마다 대학을 앞다투어 세우는 바람에 엉터리 책엉터리 학자들이 판을 친다고 한탄한다브란트에게는 개탄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식을 향한 열망이 컸고지식의 대중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시에 섞인 당시 독일의 속담들과 판화에 그려진 사람들의 의복건축물거리의 풍경은 당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지금도 바보배에 실린 다양한 어리석음은 남아 있기에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바보배는 당대를 바라보는 창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자식들 기를 죽이면 안 된다고 훈계하지 않아 아이를 망치는 부모싼 맛에 일꾼을 부리면서 일이 왜 그따위냐고 불평하는 직장 상사불량 제품의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비싼 값에 파는 상인질투심분노나태오만함 등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 500여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반복되고우리 중 바보배의 일원이 아닌 사람은 없다.


  『바보배는 15세기의 유럽인이 쓴 작품이기에 그 시대의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인종과 종교가 다른 외국인들을 흉측한 외모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바보로 비하하고 권력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브란트 자신이 속한신성로마제국은 존속할 것이라고 찬양한다여성에 대한 편견도 곳곳에서 보인다하지만 이러한 한계조차 그 시대를 더 알게 하며그 시대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 보여준다한편으로 바보배』 속 바보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겹쳐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여기에 오늘날바보배를 읽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P. S. 읻다에서 번역 출간된 바보배(2006년 안티쿠스에서 출간된 바보배』도 같은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다.)는 표지와 각 장에 실린 판화들 하나하나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본문의 앞뒤에 바보배가 집필되고 출간되게 한 사회적 배경책의 구성과 미술사적 의미 등을 해설하고 있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번역자인 미술사학자 노성두 교수는 현대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 브란트가 본문에서 가득 인용한 독일 속담과 고대그리스 로마사의 인물사건들그리스 로마 신화성경 이야기들을 주석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그뿐만 수백 년 전의 유럽인이 쓴 글임에도 판소리 사설을 풀어놓는 듯한 구수한 말투로 번역해브란트의 거침없는 입담을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히 느끼게 한다.


*참고 자료

고명섭, 「당신을 바보배로 초대합니다」, 『한겨레』, 2006.12.7.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76779.html#csidx8debc6de3192cbb93ba705378823e05

김희윤, 「세상을 읽어내는 기호로서의 바보배」, 『아시아경제』, 2016.12.14.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121313203098010.

「바보배 이야기가 광기에 대해 주는 3가지 교훈」, 『원더풀마인드

https://wonderfulmind.co.kr/3-lessons-from-the-ship-of-fools-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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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 친절함과 상냥함이 여성의 디폴트가 아닌 세상을 위해
최지미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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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지적을 할 때마다, 특히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지적할 때 두렵다. '젊은 여자가 감히 어른한테 지적을 한다'고 고까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반면 아버지나 건장한 남자 동기와 같이 있을 때는 상대방이 언짢은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도 심한 욕설은 하지 못했다. 동아리 모임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회원들이 성차별적인 말을 할 때 지적하면 나만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든 눈치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젊은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책이었다.


내가, 아니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당하는 일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사회는 여성이 공격적이지 않고 사무적이지 않고, 늘 상냥하고 밝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답지 못하고 감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무례한 말과 행동에 '그 말,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정확히 의사 표현을 하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예민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오히려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러니 무례한 일을 당해도 내 감정과 의사를 밝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그래도 목소리를 내라고 격려한다. 당신이 참으면 상대는 용기를 얻고, 자신의 무례함을 합리화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저자는 여성을 옭아매는 사회의 편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반박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흔히 남자는 이성적이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여자는 감성적이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오리건 대학교의 크리스틴 클레인과 사라 호지스 교수가 '남녀 사이의 공감 능력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행한 실험 결과는 이런 통념과 다르다. 연구진은 감정적 공감을 정확하게 수행했을 때 한 그룹에는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고 다른 한 그룹에는 보상을 했는데, 돈을 받기로 한 그룹의 경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유의미한 공감 능력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의 사라 스노드그라스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리더가 남성 하급자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보다 남성 하급자가 여성 리더의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고 한다. '남자는 원래 공감 능력이 떨어지니 네가 이해해'라고 여자친구에게 말하는 남자들도 회사 상사나 군대 선임 앞에서는 눈치 빠르게 행동하며 뛰어난 공감 능력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에세이지만 사회과학 도서 같은 면모도 지니고 있다. 여러 실험과 논문, 실제 사건을 근거로 들기에 더 신뢰가 간다.


