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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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포일러 포함


1990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한창이고 정부군도 반군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부패한 독재 정권은 납치와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30대 중반의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이 왜 죽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세계인 중간계에서, 그는 달이 일곱 번 뜨고 지기 전까지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 환생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사진 때문에 그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고 그들을 지킬지, 모든 것을 잊고 환생할지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독재 정권 시기를 거쳐왔고, <신과 함께> 같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판타지에 익숙한 한국 독자로서는 이런 시놉시스에 끌리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하지만 이 책의 초반부를 넘어가기는 쉽지 않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선 스리랑카의 현대사와 그를 둘러싼 스리랑카 국내외의 갈등 구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승에서는 인간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고깃덩어리가 된 인간들의 혼령이 죽었을 때의 끔찍한 모습 그대로 배회하고 있다. 주인공은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마약, 섹스,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고 사랑에 있어서도 지고지순하지 않다. 연인이 있는데도 가는 곳마다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관계를 갖고, 마음은 주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식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선을 긋지 않고 방치한 채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상황, 이런 주인공에게서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일을 해낸다. 주인공은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최소한의 양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사랑, 자신이 지키려던 진실이 다시 가려지더라도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인류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산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한계를 뚫고 닿으려 했던 곳에 닿아 현실을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가 죽어서도 지키고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다는 증거가 된 사진은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스리랑카의 내전은 그 뒤로도 2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원한에 찬 유령들이 산 사람을 조종해 일으킨 테러는 막지 못했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었다. 그런데도 가장 큰 원흉은 죽이지 못했다. 그의 몸부림은 현실이라는 견고한 벽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균열을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미세하다고 해도 그가 죽어서도, 자신의 운명을 걸고 한 일은 현실을 변화시켰다. 누군가는 그의 사진을 보고 진실을 깨달았고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대피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으며, 그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킨 사람들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현실은 아직도 잔혹하고 황폐하며 그가 다시 태어난 곳도 이곳 못지않게 잔혹한 세상일지 모르지만, 그가 선택한 대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갔을 테니. 짧고 불행하고 세상의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생이더라도 분명 의미가 있었다는 깨달음을 안은 채.


이 소설처럼 독재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역사 연구자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 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이 책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수천, 수만 번이나 반복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삶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삶도 역사도 계속된다. 


P. S. 1. 스리랑카의 근현대사와 언어, 문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가 충실히 주석을 달아주었다. '왜 이런 사소한 단어까지 굳이 스리랑카어로 적고, 뜻을 각주로 달았느냐'는 이야기도 보이는데, 이 소설은 스리랑카인 작가가 영어로 쓴 것이다. 제3세계의 작가들은 모국어 대신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작품을 쓸 때,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작품에 모국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국어 단어를 종종 삽입한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이 점을 충실히 살린 것이다. 주석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당시 상황과 주인공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의 이야기까지 해설로 실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P. S. 2. 이 책의 쪽번호 아래에는 달 그림이 들어가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일주일을 따라가는 구성인데 한 챕터가 주인공의 하루에 해당한다. 달은 쪽번호 아래서 차오르다 다시 야위고, 마침내 완전한 빛이 된다. 쪽번호 아래의 달을 살펴보면 주인공과 모든 여정을 함께하고 결국 빛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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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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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과학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천문학이다. 빛의 속도로 수백억 년을 가도 끝에 도달하지 못할 정도로 드넓은 우주, 하루가 1년의 두 배인 행성, 시간과 공간조차 왜곡시켜 버리는 블랙홀. 내 상상을 뛰어넘는 이런 우주 이야기들이 더없이 신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업으로는 삼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미술사 이야기가 더해졌으니, 이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의 구성은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태양계 주요 천체들과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 후반부는 명화 속에 숨겨진 우주 이야기다.

