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역사 -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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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은 소비라는 주제로 역사를 살펴보는가

나는 매주 일요일, 매달 말일, 매년 1월 초에 한 주, 한 달, 1년 치 일기를 읽으면서 그 주, 그 달, 그 해를 돌아본다. 그때 함께 보는 것이 가계부다. 가계부를 읽다 보면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소비는 단순히 물건을 사거나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을 이루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왜 이 물건을 샀는지 돌아보면 내가 그때 무엇을 필요로 했고, 무엇을 원했는지 당시의 내 상황과 그때의 내 마음까지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도 소비를 통해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소비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행위이고, 그 욕망이 만들어진 심리를 따라가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한 시대에 유행했던 물건들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과 그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이, 어떤 것의 소비(또는 소비 그 자체)를 규제하거나 장려한 사회의 규범이나 법, 정책에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 한 상품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의 소비자를 만나는 과정을 통해서는 한 국가, 한 사회를 넘어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어떻게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소비의 역사』는 소비에 담겨 있는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인간의 소비 행위와 그 내밀한 동기, 소비 행위가 불러온 사회적 효과를 살펴보는 책이다. 그렇게 새로운 차원에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소비를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끌어올리고 독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여성과 소비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젠더의 관점으로 소비를 바라보는 부분들이다. 여성의 소비는 남성의 소비와 어떻게 다를까?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소비는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여성은 소비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고 했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면서 저자는 소비야말로 젠더에 대한 편견과 차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분야임을 보여준다.


장 베로, <무도회>, 1878. 수수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성들의 모습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19세기 유럽의 사교계 풍경을 그린 명화들을 들여다보자. 그림 속 남성들은 검은색과 하얀색 정장을 입고 있는 반면 여성들은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몸을 감싸고 있다. 이미 영국에서는 17세기 말부터, 프랑스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대부분의 남성복은 수수한 스리피스 슈트로 굳어졌지만, 여성복은 화려하면서 유행에 민감했다. 수수한 남성과 화려한 여성. 여성이 남성보다 사치스러워서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일까?

저자는 이런 현상이 남성들이 사치를 여성의 몫으로 떠넘긴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치를 여성의 전유물로 보았던 고정관념과 달리, 근대의 정치 혁명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남성 왕족, 귀족들이 여성들만큼이나, 아니 여성들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그러나 정치 혁명이라는 진통을 거치면서 사치는 ‘위대한 남성적 금욕’과 대비되는 ‘여성적인’ 악덕으로 낙인찍혔다. 사치를 사회악으로 치부했지만, 국내 소비에 기대고 있던 당시 유럽의 경제 구조에서는 누군가가 넘쳐나는 물건들을 사줘야 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근대 여성들이 남성들의 ‘소비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주체로서 직업이나 사업체를 갖고 스스로 이익을 얻지는 못하고, 남성들 대신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뽐내는 과시적 소비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과시적 소비의 대리인에 머물지 않았다. 18세기 전반부터 영국에서 일어났던 노예 무역 반대 운동에도, 노예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만든 설탕을 소비하지 않겠다는 설탕 불매 운동에도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여성들에게 가정의 수호자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은 여성들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정의 수호자로서 도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세상의 권력은 남성들이 쥐고 있어도 여성들은 그들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 나갔고, 노예 무역 반대 운동이나 설탕 불매 운동은 여성들이 그런 도덕적 영향력을 세상에 미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이 책은 사치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고 남성들의 과시적 소비의 대리자 노릇을 하던 여성들이, 소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주체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비 생활 속의 인종 차별

