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파사 카페 - 네팔, 그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나라얀 와글레 지음, 이루미 옮김 / 문학의숲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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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네팔 소설이 있다면 믿겠는가. 네팔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향력이 훨씬 큰 인도의 문학 작품도 그렇게 많이 출간되지 않았는데. 이 소설이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된 네팔 문학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이후로 네팔 소설이 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아마 유일하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네팔 소설일 것이다.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네팔 소설은 이것뿐이라는 것에서 벌써 호기심이 생기는데, 네팔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네팔 국내에서 5만 부가 넘게 팔렸다니 더 호기심이 생긴다. 네팔에서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네팔 곳곳에 '팔파사 카페'라는 이름의 카페가 여러 개 생겼다고 한다. 네팔 사람들은 네팔을 대표하는 소설이라며 이 소설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그런 것들을 떼고 봐도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시기 동안 화가인 남주인공과 다큐멘터리 감독 지망생인 여주인공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니,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서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두 주인공이 실질적으로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훨씬 결정적이다. 바로 남주인공이 비호감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주인공을 망설임 없이 비호감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주인공의 행적을 살펴보자. 남주인공은 휴양지로 여행을 갔다가, 호텔 주인의 딸이 코코넛 나무에 올라가 코코넛을 따는 것을 지켜본다. 그는 그녀가 바지를 입고 있어 치마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다. 미성년자인 소녀(인 척하는 친구여서 다행이었지만)와 채팅하면서 그녀에게 처녀냐고 물어본다. 외국으로 나간 집주인이 맡기고 간 반려견을 집주인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는, 집주인에게는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다. 집주인이 잘 관리해 달라고 한 집을 쥐가 들락거릴 정도로 방치한다. 제 버릇 개 못 줘서 산간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 마주친 반군 소녀에게 처녀냐고 물어봤다 사달을 낸다. 스포일러여서 얘기할 수 없지만 더 결정적인 잘못들이 있다. 남주인공이 완전무결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게 남주인공의 성격이고 개성인 양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이 문제다. 네팔 문화에서는 그런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이 책의 서평 중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이 이해된다.


내가 남주인공을 견디고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여주인공 팔파사와 책 속에 묘사된 네팔 그 자체였다. 팔파사는 주인공에게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팔파사는 남주인공과 그의 예술을 사랑하지만, 그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어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자신의 아름다움만 찬양할 뿐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팔파사의 이 말 때문에 남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여성혐오를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겪지 않았어야 할 비극과 남주인공이 여행을 하면서 만난 네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저몄다. 네팔 근현대사의 혼란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떻게 희생되었고, 어떻게 살아남아 슬픔을 떠안게 되었는지 어떤 뉴스나 기사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네팔에서는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작물을 기르고 시골과 도시에서는 각각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를 알게 되었다. 네팔의 참상과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초연함, 여전히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대비되어 더 서글펐다. 그래서 네팔에 대한 묘사만큼은 다시 읽으면서 곱씹어 보고 싶어진다. 내게는 두 주인공의 사랑보다는 네팔 그 자체를 만날 수 있게 한 것이 이 소설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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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생리학 인간 생리학
앙리 모니에 지음, 김지현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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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오해가 없도록, 우선 '부르주아 생리학'이라는 제목의 의미부터 풀어보자. '부르주아bourgeois'는 '도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bourg'에서 유래한 말로 '성 안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주에게 귀속된 시골의 농노들과 달리 성 안의 자유 시민인 부르주아들은 성 안의 온갖 산업, 상업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세력을 키워갔고, 결국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장 유력한 사회적 계급이 되면서, 부르주아는 이전 체제의 귀족들을 흉내 내는 기득권 세력이 되고 말았다. '생리학'은 생물 유기체의 구성과 조직,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18세기 말 유럽의 지성인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구조나 생리적 변화가 인간의 감정이나 지성, 성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정신까지 생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1840년대에는 다양한 인간 유형을 제시하고 그 유형의 속성을 관찰하고 풍자하는 '생리학'이라는 장르가 프랑스 문학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19세기 프랑스의 풍자화가이자 희극 작가 앙리 모니에Henry Monnier가 부르주아를 파헤친 책 『부르주아 생리학』도 그러한 '생리학' 문학 중 하나이다.