토성은 공전 속도가 느리고 표면 온도가 매우 차가워, 이름의 기원이 된 사투르누스 신의 노쇠한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 화성의 붉은색은 마치 피 같아서 이름의 유래가 된 마르스 신이 담당한 영역인 전쟁과 살육을 연상시킨다. 이런 식으로 행성과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신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연결시키는데, 결국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들을 그린 명화 이야기에 그 행성의 주요 특징, 그 행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 탐사 근황을 덧붙인 것이다. 명화 속에 숨겨진 우주 이야기로 책 전체를 채웠으면 더 흥미로웠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우주를 연결시켜 보는 것도 나름대로 낭만적이다.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피신>, 1609년.

후반부의 명화 속 우주 이야기는 미술사학자, 또는 천문학자들이 나름대로 미술 작품과 천문학을 연관시켜 밝혀낸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엘스하이머의 그림 <이집트로의 피신> 속 달과 별 이야기다. 가로 41센티미터, 세로 31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그림 안에 1200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니 믿어지는가. 거기에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달을 완벽한 천체로 여겨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달에 분화구가 그려져 있다. 그것도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달에 분화구가 있다고 발표한 시점보다 9개월 전에. 엘스하이머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천문학자들과 교류했다지만 어디까지나 화가였고, 천체를 신의 창조물이자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달에 분화구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이 수수께끼가 이 그림을 더 신비하게 만든다.

그런데 책 속 도판의 화질이 좋지 않아 독자들로서는 달에 분화구가 그려져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쉽다. 그 뒤에서 이야기하는 루벤스의 그림 <달빛 풍경>처럼 각 그림의 디테일을 클로즈업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고흐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고흐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에 남은 것과 조합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각 요소들을 배치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천체들의 위치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문학자들은 그의 그림 속 천체들의 위치를 통해 그림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그려진 것이라는 것까지 추정했다. 미술사학자들이 고흐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데도, 고흐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순서를 더 생생히 느끼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고흐와 관련된 우주 이야기 중 가장 이상한 것은 고흐의 그림 속 소용돌이 이야기다. 그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그린 그림들에서만 그림에서 난류 패턴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고흐가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는 이야기까지 있는데, 진실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전반부에서나 후반부에서나, 미술사 파트에서나 천문학 파트에서나 아주 어려운 이론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나이면 이해할 수 있게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동사로 풀어 쓸 수 있는데 명사를 많이 써서 어색한 문장이 종종 보이지만(영어 등 서구권 언어로 된 문헌을 자주 접하며 공부한 사람들의 글이 종종 이렇다. 영어 등 서구권 언어는 명사 중심 언어이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천문학 파트는 천문학자인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예 천문학자 남편과의 대화 형식으로 만들었으면 천문학 쪽 파트가 더 풍성하고 깊어져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미술사 책치고는 도판의 화질이 좋지 않아 그림의 디테일도 잘 보이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고. 하지만 우주나 미술사 둘 중 하나나 둘 다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종이책이어서 이 책에서는 업데이트되지 못한 행성 탐사 근황

+ 목성 탐사선 주노는 2021년 마지막 정보를 수집하고 파괴될 예정이었지만, 2025년 9월까지로 임무 수행 기간이 늘어나 2023년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은 2022년 12월 25일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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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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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다루는 콘텐츠라면 다 좋아한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예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의 모습에 눈이 즐거워진다. 생생한 음식 묘사를 읽으면 아는 맛을 떠올리든 모르는 맛을 상상하든 행복해진다. 이 책도 글과 함께 실린 음식 사진들이 예쁘고 생생해 보여서 선택했다. 그런데 글을 읽어보니 단순히 '맛있겠다'는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감각을 깨우는 느낌이다.