이 책이 소비를 통해 들여다보는 또 다른 주제는 인종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단일 민족 국가로 살아왔기에 잘 체감하지 못하지만 다민족 국가로 변해가는 요즘, 인종 차별은 우리의 일상에도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광고에서도 무심하게 인종 차별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한 여행사 광고에서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홍보하는데 튀르키예만 한국인 모델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튀르키예 전통 복장을 입고 홍보한 것이 그 예다. 이것이 왜 인종 차별인지 납득되지 않는다면 역지사지를 해보면 어떨까. 이 책에 실린 아래의 두 그림을 보면 피부로 와닿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다국적 식품 회사 리비히 사의 트레이드 카드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트레이드 카드는 상품이나 상점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쇄물로, 처음에는 상품이나 상점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가 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상품과는 관련이 없는 다양한 그림들도 함께 넣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어느 나라 사람을 그린 것일까? 바로 한국인이다. 위의 그림은 조선의 귀부인을 그린 그림이라는데, 한복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의 국적 불명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한국 여성들은 축제가 있을 때 죽마를 타고 뛰는 경기를 즐기며 우승하는 여성은 상을 받는다’는, 한국인도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의 전통 놀이를 묘사하고 있다. 실제 한국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는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아시아인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저자는 서구의 회사들이 트레이드 카드에서 실제보다는 자신들의 스테레오타입에 가깝게 비서구권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명권’과 그 상품이 아직 닿지 않은 ‘비문명권’을 대비해 이질성을 강조했다고 설명한다. 이 대비는 평등한 대비가 아니라 분명한 위계가 있는 대비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타자를 납작한 스테레오타입으로 만들어 버리고, 내려다보는 일을 우리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부분을 읽으며 되돌아보게 된다.

어제의 소비, 오늘날의 소비

저자는 서양사학자이기에 이 책에서 주로 근대와 현대 서양사 속 소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멀게는 수백 년 전, 가깝게는 수십 년 전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어난 소비의 양상이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중 하나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노동 계급 사람들의 과시적 소비다. 이 시대의 노동 계급 영국인들은 아이들이 집안 사정을 남에게 얘기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가끔씩 뽐낼 만한 것(달걀, 채소, 과일 등)을 먹었을 때는 예외였다고 한다. 저자는 그런 빅토리아 시대 노동 계급 아이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SNS에 올라오는 음식 사진들을 떠올린다. 자신이 소비한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다르지만 둘 다 자신의 재력을 과시해 명예를 획득하는 과시적 소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 계급은 하층민들에게는 과시적 소비가 불필요하다고 보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노동 계급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지 신경 쓰면서 일요일에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갔고, 거리에서 바로 보이는 현관문과 창문은 화분이나 광택 나는 돌, 독특한 색깔의 페인트로 예쁘게 꾸몄다. 그러면서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남루한 생활 모습은 숨겼다. SNS에 일상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만 올리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와 같은 결은 아닐까.


노예 노동 설탕 불매 운동의 슬로건이 적힌 설탕 그릇. 1820~1830년경 추정. 영국박물관 소장.

단순히 오늘날의 우리를 닮았다는 점을 넘어서,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의 윤리적 소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노예제 폐지 운동과 설탕 불매 운동이다. 영국이 노예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18세기 전반부터 노예 해방과 노예 무역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특히 설탕은 영국이 노예 무역에서 공급했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생산하는 품목이었기 때문에,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노예 노동을 통해 생산된 설탕의 불매 운동을 벌였다. 윤리적, 도덕적 문제의식을 반영한 소비 행위의 시초라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지만, 명백한 한계점들이 있었다.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진 설탕은 노예의 피와 땀으로 오염되어 불결한 것이라는 인종 혐오가 깔려 있었고, 대안으로 큰 호응을 얻었던 동인도제도의 설탕도 사실은 노예 못지않게 열악한 근로 조건 아래서 일하는 인도인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진실은 가려졌다. 오늘날의 윤리적 소비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비윤리적인 요소가 제거되었다는 이유로 그 이면에 놓인 문제들은 은폐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운동은 오늘날의 윤리적 소비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반면교사가 되어줄 역사적 선례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어제의 소비가 오늘날의 소비와 이어지면서 미래의 소비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 설명해 주면 좋았을 것들

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들 외에도 저자는 소비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지만, 더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것들도 보였다. 우선 아날 학파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칼뱅의 징표교의가 무엇인지 간단하게라도 더 설명해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 책은 2017년 1월부터 8개월 동안 네이버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았던 책이라니, 역사학 전공자들보다는 대중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실제로 책의 전반적인 난이도는 높지 않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아날 학파, 프랑크푸르트 학파, 징표교의를 알지는 않을 것 같다.