『부르주아 생리학』의 한 대목과 그가 직접 그린 삽화

풍자랍시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가지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앙리 모니에는 자신과 같은 계층인 부르주아를 풍자한다. 그 자신이 부르주아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그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그 속에 숨은 허영과 모순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예술가들)에게 부르주아라는 단어는... 하나의 욕지거리이다. ... 어떠한 신통찮은 화가라도 부르주아로 취급되기보다 차라리 가장 끔찍한 흉악범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천 배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니에는 이렇게 자기가 속한 계층을 멸시하는 시선도 유쾌하게 받아들이며 자녀 교육, 사업, 사교 생활, 가정 생활, 문화 생활, 은퇴 후의 생활까지 부르주아의 삶 구석구석의 단면들을 꺼내놓고 풍자한다. 책 속의 부르주아들이 자신들끼리,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지금의 한국 독자들도 웃길 수 있을 정도로 신랄하고 코믹하다. 희극 작가로서의 장점을 이 풍자 에세이에서도 발휘했나 보다. 그가 직접 그린 삽화는 본문에서 그려지는 부르주아들의 캐리커처로 등장하며, 당시 부르주아들의 모습을 한결 더 생생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런데 그가 보여주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해요'라고 하고 나서는 꼭 상대방이 기분 나쁠 말을 하는 이상한 버릇부터 자신은 누구보다 선량하고 현명하고 안목이 높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웃는 얼굴로 서로에게 비수를 날리는 독설가 기질에 자질구레한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허영까지. 무슨 질문을 해도 자신의 집 주소만 대답하는 부르주아 소년의 모습에서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 문구와, 초등학생들도 거주하는 집 형태를 두고 상대방을 놀리거나 따돌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행태가 왜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과거의 부르주아들에게서 우리는 적어도 스스로를 풍자할 줄 아는 그 동력을 부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역자 서문의 마지막 문장에 동감하게 된다.

백수십 년 전을 살아갔던 사람의 풍자가 전혀 낡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풍자가 그만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풍자가 백 년이 넘은 지금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니 슬픈 일이다. 세상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해서 그의 풍자가 아주 먼 옛날의 먼지 쌓인 유산으로 느껴질 날이 왔으면 좋겠다.

P. S. 지금의 한국 독자도 배경 지식 없이 웃을 수 있을 만큼 모니에의 풍자는 이해하기 쉽고 유쾌하지만, 당시의 프랑스 사회와 정치 상황, 문화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다. 번역가가 서문(본문의 첫 문장을 패러디한 첫 문장에서 번역가의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과 각주로 수능 강사만큼이나 친절하고 자세하게 '부르주아'와 '생리학'이 어떤 것인지, '생리학'이라는 문학 장르가 생겨난 배경과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프랑스의 정치, 사회 상황을 설명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맛깔나게 번역해 작가의 신랄하고 유쾌한 풍자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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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세계
고정기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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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지니어스>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주인공은 20세기 초 미국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다그는 뉴욕의 유명 출판사 스크리브너스의 전설적인 편집자로스콧 피츠제럴드어니스트 헤밍웨이토머스 울프 등 미국 문학계의 쟁쟁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걸작을 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편집자의 세계는 그를 비롯한 15명의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이들의 활동 시기는 191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로, 20세기 전반의 미국 문화는 그들의 노력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위대한 개츠비분노의 포도』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과 에스콰이어코스모폴리탄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미국인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문화를 선도했던 잡지들의 뒤에 그들이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미국 편집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에게 멀게 느껴질 수 있다하지만 편집자라는 직업의 큰 틀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덕분에 100여 년 전에서 수십 년 전에 활동했던 이들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편집자에 대해 잘 몰랐던 독자들은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편집자가 단순히 원고의 오탈자만 잡는 사람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편집자는 원고를 읽으면서 그 원고가 작품성과 시장성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판단하고 그 원고의 출판 여부를 결정한다편집자는 저자와 논의하면서 초고를 더 완성도 있게트렌드에 맞게 재구성하고 다듬어간다책의 제본 방식표지 디자인에도 관여하며 책 제작 전반을 지휘한다출판사 판매 회의에서 자신이 편집한 책의 판매 전망을 설명하고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그 책이 벌어들인 수입과 그 책에 대한 서평들을 살펴보며 그 책의 성과를 점검한다다른 출판사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이렇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고 분주한 편집자의 세계를 책 한 권으로 엿볼 수 있게 된다.