물복숭아와 딱딱한 복숭아 중 고르라면 나는 '한 입 베어 물면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이 흐르는' 물복 중의 물복을 택하겠다. (중략) 어쩔 수 없이 끈적이고 흘러넘치는 여름 마음.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겨울에 여름을 느꼈다. 복숭아의 맛과 흐르는 과즙, 복숭아를 먹을 때 느껴졌던 덥고 습한 공기. 연하디연한 색과 금방 물크러져 버리는 촉감까지. 단순히 음식 맛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나 음식 재료의 색과 촉감, 경도, 그 음식을 만들거나 만들 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햇살, 바람, 분위기들까지 전해준다. 그래서 미각뿐만 아니라 오감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시인답게 음식이나 음식들의 재료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비유나 상념들을 끌어내는 것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동그랗게 썬 야채들을 동그랗게 배치한 라타투이에서, 한 문장에 비슷한 다른 문장을 덧대며 글을 이어가는 글쓰기를 떠올린다. 라자냐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면서 고서나 파손된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시 복원해 가는 제본사의 작업 같다고 생각한다. 가지는 "어둠으로 빛을 감싸 매끈하게 묶어둔 일인용 우울' 같다고 한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도 있었지만, 나만의 참신한 비유나 표현을 찾지 못하고 사실 위주의 단순한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신기하고 신선했다.

감각적이고 독특할 뿐만 아니라 다정하다. 좋아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요리를 했고,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한다고 선언하는 마음으로 접시를 놓았다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드는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도 작가의 다정함이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 (중략)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계의 비애 속에서 주홍 단검을 손에 쥐고 드리워진 우울을 가르며 가야지. 당근이 깊이를 알 수 없이 두려운 땅 속에서도 은밀하게 자신의 빛을 지키는 것처럼.

당근 자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근은 깊이도 알 수 없이 깊고 캄캄한 땅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지킨다는 구절이 와닿았다. 나도 그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있으니까. 내 빛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묵묵히 내 자리에서 그 빛을 지키고 싶어진다. 단검처럼 단호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평생 먹는 것에서 행복만 느끼며 살아온 사람일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서 거식증과 폭식증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었다는 이야기를 보고 놀랐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기에 음식 덕분에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더 실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작가는 직접 화단을 가꾸고 요리를 배우고 시를 쓰면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면서 회복되어 가고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작가가 그렇게 스스로를 회복하고 치유했기 때문에, 힘내라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조용히 마음을 다독이는 듯하다. 작가의 글 마지막에서 '이 고백이 당신에게 무사히 가 닿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작가의 고백은 내게 무사히 와 닿았고 작은 온기를 전해주었다. 무뎌 있던 감각을 다시 깨워주었고, 일상에 작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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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 배우는 시간 창비시선 483
송진권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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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백석, 윤동주 이후의 현대 시인 중에서는 정호승의 시집만 읽어봤다. 시도 한 권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아무 시집이나 꺼내 펼쳐봤다, 이해할 수 없는 비유와 상징들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모호하고 난해한 글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시집을 발견했다.

『원근법 배우는 시간』은 미술과 관련된 책인가 싶은 제목과 달리, 토속적인 시들로 가득찬 시집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시인이 고향 마을 풍경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놓았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살아본 적도 없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라고 하는데, 이 시집도 그렇다. 친가는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어촌 마을 집이었다는데, 두세 살 때 갔다 온 뒤로는 가본 적이 없어 기억에 없다. 외가도 시골은 아니었고, 그나마 외삼촌 댁이 소를 많이 키웠지만 이 시집에 나오는 것처럼 깊은 시골에 있진 않았다. 시골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어린 시절 어느 시골 시냇가에서 그 동네 아이들에게 산딸기를 받아 먹었던 기억뿐이다. 그것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있었던 일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지 그냥 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면 있지도 않은 시골 마을에서의 추억이 떠오르는 듯하다.