내용의 측면에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다. 근대 유럽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수집가가 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여성들에게 문화 자본이 더 적었기 때문일까? 여성들이 수집을 하는 데 어떤 것이 걸림돌이 되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21장은 ‘쇼핑몰의 이상과 한계’라는 제목이니 쇼핑몰의 한계와 문제점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같은 온라인 쇼핑몰을 사용하는 이용객들 사이에 소속감이 생겨난다는 주장의 예시를 한두 가지라도 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온라인 쇼핑몰 홈페이지에 이용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든가, 그 커뮤니티 회원들이 오프라인 모임도 진행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든가, 아니면 불매 운동 같은 특정한 활동을 함께 했다든가, 하는 실제 사례가 있었던 건지 궁금해진다. 내가 읽은 버전은 이 책의 3판인데 3판을 내면서 좀 더 보완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목표한 바를 달성했을까

저자가 이 책 서문에서 말한 목표는 세 가지였다. 소비를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끌어올리는 것,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내밀한 행위와 동기, 그것이 불러온 사회적 효과를 살펴보는 것, 이 책이 독자들에게 역사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것. 저자는 이 세 가지 목표를 이루었을까?

우선 이 책은 대중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였고 25개나 되는 주제를 10~20페이지 정도로 다루기 때문에 각 주제를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대신 대중 독자들에게 소비라는 주제로 이렇게 다양한 분야와 요소들을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소비사의 흐름과 현황, 전망을 이야기하는 보론을 통해 소비사 연구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보다는 좀 더 난이도가 높지만 대중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역사 연구자들과 대중 독자 모두에게 소비사가 이런 학문적 주제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보론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소비사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왔다니 소비는 이미 진지한 학문적 주제가 된 것 같고, 이 책은 그러한 상황을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을까.

두 번째 목표는 어떨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각 주제를 아주 깊이 파고들지는 않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내용들도 있지만, 이 책에서 펼쳐지는 소비자의 구매 동기와 그것이 불러온 사회적 효과 이야기는 흥미롭다. 깔끔한 옷차림은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데 꼭 필요한 요소였기에 빚을 내서라도 번듯한 옷과 신발을 장만했던 빅토리아 시대 하층민들부터, 은퇴한 후 노동의 부담에서 벗어나 소비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른 현대의 노년층까지, 각기 다양한 배경과 상황에 놓인 개인들이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면 삶의 좀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부분들이 좀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세 번째,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책일까? 책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들 자체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저자가 그것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다. 다채로운 컬러 사진과 그림 자료들 덕분에 본문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보는 재미도 있다. 명화 속 인물들과 금박 글씨로 화려하게 장식한 표지와 다홍색이라는 하나의 테마 색으로 책 전체를 꾸민 깔끔한 편집 디자인 덕분에 보는 즐거움은 한결 더 커진다.

따라서 이 책은 소기의 목표들을 모두 달성했다고 본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더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지식을 쌓아가는 재미와 보는 즐거움을 모두 안겨주어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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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러시아 -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와 독재자의 탄생
대릴 커닝엄 지음, 장선하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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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악랄한 독재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악행들을 저질렀는지는 알지 못해 그의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필요했다. 이 책은 그래픽노블이고 페이지도 160페이지밖에 되지 않아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이 책을 다 읽는 데 세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세 시간 동안 푸틴이 태어난 1952년부터 2020년 12월까지 60여 년 동안의 상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었다.

작가는 별다른 기교 없이 단순한 형태와 색상, 사실들로 꽉꽉 채워 넣은 텍스트로 푸틴이 평생 동안 전 세계에 끼친 해악을 전달한다. 말풍선도 별로 없고, 웃음기는 거의 없다. 오직 차분한 문장과 간결한 이미지로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다. 독자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푸틴의 범죄 목록 그 자체다. 그가 고의로 살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안일함과 무능함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세상에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텐데도 그가 여전히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책이 진행되는 내내 차분히 사실을 전달하던 작가는 결말에서 힘주어 말한다. 세계는 더는 푸틴 정권이 정상적인 정부라도 되는 듯 방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푸틴은 온 세계를 더 강하게 거머쥘 것이니, 행동해야 러시아 내부의 민주주의를 일깨울 수 있고, 푸틴 정권의 부패와 해악이 러시아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행동은 우선 아는 것에서 시작되니, 이 얇은 책으로 문제를 알게 되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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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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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소설가 조지 손더스가 대학에서 맡고 있는 소설 창작 수업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될 생각이 없는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내가 인생작이라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졸작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아, 작품을 보는 내 안목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작품 자체나 캐릭터(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배우)의 매력에 눈이 먼 것일까. 그래서 제대로 작품을 읽는 법을 배워보고 싶었다.