온갖 편견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세상이 강요할 때가 아닌 내가 원할 때에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이라는 성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어떻게 세상이 웃으라고 강요하고 내게 무례하게 굴 때 대응해야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살라고 정해진 삶의 방식을 강요해도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도 조언한다. 여기에서는 자기계발 도서 같은 느낌이 들지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비혼주의자 여성으로서 자신이 직접 겪었던 사회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고, 철없지만 멋진 이모로 살겠다면서 자신의 인생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아 같은 여성으로서 깊이 공감하게 한다.

본문의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요즘 여성들이 자주 듣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 "너, 페미니스트야?"라는 질문.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문화 시민의 도리가 된 지금은 "너 인종 차별에 반대하니"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남성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여성도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이고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 마치 그것이 잘못된 일인 양 '너 페미니스트냐'고 사상 검증을 한다. 그 질문 자체가 그런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남성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여성들 중에서도 페미니즘은 세상에 분란을 일으킬 뿐이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너무 과격하고 남성들을 혐오하며 그들보다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힘이 빠진다. 하지만 저자는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당당히 여성 혐오를 표현하는 이들이 과거의 노예주나 KKK단처럼 과거의 부끄러운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며, 여성이 두려움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꼭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챙기라고, 함께하면 더 강해진다고 저자는 여성들을 응원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두려운 것투성이지만 그 응원이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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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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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대신 책으로라도 외국을 느껴보자고 도서관 해외 문학 코너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의 책이 있었다. 샛노란 색 표지 위에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라는 제목이라니. 서가에서 책을 꺼내 뒤 표지를 보니 '연쇄살인범 동생을 둔 주인공이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뒷수습해 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설정도 특이한데 나이지리아 스릴러라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스릴러의 대부분은 일본이나 영미권 스릴러였다. 이래저래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라 빌려왔다.


평범한 간호사인 주인공 코레드가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동생이었다. 엄마를 닮아 평범한 외모인 코레드와 달리 동생 아율라는 미남이었던 아빠를 닮아 인형처럼 예쁘다. 그런데 아율라가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악습관이 있다. 매번 실수인 듯 고의인 듯 남자친구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레드는 밥을 먹으려다가도 동생이 호출하면 달려가, 자신의 의학 기술과 청소 기술을 총동원해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아율라는 남자친구를 죽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엄마와 즐겁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할 정도로 죄책감도 생각도 없다.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숨겨주고 수습해 주느라 벅찬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보상은커녕 엄마의 사랑과 남자들의 관심, 심지어 짝사랑하는 동료 의사 선생님의 마음까지 아율라가 독차지한다. 이런 줄거리 소개를 읽어보면, 스릴러 쪽으로도 드라마 쪽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일 것 같다.


문제는 이 소설이 스릴러로서는 스릴이 없고 드라마로서는 여운이 없다는 것이다. 한 챕터의 길이가 매우 짧아 호흡이 짧은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전개에 속도감이 붙는 것이 아니라 뚝뚝 이야기가 끊어지는 느낌이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릴이나 긴장감,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로서 여운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지는 않다. 처음에는 예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율라가 언니를 마냥 이용하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어린 자신을 중년 남자와 조혼시키려 했던 아버지에게서 지켜줬던 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코레드도 짝사랑하는 사람까지 빼앗아가고 늘 뒤치다꺼리를 떠넘기는 동생을 원망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동생을 지키려고 한다. 사실 두 자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서로다. 이런 서사가 뭉클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쌓여 온 감정선이 빈약하니 감정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물론 시나 시처럼 짧은 소설이 그 안에 함축된 것으로 여운을 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간략한 서술은 함축적이라기보다는 빈약하다. 그 빈약한 서술 중에서도 앞에서는 아율라가 다른 곳은 몰라도 코레드 자신과 눈이 닮았다고 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코레드는 눈이 작다고 했는데) 아율라는 얼굴의 반은 될 정도로 눈이 크다는 묘사가 나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속도감이 있고 경쾌하고 단순명료하다는 평도 있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할 만한 요소가 적다.