평생 도시에서 살아왔고 도시 생활에 만족하기에, 사람들이 시골이 좋다고 이야기할 때 공감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볼거리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시골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시골을 다룬 글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현실에 지쳤는데 농촌의 팍팍한 현실, 농촌의 현실을 고달프게 만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시들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고. '아이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니면 '그리운 내 고향'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지루하지 않다. 시골에 내려가서 어르신들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데 듣다 보니 재미있는 기분이다. 현실의 아픔과 서글픔을 아예 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더 없이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시의 어조는 느긋하고 평온하다. 마실 나온 동네 어르신처럼. 애끓는 그리움을 토해내는 대신 어제와 오늘의 정겨웠던 나날들을 노래한다. 처음 들어본 좀 오래된 말들과 충청도 사투리 때문에 사전을 찾아봐야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말들을 알아갈 수 있어 즐거웠다. 구수하고 정겨운 이 시들에는 그런 말이 말맛을 더해주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시골보다 도시를 더 좋아하고, 내 고향인 도시, 내 2의 고향인 도시, 이 두 도시를 사랑한다. 그래도 이 시집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간, 살아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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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파사 카페 - 네팔, 그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나라얀 와글레 지음, 이루미 옮김 / 문학의숲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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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네팔 소설이 있다면 믿겠는가. 네팔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향력이 훨씬 큰 인도의 문학 작품도 그렇게 많이 출간되지 않았는데. 이 소설이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된 네팔 문학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이후로 네팔 소설이 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아마 유일하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네팔 소설일 것이다.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네팔 소설은 이것뿐이라는 것에서 벌써 호기심이 생기는데, 네팔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네팔 국내에서 5만 부가 넘게 팔렸다니 더 호기심이 생긴다. 네팔에서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네팔 곳곳에 '팔파사 카페'라는 이름의 카페가 여러 개 생겼다고 한다. 네팔 사람들은 네팔을 대표하는 소설이라며 이 소설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그런 것들을 떼고 봐도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시기 동안 화가인 남주인공과 다큐멘터리 감독 지망생인 여주인공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니,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서였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두 주인공이 실질적으로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훨씬 결정적이다. 바로 남주인공이 비호감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주인공을 망설임 없이 비호감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주인공의 행적을 살펴보자. 남주인공은 휴양지로 여행을 갔다가, 호텔 주인의 딸이 코코넛 나무에 올라가 코코넛을 따는 것을 지켜본다. 그는 그녀가 바지를 입고 있어 치마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다. 미성년자인 소녀(인 척하는 친구여서 다행이었지만)와 채팅하면서 그녀에게 처녀냐고 물어본다. 외국으로 나간 집주인이 맡기고 간 반려견을 집주인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는, 집주인에게는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다. 집주인이 잘 관리해 달라고 한 집을 쥐가 들락거릴 정도로 방치한다. 제 버릇 개 못 줘서 산간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 마주친 반군 소녀에게 처녀냐고 물어봤다 사달을 낸다. 스포일러여서 얘기할 수 없지만 더 결정적인 잘못들이 있다. 남주인공이 완전무결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게 남주인공의 성격이고 개성인 양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이 문제다. 네팔 문화에서는 그런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이 책의 서평 중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이 이해된다.


내가 남주인공을 견디고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여주인공 팔파사와 책 속에 묘사된 네팔 그 자체였다. 팔파사는 주인공에게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팔파사는 남주인공과 그의 예술을 사랑하지만, 그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어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자신의 아름다움만 찬양할 뿐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팔파사의 이 말 때문에 남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여성혐오를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겪지 않았어야 할 비극과 남주인공이 여행을 하면서 만난 네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저몄다. 네팔 근현대사의 혼란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떻게 희생되었고, 어떻게 살아남아 슬픔을 떠안게 되었는지 어떤 뉴스나 기사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네팔에서는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작물을 기르고 시골과 도시에서는 각각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를 알게 되었다. 네팔의 참상과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초연함, 여전히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대비되어 더 서글펐다. 그래서 네팔에 대한 묘사만큼은 다시 읽으면서 곱씹어 보고 싶어진다. 내게는 두 주인공의 사랑보다는 네팔 그 자체를 만날 수 있게 한 것이 이 소설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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