이 책이 어쩌서 독자를 위한 책이기도 한지 저자는 나보다 좀 더 심오한 이유를 말한다. 독자들은 읽기가 자신을 더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삶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고. 읽는 방식을 공부하면 다른 사람(즉 작가)의 정신을 읽게 되고, 더 나아가 현실을 더 예리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된다고. 읽는 법을 훈련하면 타인과 세상을 읽는 우리의 능력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흠, 솔깃한데. 그러니 작가가 될 마음이 없더라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히 확보했다.

독자는 저자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대문호들의 단편 일곱 편을 읽게 된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가 놓치기 쉬운 것들을 짚어주는 저자를 보면, 문학 작품을 낱낱이 분석해 주는 수능 국어 수업이 생각난다. 물론 수능 국어 수업과 달리 저자의 수업에서는 하나의 정답만 강요하지 않는다. 저자는 '나와 의견이 다르다면 그것은 당신의 예술적 의지가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니까. 그리고 작품의 어떤 것이 복선이고 어떤 것이 상징이며 주제는 무엇인지 해부하고 분석하는 수능 국어 수업과 달리, 저자는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확장시켜 나가고, 뻔한 이야기가 될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서 이 이야기를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차근차근 보여준다. 저자의 해설을 듣지 않았다면 '이 단편소설에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없잖아', '이 작가는 왜 갑자기 사건을 전개하다 말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전부를 장황하게 소개하지', '이 단편소설은 왜 이렇게 황당하게 전개된담' 이 정도 생각에 그쳤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영어로 번역된 러시아어 단편을 한국어로 또 한 번 옮긴 것이니 원작과 좀 더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러시아인 동료를 통해 자신이 원문의 흐릿한 모방에 불과한 것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데, 한국어로 한 번 더 걸러서 읽게 되는 한국 독자들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번역가가 유려하게 번역했고, 저자가 특정 부분의 각 영어 번역본별 번역을 비교해 주어 우리는 번역들 사이에서 원본의 뉘앙스와 의미를 조금이나마 손에 잡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어로 한 번 더 걸러졌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작가와 그가 그려낸 인물들을 만날 수 있고, 저자의 수업을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더 가까이 느낄 수도 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네 작가는 각각의 스타일과 개성을 지니고 있고, 이 책에 실린 단편들만으로도 그것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대문호라 불리는 그들의 작품에도 결점이 있고, 우리가 그 결점 있는 부분을 고쳐 써볼 수도 있다는 데서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격차가 생각보다는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백수십 년 전 러시아 사람들이지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 자신도 갖고 있는 측면, 우리 자신도 느끼는 감정, 경험, 문제, 모순까지 보여주며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우리는 읽기를 통해 타자와 연결된다. 백수십 년의 세월과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공간을 뛰어넘어서.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타자와 연결됐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단편의 작가들이 활약했던 문화의 황금기 바로 뒤에 스탈린의 폭정이 이어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소설이 무언가에 효용이 있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그럼에도 저자는 읽고 쓰기를 여전히 사랑한다. 소설은 우리의 마음을 아주 조금씩 바꾸고, 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진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픽션 작품을 보는 내 안목이나, 타인에 대한 내 이해력과 공감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와 원리를 조금은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내가 어떤 작품을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좀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그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그 사람 자체를 아주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고, 타인들과 내가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을 더 예리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책을 읽기 전과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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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 찍는 법 - 잃은 독자에서 읽는 독자로 땅콩문고
박지혜 지음 / 유유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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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를 찍는다'는 표현은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덕분에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중쇄란 처음 출간한 책이 시장에서 모두 팔려 나가 같은 책을 더 인쇄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알기로 내가 만들어낸 책 중에서 중쇄를 찍은 책은 아직까지 단 한 권도 없다. 심지어 출간된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절판돼서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책도 여러 권 있다. 아마 가장 많이 팔린 책도 판매 부수가 천 부는 못 넘었을 것이다. 그런 나로서는 출판사를 차리고 나서 낸 책들의 70퍼센트는 중쇄를 찍었고, 독립하기 전엔 몇 만 부씩은 팔리는 책을 만들었다는 저자가 다른 세상 사람 같다. 나도 그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사실 아직도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다.