  편집자인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과 고민을 백 년 전수십 년 전의 편집자들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깊이 공감할 것이다출판사에 들어오는 수많은 원고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이 책을 출간할지 말지출간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갈지어떻게 홍보할지를 놓고 저자동료상사와 끊임없이 의논하고 갈등도 겪는다유명 작가의 원고를 출판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들과 경쟁하고 선인세인세 등 저자와의 돈 문제도 처리해야 하며 때로는 출판사의 처사에 불만스러워하는 저자의 항의를 받는다편집자의 세계는 그런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고 만드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내는 왕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전설적인 편집자들이라고 해도 출판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독자가 원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을 평생 동안 어려워했다편집하는 책들을 모두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는 못했고 출판 시장에서 실패하기도 했다좋은 원고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치기도 했다윌리엄 포크너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로 성장하도록 든든하게 지원해 줬던 편집자 삭스 코민스도존 오하라라는 다른 작가와는 원고 수정 문제로 갈등을 겪다 아예 그와 함께 작업하지 않게 됐다그들은 그저 그러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계속 자기 일을 사랑하며 그 일에 열정을 쏟았을 뿐이다그들이 넘어설 수 없는 전설이 아니라자신처럼 늘 고민하고 노력했던 한 편집자였을 뿐이라는 것이 지금의 편집자들에게는 용기와 위안을 줄 것이다.


  편집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편집자의 세계를 알게 하고편집자인 사람들에게는 수십 년 전 먼 나라의 선배들이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며 분투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의의일 것이다그런데 2020년대에 나온 책이라기에는 좀 오래됐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문체도 그렇고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거나 표기법이 일관되지 않은 고유 명사들이 자주 보인다. ‘처녀작’, ‘여류’ 등 최근의 성 중립적 단어를 사용하는 추세에는 맞지 않는 단어들도 자주 쓰이고, ‘여성 편집자들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원고에 너무 안이하게 공감한다남성 편집자만이 목적의식과 특수한 시장 감각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는 윌리엄 타그의 편견 어린 발언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싣고 있다. 2001년에 이미 폐간된 잡지 마드무아젤이 지금도 계속 간행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휴 헤프너가 올해’ 32세가 되는 딸 크리스티 헤프너에게 플레이보이의 회장직을 물려줬다고 서술하고 있다크리스티 헤프너가 플레이보이의 회장이 된 것은 1984년의 일이고, 2009년에 이미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가 있다이 책이 1986(인터넷 서점에서는 1991년에 출간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본문 뒤의 해설에서는 1986년 출간되었다고 하므로 후자를 따랐다)에 출간된 책을 재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저자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원고에 손을 대기 어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오탈자나 비문(오탈자와 비문이 눈에 많이 띈다)최근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표기는 바로잡고현재 변화한 상황은 주석이나 보충 설명 페이지로 보충했다면 이러한 단점이 보완됐을 것이다저자분이 인터넷도 없는 시절에 미국 대학 도서관의 자료까지 찾아가며 이 책을 완성했는데지금 어떻게 상황이 변화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덧붙이는 수고를 더했다면 2020년대에 읽기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이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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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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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0년 한국에서는 많은 여자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남아 선호 때문에 배 속의 아이가 딸인 경우 지우라고 주변에서 종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해는 특히 백말띠의 해라 이 해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팔자가 사납고 드세다는 이유로 더 많은 여자아이들이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들이 모두 죽지 않고 태어난 평행우주가 있다면 어떨까. 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는 바로 이런 상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상상은 두 가지 면에서 내 흥미를 끌었다. 하나는 나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평행우주를 상상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종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평행우주를 상상했었다. 이 소설에는 두 개의 평행우주가 존재한다. 1990년에 여자아이들이 낙태되지 않고 모두 태어난 평행우주와, 1990년에 여자아이들이 낙태된 우주(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로 보면 될 것이다). 2007A우주에서 평범한 고2로 살아가는 여자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B우주에서는 없는 사람이다. ‘내가 없는 평행우주라는 개념까지만 떠올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상상하지 못했던 나는, 이 두 우주가 어떻게 서로 접하게 되고 충돌하게 될지가 궁금했다.