  제3세계나 이민 2세 작가들은 자기 나라 음식이나 언어를 중간중간에 삽입해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이국적인 요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없다. 다른 나라의 문학을 이국적인 것으로만 소비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아모스 오즈의 『유다』가 겨울날의 예루살렘 거리의 스산함을,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이 새벽녘 이스탄불 골목의 차가운 공기까지 느껴주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책을 통해 낯선 세계를 간접적으로 여행하게 된다. 이 소설에도 젤레 같은 전통 장신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조혼 풍습, 교통 단속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뇌물을 받고 봐주는 교통경찰 같은 나이지리아의 모습이 조금 드러나지만, 그곳의 공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가볍게 한번 읽을 정도지, 곁에 두고 오래 볼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찬사를 듣는데 그 정도의 찬사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까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연쇄살인범 내 동생My Sister the Serial Killer』라는 평범한 원제를 더 인상 깊게 바꾼 제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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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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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답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룟 유다에게 연민을 느낀다. 수천 년 동안 그 이름이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렸던 사람. 온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한 예수에게도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 그가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십자가도 부활도 기독교도 없었을 텐데, 그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영원히 저주받는 운명에 놓였다. 그래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부터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직소」까지 가룟 유다를 재해석하는 작품들에 끌리곤 했다. 이스라엘의 작가 아모스 오즈의 마지막 장편소설  『유다』도 같은 맥락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예상과 다르게 유다의 재해석만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아니었다. 1959년에서 196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대학원생 슈무엘이 예루살렘의 어느 외딴 집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 게르숌 발드의 말벗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액자 역할을 하고, 발드와 그의 며느리 아탈리야, 아탈리야의 친정아버지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이 겪은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이 그 안에서 얽히며 소설을 구성한다. 발드와 아브라바넬 가족의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을 통해 작가가 돌아보려는 것은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저명한 정치가였던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끝없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국가라는 제도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만의 국가 대신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을 도모하고 있던 동료 정치인 벤구리온 때문에 정계에서 쫓겨나고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배신자였다.

  또 다른 '배신자' 유다는 이 작품에서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로 재해석된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면 신의 권능으로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것이고, 그 즉시 천국이 이 땅에 임하고 사랑만이 넘쳐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기는커녕 어린애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며 울부짖다 힘없이 죽어갔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 데다, 세상의 구원이라는 일생의 목적이 산산조각 났으니 그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배신자로 손가락질 받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아모스 오즈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 심지어 나라까지 배신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기대하는 방향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갔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꾸지 못한 꿈을 꾼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재평가될 기회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비극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모스 오즈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쉐알티엘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의 존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작품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폭력을 비판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들과 공존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극우 단체들은 그를 배신자로 몰아갔다. 그는 쉐알티엘, 유다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그들의 다음 세대인 청년 슈무엘의 눈으로 오랫동안 매도당하고 잊혔던 그들의 꿈과 절망, 슬픔을 헤아려본다. 슈무엘의 성찰이 작품 속에서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거나 그들의 재평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역사 속에 배신자로 남았던 이들과 그들을 배신자로 몰아갔던 역사,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한다.

  배신자라는 소재는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 소설은 읽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담담하게 흘러간다. 아모스 오즈 자신이 인터뷰에서 이 책은 "추운 겨울 세 명이 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로 논쟁하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이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다. 이상주의자 슈무엘과 현실주의자 발드의 대화,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자행하는 폭력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 국가라는 생각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슈무엘과, 유대인들이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며 어리석은 전쟁을 거듭하는 남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아탈리야의 대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오즈는 한 치도 물러서거나 주저하지 않고 고국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비판한다. 소설로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와 가룟 유다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름대로 연구해 온 슈무엘과, 해박한 지식에 기초해 자신의 견해를 풀어놓는 발드의 대화를 통해, 신학적, 철학적 고찰의 깊이를 드러낸다. 인문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인데 번역자가 단 역주가 거의 300개는 될 정도로, 슈무엘과 발드는 수많은 성경 구절과 유대 경전 구절을 인용한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와 오즈의 가룟 유다 재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정치적이고 지적이며 전반적으로 건조하지만, 곱씹어 읽어보면 묘한 정취와 서정이 느껴진다. 딱딱한 빵을 씹다 보면 느껴지는 고소한 맛처럼. 책 전체에는 겨울날 예루살렘의 적막하고 황폐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다. 여러 해 전 겨울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느꼈던, 깊은 밤 어두운 골목의 정취가 다시 느껴졌다. 오즈가 여기서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내가 갔을 때로부터도 수십 년 전의 예루살렘이지만, 그때부터 변하지 않는 쓸쓸함이 있다. 겨울의 어느 도시가 쓸쓸하지 않겠냐만은, 수천 년 동안 험난한 역사와 온갖 비극을 겪으면서 슬픔이 쌓여왔고, 지금도 어디서 유혈극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다의 심리를 그린 47장은 이 부분만 단편소설로 따로 떼어내도 좋을 만큼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부분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처럼 휘몰아치지는 않지만 담담해서 더 여운이 남는다. 번역자는 47장을 번역하고 이틀을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유다의 사랑과 꿈, 희망과 절망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서사 전개가 빠르고 흥미로운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이 소설을 보름에 걸쳐서 읽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예루살렘의 공기를 책으로나마 다시 느꼈고, 수많은 성경과 유대 경전 이야기를 통해 지식욕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 누군가의 진심과 꿈이 다른 한 사람에게라도 기억된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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