편집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후 출판 시장의 형편이 더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매년 더 나빠진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출판 시장 최대의 위기'는 과연 어디까지 커질지 짐작도 안 된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책을 팔아야 하는데, 나조차도 유튜브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저자처럼 희망을 찾고 싶다. 그래서 1장 첫 페이지부터 '마치 책 사줄 독자가 모두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하는 저자의 모습이 반가웠다.

우선 출판업도 제조업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종이책은 한 번 찍히면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인쇄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정정한 부분을 스티커로 만들어 붙일 수 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고 추가로 들여야 할 비용과 수고가 만만치 않다). 인쇄하기 전까지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편집 작업을 하다 막상 인쇄 직전에 힘이 풀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액화천연가스 수송선은 9천 개에 달하는 패널을 깔고, 이 수송선을 만드는 용접 기술자들은 매일 아침 용접 테스트를 거치고 매달 자격증을 갱신한다고 한다. 책 만드는 사람도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매번 반복되는 고된 사이클 때문에 해이해질 때 이것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시 마음먹게 되었다. 예전에 한 웹소설 출판사 PD가 자신들은 책의 외형까지 만들어내야 하는 종이책 출판사 편집자들과 달리 콘텐츠 자체에 더 집중하고 개발하는 데 힘쓸 수 있다고 자랑했었는데, 나는 오히려 종이책 출판사 편집자들이 책의 겉모습을 더 완전하게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그 책에 가장 잘 어울리고 그 책의 내용을 더 온전하게 전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겉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하고 땀 흘렸고, 그래서 지금까지 책의 역사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의 내용은 어때야 할까. 저자는 2할의 전복성과 7할의 충분성, 1할의 미래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책과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면 그 책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내용, 새로운 것을 담고 있어야 독자들은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대신 그 책을 읽기로 선택한다. 그런데 참신한 주장만 있을 뿐 그를 뒷받침할 내용이 없다면 함량 미달인 책이 된다. 그러니 그 책의 함량을 꽉 채워줄 7할의 충실한 내용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어야 출판사의 특성이 뚜렷해진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비슷비슷한 책들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기존의 책들과 다른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서 책의 내실은 어떻게 다져야 할까 고민하는 내게 이 비율은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내 또 다른 고민은 내가 만든 도서 기획안들이 늘 '시장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든다는 뚝심을 지켜오고 있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전복성이 구현된다는 저자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실패해도 좋으니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마음을 따라 시도하다 보면 시장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복성은 시장에 끌려 다니기를 거부할 때 이뤄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주제 중에서, 남들은 뭐래도 나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우리의 핵심 타깃이 좋아하는 형태로, 해당 주제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성공 사례처럼 이것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다 가닥이 손에 잡혀가는 느낌이 들었다.

중쇄를 찍는 것은커녕 책을 만들 기회가 다시 올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중쇄를 찍을 날을 꿈꾼다. 더 많은 독자들이 내가 만든 책을 읽고, 지식을 얻고 위로를 받고 더 깊이 생각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쇄율 0퍼센트의 편집자인 내게 이 책은 그 꿈을 잃지 않게 해주는 작은 버팀목이 되어준다.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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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본시인 2024-01-1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묵묵하게 지켜나가려는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응원합니다!

바스티안 2024-01-17 23:15   좋아요 0 | URL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의 그 부분 때문에 상처받았는데, 꿈에서본시인님 댓글에 위로를 받았어요. 이런 응원과 칭찬을 받기에는 부족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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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라는 키워드로 본 서구 천 년의 역사