 또 하나는 ‘1990년의 백말띠 여자아이들과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1990년생은 아니지만 그 또래의 여성이고, 내 친할머니는 내가 딸이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둘째인 나도 딸인 걸 미리 알고 이번 애는 지우자고 며느리인 엄마에게 강요했다면, 나는 ‘1990년의 여자아이들처럼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나 자신도 어쩌면 살아남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딸이 아니면 지우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의 가족이 아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니.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던 주인공 채진리의 일상이 조금씩 뒤틀리더니 결국은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과정은 흥미롭게 그려진다. 다정했던 남자친구와 정다웠던 남자 동급생들이 여자아이들을 갑자기 무시하고 거칠게 대한다. 집에 돌아가니 집 주소와 아버지의 직업이 바뀌어 있다. 누군가 진리와 단짝친구 해라 앞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하더니 갑자기 진리의 눈앞에서 해라가 사라진다. 해라뿐만 아니라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지는데, 그 애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부모조차 그런 애는 없다고 한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이다. 진리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에 진리가 겪는 공포와 혼란은 서서히 차오르다 어느새 턱 밑까지 온 물처럼 독자들을 오싹하게 한다.


 하지만 진리와 달리 현실에서의 1990년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짐작하게 된다. 진리가 사는 세상은 1990년에 낙태됐던 여자아이들이 모두 태어난 평행우주구나. 진리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과 출산 통계 자료를 찾아보고, 지하실 냉장고를 통해 원래의 세계, 1990년생 여자아이들이 낙태됐던 B우주에 가 옛날 뉴스와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독자들의 짐작은 사실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A우주는 B우주의 영향을 받아 뒤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진리가 A우주가 B우주의 영향을 받게 된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는 과정이 펼쳐진다. 그런데 왜 그런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나는 설명되지만 어떻게 그런 상황이 되게 했나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진리의 노력으로 조정자를 설득한 덕분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90년생 여자아이들의 운명을 건 결정을 바꾸었지만, A우주는 이전의 A우주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SF로 보았을 때 과학적인 설정이 구체적이거나 치밀하지 않고, 이야기도 촘촘히 짜여 있다기보다 성큼성큼 진행되는 느낌이다. 장편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중편소설이라고 보는 게 더 좋을 만큼 분량이 적은데, 분량을 좀 더 늘리고 이야기를 더 촘촘하게 짰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상상보다 훨씬 더 탄탄하고 흥미로운 평행우주 이야기를 기대했던 면에서는 아쉬웠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사히 태어난 사람으로서 무사히 태어나지 못했던아이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작가는 낙태는 생명을 빼앗는 것이니 무조건 나쁜 것이다라며 낙태를 했던 산모 개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1990년이라는 특정 연도에 여자아이들만 그렇게 많이 죽어야 했나라는 의문을 품고, 그런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던 사회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폭력성이 20여 년이 지난 2007년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7B우주에서 A우주로 넘어온 남자아이들은 원래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들이 설친다는 이유로 A우주의 여자아이들을 무시하고, A우주의 모든 것을 자신들만이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남자아이들만 필요하니 여자아이들은 지워도 그만이다라는 폭력적인 사고방식이, 그다음 세대들에게 이어져 여성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존중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런 폭력성은 남아 있다. A우주에서 여자아이들과 자신들의 틀에 맞지 않는 소수자들을 무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B우주 아이들의 모습은 소설 밖의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 폭력에 맞서 진리가 한 행동은 어렵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라진 친구들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진심으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한 것. 진리의 행동이 큰 변화를 이끌어 냈지만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리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더 좋게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작가가 말하는 희망은 이렇게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분량이 적고 간략한 것의 단점이 여기에서도 드러나기는 한다. 진리와 사라진 친구들의 관계, 같은 우주에 존재할 수 없는 엄마와의 관계, 새로 만나 연대하게 된 친구들과의 관계가 좀 더 쌓였다면 결말 부분의 감동이 더했을 것이다. 하지만 ‘90년생 백말띠 여자아이들과 멀지않은 사람, 살아남은 사람으로서는 나름대로 여운이 남는다. A우주의 그들도, 여기 이 세상의 우리도 씩씩하게 잘 살아남고, 잘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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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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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줄 요약: *2ch 괴담으로 시작해서 <피케이>로 끝난다

*2ch: 일본의 익명 인터넷 커뮤니티. 이곳의 오컬트 게시판에는 수많은 괴담이 올라온다.

한 서양인 네티즌이 직접 지은 밥에 젓가락을 꽂아 놓은 사진을 올리자, 한국, 중국, 일본 네티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제삿밥이야?" 이처럼 산 사람이 먹는 밥에는 젓가락을 꽂아 놓지 않는 것이 동아시아 공통의 금기다.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은 젓가락을 둘러싼 이 금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본, 대만, 홍콩의 다섯 작가가 젓가락을 소재로 쓴 단편을 한 편씩 썼는데, 이 다섯 편의 단편은 단순히 소재가 같은 게 아니라 다음 이야기로 내용이 이어진다. 초반에는 '어, 앞의 얘기랑은 상관이 없는 얘기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다섯 개의 이야기가 퍼즐처럼 들어맞으며 전체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젓가락님 - 미쓰다 신조(일본)

작가 M 선생이 주최한 모임에서 한 여자가 어린 시절 젓가락과 관련해 겪었던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에 점심 급식에 제삿밥처럼 젓가락을 꽂는 남자애가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 남자애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 남자애는 84일 동안 하루에 한 번 밥에 젓가락을 꽂고 '젓가락님'한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당시 그녀의 오빠는 학교 일진들에게 괴롭힘당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생을 때리는 것으로 풀고 있었다. 그것도 부모님 눈에 안 띄게 옷에 가려져 안 보이는 곳만. 참다못한 주인공은 오빠를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러 젓가락님 챌린지를 시작한다. 그런데 산 사람이 먹는 밥에 제삿밥처럼 젓가락을 꽂는 의식이라니, 어딘지 불길하다. '젓가락님 챌린지'를 시작한 뒤로 그녀는 자신을 비롯한 5학년 아이들 아홉 명이 모여 있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처럼 꿈을 꿀 때마다 아이들은 한 명씩 죽어나간다. 꿈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의 소원을 젓가락님이 들어준다.

말수가 없는 신비한 아이가 매일 치르는 기묘한 의식이라는 소재 자체가 으스스한데, 거기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꿈 속의 스릴러가 더해진다. 원래 대나무를 직접 꺾어 만든 젓가락으로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주인공은 마트에서 파는 보통 젓가락으로 의식을 치르는 바람에 꿈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화자가 꿈 속 살인 사건의 범인을 나름대로 추리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미스터리가 플리지는 않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소름이 돋는다. 나머지 이야기가 추리물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 이야기는 공포물의 성격이 강하다. 독자들의 흥미를 일으키는 깔끔한 시작이다.