1월은 변화를 생각하기에 좋은 시기다. 매해 1월이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그 전 해와는 어떤 것이 달라졌는지, 올 한 해는 어떤 것이 달라지면 좋을지 생각해 보는 시기라면, 1999년 12월에서 2000년 1월로 넘어가는 시기는 지난 천 년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때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모티머는 1999년 12월 말, TV 뉴스에서 진행자가 ‘20세기는 다른 어떤 세기보다 변화가 많았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의문을 품었다. 20세기에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진보가 곧 변화일까? 그러한 현대의 업적이 과거의 모든 업적보다 중요할까? 인류의 삶이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변화한 시기는 과연 20세기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저자 이언 모티머는 ‘변화’라는 키워드로 중세에 해당하는 1000년부터 현대인 2000년이 되기 직전,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저자는 전 세계의 역사가 아닌 서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그가 말하는 서구는 지리적 단위라기보다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뿌리로 한 문화적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난 천 년 동안의 서구의 발전을 고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고 분석하는 이유는 하나다. 인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색하는 것. 지난 10세기 동안 인류가 해온 것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천 년 동안의 경험들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거기서 배운 것이 있다면 어떻게 미래에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역사관으로 들여다보는 천 년

다른 역사책들과 같은 시각으로 지난 천 년을 바라본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현대의 업적이 가장 중요한 변화이며 현대 이전의 시대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통념에 반박한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사건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적 진보 때문에 20세기를 인류의 역사 중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세기로 꼽지만,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세기 동안 기술적인 진보가 얼마나 이루어졌느냐가 아니다. 그 세기에 일어난 변화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필요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었느냐이다.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지기에 각 사람의 필요가 모여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필요가 된다. 각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식량, 물, 공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무기나 법, 정신적인 허기를 채워주는 문화 예술까지 다양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요소인 농업, 의학, 과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개인의 안전과 관련된 변화인 사적 폭력의 감소, 법체계의 확립, 자아실현과 관련된 변화인 자의식의 발견, 지식의 확산, 여성의 권리 신장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각 세기의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게 될 역사는 몇몇 역사적 인물들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 온 과정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됐을 것이라고, 그래서 이성이 종교로부터 독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는 이전의 것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17세기에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입증했으며 의학에서도 혁명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그런 발전을 이룩한 학자들조차도 독실한 신앙인이었음을 지적한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이 신의 섭리를 밝히고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는 오직 발전을 향해 단방향으로 직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저자는 분명히 밝힌다. 17세기는 과학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세계를 이성적으로 관찰하게 된 시기였지만, 동시에 수만 명이 마녀사냥으로 죽어간 시기이기도 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기존의 세계사 책들에 정리된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정리하는 것이라기보다, 세계사 속에서 인간의 삶이, 그들이 사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저자와 함께 아주 느린 호흡으로 지켜보는 것에 가깝다.

탄탄한 통계적 근거와 체계적인 연구 방법

새로운 시각, 새로운 역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으면 그저 파격으로 그친다. 그는 자신의 입맛에만 맞거나 얼핏 보기에 매력적인 사료들을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1차 사료들, 선배 역사학자들의 연구 자료들을 교차 검증하고 자료들의 수치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는 오차를 좁히거나 평균 수치를 냄으로써 가장 사실에 가까운 수치를 찾아가려고 한다. 통계 자료와 그래프를 실을 때는 어느 시기, 어떤 사람들을 표본으로 한 것인지, 어떻게 해서 그런 수치가 나온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힌다. 부록으로 근대 이전의 유럽 인구 추정치를 도출해 낸 과정을 실었을 정도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역사학이 과학이나 사회과학 못지않게 치밀한 사실 검증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임을 보여준다.

또한 서문에서 내세운 포부는 거창했으나 저자의 역량이 부족해 용두사미가 되는 책들도 많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지난 천 년 동안의 서양 역사를 살펴볼 것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는데, 체계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 차근차근 자신의 논지를 풀어나간다. 인구 증가, 전체 인구 대비 군사 사상자의 비율처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들은 각종 통계 결과들을 바탕으로 분석한다. 각 시기, 각 사회 구성원의 애정이나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처럼 정량적으로는 평가하기 힘든 요소들은 정성적인 평가 방법을 활용해 분석한다. 그를 토대로 근거가 빈약하거나 논리가 비약하는 부분 없이 결론까지 자신의 주장을 착실히 이끌어 간다.

소수자를 잊지 않는, 균형 잡힌 태도

제1세계의 백인 남성 학자들의 저서를 읽을 때는 서구, 백인,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는데, 이 책의 저자 이언 모티머도 유럽 선진국의 백인 남성이다. 그럼에도 그는 남성이 여성에게, 백인이 비백인에게 저지른 차별을 적은 분량이지만 분명히 언급한다. 콜럼버스를 그가 살았던 세기에 변화를 가져온 주요 인물로 꼽으면서도 그가 식민지에 벌인 만행도 서술하고 있다. 자국에서 명군으로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도 노예 무역을 지원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유럽인들이 식민지 개척을 통해 원래 살던 고국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했지만 정작 아프리카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유는 빼앗았다는 것, 미국 독립 선언서에 평등의 개념이 담겨 있지만 그 평등을 누릴 대상에서 흑인 노예들은 배제되었다는 것도 지적한다.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는지, 고등 교육 기관에 진학하고 전문 분야에서 활약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는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지식과 전문 기술을 습득하고 전문 분야로 진출하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했는지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변화의 주체’로 꼽은 역사적 인물 중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이유가 서구 사회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이었기에 현대 이전까지 어떤 여성도 서양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사람들이 주목하길 소망한다. 또한 양육과 보호라는 여성의 특성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기에 적합하다고, 인류에게 희망이 있으려면 21세기 변화의 주체는 여성인 편이 모두에게 더 좋을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나는 여성의 특성이 누군가를 보살피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는 않지만(저자도 여성의 본성이 변화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여성이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겪어온 차별을 직시하고 여성이 앞으로의 역사에서 더 활약하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에는 공감한다. 이렇게 소수자를 잊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 덕분에 이 책을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서정성과 유머 감각, 인류에 대한 애정, 그리고 희망

이 책은 많은 통계 자료와 수치를 근거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딱딱한 숫자들과 사실만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미권 저자들이 쓴 논픽션의 장점은 글 중간중간에 드러나는 서정성과 유머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도 그렇다. 저자는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영국 남서부 어느 작은 도시의 오래된 오두막집 이야기로 본문을 시작한다. 그 오두막집의 옛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들을 천 년 전 영국의 한 시골 마을로 이끈다. “18세기는 특별한 거품이 올라간 톡 쏘는 맛이 나는 세기였다. 인간의 비극이 쌓인 진창 위에 현란한 불꽃놀이의 폭죽 소리와 현악 사중주단의 연주 소리가 울려 퍼지는 맛이라고나 할까.”(p. 306~307.) 이런 감각적인 서술은 논리적으로 사실을 입증하는 문장보다 더 생생하게 그 세기의 이미지를 독자들의 머릿속에 새긴다. “슬프게도 헤어드라이기가 없는 사람이지만”이라며 자신이 탈모인임을 고백하는 등 슬쩍슬쩍 유머 감각을 보이는 부분은 꽤 두꺼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잠깐이나마 휴식을 준다.

무엇보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저자의 인류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다. 온갖 통계와 수치를 토대로 그가 예견한 인류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우리가 갖고 있는 화석 연료는 분명 몇 세기도 되지 않아 고갈될 것이다. 태양력, 풍력 등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중 극히 일부만 이런 에너지원에서 생산되고 있고, 이런 에너지원으로 우리가 사용할 모든 에너지, 그것도 앞으로 분명히 더 증가할 인구가 사용할 에너지를 만들어내려면 갈 길이 멀다. 한정된 토지를 놓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을 생산할 장소로 만들지 사람이 살 집을 세울지 양자택일을 해야 되고, 제한된 자원을 놓고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질 것이며, 그로 인해 새로운 계급 구조가 형성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처럼 무절제하게 소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각자의 필요를 줄인다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 값을 매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한국인 독자인 우리에게 이 책이 갖는 의미

이 책은 분명히 전 세계가 아니라 서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인이 아닌 한국인인 우리에게 이 책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우선 남의 역사도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줄 수 있다. 남의 업적은 귀감으로, 과오는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되니까.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20세기에 서구는 엎질러진 잉크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대부분의 국가는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현대 의학과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인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 자본주의처럼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개념들과 사상들까지 서양에서 왔다. 자의식의 발전, 지식의 확산, 법치주의의 확립, 인권의 보편화 등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변화는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예측하는 인류의 미래가 서구만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좁은 국토, 점점 고갈되어 가는 자원으로 점점 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해야 하기에, 살아남기 위해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서 식량, 생필품 그 밖의 물품들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서구의 국가들과 한 배를 탄 운명이다. 저자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제시한 대안은 유일한 정답이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다. 저자는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여러분이 이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저자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에게도 분명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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