산호 뼈 -* 쉐시쓰(대만)

*'쉐시쓰'는 '크세르크세스'의 중국어 표기법이기에 필명으로 보인다.

결혼을 앞둔 주인공은 자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한 도사를 찾아간다. 그녀는 도사에게 자신이 중학생 때 겪었던 일을 도사에게 이야기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도 젓가락과 관련된 괴담 하나를 접한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젓가락 한 짝을 몰래 바꿔서 3개월 안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괴담이 학교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부추겨서 주인공은 반에서 제일 존재감 없고 아이들과 못 어울리는 남자애를 대상으로, 그 괴담이 진짜인지 실험해 보기로 한다. 친구들과의 장난 때문에 그 남자애에게 접근했지만, 생각지 못하게 그 남자애와 진심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애의 젓가락에는 주인공이 감당할 수 없는 뭔가가 숨겨져 있었다.

주인공에게 젓가락 챌린지를 알려주기만 했던 첫 번째 이야기의 남자아이 '네코'와 달리, 두 번째 이야기의 남자아이는 주인공과 우정인듯 사랑인듯 미묘한 감정을 나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괴이를 감당하기에 주인공은 너무 어리고 나약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는 그녀를 질책하는 대신 예전처럼 박하사탕 두 알을 주며 위로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는 그 박하사탕 두 알을 '각자의 궤도를 돌다 스쳐 지나가는 별들'에 비유한다. 그 별들이 주인공과 남자아이를 빗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릿했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어울리게 으스스하고 기묘하면서도 대만 청춘물 특유의 풋풋함과 아련함이 느껴진다. 다섯 개의 이야기 중 가장 애틋한 이야기였다.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 예터우쯔(홍콩)

주인공은 남자친구와 남자친구의 절친, 편집자까지 넷이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다. 그런데 한 달 전 남자친구 생방송 중에 죽는 바람에, 매일 하루 종일 네티즌들의 악플과 의심에 시달리게 된다. 홍콩에는 시집 가던 신부가 타고 가던 가마가 연못에 빠져, 죽은 신부가 귀신이 되어 그 연못을 떠돈다는 괴담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 귀신 신부가 나타난다는 연못가에 저주하려는 대상의 이름을 적은 젓가락을 꽂은 쌀밥을 놓으면 저주 대상이 죽는다는 괴담이 얼마 전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 괴담은 남자친구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괴담이었다. 주인공 남자친구는 그 사실을 생방송에서 밝히며 사람들을 비웃고, 백만 안티팬을 양성하게 된다. 안티팬들이 어떤 저주를 퍼붓든 개의치 않던 남자친구는 안티들이 보낸 저주 젓가락으로 생방송에서 라면 먹방을 하다 갑자기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죽는다. 살인범이라는 루머로 괴로워하던 주인공에게, 그동안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팀원 네 명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네 명 다 죽을 것이라는 다이렉트 메시지가 온다.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저주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과 두 번째 단편이 '현실을 뛰어넘는 괴이한 존재'에게서 느끼는 공포를 다루는 반면, 이번 단편은 현실 속에서 느끼는 공포를 다룬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 신상이 밝혀지고, 사소한 것으로도 트집을 잡혀 루머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훤히 알고 언제라도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현실의 독자들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공포이기에 공감할 수 있다. 현실적인 공포라 신비로운 면은 덜하지만 주인공이 사건의 진실을 추리해 가는 재미가 있다.

악어 꿈 - 샤오샹선(대만)

홍등가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거대한 악어가 고향 마을을 통째로 삼키는 꿈을 꿨다고 손님에게 이야기한다. 그 뒤에 한 유명 추리 소설 작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가 서서히 서로를 향해 다가오며 하나의 진실이 드러난다. 작가는 한 기자로부터 자신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수십 년 전 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 아홉 명이 실종된 사건을 함께 파헤쳐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사건이 기자와 기자의 아들과 교묘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기자의 아들은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젓가락님' 의식을 시작했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의식을 멈추지 않는다.

앞의 세 개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기묘한 젓가락'과 '젓가락과 관련된 주술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팔에 나타나는 물고기 모양 홍반' 뿐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엮어낼까 궁금했는데 결말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낸 솜씨에 감탄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네 번째 이야기와 연결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여기에도 등장하는데, 두 번째 작가가 만든 그 인물의 캐릭터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게 한다.

네 번째 단편을 쓴 작가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뿐만 아니라 깊은 한과 그 한을 이기는 사랑과 희망을 그리는 데도 능하다. 세 번째 단편과 같이 사회 비판적인 면도 있다. 그렇기에 다섯 개의 단편 중 가장 높이 평가하고, 두 번째 단편과 함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소박한 의식으로 웃고 울면서 한을 푸는 결말을 읽고 나면 울고 난 것처럼 마음이 개운하다. 딱 여기가 엔딩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해시노어 - 찬호께이(홍콩)

네 번째 단편에서 목숨을 걸고 젓가락님 의식에 나섰던 청년이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이다. 왜 이 청년이 젓가락 챌린지에 나섰느냐 하면, 좋아하는 여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좋아하는 여자가 중학생 여자애다. 도사인 친구의 주술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은 주인공은, '젓가락님 의식' 뒤에 뭔가 더 큰 음모가 있음을 알아채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짝사랑 소녀와 도사 친구와 함께 진상을 찾아 나선다.

일단 이 단편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대학생인 주인공이 이제 겨우 만 14세인 중학생에게 반해 목숨까지 건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도사 친구는 응큼한 놈이라고 놀리면서도 주인공이 그 여자아이와 키스를 하게 유도하는 등 잘되게 계속 밀어주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사실 네 번째 이야기와 거의 연결되지 않았고, 두 번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의 연결 고리인 여자아이가 중학생이다.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의식을 치르는 동기로 써먹기에 사랑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과 미성년자를 연애 관계로 엮으려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졌다(내가 네 번째 단편의 작가였으면 내가 만든 캐릭터를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 여자애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접근하는 캐릭터로 만든 것에 화가 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다섯 번째 이야기로 인해 네 번째 이야기까지 쌓아왔던 신비한 분위기가 결말에서 단번에 날아간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하나로 이 책의 장르는 공포에서 SF로 바뀐다. 영화 <피케이>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피케이는 도둑맞은 우주선 리모컨을 찾으려 몇 달을 헤맨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그 리모컨이 신이 내린 성물이라며 고이 모시고 있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의 결론도 그와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신비한 젓가락은 사실 이세계 사람들이 이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여는 장치였는데, 무지몽매한 지구인들은 젓가락의 능력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원한을 푸는 데 이용해 지금까지의 온갖 난리가 난 것이었다. 젓가락과 관련된 주술을 시도하거나 젓가락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팔에 난 홍반도, 사실은 이세계 사람들이 투플러스 A급 가축, 아니 지구인들에게 찍어주는 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추리 소설의 대가답게 기본적인 재미는 있다. 하지만 찬호께이가 이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진상 하나하나를 꼼꼼히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전까지의 괴기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다 날아가는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조금 겉돌게 된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네 번째 이야기로 끝내는 것이 더 좋았다. 찬호께이의 마지막 단편은 사족이라는 평들에 깊이 공감한다.

다섯 개의 이야기 모두 추리 소설, 공포 소설로서 가져야 할 재미는 갖추고 있다. 그 덕분에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뒤의 작가가 앞의 작가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가는지, 앞의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서 활용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한다. 한편으로는 같은 젓가락 문화를 공유한 한국 작가가 이 단편집에 참여했다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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